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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금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초기 한국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 본다.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기억 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03년 하디 선교사로부터 원산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음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하디는 1901년 강원도에 지경터 교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곳에서 교인을 얻고 장년 1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역 속에 회심 자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근심과 무력감에 빠지었다.그래서 하디는 갈급한 마음을 갖고 성령을 의지하게 되었다. 1903년, 때마침 중국에서 일하던남 감리회의 여선교사 미스 화이트가 원산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8월 24-30일까지 선교사 6~7명이 합숙하는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열렸는데, 기도회 인도를 부탁 받은 하디는 요한복음14장을 읽게 되었고 본인이 성령 충만하게 되었다.그 는 요14:12~17,16:23~24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기도의 세 가지 본질’을 강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하디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깨달았다. 성령의 임재가 필요함에도 구하지 않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성령께서 그의 실패의 원인을 밝혀 주는 듯 했다. 하디는 이때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내놓고 회개하여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회 이후 주일 아침 예배 때 원산교회 교인들 앞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했다.즉 자신의 실패한 원인이 자신의 무능과 부족 때문임을 고백했을 때 교회의 교인들 역시 큰 은혜를 체험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회개 했기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회개가 일어났고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유명했던 ‘윤승근의 양심전’을 소개한다.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은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수반했다. 이 무렵 윤승근의 회개와 배상에 선교사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본래 윤승근은 ‘난봉군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었으나, 1897년 남감리회 전도인 김주현과 김흥순의 전도를 받고 새사람이 된 후에, 고양읍교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그 러던 중에, 그는 1903년 여름 하디가 인도하던 원산부흥회에 참석하였다가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과거 선교사 밑에서 매서인으로 일하면서, 조금씩 돈을 빼돌린 것이 7달러에 달했다고 자복했다. 그는 이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했으며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줄곧 기도했다. “주여, 나로 하여금 과거에 모든 지은 죄를 기억나게 하사 남김없이 회개하게 하소서.” 그리고 길을 걷는 중에도 과거에 지은 죄가 생각나면,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통곡하며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다.그 러다가 10여 년, 인천 주전소에서 근무할 때 횡령한 돈이 생각났다. 그 때 한번은 회사에서 급여 계산을 잘못해서 그에게 두 달분 월급이 나왔는데, 그것을 되돌려 주지 않고 착복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쓸 것을 쓰지 않고 돈 20원을 모아 인천 주전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화폐개혁으로 인천 주전소는 폐쇄되고 없었다. 그는 주전소의 기능을 흡수하여 국가재정을 흡수하는 탁지부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돈을 내 놓았다. 사정을 들은 탁지부 관리는 “다 지난일”이라며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승근은 양심상 갚지 않으면 안 되겠다“며 받아줄 것을 요구 하였다. 탁지부 관리가 고민하게 되었다. ”대저 나라 돈이면 없는 구실을 대서라도 빼내가는 것이 세상인심인데, 어찌하여 예수교인은 아니 갚아도 될 것을 갚겠다고 하는가?“하며 탁지부 관리는 그 돈을 받으면서 영수증 항목을 ‘양심전’이라 썼다. 그 영수증은 하디가 기념으로 가져갔다. 훗날 과거 한국교회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를 증거로 언론에 영수증을 공개하기도 했다.이 렇듯이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초기 부흥운동으로 성령을 체험한 한국인들에게, 내외적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과 출생지, 나이와 환경이 달랐지만 성령을 체험한 그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자신이 죄임임을 깨닫고,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시인 하였으며, 자복 후에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회개 후에는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중생과 성화의 체험이다.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부활절을 맞은 후에 성령강림절이 찾아온다. 종교개혁을 본받자는 겉만 요란한 행사위주의 요식행위보다는 내면적으로 과거 한국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함을 그리워하며 사모하자. 사회적인 오늘의 현실은 암흑과 같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 희망을 꿈꾸게 된다.그러므로 우리 온 그리스도인들은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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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설 고향교회 방문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첫걸음
    한국교회 양극화가 정말 심각하다. 대형교회와 작은교회,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현안은 80%에 달하는 농어촌교회와 작은 개척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몸집이 커지고, 농어촌교회나 작은교회는 점점 힘을 잃고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극복하고 건강한교회로 나아가는 해답이 있는가? 해답을 찾는다면 미자립교회를 자립할 수 있도록 부축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는 일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양극화 극복의 대안은 ‘성장제일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다. ‘건강한교회’가 해답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다시 드러내야 할 때이다. 설이나 추석에 고향교회나 작은교회 방문운동은 한국교회 전체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함께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농어민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작은교회가 일어설 힘이 도저히 없을 때, 스스로 일어서거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격려와 배려, 이것이 이 시대에 먼저 선 자립교회와 도시교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일 것이다. 매년 설이 지나면 상계감리교회 서길원 목사의 경우 전국의 1,000여명의 목회자를 초청하여 격려하고 매년 100여개의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는 작은교회 리메이크를 통해 목회 생태계를 다시 복원하고, 건강한교회의 가치를 창출해, 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작은교회를 넘어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져올 정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성경에 보면 보아스가 곡식을 벨 때에 룻을 위하여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하므로 룻과 나오미가 생계를 유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땅 백성들이 암울한 오늘에서 더 암울할 것 같은 내일을 바라보며 한 숨 쉬고 있을 때, 참다운 신앙이라면 반드시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들을 품고 격려와 위로도 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그런 지도자들로 어찌 한국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또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는 고향교회 방문하기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김관선목사는 “어찌보면 저수지는 물을 가두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그 많은 물은 재앙이 될 날이 옵니다.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고통당하는데 둑이 무너질 정도로 물을 가두어 두고 흘려보내지 않는 저수지가 있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를 포함해서 웬만큼 힘을 가진 교회나, 한국교회는 그동안 쌓아둔 것을 흘려보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고 전했다. 한국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미래를 열고, 보다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농어민과 그들을 돌보는 시골 농·어촌의 고향교회, 그리고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이 절실하다.감리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대치동 성은교회 김인환 목사도 2007년부터 설이나 추석 명절을 즈음해 '고향 교회 방문하기'라는 이색 캠페인을 10년째 펼치고 있다. 소속 교회 성도들이 저마다 고향교회를 찾아 어려운 교회에 힘을 실어주자는 것. 김인환 목사는 평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꿋꿋이 고향을 지키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우리 신앙의 '못자리'같은 농어촌 교회를 가슴으로 보듬자"고 강조하고 있다.한국교회의 신앙의 못자리이자 신앙의 뿌리는 시골의 농·어촌교회와 작은 개척교회였다. 그런 저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런 교회들로 채워질 때 한국교회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제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이 땅 백성의 억울한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그들에게 참된 기쁨을 되돌려주는 선교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이 시대에 농어촌의 작은 교회,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향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한다는 그 마음을 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귀하고 복된 나눔과 배려가 있을 때 ‘건강한 한국교회’의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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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3
  • 내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
    새벽 일찍 깨어나 엎드려 묵상 기도를 합니다. 주님! 지금껏 살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은 호스피스 봉사하러 가는 날이지. 그래 오늘도 내가 할 일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일거야.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호스피스센터로 향합니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주의 사항을 듣고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시작합니다. 3층 병실로 가서 봉사자들을 살피고 오늘은 2층 임종실 환우를 돌보기로 했습니다.202호에 환우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봉사자입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임종이 가까워진 환우의 메마른 입술에 물젖은 거즈를 붙여드리고 간단한 발 마사지를 해드렸습니다. 목욕을 못한 것 같아 가까이 있는 봉사자와 함께 손과 발을 닦아드리면서 환우에게 “물이 따듯하지요.” 가족(따님)과 함께 온몸을 닦아드린 후에 새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습니다. 그때 따님이 우리 아빠가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뻐했습니다. 환우의 귓가에 대고 “박00님께서 지금 가시는 길은 우리가 도와 드릴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아침저녁 예배를 드리면서 만난 그 예수님만 믿고 가셔야 합니다.”기도를 해드릴까요?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지금까지 박00님을 지켜 주시고 이곳까지 인도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시고 행여 악한 영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십시요.. 남은 가족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했습니다.환우의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가족이 바라보는 가운데 박00님은 잠자는 듯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함께 있던 가족들이 슬퍼하는 가운데도 따님은 마지막이지만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작은 도리를 했다는 듯 “아까 우리 아빠의 눈물을 보셨지요” 라며 위로를 받고 싶은 눈빛이었습니다. 그 딸을 꼭 안아주면서 등을 다독여 주었습니다. 잠시 후 흐느끼던 따님이 고개를 들며 “오늘 너무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라고 감격해했습니다.모든 뒷마무리가 끝나고 봉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 오늘의 일들이 제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일까요..” 감사합니다.2016년 10월에 씀.메모 : 이융재 사모는 수필가 최건차 목사의 아내로 지난 12월 19일 71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위의 글은 고 이융재 사모가 수원기독호스피스센터에서 16년간 자원봉사자로 수고하면서 떠나기 두 달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입니다. 고인은 생전에 말기암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임종을 거두어 주곤 했는데, 자신이 2016년 12월 1일 담낭암 말기로 바로 그곳에 입원하여 19일 만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아름다운 삶이었기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같이 봉사했던 이들은 이럴 수가 라고 믿기지 않은 듯 금방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고들 하지만. 이 땅에서 다시는 만나 볼 수가 없는 이융재 사모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지인들에게 애틋한 그리움을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최건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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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2
  • 목사의 정치적 발언
    “목사는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 목사가 박근혜 퇴진이라든가 촛불집회라든가 하는 정치현안을 강단에서 말하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지나가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기 때문에, 목사의 정치적 발언이 성도들 사이에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분쟁을 낳게 한다.”얼마나 성경적인 논리인가! 이런 논리는 성도들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에서 아주 단순 명쾌한 논리로 주만 바라보고 살게 만든다. 불의한 정권이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리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어떤 고통의 신음이 있든 성도는 모든 관심을 영원한 나라에 집중하고 그분이 주는 영원한 내적 평화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기독교에 대해서 말한 ‘민중의 아편’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기독교를 ‘개독교’되게 하는 논리이다. 주를 사랑할수록 현실의 불의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편이나 마약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문제는 한국교회 안에 성도들로 하여금 현실의 악과 고통을 외면하고 계속 저 하늘의 꿈에 취하게 하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드는 기독교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단이나 사이비와 다름이 없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이다. 이 땅에 이뤄지는 정의의 질서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는 한국교회 안에 널리 만연한 생각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정치적 사명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 하늘에 있다고 믿고 지금 여기서 불의와 싸우고 사회에 정의로운 질서를 이루려는 것이 단지 세상 일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은 세상을 불신자들과 마귀에 넘겨주는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이 모여 주를 예배하는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우상숭배 권력과 싸우는 사회에도 임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영역이고, 주를 따르는 제자도의 영역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다. 정치적 우상숭배와 불법에 대항하는 것은 천국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무관하고 영성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교회의 마땅한 의무이다. 천국 소망을 이유로 사회 정의를 부차적이고 신앙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박근혜 대통령이 몸통이 되어 국가 전체 시스템을 왜곡시킨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대한민국의 치부가 드러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 200만 명이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흔들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박대통령과 최순실의 희대의 헌법유린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득권층의 탐욕을 질타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대안으로 제시해야 할 영향력 있는 한국교회 목사들은 위기에 처한 박대통령의 편에 서서 그를 비호하고 박근혜 탄핵 반대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또한 성도들에게 대통령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이므로 비록 잘못했다 해도 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촛불집회를 종북주의자들의 음모로 의심한다. 한국교회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시대의 주도적인 건강한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지금 현 시국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복음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종교의 울타리에 갇힌 영성을 정치적 사회적 광장의 영성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폐기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가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목사는 정치 영역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선택인지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성도들이 자신의 사회적 계층이나 속한 당파적 이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한 삶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목사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함과 함께, 현실 정치에 대해 신학적 의미를 통찰하도록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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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5
  • 역사 바로 세우는 교회 - 홍성표 목사
    역사란 우리가 사는 삶의 총체적인 기록과 해석이다. 그 역사와 함께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역사 없이 교회 없다. 역사는 보편사와 구원사가 있다. 아니 보편사 속에 구원사가 있고 구원사 속에 보편사가 있다. 다시 말하면 분리 된 역사란 없고 유아독존적인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사가 뒤 틀리면 삶의 가치와 의미가 상실되고 방향과 길은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역사는 또한 개인과 전체가 함께 한다. 개인 없는 전체 없고 전체 없는 개인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할 때 혼자만의 이기적 구원을 주장할 수 없고 개인이 없는 전체의 구원을 말 할 수도 없다. 우리는 나와 너가 함께 하는 모든 것의 구원을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의 역사적 실체는 남북한 당사자들이다. 남쪽의 광화문 광장에서의 민중들의 함성과 깃발은 이러한 역사 바로 세우는 하늘가 땅의 부르짖음이다. 소수의 정치세력과 소수의 재벌 독점으로 인한 역사 속에서의 민중들의 분노와 한의 음성들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다. 일제의 압박40년과 해방이란 이름과 분단을 맞이한 70여년의 신식민 시대, 그리고 2차 대전과 냉전의 산물로서의 한반도, 뿐만 아니라 민족 세계전쟁을과 독재의 사슬과 군부의 반란의 역사 속에서 숱한 제도적,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민중들의 죽음들과 억압의 한이 지금 광화문에서 땅과 하늘을 흔들고 부르짖는 것이다. 이 땅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가 존재해 왔다. 토속 민간신앙의 종교로부터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부터 들어 온 불교가 삼국을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까지 1500여년을 거치고 그 불교가 민중들의 마음을 떠나자 소위 유교가 조선 500년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유교가 수명을 다하자 민중과 나라는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 틈을 타서 다시 1774년을 원년으로 가톨릭이, 100년 뒤인 1884년에 개신교가 이 땅에 상륙하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그 뿌리가 하나이다. 적어도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한 종교인 것이다. 편의상 가톨릭은 구교로 부르고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의 타락상과 부패들에 대하여 저항하며 탄생한 개신교(루터교와 개혁교회)가 존재케 된 것이다.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 탄생의 과정에서 소위 종교전쟁은 30년의 긴 투쟁과 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개신교는 유럽을 통해서 시작 되었고 퓨리탄(청교도)들을 통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고 이후에는 아시아로 진출하였으며, 다시 아프리카 등 세계화의 길을 걷게 된다. 종교는 대개의 경우 좀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 병을 치유하거나 혹은 마음의 평안을 빌거나 인간의 절망적인 삶을 희망적 미래로 바꾸고 변화 시키려는 근원적 회복을 지향한다. 물론 그것은 대개의 경우 현세적 미래의 희망이다. 현재의 절망적인 삶의 정황을 새로운 희망적 세계의 지평으로 판을 바꾸거나 그러한 방향을 모색하려는 일종의 삶에 대한 몸부림의 성격을 가진다. 대개의 이러한 종교적 특성은 실존적이며 개인의 성향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는 성서를 통하여 역사적 변화와 변혁, 혹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교회의 중심축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물론 그들이 속해 있는 역사의 구원을 지향한다. 따라서 성서와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역사를 외면 한다면 소멸되거나 역사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거짓과 불의에 대한 철저한 거절과 저항을 통하여 역사를 하나님이 원하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이러한 바탕위에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일이다. 이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한반도에서의 역사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분단의 모순을 헐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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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개혁자들의 음악적 견해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다움’이라는 개혁운동이었다. 그 개혁운동은 위클리프, 후스 등, 전(前)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별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루터에게도 이어져 왔다. 루터가 말씀을 중심한 종교개혁과 찬송을 통한 음악개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루터가 가진 두가지 개혁운동의 축중 하나인 말씀으로 돌아가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주장이었고 그것은 교회개혁의 본질이었다.또 하나의 축은 ‘음악’의 개혁이었다. ‘음악’이라는 새로운 병기가 그에게는 있었다.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서,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다.이러한 두가지 개혁운동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해에 스위스 종교 및 정치개혁을 주도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특히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예배에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스위스 독일어 사용권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개혁은 프랑스어권인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되는데, 기존 교회의 전통에 대한 칼뱅의 깊은 불신은 예배에서 가톨릭의 전례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공적인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스위스의 츠빙글리도 목사인 동시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으며, 프랑스의 신학자 칼빈도 앞의 두 사람 못지 않게 교회음악의 대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에 비견되는 그들이 한 목소리로 교회음악의 개혁을 주창한 핵심은 바로 기존의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는 음악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교리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적 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하며 거기에는 음악적 타락도 포함된다는 점과, 교회음악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특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해서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가져왔다.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Hymn)라고 알고 있는 찬송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립된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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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1
  • 오사카 와사비 테러와 일본인의 콤플렉스
    10월 초 일본 초밥 체인점 ‘이치바즈시(시장스시)’에서 발생한 일명 ‘고추냉이(와사비) 테러’로 한일 양국 간에 혐한 논란이 일었었다. 시장스시 오사카 도톤보리점을 방문한 한국인 고객들에게 고추냉이를 많이 넣은 초밥을 제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이다. 이에 대해 시장스시 본점은 “평소 해외 고객들이 고추냉이를 많이 넣어달라는 요구가 많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드린 결과가 됐다”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한국 네티즌의 공분만 샀다.SNS에서 ‘고추냉이 테러’가 ‘시장스시 불매운동’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혐한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에서의 ‘고추냉이 테러’는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적지 않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서의 은근한 한국인 차별을 겪는다. 이러한 처우를 알면서도 묵과하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은근한 차별’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추냉이 테러’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닌 언어에 미숙함, 그리고 문화적 차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며, 이러한 문화적 테러는 정부 차원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추냉이 테러’는 왜 발생했을까? 그리고 일본에서의 ‘혐한’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예전에는 약했던 ‘혐한’이 왜 ‘지금’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한국이 갑자기 미운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는 몰랐던 한국의 미운털이 갑자기 ‘지금’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국가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갑자기 미움이 싹트는 경우가 발생한다. 수십 년간 알고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미워지는 요인은 수만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 마음에 심한 상처를 내는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질투심’이다. 특히 나보다 못하다고 느끼던 친구가 갑자기 잘 나가고, 상대적으로 내 처지가 안 좋아질 때 나도 모르게 시기·질투심이 생긴다. 아무리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친구를 바라봐도 마음의 상처만 남는다. 그게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1991년 이래 장기불황이 계속되면서 잃어버린 20년(1991년~2011년)으로 최악의 경제상황을 맞았다. 불황의 시작은 일본의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시작했다.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대량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침체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인에게 ‘희망’과 ‘도전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일본인은 이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자책하는 대신 잘 나가는 이웃나라 중국과 한국에 대한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2013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혐한혐중(嫌韓嫌中) 관련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인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결코 일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이제 중국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패기’와 ‘도전 정신’을 찾을 수 없다. 한 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일본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심하게 훼손된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혐한 현상을 접할 때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미래’와 ‘도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는 경제적 측면 외에 종교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사랑과 희생을 받아들인 한국과 달리 일본은 신도(神道)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 일본 문화청 ‘종교연감’에 따르면 일본 종교인 수는 신도가 약 1억843만 명, 불교 8750만 명인 반면, 기독교는 237만 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은 기독교적인 가치와 서구의 보편타당한 문화가 자리 잡기가 어렵다. 따라서 일본에서 벌어지는 ‘고추냉이 테러’와 같은 은근한 한국인 차별이나 혐한이 기승을 부려도 대국적 입장에서 일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일본과 같은 수준의 반일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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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02
  • 개혁자 루터와 두 가지 개혁운동
    1. 루터의 찬송가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였으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금하여 학비를 보충하였다. 그러다 귀족부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음악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수양아들로 데려다 키우며 음악을 가르쳤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 여러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로 음악의 영적인 힘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음악을 멸시하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이라고 부르며 없애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 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제가 된 마르틴 루터는 시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1534년 간행되는데 이후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성경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때 지은 것으로 수많은 ‘시편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루터의 찬송가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와 루프(Konrad Ruoff) 등 지지자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루터의 첫 찬송가 <새로운 영적찬송가,1523>(Neue geistlich Gesänge)는 4부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악보와 같이 통합된 피아노 보표는 아니다. 루터가 만든 4부 찬송가는 각 성부가 따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각 권은 각각 해당 성부를 부르는 사람이나 그룹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하면 「파트별 찬송가」라 하겠다. 루터의 둘째 찬송가는 <몇 편의 그리스도교노래,1524>(Etlich Christriche Lieder)인데 흔히 <성가8곡집>(Achtliederbuch)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루터가 지은 찬송 4편을 포함해 8편의 코랄이 들어 있다. 루터의 셋째 찬송가는 <영적찬송가,1529>(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인데, 여기에는 26편의 코랄이 들어 있으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회중 찬송가로서 단선율의 곡조찬송가이다. 또한 루터를 도왔던 발터는 <신령한노래,1524>(Geistliches Gesangbuchlein)라는 작은 찬송가 모음을 내었는데, 30곡 중 23곡이 루터가 작곡한 것이다. 이 책은 흔히<비텐베르크 찬송가>(Wittenberg Gesangbuchlein) 라고 부른다. 이것은 찬양대를 위한 다성부 코랄집으로 플랑드르악파의 모테트 양식으로 편곡되었고, 주된 가락은 테너 성부에 있다. 클루크(Joseph Klug)도 루터의 공인하에 50곡을 담은 <개편 찬송가>(Geistliche Lieder auf gebessert,1529)를 출판하였는데, 앞서 나온 찬송가들보다 많이 불려졌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손을 거쳐 출판된 찬송가(Valentine Bapst)에는 120편의 찬송 가사와 97편의 곡조가 들어 있는데, 루터의 찬송이 28곡 수록되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그런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을 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 2. 종교개혁과 음악개혁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개혁도 성취한 인물이며 그의 종교개혁은 찬송으로 이뤄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음악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모든 의식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성가도 모두 라틴어로 불렀다. 루터는 예배에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자기 나라 언어인 독일어 사용을 권장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 양식은 오늘날의 찬송가에 해당되는 코랄(chorale)이다. 그전까지 예배의식은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노래는 성가대만 불렀다.교인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성가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기만 했지 직접 교회음악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르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해도 아마 한정된 사람만이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래가 너무 어려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일반 교인들도 음악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코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게 되었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창안한 개신교회의 코랄은 음악을 통해 교인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루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루터나 칼쟁, 그리고 츠빙글리 모두 다성음악의 화려한 음악의 모든 부산물들을 과감히 교회 밖으로 던져 버리고, 경건히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르듯 단선율에 가사를 실어 찬송하게 했다. 코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처음으로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했다. 그동안 예배의식에서 소외되었던 교인들을 예배찬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음악을 정비하였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웅장하면서도 복잡했던 음악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단선율 찬송으로 정리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몇 백년, 아니 아예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 같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이 그렇듯이 잘못된 것을 한번에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다움과 예배의 회복인 것이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교회력에 맞추어 모든 주일에 부를 수 있는 코랄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코랄이라는 양식을 창안한 후 20년동안 찬송 117편이 수록된 찬송가를 발행해 보급했다. 종교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가 만든 독일 코랄(Chorale)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의 효시가 된다. 코랄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찬송가가 된다. 현대의 찬송가는 모두 4성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최초의 코랄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이 제창으로 불리는 단순한 노래였다. 하지만 화성과 대위법을 통해 얼마든지 큰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사는 찬송가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음악사의 역사는 바로크음악, 고전음악, 낭만음악, 근대음악, 그리고 현대음악으로 이어진다. 종교개혁 이후 찬송가는 교회음악의 전부이며 교회음악사의 중심적 흐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은 찬송가 외에 특별한 음악 양식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양음악은 오페라, 합주곡, 교향곡 등 수많은 음악 양식을 생산하며 음악계를 주도해가고 있다. 루터의 의해 기초가 세워진 개신 교회음악은 그 후 바흐에 의해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바흐는 코랄을 기반으로 코랄 전주곡, 코랄 환상곡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루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음악적 성과였다. 루터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찬송 드리기를 원했다. 이런 토양에서 <코랄>이 나오고 하인리히 쉬츠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 팰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가 배출될 수 있었다. 3. 개혁자들의 음악적 견해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다움'이라는 개혁운동이었다. 그 개혁운동은 위클리프, 후스 등, 전(前)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별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루터에게도 이어져 왔다. 루터가 말씀을 중심한 종교개혁과 찬송을 통한 음악개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루터가 가진 두가지 개혁운동의 축중 하나인 말씀으로 돌아가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주장이었고 그것은 교회개혁의 본질이었다. 또 하나의 축은 ‘음악’의 개혁이었다. ‘음악’이라는 새로운 병기가 그에게는 있었다.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서,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두가지 개혁운동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해에 스위스 종교 및 정치개혁을 주도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특히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예배에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스위스 독일어 사용권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개혁은 프랑스어권인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되는데, 기존 교회의 전통에 대한 칼뱅의 깊은 불신은 예배에서 가톨릭의 전례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공적인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 스위스의 츠빙글리도 목사인 동시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으며, 프랑스의 신학자 칼빈도 앞의 두 사람 못지 않게 교회음악의 대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에 비견되는 그들이 한 목소리로 교회음악의 개혁을 주창한 핵심은 바로 기존의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는 음악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교리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적 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하며 거기에는 음악적 타락도 포함된다는 점과, 교회음악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해서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가져왔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Hymn)라고 알고 있는 찬송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립된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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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9
  • ‘이단 정죄’ 누가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을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 주셨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이단이라며 엄청난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기독교의 전도 대상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구분이 없다. 설렁 상대가 무당 혹은 점쟁이, 불교의 승려, 심지어 살인, 강도라도 누구나 전도 대상이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도 대상자를 선택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을 따라 누구에게든 생명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느 특정인이나 어느 단체 혹은 교단이 예수 믿는 것을 선별, 결정할 권한이 없다. 필자는 금번 통합측 교단에서 이단으로 지목 받았던 4분(교회)을 이단 해지 했다가 다시 취소하며 성명서로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네 분(교회)은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개하며 이제부터는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감사의 눈물까지 흘렸다. 그런데 며칠이 못되어 다시 이단 되라는 성명서를 보고 얼마나 실망하고 낙심 했겠는가? 안타깝다.자신들의 과거를 회개하고 공식 지면을 통해 잘못을 인정하며 이제부터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하는데 안 된다고 하면서 다시 이단을 하라고 하는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진 것인가 묻고 싶다.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교연에서는 한기총과의 통합반대를 위해 다락방을 빌미삼아 안 된다고 괴변하고 있다. 그런데 류광수 목사는 6년 전 개혁교단에 가입을 했고 개혁교단에서는 철저히 검증해 ‘이단성 없음’을 밝혔다. 또한 류광수 목사는 “한국교회가 지적하는 부분이 있으면 겸허히 수용하여 지도를 받겠다”며 각 신문에 그것도 교계뿐 아니라 일간신문(조선 동아일보)에 까지 성명서를 냈다. 그 후에 한기총에서 두 번이나(홍재철 대표회장 때와 현 이영훈 대표회장 재임 시) 검증을 해서 ‘이단성 없음’이 증명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도 없이 그냥 무조건 이단하라는 것이다. 이단이 뭔가? 성경을 부인하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이다. 진짜 이단은 따로 있다. 설사 그 이단들이 회개하면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단을 정죄하는 그 교단에 속한 목회자 중에도 과거 승려 출신이나 이단에 빠졌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내가 하는 것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것은 잘못 됐다는 것은 아집이다. 필자는 통합교단이 이단을 안 하겠다는 사람들을 ‘절대 안 된다’ 그냥 이단하라고 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이단을 안 하고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겠다. 진심으로 과거를 회개 한다”고 하는 그들을 무슨 권한으로 정죄 하는가 이다.예수님은 요일 1:9에서 “만일 우리가 죄를 자복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지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고, 행 16:31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목회 전선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불철주야 애쓰는 목회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여러분들도 전도할 때 사람을 구별해서 전도 하는가 이다. 인간은 주님 앞에서 서기 까지는 누구나 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우리가 무엇인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진정한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서두에 말한 대로 우리의 전도 대상은 ‘누구나’ 이다. 심지어 타 종교를 믿는 사람도 전도 대상인데 과거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안 된다 너희는 계속 이단하라'고 한다면 과연 주님께서 그들에게 뭐라고 하실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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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 수필 - 최건차목사
    C-레이션(Combat Ration)은 미군들의 전투식량으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다.내가 C-레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남한에 사는 국민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보내준 옥수수가루와 분유를 받아먹을 때였다. 한번은 갈색종이상자에 든 것을 배급받았다. 그것도 가구당 1개 정도는 다 받았던 것 같다.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크고 부자이기에 옥수수가루와 우유가루에 이런 것까지 다 보내주는가 싶어 감격했고 몹시 부러웠다.우리는 영어를 읽을 줄 몰라 그냥 열고 보니 국방색 깡통이 쏟아져 나왔다. 깡통따개가 들어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수단방법을 다 써서 뚜껑을 열고 보니 각각 다른 음식물이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 빵, 복숭아통조림, 콩이 섞인 돼지고기, 감자를 으깨어 섞은 닭고기볶음, 비스킷 등이었다. 그 외에도 작은 약봉지 같은 질긴 갈색종이봉지에는 설탕, 분유, 검정가루, 소금, 후추가루가 들어있었고, 별도로 카멜양담배 4개비에 성냥과 바둑 껌까지 들어있어 요즘의 표현으로 환상적인 종합선물세트였다.그 중에 작은 종이봉지에 든 설탕과 분유는 달고 좋았는데, 알 수 없는 검정가루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급한 김에 설탕처럼 먹어보려다 소태처럼 쓴맛에 놀라 내버려뒀는데 침이 묻은 부분이 굳어져서 고약처럼 돼 버렸다. 누군가가 다친데 바르라는 약인 게라고 해서 환처에다 발랐는데 나았다는 것이다. 나도 다친 무릎에다 그것을 발랐다.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에서는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 C-레이션 박스를 많이 사용했다. 나는 6·25 전쟁 때부터 시작하여 카투사와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C-레이션을 많이도 먹었다. 카투사하사관으로 왜관 캠프캐롤에서 복무하던 1965년 여름, 폭우로 전방의 미군진지에 피해가 발생했다. 내가 소속한 미44공병부대가 화물열차에 장비와 C-레이션을 잔득 의정부로 향했다. 한강을 건너 동부이촌동을 지나게 되는데 철로주변이 온통 판자집들이라 천천히 달리게 되었다. 미군 화물열차를 보고 아이들이 달려 나와 무엇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화차 뒤 칸에 잔득 실린 박스를 풀어 무조건 밖으로 던지게 했다. 그것은 그냥 싣고 갈뿐 그 숫자나 처리에는 무관심 할 정도로 물자가 풍성했고, 화차에 실린 것은 내 책임으로 처분할 수가 있었기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맘껏 인심을 써버렸다.의정부역에 도착하여 트럭에 옮겨 타고 달려간 곳은 경기도의 끝자락 운천이었다. 그곳에는 캠프 카이져라는 병영에 미7사단의 1개 여단이 주둔하고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리틀타이거라는 태국군 부대가 있었다. 캠프내의 제반시설이 왜관 캠프캐롤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서울에도 잔디구장이 없을 때인데 야구를 즐기며 미식축구를 하느라 잔디가 넓게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C-레이션은 관심 밖이었고 식당에서 A-레이션으로 제때 조리해 주는 식사를 하면서 한 달여를 지내다가 왜관 캠프캐롤로 복귀했다. 1940대로부터 60년대까지가 미국의 최전성기였다. 해외주둔미군들에 대한 예우는 당시 미국의 중산층이 먹는 식단과 생활수준이라고 했다.미군들 식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이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훈련된 미군이 세계유일의 최강의 군대인 것을 식사에서부터 알아볼 수가 있었다.A-레이션(A-Ration)은 고정된 부대에서 일상적으로 빵을 굽고 계란, 고기류, 신선한 야채 등으로 조리를 해서 먹는 식사다. B-레이션(B-Ration)은 야외에서 집단으로 훈련을 할 때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단을 말한다. 나는 미군들과 문화탐방과 해수욕을 갈 때나 밖으로 외출을 할 때 식당에서 싸주는 점심을 가지고 다녔다. 아무데서나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와 종이팩에든 우유나 주스, 오렌지나 사과를 봉투에 넣어 다녔는데 그런 게 B-레이션이었다.C-레이션은 문자 그대로는 전투를 할 때 먹는 비상식량이다. 미군은 195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는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한 박스에 12개가 들어 있었다. 간단하게 한 박스만 가지면 참호에 들어가 조리를 하지 않아도 골고루 먹으면서 나흘이상 싸울 수가 있었으니 대단한 아이디어의 전투식량이었다.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그것이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식량이었지만 베트남인들이 더 좋아했고 베트콩들에게도 이상적인 전투식량이 되는 생명줄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미군들의 보급기지 캄란에서 그것을 트럭이나 큰 트레일러로 싣고 나오다 샛길로 빠져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게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결국에는 베트콩들의 전투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군과 적이 미군의 전투식량을 나누어 먹으면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나는 베트남에서 얼마간 보급차량을 호송하는 칸보이 소대장이었다. 처음 나간 작전이 C-레이션과 철조망, 판자, 양철, 모기장 등을 12대의 트럭에 싣고 캄란에서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는 팜랑까지 운송하는 작전이었다. 선두의 지프차에는 나와 운전병 이외도 뒤좌석에 기관총사수와 또 한 명의 무전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위장한 철모에 미제 방탄조끼를 입고 완전무장으로 출동을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가장 위험하고 적의 타깃이 되는 것이 바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 차량의 선두호송차량이었다. 각 트럭에는 운전병과 조수가 M16으로 무장을 한 상태로 식사용 C-레이션을 싣고 다녔다. 정글사이나 들판을 지나 해안가로 가는 곳도 있었지만 도로의 사정이 좋지 않아 기습을 받을 우려가 많았다.어느 날은 캄란에서 17대의 차량에 C-레이션과 보급품을 실고 투이호아로 가는 작전이었다. 캄란기지를 벗어나 해안가에서 휴식을 하게 되었을 때 선임하사관이 소대장님을 위하여 특식을 만들겠다며 수류탄 투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요청했다. 조심하라고 허락하였더니 바다로 흐르는 물에다 수류탄 몇 발을 투척하여 숭어를 잔득 건져와 전투식량에서 나온 소금을 쳐서 구워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요즘도 그때의 정경이 가끔 떠오른다.투이호아는 백마부대가 맹호부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북쪽으로 지형이 험난한 곳이라고 했다. 차량 17대를 이끌고 백마사단사령부가 있는 닌호아의 해변 야자수 아래에서 C-레이션으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해풍을 맞으러 놀러 나온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자니 전쟁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장거리 소풍을 가는 것처럼 투이호아를 향해 이동하는데 해안이 끝나면서 큰 산악이 앞을 가로 막았다. 간이역이 있는 마을 앞 철로에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베트콩들에게 당한 기관차와 객차가 넘어져 불에 타고 있었다. 일단은 경계를 하면서도 병사들은 비슷한 광경을 늘 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우리는 차량들을 세우고 경계를 하면서 마을로 들어갔다. 우리가 온 것을 보고 몰려나온 어린아이들과 주민들에게 C-레이션을 나누어 주면서 야자수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총으로 쏴서 따먹으라는 것이다.선임하사관과 고참병들이 M16을 냅다 쏘아 올려 야자수열매를 몽땅 떨어뜨렸다. 온수가 되어버린 수통의 물 대신 시원한 야자수액을 양껏 마시고 몇 개씩을 챙긴 다음 대관령 같은 험준한 바위산 길에 접어들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베트콩이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을 해올 것 같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여 꼼짝없이 당했구나 싶어 순간적으로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첫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이르면 오히려 차분해 지고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가 싶었다. 내 지프차에서도 기관총이 발사되면서 커브를 도는데 아군 뒤를 돌아보니 헬기가 기총사격을 해대는 게 보였다. 내 뒤로 보급차량이 오리새끼들처럼 따라오고 있었다.베트남에서 돌아 온지도 반세기가 다 됐다. 6·25 전쟁까지 심하게 겪은 탓에 늘 먼 곳으로 피하고 싶어져서 깊고 낮설은 산을 찾아 오르며 C-레이션을 떠 올린다. 적이 공격해 올 것 같은 생각에 경계를 하며 계절과 웬만한 날씨에도 산행을 하면서 배가 고파 도시락을 먹을 때면 피난 때의 치열한 전황을 떠올리게 된다.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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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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