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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0
    평화와 봉사의 생활로 중생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메노나이트파(Mennonities)뮌스터 사건과 메노 시몬스‘새 예루살렘’이라고 믿었던 뮌스터 사건은 재세례파의 이름을 더럽게 만든 소수의 과격한 열광주의자들의 사건이었다. 재세례파 가운데 뮌스터로 옮겨간 일부만이 그 사건에 관여하였고, 이들은 종말론자 호프만의 추종세력에 국한되었지만, 그러나 독일 귀족사회에서는 모든 재세례파가 정치와 사회, 도덕과 종교의 혼란을 조성시켰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재세례파는 독일과 유럽에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에 새로운 인물이 가담했으니 그가 화란의 개혁자 메노 시몬스(Meno Simons, 1496-1561)이다. 재세례파 운동은 메노 시몬스의 지도하에 다시 그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 메노는 네덜란드의 프리슬랜트에서 태어나 1524년 고향 비트마르숨 본당 마을 사제가 되었다.메노는 그때 네덜란드에 퍼진 화체설 교리 비판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깊이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거짓되었다고 결론 짓고 루터주의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형제 중 하나 피터 시몬스가 뮌스터에서 처형되었는데, 그의 시신을 장사한 후 지도자가 없이 흩어진 재세례파 교도들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재세례파로 옮겨 갔다.메노는 1535년 4월 300명의 재세례파 교도들이 볼스바르트에서 제국 군대에 패하여 130명은 싸움 현장에서 죽고, 나머지 포로는 일단 투옥되었다가 결국에는 모두 익사형으로 처벌된 사건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자신의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 것이 오로지 그들의 소망이었는데, 그들은 국가권력과 교권의 핍박으로 모두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들의 영웅적 행동은 그가 사제직에 그대로 편안히 있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 했다. 그리하여 1536년 1월 12일 자신의 교구에 사표를 내고 재세례파에 가담하게 되었다.‘메노나이트’의 출현그는 1536년 재세례파 전도자가 되려고 고향을 떠나 18년간 전도여행 끝에 1554년 북부 독일의 홀스타인에 있는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지내며 평화롭게 글을 쓰고 설교했다. 이 기간 그는 ‘영적 부활’ ‘거듭남’ ‘시편 23편 묵상’ 등을 쓰고, 성인세례를 받고 온건 재세례파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결혼도 했다. 그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평화와 봉사의 생활을 하는 중생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만이 성경적, 사도적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그러나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신교 양쪽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메노는 재세례파 가운데 비록 평화주의를 지향했으나 가톨릭과 종교개혁 세력은 여전히 그들을 의심해 탄압했다.이때부터 메노는 이단자로 낙인찍혀 위험에 처했다. 1542년 황제 카를 5세는 직접 메노를 반대하는 칙령을 내리고 현상금을 걸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메노는 오히려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후에 그의 이름을 붙여 ‘메노나이트’(Mennonities)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메노가 찾은 빛, 즉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단이라는 비난 속에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조를 지켜나갔다.이들은 뮌스터에서의 과격한 폭력적 운동은 기독교의 진리를 곡해하는 것으로 여기고 “평화야 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며, 재세례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메노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 세례, 신생, 영적할례, 재세례파에 대한 관용호소 등을 발표했다.메노파 신조메노나이트 신앙고백은 1527년 2월 24일 ‘스위스 형제단’이 발표한 슐라이타임 신앙고백과 1632년 4월 21일 네덜란드 도르트(Dort)에서 발표된 '도르트 신조', 그리고 1776년 ‘리스 고백’에 이어 1995년 7월 25일 미국 캔사스주의 위치타에서 채택된 24개 조의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등이 있다.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24개 조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성경,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창조와 인간의 부름, 죄,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와 선교, 세례, 주의 만찬, 발씻김, 교회의 규율, 사역과 지도력, 교회의 질서와 일치, 제자도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영성, 가정교회, 독신교회, 결혼, 진실 그리고 맹세의 거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책무, 평화교회, 정의교회, 무저항, 정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계,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 가운데에 제1조 하나님, 제2조 예수 그리스도, 제3조 성령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살펴본다. 제1조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믿음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거룩하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신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예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든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과 새 삶을 주셨고, 세상 끝까지 교회와 모든 것들을 지켜 나가심을 믿는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시작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인간과 다른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실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구세주 되심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속하게 되었다...제2조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복종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인도해내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킨 세상의 구세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다. 에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영화롭게 되신 죽임 당한 어린 양, 영광중에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이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새 언약을 그리스도이신 메시아, 예수를 통해 준비해 오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구주로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인정한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몸 되신 교회의 머리로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높이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한다...제3조 성령: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셨고 교회에 권능을 부여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삶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창조물의 구속까지도 믿고 확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진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을 믿는다.세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선지자들과 성경의 기록자들이 영감을 받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름이 가능해졌고, 마리아가 잉태하였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통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성령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고 우리가 핍박받을 때에 함께하시고, 연약할 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우리 육체의 구속을 보증하시며, 피조물의 장래 구속을 확신하는 분이시다. 박해를 피해 피난을 떠난 재세례파 사람들메노나이트는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다시 러시아와 신세계인 아메리카로 퍼져 나갔다. 특히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북미로 떠난 자들이 많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미로 이민을 갔다. 현재는 약 100만 명의 메노나이트 교도들이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 산재해 있다. 이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하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원칙인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넘어 전진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눈리는 ‘종교의 자유’도 그들에게 빚진 바 있다. 이제 더 이상 메노나이트를 이단으로 보는 교회는 없다.미국의 아미쉬(Amish) 공동체는 메노나이트의 일파이다.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아미쉬는 펜실베니아 랑캐스터, 오하이오의 홈스, 인디아나의 라그레인지 카운티, 일리노이, 오레곤, 캔사스, 다코다,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캐나다 온타리오 등에 공동체 마을을 이루고 있다.17세기 문명을 그대로 지키며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아미쉬는 30~40 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단위가 교회의 신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당이 따로 없이 돌아가며 2주에 한번씩 각자의 집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치른다. 또한 그들은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게끔 한 가족이 운영할 정도의 농장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는 돈을 더 벌고자 하는 욕구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평한다.
    • 기고
    • 분파 이야기
    2019-11-18
  • 보다 철저한 성경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운동 주창 -19
    재세례파 (Anabaptist)중세 종교개혁에는 루터파와 개혁파운동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개혁자들 중에는 취리히의 쯔빙글리를 중심한 개혁파운동이 오랜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기에는 반쪽 개혁운동이라며 보다 강력한 개혁을 주창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들은 더 철저한 성경적 개혁운동을 추구했다. 그들을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부른다. 재세례파 운동에는 그곳 명문 출신으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과 펠릭스 만쯔(Felix Manz)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교회사에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평가되는 그들의 개혁운동은 쯔빙글리가 성상(聖像)이나 미사를 폐지하는 일에 시의회를 앞장 세운데 비하여, 오히려 중대한 교회 문제에 시의회가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 아래 모인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저한 교회개혁을 바랐다. 유아 세례 반대로 재세례 필요성 대두가장 먼저 부딛친 문제는 유아 세례였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세례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톨릭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온 유아 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세례란 자기 자신의 고백과 판단 아래 신앙의 상징으로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재생의 상징인 세례는 인격의 변화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신앙의 인격적 결단과 유리된 세례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유아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신앙의 인격적 결단으로 신자가 된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를 ‘재세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재세례파 사람들은 루터파나 개혁파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가톨릭을 통해 전해져 온 것들을 배격하고 1세기의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의 루터파나 개혁파 교회는 대체로 주(州)교회이거나 민족 단위의 국(國)교회였다. 이는 역사적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온 제도이다. 가톨릭이나 루터파 그리고 개혁파 교회는 국가와 합치했으며, 하나의 정치적 단위 안에 있는 국민들은 모두 그들의 교회에 종속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한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주장은 오늘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는 정교(政敎)분리 사상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재세례파는 국가나 주(州)정부 또는 시(市)정부에 예속된 루터파나 개혁파와도 긴장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이로써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개혁세력 모두에게 적(賊)으로 간주되어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앞날에는 혹독한 수난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단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법에 의해 처벌되었다. 화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개혁교도들의 영역에서는 그들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물에 잠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 이다.재세례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취리히 시의회는 1526년 3월 6일, 재세례파 지도자들을 익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그레벨, 만쯔, 블라우로크 등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2주 후에 탈옥에 성공했으나, 도망다니던 그레벨은 그해 8월 페스트에 걸려 죽었고, 만쯔는 그해 12월경 다시 체포되어 1527년 1월 5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산 채로 림마강에 던저져 순교했다. 블라우로크는 티롤 지방에서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 끝에 1529년 9월 6일 클라우젠에서 화형 당했다.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에서도 매우 강하게 일어났다. 1525년에서 1528년에는 발타자르 휘프마이어(Balthasar Hubmeyer, 1480-1528)에 의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크 등지에서도 널리 퍼졌다. 그것은 뮌쩌의 농민전쟁의 참패와도 관련이 있었다. 농민전쟁에 실패한 사람들이 귀족과 연합한 루터파를 불신하여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다.1529년 독일 쉬파이어 의회는 반란세력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재세례를 베푼 사람이나 받은 사람은 타당한 재판의 형식없이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황제의 칙령을 인준했다.호프만의 제자들과 새 예루살렘재세례파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도시나 마을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어느 하나의 지리적 중심지나 통일된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그들은 엄격한 성경적 윤리적 표준을 지키려 하였으며, 이 표준을 어기려 드는 사람들과는 상종하기를 거부했다.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타락한 세계의 본질적 표현인 전쟁을 거부하고, 모든 무력의 사용을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심지어 외부의 핍박에 대해서도 무대응을 원칙으로 삼았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부류는 초대교회처럼 재산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의 타락은 사적(私的) 소유와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내것’ ‘네것’을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과 이웃과의 진정한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제세례파의 이러한 ‘새 예루살렘’ 공동체 건설은 독일 북부의 뮌스터에서 시도되었다. 1533년 이 도시에서 재세례파가 세력을 잡고 기독교의 공화체제를 선포했다. 이를 ‘뮌스터 왕국’이라고 부른다.로트만과 뮌스터 시당시 네덜란드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뮌스터 시는 가톨릭 주교의 통치하에 있었다. 거기에서 1530년부터 가톨릭 사제 출신인 인문주의자 베른하르트 로트만이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설교의 성격이 시 전역에 알려지면서 시민사회에 동요의 기운이 점차 감돌기 시작하였다. 1931년 성 금요일 밤에 그가 소속된 교회로 시민들이 몰려가 제단을 훼파하고, 로트만의 설교를 위해 교회 뜰에 강단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8월에는 그 도시의 교회당은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주의 목사들의 지도아래 들어갔다. 이 해에 시의회는 시민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모든 교회들에 복음주의 목사들을 임명하였으며, 1933년에 주교는 그 도시를 ‘복음주의 도시’로 선포했다.그리고 이어 로트만은 유아 세례가 옳지 못하다는 확신을 갖고, 1533년 11월 ‘믿는 자의 세례’와 성만찬의 상징설을 주장하는 ‘신앙고백’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의 출간은 곧 재세례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 도시가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방에서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멜키엘 호프만의 추종자들도 있었다.루터파 출신인 호프만은 1533년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결과 자신이 바로 사도들 당시의 초대교회를 복원하도록 지명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트라스부르그에 ‘새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얀 마티스와 뮌스터 왕국이렇게 이주한 인물 중에 하알렘 출신 제과공 얀 마티스(John Mattys)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호프만의 추종자로 자신을 ‘약속된 에녹’이라고 지칭하였다. 마티스는 앞으로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하여 성도들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불신자들을 제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트라스부르그를 버리고 그 대신 뮌스터를 새예루살렘으로 택하셨다고 주장했다.또 ‘라이덴 얀’(John of Leiden)이라고 불리는 25세의 젊은이가 뮌스터에 도착했다. 라이덴 얀은 1534년 2월 유력 인사들과 함께 시가를 돌아다니며 종교적 회개의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이들은 곧이어 시청과 시장 등을 장악하였다. 이에 놀란 루터파 교도들은 곧 도시를 떠났고, 대신 각처에서 몰려온 수천명의 무산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그리하여 시의회는 재세례파 의원들에 의해 장악되고 얀 마티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시의 유력한 존재였던 로트만도 그들 편에 섰다. 마티스는 사도행전 2장의 사례를 들어 재산의 공동소유제 도입부터 시작했다. 그 공동소유의 관리를 위해 7인의 집사들이 임명되고, 이를 반대하는 대장장이 한 사람을 시장에서 즉결 처형하여 본때를 보였다. 그리고 소수정예 기드온의 300용사를 뽑아 경비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1534년 4월 주교의 군대를 물리치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출격했다가 가톨릭군에 의해 모두 죽었다, 이때 마티스도 함께 죽었다.마티스의 자리는 라이덴 얀이 이어받았다. 그는 즉시 친위대를 조직하고, 계급제를 정비하여 12장로를 세워 신의 계시에 의한 ‘새 예루살렘’ 편제를 발표함으로써 약 1만명의 주민들을 상대로 공포정치에 들어갔다. 라이덴 얀은 장로회 의장으로 지명됨과 동시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주교군이 도시를 포위하자 심각한 기근에 시달린 끝에 1535년 6월 24일 성이 함락되어 성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이후 재세례파는 네덜란드 사제 출신 메노 시몬스가 이끄는 ‘메노나이트’와 ‘아미쉬’ 운동 등으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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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5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8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바탕한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신학 체계장로교(Presbyterian)장로교는 중세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과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1519-1605)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가 이루어낸 개혁교회이다. 그 중심사상은 요한 칼빈의 신학사상이다. 제네바의 요한 칼빈칼빈은 프랑스 피카디주 노용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소송대리인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귀족사회에서 양육받아 귀족계급의 예의범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소원을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사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의 부친이 노용의 주교와 다툰 일로 칼빈의 신학수업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신학수업을 중단한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인 1528년부터 그의 부친이 죽은 1531년까지 다시 법학을 공부해 오르레앙 대학에서 1533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친이 죽고 난 후 프랑스 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을 공부하고, 1532년 세네카 주석서를 출판했다. 그 이후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는데, 그 때부터 그의 관심은 종교문제로 집중되었다. 개혁파 운동에 가담한 칼빈칼빈이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은, 첫째는 1533년 11월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 대학의 학장에 취임하며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문이 개혁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어서 로마교회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연설문의 작성자가 칼빈으로 알려진 것이다. 로마교회는 콥을 최고법원에 제소하고 소환하여 이단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로인해 칼빈 역시 콥과 함께 추방 선고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혁활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수백명의 개혁파인 위그노 교도들이 투옥되었고, 이 중 35명은 화형당했다. 그 중에 칼빈의 동생도 한명 포함되어 있었다.둘째는 1535년 1월 칼빈은 친구 두 틸레(Du Tillet)와 함께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쳐 스위스 바젤까지 도주한 일이다. 그는 바젤에서 콥을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며, 조국에 남아 있는 개혁파 교도들을 변호할 목적으로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1535년 8월 그의 나이 26세 때에 탈고되어 이듬해 3월에 출간된 기독교강요는 칼빈을 개혁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칼빈의 제네바 방문얼마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조용히 집필활동을 하며 지내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1536년 6월경) 마침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었다. 이에 칼빈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가는 길에 제네바를 들렀다. 당시 가톨릭 도시였던 제네바는 1532년 10월 파렐이 한 교회 강단을 얻어 설교함으로서 종교개혁을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국민회의는 투표로서 개혁을 지지했고, 그해 8월8일 독립시로 완전한 탈바꿈하였다. 그럴때에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파렐이 칼빈을 개혁운동에 동참시켰다. 칼빈은 파렐과 함께 개혁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해 제네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등을 만들고 불성실한 회원들을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금지시키고,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칼빈의 강경한 태도를 못마땅히 여겨온 시의회의 리버럴파(반성직자파)의 공격으로 칼빈 자신이 파렐과 함께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가 1538년 5월이었다.개혁자들을 축출한 제네바는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도덕성을 잃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개혁자들을 추방한 4명의 장관은 2년이 채 가기도 전에 모두 재난을 당했다. 이로인한 제네바의 혼란은 이 작은 공화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리하여 제네바는 1541년 칼빈을 다시 불러들여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개혁자들을 비방하는 그들 리버럴들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칼빈주의의 대표적 신학은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이다. 이는 인간은 영적으로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타락해 죄인이 되어 사망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절대주권으로 조건없이 부르신다는 것이다. 셋째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이다. 하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넷째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 은혜로 선택된 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다. 이는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장로교회의 행정조직을 만든 존 낙스오늘날과 같은 장로교회의 행정조직을 만든 개혁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존 낙스이다. 스코틀랜드에는 1527년 패트릭 하밀톤(Patric Hamilton)이 루터의 종교개혁지 독일의 비텐베르그를 방문하고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대감독 비튼(Beaton)은 그를 회의에 초대한 후 이단 혐의를 씌어 1528년 화형시켰다. 하밀톤의 죽음은 나라 전역에 걸쳐 변화를 촉진시켰다.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하밀톤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여 개혁운동이 서서히 확대되어 갔다. 사태는 점차 심각해져 1534년과 1540년에도 이단 처형이 이루어졌다.하밀톤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는 조지 워셔트(George Wishart)의 설교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쯔빙글리를 지지한 조지 워셔트도 1546년 비튼 추기경의 음모에 걸려 이단으로 몰려 하밀톤이 죽은 그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이 뻔뻔스러운 살인행위에 국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두어달 후에 비튼 추기경은 친불정책(親佛政策)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비튼의 시체는 성 앤드류성 창밖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비튼의 살해자들은 성 앤드류성을 점령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을 위한 설교자 중에 가톨릭 사제 출신 존 낙스가 있었다. 낙스는 워셔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다.낙스는 프랑스 함대에 포로로 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되었다스코틀랜드 정부는 친불파로 구성되어 가톨릭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비튼 추기경을 죽인 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성 앤드류성을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군대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1547년 프랑스 함대에 의해 성 앤드류성이 함락되고 붙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갔다. 거기에 그 성에서 설교하던 존 낙스도 있었다.낙스는 19개월 후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요청에 의해 포로교환 형식으로 갤리선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났다. 1549년 4월 노예생활에서 풀려난 낙스가 가톨릭 일색으로 변해버린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향후 5년동안 영국에서 살았다. 영국은 그때 종교개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낙스는 지방의 변경요새에서 개혁신앙을 설교했다. 그후 그는 1551년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왕실 전속목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왕 앞에서 설교할 뿐만 아니라, 정규 성직자가 부족한 지방으로 다니며 종교개혁의 원리와 목적을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였다.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메리 투터가 왕위에 취임하자 영국은 다시 가톨릭으로 몰아갔다. 낙스는 영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낙스는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 등지를 떠돌며 종교개혁 동지들을 만나 제네바에서 칼빈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최초의 장로교회 탄생스코틀랜드 교회는 1560년 12월에 제1차 총회를 소집하고 이듬해 1월에는 제1차 교회헌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각 교회에는 목사와 장로들이 회중의 동의를 얻어 직책을 수행하고, 목사와 장로들이 한 치리기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후에 ‘당회’(session)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노회’(presbyteries)가 있고, 노회들 위에는 ‘대회들’(synods)이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었다. 오늘날의 장로교의 정치체제 그대로이다.만국 장로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한 웨스트민스터 대·소 요리문답과 33개 조로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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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7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7
    중세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린 ‘왈도파’ 및 ‘알비파’도 개혁파 일원개혁파 교회(Reformed Church)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스위스 취리히에는 그로스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쯔빙글리가 개혁노선에 가담했다. 취리히는 제네바와 달리 독일어권 주민들이 모여사는 지역으로 루터의 개혁사업을 계승한 지역이다.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혁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독일을 중심한 루터와 멜랑히톤이 이끈 ‘루터파’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스위스를 중심한 쯔빙글리와 칼빈이 이끈 ‘개혁파’운동이다. 개혁파의 태두 쯔빙글리취리히의 종교개혁자 훌트라이히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자신의 개혁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군과 두 차례에 걸쳐 전쟁도 불사한 진정한 개혁자였다. 그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발트하우스에서 7명의 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고, 어머니는 사제의 누나였으며, 삼촌은 가톨릭교회의 참사회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님과 삼촌으로부터 로마교회의 가톨릭교육을 받았다.10살 때 바젤의 라틴어학당에서 라틴어 문법과 음악과 변증법 등을 배우고, 14살 되던 해에 베른대학에 진학했다가 다시 빈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고, 바젤로 돌아와 성 마르티누스학당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며 고전학을 연구하여 1506년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 사제로 서품되었다.그로스민스터 교회의 목사로 취임쯔빙글리는 1518년 12월 11일 취리히의 대표적 교회인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독일계 스위스 종교개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519년 초부터 마태복음 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절 한 절을 살펴봄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천년을 넘는 동안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으나,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그리스어 성경을 앞에 놓고 회중들에게 그것을 설명함으로써 회중의 흥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그러나 그 해 취리히에는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시민의 3분의 1이 죽고, 그의 동생도 죽었으며, 쯔빙글리 자신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그가 기사회생하여 목숨을 건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덤으로써의 삶을 새로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고 믿었다. 그는 이 때부터 기독교신앙의 보다 깊은 차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그는 또 1522년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와 혼인하고,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며 교회 안의 모든 형상과 십자가 등을 철거했다. 심지어 그는 교회의 오르간도 치워버렸다. 쯔빙글리의 67개 조항과 논쟁1523 년 초 쯔빙글리는 67개 조의 논제를 걸고 가톨릭측에 논쟁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교황의 지상권, 미사, 성자 숭배, 인간의 선행과 효력, 금식, 순례, 성직자 독신제, 연옥 등의 비성경적인 계율들을 거부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가톨릭측과 개혁측의 제1차 논쟁은 1523년 1월 29일, 시청에서 성직자와 대소 의회의 의원 등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논쟁 결과 시당국은 쯔빙글리의 주장에 찬성하고 모든 설교자들에게 “신성한 복음과 거룩한 성경에 의거하여 확증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설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제2차 논쟁도 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 26일부터 시청에서 사흘간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350명의 성직자들과 10명의 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 미사와 성상숭배의 폐지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의회는 미사와 성상을 즉각 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제3차 논쟁은 1524년 1월 20일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교황주의자들은 세련된 우상숭배자들이고, 우상숭배야 말로 교회의 오류와 부패의 뿌리라고 거듭 비판하며,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의식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미사 옹호론자들은 논박을 당했다. 시의회는 자기들이 믿는 바를 고수할 수는 있으나 행정당국의 결정에 더 이상 저항하지는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1524년 6월 미사는 폐지되고, 개혁파 예식에 따른 복음설교와 성찬예배가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1525년에 종결되었다. 쯔빙글리는 가톨릭군과 벌인 제2차 카펠전투에서 47세의 나이로 그의 의붓 아들 게롤트와 그의 사위 그리고 동서와 함께 전사했다. 카펠은 취리히 호수 건너편 지역을 일컫는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의 개혁정신은 그의 제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 의해 계승되었다.개혁파의 성찬종교개혁에서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끝내 합의 보지 못한 것이 성찬이다. 개혁파 최초의 성찬식은 1525년 4월 고난주간에 그로스민스터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성찬 예식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엄숙하였다. 참례자들은 본래 제단이 있던 자리에 놓인 기다란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남자들은 오른쪽에, 여자들은 왼쪽에 자리하였다. 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와 말씀과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설교는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신다고 가르치는 요한복음 6장의 신비로운 말씀을 본문으로 하였다. 회중들은 무릎을 꿇은 채로 접시와 컵에 담긴 신성한 상징물들을 받았다. 예배 전체가 쯔빙글리의 이론에 따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고 그와의 영적인 교제를 행하는 것이었다.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미사를 폐지함으로서 떡과 잔, 두 종류의 성찬을 나누는 데는 일치했으나, 성찬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임재와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실제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이 부닥쳤다.쟁점은 성찬의 성물들이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라는 자연적인 요소들에 육체로 임재하시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임재하시는가 하는 문제였다. 또한 그리스도를 모든 참석자들이 입으로 받는가, 아니면 믿음을 통해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받는가 하는 문제였다.성찬 논쟁은 첫째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논쟁이었고, 둘째는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의 논쟁이었다. 성찬의 실재적 임재를 주장한 루터는 성찬상징론자들을 향해 “쯔빙글리파와 포도주만 마시느니, 차라리 교황파와 피만 마시는 쪽을 택하겠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친구 목사 프로브스트(Probst)에게 “복있는 사람은 성찬상징론자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쯔빙글리파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취리히 사람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했다.루터파와 쯔빙글리파와 칼빈파는 성찬에 대해 각기 견해를 달리했다. 첫째, 루터파는 성찬에서 성별의 기도 후에도 그 떡과 포도주는 주의 살과 피로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그 떡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실재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는다. 이를 공재설(共在說)이라 한다.이에 반해 쯔빙글리파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며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상징설(象徵說)이라 한다.또 칼빈은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다. 즉 떡과 포도주는 변하지 않지만, 성찬의 기도 후에 성령께서 그 떡과 잔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공로와 능력을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이를 영적임재설(靈的臨在說)이라 한다.이후 칼빈의 주장이 개혁파의 성찬론을 대변하게 되었다. 개혁파의 성찬식은 일년에 네 차례 행해졌다. 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철, 그리고 성탄절에 거행되었다. 성찬식이 거행되기 전에 전교회가 이를 준비하는 경건한 시간을 가지게 함으로써 특별히 엄숙함을 갖추도록 하였다.개혁파 교회들개혁파(Reformed Church, 改革派)란 말은 광의로는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총칭으로서 사용되지만, 정확하게는 루터파에 대해서 쯔빙글리와 칼뱅파의 교회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쯔빙글리로부터 시작된 개혁파의 신앙의 뿌리는 루터가 아니라 12세기의 왈도파와 알비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후 칼빈과 불링거에 의해서 쯔빙글리파와 칼빈파의 통합이 행하여지고, 주로 제네바가 거점이 되어서 1550년대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남폴란드, 헝가리 등에 침투했다. 12세기 월드의 물결을 일으킨 북이탈리아의 월드파는 1532년부터 개혁파에 합류했다. 정식으로는 “신의 말씀에 따라서 개혁된 교회”인데, 이를 “개혁된 교회”라고 부른다.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는 신앙내용과 교회제도가 개혁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회중에서 선발된 ‘장로’와 개교회에 청빙된 ‘목사’의 회의가 치리권을 가져 한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는다. 즉 장로회주의 대의제도(代議制度)를 가진 교회를 통칭한다. 1877년 ‘세계개혁파교회연맹’(WARC)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중세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모진 박해를 받았던 왈도파와 알비파도 회원교단으로 가입해 있다. 또 1970년에는 회중교회(조합파) 세계연맹과 병합했다. WARC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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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6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6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기본으로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루터교(Lutheran Church)중세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조로 된 공개 신학토론을 제기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독일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권 아래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인 한스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였다가 사제 서품을 받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서 유럽 역사와 세계사를 바꾼 인물이다.독일 비텐베르그의 마르틴 루터중세 비텐베르그 대학에는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이슈가 된 신학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관례가 있었다. 당시 교회의 신학적 이슈는 ‘면죄부’였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 비텐베르그 성(城)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쓰여진 장문의 논쟁문이 나붙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 요한 쉬나이더(Johann Schneider)가 내붙인 ‘95개 논제’였다. 비텐베르그 대학 부속 교회당으로 사용되는 그곳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루터는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초청해 로마 가톨릭교회에 고용된 면죄부 장사꾼들이 팔고 다니는 면죄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었다. 루터는 95개조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교회의 비신학적, 비신앙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 “죄나 형벌의 사면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교황의 면죄증으로 죄를 없이 할 수는 없다. 교황은 다만 자기가 세상에서 부과한 형벌을 방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매는 것을 너희가 땅에서 풀어도 좋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논쟁의 확대이상과 같은 루터의 논박은 교황청의 오랜 착취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루터의 논박은 죄나 형벌의 사면을 위한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게시물이 누군가에 의해 인쇄되어 배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마침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논쟁의 확대는 95개 조에 격분한 교황청의 면죄부 장사꾼 테첼(Tetzel)이 106개 조에 달하는 반론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여기에 또 요한 에크(Johann Eck)라는 잉골쉬타드 신학교수도 루터를 비난하는데 가담했다. 루터는 1518년 4월 25일 하이델베르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사들에게 논쟁을 위한 모임을 통고하고, 거기에서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계승된 신학적 논제들에 대해 논쟁했다. 루터는 하이델베르그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청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다.루터가 희생되는 것을 원치않던 독일 작센주 프레드릭 선제후는 1518년 10월에 교황청 대사인 추기경 카예타누스(000)를 아우그스부르크로 불러 루터의 주장을 듣게 했으나 일치점을 찾지 못했다. 카예타누스는 루터에게 그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이를 거절했다. 이어 1519년 1월에는 교황청 대사 밀티츠(Karl von Miltitz)가 알덴부르크에 있는 프레드릭 선제후의 전속사제 겸 비서인 슈팔라틴의 집에서 루터와 만났다. 그러나 루터를 회유하지는 못했다.그리고 또 루터는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논쟁했다. 에크는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신적 권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주장은 성경에도, 초대교회에도, 니케아 공의회에도 반대되는 것이며, 단지 로마 교황들의 형식적인 교서들에 근거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에크는 루터를 체코 보헤미야의 얀 후스와 같은 이단이라고 비난했다.라이프치히 논쟁이 무위로 돌아가자 교황의 사절들은 루터가 매우 고집이 세고 위험스러운 이단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은 1520년 6월 15일 루터를 정죄하고 그의 저술들을 불태우라는 파문 교서를 발표했다.“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옵소서. 주의 대적을 잊지 마소서, 당신 자신 때문에 탄원하나이다. 여우가 당신의 포도원을 황폐케 하고, 숲속의 돼지가 포도원을 피폐케 하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그것을 탐식하나이다.”이 파문교서는 1520년 10월 3일 에크를 통해 비텐베르그 대학 총장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루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루터는 그 해 12월 10일 오전 9시 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교황의 이 파문교서와 교황의 서적들, 교황의 문서들, 교회법전을 모두 불태웠다. 21살의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1월 28일 다시 한번 종교개혁으로 갈라진 상처를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보름스에 소집된 제국의회에는 프로테스탄트 측과 로마교회 측 지도자들이 같이 초청되었다. 루터는 소환되어 그의 책과 주장을 취소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끝까지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고 밝히고,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토로했다.루터와 농민전쟁루터의 종교개혁은 1524과 1525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그 원인은 복합적인 문제로 전적으로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려온 소작인들인 독일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빌미로 귀족들에 항거했다. 이 항거는 땅을 많이 소유한 주교들과 수도원장들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운동에 대하여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과격화를 목도한 후에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 폭도를 치라”는 격문을 내고 오히려 제후들 편을 옹호했다. 자칫 종교개혁이 농민전쟁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귀족들의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결과적으로 제후의 편에 섰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농민전쟁으로 죽은 농민들의 수는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루터의 개혁운동은 이처럼 과오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 횃불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 신교(新敎)의 승리를 가져왔다. 루터는 1546년 3월, 63세를 일기로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비텐베르그로 옮겨져 그가 처음 95개 조 논쟁문을 내건 그곳 성(城)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때까지도 루터파의 신앙은 국가나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루터파의 신앙을 인정받은 아우그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열린 것은 그가 죽은 6년 후인 1552년의 일이다.독일과 유럽의 루터파 교회루터는 종교개혁의 지도자이면서도 쯔빙글리와 칼빈과 같은 개혁파들과는 교리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그리하여 루터가 죽은 후 루터를 추종하던 교회들은 개혁파 신앙과 갈라졌다. 그래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루터파가 생겨났다. 루터교 교리는 초기 교회의 사도신경, 고대에큐메니칼 교리인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나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슈말칼덴 조항, 루터의 대(大)·소(小) 교리문답,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처음 3개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은 모든 루터교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리이고, 루터의 대·소 교리문답은 대부분의 루터교가 받아들이지만, 협화신조는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협화신조가 엄격하고 너무 세세한 교리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루터의 소 교리문답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루터교를 잘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이후 생긴 여러 논쟁으로 인해 루터교는 여러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루터교는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과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에 많으며,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이 이주해서 세운 신생국에도 많다. 유럽에서도 개혁주의 신앙이 우세한 곳에서는 루터교가 약하고,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과 같이 성공회가 우세한 곳에서는 성공회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하다. 초기부터 계속된 유럽 대륙의 선교단체와 후에 분산된 루터교단의 끊임없는 선교활동으로 루터교는 선교지(宣敎地)와 소위 신생교회 형성에 많은 공헌을 했다. 루터교는 세계 본부를 인정하지 않으나 세계 대부분의 루터교회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에 협력한다. 전 세계 루터파 교인은 약 7300만 명이다.한국 루터교회한국에 루터교가 설립된 것은 1958년 1월 13일에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 루터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루터교회는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함으로써 세계의 루터교회와도 교류를 시작하였고, 미조리 시노드(LCMS)가 이끄는 ‘국제루터교협의회’(ILC)의 회원 교회이기도 하다. 1973년부터 한국루터교회(LCK)로 불리다가, 1980년부터는 기독교한국루터회(LCK)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루터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루터교회는 현재 전국에 60개 교회와 6000여명의 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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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파 이야기
    2019-08-21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15
    각국에 독자적 지역 성공회로 발전… 전 세계 교인 수 약 1억만 명성공회(聖公會)성공회(Anglican Communion)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된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英國國敎會)의 후신이다.영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인 주후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 초 아를공의회(Council of Arles, 314년)에 영국 주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조직교회가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를공의회는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도나투스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14년 8월 남부 갈리아지방 아를에서 열린 서로마제국의 최초의 교회회의이다.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도아래 교구제도에 기초하여 교회를 조직 운영하였으나, 오랫동안 대륙의 교회와는 대부분 단절된 채로 지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국왕 윌리암 1세와 대주교 란프랑쿠스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의 교회개혁 노선에 맞춰 교회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때 영국교회도 ‘서임권 논쟁’으로 국가와 갈등이 깊었다.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와 왕의 통치를 받는 국가가 수장권을 놓고 다툰 것이다. 게다가 14세기에는 교황청의 대분열과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생겨 교황권의 영향이 크게 위축되었다.그런데 중세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헨리 8세(Henry 8, 재위 1509-1547)는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의 딸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분쟁이 생겨, 1536년 영국의회는 헨리 왕에게 ‘영국국교회의 지상 수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영국은 교황청과 사이의 재정, 사법, 행정적 유대 관계를 단절시켜 대륙의 종교개혁과 맥을 같이하는 교회로 분리되었다.그리고 헨리는 궁녀인 안나 볼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헨리에게는 이들 외에도 4명의 왕비가 더 있었다.영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하여 공동충성하고 “성공회 기도서”에 규정된 관행들을 동의하는 것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영국교회에 개혁의 불을 지핀 주인공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이다. 14세기 영국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위클리프는 1370년 ‘교황에의 저항’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교황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진정한 교회는 교황이나 추기경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 회중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르는 많은 사제들이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가톨릭의 화체설, 면죄부, 순례행각, 성직자 독신제 등을 비판하고 교황제도를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 이들을 ‘롤라드파’(Rollards)라고 불렀다. 롤라드파는 성경을 유이무이한 권위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이단자들로 몰았다.이런 와중에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했다. 캐서린은 본래 헨리의 형 아더(Arthur)와 결혼했으나 채 몇 달이 안 되어 아더가 죽자 동생 헨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생활 15년 동안 태어난 자녀들이 모두 죽고 딸 메리 하나만 겨우 성장할 수 있었다. 헨리는 후사를 얻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했다.1547년 헨리 8세가 죽고,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가 10세에 등극하여 외삼촌 서머세트(Somerset) 공작의 섭정을 받았다. 서머세트는 개혁신앙을 지지했고, 1547년 의회는 성찬식에서 평신도들에게도 잔을 주도록 명령했다. 1548년 초에는 성상(聖像)들이 제거되고, 1549년에는 사제들의 결혼이 합법화되었다.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가 1553년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복 누나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결혼이 무효화 된 캐서린의 딸로서 가톨릭 신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6세 치하의 교회법령들은 모두 폐기되고, 개혁신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죽은 1558년까지 약 300명의 개혁신앙인들이 순교했다.메리가 죽은 후, 안나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26세에 즉위하여 약 반세기에 걸쳐 치세하며 개혁신앙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가톨릭 측의 저항은 오래 지속되어 1563년에 가서야 정부는 겨우 안정기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때 훗날 ‘청교도’라고 불리운 열성적 개혁주의자들의 ‘퓨리탄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는 칼빈의 장로교적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청교도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 영국 내란과 공화정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이처럼 영국교회의 개혁은 왕실의 정치적 동기에서 정부 주도로 일어났으며, 교리신학이 그 중심이 아니고 정치와 교회법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성공회 기도서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라고도 부르는 영국국교회의 공식 예배서이다. 영국교회는 라틴어 예배를 영어 예배로 대체했다. 맨 먼저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뒤 1544년에 ‘성찬식 법령’이 공포되어 일반신자들도 이종배찬, 즉 빵과 포도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48년 말, “영국국교회의 용도에 따른 공동기도와 성례 집행, 그리고 다른 교회의식들과 행사들을 위한 책”이 상정되어 1549년 성령강림절부터 사용되었다. 공동기도서는 성직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의식과 관련된 몸짓들은 대부분 그대로 허용했다. 그러나 평신도 앞에서 성찬을 높이 들거나, 진설(陳設)하는 행위는 금지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치르신 ‘충분하고, 온전한 제사’의 유익을 얻은 예배자들의 자기 헌신으로 대체되었다.기도서에는 아침, 점심, 저녁 기도문, 각종 예배문, 의식문이 나타나 있어 전 세계 성공회는 통일된 기도와 예식을 갖는다.성공회 가입 교회의 자격성공회는 처음부터 영국 내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 각각 독자적 교구를 이루고 있었고, 1789년에 미국 성공회가 가입한 이후, 주로 영(英)연방에 속했던 지역에서 선교회로 운영되던 공동체를 포함해 1971년에 365개 가량의 교구가 생겨났다. 주로 아프리카에서 많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세 파가 있다. 하나는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고(高)교회(high church)파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파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선호하는 저(低)교회(low church)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광(廣)교회(broad church)파이다.성공회는 1930년에 열린 램버스(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관)대회에서 성공회의 정체를 밝힌 서술적 결의안을 채택했다. 성공회는 공동체로서 “성공회 기도서 속에 보편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에 따라, 신앙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급하는 캔터베리 주교좌와 한 몸을 이루며 교통하는 적절하게 조직된 주교구들이나 관구들 혹은 지역 교회들이 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공통으로 지닌다.그들은 다수 교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공동기도서’에 일반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과 의식을 지지하고 전파한다. 또한 그들은 개별적인 또는 민족적인 교회들로써, 각자의 지역 내에서 기독교 신앙과 삶과 예배를 표현하도록 촉진하며, 중앙의 법적 행정적 권위에 따라 하나로 결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공동협의회를 통하여 존속되는 상호 성실에 따라 하나로 결속된다.”성공회는 4가지 기본적 원리를 갖는다. 첫째, 성경 : 66권의 정경과 교훈으로 삼는 14권의 준정경이 있다. 둘째, 신경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온 공번된 교리를 따르고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따른다. 셋째, 직제 : 삼성직(三聖職), 즉 부제(집사) 사제(장로·목사) 주교(감독)이다. 넷째, 성사 : 그리스도가 설립한 성사를 지킨다(성세성사와 성체성사). 나머지 혼배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조병성사, 서품성사는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거기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성공회는 1947년 이래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정회원으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 외 교회들 간의 교류를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성공회의 현황성공회는 영국교회의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교회의 화체설과 7성사, 교직자 독신주의 등을 버려 신교(新敎)에 속한다. 그러나 공중예배는 가톨릭교회처럼 항상 기도서에 기초한 양식상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다. 처음에는 공중예배가 ‘미사’라고 불렸으나, 근래에 이르러 ‘감사성찬례’로 바뀌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다. 현재 전 세계 성공회 교인 수는 약 1억 명이다. 이 중 영국에만 2200만 명이 있고, 대부분 영연방에 흩어져 있다. 1889년 전래된 대한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전통과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로 약 110여 개의 지역교회에 5만 여명의 교인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교단으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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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1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4
    성공회·루터파·개혁파·장로회파·환원파·재세례파·침례파 등 파생 중세의 종교개혁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1517년 독일과 스위스를 위시한 유럽 각국에서 교회개혁이 일어났다. 교회개혁의 횃불을 든 사람은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였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그곳 비텐베르그 성(城) 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쓰여진 95개 조의 로마교회의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을 내걸었다. 비텐베르그 대학 부속 교회당으로 사용되는 그곳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면죄부는 로마교회가 만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후손들의 공덕으로 구원하는 교리이다. 루터는 그의 동료 요한 쉬나이더(Johann Schneider)와 함께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초청해 로마교회에 고용된 면죄부 장사꾼들이 팔고 다니는 면죄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토론해 보고자 했다.루터는 95개 반박문에서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자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면 욕심과 탐욕도 분명히 증가한다. △면죄부를 사므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자들은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과 같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든, 죽었든,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과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더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이를 외면한 채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면죄부 선전원들의 진상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의 뼈와 살 그리고 그 가죽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원이 재로 화하기를 원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면죄부 담당 주교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면죄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라고 면죄부의 효능을 부정했다.개혁운동의 확산루터의 이 논박은 교황청의 오랜 착취에 불만을 가진 독일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면죄부 장사꾼 테첼(Tetzel)이 106개 조에 달하는 반론을 전개하고, 가톨릭의 신학교수들이 루터를 공박하면서 이 논쟁이 확대되었다. 루터는 아직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요 사제였으므로 가톨릭교회는 루터에게 그 위험한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했다. 그럼에도 루터가 자신의 견해를 끝내 굽히지 않자, 후스와 같은 이단이라고 강력히 비난하며 파문했다. 교황의 이 파문교서는 시편의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시 74:22)로 시작해, 베드로와 바울과 모든 성인들을 언급하며 ‘숲 속의 멧돼지와 들짐승’이 주의 포도원에 들어와 파괴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루터의 책에서 41가지 주장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태울 것을 요구했다. 이 파문교서는 1520년 10월 3일 에크(ECK)를 통해 비텐베르그 대학 총장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이 파문교서를 1520년 12월 10일 오전 비텐베르그의 엘스터 문 바깥에서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가(교황이) 주님의 거룩한 자를 괴롭게 한 것처럼, 영원한 불이 너를 괴롭게 하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며, 교황의 파문교서, 교황의 선언문, 로마교회법, 에크와 엠저의 저작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로써 루터는 교황청과 완전히 갈라셨다.사실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한 이 결정이 유럽 교회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것인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프랑스에서 전 유럽으로 동시에 퍼져나갔다. 독일에서는 도시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따르는 시민들과 가톨릭교회를 사수하려는 시민들 간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스위스에서는 독일어권 취리히를 중심으로는 쯔빙글리의 개혁파가 일어나고, 프랑스어권 제네바를 중심으로는 칼빈이 개혁운동을 주도하여 모든 도시로 파급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개혁신앙을 따르는 ‘위그노’들이 일어났으며, 영국국교회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성공회란 이름으로 로마와 갈라섰다. 또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을 중심한 ‘스위스 형제단’은 가톨릭교회의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루터파나 개혁파보다 더 급진적 교회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을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부른다. 재세례파의 급진논리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혁파 역시 위협을 느꼈다. 그로인해 재세례파는 많은 희생을 낳았다. 오늘날 재세례파에는 ‘아미시’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파가 북미 대륙에서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종교개혁세력은 다양한 신앙고백과 신앙문답서를 발표했다. 루터파의 신앙고백으로는 마르틴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슈말칼트 신조(1537년) 등이 있고, 개혁파의 신앙고백으로는 제1스위스 신앙고백(1536년),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1537년),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스코틀랜드 제1신앙고백(1560년),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1563년), 아르미니우스 신조(1610년), 도르트 노회 신조(1618년), 재세례파 신조(1632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8년), 스위스 일치 신조(1675년)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루터파와 개혁파가 다같이 동의한 신앙고백서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은 루터가 별세하고 난 후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 신학자들이 치열한 신학논쟁을 통해 공동의 신조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루터파의 멜랑히톤의 신학사상과 칼빈의 신학사상이 짙게 반영된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은 제1부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 제2부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 제3부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의 일부이다. “문 76.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한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의 거룩한 몸에 더 연합함으로써, 그는 비록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위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며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가 되어서 마치 한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의 통치를 받드시 한 분 성령에 의해 살아가고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한다. 문 78. 그러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는가? 답) 아니다. 세례식에서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지 않으며 또 죄를 씻어주지도 않으며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거룩한 표지이며 확정에 불과한 것처럼, 주의 성찬에서도 거룩한 떡은 그리스도의 몸 자체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성례의 본질과 용례상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것이다. 문 79.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자신의 피, 혹은 자신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하고, 사도 바울은 무슨 이유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답)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도 우리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된 음식과 음료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눈에 보이는 표징과 보증으로써 마치 우리가 주의 기념으로서 이 거룩한 표지를 육신의 입으로 받는 것과 같이, 그의 진짜 몸과 피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참여하는 것과 또 우리 자신이 마치 우리 몸으로 고난을 받고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그의 고난과 순종이 우리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여 주시려는 것이다.”가톨릭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로마교회의 비성경적 교리와 교회전통을 부정하고 개혁운동에 나선 개혁세력을 통털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란 말은 개혁신앙을 따르는 제후들이 1529년 독일 슈파이어 제국의회에 제출한 항의서(저항: Protestatio)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를 스스로는 ‘복음주의’(Evangelical), 또는 ‘개혁주의’(Reformed)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신교’(新敎), 혹은 ‘개신교’(改新敎)라고 번역한다. 오늘날 전 세계에 나타난 수많은 그리스도교 분파(교파)는 대부분 이 프로테스탄트에서 일어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교회의 원리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에 둔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깨달음에 따라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이 하나의 교파(敎派)로 생성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는 원리에 따라 신교 내에서 교파간, 교단간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 대표적 기구가 1948년 8월 설립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이다. 전 세계 교회에는 이처럼 세계적, 지역적, 국가적 에큐메니칼 기구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에큐메니칼 기구들도 하나의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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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9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3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지만 끝내 살아 남아 보헤미야 형제교회 탄생체코형제교회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존 위클리프중세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개혁의 횃불을 밝힌 사람이 있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신학교수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가 그 사람이다. 그는 1370년 ‘교황에의 저항’이라는 책을 통해 “교황의 주장들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악한 것이며, 교황 자신의 구원도 일반 사람들의 구원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모든 기준은 복음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로 결정될 뿐, 결코 교황이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면죄부 판매, 순례행각 및 성직자 독신제, 교황 제도 등을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그러나 위클리프의 이 책은 이단서적으로 규정되어 불태워지고, 그는 1384년 12월 29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교훈을 몸소 실천하려는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을 ‘롤라드파’(Rollards)라고 한다. 롤라드파는 사도적 청빈을 생활 모토로 삼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지팡이 하나만 들고 둘씩 짝지어 전국을 돌며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와 비성경적교리를 비판했다. 그리하여 롤라드파는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체코 보헤미아의 얀 후스영국에서 롤라드파에 대한 탄압조치가 한창인 14세기 후반기에 체코 보헤미야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의 물결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얀 후스(John Hus, 1371-1415)이다. (요한 후스, 쟌 후스, 존 후스가 모두 얀 후스를 언어권에 따라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당시 위클리프가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과 후스의 모교인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383년 영국 왕 리차드 2세와 보헤미아 공주 안나와의 결혼으로 양국은 가까운 관계를 갖고, 보헤미아 청년들이 대거 옥스포드대학에 유학생 신분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들이 왕비 안나에게 기증되었고, 유학생들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보헤미아로 가져왔다.이런 이유로, 1380년대 초반기에는 벌써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위클리프주의를 프라하로 들여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que, 1371~1416)이다. 제롬은 후스의 제일 가는 친구요 제자이기도 했다. 후스는 영국에 유학한 일이 없으면서도 제롬을 위시한 보헤미아 유학생들을 통하여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후스는 위클리프와 같이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서만 구성되며,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성경적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이같은 당연한 교회의 가르침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간주되었다.프라하 베들레헴교회 설교자후스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프라하 대학교에 다닐 때 노래를 부르고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하여 1393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년 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아, 1401년에 로마교회에서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프라하대학의 신학부장 겸 프라하 베들레험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어로 설교했다. 후스는 가톨릭교회의 성직 위계제도(성경의 집사, 장로, 감독 외에 추기경과 교황으로 이어지는 가톨릭 성직 제도)에 회의를 가졌다. 당시 체코 교회는 슬라브 민족주의와 보헤미아 민족주의 간의 갈등으로 교황청은 복잡한 문제들에 얽혀 있었다. 그로인해 프라하의 후스의 적수들은 그를 로마 교황청(1407년)에 고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미결상태로 심리되고 있는 동안 교황청은 분열이 생겨 후스에 대한 고발건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후스가 프라하대학의 초대총장이 되었고, 그의 주장이 보헤미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후스가 1409년 프라하대학 내에 있는 보헤미아파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개혁과 국민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하게 되자 가톨릭 교권주의자들은 후스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후스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후스파의 분열로 탄압 빌미 제공이때 후스의 활동을 못마땅히 여겨온 프라하의 대주교 스빈코(Sbinko)는 자신들이 옹립한 피사계의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이용하여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에서 후스가 설교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불태우라는 교황령을 받아냈다. 후스를 침묵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리하여 1410년에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불태워졌고, 대주교는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가 파문 당하자 프라하에서는 대중들의 소동이 일어나 오히려 후스는 민족적 영웅이 되어갔다.이런 가운데 1410년 교황 알렉산더 5세가 갑자기 죽고, 그를 이어 요한 23세가 새로운 피사계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이 십자군을 소집하면서 기금을 모우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자 후스는 이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에 교황은 1412년에 후스를 파면하고 프라하에서 그를 추방했다. 그래도 대중은 후스를 지지했다. 그러자 후스파는 두 유파로 분열했다. 하나는 칼릭스파(Calixtines; 성배파)이고, 다른 하나는 타보르파(Taborites, 타보르 산에 거점을 둔 파)이다. 칼릭스파는 성찬 때 떡과 잔을 평신도에게 허용해야 한다는 양형성찬파로서 대체로 귀족적인 사람들의 모임이고, 타보르파는 노동자 농민 등을 대표하는 계층으로서 보다 과격한 집단이었다.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칼릭스파는 종교적인 문제에 불만이 큰 반면, 타보르파는 사회적 문제에 불만이 컸다. 타보르파는 화체설과 성인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면죄부, 고해성사, 맹세와 춤과 오락을 금지했다.이 두 파는 끝내 서로 대립하다가 프라하에서 22,000명이 한꺼번에 학살 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1434년 5월 30일 ‘리판의 전투’라는 일대 접전을 벌여 많은 사람이 죽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보헤미아가 분열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후스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정죄 받아 화형 당해이런 와중에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를 받아 콘스탄츠에서 1414년 11월 1일 공의회를 개최했다. 1918년까지 45차례의 회의를 가진 이 공의회는 교황청의 대분열을 수습하고, 공의회의 결정이 교황의 결정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인함으로써 중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 평가된다. 당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왕도 겸하고 있었다.황제는 보헤미아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후스를 공의회에 초청했다. 후스는 황제로부터 ‘안전통행권’을 약속받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1415년 5월 4일 회의 도중 영국의 위클리프를 정죄하여 그 시체를 파내 불사르도록 결정하고, 7월 6일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콘스탄츠 시 외곽에서 화형시켰다. 후스의 친구 프라하의 제롬도 얼마 후 히르샤우에서 체포되어 콘스탄츠로 압송돼 같은 장소에서 화형당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100년 전의 일이다.보헤미야 형제회그러나 로마교회는 후스파 교회를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었다. 후스파에는 이 두 집단과 다른 집단도 있었다. 이를 우니타스 프라투룸(Unitas Fratrum0이라 한다. 대개 보헤미야 형제회(the Bohemian Brethren)라고 알려진 조직이 그것이다. 보헤미야 형제회는 후스가 죽고 40년 뒤인 15세기 중반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이미 보헤미야와 모라비아에 400여 개에 이르는 지교회에 20만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신앙고백고서와 요리문답 및 찬송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직접 예배를 인도하고, 가톨릭 사제들에게 성찬을 받지 않았다. 군복무와 전쟁을 배격했고, 연옥 교리를 반대했으며, 생활이 건실하지 못한 사제들의 성직 수행을 배격했다. 이들은 1722년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진젠도르프 백작이 마련해준 헤론후트라는 지역에 정착하고,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도 아래 헤른후트를 거점으로 벌인 선교사업으로 루터파와 종교개혁 세력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이들은 또 그린란드로부터 서인도 제도와 기니, 티벳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힘썼다. 이들 대부분은 목공, 조리사, 정비공, 제빵업 등의 기술을 배운 평신도 선교사였다.지금 체코에 있는 형제교회들은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된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루터보다 딱 100년이 앞서지만, 오늘날 그들의 교회도 프로테스탄트 후스파 교회라고 부른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이들의 진리에 대한 불굴의 정신을 이어 받은 데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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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5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12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중세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끼쳐왈도파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분리파 중에는 카타리파와 함께 ‘왈도파’(Waldenses, 또는 발도파)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교황은 이들에 대해 십자군을 일으켜 진압에 나섰다. 그것을 ‘알비 십자군’이라 한다. 기독교 세계가 사라센족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십자군을 다른 기독교인을 박멸하기 위해 투입한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일이 없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황의 호소에 네 무리의 십자군이 결성되어 프랑스 남부의 이단집단을 향해 진격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은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중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져있던 왈도파는 가톨릭교회의 인준을 받기 위해 1179년 제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 왈도가 직접 참가하여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3)에게 하나의 전도회로 인정해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그들이 무식하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평신도 전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시 종교회의에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교황의 사절단이 왈도파에게 ‘성부 하나님을 너희들이 믿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또 ‘성자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네, 믿습니다’라고 했다. ‘성령 하나님을 믿느냐?’ 그들이 또 대답하기를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믿느냐?’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판정에서는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세 스콜라신학에서는 ‘믿는다’는 말을 성 삼위일체에만 적용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사절단은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복음전파를 허용받지 못했고, 이어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Lucius 3)는 그들을 이단으로 파문했다. 이후 왈도파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핍박의 대상이 되어 끔직한 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왈도파는 이단으로 몰린 중세의 다른 분파들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하나의 개혁교회 일파로 남아있다.1. 왈도파는 무엇인가?왈도파의 창시자는 흔히 프랑스인 피에르 왈도(Pierre Waldo, 1140-1217)로 알려져 있다. 그는 리용에 살았던 부유한 장사꾼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어느날 파티에 참석하는 동안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재산의 관리권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가난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가난을 실천하고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복음을 설교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리웠는데, 거친 신발을 신고 다녔으므로 신발파(Sandalati)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사도들에게 두고 있다.초기 왈도파는 교리와 신앙상에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조금도 위반할 생각이 없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찬식과 같이 떡과 잔을 사제들이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었고, 유아 세례도 실시했다. 그리고 오직 일심으로 성경에서 가르친대로 사도적 삶을 실천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대의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배포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의를 변개할려는 의도도 없었고 분리된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도 없었다. 오로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된 목적을 삼았다. 그리하여 1260년에는 벌써 42개의 교구로 성장했다. 그러나 1380년 대립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s 7)가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한 수도사를 보내 “이단자들을 척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왈도파가 누려왔던 평화가 깨어졌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화형을 당하였다. 1400년 겨울에 이르러 핍박이 점점 강도가 높아지자 왈도파의 가족들은 알프스 산맥의 깊은 계곡과 군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피신해 수백년 간을 대대로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사보이 왕가의 통치적인 피에몬테(Piedmont) 산지를 근거지로 삼고 유럽 전역에 핍박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다.2. 왈도파와 교회 개혁왈도파는 세 지역에 따라 분류된다. 그것은 프랑스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이태리 롬바르디의 가난한 사람들, 오스트리아의 왈도파이다. 그리고 이 지역 뿐 아니라 독일과 보헤미아, 스페인 등에도 흩어져 살았다. 그들의 예배는 개인의 가정에서 드리고, ‘바르비’(barbi)라는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로인해 왈도파는 16세기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제네바 종교개혁파와 접촉해 1532년부터는 가톨릭의 미사를 배제하고 종교개혁 교회와 그 목회형식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그들의 예배는 공개되고 체계가 잡혔으며, 정규 제네바 신앙고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는 동안 스스로를 단지 종교개혁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지닌 선민 곧 ‘알프스의 이스라엘’로 자처했다. 이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 사용한 이름은 ‘그리스도의 형제들’ 혹은 ‘가난한 이들’이라고 했다.3. 왈도파의 주장그러면 왈도파는 무엇을 주장해 그처럼 모진 박해를 받았는가? 그들은 세 가지 원리를 따랐다. 첫째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19, 20)는 말로 요약된다. 로마 가톨릭 당국자들은 이것을 교황과 고위성직자들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둘째는 성경말씀을 그들의 지식의 근본으로 삼고, 성경의 권위와 민중을 향한 성경교육에 열중했다. 그 시대 아직까지는 평신도가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로마 가톨릭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인정하고 자국어 번역성경은 부정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율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경에만 절대적 권위를 두고, 믿음, 윤리, 예배, 교리에 대한 문제에서 오로지 성경만을 따랐다. 셋째는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가톨릭측은 왈도파가 극악한 이단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 설교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더구나 왈도파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전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성들은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가질 수 없었다.이런 면에서 왈도파에서 중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평신도들의 권리며 임무로 여겼다.그들은 또 로마교회의 연옥 교리,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면죄부, 성자 숭배, 성상 사용 등을 거부했다. 다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실천이었다.중세 왈도파의 특징으로는 복음서 특히 산상수훈에 대한 순종, 엄격한 금욕주의, 천년왕국설에 대한 신앙, 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다. 후에 가톨릭교회에서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교회의 통일성만을 중요시한 로마 가톨릭은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모든 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왈도파의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통일성을 강조해온 로마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이단자들이었다. 중세 교회사는 페이지마다 왈도파와 같이 억울한 이단들이 흘린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4. 현대의 왈도파왈도파는 1848년 사보이 가문의 알베르 왕이 공포한 해방법령에 의해 자유를 얻기까지 300년동안 박해, 추방, 귀환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왈도파의 신앙과 사상은 앵글로색슨 복음주의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수백년 견지해온 프랑스 방언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 1855년에는 피렌체에 최초의 신학교를 세우고, 그 후 로마에도 신학교를 세웠다. 이 신학교에서 이탈리아어 성경을 번역해 이탈리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제공했다. 이탈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왈도파 정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 고아원, 양로원, 병원, 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사회적 활동에 나서고 있다.왈도파는 1848년 마침내 활동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늘날 왈도파는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 현재 왈도파 교회는 제네바 에큐메니칼협의회(ECG)와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회원이기도 하다. WARC는 장로교 정치체제를 가진 세계교회의 연합체이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예장통합측과 기장이 WARC 회원이다.
    • 기고
    • 분파 이야기
    2019-06-21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1
    그들의 목표는 도덕과 신앙의 개혁… 중세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 미쳐중세의 분리파 카타리파중세의 분리파 운동은 제후들과 성직자들의 탐욕과 세속성에 반기를 든 대중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성직자들의 세속성과 교만, 교회예배의 형식주의, 교황제도에 깔린 세속적 야심들을 타파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제들의 교만과 탐욕, 부도덕성을 지적했다. 이러한 불만의 저변에는 대중의 영적 배고픔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 복음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직자와 교회의 의례(儀禮)를 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로마교회 사제들의 지도와 감독에서 떠나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교회가 지배하는 시민사회의 도덕과 신앙의 개혁이었다.그리하여 11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밀라노, 오르레앙, 스트라스부르, 괼른, 마인츠에서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이르기까지 분리주의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십자가를 비롯한 가톨릭교회가 숭배하는 여러 가지 상(像)들을 우상숭배 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성교회(로마파)는 그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기성교회는 그들을 향해 주님의 포도원에 몰래 들어와 “포도원을 망쳐놓는 솔로몬의 여우들”, “저주의 살로 타격을 가하는 전갈”. “해충을 지닌 채 땅에 숨는 요엘의 메뚜기떼”, “바빌론의 금잔에 담긴 뱀의 독을 내미는 귀신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분파는 카타리파였다. 이에 대해 카타리파는 로마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자 곧 음녀이며,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응수했다.1. 카타리파는 무엇인가?중세의 분리파 가운데 가장 널리 확산된 분파는 카타리파(Cathari)이다. 카타리는 ‘순수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로스(catharos)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그 이름이 다양하게 불렸다. 그들의 중심지가 프랑스 남부의 알비(Allbi) 시였으므로 ‘알비파’(Allbigensis)라고도 불렸고, 또 유럽 동부에서는 불가리파(Bulgari), 부가레스파(Bugares), 부그레스파(Bugres)로도 불렸다. 그 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직조공과 노동자 계층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테사랑파’(Tessarants)로 불리거나, ‘파울루스파’ ‘푸블리카니파’ ‘포플리카니파’라고도 했다. 카타리파는 1167년에 프랑스 남부 생 펠릭스 드 카라망에서 독자적 교회공의회를 소집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공의회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니케타스가 참석했다. 12세기 말경에는 거의 1천 개의 도시에 교회를 설립하고 그 수가 약 4백만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카타리파 소년들과 소녀들을 가르칠 학교도 운영했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교리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 카타리파의 교회론카타리파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악하고, 다른 하나는 의롭다. 그들은 주님께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한대로 기성교회(로마파)는 참 교회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참 교회는 다른 교회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견딘다. 로마교회는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다. 참 교회는 먼저 가르치는 일에 힘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세례를 앞세운다. 참 교회는 고관들과 고위성직자들과 추기경들과 대부제들과 수사들을 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에 따라 안수를 받고 고해를 행한 의인들의 교회이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사용했다. 성경의 기적들을 영적으로 해석했고, 비유들을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했다. 예를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아담이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 이 낮은 세속의 강도들 사이에 떨어졌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을 대표하는 멜기세덱과 아론이다. 구약의 율법으로는 그를 도울 수 없었으나, 참 교회인 자신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다고 해석했다.카타리파는 교회를 ‘완전한 자들’과 ‘신자들’로 구분했다. 완전한 자들은 하나님께 위령 안수례(慰靈按手禮, consolamentum) 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묶인 자로서 선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렸고, 신자들은 교리문답자들에 해당되어 앞으로 위령 안수례에 참여할 준비 중에 있는 자이다. 위령 안수례는 로마교회의 칠성사를 배격하는 의미에서 행해졌는데, 세례보다 더 광범위한 영적 의미를 갖는다. 3. 카타리파의 신행(信行)카타리파는 육식은 고기뿐 아니라 달걀과 치즈까지 금하고, 생선은 먹도록 허용했다. 생선이 허용된 것은 주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과 부활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선을 주어 먹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 카타리파는 사형을 반대했다. 이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라는 구절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기피하고, 교회가 전쟁을 장려하고 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맹세를 금했다. 카타리파는 사제의 복장과 교회의 꾸민 제단, 십자가상을 우상숭배로 보았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수치와 죽음에 쓰인 도구였으므로 교회가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십자가보다는 창이나 가시가 신앙의 상징으로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또 로마교회의 연옥과 면죄부 교리를 부정했다. 카타리파 교인들은 이단재판소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슈타인벨트의 에버빈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힘겨운 방랑생활을 하고 있다. 늑대 떼에 에워싸인 양들처럼 이 도시 저 도시를 피해 다닌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거룩하고 엄숙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과 순교자들처럼 박해를 당한다. 기도와 금욕과 수고가 따르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이 쉽다.”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신학사상으로 역사적 기독교의 보편성에 오류를 남기긴 했지만, 당시 교회가 제시한 것과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영성에 가까이 가려고 한 노력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4. 그외 분리파들과 이단 탄압중세에는 카타리파 이외에도 수많은 분리파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회에 의해서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238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공포한 법률에는 카타리파, 파타리아파, 베긴파, 아르놀드파, 발도파를 비롯하여 19개의 이단 분파가 들어 있었다. 이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겸손파, 스트라스부르의 오르틀리브파, 벨기에의 사도파 , 또 파사기니파, 요세피니파, 아르놀드파 등이 있었다. 어떤 문헌에는 72개, 혹은 130개에 이르는 분리파 집단이 거론된다. 그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의식과 조직을 반대했다. 그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십자가와 성상 등의 숭배 행위를 우상 숭배로 간주했으며, 화체설과 미사 교리를 부정했다. 이들 분리파를 탄압하려는 세속 정부가 제정한 이단금지법은 교회의 이단에 대한 법률과 일치했다. 이단은 제국에서 추방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또 이단의 재산은 1232년에 공포된 법률에 의해 몰수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4년에 이들 분리파에 화형을 언도하거나, 판사의 재량에 따라 그들의 혀를 뽑도록 했고, 1231년 시칠리아 헌법은 교회가 이단으로 판결한 자들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불태우도록 규정했으며, 같은 해 로마에서는 이단은 교회 법정이 판결을 내린지 8일 내에 사형을 집행토록 했고, 베네치아는 1249년부터 이단들을 화형에 처했으며, 잉글랜드는 1401년에 화형법이 통과되었다. 독일에서는 심지어 이단을 화형시키지 않는 군주는 이단으로 취급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종교재판소는 1228년 프랑스 루이 9세가 제일 먼저 법령으로 승인한 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영향을 미치는 모든 나라에 설립됐다. 종교재판관들은 대체로 사제가 아니라,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이 맡았다. 이들은 이단 혐의가 있는 사제들에게서도 성직록을 박탈하고, 세속 권력의 지원을 받아 이단을 진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 그들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는 교황청에 항소하는 것 외에는 재심을 청구할 길이 없었다.그러나 그들 분리파들의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많은 부분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들어왔다. 모든 개혁세력은 십자가 숭배와 마리아와 성자 및 화상 숭배를 부정했으며, 루터파와 칼빈파는 미사와 화체설을 버렸고, 사제와 주교와 추기경과 교황으로 이어지는 교회 성직위계제도를 버렸다. 또 재세례파와 침례파는 유아세례를 버렸다. 이것들은 모두 중세의 분리파들이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몰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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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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