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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4
-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아타나시우스)와 ‘본질이 비슷하다’(아리우스)는 주장이 맞서아리우스주의로마 시대에 탄생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박해 아래 있었다. 그 박해는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선포될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그래도 복음은 계속 확장되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방 전 로마사회로 퍼져갔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교 전체가 모여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교리를 확립하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많은 이설(異說)이 난무했다. 즉 기독론 논쟁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이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교구 출신들이다. 이 논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이 확립되었다. 1. 아리우스는 누구인가?아리우스(Arius)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장로(당시의 목회자)를 지낸 인물로서, 학식이 높고 빈틈없고 엄격한 사람으로 당시 교회에 널리 인기가 있었다. 그는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기독론을 놓고 논쟁을 벌여 심각하게 대립했다. 알렉산더 감독은 오리게네스의 성자의 영원한 발생 교리를 받아들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호모우시아)을 주장했지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주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닌 ‘유사본질’(호모이우시아)이라고 주장했다.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결국 겉으로 분출하여,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321년, 100명의 이집트와 리비아 감독들이 모인 이집트 시노드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한 죄로 면직 출교 당했다. 그럼에도 아리우스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가르치고 다녔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그를 추방하자, 그는 팔레스타인과 니고메디아로 가서 자신의 교리를 퍼뜨렸다. 그리고 ‘연회’(Thalia)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에 신학교 동문이었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그를 변호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감독은 모든 감독들을 대상으로 여러 편의 회람용 서신을 보내 이들을 단죄했다. 이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대거 일어나 알렉산더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논쟁은 온 교회를 신학적 전쟁터로 만들었다.2.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신앙’이 논쟁은 끝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하여 325년 소아시아 니케아(지금의 이즈닉)에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때까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문제에 최초로 개입한 사건이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감독들에게 소집공문을 보내 각 지역 관공서에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탈 것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니케아에서의 체류 비용의 일체는 국고에서 지원했다.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서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318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 달동안 진행되었다. 어떤 이는 국가의 우편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말이나 노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걸어서 왔다. 참석한 감독은 318명이었지만, 장로들과 집사들과 수행원들의 수를 합하면 참석자 수는 1500명 내지 2000여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회의는 양 진영의 지도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예비 변론이 있은 뒤에 정식 회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히 주장한 아타시우스를 대표로 하는 정통신앙 진영은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유사본질파는 “아들은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같은 신(神)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대부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 호모우시오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신앙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 호모이우시오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3.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주의 분파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가운데 예루살렘의 사도 공의회(행 15장)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회의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회의를 가리켜 “모든 이단에 대해 승리를 거둔 진정한 기념비”라고 했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할 때만 해도 아라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발표된 이후 많은 감독들이 정통신앙편으로 돌아섰다.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옹호하는 자들이 그때부터 이단의 공세에 맞서서 방어전을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감독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호모우시온’ 문서에 마지 못해 서명했으므로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타나시우스는 328년 4월에 감독 알렉산더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뒤에 이단 죄로 면직된 성직자를 복직시키기를 거부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336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서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지목돼 갈리아 트레브로 유배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339년 두번째로 면직된 후 로마 감독 율리우스에게로 망명했다. 반면에 아리우스는 335년에 이미 사면을 받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상태였으나, 그 다음 해에 80세 나이로 죽었다.이런 혼란을 거듭하면서 동방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우세했다. 338년에 니케아 이전부타 아리우스를 두둔해온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로서 아타나시우스의 정통신앙을 채택한 서방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대립관계에 들어가자 343년에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서방 황제 콘스탄스가 샤르디카에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346년 그의 형제 콘스탄스의 강권에 못이겨 아타나시우스를 복권했다. 그러나 350년 콘스탄스가 죽자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감독들을 폐위하고, 아타나시우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서 쫓아냈다. 아리우스파의 배후에 콘스탄티우스의 아내 유세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교구를 제외한 제국 전역에서 교권을 잡았다.4. 정통신앙의 승리그러다가 361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죽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모든 그리스도교 진영에 관용을 베풀어 유배당한 감독들을 불러들였다. 그 조치로 아타나시우스도 돌아올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로마와 밀라노, 갈리아에서 모인 교회회의(지방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와 동방에서 열린 교회회의들에서도 아타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세 명의 감독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활동이 큰 힘이 되었다.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감독이 되어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수도의 모든 교회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들에 아리우스파가 반발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81년 5월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삼위일체 ‘위격’을 논쟁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령론이 중심이었다.여기에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성령의 위격이 결정되었다. 황제는 그 해 7월에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믿는 신앙에 의무적으로 복종하도록 법을 공포했다.이로써 정통교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몰려 영구히 뿌리가 뽑혔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득세하던 기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는 200년 이상 아리우스파가 존속했다. 또 고트족은 587년까지, 스페인의 수에비족은 560년까지, 반달족은 530년까지, 부르군트족은 534년까지, 롱고바르드족은 6세기 말까지 아리우스주의를 견지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와 정통교리 사이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381년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통 교회들이 사실상 채택하고 있는 신조가 수립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백년에 걸친 삼위일체 논쟁에서 정통신앙의 확립은 성령의 역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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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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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와 부전(附箋)상소 개헌안 소고 (상)
- 총회직무에 고소접수처리 규정은 64년판 오류신도와 목사의 원심재판권이 없는 대회와 총회 《고소 받아 재판하는 총회의 불법》권 제4장 제19조에 의하면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즉 목사를 피고로 하는 고소를 받아 재판하는 권한과 직무는 당회에도 없고, 대회나 총회에도 없고 노회에 있는데, 온갖 노회들 중에서도 오직 그 목사가 소속한 노회에만 있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 (즉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받은 적이 없는 일반 신도들은 물론, 직분을 받은 신도 <서리집사, 집사, 권사, 장로, 노회총대가 된 장로나, 노회임원 등, 노회관계 직분을 받은 장로와, 총회총대가 된 장로나, 총회임원 등 총회 관계 직분을 받은 장로>의 고소를 받아 재판하는 권한과 직무는 노회에도 없고, 대회나 총회에도 없고, 당회에 있는데, 온갖 당회들 중에서도 오직 그 일반신도<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받은 적이 없는 신도와 서리집사, 집사, 권사, 장로>가 소속한 당회에만 있고),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즉 노회가 당회에 명령하거나, 총회가 노회에 명령하여 <임원회도 아니고 상비부도 아니고 상회라 하였으니, 당회의 상회는 노회요, 노회의 상회는 총회이니, 하회에 명령하려고 하면 반드시 상회의 결의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처리하라는 (2000년 판 헌법이 “라”자를 빠뜨려 “처리하는”이 된 것은 오류이다)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결국 고소를 받아 재판할 수 있는 치리회란 당회(일반신도 관계 재판)와 노회(목사 관계 재판)이니, 정문: 405 문답에서 “대회와 하급치리회는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르냐?” “대회와 하급치리회가 서로 다른 것은 대회는 상소 혹은 상고를 수리하는 회이다. 목사의 원치리권이 노회에 있는 것처럼, 치리장로나 교인의 원치리권(직접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리킨다 …필자 주:)은 당회에 있은 즉(Presbyterian Digest. PP.191~192) 대회는 이런 원치리권(직접 다스리는 권한… 필자 주:)이 없고, 오직 노회로부터 위탁 판결이나 고소, 혹은 상소나 상고가 있어야 이를 심리할 수 있다” 동 430문답 “총회에 어떤 원치리권이 있느냐?” “상고를 받지 아니한 이상 교회와 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이 없다(Presbyterian Digest. PP.127, 277, 본서 438~440문답 참조)고 풀이한다. 즉 총회는 상소나 소원, 위탁판결 청원은 받을 수 있어도 고소는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2008년 제93회 총회에서 2018년 제102회까지 헌의부와 재판국 보고에 나타난 고소건은 제93회 총회에서 4건, 제94회에서 5건, 제95회에서 4건, 제96회에서 3건, 제97회에서 2건, 제98회에서 6건, 제99회에서 1건, 제100회에서 18건, 제101회에서 3건, 제102회에서 1건이니 도합 47건이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 제12장 (총회) 제4조 총회의 직무」에 의하면 “총회는 소속교회 및 치리회의 모든 사무와 그 연합관계를 총찰하며, 하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하는 헌의와 청원과 상고와 소원과 「고소」와(1964년 판에서부터 「고소」가 들어간 오류인데 벌써 54년이나 방치될 뿐 아니라, 지금은 정당한 규정처럼 인용되고 있다). 문의와 위탁판결을 접수 처리하고…”라고 하였으니, 이 규정대로면 총회가 고소를 받아 심결하는 일이 합법이요, 위에서 본 바대로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란 권 제4장 제19조의 재판관할 규정에 의하면 대회, 총회가 상소, 소원, 위탁판결청원은 받을 수 있어도 고소는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명백한 불법이다. 정치규정(제12장 제4조 총회의 직무)를 따르자니 권징조례(권 제4장 제19조)가 불법이라고 소리 지르고, 권징조례(권 제4장 제19조)를 따르자니 교회정치(정 제12장 제4조 총회의 직무)가 불법이라고 하니, 이것이 그 교단의 헌정 실상인가? 1964년 판 헌법에서 잘못 들어간 오류(고소)를 어서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상소 절차를 곡해하는 총회의 불법》2008년 제93회 총회로부터 2018년 제102회 총회까지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에 나타난 상소 혹은 소원 등에 경유 미비, 부전지 미비, 절차 미비 등 사유로 불이익 처분을 당한 건수가 2010년 제95회 총회에서 2건, 제96회 총회에서 3건, 제97회 총회에서 3건, 제98회 총회에서 7건, 제99회 총회에서 6건, 제100회 총회에서 26건, 제101회 총회에서 10건, 제102회 총회(2018년)에서 6건, 도합 67건인데, 「절차 미비」란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만으로는 어떤 절차가 미비인지 알 수가 없으나, 헌법이 정한 소원인의 소원절차는 “소원에 대한 통지서와 이유서는 하회 결정 후 10일 내로 작성하여 그 회 서기에게 제출할 것이요(서기가 별세하였거나, 있지 않거나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 그 회 서기는 상회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그 소원통지서와 이유서와 그 안건에 관한 기록과 일체 서류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권 제9장 제85조)고 규정하였고, 이어서 제87조는 “소원하기로 성명한 자는 상회 그 다음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소원통지서와 이유서를 상회서기에게 제출한다”고 한 것이 전부이다.그리고 상소절차도 소원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 제9장 제96조에 의하면 “…하회 판결 후 10일 이내에 상소통지서와 상소이유 설명서를 본회 서기(서기가 별세하였거나, 부재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에게 제출할 것이요…” 이어서 제97조는 “상소인 자기가 대리할 변호인은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소장과 상소이유 설명서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 상소인이 전기 기일에 출석하지 못한 때에는 불가항력의 고장을 인하여 위의 기간 안에 출석하지 못한 믿을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 상소는 취하한 것으로 인정하고 본 하회의 판결은 확정된다”고 하였으니, 결국 소원이나 상소는 하회가 처결(혹은 판결)한 후 10일 이내에 하회서기에게 상소 또는 소원통지서와 이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성립되고,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회서기에게 같은 문제를 다시 제출하지 아니하면 상소 취하로 보고 본 하회의 판결이 확정된다 하였으니, 이는 “후 10일” 이내에 제출한 상소(소원)통지서와 이유서로 이미 성립된 상소에 대한 취하 여부를 판단하는 자료가 된다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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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와 부전(附箋)상소 개헌안 소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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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3
- 이들의 사상은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지금도 간간히 나타나고 있다니케아 이전 시대의 분파들그리스도교의 탄생과 함께 초대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이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몬터너스주의, 노바티아누스주의, 마니교 등이 그들이고, 도나투스주의는 교회의 권징 문제로 벌어진 논쟁으로 분리된 분파이다. 이처럼 수많은 이설(異說)들이 정통주의가 확립되기 전에 교회를 혼란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니케아 시대를 지나며 그리스도교의 복음에서 일탈한 것이 확인되어 역사적 그리스도교에서 소멸해 갔다.1. 에비온주의(Ebionites)에비온파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였다. 이 이름은 ‘가난한’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에비온파는 자신들이 ‘가난한’ 그리스도와 그 분의 가난한 제자들의 참된 추종자들로 간주했으며, 자신들에게만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된 복이 있다고 생각했다.에비온파는 유대교 바리새파의 율법주의를 구현하고, 모세 율법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율법의 준수와 할례를 반대하는 사도 바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의식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행 15:1).그들은 예수는 약속된 메시야, 다윗의 아들, 최고의 입법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모세와 다윗처럼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이다. 그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어 영원한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바울은 이단이며 배교자이고, 그가 쓴 서신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셔서 지상의 예루살렘에 권좌를 설치하고 천년동안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에비온파에 대한 경계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 13).이들은 오늘날 ‘에비온파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복음서를 갖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마태복음의 발전된 형태이다.2. 영지주의(Gnosticism)영지주의는 처음에 이교철학에서 기독교로 주입된 특이한 사상이다. 영지주의는 당시의 그리스 철학, 문학, 종교에까지 광법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대다수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더 고등한 지식으로 이루진다고 간주했고, 자신들은 보다 높은 영적 지식, 즉 자신들을 비밀스럽고 철학적이며 영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고 믿고, 영혼과 육체만을 지닌 단순한 사람들을 경멸했다.영지주의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과 물질이 영원히 대립된다는 이원론(二元論) 체계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는 악의 원리가 거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없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면 하나님이 악을 지으신 셈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빛의 영혼이 어두운 물질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각할 수 있고 현상적인 세계로부터 감각되지 않는 이상적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중보자이다.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소수의 무리에게 ‘그노시스’(gnosis, 靈知)를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상적 세계(하나님 나라)와 연합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능력을 주는 존재이다.영지주의는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의 정체성을 파괴할 정도로 이질적 사상을 혼합하여 그리스도교를 변질시켰다. 그로인해 또 다른 분파들이 생겨나고, 수많은 학파들도 생겨났다. 그들이 남긴 저서들은 1946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콥트어로 기록된 사본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리의 복음, 레기노스의 서신, 도마복음, 빌립복음서, 요한 외경, 아담묵시록 등이다.3. 마니교(Manes)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활동한 철학자 마니(Mani)에서 유래한다. 마니는 유대교적 영지주의에 속해 있었으나, 다른 영지주의파들과는 달리 19세와 24세 때 신(神)으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계시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보낸 선지자이자, 그리스도가 약속한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근본 원리들에 대한 서신들’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마니는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힘입어 이 서신들을 쓴다. 이 서신들은 영원하고 생명이 있는 근원으로부터 온 구원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했다.마니는 처음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 1세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으나, 당시 페르시아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마기교(Magians)의 사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피신해 인도 동부와 중국으로 가 불교를 접했다. 270년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와서 교리를 가르치다가 227년경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박해를 받아 산채로 가죽이 벗겨진 채 죽었다. 그가 비참하게 죽은 후에, 그의 교리는 살아남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중앙아시아, 메소포다미아,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 등으로 널리 퍼졌다.마니교는 이원론과 범신론과 영지주의와 금욕주의 요소들이 두루 혼합된 종교이다. 마니교의 신학은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 사이의 철저한 대립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서 온 것이다. 또 마니교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드러낸다. 이것은 불교적 영향이다.마니교의 기독론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도들이 곡해해 유대교 정신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약속한 다른 보혜사인 마니가 비로소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되살려 놓았다는 것이다.그들은 언어생활과 식생활에서 순결을 위해 일체의 육류와 자극성 있는 음료를 삼가며, 곡물과 채소만 먹고, 현세적 재산과 물질을 갖지 않으며, 자연에 두루 스며 있는 신적인 빛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또 결혼생활은 영혼을 더립히는 행위임으로 독신생활을 선호했다.4. 도나투스주의(Donatism)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권징 문제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일어난 분열이다.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11년) 때에 신앙을 배교한 고위 직분자 처리 문제를 놓고 벌어진 일이다. 박해 당시 누미디아 대주교 관할에 속한 카사이 니그라이의 주교 도나투스(Donatus)가 이끈 강경파는 순교를 각오하고 황제의 박해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위협을 피해 도주하거나 성경을 당국에 내어주는 행위를 반역적인 행위로 간주했다.그런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은 신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들, 특히 박해 때 신앙을 부정하거나, 박해자에게 교회가 보존해온 성경을 내어준 배교자들을 예외 없이 출교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교회의 일에 세속 권력의 개입을 철저히 배격했다. 반면에 주교 멘수리우스와 그의 차부제와 후임 주교 카이킬리아누스를 필두로 한 온건파들은 배교자들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고, 교회의 권징에서 신중할 것을 요구했다.313년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고 박해가 중단되자 카이킬리아누스를 카르타고 주교로 임명한 것이 발단이었다. 도나투스파는 그를 주교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강경파에 속하는 70명의 누미디아 주교들이 카르타고에 모여 카이킬리아누스를 면직하고, 독서자 마요리누스를 주교로 선출했다. 315년에 마요리누스가 죽자 동명이인인 다른 도나투스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열정적 웅변력을 지닌 자로 존경을 받았다.그런데 양 진영은 해외의 지지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판결은 카이킬리아누스에게 유리하게 내려져 그가 카르타고의 합법 주교로 인정을 받았다. 도나투스파가 강력히 항의하자 314년 황제는 다시 이를 교회재판에 위임했다. 교회의 판결도 전과 같았다. 도나투스파는 그것 역시 불복하고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했다.황제는 321년에 도나투스파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도나투스파의 논쟁에서 저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혼합된 몸’을 구분하는 교회론이 나왔다. 도나투스파의 분열은 일종의 교권 투쟁으로, 교회의 순결주의와 절충주의 간의 논쟁이었다.도나투스파는 가톨릭과 별개로 7세기까지 존속했으나 아프리카 교회 전체가 이슬람 사라센의 정복으로 사라졌다. 이 논쟁은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도 때때로 되풀이 되고 있다.4. 기타 분파들몬타누스주의(Montanism), 시몬파(Simonians), 니골라당(the Nicolaitans), 케린투스(Cerinthus), 바실리데스(Basilides), 발렌티누스(Valentinus), 마르키온(Marcion),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 타티아누스(Tatia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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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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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반으로 조직되는 당회결의 소고
- 장로반, 동의·재청을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목사, 가부를 물을 권리와·묻지 아니할 권리 1959년 제 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집되었을 때에, 표면적으로는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요, 내부적으로는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찬반으로 서로 충돌 하다가 총회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총회장소(대전)를 떠나, 언제 교섭해 놓았었는지 야간특별열차(버스가 아니다)를 타고 상경하여 서울 연동교회당으로 옮겨 별개집단을 형성하였다가, 그 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사들과 함께 모였다며 총회가 통합으로 갈리는 아픔을 겪었으나, 1960년 12월 13일 제45회 속회총회에서 고신측과 합동하여 세칭 합동측 총회가 되었고, 그 합동총회에서 헌법과 총회규칙을 개정하기로 하고 개정위원으로 양측의 저명한 인사 17인(고성모, 김세영, 김윤찬, 노진현, 명신홍, 민상기, 박병훈, 박손혁, 서완선, 송상석, 양성봉, 윤봉기, 이인식, 전성도, 정규오, 한상동, 황철도, 가나다 순임)에게 위탁하였단 바, 1961년 제46회 총회에서 각 노회에 수의하여 가결되었으므로 1962년 제47회 총회에서 공포 시행하였는데, 책 (「신조, 정치 및 헌법적 규칙」이 발행된 것은 1964년이었다.그 1964년 판 헌법에서 「교회정치 총론」이 신설된 셈인데, 교황정치, 감독정치, 자유정치, 조합정치에 이어 장로회정치 체제에 대하여,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지교회를 주관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당회는 치리장로와 목사인 강도장로(講道長老)의 두반(班)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서 노회, 대회, 총회, 이같이 3심제의 치리회가 있다.이런 정책은 “모세(출 3:16, 18:25~26, 민 11:16)와 사도(행 14:23, 16:4, 딛 1:5, 벧전 5:1, 약 5:14)때에 일찍 있었던 성경적 제도요, 교회역사로 보더라도 가장 오랜 역사와 우위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 장로회정치를 채용한 교인들이며, 또한 이 장로회 정치는 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본으로 한 것인 바, … 본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회헌법도 1912년에 총회가 조직되고, 1917년 제6회 총회 때 본 총회의 헌법을 제정할 때에 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초로 해서 수정 편성한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그리고 정 제3장 제2조에서도 “장로는 두 반(班)이 있으니, 1.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2.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라고 규정한다. 즉 지교회를 주관하는 당회의 조직은 통상적인 회의체들처럼 수(數)를 단위(單位)로 하는 수의 결합체가 아니고 반(班)(즉 목사반, 또는 장로반 등)을 단위로 하는 회의체라고 하는 말이다. 지교회의 담임목사는 항상 1인이지만 장로는 (물론 한 분도 없는 미조직교회도 있지만) 오히려 다수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회조직이 수를 단위로 하는 의결체라고 하면, 장로들의 생각이 서로 갈리지 아니하는 한, 소 수(목사 1인)는 다수(장로들)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겠는데, 이것이 과연 장로회정치인가?두반의 조직, 즉 당회는 목사반과 장로반의 조직이요, 그런즉 당회의 결의란 목사반과 장로반의 합의를 가리킴이니, 목사반을 배제한 장로반만의 결의도 있을 수 없고, 장로반을 배제한 목사반 만의 결의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이다.그리고 반의 조직은 당회의 성수 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과 목사 1인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목사 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장로 1인만 있는 경우에도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문제나, 다른 사건에서 장로가 반대할 때에는 노회에 보고해서 처리한다”(정 제9장 제2조) 목사반은 전원출석이 목사 1인의 출석이요, 장로반은 전원출석이 옳으나 과반수이면 전운출석으로 간주하고 성수의 한 요건이 되게 한다. 그리고 장로 2인의 과반수는 불가능하니 반(半)인 1인 출석으로 전원출석으로 간주하고 성수요건이 되게 하였으며 “…장로 1인인 경우, 목사 1인 장로 1인 출석으로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권징)문제나, 다른 사건에서 장로가 반대할 때에는 노회에 보고하여 처리 한다”고 하였는데, 장로반과 목사반이 동등이니, 두 반의 합의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노회에 보고해서 처리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게 하고 있다.그러나 당회의 성수를 “…당회장을 포함한 회원 과반수 출석으로 개회성수가 된다”(기장: 정 제9장 제46조, 통합 정 제10장 제65조)는 교단 중 기장측은 목사반과 장로 반 즉 두 반(班)의 조직이라는 전통적인 관계 규정을 삭제했고, 통합측은 ‘두 반(班)’을 ‘두 가지’라고 바꾸기는 하면서도 당회성수 규정에서는 1971년 판과 1972년 판과 1981년 판까지 “…당회장과 당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한다”(정 제9장 제54조)고 하여 두 반(班) (즉 목사반의 출석과, 장로 과반수이면 장로반 전원출석으로 간주한)의 조직이란 원규정대로의 조직 같았으나, 1984년 판 헌법(정 제10장 제65조)에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회의 성수는 당회장을 포함한 당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한다…“고 하여 당회조직이 반단위(班單位) 조직에서 수단위(數單位) 조직으로 되었으니, 두 교단은 당 회원인 장로들의 의견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똘똘 뭉쳐 있는 한 어떤 사건에서든지 소수인 목사(1인)는 다수인 장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그러나 당회를 목사반과 장로반 즉 반단위로 조직하는 교단(합동측, 합동보수측, 합신측, 개혁측 등)의 경우, 목사반과 장로반은 동등한 권한이니, 수에 있어서 다수인 장로반도, 소수인 목사반도 서로를 이기지 못하니, 결국 당회는 양권(두반)의 합의로 가결 하느냐 합의에 실패하여 부결하느냐는 두 길이 있을 뿐이다. 회의법으로는 회원 중에서 동의와 재청이 있으면 회장은 가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두 반으로 조직되는 당회의 경우, 장로반과 목사반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동의와 재청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권리가 장로반에게 있음과 같이, 가부를 물을 수도 있고, 안 물을 수도 있는 권리가 목사반에게 있게 된다. 교회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뜻으로 확실할 때에는 동의 재청을 할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동의 재청을 안할 수가 있음 같이, 장로반의 동의 재청이 주님의 뜻으로 여겨질 때에는 가부를 물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여겨질 때에는 가부를 묻지 않을 권리가 목사반에 있다는 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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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반으로 조직되는 당회결의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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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
-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680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까지교리의 확립: 초기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도 불리우는 이 그리스도교 보편공의회는 325년 니케아(Nicaea)에서 시작하여 이후 787년까지 7차에 걸쳐 개최되어 기독론과 성령론 등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확정했다. 이 시기를 니케아 시대라 한다.제1차 325년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 논쟁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하여 318명의 감독들과 장로들이 두달 동안 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목회자) 아리우스 간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는 “예수는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아다나시우스이다. 아다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정통파를 괴롭혔다. 한때는 아리우스주의가 정통파보다 우세한 때도 있었다.그런데 곧이어 그러면 성령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보혜사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승천 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요 14:16) 오순절 날 온 것이 성령인데(행 1:4, 2:1-4), 이 다른 보혜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논쟁의 주제였다.제2차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삼위일체 위격 논쟁니케아 공의회가 있은 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소아시아 보르포부스 해협의 그리스 도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 330년에 수도를 낙성하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ul)이라 명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에따라 그리스도교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 교구이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그리고 동유럽이 포함되었다.381년 5월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는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1)이다.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달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위격이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했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사회의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제3차 431년 에베소 공의회: 기독론의 단성론과 양성론 논쟁니케아 회의의 결정대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예수의 인성(人性)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기독론의 단성론(단性論)과 양성론(兩性論) 논쟁이다.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Cyrilus)를 중심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그가 인간으로 오셨으나 “신성이 우세하다”고 주장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중신한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가 신일 때는 신성이, 인간 예수일 때는 인성이 우세하다는 양동설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431년 6월 22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2)가 에베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6월 22일, 키릴파의 감독 160여명이 네스토리우스파 감독들이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공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감독 50여명이 26일, 대립공의회를 열고 키릴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분열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 theotokos)라고 결정됐다.이로인해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사막으로 추방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던 안디옥 학파는 에뎃사에 선교본부를 두고 동방선교에 나섰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거쳐 중국 당나라에까지 퍼진 네스토리우스 교회이다. 중국에서는 이 교회를 ‘경교’(景敎)라고 부르고, 몽골에서는 ‘에루케온’(也里可溫, 야리가온)이라 불렀다.제4차 451년 칼케톤 공의회: 단성론 정죄에베소 회의가 파행으로 끝나자 449년 8월 8일부터 22일까지 에베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장로이자 300명의 수사를 감독하는 동방교회의 대수도원장 유디게(Eutyches)를 따르는 150여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일성론(一性論)을 채택하고, 그리스도에게 “이성(二性)이 있다는 자는 둘로 쪼개라”라며 양성론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에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는 451년 9월에 다시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니케아에 회집한 감독들이 격앙되고 난폭한 행위를 드러내자 장소를 바꾸어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칼케톤으로 옮겨 공의회를 개최했다.35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다. 다만 죄만 없으시다”며 “신성과 인성은 혼합됨이 없이 존립한다”고 결정하고,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로인해 교회는 양성론파와 단성론파 사이에 오래동안 분열이 지속되었다.476년에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에 남은 것은 이제 교회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이다. 590년 로마교구의 대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1)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제5차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성론자와의 화해 시도칼케톤 회의 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553년 5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anus)가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했다. 166명의 감독들이 참가해 한달간 진행된 이 회의는 황제가 단성론자였기 때문에 칼케톤에서 이단이 된 칼케톤 신조 반대파들과 화해를 위해 모인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양성의 본체이신 로고스”라는 애매한 말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그러나 끝내 양측은 화해하지 못하고, 칼케톤 신조를 반대하던 단성론파인 에집트의 콥틱교회(Copts),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s), 시리아의 야곱교회(Jacobitrs), 레바론의 마론교회(Maronites)가 분리해 나갔다. ‘두 번째 분파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정통(正統)이라며, 교파 이름을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그런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 안디옥 감독 세베루스(Seberus)가 단의설(單意說)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양성이 있다면, 그 의지(意志)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논쟁이 제기된 것이다.제6차 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단의설 논쟁단의설 논쟁으로 교회는 1세기가 넘겨 여론이 갈라져 있었다. 이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680년 11월 7일,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174명의 감독들이 모여 10개월 간 가진 이 회의는 “그리스도는 두 의지(意志)가 있으나 서로 반대됨이 없고, 인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복종한다”고 결론 짓고, 단의설파를 배격하고, 단의설을 지지한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1)와 교황 비길리우스(Bigilius)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정립과 교리 논쟁이 끝났다. 이를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라고 한다.제7차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콘 논쟁그런데 교리 논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6세기 이후 교회 안에 들어온 성화(聖畵, 이콘) 숭배를 이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한 의식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여론이 갈라졌다. 사실 이콘은 당시 신도들 가운데 문맹자가 많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복음서를 설명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방편으로 삼았다.이를 조정하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6)는 787년 9월 24일,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365명의 감독들이 모여 10월 23일까지 개최된 이 회의는 성화 숭배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 열띤 논쟁 끝에 “인간이 이콘(성화)을 보며 공경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근원인 신성(神性)에 있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콘이 교회안에 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이콘 논쟁’이라 한다. 그러나 이콘 반대파들은 814년부터 829년 사이 ‘성상 파괴운동’을 일으켜 교회 안에서 이콘을 몰아내는 과격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에서 중세 종교개혁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콘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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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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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 4
- 환부와 환송회 뜻도 헷갈리는 총회상설재판국원심파기 스스로 판단하고서도 노회 환부가 웬 말 (승전) 2013년 제98회 총회가 채택한 총회재판국 판결에 노회로 환송한 사건이 5건인데,(동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P.89~91) 그 다음해인 2014년 제99회 총회 회의결 의 및 요람 PP.93~96)에 의하면 ‘노회로 환부하다’고 하였고, 2016년 제101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P.120~121)에 의하면 “…상소인의 상소를 J노회로 환송한다”고 노회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환송」이라고 올바로 표시하고 있으나 같은 재판국이 바로 그 다음 사건부터는 노회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환부」한다고 환부한 것이 4건이나 이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웬일인가? 어떤 때는 노회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환송」이고, 어떤 때는 「환부」가 되는가? 하회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환송」이란 규정이 여기 뿐 아니라, 권 제9장 제70조와 동 제76조 제82조에도 규정되어 있는데, 총회재판국이 정녕 환부와 환송의 뜻을 알지 못하고 환송이라 해야 할 경우에 환부라고 하고, 환부라고 할 경우에 환송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헌법의 규정에 따라 총회재판국 판결의 적부(適否)를 논하는 자체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그러나 위에서 본 잘못은 비록 용어 선택은 잘못했을 망정 사건을 노회로 되돌려 보낸다는 뜻은 바로 되었는데, 2017년 제102회 총회가 채택한 총회재판국 판결에는 「환부」가 무려 9건이나 되는데, (동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P.121~127) 환부란 그 사건을 판결한 상설재판국에 재판을 다시 하라고 되돌려 보낸다는 뜻인데(권 제13장 제 141조, 동 제131조), 판결대로라면 총회가 9건이나 상설재판국이 재판 잘못했다고 다시 재판하라고 되돌려 보냈다 함인데 과연 그러한가?여기 관계 판결 주문이 과연 환부인지, 환송을 환부라고 썼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 그대로 옮겨 본다.“…상소건은 주문: 상소인 A, B, C, D, E, F, G 씨에 대한 2017년 2월 13일자 ○○교회 당회재판회의 제명출교 판결과, 상소인들의 상소장 및 조사청원서들에 대한 2017년 3월 13일자 ○○노회의 기각 및 청원인 상소인들의 자격을 3년간 정지한 처분은 각 무효임을 확인하고, 위 상소인들의 시무장로직 및 당회원의 지위를 회복한다”는 환부 하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주문의 내용을 보면 총회재판국이 다 판결 하였는데 끝에 가서는 환부(즉 총회상설재판국으로 돌려보낸다) 한다고 하였으니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는가? 다 판결했으면 그냥 보고하면 될 것인데 이 사건을 판결한 총회재판국이 다시 돌려 보낸다가 말이 되는가? 더구나 총회재판국이 판결해 놓고, 총회재판국에 되돌려 보내자고 스스로 결의해서 총회에 보고하다니 말이 되는가?그 다음 사건 하나를 더 본다. “○○노회 ○○○ 씨 외 6인의 ○○노회 XXX 씨 외8인에 대한 상소건은 주문 ① 피상소인 A씨를 목사면직에 처한다. ② 피상소인 B, C, D, E, F, G 씨를 정직 6개월에 처한다(단 설교권은 허락한다). ③ 재판비용은 피상소인들이 부담하라)는 환부하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이 사건도 위에서 본 것과 똑같이 총회재판국이 다 판결해 놓고 끝에가서 환부(즉 총회재판에 다시 재판하라고 돌려보내기로) 하기로 가결하였다는 것이니 여기서 총회재판국이 환부 한다는 뜻은 우리 총회재판국이 원심을 파기하고 자판하였으니 이대로 집행하라고 노회로 돌려보냈다고 해야 맞을 것처럼 여겨진다. 결국 총회재판국은 환부의 뜻을 모르고 이렇게도 갖다 붙이고 저렇게도 갖다 붙이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래 7건도 모두 똑같이 다 판결해 놓고 끝에 가서 환부한다고 하였으니 말이다.총회가 채택한 총회재판국 판결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판례가 되는데 교회정치 문답조례는 “…재판사건에 대한 총회의 결정은 최종적이니 순복할 수밖에 없고, 후회(後會)가 이를 취소하거나 정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명백한 착오는 정정할 수 있다(Presbyterian Digest pp.533~534)고 풀이한다. 그러나 역대 총회에서 총회의 판례를 변경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면 판례는 앞으로도 실무상의 선례가 되는 것인데, 선례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니 어떤 선례가 후 판결에 본을 삼을 선례구실이 되겠는가?끝으로 가장 크게 황당하게 여겨지는 총회가 채택한 총회재판국 판결은 상소사건 혹은 소원사건을 심리 판결하고 나서 이 판결에 불응하면 거의 모조리 제명출교에 처한다는 것인데, 제98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pp.89~91)에 의하면 “…상소건은 병합하여 주문 (1. ○○교회 A장로와 a전도사에게 이명을 발급하여 타교회로 출석케 하고 이를 불복할 시는 제명출교한다…”, “…상소건은 주문(상소인은 2013년 10월 15일까지 이명하고 이를 불응시 제명출교를 확정한다)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 아래에도 똑같은 판결이 두 세건이나 뒤를 잇고 있다.이제 총회재판국에 묻는다. 정 제9장 제5조 2.에 의하면 “…주소 변경한 교인에게는 이명증서를 접수 또는 교부하며…”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주소 변경하지 아니한 교인에게 이명을 주어 타교회로 출석케 함이 옳은가? 국헌은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고 장로회 정치의 제1원리는 양심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총회재판국이 판결로서 거주의 자유를 박탈하여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6조)는 국헌을 어기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의 자유를 어기는가?판결한 분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이명하면 무죄가 되고 안하면 최고 극형인 제명출교가 되는 죄가 도대체 무슨 죄인가? 총회재판국은 총회의 결의로 위탁받은 사건만 심리 판결한다(권 제13장 제134조)고 하였는데, 판결을 받은 분들이 아직 판결을 어기지도 않았고, 어겼다고 피소되지도 않았으며, 총회가 결의하여 판결을 어긴 사건을 심리판결 하라고 총회의 결의로 재판국에 위탁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이 없으니 위탁할 수도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판결 운운하는가? 범행이 있고 난 다음에 그 범행에 대하여 고소하는가? 범행도 없고 소송하는 자도 없는데 재판국이 멋대로 범행을 예상하고 극형에 처하는 것이 맞는가? 과연 이것이 사람의 이름으로도 판결하지 못할 일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행한 판결이라고 갖다 붙였을 터인데, 그러고서도 두려움이 없는가? 답변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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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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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춘오 목사(발행인) -1
-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비로소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아 처음에 하나였던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분파를 만들어내었다. 크게 로마 가톨릭, 희랍 정교, 프로테스탄트로 구분하나, 실상은 이 외에도 각 나라와 민족에 따라 이 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엡 4:4-6)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이처럼 많은 분파를 만들게 된 과정을 살펴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고자 한다.1.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그리스도교는 사도 시대로부터 속사도 시대 그리고 교부 시대를 지나기까지 처음 3세기는 로마 제국의 박해아래 있었다. 이 박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기나긴 참극이었다.이 시기의 교회는 겉으로는 가난하고 비천해 보였으나 실상은 하늘의 은혜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품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라는 말씀대로 순교자들의 피를 딛고서 인내 속에서 견뎠다. 은과 금은 없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3:6).이 기간동안 교부들의 신학은 주로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적 이교(異敎) 사상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고, 영지주의(gnosis) 이단을 논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변증과 논박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거대한 힘과 활력으로 신앙의 신적 기원과 특성을 도출해 냈다.1)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처음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반란 가능성이 있는 혁신집단으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는 제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들이 점령한 각 지방의 풍속, 종족들의 법, 종교적 신앙, 백성들의 정치제도를 인정해 주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불법적 종교’(religio illicita)가 된 이유는 유대사회의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였던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는 황제숭배를 반대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그가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상관없이 신(神)으로써 제국의 번영과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법(法)을 구현하는 존재로 추대되었다. 황제숭배의 깊은 뜻은 단순히 황제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경배였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권력과 제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고발되었다.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주후 64년 네로(Nero) 황제로부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는 제국의 모든 속주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의 감독(주교), 사제(신부), 부제(집사)는 즉결 처형하고, 귀족이나 귀부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노동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죄명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행위였다.주후 300년 2월 24일 로마제국 전역에 공표된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은 다음과 같다.①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모두 토대부터 파괴한다. 교회로 쓰인 곳이 개인주택의 일부라 해도 예외가 없다.②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교도들의 모임은 엄금한다. 예배도, 세례식도, 결혼식도, 장례식도 이 금령에 적용된다.③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서적, 예배에 쓰이는 기구, 십자가, 그리스도상 등은 몰수하여 소각한다.④ 그리스도교도는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자라도 모든 특권을 박탈한다.⑤ 그리스도교도로 인정된 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비롯하여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⑥ 교회의 재산은 몰수하여 경매에 붙이고, 매상금은 지방자치단체나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직능조합에 분배한다.⑦ 그리스도교의 신도로 인정된 자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한다.2)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로마는 지중해를 끼고 동서남북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다보니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선 국경 침입과 군대의 반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해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로 구성된 4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가장 극렬히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였다.동방의 정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수도를 니고메디아(Nicomedia)로 정하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북아프리카를 방위했다. 부제는 갈레리우스(Galerius)로, 수도는 시르미움(Sirmium)으로 정하고, 북쪽은 도나우 강, 남쪽은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 전역을 방위했다.서방의 정제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수도를 밀라노(Milano)로 정하고, 도나우 강 상류 일대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지중해 섬, 북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방위했다. 부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로, 수도는 트리어(Trier)로 정하고,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히스파니아, 북서 아프리카를 방위했다.주후 305년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동반 퇴위하고, 동방 정제는 갈레리우스가 되고, 부제는 막시미아누스 다자(Maximianus Daza)가 되었다. 그리고 서방 정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되고, 부제는 세비루스(Sebilus)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자 부제인 세비루스는 밀려나고, 서방 정제에는 니키니우스(Licinius)가 되고, 부제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되었다.그런데 문제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아버지가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며 황제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4명의 황제는 막센티우스를 국가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북쪽에 있는 티베르 강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아우스를 무찔렀다. 이 전투가 있기 전날 밤 꿈에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상징이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교를 관용하라.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다”라는 내용의 역사적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가 박해에서 해방된 ‘밀라노 칙령’이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지금까지 발령된 그리스도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 받는다. 그리스도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된다.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교도들에게서 몰수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3)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자유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4개의 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째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교구이고, 둘째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구이며, 셋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이고, 넷째는 이탈리아의 로마 교구이다. 그리스도교가 박해 아래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구마다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즉 기독론이 통일되지 않았던 것이다.이원론의 영지주의(gnosis)는 예수를 신의 현현, 즉 ‘그리스도’(메시야)로 보면서도 사도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는 진정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영(靈)이므로 육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리우스(Arius)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창조주 성부의 신성과 달라 성부로부터 맨 처음 난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성육신 신앙에 위배된다는 것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여론은 지역에 따라 갈라져 있었다.이를 통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4개 교구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소아시아 니케아에 불러모았다. 그것을 제1차 세계그리스도교공의회라 한다. 그 이전에도 각 교구나 관구(속주) 또는 전국 및 총대교구 단위의 지역 공의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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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춘오 목사(발행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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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 -3
- 상소건이 왜 조정건 되고, 판결 않기로 건 됐나임원회의 재판간섭 보고, 순진인가 망발인가? (승전) “…상소는 원고 혹은 피고가 하회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고 상회에 이에 대한 취소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권 제9장 제94조). 그리고 위탁판결은 하회가 상회를 향하여 처결방법을 지시하라고 구하는 것이요, 상소는 하회의 착오된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니, 상소가 교회법규에 위반되지 아니하였으면 상회가 반드시 수리할 것이요, 위탁판결은 상회가 형편을 따라 지시하기도 하고, 지시 없이 돌려보내기도 한다”(정문: 294문답). “…소원은 행정사건 체결에 대한 불복으로 발생하는 것이니, 이는 그 치리회 관할 하에 있는 교인 중 아무라도 제기할 수 있다(가령 당회의 이명증서 발급관계, 공동의회 소집, 불소집 관계, 회록을 낭독 없이 채용하는 문제 등등). 사건처리 당시에 참석한 회원 3분의 1 이상이 연명날인하여 소원하면 상회의 결정이 나기까지 하회의 결정을 정지해야 한다(권 제9장 제84조, 동 제86조). 규칙에 적합한 소원을 불가불 청리(聽理)해야 한다(동 제 88조), (정문: 295문답).위 두 문답은 “…상소가 교회법규에 위반되지 아니하였으면 상회가 반드시 수리 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규식에 적합한 소원은 불가불 청리해야 한다 함이다. 교인에게 양심자유가 있고(제1장 제1조, 정문: 1문답). 교회직원에겐 3대 직책이 있으니 “직원의 직책은 예수께서 지정하신 것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성례를 관리하는 것과, 권징하는 것이다. 저들은 견책을 행하든지, 거짓되거나 악한 자를 징출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행하며, 모든 경우에서 성경의 법례대로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권세는 직원들과 전체 교회에 지워진 의무이다. 이 권세는 오직 그의 명하신 바, 그의 법을 적용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바대로 대언하며 선포하는 것 뿐이다”(정문: 제6문답). 요약하면 정당한 송사는 치리회가 수리해야 하고, 접수한 재판사건은 원고가 이기든지 피고가 이기든지 판결해야 할 의무가 지워졌다고 하는 말이다.그런데 위에서 본 5년 동안 총회회의 결의 및 요람에 의하면 2013년 제98회 총회재판국 판결에 “○○○ 씨의 ○○노회 및 ○○노회 XXX 씨 외 2인에 대한 고소건은 총회임원회의 중재로 이 재판권도 취소하고, ○○○ 목사에 대한 먼저 ○○노회에서 면직 한 것도 취소하라고 하여 판결하지 않기로 가결하다”(동서 P.91)고 하였고, 2012년 제97회에서는 “○○○노회 XXX 씨에 대한 고소건은 주문: 무지역노회에서 지역노회로 편입하는 것은 총회 결의정신에 부합하고, 이적 이명절차를 따르지 아니한 것은 당시 ○○교회의 잘못이다. 1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소원한 것은 불법이므로 권징조례 제4장 제19조, 제9장 제99조 2항 (4)에 의거 조정 결정한다.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동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P.88)고 하였는데, 적용법조문까지 기록되었으니 총회재판국은 판결 권만이 아니고 조정권도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하고 있는데, 그 법조문은 조정관계 규정이 아닌 것은 교회재판 규범인 권징조례는 조정제도 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권 제4장 제19조는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치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다”는 재판관할 규정인데, 이것이 어떻게 조정의 근거가 되며, 또 권 제9장 제99조 2항 (4)는 조문 자체가 상소심 재판의 진행절차이요 2항 (4)는 위 순서 중 마지막 단계의 규정이니 “상소이유 설명서에 기록한 각조를 회장이 토론 없이 축조 가부하여 각조에 상소할 이유가 없고, 또 하회의 처리도 착오가 없는 줄로 인정되면 상회는 하회 판결이 적합한 줄로 인정할 것이요, 각 조 중 1조 이상이 시인할 만한 이유가 있는 줄로 인정되면 상회는 하회의 판결을 취소 하든지, 변경하든지 갱심하게 하든지 편의대로 작정할 것이요, 상회가 하회 판결을 변동할 때에는 그 결정과 이유를 회록에 기재하고, 필요로 인정되는 때에는 그 판결 해석의 대요를 회록에 기재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조정의 근거규정인가? 그저 이 조정에는 근거규정도 있는 것처럼 구색을 갖추기 위한 억지요 더 정확히는 속이는 말이다. 그런데 위 조문 중 1조 이상이 시인 할만한 이유가 있는 줄로 인정되면 상회는 하회의 판결을 취소하든지, 변경하든지 하회로 갱심(更審)하게 하든지 편의대로 작정할 것이요…”에서 편의대로라고 하였으니 총회재판국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석했는지 모르나, 그렇다면 정말 철부지 수준이라 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고 본다. 이 조문이 말하는 “편의대로”란 “…상회는 하회의 판결을 취소하든지, 변경하든지 하회로 갱심하게 하든지 세가지 예시 중 어느 하나를 마음대로 정하라는 뜻이니 말이다.그리고 첫 머리에서 본 판결하지 않기로 한 사건에서 ‘총회임원회의 중재로 이 재판 건도 취소하고 노회에서 면직한 것도 취소하기로 하여 판결하지 않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총회재판국은 총회가 맡긴 사건을 독립하여 판결할 전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가? 총회임원회는 총회가 폐회되어 파회된 후에는 경우 특별히 총회가 결의하여 맡긴 일이 있으면 그 수임사항은 체결할 수 있고, 내회를 준비하여 소집하는 일은 할 수 있으려니와 그 밖에는 할 일도 없고 하면 안되는 줄로 알지 못하는가?임원회에 다시 묻는다. 총회임원회가 중재하여 노회가 면직한 것도 취소하고, 총회가 결의하여 총회재판국에 위탁한 사건도 판결하지 않기로 중재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 이 제98회 총회의 재판사건이 29건이나 되는데(동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PP.99~91) 왜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중재하지 아니하고 유독히 이 사건만 중재해야 했는가? 또 총회재판국이 맡은 재판사건을 총회임원회가 좌지우지할 만한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간섭한 내용을 기록에 남기지 못하게도 했을 터인데, 버젓이 기록하여 총회에 보고하여 역사화되게 하였으니, 너무 순진스러워서인가? 아니면 세인들의 표현대로 낮에 나온 도깨비처럼 되었기 때문인가? “…재판사건에 대한 총회의 결정은 최종적이니 순복할 수 밖에 없고, 그 후회(後會)가 이를 취소하거나 정정할 수 없다…”(정문: 435문답)고 하였는데 이대로 역사화 되어도 무방하다고 여겼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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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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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최 건 차 목사
- 지난 연말, 세찬 바람결에 코끝이 알싸해지는 저녁. 기독언론계 지인들과 송년가곡의 향연이 펼쳐지는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우리가곡과 이탈리아 노래를 좋아하는 클래식 팬인 것을 알고 음악회에 늘 초청해주는 이가 있어서다. 오늘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선생의 구순을 축하하며, 한국예술가곡보존회가 2018년을 마무리하는 정기음악회로 열렸다. 초장에는 낯설은 남녀성악가가 등장하고 이어서 이전부터 낯익은 유명성악가들이 대거 출연하여, 최선생이 작곡한 수많은 곡들 중에서 특별히 선정한 것들을 저마다 그윽하게 열창하는 가곡의 한마당이었다.초청장을 보내주는 이는 이번 공연의 음악감독인 소프라노 임청화 교수이다. 내 고명딸이 재즈클래식을 전공하려고 유학한,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왕립음악원 최고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분이라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딸 결혼식을 현지에서 치르느라 헤이그에 십 여일간 체류한 적이 있었던 터라 친근감도 든다.최영섭 선생과 각별한 사이라는 임 교수는 네덜란드 유학시절 “아시아 평화의 날”을 맞아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자가 되어 헤이그 국회의사당에서 <그리운 금강산>를 부르다 이준 열사를 떠올리며 울컥했다고 한다. 왕립음악원 졸업식전에서도 우리가곡의 위상을 높이고 알리고 싶어 ’Longing for Mt. KUMKANG’이란 연주곡을 선정받아 당당하게 연주하여 국위를 선양했다고 해 존경스럽기도 하다.우리가곡 애창 상위수준에 속한 <그리운 금강산>은 세계유명성악가들도 즐겨 부르고 있는 추세다. 우리 국력의 역할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세계적 음악가인 임청화 교수와 같은 분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영향이지 않나 싶다. 나는 50년대에 중학시절을 보냈었기에 아쉽게도 최 선생이 작곡한 노래를 배우지 못했다. 그 시절 음악시간이면 우리가곡과 이탈리아, 미국, 영국, 독일과 스페인 민요를 즐겁게 배웠던 게 남아있어 지금껏 애창하고 있다. 특히 감미로운 벨칸토 기법의 이탈리아 남부민요가 내 적성에 맞아 즐겨 부른다. 근래에 와서는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스리테너의 파파로티가 생전에 카레라이스, 도밍고와 여러 나라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늘 불렀다는 것이다. 최근에 내한공연을 가졌던 도밍고는 우리말로 능숙하게 불러서 뜨거운 사랑의 갈채를 받았었다.최영섭 선생께서는 1961년 <그리운 금강산>을 KBS로부터 위촉을 받아 그 시대의 정서에 맞게 작곡했다고 한다. 요즘 같이 북한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는 좌편향정부시대라면 한상억 시인이 이런 글을 발표하기도, 가곡으로 유명하게 불러질 수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오늘 음악회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시작하는 첫 노랫말이 ‘누구의 주제련가로 되어 불리어지고 있었지만 작사자인 한상억 선생께서는 당시 ‘누구의 주재련가’로 썼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절대 소유권을 지닌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고 강조하고픈 그분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주제’가 ‘주재’로 고쳐지는 게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어서 맘에 들었다. 최근에 와서는 전체 가사의 1,2절 글 중에서도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맺힌 원한’은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지 몇몇 해’를 ‘못가본 지 몇몇 해’로 고쳤다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시대적인 아픔을 함께하기 위한 노랫말로 바꾸게 된 것이라고 한다.아이러니하게도 최영섭 선생은 나라가 분단되었기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함으로 유명해진 분이다. 선생은 이제라도 무명가로 돌아가고 싶으니 통일이 빨리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이 가까운 강화도 도화면 사기리에서 출생한 분이라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남다를 것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지만 북한이 공산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등반을 좋아해 중국 쪽의 백두산을 비롯하여 한라산과 지리산, 북한산 등 국내 유명산을 거의 다 올라봤다. 하지만 햇빛정책을 내세워 금강산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도 돈을 드려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우며 그들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아 금강산을 보류했었다. 노랫말이 고쳐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는데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주었으면 한다. 우선 암벽에 새겨 논 이념의 선전문구들을 다 지우고 우리관광객 피살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남한에서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북한 내부사정을 잘들 알고 있다. 핵과 남침을 위한 무장시설, 가혹한 인권유린과 비참해진 인민들의 실상을 감추기 위한 통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지가 이미 오래다. 통일은 차제하고서라도 유엔의 제재가 풀리고 이전 같은 분위기가 해소된다면 나도 배낭을 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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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최 건 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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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2
- 총회재판국의 오만인가, 예심판결로 호령?법정(法定) 시벌도 에누리하는 방자한 자태 (승전)권 제4장 제19조는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다.” 위의 조문을 보면 노회직할(목사관계 사건)도 있고, 당회직할(일반신도 관계 사건)도 있으나, 대회직할이 없고, 총회직할이 없다. 즉 대회와 총회는 목사와 처리장로나 교인이 원치리권(직접치리권)이 없기 때문이다. (정문: 405문답, 430문답).그런데 위에서 본 대로 2013년 제98회 총회로부터 2017년 제102회 총회까지 5개년에 총회에서기가 접수하여 헌의부에 넘긴 상소 아닌 고소건이 제98회에 5건, 제99회에 2건, 제100회에 21건, 제101회에 6건, 제102회에 3건이니 도합 37건이요 대부분 헌의부에서 이유를 붙여 기각하였지만 버젓이 재판국에서 판결한 안건도 제98회에서 2건, 제100회에서 2건, 제101회에서 1건, 제102회에서 2건이니 도합 7건이나 된다.위에서 본 권 제4장 제19조가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한다…”는 규정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헌법 규정이 맞는가? 맞다면 해마다 한 두 건도 아니고 평균 7건이 넘는 고소장을 총회서기가 어떻게 접수하였으며, 총회재판국의 판결보고를 총회가 어떻게 채택하였는가? 총회헌법이 총회재판국 앞에서는 왜 거미줄처럼 변모하는가? 재판관할은 소속치리회의 고유한 특권인데 총회는 고유한 특권도 파괴할 수 있는가?뿐만이 아니다. 권 제4장 제19조는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게 된 규정이요, 하회가 불복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처결권이 있다는 내용의 규정이고, 권 제13장 제138조에 의하면 “총회재판국 판결은 총회가 채택할 때까지 당사자 쌍방을 구속할 뿐이다”고 하였으니, 아직은 당사자 쌍방을 구속 즉 현상 그대로 동결할 뿐, 판결 효력이 발효되기 이전이 분명한데, 총회의 결의로 총회가 하회에 명령할 수 있다는 규정을 총회 아닌 총회상비부 중 하나인(총회규칙 제3장 제9조 1의(14), 동 3의 14) 총회재판국이 판결보고가 총회에서 채택되기도 전에, 더 정확히는 총회 정례회 소일이 되기도 전에 탕탕 명령을 발하고 있으니, 총회재판국이 총회인가? 총회가 총회재판국 밑에 있는가?2013년 제98회 총회에서는 7월 31일까지 이명 발급하고, 8월 1일부로 제명출교령 1건,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는 6월 30일까지 지급령 1건, 2015년 제100회 총회에서는 3월 3일까지 사임서 제출령, 3월 6일까지 퇴직금 지급령, 9월 11일까지 이전령 등등이고, 2016년 제101회 총회에서는 6월 5일까지 주보게재령, 6월 10일까지 이명령 등이고, 2017년 제102회 총회에서는 1월 6일 사면령, 지급령, 3월 20일까지 증명발급령 등등이다. 총회재판국 판결은 보고가 채택되어야 총회의 판결로 확정되고, 확정되어야 판결효력을 발하는데, 총회의 보고채택은 커녕 총회 회집일도 되기 이전에 하회에 명령을 발하였으니 이것이 어떻게 효력있는 명령인가? 권원 없는 자들의 권리행사이니 당연무효라고 하는 정도의 평가로는 너무 점잖고 모자라는 느낌이지만 이만해 둔다.그리고 교회헌법이 규정한 벌은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이다(권 제5장 제35조, 동 제6장 제41조). 그리고 권계는 훈계하는 수준의 벌이고 견책은 책망하는 수준의 벌이어서 권 제9장 제100조에 의하면 “권계와 견책은 잠시 정지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시벌과 해벌을 규정한 예배모범엔 권계와 견책의 시벌규정도 없고 해볼규정도 없다. 그 다음의 벌이 정직과 면직인데 정직은 직분 자체를 멈추는 벌이요 면직은 직분을 거두는 벌이니 성직 없는 평신도가 되게 하는 벌이다.그런데 2017년 제102회 총회가 채택한 총회재판국 판결에 전대미문의 정직판결이 4건이나 되는데, 총회가 고소를 받아 3피고에게 「정직 1년에 처한다(단, 설교권은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총회가 직접 고소를 받은 것 자체가 불법인데,(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은 소속노회에만 있으니 소속노회 외에는 직접 고소장을 접수하지 못한다) 정직 1년이면 그냥 1년이지 “설교권은 허락한다”가 웬 말인가? 총회 100년 역사에 정직 벌을 에누리 하는 제한적 정직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권징이다. 이런 식으로 시벌을 에누리하게 된다면, 사안에 따라 면직에도 수찬정지에도 제명출교에도 “단, 무엇무엇을 허락한다”식이 될 것 같아 오싹한 생각이 든다.또 “…피상소인 ○○○ 씨를 정직 3개월에 처한다(단, 강도권은 허락한다)고 했고, ”피상소인 ○○○ XXX △△△ 씨는 각각 정직 1년에 처한다(단, 설교권은 허락한다)고 했고, 고소를 총회가 직접 받아 “피고소인 ○○○ XXX △△△ 씨를 각 정직 1년에 처한다(단, 설교권은 허락한다), 피고인 ○○○ XXX △△△ ◈◈◈ ◇◇◇ ●●● 씨를 각 정직 6개월에 처한다(단, 설교권은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이 재판국에서 벌을 에누리하는 것은 약과인지 모른다. 위 5년간의 총회재판국 판결을 보면 벌의 에누리 정도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벌을 만들어 판결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3년 제98회 총회에서는 이명가라는 벌(?)이 4건, 제99회에도 1건이 있고, 또 공직정지 벌(?) 제98회에 3건, 제99회에 2건, 제100회 4건이요, 노회의 총회총대 천서 제한 벌(?)이 제99회에 2건, 제100회에 3건이요, 제102회에는 노회장직 정지 벌(?), 서기직 정지 벌(?) 등 모두 헌법이 규정한 벌이 아니다.“네가 네 죄를 알렸다”식으로 어두웠던 시절의 죄형전단주의(罪刑專斷主義)의 길이 총회재판국의 길이 아니라면 자유자재로 상황 따라, 형편 따라 어떻게 짓고 쓰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느냐고 하는 말이다. 총회총대 파송은 노회들의 의무요 동시에 권리라고도 할 것인데, 그래서 “합법적인 천서에 의해 파송한 총대를 총회가 거절할 수 있느냐? 총대가 피소되었으면 재판할 수는 있으나 노회가 파송한 합법적인 총대를 거절할 수 없다.”(정문 646 문답)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고소는 원고와 피고의 다툼이요, 상소는 상소인과 피상소인의 다툼인데 그래서 원고나 피고, 상소인이나 피상소인을 벌하는 일은 옳거니와 왜 엉뚱하게 판결 하회가 불이익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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