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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얼마 전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두 사건을 접하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엄청난 실망에 허탈해 한 일이 있었다. 형을 마치고 출소하는 기업의 총수가 성경책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 이제 많이 달라졌겠지, 앞으로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언론으로 듣는 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객을 맞이하느라 성경을 얼마나 읽었겠는가?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소위를 살피고’ 성서의 교훈에 흠 뿍 빠져보는 기쁨을 누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옥토의 교훈을 주실 때, 어떤씨는 길바닥에, 또는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얻는다고 하셨다.이 말씀 후 예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4:23) 하였는데 “아하 들을 귀가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오늘 한국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수없는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있지만 말씀을 듣고 있지 만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되겠느냐? 는 음성으로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 교회는 1960대를 지나면서 수량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교계의 현실을 직시해 보면 들여다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랑스러운 몸집을 불렸지만 실망감도 감추기 어렵게 되었다.개 교회들이 교세가 교단의 힘을 능가 한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계 단체가 대형 교회들의 재정을 기대고 장소와 시설을 빌려 교인 동원의 신세지고 있다. 이렇게 개교회주의가 성행 하면서 상납금에 의존하는 연합사업은 대 사회적인 사업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연합사업은 사회와 교계에 공인 받아 위상을 높이는 한편 타 교단과 교류 협력함으로써 자 교단의 발전을 모색해 가야 한다.이러한 현실은 연합사업 안에도 부정적인 요소가 끼어들기 마련이어서 금번 총회에서 드러 난 연금 재단의 영구화 술책이 시행 전에 들어난 사실만 보아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세속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자격 미달의 인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심심치 않게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는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선한 양이 분별없이 푸른 초장만을 탐하여 덤벼드는 것과 같이 인간이 선, 악의 구별이나 참 과 거짓의 판별도 없이 이기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의 그 물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이 참으로 신앙의 위기요 교회의 파멸을 부르는 듯하다.언제 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재벌의 힘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배려되고 있다. 진실의 자리는 사라지고 재력과 명예만이 판을 치게 하는 오늘 교회 안은 눈물겨운 영혼들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현실의 왜 보지 못할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오늘의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서기 보다는 세속적인 부에 편승하여 보다 편하고 보다 귀족적이 되려고 하는 것 아닌가. 비신앙적이고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의 본산이 교회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라고 지적한 언론인의 말에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을 보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돈 많은 부자 젊은이가 예수를 떠날 때에도 예수는 그를 붙들지 않으셨다. 오히려 연민에 찬 눈빛으로 동정 하셨을 뿐이다. 교회는 금력의 힘 보다 진실이 우선되고 믿음이 우선인 천국 건설의 모형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어린 목동에 불과한 다윗을 통하여 골리앗을 쓰러트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는 이러한 교회야 말로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원동력으로 쓰임 받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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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6
  • 죽음의 단상!
    죽음에는 자연적인 죽음, 또는 형벌로서의 죽음이 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모든 육체적인 요소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죽음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신다.(삼상2:6)고 하여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죽음에 대해 초연한척 하여도 막상 내게 죽음이 다가오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기대 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사는 것만 생각하고 노력하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죽는다는 것만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질병과 각종사고 그리고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남녀, 노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때와 장소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시도 때도 없이 평등하게 다가온다. 죽는 모양은 각각 다르겠지만 사람에 따라서 죽음을 맞는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불안과 공포가 없이 평화와 희망의 빛난 얼굴로 잠자리에 든 것 같은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복스러울까? 봄에 싹을 티 우고 여름에 무성 했다가 가을에 씨를 맺는 것과 같이 인생도 그때를 대비하여 푸름을 유지 할 수는 없는 것일까?그러나 잎만 무성해서는 안된다. 알이 차야한다. 알찬 영혼은 무르익은 실과 빛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법이다.생일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있다. 생일 집에서 보다 초상집에서 인생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사람은 결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과 이해와 관심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정신적인 압박과 배신을 당하게 되면 괴로 와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타인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든지 또는 배신을 하는 경우에‘짐승 같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얼마 전 서울 공원에서 사육사가 먹이를 주다 사자에게 물려 세상을 떠난 것이 떠오른다. 이 잔인한 짐승을 욕해서 무엇 하랴? 그 사자가 자기에게 양식을 먹여 주던 고마운 사육사를 왜 해쳤을까? 사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진정 우리 자신을 돌아 볼 때에 너무나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인간도 인간끼리 서로 물고 먹으면 희망이 없게 된다.거기는 오직 파멸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증오하고 배신을 일삼으면 결국은 총살된 사자처럼 자기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죽게 된다는 사실(갈5:15)분열 아집 편견. 죄로 얼룩진 '나'라는 무덤, 사랑과 평화가 사라져 가는 '가정이라는 무덤, 신뢰와 빛을 잃어가는 학원 이라는 무덤, 노사 분규로 증오와 불신이 팽배해 가고 '직장 이라는 무덤, 권모, 술수와 당리, 당략이 난무하는 '정치'라는 무덤, 경쟁과 폭력, 빈부 격차에 흔들리는' 자본주의라는 무덤, 물질주의에 발목 잡혀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 라는 무덤 우리는 이런 무덤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변화 시켜야 하며 오직 사랑과 용서와, 배려만이 우리들을 연합케 하는 줄이 되어야 한다. 그 길만이 나도 너도 같이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평생 개척 교회를 섬기며 그 흔해 빠진 시찰 장, 노회 장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는 제대로 익은 과실 한번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키우고 조기 은퇴를 하였으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남 매가 잘 자라 큰 아들은 한 의사로, 둘째 아들은 의사로 딸은 교수부인이 되기까지 역경의 세월을 보내고 소천하신 목사님의 감동적인 일화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생각하며 밤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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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7
  • 광복 70주년과 기독교의 사명 - 이선규목사
    광복 70주년 행사가 지난주 민족의 광장인 시청 앞에서 타 종교인들이 보란 듯이 많은 인파 가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행사를 마치고 SNS를 통해 전해오는 내용들은 대교회 목회자들 위주로 진행된 점, 기도시간이 적었다는 점과 심지어는 순서 맡은 자들 중에는 가톨릭의 사제 복장을 한 것도 지적하기도 했지만 모처럼 보수와 진보를 넘어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참여 하였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대한민국은 해방 된지 어언 70주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너무 무나 신속히 자나 갔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8,15 민족 해방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남, 북 분단의 시련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동안 분단의 시련과 동족간의 대결 그리고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던 지난 70년은 꾸준히 나라를 지켜 오면서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선진 대열에 진입하게 된 것을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도 된다.우선 우리는 민족 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바이다.유독이 지구의 동반구 맨 끝 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것도 남, 북으로 갈라져 있는 대한민국 에서 기독교인의 인구가 성장해 왔다는 사실은 과히 기적의 역사라 하기에 과언이 아니다.지난 70년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정치사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 왔다는 사실을 인정 하면서 도 그 과정이 오늘을 낳아준 모태요 오늘의 현실을 항상 보게 하는 거울이요 미래로 나아 가게 하는 새로운 길목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밝은 마음과 아름다운 백성으로서의 한 동족이 자신도 모르게 남과 북으로 갈렸고 그래서 서로 미워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끝까지 간다면 양쪽 다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고 장담 할 수 없을 것이다.주여! 하나님 지으신 이 민족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북에서도 원하고 남에서도 원합니다. 그런데 방법이 다릅니다. 북에서는 무력으로 통일 하려하고 남에서는 대화로 하려 합니다. 우리는 화해를 원하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려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뼈아프게 겪은바입니다. 상대 적으로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를 즐기며 사는 남쪽이 먼저 북쪽을 안아 주려 할 때 더욱 그러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칫 북으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은 오해만 더 쌓이게 하 고 결국은 화해를 내민 손이 거센 저항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화해를 내미는 손은 언제나 화해를 갈망하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함을 압니다. 북한 당국은 지난 세월도 그러한 태도를 보여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 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세도 한번 돌아보게 하소서.우리 주변에는 남과 북 화해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모습들이 적지 않다. 그러한 모습들 가운데 특히 북한 이탈 주민들과 남 북 이산가족의 삶 그리고 북한 주민의 실상은 남 북 화해의 주체인 우리가 꼭 알고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들이다. 이들 삶의 실상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과 이해의 실태도 주목해야 할 부분 들이다.역사를 보면 한 나라의 발전과 성장은 대개 1세기동안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풍요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갑자기 한 민족의 위상이 높아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불법과 사치로 치닫고 있으며 무절 제하에 달려가는 민족을 일깨우고 갈라진 교계가 복음 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 나갈 때 민족 화해의 통일의 과제도 능히 해결 되리라고 확신한다. 한국 교회가 이웃과 아픔을 나누어 희망이 되고 가진 자는 나눔을 실천하여 진보와 보수 세대 와 계층 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주여 전쟁 없는 통일 국가 이루어 주소서 일제 치하의 40년 공산치하 40여년 자유를 모른지 수많은 세월들 너무 길지 않습니까? 하나님 밤낮 부르짖는 주의 사랑 하는 자녀들의 기도 소리 들어 주소서 분단 70년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더 이상 아픔을 아픔으로 갈등을 갈등으로 원한을 원한으로만 보지 말라 그 속에 있는 뜻 그래도 너는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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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70년을 넘기지 마소서!
    “마음이 평안하면 초가집도 아득하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격언이다.평화는 마음의 문제에 속한다. 마음이 격동 되거나 욕심으로 가득해 지면 평화는 파괴 된다. 아무리 풍요로 와도 평화가 없는 곳은 사람이 정을 붙이고 살 곳이 되지 못한다. 한 번은 인도의 성녀로 알려진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고 한다. 일생을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 왔는데 그들이 죽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무엇 이었습니까? 수녀는 한 마디로 대답 하였다. "피스"(peace,)평화 라고, 어려운 시대 먹 거리나 병과 싸우 는 것이 우선 이라는 대답이 나올듯한데 그게 아니고 ‘평화’ 라는 것이다.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고달프게 하는 것은 다툼을 일삼는 것이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사람이 많은 국민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그러한 지도자 들을 둔 국민은 불행 할 수밖에 없다.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마5:9절) 예수의 복음의 진수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던 예수를 잡으려오는 자들에게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에게 책망 하시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마26:52) 엄히 경고 하셨다.이 말씀은 일제가 독립 운동가요 민족지도자였던 이상재 선생을 회유 정책으로 일제의 무기 창고를 열어 그에게 보여주며 소감을 묻는 일본 경찰에게 그가 한 말은 아무리 현대 무기로 잘 갖추어져 있어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대로 그 후 일제는 얼마 못가서 패망의 쓴잔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지난 20세기는 인류가 싸운 100년이었다. 전에 영국에서 발행한 ‘평화 속에 전쟁’이란 보고에 의하면 세계 2차 대전 후에도 100개국에서 130건의 분규가 있었고 35만 명이 전쟁으로 희생 되었다고 한다.그리하여 인류는 20세기 100년 동안에 세 가지 사실을 배웠는데 이데올로기보다 자유가 낫다는 것과 자원보다 두뇌가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것을 발견한 점이라고 하였다.대립이란 내가 너 보다 낫다.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는 우월감에서 나온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살자, 피차 돕고 의지하자. 함께 잘 되자는 형제애 정신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조물주 하나님께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과의 “공존”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아기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오신 평화의 왕이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오신 평화의 아기이시다. 모든 인간관계 근본은 적대 관계가 아니라 화해와 공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서로 양보하고 협조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경쟁 관계의 결과는 먹고 먹히는 것뿐임을 우리는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바이다. 이것을 가리켜 적자생존(嫡子生存)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결코 적자생존의 법 칙 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현재 남한의 모든 여건은 북한이 추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앞서 있다. 이제 분단의 고리는 끊고 사소한 일에 시시비비를 떠나 큰 자로서의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 형이 동생을 설득하듯 평화와 계절이 오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때려잡을 공산당’으로 가 아니라 피를 함께 나눈 형제로 내 자식을 죽인 원수로 보다 하늘에 제물을 드린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으로 이제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혔던 노예로서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고 만들어 가는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주여! 이제 한반도에 전쟁 없는 통일 국가 이루어 주소서. 북한 동포에게 자유를 주소서.일제 치하 40년 자유를 모른지 한 많은 세월 너무 길지 않습니까? 하나님 밤 낯 부르짖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울부짖는 통일의 염원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평화와 정의가 넘쳐흐르는 한반도가 되게 하소서.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 16:7) 우리가 먼저 양보와 관용을 보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평화 통일이 문 앞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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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30
  • 메르스와 영적 바이러스
    지난 5월 하순부터 광풍처럼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메르스’에 대한 공포분위기가 차츰 진정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되려는 시점이다.‘메르스’란 이름의 아랍형 독감이 한국사회의 경제·문화·정치권까지 온통 혼돈으로 몰고간 현상은 불과 1년 전 세월호의 참사에서 확인했듯이 한국 사회 내 적재적소에 필요한 책임적 리더십의 부재가 낳은 결과인 것 같아 더 안타까운 심정이다.메르스가 세간의 관심을 끌며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하던 6월 초에 경기도의 유명기도원의 부흥집회에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다.새벽시간의 강사로 초빙되어 부득이 1박하며 이틀간에 걸쳐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기에 기왕이면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을 마음으로 내 순서가 있기 전날 일찍부터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그런데 도착한 날 오후에 강단에 선 강사는 파격적인 옷차림의 젊은 사람으로서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집사님이 성경공부 하라는 유혹에 따라 갔다가 ‘신천지’라고 의심되어 공부하던 내용의 강의 녹음테이프의 내용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다.나는 의아해서 내 귀를 의심해 보고 설마 신천지 강사가 한국교회의 전통 있는 기도원 강단에 서있진 않을 것이라고 다시 생각하며 들어보아도 녹음테이프의 신천지 교리와 너무도 같은 내용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말씀이 끝나고 강단에서 내려오면 진위에 대해 확인해 볼 요량이었으나 파격적인 옷차림의 그 젊은 강사는 자기 시간이 끝난 후에 목사님들과 통상적인 인사도 생략한 채 간다온다 말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려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부흥집회를 주관하는 목사님께 “아니 신천지 강사를 어디서 데려왔느냐?”고 항의하자 “아는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유능한 목사라고 추천하여 자신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강단에 세웠다”는 석연찮은 대답을 들었으나 부흥집회를 주관하시는 그 목사님의 한국교회 내의 위상을 생각해 더 이상은 거론을 하지 않았다.다음날 내가 강사로 선 새벽집회를 마치고 낮예배의 강사를 강사 대기실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한국교회 내에서 생소한 얼굴로서 어딘가 어색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심정으로 혹시나 하여 어제 오후예배의 강사였던 한○○목사를 아시냐고 질문하자 그 대답인즉 “아 그 분이 아직 많이 미숙하시죠?”하고 대답하길래 내심 의아한 생각에 그 사람과 잘 아는 사이냐고 재차 추궁하자 무슨 낌새를 챈 듯 표정이 바뀌어 “잘 모르는 사이”라고 금새 딱 자르며 부정하는 것이었다. 석연찮은 마음으로 그 강사의 설교를 듣는 중에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강단 위의 그 강사의 설교내용은 신천지 교육용 녹음테이프 내용은 물론 어제 신천지로 의심되던 젊은 강사와는 본문만 다르고 좀 더 세련된 어휘를 구사하는 것 외에는 너무도 똑같은 신천지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었다.이 강사는 좀 더 대범해서 목사님들이 장기금식 중인 금식기도원 강단에서 “이따위 금식 아무쓸데 없는 짓이니 모두들 금식 깨고 기도원에서 내려가라”고 선포하며 한국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신천지 강사들로 보이는 그들의 특징은 한국교회 내에서 그들의 언변은 세련되고 능란하며 한국교회 기존 목사님들처럼 위장하기 위해 사도신경도 외우는 척하고 방언을 하는 척도 하지만 아직은 상당히 어색하고 적진에 고립된 병사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또한 그들의 강의내용도 대동소이하고 유사한 것은 편협한 그들의 교리를 집중적으로 반복습득한 후 들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광범위하고 다양한 교리적 해석을 찾아볼 수 없고 그들 교주의 지론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한계적 모습을 나타내보였다.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한국교회는 타락하여 더 이상 구원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심판 때에 목사들이 가장 먼저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를 뒤집어엎고 진정한 구원사역의 주체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그들의 주장은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기에 한국교회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장과 영적 부흥을 위해 영적회복을 추구하는 개혁자들의 열정어린 목소리와 분별하여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접할 수 있는 신천지 자체 신도들을 위한 교육내용을 보면 그들은 교육을 시작하면서 한국교회를 향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라는 구호로 수차례 복창하고 “영적 알곡들은 한국교회 내에 있으니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서 “이리의 옷”을 입고라도 한국교회에 침투하여 추수해야 한다고 교육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개교회의 주보내용을 분석하고 그 교회 목회자의 설교성향 등을 참조하고 새신자 양육시스템 등에 접근하여 한국교회를 함락시킬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인 것이다.메르스와 같이 경험해 보지 못한 바이러스의 공격에 한국사회가 흔들리고 대외적인 신인도가 하락하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져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소중한 생명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정부와 관계부처가 철저한 예방책을 세워두어야 할 것이다.영적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인 신천지는 알곡을 추수한다며 하나님의 선량한 백성들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는 일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훈련된 강사들의 신분을 위장하고 사이비 교단의 총회장 신분 등으로 포장하여 한국교회 강단을 아예 접수하려고 나서고 있는 현실이다.이제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계 3:18)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하여 한국교회 강단을 능멸하는 영적 바이러스를 색출하고 그들의 전략에 적절히 대응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연약한 영혼들을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에 한국교회 모두가 합심하여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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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터가 무너지고 나면 - 이선규 목사
    누구나 흔들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흔들리면 순간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날들이 다가 오고 있다. 이미 땅이 흔들리고 공중에서 바다에서 그 징조가 보이고 있다.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선진국이라 믿었던 그리스에서 구호 물품을 타기 위해 줄을 서있는 모습이 남의 나라일 같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경제가 흔들리고 도덕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 내일의 일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교회는 흔들리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교회마저 흔들리고 있다. 개척 교회가 예전 같지 않다고들 아우성이고 중형 교회도 전도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고 대형 교회들조차 교회 내분으로 인한 진통이 만만치 않은가 보다.그러면 왜 교회가 흔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기초가 바르지 않아서 그렇다. 찬송가 가사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삭 위에 세운 교회 흔들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라는 가사처럼 올바른 기초 즉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감히 누구인들 흔들자가 없다.이러한 교회가 흔들림이 있다면 무엇인가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얕은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역사 소설을 읽다보면 다음과 문장이 흔히 나온다.'말발굽에 밝히는 자 부지기 수더라 “전쟁을 하다보면 한쪽은 승승장구요 또한 쪽은 그 ◎⃝기는 상황에서도 일패도지(日敗途地)라 표현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름 없는 무명초로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회고해 볼 여유조차 없이 먼지 속에 휩싸인 채 사라지는 모습이 서글픈 심정이었다. 승승장구 하던 군사들도 어느 때 인가는 패잔병의 신세로 전락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구가하던 영웅호걸들도 한순간의 실수나 잘못된 판단으로 별 수 없이 무 그 모든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목불인견 이었다.느헤미아 5:5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제 아들 딸 들을 종으로 팔아먹는 신세다. 딸들이 짓밟히는데도 우리는 어떻게 손쓸 힘이 없구나? 귀향 이후의 이스라엘의 재건과정에서 겪었던 사회 불의에 대해 부르짖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자. 정치에 있어 그 불의는 차마 귀담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다. 그리고 정치에 몸담고 있는 선량들은 그런 불의에 불감증 증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일반 서민층들은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액수의 돈들로 불의를 자행 하면서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으니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진리의 터전위에 세워진 교회조차 정의와 하나님의 의를 외치는 소리는 모기 소리만큼이나 듣기가 어려운 시대라면 과언이랄까? 불의에 대해 외치는 자 보기 힘들고 오히려 그들의 불의한 헌금의 출처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축복의 음성은 크게 들리는 듯하다.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독일의 본 회퍼는 불의와 비 진리에 맞서 싸우다 기득권자들의 음모에 죽어가면서도 그 진리를 사수 하였는데 오늘에 그러한 예언자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이 시대의 부정과 부패에 과감히 대처하며 날카로운 도덕적 판단력을 가져야 함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이며 절대 다수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경외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왜곡된 역사의 흔적을 후손에 물려주지 않아야 할 자의 의무이다.시편 11:3절에서도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꼬 하였다”. 터가 무너지면 자칭 의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할 일도 없는 천박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동성애 문제, 젊은이들의 탈선. 가정의 해체로 인한 신음 소리가 심상찮다. 터가 무너지기 전에 교회의 기초를 다시 돌아보자. 오늘아침 신문에 외래 종교에만 의존 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헌화한 영령들을 위해 청와대에 제단을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고 한면을 광고로 채웠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무너지기 전에 손볼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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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8
  • 믿음의 에너지를 확산 시키자
    어떤 사람이 기차의 냉동 칸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문이 닫히는 바람에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 몹시 당황 했다.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열어 보았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낙심하여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상상하고 벽에다가 그의 마지막 글을 쓰기 시작 하였다. “나의 몸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 한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기 시작했다” “이 글이 나의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발견 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냉동 칸의 최저 온도가 58도에서 사람이 적응하기에 알맞은 온도 였다는 것이다. 그는 배가 고파서 죽은 것이 아니요 질식해서 죽은 것도 아니요 그는 공포에 쌓여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이 그를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하게 했다. 절망, 두려움, 불안, 공포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커다란 질병이다. 실제 메르스의 두려움 보다 이 공포가 모든 사람을 위축 시키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에 심각한 두려움을 갖고 살면 그 마음의 공포는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두려움을 예상 할 때 인간에게는 심한 불안이 나타난다. 이를 해소 하려해도 그 방도가 발견되지 않을 때 죽음과 같은 고민이 밀려오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서 ’불안의 시대‘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인 들은 불안과 공포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는 처절한 모습을 발견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처방은 없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여호수아1:9절)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범 브란트 목사는 그가 옥중에서 있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이 말씀을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 년 365일 동안 매일 같이 두려움에 쌓여 있는 인간들에게 성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두려워 말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안그래도 요즈음에는 걱정할 일이 정말 많다. 경제걱정 건강 자녀문제, 온통 걱정 투성이인데다 메르스의 공포가 더 우리를 두렵게 하고 있다.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쓸 에너지를 오히려 믿는데 쓰라고 하신다. 걱정 하는데 쓰는 에너지가 믿는데 쓰는 에너지와 똑같다는 사실을 아는가? 걱정과 믿음은 그야말로 말 한마디 차이이다. “오래 오래 장수 할 거야”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이 두 가지 말을 하는데 드는 에너지는 똑같다. 전염병에 전염 될 비율은 하루에 국내에서 교통사고 만큼 정도의 환자가 있다고 한다. 두려운 일에 골똘히 생각하지 말고 믿는 일에 에너지를 사용하자. 두려움을 멈추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제 인생은 당신의 장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제 발 걸음 하나하나를 인도하고 게신 줄 믿습니다” 당신은 믿는 이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걱정 하는데 낭비하고 있는가? 긍정의 에너지를 전염 시키자.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근심 걱정 부정적인데 태도 역시 전염성이 강하다. 어느 심리학자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충격을 가할 거라는 말을 들은 후 부터 충격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뇌파가 측정 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다른 방에서 실험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뇌파도 측정 했는데 그들은 전기 충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과 똑같이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보기만 해도 그와 동일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 실험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버리라 부정적인 영화를 마음의 스크린에서 지워 버려라. 리모컨은 당신의 것이다. 라고 알려준다. 오늘 아침 외출을 하니 어제 보다 마스크를 착용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까운 병원에도 메르스 환자가 있다더란다.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다. 소문이 자자하고 공포의 에너지는 퍼져간다. 조심은 하되 두려움과 공에서 벗어나자 믿음의 에너지를 확산 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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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8
  • 6월을 생각하며
    우리나라를 보며 주변국에서 흔히 ‘선진국’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기왕이면 낙후된 나라의 국민보다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느 정치인의 책에서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쓴동의를 보내었다. 첫째 경제적으로 삶의 차원에서 모자람이 없어야 하고, 둘째 정치적 제도와 실천의 발전이 있어야 하고, 셋째 정신적 기반의 차원에서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중에 세 번째 항목에 들어 있지만 본인은 정신적 기반의 건실성 여부에 따라 경제 문제도 정치 문제도 다 연결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또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만난다. 세상이 급속도로 발전 하다 보니 생활에 편리한 점들이 많아 좋다. 그렇다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 좋은 세상일까? 현재 기독교인의 숫자는 불교 다음으로 교세를 자랑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신뢰 지수는 계속 하락 추세로 흐르고 있으니 참으로 어느 때 보다도 우리 기독인들의 자성이 필요한 때이다. 어떤 이들은 물질에서 만족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 보다 현재의 가장 큰 위기는 불신이다. 신의가 인간 사회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이라고 로마의 장군 카르타고는 일찍이 말했고, 링컨은 정직이 최고이다라고 말했다, 인간 의지란 특히 성도의 저력은 역시 정직과 신의가 자본이 되어야 한다. 조작해서 중상하고 모략하는 악습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에게 ‘여러분, 돈 벌고 잘사는 방법은 세 가지가 먼저 확립되어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말의 신용, 말의 정직, 말의 공신력 을 갖도록 노력하자. 신의의 한국을 세우자, 민족의 공신력은 국가의 번영과 발전의 기본이 된다고 믿는다. 무엇이 인간의 위기인가 서로 불신하는 것이라고 철학자 야스퍼스는 말한다. 너도 나도 인간 보증 수표가 되어야 한다. 잠언 11장 1절은 바로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사회요 국가가 이겠는가? 특별히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백성들이 가지는 신뢰도가 어느 정도일까? 여기에 기록하지 않아도 국민이 판단하리라고 본다. 위정자들과 백성간의 신뢰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국가나 사회는 결속되고 발전되기 마련이다. 진실을 말하고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런 풍조가 정착이 될 때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더욱 빠르게 진행되리라고 확신한다. 거리를 지나다가 ‘아직도 세월호 해결되지 않았습니다’라는 퇴색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직도 저런 구호냐고 푸념을 할만도 한데 진실을 규명 하는 데는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묻혀 져서도 안 되고 잊혀 져서도 안 된다. 결코 그러한 사회나 국가는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국가의 기초는 경제력 보다 정신적인 기초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전쟁 무기인 ‘낫’을 국민복지를 위한 생산 도구인 ‘쟁기’로 만들어 라는 미가의 음성은 오늘 우리들에게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고 정부와 국민 사이에 불신의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앞장서고, 교회가 이 사회의 신뢰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때 이 민족은 통일을 이루어 내고 민족의 저력으로 선진조국을 이루어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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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0
  • 이선규목사-가정 수호의 중요성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최초로 인간에게 창설해 주신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가정에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고 끝이 난다.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즐거운 가정은 일찍 맛보는 천국“이라고 했다. 사회관계 속에서 상하고 깨진 상처들을 가정의 사랑 공동체를 통해서 치유 받고 쉼을 얻는다. 가정에서 진실한 인격이 형성되며 재창조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의 붕괴가 악성 종양처럼 우리 사회를 좀 먹어가고 있다. 이 시대의 최대 과제가 있다면 건강한 가정의 회복일 것이다. 엘빈 토풀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우리는 눈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과 정보의 홍수시대를 맞이하여 감각적인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혁명적인 일들이 계속 증가하는 것을 체험 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오늘의 현실은 기존의 가정의 개념이 무너져 가고 있다.많은 청소년들이 문자 메시지 E메일 외곡 된 인터넷 문화로 채팅을 통해 쇼핑과 오락 등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이런 문화 속에 생활 하다 보니 문화와 언어가 서로 다른 이방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였다.가정의 원초적인 결혼 인식은 전통 적으로 죽음에 의해 나뉠 때 외에는 해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왔으나 쉽고 빠르게 가정이 해체의 위기를 낳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의 가정이 핵가족화, 현대화 도시화, 되면서 자녀 감소 주말 부부 편부모, 재혼 가정, 기러기 가족 미혼모, 증가로 다양한 다문화 가정 형태를 이루어 가고 있다.이처럼 시대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 되면서 교회가 이런 세속화 환경들을 단 시일 내에 변화시키기는 역 부족일 지라도 교회는 이렇게 표류하는 가정들을 초청하여 하나님 말씀과 사랑으로 관심을 가질 때 가정이 회복되고 바로 서게 될 것이라고 확신 한다.결국 대 가족으로 부터 핵가족으로의 변화, 가정 내 생활, 가족 간 접촉, 시간의 감소가 가정교육 기능을 약화 시켰다. 더욱이 이혼율의 증가는 한부모의 수를 늘려 가고 있다. 모든 가정은 한 가정으로 부터 나왔다. 그의 생애와 그의 생활 능력은 그의 가정이 그를 어떻게 삶속으로 동행해 주었는가 하는 것에 의해 결정적 영향을 부모의 축복이 천대까지 이른다 함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시정해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가정에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처세훈의 제 일조는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가정은 지팡이가 되어주고 스페어타이어가 되고 간호사가 되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왕이 되고 왕비가 되고 공주병에 걸려있고 보스의식을 가진 가정은 안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밥은 굶어도 스마트 폰은 산다고 한다. 그것은 고독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오늘 불행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애정결핍증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정은 대화를 강화하여 애정을 공급 하여야 한다. 물이 수도 파이프를 통하여 공급이 되는 것처럼 애정의 칭찬이라는 말의 파이프를 통하여 공급 된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자야 한다. 불평하는 자녀가 걱정이 아니라 입을 다문 자녀가 더 무서운 자녀로 다가온다. 가정은 벗은 몸을 보이는 곳이고 그릇을 깨는 곳이고 변을 보는 곳이고 화장 안한 얼굴을 보이는 곳이다. 이런 것들을 편하게 할 때 스트레스가 풀리고 안식이 오게 되어있다. 가정은 식당이나 여관이 아니라 서로가 웃고 울며 험한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에너지를 충전이 되어 지고 영혼과 몸이 쉬는 안식처가 된다. 대화가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언어를 주셨고 대화의 짝을 허락 하셨고 우리도 하나님의 바라심처럼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한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갈망해 보자 부부간 자녀와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갖자.바로 지금 우리 가정은 얼마나 건강한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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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 부모의 유산
    한번은 1979-97년까지 모든 주보를 한데 모아 보았다. 18년간 모은 주보의 두께가 정확한 20cm의 책이 꾸며 졌다. 이 주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때의 현황과 지금의 상황과는 많은 변화를 보게 된다. 내가 겪어 온 역대 목사님들은 박찬성, 최우열, 안동해, 이정복, 전태국, 목사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훌륭한 목사님들의 얼굴을 보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이 책을 펼쳐보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 왔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후손들에게 나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으니 너희들은 이 보다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유하고 이 주보로 본을 보여 줄 것이다. 이 주보 책이 유산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신앙의 증거이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보여 주고 너희들은 이 보다 더 두꺼운 주보 책을 작성하라 권면하고 전해 줄 것이다. 이것이 곧 유산과 동시에 유언으로 남길까 다짐해 본다. 우리 모두 훌륭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이글은 우리 교회 박규정 장로님의 부친께서 손수 쓰신 글이다 .유언은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기 전 하시는 마지막 말씀으로 보통 유언은 가족들이 고이 간직하여 그것을 실천 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부모님들의 유언을 무시하는 가족이나 자녀들은 없을 것이다. 현재는 세태가 많이 변하여 오늘의 젊은이들이 ‘유언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이해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를 창출 할 수 있는 마지막 말 이라고 사료된다. 그런데 아직 살아 계시기는 하지만 미리 자녀들에게 불후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참신한 유언을 만나볼 수 있어 수 있어 기쁘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주보를 잘 보지도 않을 뿐더러 집에까지 가져가 모아두는 경우는 더욱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런데 18년간이나 주보를 빠짐없이 모아 두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신앙의 성실성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근래에 보기 드문 사도행전적인 ‘사건’ 으로 기록 될 만한 사건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살펴 보자. 그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성도의 교재에 참여했다. 그들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었다. 그들은 예배를 목적으로 매일 성전에 모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간증을 보였다.이 주보를 읽어 보지는 못했으나 속에 담겨진 것들은 여기에 기술한 내용들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목회자들을 존경 한다는 내용들은 가르침을 잘 받았다는 것이고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사람들 에게 선한 간증이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마침 글을 쓰면서 어렸을 때 어머님이 모시를 짜서 얻어진 수입으로 성경책을 구해 주면서 ‘부지런히 읽어라’ 하시던 “그 말씀‘이 떠오른다. 목회를 하면서 바로 그 말씀이 있었기에 목회의 외도를 가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됨을 모친께 감사하고 ‘부지런히 읽으라’고 하시던 그대로 순종 하였더라면 더 좋은 목회자의 길을 걸었을 게 아닌가? 하고 후회가 든다. 이제라도 더 많이 성경을 읽으라고 교우들에게만 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늦은 후화와 함께 다짐을 해본다. 앞으로 한국 교회에 이러한 유산 물려주기 운동이 활화산 같이 타오르게 되기를 소원한다.교회의 신뢰가 상실 되어가는 아픔 속에서도 이러한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희망으로 떠오르게 되리라고 확신 한다. 오늘의 기독인들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너희는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명령을 지키도록 하라는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나는 후손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길 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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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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