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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아 성찰 -이 선 규 목사/금천교회
    지난 년말에 장기 목회를 이어 왔다고 노회에서 배려해 주어 서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종교개혁의 본산지인 독일 스위스를 위시하여 고대 문명의 수많은 흔적을 남긴 로마를 방문 하여서는 그러한 문명의 도시가 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나? 거기에 이어 왜 이스라엘 왕국은 여지없이 무너졌든가?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 본다. 우선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떠 올린다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 전성기는 솔로몬의 치세였다. 그는 아쉽게도 그의 BC 922년에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넘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왕위를 승계하게 되고 곧바로 여로보암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반기를 들게 되어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가 치명적인 분열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 왕조 유다가 신 바벨론에 망함으로 영광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스라엘의 불행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두드러진 부분이 솔로몬의 화려한 외교력에 있는데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불러 들였고 그 때 그 여인들을 따라 이방 잡신들이 함께 이스라엘에 끼어들어 왔던 것이다. 이번 로마에서도 많은 유적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성적인 문란과 퇴폐 문화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성찰에 둔감한데서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해 본다. 기독교는 건강한가?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기독교는 병든 것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우리의 병리를 깊이 더듬어 보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느끼는 병리를 진단해 보자.1. 편견에서 생긴 병크리스천들은 그 신앙이 독실한 만큼 편식을 많이 하고 있다. 이 편식으로 생긴 병은 피가 말라 핼쑥해진 얼굴을 가진 환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무서운 병인지 모르고 오히려 가장 건강하고 이상적인 얼굴인 듯 착각을 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의 모범적인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충돌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꿈꾸는 신앙인의 모델은 죄인들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었으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성자의 자화상이 아니라 친히 죄인의 벗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독교라는 교리를 형성하고 나서는 다시 성자의 초상을 만들어 피가 없는 인간으로 화해 버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타적이고 이 편협한 인간상을 두들겨 부순 것이 마틴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루터나 칼뱅이 개혁해 놓은 개신교회도 다시 이런 왜곡된 성자의 초상을 수 없이 만들어 낸 것이다. 루터나 칼뱅에게도 그런 병의 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라는 구호는 다시 배타적인 성격으로 왜곡되고 순수한 신앙이란 곧 배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으로만’이라는 구호는 순수하고 고귀한 가치임에 분명하지만 그 속에 안주하는 신앙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자아를 성찰 해 볼 때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날이 갈수록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수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기독교의 전성지라 할 수 있는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기회 지나가기 전에 철저한 자기 성찰로 기회를 만회 해야 할 것이다. 2. 분열증세지난주 교계의 두 교단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한국 교회를 희화해서 말하기를 ‘둘이 합치면 셋으로 나뉜다는’ 기사를 읽고 병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듯하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병든 사회, 병든 몸(교회 공동체)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우리 크리스천 문학인들의 사명을 살펴본다. 그 병을 고치는 의사는 율법 이라는 방식으로의 처방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간을 치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의사이시다. 이 의사에게 먼저 치유를 받고 사회의 여러 계층의 고질적인 병들을 치유하는 일에 총결집을 이루어 내는 희망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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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8
  • 이 선 규 목사(금천교회)
    마음의 문단속을 하라 요즘은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어서 외부 판매원들이 출입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때는 이런 제재가 없어 외출 할 때는 항상 남아 있는 가족에게 “문단속을 잘 하라”고 타이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문단속은 현관이나 대문만 단속 할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단속도 잘 해야 한다. 자산과 생명을 노리는 흉한 사람처럼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기 때문이다.어느 날 교회를 잘 나오시는 성도 한분이 갑자기 교회를 안 나오신단다. 간곡하게 권면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에 대해서 상담을 드린다고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한 것이 결국 이단자에게 넘어간 단초 가 된 것이었다. 마음의 문단속을 잘못한 것이다. 이들은 대개 이런 말로 초신자들에게 도전해 온다고 한다. “교회 주보를 보시오 교회의 목사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지 않은가요? 교회 확장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그 말부터가 비기독교적 입니다. 교세란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교인 수인 통계 헌금 통계 헌금액 표기(경쟁심 유도) 그런 거 아닙니까?” “그 대신 구원 문제 같은 것이 개인적으로 해결 된 일이 얼마나 됩니까?”“당신은 지금까지 목사를 몇 번이나 만났으며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상담을 받아 보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 바라고 계시는 참된 교회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교회당 건물도 지을 필요도 없고 숫자를 헤아리는 것도 없고 기성 교회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어디에다 공시하거나 자랑감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세례가 중요시 되며 일대 일의 상담 요원이 언제든지 신앙 상담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를 나가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주님이 판단을 주실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 교인은 이단에게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일고의 들을 가치도 없는 내용들인가? 그런데 그들 말 속에도 언뜻 귀담아 들을 말은 있었다. 나는 그 후로 주보에 헌금이나 출석 통계를 싣지 않기로 하였고 가급적 교회를 개방하기로 다짐도 하였다. 그리고 교인을 대중으로 보다 일대 일의 만남을 강화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낯선 편지 한통을 받았다. 곧 바로 개봉해 보니 내용이 수상하다. “목사님 저를 대적 하지 마시고 성경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저는 스스로 온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언의 사자로 교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생략)이것들을(계1:1-계22;21)보고 들은 자는 저 뿐이며 저 외 어느 누구도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생략) 초림 때 약속의 목자는 예수님 이셨고(요한 5:37--40)재림의 계시록 성취 때 약속한 목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약속의 메시야를 무시하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읽어볼 가치도 없는 내용들이지만 이러한 내용도 성경의 깊은 인식이 없는 평신도들에게는 미혹 받기 쉽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치 요한이 보고 들은 내용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처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하고 기 성 교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 인 것처럼 무작위로 편지를 보낸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곧잘 멸망과 불행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마음 문을 활 짝 여는데 구원과 평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는 굳게 닫아 버 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문단속을 잘하는 것은 무조건 굳게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말을 하건 진리가 아닌 것은 듣지도 말고 아예 문을 잠가 버리고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고 복된 것은 활짝 열어 드려야 한다. 만물 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페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시느니라. ...(렘17:9-10)복음을 받아들이는 복된 문단속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이제 어느 때 보다 문단속을 잘 해야 할 때임을 절감하고 마음의 문고리를 점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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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6
  •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와 삶으로” - 장헌일
    민족 분단의 시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야하는 중요한 해입니다. 성경상으로도 70년이 중요한 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고국으로 귀향한 해가 70년 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를 제2의 출애굽이라 일컫습니다. 그래서 성경상으로 70은 수치와 억압에서 해방을 맞는 역사적인 숫자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2015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조국을 위하여,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그리고 통일한국시대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이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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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 무종교인이 늘어난다는데?-이 선 규 목사
    최근 여론 조사 업체인 한국갤럽은 1984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한국인들의 종교와 종교 의식 변화를 비교한 한국인의 종교 실태 조사를 발표 했는데 종교관심도 뚝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필자가 눈여겨 본 것은 ‘종교가 없다’고 말한 비율이 55%로 10년새 13%나 상향 되었다는 부분이다.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전도 대상자인 비종교인들로부터는 늘 외면 당하고 있다. 왜 그럴까?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자체의 성장에는 어느 나라 어느 종교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큰 성과를 이루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 박에는 외면 아니면 무관심 하지 않았나하는 의구심을 가져보게 된다. 마침 필자의 신학교 교수님이 ‘월요일의 하나님’ 을 강조하시던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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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6
  • 대림절과 도미노-이선규목사
    대림절(혹은 강림절 ‘대강절’ 이라고도 부름)은 교회력의 시작으로 성탄절 전 일곱 주일을 포함한다. 이 기다림과 준비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성탄절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심 (사 45;7) 둘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오늘도 인간의 삶속에 오시는 그리스도 (마 24:30) 를 기다리고 준비한다. 셋째, 이 기간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말단 문제 즉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묵상한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맞으려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그 마음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살았는가?’ 돌아보고 주님의 뜻에 더욱 충실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때가 바로 대림 절기이다. 대림절에 접어들어 ‘도미노’현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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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1
  • ‘심은 대로’ - 이선규목사
    가을은 수확의 계절, 땅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은 흐뭇하고 마음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어디 자연 뿐이겠는가? 인생에도 수확이 있다. 기쁨을 거두는 자도 있고 후회를 타작하는 이도 있다. 또 영광을 수확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거두기도 한다. 아침저녁으로 약간 싸늘함을 느끼게 하 는 바람 또는 기온의 변화는 벌써 가을이 가버리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 어느 계절보다 가을이 되면 어쩐지 풍요와 초조감이 반복하는 하는 가운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하겠다. 가을은 심어야 거둔다는 자연의 범칙을 가르쳐 주는 계절이다. 봄에 심는 씨앗도 있고 여름에 심는 씨앗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심은 씨앗들이 잎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수확을 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 사회 속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들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무리들이 늘어 간다는데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하니까 물의가 생기고 불법과 위법이 생기며 부정과 부패의 징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기본 법칙마저 어기고 사는 이런 부실 인간이 된다면 그 자체가 곧 심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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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7
  •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 - 이선규목사
    세상에 죄가 들어오므로 모든 세상의 구조가 온통 바꾸어져서 원상태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질서, 그리고 평화와 환희를 찾을 수 있기보다는 미움과 혼란과 분열과 불안을 더 절감하면서도 이 영역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가 보다. 대개의 경우 우리 사회는 이권(利權)과 불신(不信)의 요소 때문에 모든 분위기가 영점 이하로 전락하고 험악해진 정황에서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음을 하나님께 하소연을 해 본다. 권력이 명랑한 사회 형성의 큰 요소가 되는 때도 없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당리, 당략에 치우치거나 악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면 흉악한 냄새만 풍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될 때 대립과 갈등을 벗어 날 수 없고 이에 따라 불신의 도는 확대되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도 교권이 냉정하게 작용할 때 발전과 새 질서를 이루기보다 분열(分列)과 불목(不睦)과 파괴가 더 크게 작용한다. 사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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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31
  • 이런 바보들의 목회가 그립다 - 이선규목사
    어려서 학교에 다녀오면 동구 밖 조그만 텃밭에 가서 풀을 뽑고 밭을 매는 일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지나가는 행인이 “얘 아직 깨끗한데 무얼 그리 열심히 일하느냐?” 는 어린 아이의 땀 흘려 일하는 모습에 애정 어린 충고이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들어 나지는 않았지만 땅에서 돋아 오르는 잔풀을 호미로 매어 주는 일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풀이 돋아나기 전에 밭을 매는 것이다. 그런 밭에서는 풀이 돋아 날 수가 없다. 보통 농부들은 자라난 풀을 보고서야 그것을 뽑아내고 게으른 농부는 풀을 보고도 뽑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은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는 보이지 않는 정신의 보이는 옷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영혼과 정신을 항상 바로 잡는 것이야 말로 슬기라고 하겠다. 나무를 잘 가꾸는 비결은 흙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 뿌리를 잘 가꾸는데 있다. 어느 정원이 잘 가꾸어 있는 집의 정원사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고 한다. 정원사의 대답, “뿌리를 가장 소중하게 다루어야합니다”. “그게 비결이지요” 라고 대답하였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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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4
  • 모순(矛盾) - 이선규목사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나 이야기를 일컫는 표현으로 모순이라는 말을 씁니다. 모는 창이고 순은 방패인데 옛날 창과 방패를 팔던 장사꾼의 어이없는 호객 행위에서 비롯된 고사 성어입니다. 세상의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 그리고 세상의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 그렇다면 이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교황의 방문으로 천주교의 순교자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한 가지 모순은 그 주인 공격인 124분의 순교자들의 순교 이유와 그 종교의 지금 교리입니다. 윤지충 순교자는 정약용선생의 외사촌으로 종교에 입문한 후 모친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고발당하고 옥고를 치르고 순교한 분입니다. 그의 잘못이라면 모친상을 치른 후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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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6
  • 성경대로 믿지 않는 자들 - 이선규목사
    지난 주일에는 오래동안 소식이 없던 외가로 친척이 되는 형님이 교회를 방문 하였다. 예배 후 여러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 목사 믿든지 안 믿든지 자유지만 이 책을 읽어보게”라며 대뜸 소책자 두 권을 내민다. 그리고 간단히 저자를 소개하면서 나도 빨리 마음을 돌이켜 자기가 따르는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3년만에 모든 것이 끝장나는데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라며 위협적으로 말을 한다. 그동안 이 분의 소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한생을 목회에 전념하는 나에게 ‘믿든지 말든지’란 무슨 뜻일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책을 받아들고 그 분과 헤어진 후 책을 펼쳐 보았다. 저자는 전북 익산에서 한 동안 교회 간판을 걸고 목회를 하던 분으로 예배 중 나체쇼를 해서 세간을 놀라게 한 사람이다. 수많은 기성교회로 부터 지탄을 받고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 교회 간판을 떼고 교주 중심의 단체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앞으로 3년 안에 민족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는 회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란다. 그러면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포기한 이유가 기성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며 정작 믿지 않기 때문이란다. 내용상 문제가 많지만 일단 뒤로 제쳐두고 내가 주목한 단어는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 이라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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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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