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0(목)

기고
Home >  기고  >  독자기고

실시간뉴스

실시간 독자기고 기사

  • 어느 장로님의 죽음을 보면서
    이 우 복 목사우리는 최근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가슴을 아파하고 있다. 본인이 생각할 때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로 인하여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하였고, 지금도 그 진행형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특히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쪽지에 적힌 이름들은 사실여부를 떠나 저들의 정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넣고 있다.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서산의 모 감리교회 장로님이셨다는 사실 앞에 아연실색을 하게 된다.한국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사람도, 또 굴지의 기업인들도, 정치인들도, 심지어는 유명한 연예인들도… 이 나라를 바르게, 자랑스럽게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 아침 이슬같이 사라져 버렸다.이들로 인하여 철없는 청소년들에게도 자살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있음이 가슴이 아프다. 특히 이 사람들 중에 소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 앞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한국교회는 이 한국사회 앞에 이런 일들을 당하면 어떤 변명을 늘어 놓기 보다는 가슴을 치고 통회하는 일을 하였으면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을 위로한다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없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초대 한국교회는 술과 담배 문제에 대하여 엄격하였다. 그래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술과 담배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어서 인지 죄악시하는 경우가 많이 약화되어 버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발전이 되고 있음이다. 이혼, 낙태, 자살, 자위행위, 동성애, 분열과 분쟁 등 수많은 문제에 대한 죄의식이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음이다.이 모든 것의 종합판이 있다. 그것은 모든 거짓을 합리화하는 위선의 모습이다. 교회 안에도 변명과 합리화의 명수들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 가지만 예를 들겠다. 자살행위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그 행위를 질병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우울증의 결과인 것처럼 진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다르지 않는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몇 시간 전까지도 언론과 인터뷰를 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구명을 호소하였다고 하는 데도 우울증 환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국교회는 이렇게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는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억울함으로 말한다면 구약에 나오는 요셉이나 다니엘,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은 아마도 그 억울함의 무게가 이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특히 예수님을 보면 그 억울함의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억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 무게가 조금씩 다를 뿐일 것이다.한국교회 지도자라는 분들은 아직도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지 않는가? 왜 하나님이 죄라고 한 것들을 그대로 죄악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가? 죄에서 떠나야 한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가? 이것이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묻고 또 묻고 싶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4-23
  • 가장 멋있는 교회 건설
    세계에서 제일 잘 지어진 교회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 성 베드로 성당이다. 로마의 네로 황제가 쓰던 둥근 운동장의 자리이며 사도 베드로의 묘위에 세웠다고 한다. A.D 80년 교황이 기도하는 집으로 지었고 326년에 콘스탄틴누스 황제 배실리카가 기도하기 위하여 지었으나 1450년 브라만테의 설계로 다시 건축을 시작하여 1614년에 준공한 세계 최대의 성당이다. 라파엘로, 미카엘젤로 같은 대 건축가들이 참여한 것도 유명하지만 160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었고 재정이 모자라 면죄부를 팔았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베드로 성당보다 더 잘 지어진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430년간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서 시내 광야로 나왔다. 인도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실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다.(출 25:8-9) 일종의 피난민 같은 그들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 날 런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은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리자 그들은 손수 실을 내리고 천을 짜고 동과 은이나 금을 드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비록 천막이요 영구성도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셨다고 한다. ‘모세가 그 필한 것을 본 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 하셨더라.(출 39:43)’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란 의미를 되새겨 본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양보는 없고 끝없는 분쟁으로 자기주장만을 앞세 우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일치와 연합하는 모습은 극히 드물고 파당과 분열만이 점점 더 심화 되고 있는 추세다.성경은 ‘너희는 다같은 말을 하고 분쟁 없이 같은 뜻으로 온전히 연합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고 하나 되는 일이다. 많은 교회들이 선교 하고 교육 하는 일이나 봉사 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일치 되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교회의 연합은 뭉쳐진 믿음의 힘으로 불의하고 부패한 사회의 개혁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이 바지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과 임무 보다는 개 교회 자체의 외형적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추세다.이러한 현상은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가치관의 중심을 차지하고 성도들의 신앙의 에너지와 열정을 개 교회 안으로 축소하거나 제한해 버릴 위험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통치는 실제로는 개인이나 가정과 개 교회의 영역으로 제한 되게 된다. 이런 개교회 주의 신앙은 사도 신경에서 천명 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일탈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개교회주의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에너지와 은사와 능력과 배분을 왜곡 시키고 그 결과 성도 개개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자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인들은 단지 목회자의 욕망을 실현 시키는 사병화 되어 버리는 경우를 낳게 된다. 이렇게 예배당 중심의 종교 생활에 제한되어 있는 동안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신앙의 경건성과 전문성을 살려 빛과 소금이 될 일꾼들은 점점 고갈되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은 다른 세력들의 지배하에 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탈피 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하고 고심하던 지난 주 우리 교회는 두 교회가 연합하는 조인식을 가졌다. 조선족들이 집결되어 있는 대림동에 다문화 선교관을 개관하고 협력하여 “다문화 가족을 그리스도에게” 라는 표어를 내 걸고 시동을 걸었다. 외형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려는 것이다. 아무쪼록 협력하는 곳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리라고 확신하며 모든 분들의 기도를 요청 하는 바이다. 시동을 걸었으니 계속해서 제이 제삼의 아름다운 교회가 건설되기를 바란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4-22
  • 부활 주일을 맞이하며
    고난 주일을 보내고 부활절과 함께 4월에 접어들면 산에는 온통 봄꽃 들이 만발한다. 이때쯤이면 생활에 찌든 마음을 헤치고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을 회복 시켜준다. 세상이 좋아 보인다. 겨울을 보내고 기다림 중에 활짝 피어나는 꽃들로 세상이 환해진 느낌이다. 찬 기운이 완연히 자취를 감추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동면한 풀잎들이 대지를 꿰뚫고 솟아 나오면서 그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절이다. 죽은 것 같으나 살았다는 함성이 들려지는 계절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야외로 봄나들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의 부활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무죄한 신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사와 감격을 가져오게 한다. 죽은 듯 조용하던 대지에 새싹이 틔어 오는 것은 죽음 뒤에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 없는 부활이나 영광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나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 이 말은 곧 뛰지 않은 경주자가 일등을 기대하는 망상과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 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 같이 부활 사건을 전해 주고 있다. ‘빈 무덤 설화 “엠마오 길의 예수 이야기’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등이 모두 예수 부활을 전 해주는 예수 이야기 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 보다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왜 고난을 받고 부활 하셨는가? 분명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라는 관점에서 전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보활 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과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서 그 핵심적인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활 하신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명령 하였다. 예수가 우리에게 명한 것이 무엇인가?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예수의 어떤 삶과 사상을 기념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려고 부활 하셨다. 예수의 부활 신앙도 없이 부활 주 일 공동 예배의 주도권 싸움이나 하고 교회를 사유물과 같이 생각하고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는 이름으로 온갖 불의를 행하는 종교 주의자들은 부활 신앙은 없고 권위주의 자들을 위해서 부활 하신 것이 아니라 병들고 억압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다. 4월이 되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꽃 피우기 위하여 죽음을 사수하였던 젊은 이들의 희 생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국가만을 위해서 일어섰던 그 마음 우리도 지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도 한다. 과연 오늘 우리 사회나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에의 참여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쉽게 예수를 따르려 하고 너무 쉽게 애국의 대열에 서려고 하는 것 같다. 쉽게만 살려고 하고 쉽게만 성취 하려고 하는 이런 삶은 생의 기만이다. 이런 태도는 절대자를 향한 사기를 치려는 불손한 행동임을 이제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봄과 함께 맞은 부활 신앙임을 명심하자. 4월은 축복의 길이 환히 트여 있는 달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길을 가는 자들이 적다는 것이다. 아마 이 길이 좁고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길만이 참 길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이제 의연히 돌아서서 이 봄의 훈풍을 맞으며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열심히 걸어 가 야 한다. 역시 인간사 최고의 대박과 인생 역전의 드라마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우리 주 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일과 그 부활의 증인으로 우리 주님앞에 당당히 서는 일이 아닐까 봄의 의미를 새겨 보게 된다.아! 부활을 알리는 봄의 기운이 싹터 온다. 축복의 길이 열려지고 있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4-01
  • 자아 성찰 -이 선 규 목사/금천교회
    지난 년말에 장기 목회를 이어 왔다고 노회에서 배려해 주어 서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종교개혁의 본산지인 독일 스위스를 위시하여 고대 문명의 수많은 흔적을 남긴 로마를 방문 하여서는 그러한 문명의 도시가 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나? 거기에 이어 왜 이스라엘 왕국은 여지없이 무너졌든가?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 본다. 우선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떠 올린다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 전성기는 솔로몬의 치세였다. 그는 아쉽게도 그의 BC 922년에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넘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왕위를 승계하게 되고 곧바로 여로보암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반기를 들게 되어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가 치명적인 분열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 왕조 유다가 신 바벨론에 망함으로 영광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스라엘의 불행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두드러진 부분이 솔로몬의 화려한 외교력에 있는데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불러 들였고 그 때 그 여인들을 따라 이방 잡신들이 함께 이스라엘에 끼어들어 왔던 것이다. 이번 로마에서도 많은 유적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성적인 문란과 퇴폐 문화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성찰에 둔감한데서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해 본다. 기독교는 건강한가?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기독교는 병든 것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우리의 병리를 깊이 더듬어 보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느끼는 병리를 진단해 보자.1. 편견에서 생긴 병크리스천들은 그 신앙이 독실한 만큼 편식을 많이 하고 있다. 이 편식으로 생긴 병은 피가 말라 핼쑥해진 얼굴을 가진 환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무서운 병인지 모르고 오히려 가장 건강하고 이상적인 얼굴인 듯 착각을 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의 모범적인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충돌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꿈꾸는 신앙인의 모델은 죄인들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었으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성자의 자화상이 아니라 친히 죄인의 벗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독교라는 교리를 형성하고 나서는 다시 성자의 초상을 만들어 피가 없는 인간으로 화해 버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타적이고 이 편협한 인간상을 두들겨 부순 것이 마틴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루터나 칼뱅이 개혁해 놓은 개신교회도 다시 이런 왜곡된 성자의 초상을 수 없이 만들어 낸 것이다. 루터나 칼뱅에게도 그런 병의 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라는 구호는 다시 배타적인 성격으로 왜곡되고 순수한 신앙이란 곧 배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으로만’이라는 구호는 순수하고 고귀한 가치임에 분명하지만 그 속에 안주하는 신앙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자아를 성찰 해 볼 때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날이 갈수록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수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기독교의 전성지라 할 수 있는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기회 지나가기 전에 철저한 자기 성찰로 기회를 만회 해야 할 것이다. 2. 분열증세지난주 교계의 두 교단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한국 교회를 희화해서 말하기를 ‘둘이 합치면 셋으로 나뉜다는’ 기사를 읽고 병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듯하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병든 사회, 병든 몸(교회 공동체)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우리 크리스천 문학인들의 사명을 살펴본다. 그 병을 고치는 의사는 율법 이라는 방식으로의 처방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간을 치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의사이시다. 이 의사에게 먼저 치유를 받고 사회의 여러 계층의 고질적인 병들을 치유하는 일에 총결집을 이루어 내는 희망을 꿈꾸어 본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3-18
  • 이 선 규 목사(금천교회)
    마음의 문단속을 하라 요즘은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어서 외부 판매원들이 출입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때는 이런 제재가 없어 외출 할 때는 항상 남아 있는 가족에게 “문단속을 잘 하라”고 타이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문단속은 현관이나 대문만 단속 할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단속도 잘 해야 한다. 자산과 생명을 노리는 흉한 사람처럼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기 때문이다.어느 날 교회를 잘 나오시는 성도 한분이 갑자기 교회를 안 나오신단다. 간곡하게 권면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에 대해서 상담을 드린다고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한 것이 결국 이단자에게 넘어간 단초 가 된 것이었다. 마음의 문단속을 잘못한 것이다. 이들은 대개 이런 말로 초신자들에게 도전해 온다고 한다. “교회 주보를 보시오 교회의 목사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지 않은가요? 교회 확장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그 말부터가 비기독교적 입니다. 교세란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교인 수인 통계 헌금 통계 헌금액 표기(경쟁심 유도) 그런 거 아닙니까?” “그 대신 구원 문제 같은 것이 개인적으로 해결 된 일이 얼마나 됩니까?”“당신은 지금까지 목사를 몇 번이나 만났으며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상담을 받아 보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 바라고 계시는 참된 교회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교회당 건물도 지을 필요도 없고 숫자를 헤아리는 것도 없고 기성 교회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어디에다 공시하거나 자랑감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세례가 중요시 되며 일대 일의 상담 요원이 언제든지 신앙 상담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를 나가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주님이 판단을 주실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 교인은 이단에게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일고의 들을 가치도 없는 내용들인가? 그런데 그들 말 속에도 언뜻 귀담아 들을 말은 있었다. 나는 그 후로 주보에 헌금이나 출석 통계를 싣지 않기로 하였고 가급적 교회를 개방하기로 다짐도 하였다. 그리고 교인을 대중으로 보다 일대 일의 만남을 강화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낯선 편지 한통을 받았다. 곧 바로 개봉해 보니 내용이 수상하다. “목사님 저를 대적 하지 마시고 성경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저는 스스로 온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언의 사자로 교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생략)이것들을(계1:1-계22;21)보고 들은 자는 저 뿐이며 저 외 어느 누구도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생략) 초림 때 약속의 목자는 예수님 이셨고(요한 5:37--40)재림의 계시록 성취 때 약속한 목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약속의 메시야를 무시하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읽어볼 가치도 없는 내용들이지만 이러한 내용도 성경의 깊은 인식이 없는 평신도들에게는 미혹 받기 쉽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치 요한이 보고 들은 내용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처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하고 기 성 교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 인 것처럼 무작위로 편지를 보낸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곧잘 멸망과 불행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마음 문을 활 짝 여는데 구원과 평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는 굳게 닫아 버 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문단속을 잘하는 것은 무조건 굳게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말을 하건 진리가 아닌 것은 듣지도 말고 아예 문을 잠가 버리고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고 복된 것은 활짝 열어 드려야 한다. 만물 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페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시느니라. ...(렘17:9-10)복음을 받아들이는 복된 문단속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이제 어느 때 보다 문단속을 잘 해야 할 때임을 절감하고 마음의 문고리를 점검해 본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3-06
  •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와 삶으로” - 장헌일
    민족 분단의 시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야하는 중요한 해입니다. 성경상으로도 70년이 중요한 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고국으로 귀향한 해가 70년 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를 제2의 출애굽이라 일컫습니다. 그래서 성경상으로 70은 수치와 억압에서 해방을 맞는 역사적인 숫자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2015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조국을 위하여,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그리고 통일한국시대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이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2-16
  • 무종교인이 늘어난다는데?-이 선 규 목사
    최근 여론 조사 업체인 한국갤럽은 1984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한국인들의 종교와 종교 의식 변화를 비교한 한국인의 종교 실태 조사를 발표 했는데 종교관심도 뚝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필자가 눈여겨 본 것은 ‘종교가 없다’고 말한 비율이 55%로 10년새 13%나 상향 되었다는 부분이다.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전도 대상자인 비종교인들로부터는 늘 외면 당하고 있다. 왜 그럴까?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자체의 성장에는 어느 나라 어느 종교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큰 성과를 이루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 박에는 외면 아니면 무관심 하지 않았나하는 의구심을 가져보게 된다. 마침 필자의 신학교 교수님이 ‘월요일의 하나님’ 을 강조하시던 의미를 되새겨 본다.
    • 기고
    • 독자기고
    2015-02-06
  • 대림절과 도미노-이선규목사
    대림절(혹은 강림절 ‘대강절’ 이라고도 부름)은 교회력의 시작으로 성탄절 전 일곱 주일을 포함한다. 이 기다림과 준비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성탄절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심 (사 45;7) 둘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오늘도 인간의 삶속에 오시는 그리스도 (마 24:30) 를 기다리고 준비한다. 셋째, 이 기간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말단 문제 즉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묵상한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맞으려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그 마음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살았는가?’ 돌아보고 주님의 뜻에 더욱 충실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때가 바로 대림 절기이다. 대림절에 접어들어 ‘도미노’현상을 꿈꾸어 본다.
    • 기고
    • 독자기고
    2014-12-11
  • ‘심은 대로’ - 이선규목사
    가을은 수확의 계절, 땅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은 흐뭇하고 마음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어디 자연 뿐이겠는가? 인생에도 수확이 있다. 기쁨을 거두는 자도 있고 후회를 타작하는 이도 있다. 또 영광을 수확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거두기도 한다. 아침저녁으로 약간 싸늘함을 느끼게 하 는 바람 또는 기온의 변화는 벌써 가을이 가버리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 어느 계절보다 가을이 되면 어쩐지 풍요와 초조감이 반복하는 하는 가운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하겠다. 가을은 심어야 거둔다는 자연의 범칙을 가르쳐 주는 계절이다. 봄에 심는 씨앗도 있고 여름에 심는 씨앗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심은 씨앗들이 잎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수확을 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 사회 속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들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무리들이 늘어 간다는데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하니까 물의가 생기고 불법과 위법이 생기며 부정과 부패의 징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기본 법칙마저 어기고 사는 이런 부실 인간이 된다면 그 자체가 곧 심판인 것이다.
    • 기고
    • 독자기고
    2014-11-27
  •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 - 이선규목사
    세상에 죄가 들어오므로 모든 세상의 구조가 온통 바꾸어져서 원상태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질서, 그리고 평화와 환희를 찾을 수 있기보다는 미움과 혼란과 분열과 불안을 더 절감하면서도 이 영역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가 보다. 대개의 경우 우리 사회는 이권(利權)과 불신(不信)의 요소 때문에 모든 분위기가 영점 이하로 전락하고 험악해진 정황에서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음을 하나님께 하소연을 해 본다. 권력이 명랑한 사회 형성의 큰 요소가 되는 때도 없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당리, 당략에 치우치거나 악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면 흉악한 냄새만 풍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될 때 대립과 갈등을 벗어 날 수 없고 이에 따라 불신의 도는 확대되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도 교권이 냉정하게 작용할 때 발전과 새 질서를 이루기보다 분열(分列)과 불목(不睦)과 파괴가 더 크게 작용한다. 사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 기고
    • 독자기고
    2014-10-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