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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9
    지방교회란 말은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이름을 둔다는 뜻 지방교회 (local Church)지방교회의 생성과정지방교회(local Church) 또는 회복교회라고 불리우는 이 교회는 20세기 초 중국의 복음전도자 워치만 니(니토셍 Watchman Nee, 1903-1972)와 그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이다. 지방교회란 말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모두 각 도시 중심의 지방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즉 고린도 시에는 하나의 ‘고린도 교회’가 있었고, 에베소 시에는 하나의 ‘에베소 교회’가 존재했다는 식이다. 이에 따라 지방교회 역시 각 도시에 행정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교회를 둔다고 해서 생겨난 것이 지방 교회이다. 이는 워치만 니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주의(還元主義)를 주창했기 때문이다.워치만 니는 많은 책을 썼으며,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집회와 훈련을 개최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북부와 남부와 동남아 등에서 교회들을 세웠는데, 그 숫자는 1949년 중국의 공산 혁명 전까지 무려 600여 개나 되었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중국 공산혁명 이후 1952년에 공산당에 체포되어 20년간 감옥생활을 하던 끝에 순교했다. 워치만 니의 제자인 위트니스 리((이상수 李常受, 1905-1997)는 1949년에 니에 의해서 중국에서 대만으로 보내어졌다. 위트니스 리는 대만을 중심으로 사역했으며 필립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교회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196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엔젤레스에 교회를 세웠다. 한국에는 1966년 왕중생(권익원)에 의해 시작되었다.현재 한국에는 180여 개의 교회들과 3만 여명의 교인들이 있다. 특히 교육기관인 전시간 훈련원(대학원대학교 수준)이 용인 신갈에 있는데 1996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1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 지방교회 출판사인 한국복음서원에서는 2020년 3월 초에 회복역 성경전서를 발간했다. 교회 직제 ‘목사’대신 ‘장로’가 지도자중국의 자생교파인 지방교회는 교회의 직제에 '목사' 제도를 두지 않고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복수의 ‘장로들’로 구성한다. 이들이 곧 개교회의 ‘목회자’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플리머스 형제회에서 유래한 ‘주님의 상’을 중심으로, 매주 성만찬을 실시한다. 성만찬은 주님의 인격과 관련된 찬송을 부르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떡과 잔을 회중에게 돌린다. 그리고 만찬집회에 이어 고전 14장에 있는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위하여 하라”(26절)는 말씀을 따라, 미리 기도하고 준비한 성도들이 각자 서로 권면하고 함양하고 격려하고 교육하고 성경을 해설하는 짧은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신언’(神言, prophesying)이라 한다.지방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 전개 과정그런데 1980년 미국의 이단연구기관인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 대표 월터 마틴)가 “신흥 이단들”(The New Cults)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미국으로 갓 건너온 지방교회를 이단성이 있는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CRI는 월터 마틴이 쓴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라는 제목 아래 삼위일체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모달이즘(modalism, 삼위 양식설)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 위격의 세 가지 측면 중의 하나이며, 아담은 생명나무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먹지 않고, 지식의 나무로 대표되는 사단을 택해 먹음으로 죄를 짓고 “사단의 화신”이 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또 월터 마틴은 “지방교회는 스스로 유일한 참교회라고 가르칠 뿐 아니라 그 교회가 보통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런 성격의 교회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며, “지방교회가 정통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근거는 순전히 이 CRI의 월터 마틴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종교가 이 CRI의 기사를 번역해 실은 이유는 당시 구원파의 권신찬 목사를 비판하는데 사용된 것이다. 즉 권신찬 목사가 워치만 니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이용한 것이다.미국 CRI의 “우리가 틀렸었다” 특집기사 발표그런데 1980년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발표한 CRI가 2010년 CRI저널 신년특집호를 통해 지방교회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들과 함께 6년동안 면밀히 검증해본 결과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장문의 특집기사를 싣고 지방교회측에 사과했다. CRI는 수백 권의 책과 논문과 교회문서와 음성자료와 영상물을 조사 연구했으며, 매우 신중하게 평가하기 위해 법정자료들까지도 참고했다. 이들은 미국과 중국 등 각 나라에 있는 지방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 면담하였고, 그러한 연구결과에 지방 교회를 재평가했다. 그들은 풀러신학대학과 리전트대학, 아주사 퍼시픽대학 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연구 결과를 ‘지방교회 운동에 대한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30년 전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시인한다”고 밝혔다. 특히 1970년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할 때 참여했던 미국의 유명한 이단연구가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는 지방교회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다음과 같이 재평가했다.첫째, 당시에는 지방교회에 관한 영문 출판물이 많지 않아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했다.둘째, 지방교회에 대한 접근이 상당 부분 어려움이 있었다. 셋째, 사용 가능한 인쇄물이 대부분 방어용도 아니고 변증문도 아니어서 판단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지방교회에 “우리만 오직 하나뿐인 참교회이다”라는 배타주의적인 가르침이 있는 줄 알았으나, 후에 자세히 관찰해보니 “모든 참된 믿는 이들과 같이 우리는 하나의 참된 교회일 뿐이다”라는 포괄주의적 가르침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교회의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또 CRI 대표 행크 헤너그래프(Hank Hanegraaff)는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말처럼 하기 힘든 말이 없지만,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방교회들은 광범위한 교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합당한 교리(정통성)와 합당한 실행(건전성) 모두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자유를 갖고, 다른 모든 것들에서는 자비를 베풀라’는 격언대로 전진한다”고 밝혔다.지방교회는 환원주의 교파지방교회는 신교(新敎) 가운데 초대 성경 안의 교회로 돌아간 환원주의 교파에 속한다. 초대 사도시대의 교회에는 ‘목사’나 ‘주교’란 직제가 없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교회의 지도자였다. 사도시대가 지나고 속사도시대부터 교회의 지도자는 모두 장로였다. 지방교회가 ‘목사’ 제도를 부정한다고 하여 교회의 '목회' 직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교회를 각 지방에 행정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교회명을 둔다고 해서 ‘지방 교회’라고 불리울 뿐이다.그러나 그 교회명 아래 다수의 집회소를 둔다. 이 역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교회의 조직이나 설정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 될 수는 없다. 장로교 정치원리 ‘교회의 자유’에는 “어떤 교파 또는 어떤 교회든지... 교회의 정치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단은 성경의 해석이 보편적 교회의 해석원리에서 일탈했거나,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부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지방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는 성경해석의 문제나 교리적 문제라기보다 기성교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방교회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방교회도 세계 기독교의 한 일원으로 인정하고, 지방교회 역시 한국교회와 함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면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들로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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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기독교 역사의 부활절과 성탄절 논쟁 /강 춘 오 목사(발행인)
    325년 니케아공의회서 부활절 통일... 성탄절은 12월 25일 서방교회 주장 따라 부활절 논쟁 예 수님은 그 해 유대력 니산월 14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유월절 어린양(고전 5:7)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가 안식일이 지난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다. 이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날짜여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날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기독교는 이 ‘부활절 날짜’를 놓고 오랜 논쟁을 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대속의 죽으심을 중요시 할 것인가, 주의 부활일을 중요시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즉 부활절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주 중(7일) 어느 날이 되든지 유대력 니산월(첫달) 14일에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주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사도 시대가 지나고 주후 2세기에 이르면 교부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교회는 세 가지 절기를 지켰다. 그것은 유월절(부활절)과 오순절 그리고 주현절이 그것이다. 기독교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파스카 스타로우시몬(Pascha Staurosimon, 본 유월절)이라 불렀고, 바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일을 부활절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슬픈 날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곧 이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 동시에 이어졌다. 그래서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은 니산월 14일에, 유대교 유월절에 맞추어져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15일 해뜰 때까지 유대교의 유월절양 대신, 성찬과 애찬으로써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인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 그래서 이들은 ‘14일파’라고 불렸다.소 아시아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 교회는 기독교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의 날’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님이 죽으신 니산월 14일에 맞추다보면, 그 날이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니산월 14일에 맞추는 수난 기념일은 기독교의 부활정신과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어 동방교회(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와 서방교회(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 간에 부활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313년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자,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세계기독교공의회가 모였는데, 그 회의에서 조정된 것이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성경적 부활절을 주장한 ‘14일파’는 오히려 이단으로 몰려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그 때는 기독교가 지중해를 끼고 로마령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당시 세계교회가 통일했다. 그 전통을 오늘날의 세계교회가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그 런데 이 부활절 논쟁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에 관한 문제도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 초대 교회에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2세기에 이르러서는 차츰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아의 결정은 기독교 교회력의 독창성과 그리고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는데 있었다. 초기 기독교가 부활절을 ‘12월 25일 성탄절’과 같이, 어느 한 날자를 정하지 못한 것은 주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성탄절 논쟁예 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한 최초의 인물은 서방교부 히폴리투스(Hippolytus, 180년경)로 알려져 있다. 히폴리투스는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로부터 십자가 형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는 정확히 33년이며, 이 두 사건은 모두 3월 25일에 일어났다고 계산했다. 그래서 수태고지로부터 만 9개월이 되는 12월 25일에 예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155-220년경)에 의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4월 18일 또는 19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클레멘스는 19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요리문답학교 교장을 지낸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다. 그리고 또 3월 28일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한 기록이 없다.동 방교회는 4세기 초엽에 1월 6일을 예수의 육채적인 생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영적인 출생일로 지켰다. 예루살렘교회는 4세기 중엽에 예수의 출생(出生)과 수세(受洗)를 동일한 1월 6일에 기념했는데, 탄생은 베들레험에서, 수세는 요단강에서 기념했다. 베들레험에서 요단강까지는 약 30km나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를 하루에 기념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예루살렘교회의 주교 키릴루스(Cyrilius)가 로마의 주교 율리우스(Julius)에게 그리스도의 실제 출생일자를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다. 율리우스는 제사장 사가랴가 장막절에 환상을 보았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했다(눅 1:26)는 말씀을 연결해 12월 25일을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다. 또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이 된 것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12월 17-24일)와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제(冬至祭) 브루말리아(Brumalia, 25일) 축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농신제와 동지제는 민간에 너무 깊은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 축제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 동방교회 설교자들은 서방교회가 이교의 태양신 숭배 문화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25일의 축제는 서방교회가 주도하는 가톨릭 체제에 급속도로 수용되었고, 결국 16세기 종교개혁도 그 절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았다.이 런 이유를 내세워 환원주의자들은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가 기념해 온 12월 25일 성탄절을 기독교가 마치 이교(異敎)의 태양신 숭배사상을 받아들인 것인양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더우기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신이 깊은 어떤 교회들은 아예 성탄절 자체를 기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태양 위에 빛나는 '의로운 태양'(말 4:2)이다. 따라서 반드시 그 날짜가 확실한 것은 않을지라도 교회가 한 날을 정하여 그의 출생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온 인류가 함께 축하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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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28
    시리아 정교회·콥틱 정교회·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단성파 교단들 동양 정교회 (Oriental Orthodoxy)본 분파 이야기 6회(2019년 3월 22일) 단성론파의 분열을 다루었다. 그것은 단성론파의 네 지류, 즉 이집트의 콥틱파, 시리아의 야곱파, 레바론의 마론파, 아르메니아파가 그것이다. 이들은 고대 에큐메니칼 기독론 논쟁 당시 451년 칼케톤에서 모인 양성론 논쟁에서 단성론을 채택한 교회들이다. 이들을 동방 정교회와 구별하여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 혹은 ‘동양 정교회’(Oriental Orthodoxy)라고 부른다. 이 교회들은 칼케톤공의회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양성론(兩性論)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단성론(單性論)을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단성론파의 분열과 꼭지를 달리하여 동양 정교회라는 이름아래 다시 정리하고자 한다.1. 시리아 정교회(Syriac Orthodox Church)시리아 정교회는 안디옥(오늘의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오랫동안 ‘야곱교회’ (Jacobite Church)로 불리우다가 2000년 교회 회의에서 ‘시리아 정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성론파의 주교 야코부스 바라다이오스(Jakobus baradaios, 500-578)는 에데사 동부 델라에서 태어나 니시비스에 있는 파실타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542년경 에데사 주교로 축성되었으나 단성론을 지지함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에게 바라다이(누더기옷)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로마 군대의 체포를 피해 누더기옷을 입고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을 피신해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설교를 하고, 수도원을 세우고, 사제를 임명했다. 시리아 정교회는 지정학적으로 동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시, 찬송, 문학 등이 발달하고, 사제들은 독서와 기도와 명상 등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수행하며, 시리아어를 예배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중동의 이슬람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시리아 정교회는 1960년부터 WCC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시리아 정교회는 시리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 케랄라 주에도 시리아 정교회가 있다. 이를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Malankara Orthodox Syrian Church)라고 부른다. 이 교회가 고대 동방선교를 담당했던 사도 도마교회로 알려진 교회이다. 사도 도마는 1세기 중엽에 인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마는 처음에 북부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후에는 인도 남부 케랄라 주 코친(Cochin) 근방에 상륙하여 선교했다. 코친에는 당시에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 그 때가 주후 52년경, 그는 그곳에서 주후 72년 순교할 때까지 20여년간 동방선교에 주력했다. 도마의 신앙을 따르던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16세기 포루투칼 선교사들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신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교황의 통제 아래 있는 포루투칼은 인도 교회를 라틴 교회의 구조 안에 끌어들이기를 열망했다. 그리하여 포루투칼측은 1652년 3월 시리아에서 온 고위 성직자 아하탈라를 구금하고 고문했다. 이 일로 인도 교회 사제들은 1653년 1월 코친에 있는 마탄체리 성모교회에 모여 포루투칼 국왕의 지배에서 교회의 정신적, 행정적 그리고 자율성을 회복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이 오늘날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가 된 것이다. 이 정교회는 1948년부터 WCC에 가입했다. 2. 이집트의 콥틱 정교회(Copts)이집트의 콥틱 정교회는 주후 42년경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에 의해 설립된 교회로 전해진다. 그 때는 로마 황제 네로가 재위하던 시기이다. 마가는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차츰 이집트 원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이집트 원주민을 콥틱족이라 한다. 그들은 고대 파라오의 후손들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콥트(copt)라는 뜻은 ‘Egypt’를 이르는 말이다. 콥틱 정교회를 대표하는 총대주교좌는 알렉사드리아에 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아프리카 총대주교’라고 부르며 ‘교황’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다. 콥틱 정교회는 세계적으로 약 2000만명 정도의 신자가 있으며, 이집트에는 약 1500만명 정도가 있고, 나머지는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독일 등에 흩어져 있다. 이들 중에는 지식인과 상업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이집트의 콥틱 정교회는 기독교 세계에 두 가지 큰 공헌을 남겼다. 초기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는 가장 오래된 신학교육 기관이었다. 이 교리학교는 주후 190년경 판타내우스의 지도 아래, 아테네의 아테네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부 오리게네스 등 성경 주석과 비교학 분야에서 특출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단지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과학과 수학, 인문학 등도 가르쳤다. 다른 하나는 수도원이다. 3세기 안토니오(251-356)와 파코미오(290-346)에 의해 이집트에서 시작된 수도원은 사막 교부들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639년 이슬람이 이집트를 침공해 정치적 격변기가 있었으나 이집트인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으로 남았다.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는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믿도록 유도하기 위해 세금정책으로 콥틱 교도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콥틱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이집트 국민의 약 15%에 이르는 최대 그리스도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슬람 점령 이후 현대 했기까지 많은 박해를 받은 교회이다. 콥틱 정교회는 1948년부터 WCC에 가입했다. 또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본래 이집트의 콥틱 정교회의 지도를 받았으나, 1959년 콥틱 정교회 총대주교 키릴로스 6세에 의해 에디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총대주교좌를 갖게 되었다. 또 에리트레아에도 콥틱 정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1994년 에디오피아 정교회에서 독립하여 총대주교좌를 가졌다. 에리트리안 정교회는 2003년부터 WCC에 가입해 있다. 콥틱 정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에리트레아 정교회, 이 세 교회는 오리엔탈 정교회들과 상호 성사 교류를 하고 있으며, 다만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를 으뜸 주교로 인정하고 있다. 에디오피아(Ethiopia)에는 인구가 약 1억1950만명이고, 홍해를 끼고 있는 에리트레아(Eritrea)는 인구가 약 360만명인데, 에디오피아 교회는 교인수가 약 2900만명이고, 에리트레아에는 180만명 정도의 교인이 있다. 3.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아르메니아 정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교회는 사도 바돌로매와 다대오가 복음을 전했다는 전통에 근거하여 '사도 교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메니아는 계시자 성 그레고리우스가 주후 300년경 아르사키드 왕 타리다테스 3세를 개종시킴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제국이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 90년 전 주후 301년에 이미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교회의 지도를 받으며 시리아 문자를 사용했는데, 5세기에 이르러 성 메스로프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만들고 성경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했다. 이들은 506년 지방회의인 드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두 개의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칼케톤 공의회(451년) 의 결정을 반대했다. 그리스도가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된' 한 가지 본성(신성)만 가졌다고 주장하는 단성론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 교회는 정통파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이집트의 콥틱 정교회와 시리아의 야곱파 교회와 교제했다. 계시자 성 그레고리우스와 그를 계승한 처음 주교들은 에치미아진(Echmiadzin)에 총대주교좌 관구(교회 최고행정부)를 두었다. 그 후 485-927년까지는 드빈으로 옮겼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전전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총대주교를 '가톨리코스'(katholikos)라고 부르는데, 가톨리코스는 보편적 교회를 뜻하는 가톨릭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에는 교권과 정치적 이해 관계로 오늘날도 아르메니아 교회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가톨리코스가 있다. 하나는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의 최고 가톨리코스로서 에치미아진에 관구를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시스(sis)의 가톨리코스로서 현재 레바논 안텔리아스(Antelias)에 관구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전체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되는 사람은 에치미아진에 있는 가톨리코스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레바논의 안텔리아스에 있는 가톨리코스를 지원한다. 아르메니아 교회가 총대주교좌가 둘로 나누어진 것은 정치적 문제와 연관이 있다. 전통적으로 에치미아진의 총대주교 가톨릭코스가 현재 실질적인 최고 의장 주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동로마 시대인 1293년 킬리기아 수도 시스로 가톨리코스 관구를 옮겼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터키 동남부 킬리기아 지방엔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았을 뿐 아니라, 한때는 그곳에 아르메니아 왕국이 세워졌다. 그래서 이곳에 가톨리코스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는데, 이후 1441년 에치미아진에 총대주교가 다시 선출되었다. 총대주교좌가 에치미아진과 시스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후 1894년부터 3년동안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박해와 1915년 터키의 인종청소로 아르메니아인이 100만에서 200만명이 학살당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안 디아스포라와 함께 시스의 가톨리코스가 레바논 안텔리아스로 옳겨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이스탄불에도 총대주교청이 있다(사실상 총대주교가 넷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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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본으로 한 회중교회주의 신앙선언 채택회중교회주의 Congregationalism회중교회(會衆敎會, Congregational Church)는 특정 지도자가 중심이 된 감독체제 교회(에피스코팔처치)나 교인 중에 지도자를 선택해 교회를 치리하는 대의제 교회(장로교회)가 아니라, 전체 회중의 의견에 따라 교회의 결정과 정치가 이루어지는 교회이다. 이를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도 한다.회중교회주의의 역사회중교회주의는 17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운동의 한 부분에서 태동했다. 청교도운동의 목표는 영국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완성하는데 있었다. 이 가운데 회중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모토인 만인사제론을 실천하는데 큰 관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만인사제론을 지지한 올리버 크롬웰의 후원으로 165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죽고 난 후 그 세가 급격히 기울어져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폐지되었다. 그후 1689년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하고, 신앙의 자유 법령이 통과되어 비국교도들과 함께 회중교회주의자들도 관용을 얻게 되었다.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열정도 식어 18세기 전반에는 영국의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유명무실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활기를 얻어 1832년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회중교회연맹이 결성되는 중요한 전한점을 맞이했다.회중교회주의가 공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미국에서였다. 회중교회주의는 식민지시대 초기에 두 가지 형태로 미국에 심어졌다. 하나는 플리머스 식민지의 순례자들로, 자신들의 교회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국교회를 이탈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국교회를 자기들의 이상에 따라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미국의 회중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연합에 힘썼다. 19세기 초에는 장로교도들과 연합하기도 하고, 1871년에는 ‘전국회중교회협의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 협의회는 1931년 ‘그리스도교회총회’와 연합하고, 또 1961년에는 복음주의 개혁파 교회와 연합하여 ‘연합그리스도교회’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독일 루터파와 개혁교회의 배경을 가진 강력한 공동체로서 유명한 현대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나 폴 틸리히 같은 걸출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회중교회는 전세계적인 교회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영어권의 모든 나라에는 전파되었다. 회중교회는 1925년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형성되는데 도움을 주었고, 1947년 남인도교회 설립에 역할을 했으며, 1970년대에는 ‘국제회중교회연합회’를 통하여 네덜란드와 스웨덴 등의 형제교회들과도 유대를 다졌다.회중교회의 질서와 원칙들회중교회는 성서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선교에 항상 중요성을 둔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가 그렇듯이 세례와 주의 만찬 만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성례전으로 간주한다. 또한 유아세례도 인정한다. 주의 만찬은 보통 한달에 한 번이나 두 번 행해지며, 설교와 성례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회중교회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강조된다.1. 회중교회는 특수한 회중의 영적 자율성의 원칙을 중요시한다. 모든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같이 모여 종교적 명령들을 지키며, 상호간의 교화와 거룩을 조장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영존시키고 보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신자의 각 단체가 이러한 것을 목적으로 모인 단체이면 그 단체는 올바른 그리스도 교회임을 믿는다.2. 회중교회는 신약성서가 명백한 성문의 형식으로, 또는 사도들과 사도적 교회의 모범과 실천사항들로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조목들과 그리스도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필요한 질서와 원칙들을 담고 있다고 믿으며, 인간의 전통과 교부들과 회의들과 교회 법률과 신조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생활에 대하여 아무 권위도 갖지 않음을 믿는다.3. 회중교회는 교회의 기초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인으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교회의 역원목회자 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의 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다스리도록 임명을 받았으며, 또 그들이 종교적 신앙과 실천에 저촉되는 모든 질문들에 있어서 호소할 곳은 성서뿐임을 믿는다.4. 회중교회는 신약성서가 개체 교회마다 그 자체의 역원들을 선택하며 그 자체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권위에서 독립하며 또 모든 권위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음을 믿는다. <중략> 10. 회중교회들은 회원들이 한 몸의 지체들로서 서로서로 친교를 나누고 확대한 사랑을 즐기며 그리스도인의 일을 추진하는 것이 교회들의 의무이지만, 어느 교회나 교회 연합이 어느 한 개체 교회의 신앙이나 기강을 방해할 권한을 갖지 않으며, 다만 신앙과 기강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을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회중교회 신조1. 케임브리지 헌장(1648년) 케임브리지 헌장(Cambridge Platform)은 영국의 청교도 칼빈주의자들 중에서 회중교회 제도를 채택한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지 뉴잉글랜드 주로 이민해온 회중교회 정치 헌장이다. 이들은 이민 와서 회중교회를 세우고 1646년 9월 1일 최초의 노회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케임브리지 노회이다. 이 노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받아 회중교회 신조로 삼았으나 교회 조직과 행정은 회중교회 형식을 취했다.케임브리지 헌장의 특색은 개체 교회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개체 교회는 자발적으로 모여든 신자들의 자발적인 합의에 따라 조직되었는데, 그 합의를 계약이라고 불렀다. 이 계약은 단순히 계명에 따라 같이 예배하며 피차 형제애에 충실할 것을 담고 있다.개체 교회는 신앙고백이나 교리 문제에 있어 대체로 자유로워 타 교회나 노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개체 교회의 행정은 완전독립에 가까운 것이었다.처음에는 직제를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했으나, 나중에는 교사와 장로의 직제가 없어졌다.이 헌장은 제1장 교회 행정 체제, 제2장 개체 교회의 공동교회적 본성, 제3장 지상의 가시적 교회, 제4장 가시적 교회의 체제와 교회 계약, 제5장 교회의 권의 주체, 제6장 교회직제, 제12장 회원의 교회 가입, 제15장 교회들 사이의 친교 등이 명시되어 있다.2. 사보이 선언(1658년) 회중교회는 일찍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받았으나, 정치와 조직 면에서는 장로교와는 달리 개교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1648년 케임브리지 헌장에 이어, 1658년에 런던의 사보이관에서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 of the Congregational Church)을 발표했다.그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에 “복음과 그 은혜의 한도”라는 제목을 첨가하고 또 몇 가지 조항을 수정한 것이다. 그래서 회중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4장으로 되어 있다.제20장 복음과 그 은혜의 한도에 관하여 ① 행위의 계약이 죄 때문에 파괴되어 사람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선택된 자를 불러서 신앙과 회개를 갖게 할 방편으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약속을 그들에게 주기를 원하셨다. 이 약속에서 복음은 그 본질에 관하여 제시되었으며, 죄인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② 그리스도의 이 약속과 그로 말미암은 구원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또 그 말씀을 통해서만 계시되었다. 자연의 조명만으로는 창조와 섭리의 역사가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은혜를 발견하게 해주지 못하고, 다만 일반적 혹은 애매한 방법으로밖에 조명할 뿐더러, 그 약속과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계시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구원의 신앙이나 회개를 얻기는 더욱 어렵다.③ 죄인들을 위하여 주신 복음의 계시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복종을 위한 약속들과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선한 기쁨에서 나온 것이어서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적당하게 개선하기 위한 어떤 약속이나, 또는 자연적으로 받은 일반적 조명과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④ 복음이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의 외견적인 방편이며, 또 아주 충족한 것이지만 죄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거나 살아나고 혹은 중생하여 하나님에게로 가는데 충분하고 유일한 방편은 성령의 불가항력적이고 효과적인 역사 뿐이다.한국기독교와 회중교회미국 회중교회는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하바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윌리엄스 대학교 등 유수한 대학들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에는 1886년 회중교회가 창설되었으나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조합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을 전도지역으로 선정하고 서울과 평양에 조합교회를 설립했다. 이 조합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지원으로 유지되다가 1921년 다시 조선회중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합교회의 친일 행위가 문제가 되어 1945년 해방과 함께 해체되었다. 오늘날 회중교회주의 정치원리를 가진 교회는 ‘회중교회’ 외에도 침례교회, 그리스도의 제자회, 그리스도의교회, 형제교회 등 다양한 교단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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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6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7
    건물 교회당·전임 성직자 제도 부정... 예배형식 및 성례전 등 전통교회와 달라퀘이커(Quaker)그리스도교 분파 중에 ‘퀘이커’라는 특이한 교파가 있다. 다른 말로는 ‘종교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라고도 한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국교회에서 일어난 청교도운동의 한 일파로서 ‘떨다’ 또는 ‘진동하다’라는 뜻이다. 1650년대에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명상 중에 성령이 임하면 몸을 떤다는 것이다.조지 폭스는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치고 인도한다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특별히 구별된 교회당 건물이나 안수 받은 성직자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례전에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세례와 성찬이 아니라 영적인 세례와 성찬을 믿으며, 노예제 폐지, 사형제도 폐지, 집총거부, 절대평화주의, 금주령 및 남녀평등 등 혁신적인 사회사상을 주장해 초기에는 많은 박해를 받았다.창시자 조지 폭스와 퀘이커교도들창시자 조지 폭스는 청년시절 청교도그룹에 속했으나 칼빈주의 예정설과 원죄 개념에 회의를 갖고 방황하며 영적 도움을 찾아 여러 모임에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네 상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음성을 들었다. 그가 이 메시지를 전파하자 추종자들이 생겼다.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사전 준비 없이 예배를 드렸다. 심지어 정해진 설교자도 없었다. 성령의 인도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예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설교자로 삼을 것이라고 믿었다.퀘이커 운동은 영국 북부에서 시작하여 런던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유럽 지역과 신대륙 북아메리카로 퍼져나갔다. 초기 북아메리카의 선교활동의 중심지는 뉴잉글랜드, 뉴암스테르담, 롱아일랜드, 메릴랜드, 버지니아 등이었다. 후에 펜실베니아가 중심이 되었다.그러나 영국에서 청교도 성직자들은 기성교인들이 퀘이커에 심취해 가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퀘이커교도들의 예배형식은 충동적이었고, 청교도의 정통주의적 견해들을 거의 무시했다. 그로인해 ‘예배의식이 무질서하고 난잡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퀘이커교도들은 맹세도 하지 않고, 국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며, 국교회에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1662년 발표된 퀘이커 조례와 유사한 형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약 1만5천명이 이 법에 의해 처벌을 약 500여명이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당시 영국은 비국교도들에게는 공무원이 되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제한했다. 그래서 퀘이커교도들은 주로 상업이나 공업 같은 자영업에 종사했다퀘이커교도들에 대한 자유는 1686년 챨스 2세가 관용령을 내리고 1689년 종교적 관용법이 발표되어 영국에서 자행되던 극심한 박해는 그쳤으나 법적 제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퀘이커교도들의 검소한 생활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많은 지방에서 은행들을 세우는데 공을 남겼다. 퀘이커의 신앙 및 예배 퀘이커란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친우회’(Friends)라고 칭하며,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신성(神性)이 있으므로 이를 잘 기르는 법을 배우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퀘이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내면의 빛’이다. 그 빛은 양심이나 이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 빛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모든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빛이다. 그 빛은 인간의 양심을 깨우쳐 이성에게 다시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내적인 인도에 귀를 기우리는 경험은 신비적이고 공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빛을 따라 그의 말씀을 기다리는 모임이 예배이다. 성령이 말하는 것을 기다리는 자들과 예배자들의 침묵 속에서이다. 이 모임은 어떤 때는 어떠한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으며 완전히 침묵적일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이 모임은 참여자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준다.예배시에는 남녀가 구별 없이 말을 하거나 기도한다. 남녀의 동등한 자격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하는 증거를 그 모임 전체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여기고 숙고한다.15개 조의 신학 논제1675년 15개 조의 신학 논제로 발표된 퀘이커 신조는, 제1 지식의 참된 토대에 관하여, “모든 행복의 극치는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에 있다...” /제2 직접적인 계시에 관하여, “아버지를 알 사람은 아들과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여 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또 아들의 계시는 성령 안에서, 또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성령의 증거로만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 계시되어 왔고 또 되고 있으며 될 수 있는 것이다...” /제5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에 관하여, “한 사람의 죄인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살고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무한한 사랑으로 그의 독생자에게 빛을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제11 예배에 관하여, “하나님이 열납 하실 만한 예배는 어떤 장소나 때나 사람에게 제한되는 일 없이 하나님 자신의 성령의 내면적 및 직접적 감동과 이끄심을 받고 드리는 것이다...” /제12 세례에 관하여, “한 주, 한 신앙이 있드시 ‘한 가지 세례’(엡 4:5)가 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의 응답이다. 이 세례는 순수한 영적인 것 즉 성령과 불의 세례이며, 이것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힌다...”/제13 성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일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은 내면적 또는 영적인 일이며, 그의 살과 피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시는 사람들의 심중에서 성찬에 의하여 속사람이 커간다.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같이 계실 때 떡을 떼신 것은 이 사실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교 교파들 가운데 성례전을 외적 형식으로 준수하지 않는 교파는 퀘이커교 뿐이다. 퀘이커는 영적인 세례와 성찬을 믿는다. (구세군은 세례식은 ‘병사입대식’으로, 성찬식은 삼색 깃발 앞에서 신앙 다짐으로 대신한다.) 퀘이커 내의 분파 및 조직들퀘이커는 18,19세기를 지나면서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다. 첫째, ‘정통파’ 또는 ‘복음주의파’는 런던 및 아일랜드에서 연례 모임을 통해 서로서로 친교를 가졌다. 둘째, ‘보수파’는 퀘이커의 예배 및 복장 등 옛 형식을 지키며 연례 모임을 가졌다. 셋째, 미국에서 일어난 ‘힉스파’는 비교적 진보적 신학사상을 가져 다른 퀘이커교도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미국의 연회들은 친교 가운데서 퀘이커의 전통과 예배양식을 유지했다.퀘이커는 아프리카나 유럽대륙에 널리 확장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행한 구호활동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 등에도 새로운 연회들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이 이루어졌다.퀘이커교 연합회: 이 연합회는 1902년에 5년회(Five Years Meetimg of Friends)로 조직되었다가 1965년 연합회(Friends United Meeting)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정통파와 보수파 연회들은 힉스파의 진보적 사상을 경계했다.일부 정통파 교회들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조지프 존 거니의 영향을 받아 사역자가 사회를 보는 전통적인 예배형식을 채택했다. 이들은 내면의 빛보다 신조와 성서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활동과 선교프로그램을 전개했다.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이 단체는 사회사업과 공공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평화와 화해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1917년 미국과 캐나다 퀘이커교도들이 창설한 단체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도와 선택적 군복무 형태의 일환으로 구제사업 및 구급차 부대에서 일하도록 조치했다. 이들은 지역사회 발전, 인종화합, 전쟁 피해지역 주민에 대한 구호, 피난민 지원 등의 사업을 한다.퀘이커교 세계자문위원회: 1937년 미국에서 창설된 국제조직으로, 세계 모든 지역의 퀘이커교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방문, 회의, 연구 등의 활동을 장려하며, 퀘이커교의 여러 조직 및 활동과 연계한다. 이 위원회는 뉴욕과 제네바에 있는 UN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한국의 퀘이커교퀘이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55년 미국인 교도들로부터 포교되었다. 한국 퀘이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입신의 표적으로 세례와 성찬을 행하는 외에 특별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표기된 신조, 즉 신앙조문은 고정화 형식화 되어 살아 있는 신앙을 기계적으로 말살하고 생장(生長)을 막아버리는 위험이 있으므로 친우회(親友會)는 성문화 된 신앙조문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침묵 중에 하나님과 교통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모임은 만장일치로 사회자 1인을 선출해 회합을 갖는다. 모든 교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목사·장로·집사 등 직제는 따로 없다. 퀘이커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고대 에큐메니칼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프로테스탄트의 일파이다. 따라서 기성교회들의 직제와 예배형식 및 성례전이 다르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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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4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26
    재림교인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토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ts, Adventism) 역사적 배경 흔히 안식일교회라고 불리우는 ‘재림교회’는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영적 대부흥운동과 재림운동 이후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 재림과 안식일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교파이다. 교파의 공식 명칭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ts)에는 이들의 정체성이 잘 나타난다. 제2차 영적 대부흥운동은 1820년대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으로 절정을 맞이하였다. 1831년까지 계속된 이 부흥운동으로 뉴욕 주를 포함해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침례교 신자였던 윌리엄 밀러는 1816년부터 약 2년간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예수 재림의 시기를 특정한 후(시한부 말세론)에 재림운동을 전개하였다. 윌리엄 밀러는 다니엘서 8장 14절에 나타난 “이천삼백주야”의 예언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당시 학자들 중에는 이 예언이 1843년~1847년경에 마쳐진다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었다. 밀러도 이 예언 해석을 받아들여, 그 기간이 마치는 때에 “성소가 정결케 되는 사건,” 즉 “예수 재림”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밀러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뉴잉글랜드 지역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서 재림운동이 전개되었다. 1844년에 이르러 각 교파에서 5만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재림운동은 대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예정된 날짜인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몇몇이 실망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연구하였다. 그 중에 하이람 에드슨이란 사람은 이천삼백주야의 끝에 정결케 되는 성소가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늘성소”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1844년은 예수 재림의 날짜가 아니라 하늘성소가 정결케 되는 날이라고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리고 또 밀러의 재림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조셉 베이츠는 당시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제칠일침례교인들’로부터 안식일이 성경에 나타난 참된 예배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재림운동 당시에 17살의 소녀였던 엘렌 하몬(Ellen Harmon= 엘렌 G. 화이트, Ellen G. White라고 부른다.)은 재림운동이 하나님께서 이끄신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에 그녀의 남편이 된 제임스 화이트와 함께 실망한 재림신도들을 격려하는 활동을 하였다. 1846년 가을에 실망한 재림신도들을 다시 모아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 공동체가 재림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재림교회의 조직과 발전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신도들은 1848년부터 1850년까지 약 20여 차례 안식일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모임은 재림운동의 실망의 이유와 하늘성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안식일준수의 성경적 의미, 성령의 은사를 통해 주어지는 예언의 선물의 가치, 영혼의 조건적 불멸과 의인의 부활 등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함께 공유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일련의 모임을 통해서 재림신앙(Adventism)이 형성되었다. 엘렌 화이트와 제임스 화이트는 흩어진 많은 재림신도들과 재림신앙을 공유하기 위해서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1849년에 ‘현재진리’, 1850년에 ‘애드밴트 리뷰’를 출판한 후, 이 두 잡지를 통합해 1851년부터 재림교회의 공식기관지인 ‘리뷰 앤드 헤럴드’를 출판하였다. 이 잡지는 미국 전역에 흩어진 많은 재림신도들에게 재림신앙을 전파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잡지의 발행과 초기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을 포함해 미시간 주, 아이오와 주, 일리노이 주, 위스콘신 주, 미네소타 주 등에서 재림교회가 조직되었다. 1860년대에 이르러 약 3천여 명의 재림신도들이 이 지역에서 재림신앙을 받아들였다. 교인이 늘어나자 행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단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1860년에 교단의 명칭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약칭, 재림교회)로 정하고 본격적인 교단 조직에 착수하였다. 1861년에 미시간에 있는 교회들이 모여 최초의 합회(conference)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7개 지역에서 합회들이 조직되었다. 1863년에 이 합회들이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서 모여 대총회(General conference)를 조직하였다. 대총회는 전 세계 재림교회를 대표한다. 선교사업을 위해 교단 조직을 완성한 재림교회는 1866년에 의료사업을 위해 요양병원을 설립하고, 1870년대에는 교육사업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교단 선교체제를 구축하였다. 특별히 미국에서 시작된 재림교회는 1874년 최초의 선교사인 존 앤드류스를 유럽으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시작되기까지 미국을 포함해 유럽, 호주,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대륙에 약 8만여 명의 재림교인들이 생겼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재림교회는 237개 국가에 78,800여 개의 교회와 1848만여 명의 교인들이 있으며, 한국에는 700여 개 교회에 25만여 명의 교인들이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재림교회는 지역교회, 합회, 연합회, 지회, 대총회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지역교회는 등록된 교인으로 구성된 개교회이며, 개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과 선교회, 안식일학교, 구호봉사회, 청소년부, 어린이부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또 합회는 지역교회들의 연합체로 한국에는 동중한합회, 서중한합회, 충청합회, 영남합회, 호남합회 등 5개 합회와 제주선교협회로 조직되어 있다. 또 연합회는 상기 5개 합회의 연합체로 한국에는 1개의 연합회(일반 교회의 총회에 해당함)가 조직되어 있다. 대총회는 전 세계교회들의 연합총회로서 본부는 미국 매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위치해 있으며, 산하에 15개의 지회가 조직되어 있다. 한국은 북아시아태평양지회에 속한다. 재림교회 신앙의 랜드마크와 기본 교리 재림교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하늘성소와 재림 전 심판, 제칠일 안식일 성수, 성령의 은사와 예언의 선물, 조건적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등 다섯 가지 랜드마크로 이루어져 있다. 전천년적 재림신앙은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예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하실 것이며, 성경의 예언에 기초해 볼 때 그 재림의 징조들이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재림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앙을 말한다. 즉 일반 전통교회의 ‘전천년설’이다. 하늘성소는 지상성소의 원형으로 구속의 경륜을 표상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은 하늘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 심판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앙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성경에서 명시한 예배일로서 엄숙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식일은 창조와 구속과 해방의 기념일로서 십계명에 포함된 거룩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과 교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고 믿는다. 재림교회가 안식일을 강조한다하여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언의 선물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마지막 시대의 백성들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 교훈과 권면을 받는 통로이다. 재림교회는 예언의 선물을 통해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지도를 받는다. 조건적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일원론적으로 보고 사후세계에서 영혼의 존재(영혼불멸설)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부활을 통해 불멸을 얻게 된다는 신앙을 말한다. 재림교회는 이 다섯 가지 랜드마크를 포함해 28개 기본교리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대총회의 총회에서 결의하여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재림교회와 일반 전통 교회와의 다른 점 앞에서 언급된대로 재림교회는 일반 전통 교회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예배일을 역사적 전통 교회의 ‘주일’ 대신, ‘토요 안식일’을 지킨다. 재림교회 기본 교리는 “이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네 번째 계명은 제7일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이 거룩한 제도는 창조의 기념이 되는 동시에 거룩하게 하심의 표가 되며 신자가 그 죄의 행위에서 쉼을 얻고 또한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영혼의 쉼에 들어간 표가 된다. ” 둘째, 인간 사후세계에서 일반 전통교회 가 ‘영혼불멸설’을 믿는 대신 ‘영혼멸절설’을 믿는다. 재림교회 기본 교리는 “죽은 자들의 상태는 무의식의 상태이다. 모든 사람은 선악간에 다같이 사망할 때부터 부활할 때까지 무덤 속에 머물러 있다” 고 말한다. 셋째, 음식 문제로서, 일반 전통 교회가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내신 것으로 감사함으로 먹는 대신, 재림교회는 육식을 피하고 채식위주의 음식을 먹는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대에 큐메니칼 교리와 인간론과 구원론이 일반 전통 교회와 같다는 점에서 정통 기독교의 일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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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24
    세례식은 ‘병사입대식’으로,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 대신 ‘신앙다짐’으로 구세군 (Salvation Army)그리스도교 교파 중에 특이한 형태의 조직이 있다. ‘구세군’(Salvation Army, 救世軍)이라고 불리는 선교 공동체가 그것이다. 전 세계 130여 개국에 전도센터를 설치하고 있는 구세군은 영적 군사조직으로 계급화 되어 있고, 사역자들은 군복을 입으며, 모든 역사적 그리스도교가 행하는 전통적 성례, 즉 세례식과 성찬식도 하지 않는다. 세례식은 ‘병사입대식’으로 대신하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 대신 구세군을 상징하는 3색 깃발 성령, 성결, 보혈을 상징 앞에서 신앙을 다짐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신앙을 다짐하는 이유는 성찬식은 포도주를 사용하기 때문에 알콜중독자들이 알콜을 끊었다가 성찬식에서 약한 알콜을 맛보고 다시 알콜을 찾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그래도 아무도 이들을 이단이라 하지 않는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사회사업을 선교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굶주린 자들을 위한 사업, 술꾼들을 위한 사업, 극빈자들을 위한 사업, 실직자들을 위한 사업,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 범죄자를 위한 사업, 매춘부들을 위한 사업, 빈민가 사업, 병자를 위한 사업 등 다양하다. 구세군의 기원과 창시자 윌리암 부우드구세군의 창시자는 영국국교회(성공회) 출신 감리교 목사 윌리암 부우드(William booth)이다. 윌리암 부우드는 1829년 영국 노팅검에서 태어나 영국국교회 교도로서 성장하고, 후에 웨슬레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청년들을 중심한 소규모 조직과 함께 마을을 복음화 하고, 극빈자들을 도우며, 참회자들을 위한 집회를 이끌었다.이 시기에 웨슬레 감리교의 한 분파가 교단본부의 치리에 불만을 품고 이탈했다. 부우드는 그 지방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그 지방회의 설교자직을 사임하고 1851년 개혁을 주창하는 조직에 가담하였다. 후에 이들은 개혁감리교를 창립했다. 부우드는 1861년까지 개혁감리교의 순회 설교자였으나, 연회에 자신을 순수한 복음전도사업을 위해 별도의 전도목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가 동료들의 반발을 사 한 구역 안에서만 복음사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고 다른 구역에서는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부인 캐더린(Catherine)도 능력있는 부흥사였다. 결국 이들 부부는 개혁감리교를 떠나 영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런던 동부 빈민가 사역그는 런던 이스트 엔드 빈민가에 세워진 천막에서 드리는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빈민가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실업자와 빈민이 급증하면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거기 빈민가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문화적인 혜택이나 기독교적 교육을 받지 못했고,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천막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 매춘부 등 최하층 사람들이었으나 부우드의 설교에 열렬하게 호응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가로전도집회’(노방전도)였다.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 알았소. 이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여러 해 동안 구원하고자 갈망해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요. 내가 오늘 난로가 타오르는 술집 앞을 지나칠 때에 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소. ‘네가 어디에서 이같은 이교도들을 만날 수 있으며, 또 네가 어디에서 이같이 간절하게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소. 나는 그 즉시 마음속으로 이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소.” ‘구세군’이란 유사군대조직의 탄생부우드는 자신의 전도방법이 일반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회의 전통적인 전도방식은 최하층의 타락한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보다 강력한 전도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전투’ 조직이었다.그는 세상에서 소외되어 버림받고 죄에 물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복음전도에 대한 전투적인 정신, 그리고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악의 세력을 무찌르는 조직, 영혼의 적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하는 군대와 같은 조직이 필요했다.그는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한 전쟁이라는 사상이 성경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고 믿었다. 당시 불리던 교회의 찬송가와 존 번연의 ‘거룩한 전쟁’(Holt War)이라는 찬송가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1878년 그 이름을 ‘구세군’으로 바꾸었다.군대 조직과 구세군의 제도구세군이 복음전도에서 군대조직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 선교의 전투적인 개념에 부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보편적 교회를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와 새예루살렘 승리의 교회로 나누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대장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투쟁하며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자는 천상 승리의 교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부우드 내외와 그들 주위에 모인 작은 집단은 군대식 행정이 그 권위를 세워주며, 또 병사의 훈련을 위하여 가장 적절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군대를 조직한 것이다. 처음에는 부우드를 ‘총재’라고 불렀으나 이후 ‘초대 대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목회자는 ‘사관’(士官), 연회는 ‘전장회의’(Council of War), 교회당은 ‘영문’(corps)이라 부른다. 또 구세군 사업 확장을 위한 다른 나라에 선교의 시작은 ‘개전’(開戰)이라고 한다. 구세군의 편제와 지휘체계① 구세군 편제의 중요한 구분은 군영. 여단. 군국. 지구이다.② 군영은 담임사관의 감독과 지도하에 화합하고 함께 활동하는 병사 및 예비병으로 구성된다. 영문(개교회당)은 복음화운동의 기본단위이다.③ 군국(軍國)은 대장의 지정에 따라서 한 나라 혹은 그 나라의 한 부분, 또는 여러 나라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대체로 한 나라에 한 군국이 있으나, 미국에는 4개 군국이 있다. ④ 본영은 만국본영, 내국본영, 도(사단)본영, 여단(지방)본영으로 구분된다.⑤ 사관은 남녀가 함께 임명되며, 구세군 이외의 다른 세속적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⑥ 사관의 계급은 부위(副尉), 정위(正尉), 참령(參領), 정령보(正領補), 정령(正領), 부장(部長), 대장(大將) 이다. 그리고 기성교회의 일반 교인은 ‘병사’이고, 집사는 ‘부교’이며, 장로는 ‘정교’라고 부른다. 구세군 신앙고백 구세군은 ‘구세군교리문’이라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다. ① 우리는 신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② 우리는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만물의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이시며 예배의 참 대상이심을 믿는다. ③ 우리는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가 있으며 권능과 영광으로도 동등하심을 믿는다. ④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 있으며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믿는다. ⑤ 우리는 인류의 시조가 본래 죄 없이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정결과 행복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을 믿는다. ⑥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 ⑦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 중생은 구원에 필요한 것임을 믿는다. ⑧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됨을 믿는다. ⑨ 우리는 구원 상태의 지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함을 믿는다. ⑩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신자의 특전이며 “저들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게 흠없이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 ⑪ 우리는 영원한 생명, 육체의 부활, 세상 끝의 총심판, 의인의 영원한 행복과 악인의 영원한 형벌을 믿는다. 한국의 구세군한국의 구세군은 1907년 윌리암 부우드가 세계순회 도중 일본에 들렀을 때 한국 개전을 결정하고, 1908년 초대 사령관에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와 애니 존스(Anni Johns) 부부를 파송하면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포교활동이 금지되어 한때 활동을 중단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영국과 미국 본영의 도움으로 무료 급식소를 다시 개설하고 활동했다.구세군 대한본영(본부)은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있고, 지방은 서울지방본영, 남서울지방본영, 충청지방본영, 서해지방본영, 충서지방본영, 충북지방본영, 경남지방본영, 경북지방본영, 전라지방본영을 두고 있다. 또 한국 사령관은 만국본영에서 임명해 오다가 1973년 전용섭(全龍涉) 사령관 때부터 한국인으로 교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기고
    • 분파 이야기
    2020-01-17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23
    방언(方言)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보는 은사주의 교회오순절-순복음교회(PENTECOSTAL)오순절 교파의 태동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 교회라고 알려진 오순절교회의 태동은 20세기가 막 동이 튼 1901년 1월 초에 미국 캔사스 주 토페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현대오순절운동이라고도 부른다. 현대 오순절 운동은 1901년 1월 3일 감리교 목사 챨스 파아함(Charles F. Parham)이 운영하던 벧엘신학교(The College of Bethel)라는 성경학교에서 일어난 ‘방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학교를 성경학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과서가 오직 성경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은 약 40여명이 전부였는데, 식비나 수업료는 일체없었다. 이 학교의 주요 교육 프로그램은 세 가지였다. 첫째, 성경만을 교과서로 사용하면서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을 사용하였다. 둘째, 기도탑(Prayer Tower)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원한 학생들에 의해서 기도가 계속되었다. 셋째, 실천적 봉사로서 토페카 시민들의 가정을 방문해 전도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 해 1월 초, 신년 기도회를 열고,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를 공부하다가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란 여학생이 파아함에게 안수를 요청해 안수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12명의 학생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을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오순절운동의 출발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는 표시가 ‘방언’이라고 말한다.그 후 파아함은 학생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신유집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에 신학교도 설립했다. 처음에는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이라며 냉정한 대접을 받았으나 1904년에 이르러서 오순절운동은 차츰 확산되어 갔다. 1906년에는 파아함의 휴스톤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흑인목사 윌리암 씨무어(William J. Seymour)에 의해 로스엔젤레스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본니 브래(Bonnie Brea) 거리와 아수사(Azusa) 거리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이 집회의 영향으로 오순절운동은 미국 교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어 1907년에는 로스엔젤레스 아수사 거리 집회에 참가했던 윌리암 더함(William H. Durham)이라는 목사가 성령세례를 받고 시카고로 돌아가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시카고 부흥운동이다.오순절 교단의 창립과 분파이들이 처음에는 “미시시피 벨리의 오순절협회”라는 조직을 결성해 전도집회를 하다가 기성교회로부터 배척이 심하자 1904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라고 하는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단이 창립되자 주변의 기성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다이나믹한 예배와 은사가 나타나는 이 교단에 합류하였다. 심지어 지역의 기성교회들이 간판을 바꾸어 달고 오순절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어떤 장로교는 노회 차원에서 오순절 교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교세가 급속히 늘어나자 하나님의 성회 외에 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교단들이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 in Christ), 연합오순절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 미국 오순절 하나님의 교회(The Pentecostal Church of God in America), 국제복음교회(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 오순절 성결교회(The Pentecostal Holiness Church) 등이다. 이들 교파들이 두 개를 제하고는 모두 한국에 나와 있다. 오순절운동의 은사미국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 현상은 다음과 같다. ① 방언(Unknown tongues) = 방언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표적이다. 방언을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② 소리지르기(Shouting) = “주여, 주여”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인데, 이를 소리지르는 감리교인이라고 불렸다. 도심에서는 소음 문제가 제기됨으로 주로 야외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③ 황홀상태(Ecstasy) = 집회 중에 엑스타시에 빠져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현상이다. ④ 입신(Trance) = 엑스타시 상태에서 오래동안 정신을 잃고 영적 경험을 하는 현상이다. ⑤ 경련(Jerks) = 집회 중에 온 몸을 떠는 현상이다. ⑥ 거룩한 춤(Holy dancing) = 집회 중에 엑스타시 상태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현상이다. ⑦ 거룩한 웃음(Holy laugh) = 이유없이 계속 웃고 다니는 현상이다.⑧ 거룩한 딩굴기(Holy roller) = 집회 중에 그냥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현상이다. ⑨ 칼로 베기(God’s slain) = 집회 인도자가 손을 흔들면 한꺼번에 수십명씩 쓰러지는 현상이다.⑩ 환상, 투시(Vision) = 영분별이 포함된 영적으로 본다는 신비주의적 현상이다.⑪ 예언(Prophesy) = 장래를 말하고, 감추인 비밀을 폭로하는 은사적 현상이다.‘오순절운동’과 ‘신오순절운동’의 차이는 오순절운동이 성령세례의 증거를 ‘방언’에 두는데 비해, 신오순절운동은 방언 외에 ‘다른 은사’를 체험한 것도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신오순절운동은 ‘은사운동’이라고 부른다. 오순절 교단의 신조(주요 내용)•삼위일체 하나님 = “우리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며, 자신 스스로를 영원 지존자로서, 천지만물 의 창조자로서, 인류의 구속자로서 계시하셨음을 믿는다. “한 분이신 하나님(신 6:4)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삼위일체 안에서의 독립성과 협력성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인격에 있어서 동일시 되지 않으며, 신격에 대해서 나누이지 아니하며, 협력에 있어서 대립되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다. 사귐에 있어서도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다. 권위에 있어서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오시지 않으시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오신다. 성령은 본질·관계·협력·권위에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오고, 아들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은 다른 위(位)들과 분리되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일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성령 =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삼위 중 한 위(位)로서, 그 본체와 능력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이 땅에서 시행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죄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인도하시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시며, 은사를 보여주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능력을 주시어 성도의 심령을 강건케 하시며, 성령세례와 권능을 부어주시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성도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유기적 공동체가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교회의 성례 = ① 침례 :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몸을 물 속에 잠기게 하므로 받는 침례의식이다. ② 성찬: 떡과 포도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상징이며, 그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며, 재림의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또 성령세례는 후속적 영적 체험으로 삶과 봉사를 위한 권능이 입혀지며, 은사가 주어지고, 사역에 역사를 일으킨다. •신유 = 신적 치유는 복음의 필수적인 내용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속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받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함께 질병도 짊어지셨으며, 질병으로 통치하려는 마귀의 일을 멸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주셨으며,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병든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한국의 오순절교회오순절교회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일제하에 있던 192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아수사 거리 부흥운동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은 메리 럼시(Mary Rumsey)라는 처녀가 한국 선교를 위해 개인적으로 입국했다. 럼시는 시병원에 숙소를 정하고 전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보니 전혀 오순절운동이 먹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5년동안 냉대를 받으며 지내다가 1933년 봄에 구세군 본영에서 근무하던 허홍이란 청년을 만나 최초의 한국에서 오순절 교인을 얻었다. 그들이 서빙고에 조그마한 기와집을 한 채 구입하여 교회를 시작했다. 그 교회의 담임 목회자는 일본에서 성경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박성산 목사가 맡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선교활동이 중단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게 되자 오순절 교인들이 다시 모여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선교 부장인 오스굿(Osgood) 목사의 내한에 의해 본격적인 하나님의 성회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교단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고 부른다.한국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외에도 '하나님의교회' '연합오순절교회' '국제복음교회' '오순절성결교회' 등의 오순절 교단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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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2
    “감리교도는 성경에 제시된 방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감리교(Methodism)감리교의 태동감리교는 영국국교회 출신 존 웨슬리의 종교체험에서 비롯된 교파이다. 메도디즘이라는 명칭은 1729년 옥스퍼드에서 웨슬리 형제가 이끈 ‘홀리 클럽’회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존 웨슬리는 1738년 한 종교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집회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끼고,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개인 구원의 확신을 체험했다. 그는 곧 조지 화이트필드와 협력하여 교회가 자기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회의 소외계층을 상대로 옥외설교를 시작했다. 거기에는 많은 평신도와 몇몇 성직자가 가담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이다. 이들은 영국국교회 안에 한 ‘단체’를 형성했다. 웨슬리는 이들이 영국국교회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몇 년 동안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웨슬리가 죽은 지 4년 뒤인 1795년에 이들은 정식으로 영국국교회와 결별했다. 중앙기관의 강력한 권위와 효율적인 지방조직을 결합한 잘 짜여진 교회행정 및 평신도 설교자들의 기용에 힘입어 이들의 운동은 19세기 내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감리교는 특히 팽창해 가는 산업화 지대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고, 때로 근검절약으로 경제의 향상도 도모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이다.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나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들까지도 제거하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설교했다. 웨슬리의 이 체험은 많은 경건한 국교도이거나 모라비안교도들에게는 이미 체험된 것이었다. 웨슬리의 회심은 그의 마음 속에 전도자의 열심을 가득히 채웠다. 그는 런던의 여러 교회에서 ‘신앙에 의한 구원’에 대한 교리를 설교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는 웨슬리가 가르치는 교리를 못마땅히 여겨 배척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39년 4월부터 옥외설교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옥외설교는 수많은 군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모여드는 군중을 위해 1739년 11월 11일, 폭발로 파괴된 무어필드 근처의 ‘주물공장’을 매입하여 집회소를 건축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도회’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감리교의 모체가 되었다. 미국의 감리교회감리교는 영국보다 신대륙 미국에서 더 크게 번창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감리교는 1784년에 ‘감리교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으로 자치권을 지닌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이 교단 설립을 이끈 인물은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토머스 코크이다. 이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미국의 다른 어느 교단보다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 순회목사들은 말을 타고 변방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쉬운 말로 설교했다. 감리교가 미국 사회에서 그처럼 활력이 넘치는 교파가 될 수 있게 한 것은 감리교의 독특한 제도에 기인하고 있다. 지역단위로 종규를 집행하는 감리교도들의 ‘속회’(屬會 class)가 조직되었고, ‘감독’을 중심한 강력한 중앙기관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조직이 있어 순회설교자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감독한 것이다.그러나 미국 감리교는 1844년 노예제도 문제로 남감리회와 북감리회로 분열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후 두 교단은 교인과 재산면에서 급성장을 계속했다. 감리교가 점차 미국 중산층 신교(新敎)의 일반적인 양상을 닮아가자 내부에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 발생하여 19세기 말에 또다시 갈라졌다. 그것이 성결교(홀리니스 처치)이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감리교에서 오순절교회가 나타났다. 1939년 남·북 감리회가 재결합하고 그후에도 더 많은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성결운동에서 비롯된 성결교와 오순절교회는 계속 독립교회로 남아 있다.또 감리교의 흑인교회들은 1939년 새로운 중앙기관의 관할하에 통합되어 연합감리교 내에서 독자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가, 1968년 이후 점차 감리교 본교단에 통합되었으며, 1974년까지는 인종에 바탕을 둔 모든 교구가 폐지되었다. 영국과 미국 감리교도들이 선교활동에 쏟은 열정 덕분에 감리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 감리교에서 유래한 교회들이 영국 감리교회에서 비롯된 교회보다 더 많고, 널리 퍼져 있지만 영국 감리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자치권을 향한 운동이 더욱 순탄하게 진행되어 왔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 감리교가 모두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재연합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으며, 전세계 감리교도들은 범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감리교의 네 가지 특징1. 보편적 구원 : 감리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모든 죄인들에게 자유롭고 완전하며 현재적인 구원을 인정한다.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주어지고, 내적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인식으로 증명되며, 외적으로는 경건한 복종의 생활에 의하여 증명된다. 2. 완전한 성화 : 감리교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과 그의 동료에게서 죄의 질병이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3. 성도의 교제 : 감리교는 그리스도인의 형제됨을 선포한다. 그리고 두 가지 성례전(세례, 성찬)을 소중히 여긴다. 또한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서로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짐을 져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한다. 4. 그리스도인의 봉사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의 새계명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또한 그의 동료들과 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넓히는 일을 위하여 생의 모든 것을 쏟아붓도록 부름받았음을 인정한다. 감리교의 신앙고백1. 교리적 선언(1930년 한국감리교)①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②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③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④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⑥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⑦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⑧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감리교 교리의 특징은 신학사색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역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들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감리교는 신자의 신앙을 북돋워주고 개인생활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구원의 확신 교리들을 강조하고,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배는 단순하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예배 및 교회행정에 함께 참여하며, 소외당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회 여건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격려하고 배우기 위한 작은 모임들을 구성하고 협력적인 감독체제를 유지하며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 감리교에도 디양한 교단이 분파되어 있다. 웨슬리개혁연맹, 연합감리회 자유교회, 독립감리교회 등이다.감리교의 조직감리교는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의 5가지 의회로 운영된다. •당회는 개체교회에 등록된 모든 입교인으로 구성된 의회이다. 장로교의 공동의회에 해당한다. •구역회는 개체교회 1개소 이상의 교회에서 목사, 전도사, 교육사, 심방전도사, 장로, 권사, 속장, 선교부장, 교육부장, 사회봉사부장, 문화부장, 재무부장, 관리부장, 남선교회 회장, 교회학교 교장, 당회 서기, 감사, 구역에 소속한 교역자 연회회원으로 구성되어, 수입 지출 결산 및 예산을 확정하고, 교회에 속한 동산 및 부동산에 대한 사항을 의결한다. •지방회는 해당 지방회에 소속한 연회 회원인 교역자, 지방교회에 파송받은 장로, 전도사, 각 구역 및 각 부의 대표로 구성되며, 장로 안수, 교회의 모든 재산의 유지재단 편입 등 제반 회무를 처리한다. •연회는 정회원 교역자들과 이와 동수로 각 지방에서 선출한 평신도 대표들, 그리고 준회원과 협동회원으로 조직되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분쟁사안을 조정하고, 교역자에 대한 고소·고발 사건과 각 재판건을 비롯, 연회 및 지방 경계법 등을 심의한다. •총회는 감리교의 입법과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최고의회로서, 교역자, 평신도 동수로 구성하여 주요 정책과 주요 행정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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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3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21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주장… ‘유아세례’와 ‘사도신경’도 거부침례교회(Baptist Church)침례교회란 무엇인가?침례교회란 말은 가톨릭이라는 전통적 보편적 역사적 교회가 물을 머리에 뿌리는 ‘세례’(란티조)를 기본 성례로 채택한 데 비해, 물에 온 몸을 잠그는 ‘침례’(뱁티조)를 주장한 데서 나온 교파이다. 그 역사적 기원은 영국국교회의 통치를 벗어나려 했던 “자유교회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침례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유일한 권위를 성경에 둔다. 그래서 침례교인들은 ‘성경의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초대교회를 이어가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강조한다. 그래서 침례교회를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도 한다. 환원주의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뜻한다.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침례교회의 주장은 침례교회의 자유와 연관되어 있다. 침례교회사의 발전은 침례교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영혼 자유, 성경 자유, 교회 자유, 종교 자유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자유는 각각 전신자(만인) 제사장주의, 성경 해석의 자유, 지역교회의 자치, 교회와 국가의 분리로 나타난다.첫째, ‘영혼 자유’(Soul freedom)는 신자 개인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개인 각자의 영혼의 역량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영혼 역량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으로 모든 침례교인은 제사장 직분을 갖는다는 것이다.둘째, ‘성경 자유’(Bible freedom)는 신자 개인에게 성경 해석의 자유가 있다는 주장이다. 침례교회는 교권에 따른 성경해석보다 성령의 조명에 의한 개개인의 자유로운 보편주의적 성경해석을 인정한다.셋째, ‘교회 자유’(Church freedom)는 지역교회가 개교회로서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봉사 등에 대해 자치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 등과 달리 개교회를 지배하는 상회(上會)로서의 노회나 지방회나 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회중정치로 교회를 운영한다.넷째, ‘종교 자유’(Religious freedom)는 교회와 국가는 분리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예수 믿는 신자들의 영적인 공동체로서 세속권력과 결탁된 국가교회를 배격한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의 재정이나 권력에 의존해서 선교 사업을 수행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16세기 제세례파운동과 침례교회침례교회는 ‘침례’의 기원을 침례요한에서부터 찾는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셰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에서 ‘세례’를 ‘침례’로 읽는다. 그런데 그 침례를 가톨릭교회가 세례로 바꾸었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의 주장은 무엇인가?첫째, 재세례파는 엄격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했다. 국가와 종교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며, 어느 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국(國)교회이거나 시(市)교회로 운영되던 중세에는 이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재세례파는 많은 희생을 낳았다.둘째, 재세례파는 순수하게 신자(信子)의 결단에 의한 신앙과 실천을 주장했다. 왕이나 제후나 국가 법률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셋째, 재세례파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했다. 그들은 교권적인 성직 제도를 부정했으며, 모든 신자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고 믿었다.넷째, 재세례파는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보편적 기독교가 ‘정당한 전쟁’을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재세례파는 정당한 전쟁을 부정하고 신약성경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들은 ‘믿는 자(신자)의 침례’를 주장했다. 오늘날 침례교회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이로 보건대 침례교회는 재세례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침례교회도 평화를 주장하지만, 정당한 전쟁을 인정하며 병역 의무를 인정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재세례파 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은 갖고 있지 않다.침례교회의 역사역사상 최초의 침례교회는 암스테르담에서 세워졌다. 이들은 모두 영국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영국인들이었다. 이들은 1611년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와 존 모튼(John Murton)의 지도 아래 영국으로 돌아와 비국교도 운동을 계속해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를 ‘일반침례교회’라 부른다.비국교도 운동의 선구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은 1581년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나와서 비국교도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어 존 스마이스(John Smyth)는 1602년 국교회 감독제는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설교를 하고 1606년에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의 일부가 미국의 메사추세츠로 이주하여 그 유명한 필그림교회가 된 것이다.비국교도란 16~17세기 영국국교회에 저항한 영국의 신교도(新敎徒)를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영국국교회의 개혁은 참된 개혁이 아니라고 여기고 영국국교회와 별도로 지역교회의 목사를 감독(주교)의 임명이 아니라 회중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국교회는 이들을 ‘분리주의자들’라고 비난했다.또 1616년 비국교도 중에서 침례방식의 회복을 바라는 신자들이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이 목회했다. 이 교회의 17명의 신자들이 1633년 침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가 런던의 사우스워크에 최초의 ‘특수침례교회’를 세웠다. 특수침례교회란 일반침례교회의 ‘관수례’ 대신 ‘침수례’를 행하는 것이다. 관수례란 물을 물주전자 등에 담아서 머리 위에 붓는 행위이고, 침수례란 온 몸을 물속에 잠그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침례교회는 모두 침수례를 행한다.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셨고 친히 머리가 되시며 그 입법자이다.•교회의 교리와 생활에 대한 유일하고 권위 있는 표준은 성경뿐이다.•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서, 주의 만찬은 상징적 기념일뿐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서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다.•교회의 정체는 민주 정치로서 행정만 할뿐 입법은 하지 않는다.•교회의 회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교회 회원의 의무는 신앙고백으로 침례를 받고 신약성경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모든 교회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이나 복음 전도 사업은 협동한다.•교회와 국가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이다.이상에서 침례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직제는 ‘목사’와 ‘집사’뿐이고, 성찬은 주의 죽으심과 장사됨과 그리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기념설’이다. 침례는 믿는 자의 고백에 의한 것임으로 자신의 고백이 없는 ‘유아 세례’는 부정된다. 또한 침례교회는 신조보다 성경을 더 높은 권위에 둠으로 대체로 사도신경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외에도 정교 분리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며, 개교회주의를 주창한다는 점이다.세계교회 속의 침례교회침례교회는 세계 신교(新敎) 가운데 대체로 빠른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퍼져있다.21세기 오늘날 ‘침례교세계연맹’(Baptist World Alliance)에는 약 5천만 명의 침례교인이 가입해 있다. 그런데 이 조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침례교인까지 포함하면 전 세계에 약 1억5천만 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침례교세계연맹(BWA)에 소속된 각 국의 침례교단 가운데 WCC에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는 교단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한국침례교회는 WCC에 가입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이 내한하여 선교가 시작되어 ‘대한기독교회’(1906-1920)와 ‘동아기독교회’(1921~1932),‘동아기독대’(1933-1939)와 ‘동아기독교‘(1933-1948), ‘대한기독교침례회’(1949~1951), ‘대한기독교침례회 연맹’(1952~1968), 그리고 분열 시대를 거쳐, ‘한국침례회 연맹’(1968~ 1975)에서 1976년 오늘의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을 바꾸어 한국교회의 주요교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한편, 1954년 미국 남침례교회에서 ‘성서침례교회’가 탄생했다. 성서침례교회는 미국교회에 침투된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보다 보수적인 신학노선을 추구했다. 그들은 세대주의, 축자영감사설, 성경의 무오성, 은사종료설, 전천민설을 지지하며, 현대 오순절교회의 은사주의(방언, 신유, 입신, 투시, 영서 등)와 에큐메니칼 교회일치운동을 부정하고,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음을 믿는다”는 교리를 갖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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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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