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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0]
    1453년 콘스탄티노플 이슬람에 함락되자 동방교회 상징 모스크바로 옮겨가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988년 끼예프 루시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동방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끼예프 루시 전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있다. 끼예프 루시 귀족들은 서방에도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교란 것이 있고, 남쪽에도 이슬람이라는 유일신 종교가 발전하고 있는데 자기들만이 무속신앙에 젖어있다고 생각해 블라디미르에게 우리도 좋은 종교를 받아들이자고 간언했다. 이에 블라디미르는 현자(賢者)들을 메디나의 이슬람 예배와 로마의 가톨릭 미사,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 예배에 참관토록 했다.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슬람 예배에는 슬픔만이 있었고, 가톨릭 미사에는 영광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동방교회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1만여 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진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 예배의식에 감탄했다고 보고했다.“소신들은 그때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러한 광휘와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없기에 제대로 묘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곳에서는 신께서 인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과 그 사람들의 예배의식은 다른 어떤 민족의 예배의식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이에 감동을 받은 블라디미르 대공은 동방교회 선교사들을 초청했고, 이듬 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성직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비쟌틴 황제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함으로써 끼예프 루시와 비쟌틴 제국이 정치, 종교적으로 하나가 되었다.1. 제3의 로마, 모스크바러시아인들에게 하나님은 진리와 믿음의 신(神)일뿐 아니라 아름다움의 신이었다. 그리하여 신앙이란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등식이 생겨난 것이다. 아름다움은 곧 진리였으며 진리는 곧 선한 것이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비쟌틴 문화를 받아들이고, 문자는 9세기 중엽에 비쟌틴 황제의 특명을 받고 중부 유럽에 파견된 두 명의 선교사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오스가 불가리아 방언을 토대로 만든 슬라브 문자를 채용했다. 그때까지 러시아에는 문자가 없었다.러시아교회는 처음에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예속되었다가, 1037년에 끼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을 짓고 총대주교좌 성당으로 지정했다. 이로써 러시아교회는 콘스탄티노플로 교구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회로 확립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237년부터 1480년까지 250년간 몽고(타타르)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1326년)에 총대주교좌가 끼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오면서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명성을 얻었고, 국호 또한 루시에서 러시아로 변경했다.1453년 5월 29일,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젊은 슐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함락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존재했던 비쟌틴 제국은 1123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대성당 총대주교좌에 있던 동방교회 쌍두 독수리 문양(깃발)이 갈 데가 없어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교회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2 로마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터키) 함락되고(1453년), 러시아에서 타타르(몽골) 지배가 1480년에 종식되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두 사건이 자연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정교회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진실로 참된 존재가 되며, 예배 안에서 자신의 완전과 자아 성취를 발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러시아인의 시, 예술, 음악에 영감을 주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몽고와 터키, 또 공산주의의 지배하에서도 러시아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2. 러시아교회의 성사(聖事, 성례)러시아어로 성사는 ‘신비’(tainstvo)라고 한다. 물질계의 상징을 통하여 신의 은총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성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전 인류가 구원되는 것을 지향하며, 지상에서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사제이지만 그 직접적인 집전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의 핵심은 성찬예배이다. 성찬예배의 참여자들은 이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고 성체와 성혈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7성사는 다음과 같다.△세례성사: 세례성사는 가장 기본적인 신비로, 세례성사를 받는 사람은 죄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견진성사: 세례성사가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견진성사는 새 생명의 완성이다. 사제는 ‘미로’라는 기름을 신자의 이마, 눈, 코, 입술, 손, 발에 발라준다. △성체성혈성사: 성찬예배에서 거행되는 모든 전례의 중심이다. 신자는 영성체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개인적으로 자신 안에 맞아들이는 것이다.△고백성사: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저지르는 죄를 사제에게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사함받는 것이다.△신품성사: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이 신품성사를 통해 성직자가 된다. 기혼자나 미혼자 모두 사제가 될 수 있다. △결혼성사: 남녀가 사랑으로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정교회는 이 소중한 결합을 축복해 준다.△성유성사: 임종을 앞둔 사람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름과 기도로 치유하고 위로하는 성사이다. 3. 러시아교회의 매일 기도의식정교회의 성무일과는 시간별로 나누어진 매일 기도의식으로 진행된다. 매일 기도의식은 ‘만과’라고 부르는 저녁 기도에서 출발한다. 해질 무렵 시작되는 만과는 그 다음 날의 시작으로 이어진다.△만과: 주님의 놀라우신 창조를 경탄하며 자비를 호소하는 기도이다.△석후과: 매일 밤에 드리는 기도로, 이 밤에 나의 육체와 영혼을 그리스도의 품속에 맡기는 기도이다.△심야과: 우리 영혼이 한밤중에도 깨어 있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깨우치는 기도이다.△조과: 하루를 새롭게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이다. △제1시과: 오전 6시에 봉헌하는 기도로, 암흑에서 빛을 발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감사하는 기도이다. △제3시과: 오전 9시에 봉헌하는 기도로, 사도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상기시키는 기도이다.△제6시과: 정오에 봉헌하는 기도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상기하는 기도이다.△제9시과: 오후 3시에 봉헌하는 기도로, 주님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기도이다.4. 러시아교회의 개혁과 분열러시아교회에는 17세기 중반에 옛 의식을 고수하려는 전통고수파와 시대에 맞게 고치려는 개혁파 사이에 혼란도 있었다. 러시아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일예배를 전례에 따라 8시간 내지 10시간동안 드렸다. 이를 ‘단성제’(單聲祭)라 한다. 이를 5시간 정도로 줄인 것이 ‘다성제’(多聲祭)이다. 그런데 소위 다성제는 성찬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사제의 선창과 부제의 호칭기도, 성가대의 응송과 독서자의 영창 등 여러 기도문이 동시에 발성되어 몹시 혼란스러웠다. 신도들은 기도와 성가의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고, 예배 중에 옆사람과 잡담을 하거나 소곤거리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또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꼰이 1652년 러시아 전례양식을 그리스식으로 바꾸면서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으로 하던 것을 세 손가락으로 할 것과, 두 번의 알렐루야 대신 세 번의 알렐루야를 부르도록 했다. 이 조치에 무수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니꼰의 개혁에 반발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배교 행위나 마찬가지라며, 이에 항의하여 약 2만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불길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들을 구교도라고 부른다. 결국 구교도는 이단으로 몰려 모두 파문 당했다.이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떠나 분리파가 되었는데, 그들 중의 일부는 신학적으로는 정교회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다분히 비정교회적인 이단으로 발전해 갔다. 이 외에도 성직자의 존재를 들러싸고 갈라진 ‘사제파’와 ‘무사제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5. 러시아 교회의 이단들러시아 교회의 최초의 이단은 서쪽 노브고르드라는 도시에서 14세기 말에 시작된 ‘삭발파’(스뜨니골니끼)이다. 삭발파는 주교가 성직자를 서품할 때 그 비용을 징수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를 ‘성직매매’라고 주장하면서 그런 식으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그들의 주장은 점점 더 발전해 결국 세례성사를 제외한 모든 성사를 부정하고, 끝내는 내세와 부활을 부정하는데까지 나아갔다.또 15세기에는 ‘유대주의파’라는 새로운 이단도 생겨났다. 유대주의파는 신약의 삼위일체는 구약의 유일신 개념에 위배되며, 구약의 메시아는 종말 직전에 오시기로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콘, 십자가, 수도생활, 전례, 단식, 그리고 제도로서의 교회 전체를 부정히여 비기독교 집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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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9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9
    성령발출설·마리아숭배·사제결혼 등 서방교회와 달라그리스 정교회(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는 가톨릭이라고 불리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그리스도교회가 1054년 서방교회와 갈라지면서 얻은 동방교회의 이름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 교회를 그리스 정교회 또는 동방 정교회라고 부른다. 동방 정교회는 니케아 신조를 비롯, 초기 니케아 시대에 결정된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모두 인정한다. 성경과 교회의 전승을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믿고, 성상화나 성유물에 대한 예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만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또 7성례와 화체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미사, 사제의 교권의 절대성을 믿는다.1. 왜 분열했나?동방교회가 서방교회와 갈라진 근본 원인은 로마 교구의 ‘교황’제도에 있다. 당시 로마 판도 안에 있던 그리스도교회는 5대 교구(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콘스탄티노플)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교구는 독립적이어서 교구의 총책임자를 총대감독(총대주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590년에 이르러 로마 교구가 수위권(首位權)을 주장했다. 로마 교구는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세운 교구임으로, 로마 교구의 총대감독이 세계 그리스도교회의 대표성을 갖는 ‘교황’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비쟌틴제국의 수도에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황제를 모시고 있는 교구라는 이유로 로마 교구의 수위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보다 앞서 성령론 논쟁을 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이 어디서부터 오는가(성령발출설) 하는 문제를 놓고 충돌이 생겼다. 니케아 이후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성령이 단지 인간에게 선사된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한 실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모인 공의회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이다. 공의회는 5월부터 7월까지 두달 간 계속되어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채택하고 폐회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서방교회가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발현)를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라고 고친 것이다. 그것이 니케아 정신에 합당하다는 이유였다. 이것을 성령발출설(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한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에 이를 수정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으나 서방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2. 그리스도교의 대분열동방교회(Eastern Church)와 서방교회(Western Church)는 이같이 대립되는 신학적 논쟁을 오래동안 해오다, 1054년 7월 16일 서로를 파문하고 갈라졌다. 1054년 초 로마 교황 레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게롤라리우스에게 3명의 사절을 보냈다. 비쟌틴제국 내 로마교회 수도원 폐쇄 문제를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3명의 사절단은 훔베르트 추기경, 로렌의 프레데리크 추기경, 그리고 아말피의 페트루스 대주교이다. 이 3명의 로마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4월 초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들은 총대주교좌를 방문했으나 게롤라리우스가 만나기를 거절하자 푸대접을 받았다며 불끈 화를 내면서 교황의 편지만 남겨놓고 나가버렸다.총대주교가 교황의 편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봉인을 뜯어본 흔적이 있었다. 사절들이 그 편지를 중간에 개봉해 누군가에게 보여주었거나 내용을 고쳤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다. 게롤라리우스는 교황의 사절이라는 자들이 아주 불손할 뿐 아니라 후안무치한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절단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고 그들과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7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이 성찬식을 위해 소피아 대성당에 모여 있는 가운데 로마 사잘단은 각기 정식 대주교복과 추기경복을 갖춰 입고, 소피아 대성당에 나타나 주제단 위에 총대주교 게롤라리우스를 파문하는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신발의 먼지를 터는 상징적 행위를 보이고 성당을 나섰다.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총대주교는 파문장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로마 사절들을 공식적으로 파문했다. 이로써 ‘하나의 그리스도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라는 대분열로 갈라서고 말았다.3. 동방 정교회의 교리와 예배동방 정교회 예배의 기본은, 첫째 성찬예배, 둘째 성무일과(아침부터 저녁까지 여섯 가지 기도 시간), 셋째 세례, 결혼, 수도 서약, 대관식, 교회봉헌, 장례 등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예배이다. 정교회 예배의 특징은 신적인 아름다움의 강조이다. 그리스도교는 성찬예배의 종교이다. 그래서 미사(Missa, Mass)라고 부른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즉 보이는 말씀(성찬)이 중심이지, 들리는 말씀(설교)이 중심이 아니다.첫째, 동방 정교회는 무엇보다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가 으뜸이고, 교리와 기독교적 훈련은 그 다음이다. 따라서 성찬예배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거룩한 성찬예배는 동시에 두 세계를 포용한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성찬예배는 동일한 것-하나의 제단, 한 희생제사, 한 임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방 정교회는 지상의 회중이 예배할 때 “지금 천상의 권세들이 우리와 함께 하며, 눈에 보이지 않게 예배하고 있다”고 믿는다.또 동방 정교회 예배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안디옥에서는 아랍어로, 헬싱키에서는 필란드어로, 동경에서는 일본어로, 서울에서는 한국어로, 뉴욕에서는 영어로 예배를 드린다. 둘째, 동방 정교회는 천국의 위대한 전례를 외적으로 빛나는 광채와 아름다움을 지닌 성화(聖畵, Icon)로 표현한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는 어디나 성화로 가득차 있다. 칸막이나 벽면에, 특별한 성물함에, 혹은 책상 위에 성화가 놓여져 신자들이 공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동방 정교회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양초를 들고 성화에 다가가서 성호를 긋고 성화에 입을 맞추고 그 앞에서 촛불을 켜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는 교회 안에뿐 아니라 교인들의 각 가정에도 성화가 있다.셋째, 동방 정교회의 성례전은 일곱 가지이다. 세례(물에 세 번 들어갔다가 나옴), 견진례(세례 받은 사람이 성령으로 기름부움 받음), 성찬식(그리스도의 실재 임재), 서품식(사도적 계승), 고해(죄 사함을 받는 고백), 혼배(남녀 모두 정교회 교인, 세 번까지 허용), 종부(성유식)이다.세례, 견진, 서품은 반복될 수 없는 것이며, 성찬, 고해, 혼인(혼배), 종부 성사는 반복될 수 있다. 이들 성례는 모두 나름의 특별한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세례와 견진례는 의롭게 하고 중생하는 은혜를 전달하며, 고해성사와 성유식은 영혼과 몸을 치료하는 은혜를 전한다.4. 마리아 숭배동방 정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그룹 천사보다 고귀하며 스랍 천사보다 영광스러운 분”,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분으로 숭배한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숭배는 동방 정교회 전체를 따뜻하게 해 주고 활력을 주는 심장이요, 정교회 신앙의 핵심이라 믿는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마리아 숭배를 포함하지 않는 신앙은 정교회와 관계가 없는 다른 신앙이다.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1854년에 결정된 로마교회의 동정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이 태어났다는 ‘성모무념수태’ 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동방 정교회는 마리아가 자연사 했으나 그 몸이 썩지 않고 아들에 의해 일으킴을 받아 영화된 몸으로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우편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5. 성인 숭배동방 정교회 신앙에서 성인들은 천국에 있는 우리의 중보자요 보호자시며, 따라서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살아있는 적극적인 지체이다. 그들은 그림이나 성유물(聖遺物)을 통해 교회 안에 임재한다. 성인들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복음사역과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들이다. 성인 숭배에 따른 하나의 결과는 성유물 숭배이다. 성유물 숭배는 성인의 영과 그가 남긴 유물 사이의 특별한 관계, 즉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믿음에 기초를 둔다. 그래서 정교회는 교회력의 모든 날들이 성인이나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로 봉헌되어 있다. 모든 성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 있는 성인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례요한이다.6. 천사 숭배동방 정교회의 천사 숭배는 성인 숭배와 흡사하다. 천사들도 성인들처럼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중보한다. 천사들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지만, 인간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절정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 세계 전체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그 세계를 다스린다. 그러나 천사들은 몸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자기들에게 속한 자연이나 세계를 소유하지 않는다. 각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어서 주님 앞에 선다고 믿는다. 이 수호천사는 성도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선한 생각을 보내주는 보호자요 친구이다. 정교회 신도들은 수호천사 및 대천사 미가엘과 가브리엘에게도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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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0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8
    정경·마리아숭배·면죄부·행위구원 등 신학적 해석 달라로마 가톨릭 교회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인 ‘가톨릭’(catholic)이란 이름아래 5대 교구(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콘스탄티노플)로 나뉘어 통일되어 있던 그리스도교가 1054년,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교회와 헬라어를 사용하던 동방교회로 갈라지면서 서방교회가 얻은 이름이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이다. 로마 교구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하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교세를 가진 교단이다. 한국교회는 이를 ‘천주교’(天主敎)라고 부른다. 천주교라는 말은 중국교회에서 나온 말이다. 17세기 중국선교에 나선 로마 가톨릭교회가 신명(神名)을 놓고 논쟁하던 끝에 하나님을 ‘천주’(天主)라고 부른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1. 성경과 전승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규범은 성경에서 나온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도 역시 성경에서 얻는다. 바티칸 공의회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교회의 전승”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로 믿는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의 신앙의 규범은 성경보다 교회의 전승이 우위에 있다. 그들은 성경이 있기 전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고, 또 낱권으로 흩어져 있던 그 책을 모우고 어떤 책이 영감 받은 성경이고, 어떤 책이 성경이 아닌가를 결정한 것이 바로 초기의 ‘하나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인 가톨릭교회라고 주장한다. 그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이은 교회가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또 교회는 성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내주(內住)하시는 교회가 성경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그 존재가 교회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정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가경 7권을 포함한 총 73권이다. 가경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 마카베오기 하, 바룩서, 지혜서, 집회서이다.2. 성찬의 화체설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즉 사제인 신부가 일반적 빵과 포도주에 축성하면 그 빵과 포도주가 신비스럽게 “진실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감각적인 물질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여 성례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 그리스도의 성체(聖體)를 참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사 본다’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 제물을 제단에 드릴 자격을 갖춘 사제가 필요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부(본래 성경에서는 ‘장로’)를 사제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집례자의 기도 후, 그리스도의 실제적 살과 피로 변한다는 신앙은 초대 교부 다메섹의 요한 때부터 막연하게 내려온 설(說)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발전하여 12세기에 이르러 ‘화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도 찬반 논란이 많았으나,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는 “... 빵과 포도주에 축성함으로써 그 모든 실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포도주의 실체가 그의 피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고 선언했다.3. 마라아 숭배와 성상 경배로마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숭배하는 근거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들은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 기도의 중보자, 구원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래서 “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우리는 당신의 보호의 품안으로 들어갑니다. 성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천주의 성모여, 흠 없으신 모친이여, 주물주의 모친이여, 구세주의 모친이여, 지혜의 보좌여, 공경하올 그릇이여, 황금의 전이여, 언약의 궤여, 하늘의 문이여, 천사의 여왕이여, 원죄 없으신 여왕이여, 세상의 죄를 면하여 주시는 천주의 고양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성모덕서 기도문)라고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묵주를 돌리면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를 로사리오 기도라고 한다.초기 그리스도교는 기독론 논쟁이 한창이던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인 그리스도라고 결정된데서 나온 말이다.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마리아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것이 오늘날까지 로마 교황청의 기본교리가 되었다.또 로마 가톨릭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마리아는 목수인 요셉과 결혼은 하였으나 ‘영원한 동정’이었으며, 예수가 잉태될 때 원죄가 없었고(성모 무염시태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승천했다(성모 몽소승천)고 믿는다. 그래서 중보자로서의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경배(Hyperdulia)를 드린다.또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인들의 성상을 경배(Dulia)한다. 숭배에는 성모상, 성상, 유골, 성자, 성체, 천사, 십자가고상 등이 있다. 성상 숭배는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역사적 교회의 의식으로 인정되었다.4. 연옥설과 면죄부로마 가톨릭교회는 내세(內世) 상태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은총 중에 죽어 더 이상의 정화(淨化)를 필요치 않는 사람은 죽자마자 천국에 들어가고, 둘째는 은총 상태에서 죽었으나 약간의 정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정화가 끝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며, 셋째는 큰 죄악 중에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지옥으로 가 끝없는 벌을 받기 시작한다. 따라서 정화가 필요한 영혼을 위한 대기 상태인 중간 천국을 설정해 놓았다. 이것이 ‘연옥’(煉獄)이다.연옥설이 도입된 것은 590년 경 로마 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최초의 교황)가 취임한 이후였다. 교회에 연옥설이 기본교리로 들어오게 된 데는 행위구원, 즉 공로사상에 근거한다. 연옥설의 근거는 마태복음 5장 26절에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과,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獄)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성경 귀절이다. 따라서 이 중간 상태에 머물고 있는 조상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후손들의 공덕(功德)이 필요하다. 이 공덕을 돈으로 쌓으려 한 것이 ‘면죄부’이다.5. 성직자 독신주의그리스도교회는 처음부터 모든 교직자들에게 ‘독신주의’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키로 한 수도사들이나, 교회에서 고위성직자로 나아갈 사람들 중에 독신주의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고위 성직자들의 교회세습과 성직매매가 문제되자 105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에 의해 모든 교직자의 독신주의가 선포되었다.당시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폐습은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성직매매와 주교, 대주교, 추기경은 말할 것도 없고, 교황까지도 여러 명의 첩을 두는 니골라주의가 횡행했다. 급기야 1059년에 로마 라테란에서 공의회를 열고 이 두 이단을 금하는 결의를 했다. 오히려 당시 교회는 독신으로 남은 성직자들은 의심의 대상인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위기에서 가정을 잘 세워가는 성작자들은 존경을 받았고 주교직의 적임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매매와 리골라주의가 모두 성직자의 결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4년 교황에 취임하자말자 △모든 사제는 독신이어야 한다. △이미 결혼한 사제는 이혼하라. △여자를 숨겨놓고 있는 자는 간음한 자로 간주 파문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그리스도교에 성직자 독신주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성직후보자들이 미혼일 경우 독신으로 지낼 능력이 있는지를 물었고, 그럴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상대인 신부가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는 것과 레위기 법을 준수토록 했다. 다만 재혼은 금지됐다. 6. 로마 가톨릭교회의 십계명로마 가톨릭교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을 변조해 사용한다. 제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와, 제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한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뭉뚱거려, 제1 계명으로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라고 하고, 그리고 마지막 10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십계명을 만들었다. 다음은 한국 천주교의 십계명이다.①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 ②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 ④ 부모에게 효도하라. ⑤ 사람을 죽이지 말라. ⑥ 간음하지 말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⑧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⑩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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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6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7
    1054년, 서방 ‘로마 가톨릭’과 동방 ‘그리스 정교회’로 분파그리스도교의 대분열그리스도교는 주후 3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불렀다. 이때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류라는 말만큼 범위가 광범위한 말이다. 이 보편적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종이나 자주자나, 주인이나 머슴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다.빌립보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라고 했다.또 에베소서는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0~23)라고 한다.1.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은 이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를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밀리탄스(Ecclesia militans)이고, 둘째는 죽은 자들이 ‘연옥에서 잠자는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도르미엔스(Ecclesia dormiens)이며, 셋째는 천상의 ‘승리의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트라움판스(Ecclesia traumfans)이다. 그러나 중세 종교개혁자들은 연옥에서 잠자는 자들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의 교회에 편입시켰다. 즉 가톨릭(보편적)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를 관장하는 우주적 교회라는 뜻이다.당시 로마 판도 안에 있던 그리스도교는 5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순서대로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수리아 안디옥,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이탈리아의 로마 교구가 먼저 생기고, 이어 4세기 초에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생겼다. 이 중에 예루살렘과 안디옥,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에 속하고,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구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에 속했다. 교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는 이 5대 교구의 대표자들이 참여해야 보편공의회로 인정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공의회에 지나지 않게 된다.2. 로마 교구의 수위권 주장과 ‘필리오케’ 논쟁그런데 6세기에 이르러 로마 교구가 수위권(首位權)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교구는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가 세웠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590년 로마 대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에 등극하면서, 세계교회의 모든 감독 가운데 제1의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황제를 모시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자연히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에 분쟁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교구가 교황의 이름으로 수위권을 주장하고 다른 교구에 간섭하려 하자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작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골을 더 깊게 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성령발출설’(필리오케) 문제가 그것이다. 325년 니케아 신조는 성령론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생기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고 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고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끝난 후 서방 교회가 돌아가서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일방적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라고 고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라틴어 ‘…으로부터’라는 단어인 “필리오케(Fillioque) 논쟁”이라고 한다. 분명히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은 “성부로부터…”라고 했는데, 서방 교회가 “성부와 성자로부터…”라고 변조했다는 것이다.동방 교회는 회의 때마다 서방 교회에 시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끝내 수백년 동안 갈등을 빚어오던 이 필리오케 논쟁은 1054년에 동·서 교회가 갈라지는 명분이 되었다.이때는 613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모하마드의 이슬람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과 수리아 안디옥,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이슬람에 점령당한 후였다. 이 세 교구는 총대주교좌가 유지되고는 있었으나 교세는 현저히 축소된 상태였다. 시리아는 636년에, 이집트는 642년에, 북아프리카는 670년에, 카르타고는 698년에 각각 이슬람화 되었다.3. 가톨릭의 분열거룩한 가톨릭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결정적인 원인은 1053년 동방 교회 총대감독(총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우스(Michael Kerularius)가 비잔틴 제국 내 로마교회의 수도원을 폐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1054년 초 로마 교황 레오 9세(Reo 9)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케롤라리우스에게 세 명의 사절단을 보냈다. 훔베르트 추기경, 프레드리크 추기경, 페트루스 대주교가 그들이었다. 1054년 4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사절단은 총대주교 앞에서 자신들이 푸대접을 받았다며 불평했다. 게롤라리우스가 그들이 들고 온 교회의 서신을 받아보니 봉투가 뜯긴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신이 중간에 변조되었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불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한지 얼마 후 로마 교황 레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은 교황 레오의 사절단이었으므로 자신들을 파송한 교황이 죽어 그 권한이 사라진 셈이다.그런데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7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이 성찬식을 위해 소피아 대성당에 모여있는 가운데 로마 사절단은 정식 대주교복과 추기경복을 갖춰 입고 소피아 대성당에 나타나 주제단 위에 총대주교 케롤라리우스에 대한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파문장을 엄숙히 올려놓고, 게롤라리우스가 이단자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발에 먼지를 털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총대주교는 파문장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로마 사절단을 공식적으로 파문한 후에야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이로써 사도 시대 이후 ‘가톨릭’이란 이름아래 유지해 오던 그리스도교는 크게 두 교회로 갈라졌다. 로마 교구를 중심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되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중심한 동방 교회는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가 되었다. 4. 동·서 교회는 왜 분열했나?동·서 교회의 분열의 배경에는 서로 다른 언어·문화·관습의 문제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언어의 상이성은 정신적 문화적 상호 이해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신학 용어에서도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서방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고, 동방 교회 지도자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상호교류는 언제나 통역관에 의지해야 했다.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은 그리스인들은 라틴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음험하게 비쳤고, 라틴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무식하고 야만스럽게 보였다.또 서로 다른 관습도 문제였다. 그로 인해 신학, 예배, 교회법, 제도, 조직 등 교회의 관습들이 따로 발전해 갔다.하나의 보편적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거룩한 가톨릭’(the holy catholic)은 소(小)문자 가톨릭(catholic)으로 표시되고, 거룩한 가톨릭에서 분파된 하나의 교파로서의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은 대(大)문자 가톨릭(Catholic)으로 표시해 그 차이를 나타낸다.1054년 교회가 동·서로 갈라진 후 서방교회는 1095년부터 1207년까지 175여년 간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수행했고, 동방 교회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 당하므로써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고, 총대주교좌를 잃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동·서로 갈라진 결과이다. 오스만 제국 내에 있는 동방 교회의 재산은 몰수 당했으며,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1517년 독일에서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촉발된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신교(新敎)가 생겨났는데, 이는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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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5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6
    이집트의 콥틱교회, 시리아의 야곱교회, 레바논의 마론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 단성론파 분리 단성론파의 분열325년 그리스도교 세계공의회가 최초로 지금의 터키 땅인 소아시아 니케아에서 모였다. 콘스탄타누스 황제의 소집으로 모인 니케아 공의회는 기독론 논쟁이 주 목적이었다. 과연 나사렛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 신이라면 어떤 성격의 신적 존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5월 20일부터 318명의 감독들과 장로(목회자)들이 모여 두 달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예수는 신과 본질이 같은”(homo ousius) ‘그리스도’라고 결정했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러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예수의 인성(人性)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곧바로 대두되었다. 이것이 기독론의 양성론 논쟁이다.이 기독론의 양성론 논쟁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여서 431년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대립으로 난장판이 된 에베소 공의회를 거쳐,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451년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35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해 논쟁한 칼케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다. 다만 죄만 없으시며”, “신성과 인성은 혼합됨이 없이 존립한다”며, 양성론을 정통으로 결정하고, ‘신성이 우세하다’는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1.칼케톤 신조의 그리스도의 양성론“...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성자, 주(主), 두 가지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 두 가지 본성이 혼동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성의 특징은 연합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성의 고유성이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로고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것이 칼케톤 신조의 기독론이다. 칼케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성론파와 양성론파는 한 세기동안 서로가 옳다는 주장을 계속해 그리스도교는 분열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553년 5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칼케톤 신조를 반대하는 단성론파와의 화해를 위해 소집되었으나 끝내 양측은 화해하지 못하고, 이집트의 콥틱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시리아의 야곱교회, 레바논의 마론교회가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다. 기독론의 양성론 논쟁으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분파된 이후, 또 다시 큰 세력이 양성론 논쟁으로 인해 분파된 것이다. 2. 단성론파의 네 지류1) 이집트의 콥틱파이집트의 콥틱파는 고대 이집트의 적통이다. 그들은 양성론을 정통(正統)으로 지지한 칼케톤 공의회 직후에, 자신들의 총대주교를 따로 선출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536년부터는 자신들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보유해왔다. 그는 자신을 복음서 저자 마가와 성 아타나시우스, 키릴루스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총대주교는 수사(修士)들 사이에서 선출되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할 의무가 있다. 오직 그에게만 성직 임명권이 있으며, 성직임명 때 안수를 하지 않고 후보자에게 숨을 불어넣고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그의 관할권은 이집트, 누비아, 아바시니아, 에디오피아이다. 그 휘하에는 열두 명의 주교가 있고, 이들의 휘하에는 여러 직책의 성직자들이 있다.콥틱 내의 아바시니아파는 콥틱파의 자교회이지만, 유대교 요소가 강하다. 기독교의 주일과 유대교의 안식일을 함께 지키고, 돼지고기를 비롯한 구약 율법에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된 육류의 섭취를 금한다. 아바시니아는 이집트에 붙어있는 독립된 왕국이다. 이 교회는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 출신 두 선교사 프루멘티우스(Frumentius)와 아이데시우스(Aedesius)가 세웠다. 이들은 칼케톤 공의회를 미련한 자들과 이단들의 집회로 폄하한다. 현재 이집트의 콥틱파는 9,900만 이집트 인구의 약 10%에 이르는 1천만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시리아의 야곱파야곱파라는 이름은 6세기 중엽에 박해받는 단성론파를 위해서 열정으로 싸운 수도대주교 야코부스(Jacob)에서 유래했다. 수도대주교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대주교좌이다. 그래서 메소포다미아, 시리아, 바빌로니아에까지 야코부스파(Jacobites)가 퍼져 있었다. 이 교회는 소금과 기름을 섞은 유교병을 성찬식 빵으로 사용하고, 십자 성호를 한 손가락으로 긋는다.야곱파는 최근까지 이슬람에 의해 많은 손실을 입었고, 17세기에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도 박해를 받았다.야코부스는 541년부터 578년까지 37년간 수의(壽衣) 같은 허름한 옷을 입은 채로 각처를 누비고 다니며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을 임명했고, 교회들을 조직했으며, 분열을 치유하는데 힘써 안디옥 총대주교구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야코부스파 수사들은 심한 미신과 엄격한 금욕주의로 유명하다. 3) 레바논의 마론파단성론파 중에 가장 늦게 나타난 집단이 마론파(Maronites)이다. 성 마론(St. Maron)은 400년 경에 시리아에 유력한 수도원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423경에 죽었다. 순수한 시리아 혈통을 물려받은 이들은 교회의 전례에 있어서는 이미 사어(死語)가 된 시리아어를 사용하지만, 일상의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한다. 13세기에는 서방 교회의 십자군에 합류해 로마 교회청과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 교회와의 그런 노력으로 인해 1584년 로마에 마론파대학을 설립하였다.총대주교는 레바논 산 카노빈 수도원에 거주하지만, ‘안디옥과 모든 동방의 총대주교’로 불리우며, 모든 교회는 그의 감독을 받는다. 이들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고, 시리아어 미사 경본, 사제들의 결혼, 전통적인 금식일들, 자체의 성인들, 특히 성 마론을 존숭한다. 오늘날 마론파는 현재 600만 레바논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고, 레바논의 대통령은 언제나 마론파에서 나온다. 마론파는 레바논 외에도 아메리카와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에 흩어져 있다.4) 아르메니아파552년 가톨릭으로부터 탈퇴한 아르메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4세기 초 티리다테스(Tiridates) 왕 치하에서 초대 총대주교 계몽자 그레고리우스(Gregory the Enlightener)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아르메니아에 수도원과 신학교들을 설립했고, 헬라어 성경을 토대로 아르메니아어 번역성경도 제작했다. 아르메니아 교회가 채택한 정경에는 다른 성경에는 없는 독특한 네 권의 책이 실려있다. 구약성경에는 “요셉과 아세낫의 역사”, “열두 족장의 언약”이고, 신약성경에는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보낸 서신”,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셋째 서신”이 그것이다.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300만 인구 중 약 95%가 아르메니아파 사도교회에 속한다. 아르메니아는 1895년 터키로부터 약 200만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외에도 동방가톨릭교회, 아르메니아 동방가톨릭교회, 갈대아 동방가톨릭교회, 말라바르교회, 루테니아교회, 루마니아교회, 헝가리교회, 유고슬라비아교회, 멜키트교회, 불가리아교회 등이 있다.3. 단성론파들의 특징단성론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등과 구분되는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의 고대 민족 교회들이다. 이들은 5~6세기에 기독론에 대한 교리 논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분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오늘날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충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까지도 로마 교회나 그리스 교회와 적대적 관계에 있다.그들은 성경과 전승이 계시의 근원이며, 신앙의 준칙들이다. 교리는 그리스 정교회와 가깝고, ‘필리오케’도 인정하지 않는다. 미사는 성찬제사로서 화체설과 함께 견지하고, 성찬에 유교병을 사용하며, 삼중 침수(세번 물에 짐기는 것)에 의해 세례시에 중생한다고 가르치고, 총대주교 중심의 정치 제도와 수도원주의, 순례와 금식, 사제들과 부제들에 대한 결혼을 허용하고(주교들에게는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피나 목메 죽인 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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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파 이야기
    2019-03-22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5
    시리아·이란을 거쳐 중앙아시아·몽골과 중국에까지 널리 전파동방 기독교통칭 동방 기독교는 초기 교회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조화를 놓고 논쟁하던 기독론 논쟁에서 생긴 교단이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루스는 니케아의 신조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신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시라면, “결국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으신 것”이라며,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데오토코스’(The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이 표현을 반대하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뜻하는 ‘크리스도토코스’(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인해 42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루스를 공격했다.키릴루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 위격의 철저한 단일성과 신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이라 불렀다. 이에대해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래서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 대한 데오토코스라는 이름은 신성모독이고, 복음선포에서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이었다.그리하여 431년 6월 22일, 에베소에서 공의회가 열렸는데, 양측이 논쟁도 하기 전에 에베소에 먼저 와 있던 키릴루스파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공의회를 폐회했다. 나흘 후(26일) 안디옥의 요한을 대표로 하는 시리아 주교들이 도착해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해 대립공의회를 열고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규정했으나,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시리아의 한 수도원에 구금되었다가 후에 아라비아(현재 요르단) 사막으로 추방됐다.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디옥 학파는 시리아와 아시아 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는 분리주의 교파가 생겨났다. 1. 동방 앗시리아교회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시리아와 아시아 교회 감독들은 소아시아 동쪽 변경에 있는 에데사(Edessa)에 신학교와 선교본부를 세우고 동방선교에 나섰다. 이 교회가 동방 앗시리아교회, 앗시리아교회, 앗시리아 정교회, 앗시리아 사도교회 등으로 불리우는 통칭 ‘동방 기독교’이다.489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제노(Jeno)에 의해 에데사의 신학교가 폐쇄되고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이들은 페르샤(지금의 이란)의 니시비스(Nisibis)로 옮겨 496년까지 그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하며 페르샤와 인도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이곳에 모인 학자들은 그리스어로 된 철학, 신학, 자연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해 연구했으며, 신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나 수도원에 부설된 학교에서 종교적 지식과 의술을 습득했다. 이들은 그 지식과 기술로 다방면에 진출했다. 아시아는 이들의 의술과 자연과학 지식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얻었다.동방 기독교는 에베소 공의회의 결의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행위, 화상(畵像) 사용, 연옥 교리, 화체설을 배척했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십자가 성호,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찬에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이다. 이들은 다시 496년에 신학교를 셀레우키아-크테시폰으로 옮겼다가, 762년에는 바그다드에 선교본부를 세우고 페르샤, 인도, 아라비아,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다.1) 초기의 동방 기독교동방 기독교(the Eastern Christianity) 혹은 동방 앗시리아교회(Asyria Eastern Church)라고 불린 네스토리안 교회는 아랄해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활한 초원과 동쪽으로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아래 오아시스(타클라마칸 사막)에 살던 수많은 왕국과 부족들에게 전파되었다.전성기의 동방 기독교는 니시비스,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바그다드에 총대주교좌가 있었고, 모술, 아르빌, 보그라, 베르다, 라이, 하마단, 메르브, 발흐, 사마르칸트, 카슈카르, 야르칸트, 알말리크, 하미, 돈황, 서안, 칸발리크에 대주교좌가 있었으며,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에데사, 히라, 이스파한, 이스타흐르, 호르무즈, 다린, 베트카리지, 하타, 부칼, 소코트라, 자랑, 니시푸르, 시지스탄, 헤라트, 투스, 아물, 베르다 등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어 있었다.네스토리안 교회는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라고 불리고, 몽골에서는 ‘에르케운’(也里可溫, 야리가온)이라 불렸다.2) 중국의 네스토리안교회: 경교(景敎)네스토리안 동방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35년 당나라 정관(貞觀) 9년 아로펜(阿羅本, Alopen) 주교가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교단본부로부터 파송된 21명의 선교단을 이끌고 수도 장안에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황제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서쪽 변방까지 보내 아로펜 일행을 귀빈으로 영접했다. 태종은 638년 황궁의 서쪽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라는 교회당을 세우고 선교를 허락했다.아로펜 일행은 성경과 예배문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만드는 등 역경사업에 힘쓰고, 중국인 지도자들을 세워 교회를 관리했다. 경교란 “크고 비추며 빛나고 밝은 종교”란 뜻이다.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비문에서도 “변하지 않는 참된 말씀이며 오묘하기 그지없어 이름하기 어렵지만 그 효용은 뚜렷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경교다”(眞常之道, 妙而難名, 功用昭彰, 强稱景敎)라고 썼다.경교는 당태종을 시작으로 고종, 측천무후, 현종, 숙종, 대종, 덕종 등 누대에 210여년동안 번성했다. 이후 845년경 무종의 종교박해 때에 변방으로 밀려났다가 몽골제국 원나라 때에 크게 융성했다.3) 중앙아시아의 동방 기독교가톨릭교회와 차별화를 시도하며 동방선교에 매진한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 지금의 ‘스탄’ 전 지역과 몽골 등을 상대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로인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을 비롯, 초원의 유력한 부족인 나이만, 케레이트, 웅구트 등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 지역에서 14세기 이슬람 장군 티무르가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가할 때까지 약 800여년 간 선교를 이어갔다. 지금은 그 유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현재 내몽골의 수도인 후흐호트에서 서북방으로 19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올룸 숨’에는 동방 기독교도들의 무덤에 세워졌던 수많은 비석들이 발굴돼 있다. 이 비문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던 웅구트족의 것이다. 이 비각은 한결같이 동방 기독교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비석 주인의 이름은 세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또 키르키즈스탄의 이스크 쿨 호수 근처에서 610개에 이르는 투르크어로 된 경교도 비석이 발굴되었고, 중국 천주의 중국해외교통사박물관 뒤뜰에는 수십 기의 경교도 비문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05년에는 독일 탐험대에 의해 중국 신장 위구르의 캬슈카르와 투르판 등에서 400~ 500종의 기독교 문헌이 발굴되었다. 이들 문헌은 8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투르크어로 기록된 것들이다.광신적인 무슬림이었던 티무르는 이슬람 외에 종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와 동쪽으로는 트루판까지, 북쪽으로는 킵차크 초원과 남쪽으로는 인도에까지 미쳤다. 박해는 그가 1405년 중국 원정길에 올랐다가 사망하기까지 30여년 간 이어졌다.4) 동방 기독교의 신앙고백“나는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습니다. 이 세 분은 서로 동등하고 분리될 수 없으며,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더 젊지도 늙지도 않습니다. 본질상 그들은 하나이나, 위격상으로는 셋입니다. 성부는 낳으신 분이고, 성자는 낳아진 분이며, 성령은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최후로 이 성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신 성자께서 성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셔서, 하나님과 본체상 하나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신성에 있어서 그 분은 영원히 성부와 같고, 인성에 있어서 그 분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결합은 영원히 나누어질 수도 혼합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합을 지닌 성자는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고, 두 개의 본질과 두 개의 위격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의 본체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것은 1287년 6월, 랍반 소마(Raban Soma)라는 내몽골 출신 동방 기독교 순회사제가 로마 교황청에 들렀을 때 로마교회 추기경들 앞에서 밝힌 네스토리안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몽골출신 랍반 소마는 후에 동방 기독교의 총대주교가 되었다.동방 앗시리아교회는 1843년과 제1차 세계 대전 둥에 인근의 쿠르드족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 대대적인 학살을 당하고, 총대주교좌는 이라크를 떠나 미국의 시카고로 옮겨졌다. 오늘날 동방기독교 신자는 주로 이라크에 분포해 있지만, 시리아, 인도, 러시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 교회와 수도원을 짖고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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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8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4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아타나시우스)와 ‘본질이 비슷하다’(아리우스)는 주장이 맞서아리우스주의로마 시대에 탄생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박해 아래 있었다. 그 박해는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선포될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그래도 복음은 계속 확장되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방 전 로마사회로 퍼져갔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교 전체가 모여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교리를 확립하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많은 이설(異說)이 난무했다. 즉 기독론 논쟁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이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교구 출신들이다. 이 논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이 확립되었다. 1. 아리우스는 누구인가?아리우스(Arius)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장로(당시의 목회자)를 지낸 인물로서, 학식이 높고 빈틈없고 엄격한 사람으로 당시 교회에 널리 인기가 있었다. 그는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기독론을 놓고 논쟁을 벌여 심각하게 대립했다. 알렉산더 감독은 오리게네스의 성자의 영원한 발생 교리를 받아들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호모우시아)을 주장했지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주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닌 ‘유사본질’(호모이우시아)이라고 주장했다.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결국 겉으로 분출하여,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321년, 100명의 이집트와 리비아 감독들이 모인 이집트 시노드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한 죄로 면직 출교 당했다. 그럼에도 아리우스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가르치고 다녔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그를 추방하자, 그는 팔레스타인과 니고메디아로 가서 자신의 교리를 퍼뜨렸다. 그리고 ‘연회’(Thalia)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에 신학교 동문이었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그를 변호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감독은 모든 감독들을 대상으로 여러 편의 회람용 서신을 보내 이들을 단죄했다. 이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대거 일어나 알렉산더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논쟁은 온 교회를 신학적 전쟁터로 만들었다.2.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신앙’이 논쟁은 끝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하여 325년 소아시아 니케아(지금의 이즈닉)에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때까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문제에 최초로 개입한 사건이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감독들에게 소집공문을 보내 각 지역 관공서에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탈 것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니케아에서의 체류 비용의 일체는 국고에서 지원했다.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서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318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 달동안 진행되었다. 어떤 이는 국가의 우편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말이나 노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걸어서 왔다. 참석한 감독은 318명이었지만, 장로들과 집사들과 수행원들의 수를 합하면 참석자 수는 1500명 내지 2000여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회의는 양 진영의 지도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예비 변론이 있은 뒤에 정식 회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히 주장한 아타시우스를 대표로 하는 정통신앙 진영은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유사본질파는 “아들은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같은 신(神)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대부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 호모우시오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신앙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 호모이우시오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3.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주의 분파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가운데 예루살렘의 사도 공의회(행 15장)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회의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회의를 가리켜 “모든 이단에 대해 승리를 거둔 진정한 기념비”라고 했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할 때만 해도 아라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발표된 이후 많은 감독들이 정통신앙편으로 돌아섰다.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옹호하는 자들이 그때부터 이단의 공세에 맞서서 방어전을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감독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호모우시온’ 문서에 마지 못해 서명했으므로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타나시우스는 328년 4월에 감독 알렉산더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뒤에 이단 죄로 면직된 성직자를 복직시키기를 거부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336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서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지목돼 갈리아 트레브로 유배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339년 두번째로 면직된 후 로마 감독 율리우스에게로 망명했다. 반면에 아리우스는 335년에 이미 사면을 받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상태였으나, 그 다음 해에 80세 나이로 죽었다.이런 혼란을 거듭하면서 동방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우세했다. 338년에 니케아 이전부타 아리우스를 두둔해온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로서 아타나시우스의 정통신앙을 채택한 서방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대립관계에 들어가자 343년에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서방 황제 콘스탄스가 샤르디카에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346년 그의 형제 콘스탄스의 강권에 못이겨 아타나시우스를 복권했다. 그러나 350년 콘스탄스가 죽자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감독들을 폐위하고, 아타나시우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서 쫓아냈다. 아리우스파의 배후에 콘스탄티우스의 아내 유세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교구를 제외한 제국 전역에서 교권을 잡았다.4. 정통신앙의 승리그러다가 361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죽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모든 그리스도교 진영에 관용을 베풀어 유배당한 감독들을 불러들였다. 그 조치로 아타나시우스도 돌아올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로마와 밀라노, 갈리아에서 모인 교회회의(지방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와 동방에서 열린 교회회의들에서도 아타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세 명의 감독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활동이 큰 힘이 되었다.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감독이 되어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수도의 모든 교회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들에 아리우스파가 반발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81년 5월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삼위일체 ‘위격’을 논쟁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령론이 중심이었다.여기에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성령의 위격이 결정되었다. 황제는 그 해 7월에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믿는 신앙에 의무적으로 복종하도록 법을 공포했다.이로써 정통교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몰려 영구히 뿌리가 뽑혔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득세하던 기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는 200년 이상 아리우스파가 존속했다. 또 고트족은 587년까지, 스페인의 수에비족은 560년까지, 반달족은 530년까지, 부르군트족은 534년까지, 롱고바르드족은 6세기 말까지 아리우스주의를 견지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와 정통교리 사이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381년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통 교회들이 사실상 채택하고 있는 신조가 수립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백년에 걸친 삼위일체 논쟁에서 정통신앙의 확립은 성령의 역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 기고
    • 분파 이야기
    2019-02-22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3
    이들의 사상은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지금도 간간히 나타나고 있다니케아 이전 시대의 분파들그리스도교의 탄생과 함께 초대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이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몬터너스주의, 노바티아누스주의, 마니교 등이 그들이고, 도나투스주의는 교회의 권징 문제로 벌어진 논쟁으로 분리된 분파이다. 이처럼 수많은 이설(異說)들이 정통주의가 확립되기 전에 교회를 혼란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니케아 시대를 지나며 그리스도교의 복음에서 일탈한 것이 확인되어 역사적 그리스도교에서 소멸해 갔다.1. 에비온주의(Ebionites)에비온파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였다. 이 이름은 ‘가난한’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에비온파는 자신들이 ‘가난한’ 그리스도와 그 분의 가난한 제자들의 참된 추종자들로 간주했으며, 자신들에게만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된 복이 있다고 생각했다.에비온파는 유대교 바리새파의 율법주의를 구현하고, 모세 율법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율법의 준수와 할례를 반대하는 사도 바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의식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행 15:1).그들은 예수는 약속된 메시야, 다윗의 아들, 최고의 입법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모세와 다윗처럼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이다. 그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어 영원한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바울은 이단이며 배교자이고, 그가 쓴 서신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셔서 지상의 예루살렘에 권좌를 설치하고 천년동안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에비온파에 대한 경계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 13).이들은 오늘날 ‘에비온파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복음서를 갖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마태복음의 발전된 형태이다.2. 영지주의(Gnosticism)영지주의는 처음에 이교철학에서 기독교로 주입된 특이한 사상이다. 영지주의는 당시의 그리스 철학, 문학, 종교에까지 광법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대다수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더 고등한 지식으로 이루진다고 간주했고, 자신들은 보다 높은 영적 지식, 즉 자신들을 비밀스럽고 철학적이며 영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고 믿고, 영혼과 육체만을 지닌 단순한 사람들을 경멸했다.영지주의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과 물질이 영원히 대립된다는 이원론(二元論) 체계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는 악의 원리가 거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없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면 하나님이 악을 지으신 셈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빛의 영혼이 어두운 물질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각할 수 있고 현상적인 세계로부터 감각되지 않는 이상적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중보자이다.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소수의 무리에게 ‘그노시스’(gnosis, 靈知)를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상적 세계(하나님 나라)와 연합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능력을 주는 존재이다.영지주의는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의 정체성을 파괴할 정도로 이질적 사상을 혼합하여 그리스도교를 변질시켰다. 그로인해 또 다른 분파들이 생겨나고, 수많은 학파들도 생겨났다. 그들이 남긴 저서들은 1946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콥트어로 기록된 사본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리의 복음, 레기노스의 서신, 도마복음, 빌립복음서, 요한 외경, 아담묵시록 등이다.3. 마니교(Manes)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활동한 철학자 마니(Mani)에서 유래한다. 마니는 유대교적 영지주의에 속해 있었으나, 다른 영지주의파들과는 달리 19세와 24세 때 신(神)으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계시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보낸 선지자이자, 그리스도가 약속한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근본 원리들에 대한 서신들’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마니는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힘입어 이 서신들을 쓴다. 이 서신들은 영원하고 생명이 있는 근원으로부터 온 구원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했다.마니는 처음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 1세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으나, 당시 페르시아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마기교(Magians)의 사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피신해 인도 동부와 중국으로 가 불교를 접했다. 270년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와서 교리를 가르치다가 227년경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박해를 받아 산채로 가죽이 벗겨진 채 죽었다. 그가 비참하게 죽은 후에, 그의 교리는 살아남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중앙아시아, 메소포다미아,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 등으로 널리 퍼졌다.마니교는 이원론과 범신론과 영지주의와 금욕주의 요소들이 두루 혼합된 종교이다. 마니교의 신학은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 사이의 철저한 대립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서 온 것이다. 또 마니교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드러낸다. 이것은 불교적 영향이다.마니교의 기독론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도들이 곡해해 유대교 정신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약속한 다른 보혜사인 마니가 비로소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되살려 놓았다는 것이다.그들은 언어생활과 식생활에서 순결을 위해 일체의 육류와 자극성 있는 음료를 삼가며, 곡물과 채소만 먹고, 현세적 재산과 물질을 갖지 않으며, 자연에 두루 스며 있는 신적인 빛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또 결혼생활은 영혼을 더립히는 행위임으로 독신생활을 선호했다.4. 도나투스주의(Donatism)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권징 문제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일어난 분열이다.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11년) 때에 신앙을 배교한 고위 직분자 처리 문제를 놓고 벌어진 일이다. 박해 당시 누미디아 대주교 관할에 속한 카사이 니그라이의 주교 도나투스(Donatus)가 이끈 강경파는 순교를 각오하고 황제의 박해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위협을 피해 도주하거나 성경을 당국에 내어주는 행위를 반역적인 행위로 간주했다.그런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은 신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들, 특히 박해 때 신앙을 부정하거나, 박해자에게 교회가 보존해온 성경을 내어준 배교자들을 예외 없이 출교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교회의 일에 세속 권력의 개입을 철저히 배격했다. 반면에 주교 멘수리우스와 그의 차부제와 후임 주교 카이킬리아누스를 필두로 한 온건파들은 배교자들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고, 교회의 권징에서 신중할 것을 요구했다.313년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고 박해가 중단되자 카이킬리아누스를 카르타고 주교로 임명한 것이 발단이었다. 도나투스파는 그를 주교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강경파에 속하는 70명의 누미디아 주교들이 카르타고에 모여 카이킬리아누스를 면직하고, 독서자 마요리누스를 주교로 선출했다. 315년에 마요리누스가 죽자 동명이인인 다른 도나투스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열정적 웅변력을 지닌 자로 존경을 받았다.그런데 양 진영은 해외의 지지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판결은 카이킬리아누스에게 유리하게 내려져 그가 카르타고의 합법 주교로 인정을 받았다. 도나투스파가 강력히 항의하자 314년 황제는 다시 이를 교회재판에 위임했다. 교회의 판결도 전과 같았다. 도나투스파는 그것 역시 불복하고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했다.황제는 321년에 도나투스파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도나투스파의 논쟁에서 저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혼합된 몸’을 구분하는 교회론이 나왔다. 도나투스파의 분열은 일종의 교권 투쟁으로, 교회의 순결주의와 절충주의 간의 논쟁이었다.도나투스파는 가톨릭과 별개로 7세기까지 존속했으나 아프리카 교회 전체가 이슬람 사라센의 정복으로 사라졌다. 이 논쟁은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도 때때로 되풀이 되고 있다.4. 기타 분파들몬타누스주의(Montanism), 시몬파(Simonians), 니골라당(the Nicolaitans), 케린투스(Cerinthus), 바실리데스(Basilides), 발렌티누스(Valentinus), 마르키온(Marcion),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 타티아누스(Tatia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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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5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680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까지교리의 확립: 초기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도 불리우는 이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는 325년 니케아(Nicaea)에서 시작하여 이후 787년까지 7차에 걸쳐 개최되어 기독론과 성령론 등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확정했다. 이 시기를 니케아 시대라 한다.제1차 325년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 논쟁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하여 318명의 감독들과 장로들이 두달 동안 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목회자) 아리우스 간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는 “예수는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아다나시우스이다. 아다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정통파를 괴롭혔다. 한때는 아리우스주의가 정통파보다 우세한 때도 있었다.그런데 곧이어 그러면 성령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보혜사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승천 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요 14:16) 오순절 날 온 것이 성령인데(행 1:4, 2:1-4), 이 다른 보혜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논쟁의 주제였다.제2차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삼위일체 위격 논쟁니케아 공의회가 있은 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소아시아 보르포부스 해협의 그리스 도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 330년에 수도를 낙성하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ul)이라 명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에따라 그리스도교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 교구이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그리고 동유럽이 포함되었다.381년 5월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는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1)이다.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달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위격이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했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사회의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제3차 431년 에베소 공의회: 기독론의 단성론과 양성론 논쟁니케아 회의의 결정대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예수의 인성(人性)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기독론의 단성론(단性論)과 양성론(兩性論) 논쟁이다.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Cyrilus)를 중심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그가 인간으로 오셨으나 “신성이 우세하다”고 주장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중신한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가 신일 때는 신성이, 인간 예수일 때는 인성이 우세하다는 양동설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431년 6월 22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2)가 에베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6월 22일, 키릴파의 감독 160여명이 네스토리우스파 감독들이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공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감독 50여명이 26일, 대립공의회를 열고 키릴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분열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 theotokos)라고 결정됐다.이로인해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사막으로 추방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던 안디옥 학파는 에뎃사에 선교본부를 두고 동방선교에 나섰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거쳐 중국 당나라에까지 퍼진 네스토리우스 교회이다. 중국에서는 이 교회를 ‘경교’(景敎)라고 부르고, 몽골에서는 ‘에루케온’(也里可溫, 야리가온)이라 불렀다.제4차 451년 칼케톤 공의회: 단성론 정죄에베소 회의가 파행으로 끝나자 449년 8월 8일부터 22일까지 에베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장로이자 300명의 수사를 감독하는 동방교회의 대수도원장 유디게(Eutyches)를 따르는 150여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일성론(一性論)을 채택하고, 그리스도에게 “이성(二性)이 있다는 자는 둘로 쪼개라”라며 양성론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에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는 451년 9월에 다시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니케아에 회집한 감독들이 격앙되고 난폭한 행위를 드러내자 장소를 바꾸어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칼케톤으로 옮겨 공의회를 개최했다.35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다. 다만 죄만 없으시다”며 “신성과 인성은 혼합됨이 없이 존립한다”고 결정하고,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로인해 교회는 양성론파와 단성론파 사이에 오래동안 분열이 지속되었다.476년에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에 남은 것은 이제 교회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이다. 590년 로마교구의 대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1)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제5차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성론자와의 화해 시도칼케톤 회의 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553년 5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anus)가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했다. 166명의 감독들이 참가해 한달간 진행된 이 회의는 황제가 단성론자였기 때문에 칼케톤에서 이단이 된 칼케톤 신조 반대파들과 화해를 위해 모인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양성의 본체이신 로고스”라는 애매한 말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그러나 끝내 양측은 화해하지 못하고, 칼케톤 신조를 반대하던 단성론파인 에집트의 콥틱교회(Copts),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s), 시리아의 야곱교회(Jacobitrs), 레바론의 마론교회(Maronites)가 분리해 나갔다. ‘두 번째 분파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정통(正統)이라며, 교파 이름을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그런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 안디옥 감독 세베루스(Seberus)가 단의설(單意說)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양성이 있다면, 그 의지(意志)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논쟁이 제기된 것이다.제6차 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의설 논쟁단의설 논쟁으로 교회는 1세기가 넘겨 여론이 갈라져 있었다. 이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680년 11월 7일,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174명의 감독들이 모여 10개월 간 가진 이 회의는 “그리스도는 두 의지(意志)가 있으나 서로 반대됨이 없고, 인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복종한다”고 결론 짓고, 단의설파를 배격하고, 단의설을 지지한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1)와 교황 비길리우스(Bigilius)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정립과 교리 논쟁이 끝났다. 이를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라고 한다.제7차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콘 논쟁그런데 교리 논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6세기 이후 교회 안에 들어온 성화(聖畵, 이콘) 숭배를 이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한 의식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여론이 갈라졌다. 사실 이콘은 당시 신도들 가운데 문맹자가 많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복음서를 설명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방편으로 삼았다.이를 조정하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6)는 787년 9월 24일,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365명의 감독들이 모여 10월 23일까지 개최된 이 회의는 성화 숭배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 열띤 논쟁 끝에 “인간이 이콘(성화)을 보며 공경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근원인 신성(神性)에 있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콘이 교회안에 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이콘 논쟁’이라 한다. 그러나 이콘 반대파들은 814년부터 829년 사이 ‘성상 파괴운동’을 일으켜 교회 안에서 이콘을 몰아내는 과격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에서 중세 종교개혁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콘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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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01
  • 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춘오 목사(발행인) -1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비로소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아 처음에 하나였던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분파를 만들어내었다. 크게 로마 가톨릭, 희랍 정교, 프로테스탄트로 구분하나, 실상은 이 외에도 각 나라와 민족에 따라 이 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엡 4:4-6)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이처럼 많은 분파를 만들게 된 과정을 살펴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고자 한다.1.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그리스도교는 사도 시대로부터 속사도 시대 그리고 교부 시대를 지나기까지 처음 3세기는 로마 제국의 박해아래 있었다. 이 박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기나긴 참극이었다.이 시기의 교회는 겉으로는 가난하고 비천해 보였으나 실상은 하늘의 은혜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품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라는 말씀대로 순교자들의 피를 딛고서 인내 속에서 견뎠다. 은과 금은 없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3:6).이 기간동안 교부들의 신학은 주로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적 이교(異敎) 사상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고, 영지주의(gnosis) 이단을 논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변증과 논박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거대한 힘과 활력으로 신앙의 신적 기원과 특성을 도출해 냈다.1)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처음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반란 가능성이 있는 혁신집단으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는 제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들이 점령한 각 지방의 풍속, 종족들의 법, 종교적 신앙, 백성들의 정치제도를 인정해 주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불법적 종교’(religio illicita)가 된 이유는 유대사회의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였던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는 황제숭배를 반대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그가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상관없이 신(神)으로써 제국의 번영과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법(法)을 구현하는 존재로 추대되었다. 황제숭배의 깊은 뜻은 단순히 황제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경배였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권력과 제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고발되었다.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주후 64년 네로(Nero) 황제로부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는 제국의 모든 속주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의 감독(주교), 사제(신부), 부제(집사)는 즉결 처형하고, 귀족이나 귀부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노동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죄명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행위였다.주후 300년 2월 24일 로마제국 전역에 공표된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은 다음과 같다.①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모두 토대부터 파괴한다. 교회로 쓰인 곳이 개인주택의 일부라 해도 예외가 없다.②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교도들의 모임은 엄금한다. 예배도, 세례식도, 결혼식도, 장례식도 이 금령에 적용된다.③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서적, 예배에 쓰이는 기구, 십자가, 그리스도상 등은 몰수하여 소각한다.④ 그리스도교도는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자라도 모든 특권을 박탈한다.⑤ 그리스도교도로 인정된 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비롯하여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⑥ 교회의 재산은 몰수하여 경매에 붙이고, 매상금은 지방자치단체나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직능조합에 분배한다.⑦ 그리스도교의 신도로 인정된 자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한다.2)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로마는 지중해를 끼고 동서남북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다보니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선 국경 침입과 군대의 반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해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로 구성된 4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가장 극렬히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였다.동방의 정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수도를 니고메디아(Nicomedia)로 정하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북아프리카를 방위했다. 부제는 갈레리우스(Galerius)로, 수도는 시르미움(Sirmium)으로 정하고, 북쪽은 도나우 강, 남쪽은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 전역을 방위했다.서방의 정제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수도를 밀라노(Milano)로 정하고, 도나우 강 상류 일대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지중해 섬, 북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방위했다. 부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로, 수도는 트리어(Trier)로 정하고,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히스파니아, 북서 아프리카를 방위했다.주후 305년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동반 퇴위하고, 동방 정제는 갈레리우스가 되고, 부제는 막시미아누스 다자(Maximianus Daza)가 되었다. 그리고 서방 정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되고, 부제는 세비루스(Sebilus)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자 부제인 세비루스는 밀려나고, 서방 정제에는 니키니우스(Licinius)가 되고, 부제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되었다.그런데 문제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아버지가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며 황제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4명의 황제는 막센티우스를 국가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북쪽에 있는 티베르 강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아우스를 무찔렀다. 이 전투가 있기 전날 밤 꿈에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상징이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교를 관용하라.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다”라는 내용의 역사적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가 박해에서 해방된 ‘밀라노 칙령’이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지금까지 발령된 그리스도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 받는다. 그리스도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된다.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교도들에게서 몰수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3)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자유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4개의 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째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교구이고, 둘째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구이며, 셋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이고, 넷째는 이탈리아의 로마 교구이다. 그리스도교가 박해 아래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구마다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즉 기독론이 통일되지 않았던 것이다.이원론의 영지주의(gnosis)는 예수를 신의 현현, 즉 ‘그리스도’(메시야)로 보면서도 사도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는 진정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영(靈)이므로 육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리우스(Arius)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창조주 성부의 신성과 달라 성부로부터 맨 처음 난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성육신 신앙에 위배된다는 것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여론은 지역에 따라 갈라져 있었다.이를 통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4개 교구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소아시아 니케아에 불러모았다. 그것을 제1차 세계그리스도교공의회라 한다. 그 이전에도 각 교구나 관구(속주) 또는 전국 및 총대교구 단위의 지역 공의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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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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