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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영 실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부모가 되면 누구나 내 자녀가 건강히, 씩씩하게,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자신감은 언제부터 키워주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늘의 별자리 수인 1000억개의 교세포를 머리에 담아 태어난 아이는, 태내 0세에서 7세까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낸다. 이때는 아이의 성품이 발달되는 시간임과 동시에, 자신감과 창조뇌가 자라나는 엄청나게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어린아이들의 성장발달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이를 귀찮아하며 그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중고등 학교 때는 공부를 잘하라고 학원 등을 보내느라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영유아 시절에 만들어진 성품이, 100세까지(세살 버릇이 백살까지 간다!) 연결된다는 것을, 뇌학자들이 알려주고 있기에, 이를 온 국민이 심각하게 깨달아야 한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 초등학교 때 친구들의 성격이, 50세가 되었다고 달라졌을까? 생각해보자.50년이란 긴 세월을 지냈는데도, 그 성격이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 아닌가? 나이가 들었다고 사람의 성품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소극적인 아이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소극적이며, 어려서 활달한 친구는 여전히 명랑한 성격으로 늙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7세 이전에 만들어진 성품, 성격, 인격이 평생을 간다는 확실한 증거다.내 아이를 자신감 넘치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비밀은, 아이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질문을 할 때, 아무리 바쁘더라도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끝까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육하원칙에 의해 친절히, 천천히 대답해 주어야 한다. ‘엄마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랬지!’ ‘시끄러워!’ ‘네가 형이니깐 참아!’라는 명령어 대신에,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엄마는 너도 똑같이 사랑해!’라고 친절한 언어를 들려줄 때에, 아이의 뇌는 행복하게 발달하며, 자신감 넘치는 좋은 성품의 소유자로 자랄 수 있다.피곤한 아이에게 ‘빨리 못 일어나!’라고 소리를 치면 아이는 인생 살 맛이 없어진다. 그 대신,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한 후, 찬송가를 부르며 아이의 발끝부터 마사지를 하며 깨워준다면, 아이는 웃으면서 일어나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아이의 뼈가 급격히 자라나는 7세 이전 이 시기엔, 아이들은 계속 움직여야 하므로, 양육자가 감당하기 어렵게 부산스럽고 위험하다. 우리가 원치 않는, 영유아들의 다치는 사고와 부상은, 대체로 보호자가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결과물이다. 키와 뼈가 자라는 이때는 자동적으로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며, 무엇에나 호기심이 잔뜩 있는 개구쟁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는 뇌가 자라면서 근육도 함께 자라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육자는 아이들이 많이 움직이며 자라는 시간임을 잘 이해해주며,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친절한 언어를 사용하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아 위험한 요소를 미리 치워야 한다. 내 아이가 자신감이 많은 아이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다른 친구나 형제와 비교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아이의 자신감을 잃게 하는 지름길이다. 뱃속 태아 때부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남과 똑같이 뇌발달을 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아이에게 자신감을 키워줄 수 있다. 영아부와 유년부를 지내면서, 아이는 부모님이 옆에 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앞에 나가 찬송을 부르며 재롱스런 무용을 하며 자신감을 키워간다. 세상에서는 키워 줄 수 없는, 그러나 교회 앞에서 세워져가는 자신감과 리더십은 아이의 성품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젊은 부부는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영유아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는데 노력해야 한다.‘엄마/아빠는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너 그대로 엄마/아빠는 만족해요!’ ‘예수님은 너를 사랑해요!’라는 말은 먼저 들려주자. 그러면 자녀는 자신감으로 빛나는 사람으로 자라나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 자신감이 넘치는 성품으로 리더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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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다시 부르는 드보라의 노래
    2015년 마지막 날과 2016년 새해 첫날,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햇빛 받은 나뭇잎들은 향유로 기름부음 받은 듯 눈부시게 빛나며, 공기는 온통 덩달아 향기롭습니다. 남쪽 바닷가 몽돌들도 파도와 함께 제자리 지키며 하늘 향해 노래하고 있습니다.지금도 골고다로부터 들려오는 <침묵 속의 아가(雅歌)>. 2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은 하늘의 시간엔 늘 현재만 존재하기에, 오늘도 그 침묵 속의 사랑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렇게 오늘도 여전히 그때, 그곳에서처럼 ‘아버지’는 온 우주를 흔드는 침묵 속에서 사랑의 오열을 터트리십니다. 인간의 고막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듣지 못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그 사랑의 오열로 인해 바위가 터지고 땅이 갈라지고, 문둥병자가 낫고, 성전의 휘장이 위 아래로 찢어집니다.인간의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지은 만리장성엔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IS로 둔갑되어 곳곳에서 테러가 자행되며, 현대판 노아 방주는 세 살짜리 사내아이조차 구하지 못하고 해변 모래가로 토해냅니다. 갠지스 강가의 개들은 이미 우두머리 되고 싶어 하는 이 세상 권력자들과 손잡고 떠내려오는 시체 주위를 어슬렁거립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차 산 자의 세계가 아닌 죽은 자의 세계로 변해 갑니다. 세상은 어느새 오염된 심성들의 어른들로 가득 찼습니다.아, 아버지. 이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들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우슬초로 정결케 씻어 주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어린아이처럼 난생 처음으로 아빠가 사주신 크레파스 손에 쥐고, 아빠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하얀 종이 위에 생기 넘치는 생명의 세계를 그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바람과 생수의 강물로 기쁨과 희망의 세계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은총 속에 동터온 새해엔 새 혼불, 새 영혼으로 새 일,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먼저 불꽃이신 당신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가 저의 딱딱한 굳은 뼈마디, 흐물흐물해진 사고, 늘어진 몸뚱이 등 그 형체조차 자취조차 없애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줄탁. 암탉처럼 날개 안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골고루 품어 주시다 깨뜨리시면 저도 그 안에서 구각을 깨고 새생명으로 나오겠습니다. 죽음의 부활처럼, 밤을 낮으로, 고통을 환희로 빚겠습니다.단 한번뿐인 삶, 끄트머리 생의 여정, 꿈 같은 삶. 오직 사랑이신 당신께만 매달려 살겠습니다. 당신의 춤, 당신의 비파가 되어 노래하며 살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들의 인생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하늘은 생명의 흐름을 양떼구름의 입을 통해 역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낮아짐의 도(道). 비움의 도(道). 들의 꽃, 공중의 새. 그들을 통해 가난한 당신을 다시 노래하게 합니다. 감동에 벅차, 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은비(隱秘)의 부요에 무릎 꿇으면, 어느새 마를 대로 마른, 겨울나무의 텅 빈 목관 악기 같은 몸뚱이, 외경에 전율하며 사랑에 취해노래를 부릅니다. 언젠가 들려주신 말씀이 스멀대며 고개를 내밉니다. “난 널 보았단다. 네가 배나무 하얀 꽃잎 떨어지는 봄날에 한 마리 꿀벌 되어 붕붕 날아 다니는 것을, 말씀 꿀 송이 하나 가득 담고 내 사랑에 취한 네 모습은 마치 여자 사사 드보라 같았어. 남편을 둔 주부로서 두나미스, 넌 내가 오는 길 닦는다며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길 기도했지. 얘야, 여사사 드보라 이름의 뜻도 꿀벌이야. 그러니까 너흰 둘 다 꿀벌인 셈이지. 생동감 넘치는 면에서 너와 똑 닮았단다. 넌 어릴 때부터 나비되어 날아다녔잖아. 이제 알겠니? 그때도 나와 함께였음을. 이젠 꿀벌이네, 후우! 재미있구나. 넌 시간이 지날수록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새 술에 취해 빨개진 얼굴로 아침 해가 힘 있게 돋는 것같이 성령의 은빛 날개 퍼덕이며 사방을 날아다녔지. 난 밤이면 그런 너에게 큰 날개를 주어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가게 했단다. 이제 그때를 다시 그려 봐”지금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넓이를 알 수 없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우주공간으로부터 아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영혼 속으로부터 들려옵니다. 그분의 끝나지 않는 침묵 속의 노래. 그 노래 속에 사랑하는 자의 명(命)이 들어 있음에 겸허히 무릎 꿇습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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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0
  • 내가 할게
    베란다에 있는 화초에 물을 주다가 가뭄에 목말라 하는 아파트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떡하니 난 너희들에게 물을 줄 수가 없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단번에 주실 수가 있는데... 아버지 비 좀 내려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려도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소식이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단비가 내려 우중충했던 단풍이 선명하게 본색을 드러내 참 아름다운 가을을 선사했다.살다보면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서 하늘만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것이 건강, 물질, 미래에 대한 불안감등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때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며 주님 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대가 도움이 되지 않으면 외면하지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할게 걱정마'라며 가장 좋고 선하시고 아름답고 놀랍게 역사를 하신다. 나의 자라온 환경 탓인지 매사에 내가 해야 하고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 때로 힘들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자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명예와 재물로 한때 사람노릇을 했었다. 언제나 주는 사람,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교만이었는지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주님의 싸인 없이는 하나도 맘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처음엔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가 무척이나 괴로웠다. 아파도 내색도 안하고 건강한 척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십자가 컴플렉스로 매사에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연약 할 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라는 찬양의 가사가 나를 위로해준다. 11월 11일은 '승강기의 날'이다. 잡지에서 수필공모 기사를 보고 딸이 응모를 했는데 장려상을 받았다. 그동안 딸을 통해 받은 큰상들의 일부를 하나 둘씩 꺼내어 보았다. 남들은 단 한 번 당첨 되기도 어려운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우연히 당첨된 것들이 참 많다. 왜 이 죄인에게 이런 기적이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주님이 얼마나 외로우시면 우리를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고 싶으신 것이리라. 내 자랑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칼럼에 자주 등장하는 '문리버파크 대표 박강월' 친구는 매사에 '오직 주님' 뿐이다. 죽음의 골짜기를 넘고 넘고 또 넘어 오뚝이처럼 일어나 매일 아침과 저녁에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파주 헤이리에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지중해식 스타일의 하우스와 선교센타를 설립하여 마음껏 주님을 증거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부용아 여기서 목회자 보이스클리닉을 해”라는 제안을 받아 10월 12일 '경기북부지역 목회자'를 대상으로 장소제공은 물론 간식과 점심식사까지 주님을 대하듯이 정성을 다해 모두 감동을 받아 행복한 날이었다. 감히 계산을 할 수가 없어서 내가 아끼는 예쁜 망토를 드라이 해서 주었더니 아기처럼 좋아했다. 목회자강의를 하도록 처음 문을 열어 주어 10년간 무료로 해보았지만 이제야 내린 결론은 '하나님 전 더 이상 할 수 없어요'였다. 너무나 허무하고 안타까워서 엉엉 울었다. 그 많은 세월들 '내가 헛수고를 했나? 이것밖에 안되나? 이렇게 무능력하다니' 분명히 11년 전 새벽에 말씀으로 콜링하신 그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마'라고 말리던 사람들의 말이 정답인가? ‘그동안 강의를 잘하도록 곁에서 도와준 딸과 친구와 제자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보셨기에 다 갚아주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장 많이 수고한 딸을 위해 귀한 믿음의 배우자를 허락해주시며 '내가 한 거야'라고 하셔서 그 순간 울음을 뚝 그쳤다. 인생의 드라마의 감독과 연출은 주님이시고 나는 주인공이다. 명작일수록 주인공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어진 배역을 잘 감당하고 마지막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어 박수를 받지 않는가. '나의 드라마는 어디까지 왔을까? 난이도가 높은 연기를 얼마나 더 해야 하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이 때도 역시 주님은 '내가 할게'라며 위로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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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0
  • 귀에 새겨진 흔적을 통한 상담
    귀에 나타나는 삶의 흔적을 보며 그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면 공감대가 형성되고 마음 깊이 숨겨 두었던 어려운 내용을 이끌어 내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귀에는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또렷이 기록되어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통해 수많은 직군을 교차 배치하여 민중을 통일화하는 과정에서 의료의 혜택이 전혀 미치지 않은 곳에 책무를 다하는 군인들에게 귀에 혈을 자극하여 사람에게 나타나는 급한 통증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소책자에 인쇄하여 나누어 줌으로 응급처치를 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다.사람의 귀에는 오장육부와 대응하는 혈 자리가 나라마다 다르게 발견되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의 연구결과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폴 노지에 박사는 이를 통하여 세계보건기구에 이 효능을 제출하여 인정을 받았다. 귀에 삶의 역정에 따라 기록된 표지가 있고 그 귀 자체가 삶의 흔적을 기록하면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점점 더 귀가 말해오는 내용이 사람을 상대하는데 의미가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건강할 때는 두툼하였던 귀가 병을 앓고 나서부터는 점점 얇아지는 현상이라든지, 평소 주름이 없던 귓바퀴나 귓불에 어느 날 패이고 접힌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매끈하고 윤기가 흐르던 귀모양이 부스럼이 생기고 윤기가 날라 가고 각질이 덧입혀지는 것을 볼 때 몸이 귀를 통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몸 전체에 기운이 막히면 귀에 열이 나고 붉어진다. 붉게 변하면서 뜨거워지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에서 맹렬히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 전체가 열이 있다. 몸의 건강이 회복되고 마음의 아픈 곳이 없어지면 이 귀는 다시 부분적인 흔적이 없어지며 두툼해지고 윤기가 반들거리게 된다.굽었던 부분이 아름답게 호(弧)를 그려내면서 누가 봐도 탐스러운 몸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병원에 가면 몇 가지의 병증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그런 몸속에 있는 어느 부분에 발생되는 병증이 귀에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는 사실은 귀에 대하여 반응점을 배우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혜안이다. 장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다면 그 부분의 반응점 자리가 부풀어 오르든지 색깔이 변하든지 오래되면 검은 점이 인쇄되듯 선명하게 찍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귀를 보면 소화기능 쪽과 스트레스 및 신경자리가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그래서 귀와 같이 하모니를 이루는 얼굴의 코와 눈, 입, 귀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조화로운 빛깔과 모양의 변화를 이루어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바로 인지하게 되는가 보다.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는 상담자로서의 삶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은 너무 아픈 마음과 몸을 부대끼고 살아가는 이웃이 많다.말의 권세를 잘못 사용하여 그 말을 인지하고 그 말의 역기능적인 요소를 잘못 흡수하여 마음과 몸 깊이 병증을 간직하여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고 나아가 이웃을 같이 아프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이 병증을 귀를 통하여 미리 예견하여 어루만지고 다독거려서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참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여야 함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사람마다 한 가지 이상의 상처의 흔적을 가슴 깊숙이 품고 산다. 귀란 앞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앞의 소리만 듣게 설계되고 만들어져 있는데 너무 뒷이야기에만 신경을 쓰다가 마음이 다쳐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앞의 소리만 듣도록 뒤쪽에 병풍을 쳐 놓았다고 해서 귓바퀴의 병풍처럼 둘러친 부분을 대이병(對耳屛)이라고 한다.병풍은 뒤쪽을 보지 못하게 가려두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하는 소리만 들으라고 하나님이 설계하신 몸의 한 부분인 것을 인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삶으로 인하여 자신도 매우 답답하여, 상담을 받고자 오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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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3
  • 누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5,6년 전만 해도 퀴즈의 문제에나 등장해서 출연자를 당황스럽게 만들던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의 유래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중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라는 단어도 일상적인 언어로 다가서고 있다. 이렇듯 사회 지도층의 기부와 나눔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때이며, 이 일에 동참하는 이들도 계속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일반 서민과는 동떨어진 일처럼 여겨지는 바도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기부는 사회의 지도층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남을 섬기는 일을 꾸준히 계속 해오고 있다. 섬김과 봉사는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는 중요치 않다. 나누고 섬기라는 명령만 있을 뿐이다. 돈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과부, 사르밧의 과부에게는 가루 한 웅큼과 조금의 기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 소망도 희망도 없었던 사르밧의 과부는 이 마지막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기를 기다리고자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과부의 마지막 양식마저 선지자를 섬기는 데 내어놓으라고 하셨다. 이 뿐 아니다.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린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드린 것이라며 칭찬하셨다.그런데 우리라면 어떨까? 주변에 아주 가난한 성도가 가진 모든 것을 헌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잘 했다는 칭찬보다는 혀를 끌끌 찰 것 같다. 자기 앞가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충고를 곁들일 것이다. 뒤에서 수군거릴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두고 칭찬을 못할망정 손가락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하는 자신들에 비해 그렇게 다 드리는 이들의 모습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만약 가난한 이들이 모든 것을 다 드려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면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본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이들은 대체로 힘에 겹도록 섬기는 자리에 거하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나사렛의 회당에 서셨을 때 이사야서의 말씀 중에 이 부분을 찾아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주의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 것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한국 교회 역사의 초창기부터 성도들은 연약한 이들을 돌아보는 일에 앞장섰다. 그로 인해 가정 안에서의 갈등도 없지 않았다. 성령 충만한 이들은 가족은 뒷전이고,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퍼주기 바빴다. 이로 인해 가족들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도 믿음의 분량이 다른 이들은 이런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이들 가운데 자기 삶이 넉넉하고 편안한 사람보다 자기 자신도 힘든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자리로 나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사회의 지도층이고, 왕족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 세상은 권력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큰 자이며, 지도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신다. 소유의 넉넉함이나 권력의 유무를 떠나서 자신이 처한 곳에서 이웃을 섬겨갈 때 지도력이 발휘되는 지도자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담대히 그 자리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또한 과격하게 우리를 재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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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0
  • 승강기한테 배웠어요
    엄마가 사라졌다…. 짧은 시간의 일이지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작년 추석, 외삼촌 댁에 가기 위해 나는 지하주차장에 먼저 내려와 가족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엄마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20분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 집으로 와보니 엄마는 안 계셨다. 모두 걱정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관리실인데요.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고장나 어머니가 갇히셨는데 무사하니 걱정 마세요.” 우리는 빨리 6층으로 가서 갇힌 엘리베이터 문을 탕탕 두드리며 “엄마! 엄마!”하고 다급하게 불렀다. 그러자 엄마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관리사무소 직원이 도착해 사다리를 설치하고 비상키로 문을 열어보니, 엘리베이터가 6층과 7층 사이에 걸쳐 있었다. 문이 열리자 엄마는 지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직원이 지시하는 대로 침착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안전하게 구출되었다. “어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상벨을 눌러도 왜 안 받으시는 거예요? 추석날 이게 뭐예요. 40분 동안 갇혀 있었잖아요!”라며 엄마는 화를 내셨다. 평소 웬만하면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이신데, 즐거운 추석날 혼자 밀폐된 공간 안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그러자 관리실 아저씨는 “죄송합니다. 추석날이라서 비상 근무자들이 늦게 나왔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관리실에서 대신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엄마는 엘리베이터 AS 담당직원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집으로 들어와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그날의 상황은 이러했다. 우리 집은 12층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8층쯤에서 흔들리더니 6층에서 갑자기 멈췄다는 것이다. 비상벨을 계속 눌러도 응답이 없어 추석 음식을 만드느라 쌓인 피로로 서 있기가 힘들어 15분쯤 바닥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일어나 다시 비상벨을 누르자 다행히 관리실 직원이 받았다.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엄마는 내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지금 딸에게 빨리 전화를 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다음날, 엘리베이터 AS 직원이 우리 집 앞으로 일찍 찾아왔다. 엄마는 따끈한 한방차에 잣을 띄워 쟁반에 받쳐 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갔다. 직원이 정말 죄송하다고 하자, 엄마는 “우선 차 한잔 드시고 야단 맞으세요. 저 화가 많이 났거든요.”라며 차를 대접했다. 그러자 “아이구, 야단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이런 차까지 주시다니요. 감사합니다.”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가족이 아파트에 입주한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2대 모두 ‘점검중’ 표시가 들어와 있었다. 관리실에 알아보니 20분 후에나 정상가동을 한다고 해서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기운이 없었다. 단 한 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렇게 힘들고 불편하다니. 그동안 참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 후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덕분에 나는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점점 높아져만 가는 빌딩 속에서 우리는 승강기를 당연한 듯이 타고 내렸다. 안전하고 편리한 혜택을 누리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승강기를 이용할 때마다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을 하기로 했다. 승강기 이용 시에는 감사와 양보하는 마음으로 옆 사람에게 “먼저 타세요.” “먼저 내리세요.”라고 한다. 간혹 짐이 있거나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에게 “몇 층 가세요?”라며 버튼을 눌러주는 마음의 여유를 발휘하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한두 마디를 통해 어색한 분위기가 금방 부드러워진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입가에는 미소가 잔잔히 번지고 있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다보니 내 마음도 밝아지고 있었다. 승강기가 사랑과 행복을 실어나르는 더욱 멋진 공간이 되기까지 계속 실천하리라 다짐했다. 승강기, 정말 고마워!이 글은 ‘2015 승강기안전공모전’에서 장려상(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장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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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9
  • 부모가 알아야 할 아이들의 성 발달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기저기를 보고 듣고 만지고 탐험하며 아이들은 뇌 발달을 일으킴과 동시에 IQ와 EQ등을 키워나간다. 이를 위해 어린 시절에는 모든 사물에 대한 강한 지적, 탐구적 호기심이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이 시기는 창조의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창조적인 능력을 키워주는 좋은 때이며, 창조뇌가 잘 발달할 그들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 넓고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것이다.이를 위해 아이들은 눈을 뜨면 무엇인가를 손으로 만지고 싶어 하고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어른들과 양육자에게 계속 질문공세를 한다. 미국 동부에 있는 박물관들은 그 규모가 거대하여 자세히 보려면 한 군데에 보통 1주일 이상을 구경해야 한다. 그곳에 세워진 Children's Museum을 방문했을 때, 아래와 같은 문구를 보고는 놀란 경험이 있다. “정상적인 아이가 하루 동안 어른에게 질문하는 양은 275 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한참 뇌발달을 일으키는 아이는 끊임없이 궁금해 하고 질문하고 그 답을 들으며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모와 양육자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아이와 눈을 맞추고 육하원칙에 의해 조리있고 친절하게 대답해야 한다.아기는 태어나서 엄마 젖을 물고 빨며 입과 혀를 발달시키는 구강기(0-18개월)를 보내게 되는데, 이때 아기의 입과 입술은 엄마의 몸을 통해 충분히 자극받아야 한다. 이렇게 만족한 구강기를 지나며 아이는 원만하고 좋은 성품을 소유한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라면 아이는 성장하면서 손가락 빨기, 과식, 음주, 흡연, 수다, 부정의 언어와 빈정거림 등을 부작용으로 지니고 평생 살기 쉽다.구강기가 지나면 항문기(18개월-만 3세)를 거치며 대소변을 통해 신경계의 발달을 이루는데, 이때 배변 훈련을 부드럽게 잘 받으면, 자라서 관용과 배려심이 큰 사람이 되지만, 반대로 엄격하고 강압적으로 야단을 맞으며 배변 훈련을 받게 되면, 거칠고 난폭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사람으로 자라나기 쉽다. 그 후 ‘유아 사춘기’라고 불리는 남근기(만 3세-6세)가 되면, 남아든 여아든, 아이는 호기심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지고 놀며 쾌락을 느끼는 시기를 갖게 된다. 특히 동생을 보았거나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이런 증상이 심해지는데, 이때 부모님은 성기를 가지고 노는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 ‘아이야 재미있어? 우리 이것 가지고 놀까? 밖에 나갈까? 너를 많이 사랑해!’ 라며 장남감이나 다른 것으로 아이가 시선을 돌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가 이런 지식이 없을 때 ‘못써! 벌레가 생기고 병이 나! 누가 만지라고 했어!’하며, 무조건 야단을 치며 아이의 행위를 나쁜 것으로 돌리면, 아이는 성에 대해 비뚤어진 지식을 갖게 된다. 남편의 바람기에 평생 속을 썩이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한 할머니는, 한 평생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한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애정을 쏟는 손자가 있었기에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남근기에 들어선 그 어린 손자가 성기를 만지며 노는 것을 보자 노발대발한다. 할머니 생각에는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남편처럼 남봉꾼이 될까 두려워 소리를 치며, 가위를 가지고 아이의 성기를 자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충격으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는, 성기에 대한 두려움과 성생활이 더럽고 추잡하고 나쁘다는 인식을 키우며 성장해서 결국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어버린 슬픈 실화가 있다. 자신의 후손을 만들지 못했으니, 아!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가슴을 칠까...그러므로 7세가 되기 전까지 우리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충분한 포옹과 배려 받으며 자라야 한다. 우리가 자녀 키우는 것을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부모가 꼭 알아야 할 지식을 사전에 갖지 못한 불찰 때문이며, 아이의 뇌 발달과 성장 단계를 잘 이해한다면 어느 가정이나 행복하며 누구나 쉽게 훌륭한 자녀를 키워낼 수 있고,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갈 더 좋은 세상을 기대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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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6
  • 가을날, 거울을 사라 - 이미옥
    "거울 사세요, 거울 사세요” 한사코 거울을 사라는 여인을 끝내 외면했다.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왠지 개운치 않았다. 거울은 남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장자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어떤 사명과 함께 늦가을에 접어든 자기 자신을 마주 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 24년 1개월, 한창 젊은 인생의 봄철을 맞아 쓴 윤동주의 참회록 시구는 내게는 부끄러움을 넘어 차라리 형벌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을 절망적이고 참담한 슬픈 날이 아닌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쓴다는 그 역설에, 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닦는 것이 부족해 발바닥으로까지 닦는다는 그 신산한 치열함에, 마침내는 거울 속에 슬픈 사람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이 나타난다는 그의 고백이 세례 요한의 광야의 외로운 외치는 소리로 들려 왔다. 비록 자신의 살았던 시대가, 그 일제 시대의 어둠이 그를 덮었을지라도 그는 끝내 그 어둠을 초월할 수 있는 한 자루의 촛대였다. 여리지만 어둠에서 오히려 밝음을 보여 주는 빛이었다. 비록 초 한 대지만 그 어떤 빛보다 강한 한순간 방심하고 있는 마음을, 나라를 잃어버리다 못해 팔아먹는 양심이 무디어 가는 거의 끝나는 곳으로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반격이었다. 어둠이 그 젊음의 제물로 인해 마침내 암흑이 창구멍 통해 도망간 <초 한 대>의 빛이었다.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이 가을날, 늦가을 맞은 내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며 어둔 밤에 별을 헤는, 윤동주라는 맑은 빛을 그리워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한 시대의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풍기는 그가, 이렇게 부활의 생명으로 곁에 나타나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늘 깨어 있어 자신을 성찰했다. 그의 또 하나의 거울, 바로 우물을 통해 말한다. 높디높은 하늘이 살포시 깊고 깊은 우물물 바닥에 침잠해 있다. 하늘의 밝음이 우물의 어둠에 의해 다시 되비치는 이 신비로운 현상 역시 계절은 봄날이 아닌 가을이며 때는 낮이 아닌 어둔 밤이다. 그의 우물 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그리고 자신, 모두가 우물이란 공간에 유폐되어 있다. 그게 싫어 그는 떠난다. 그러나 연민으로 곧 다시 와 우물을 들여다본다. 늘 그의 시에는 달, 구름, 별처럼 하늘이 있고, 그리고 우물, 어머니, 어릴 적 친구들 같은 땅이 있다. 하늘과 땅. 은총과 중력이다. 가을이 오면 자신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다던, 가을이 오면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살아가겠다던 윤동주, 그는 그가 바라던 가을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봄날에 홀연히 쓸쓸히 감옥에서 떠났지만 그가 남긴 열매는 그 어떤 가을날의 추수보다 많다. 반면,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 하얗게 서리 내리는 늦가을을 맞고 있는 나 자신은 텅 빈 손이다. 그래서 꿈에서조차 살아 있음이 부끄러워, 한사코 거울 사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또 한 번 그의 시구를 빌린다. 그게 윤동주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나의 고백이라면 조금은 가벼워질까?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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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0
  • 같은 옷 다른 느낌
    영화제나 시상식 등 레드카펫이 깔리는 큰 행사가 끝나면 그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유명 인사들의 사진에 대한 기사가 여기저기 실리게 된다. 여러 사진들이 게시되지만 그 중에서 대중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유명 인사들의 옷차림이다. 이런 대중의 심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반드시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가 가려진다. 대중들은 즐겁겠지만 워스트 드레서에 이름이 오른 이는 괴로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유명인들에게 굴욕을 선사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같은 옷 다른 느낌이다. 같은 옷을 입었는데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냥 느낌이 다르면 괜찮은데 누군가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다른 이는 영 아닌 경우는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분명 겉모습은 같은데 그 속사람은 완전히 반대일 수 있다. 다른 지방에서 우리 교회로 온 학생Q가 있었다. 그는 중직자의 자녀였는데 대학교에 오면서 타지방으로 오게 된 것이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홀로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그를 우리 교회로 이끈 이는 우리 교회의 자매 A였는데 같은 학교 같은 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직자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Q는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다. 토요일에 늦게까지 실컷 놀고 주일에는 늦잠을 자느라 교회에 오지 못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오다시피 하는 그는 교회에 오면 예배만 드리고 사라지기 바빴다. A는 Q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늘 전화를 하고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Q는 강압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벗어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예배에 참석한 Q가 A에게 핀잔을 주었다. 교회에 오면서 양말을 신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 신앙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 지 잘 모르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이 비단 Q만의 문제일까? 어쩌면 우리 안에 이런 오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앙의 연륜이 짧아서 여러 가지 실수를 하는 성도가 나쁠까? 모든 거룩함과 경건함을 다 갖추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멸시하는 것이 더 나쁠까? 미국의 한 교회의 예배 시간 중간에 갑자기 히피 한 사람이 예배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중간 통로로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땅바닥에 앉는 것이었다. 그를 본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고,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때 교회의 중직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히피 옆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그를 끌어내려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 중직자가 히피 옆에 앉아 같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예배당 통로 한 가운데 앉아 예배드리는 두 사람!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두 사람의 수준은 극과 극인 것이다.한국 교회의 역사도 백 여 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어느 정도의 전통과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전통과 문화의 옷을 잘 입을 때는 베스트 드레서가 되지만, 같은 모습이라도 잘못 입게 되면 워스트 드레서가 되기 십상이다. 신앙에서 베스트와 워스트를 가르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다. 속사람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이다. 정답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답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는 가장 잘 단장하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양말이나 옷에 대해 먼저 말해버리면 체면과 위선의 옷을 먼저 입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보지 않을 때나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면 방탕의 옷을 입을지도 모른다. 우리 자녀들과 새신자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이 우리 눈에 거슬리더라도 참아주고 기다려주자. 비록 그 시간이 길고 그 과정이 더딜지라도 인내해 보자.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가는지, 그 분을 제대로 만났는지에 먼저 있어야 한다. 이런 성도들로 채워지는 예배당에는 베스트 드레서들로만 가득할 것이다. 이왕이면 겉사람도 속사람이도 베스트 드레서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체이신 하나님! 하나님도 우리도 아름답길 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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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2
  • 영화 ‘암살’과 자녀교육
    1919년 3.1운동 때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27살이었으며, 6.25전쟁 때의 평균수명은 35살이었는데, 감사하게도 2015년엔 81세로 늘었고, 앞으로는 100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식구나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동안 행복하고 건강하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모두의 바램입니다.이미 우리나라는 선박 기술이 세계 최고로 올라섰으며, 인터넷 등 IT산업, 공항과 지하철 시스템, 체육과 음악, 영화, 드라마, 병원 기술등... 그 수준도 뛰어나서 우리들도 놀라고, 이웃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자식을 위해 자신을 처절히 희생하신 부모님들의 사랑과 극성맞은 교육의 효과이며, 요즘 유행하는 영화 ‘암살’에서 보듯이, 우리의 조상들이 지켜낸 거룩한 피의 은혜입니다. 저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온 집안이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호위를 맡던 남편을 젊은 나이에 여의고, 저의 김점순 증조할머니는 3남매를 혼자 키우셨습니다. 훌륭한 애국자인 그녀는 어린자녀들에게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하면 부도 누릴 수 없고, 식구들과 행복한 가정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치시며, 한일 합방 이전부터 어린 아들 김상옥이 새벽마다 동대문에서 가까운 낙산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지난 3.1절에 KBS에서 방영한, “1대 1000의 전쟁” 주인공 김상옥의사는 제 친할아버지시며, 그분의 독립활동 뒤에 보이지 않는 희생과 눈물과 고통속의 몸부림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그 아내 정진주 여사, 아우 김춘원 부부와, 여동생 김애기 부부의 고문당하는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김상옥의사(1890-1923)와 한훈의사(1890-1950)는 비운의 시절에 태어나 청년시절을 지냈으며, 둘이 만나 혈서를 쓰며 동지애를 맺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아들과 딸이 태어나면 죽어서라도 사돈을 맺자고 약속하셨기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한훈의사는 제 외할아버지며, 나라가 합방되기 전인 1900년경인 16살부터 의경들을 모아 독립운동의 힘을 키우셨으며, 그분의 형제와 친척도 함께 목숨과 재산, 자녀와 가정까지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망하면 나도 없기 때문에, 나를 생각하기 전에 나라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그토록 용감하셨습니다. 이렇게 양가 온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예가 전 세계적으로 별로 없기에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8년 1월 김상옥의사 85주년 기념행사 기사는 신문 구석에 작게 나와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그 바로 위에 최진실의 자살 사건은 전면기사로 같은 면에 보도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눈물 섞인 한숨을 쉬시며, ‘이런 나라를 위해 김상옥 아버님! 왜 목숨과 가정, 재산을 다 버리셨나고!’ 한탄하신 것을 기억합니다.거의 2,000년간을 노예로 슬픔의 세월을 살아온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었는지를 박물관에 그대로 재현하고, 1년에 한두 번씩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역사를 가르칩니다. 역사는 학교에서도 배우지만 우선 가정에서 부모가 먼저 가르칩니다. 그래서 유대 자녀들은 왜 자신이 남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공부해서 훌륭한 나라로 세워가고 있습니다.유대인의 학살 장면과 일본의 학살 장면은 인터넷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찾아 자녀들과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갖으시기 바랍니다. 자녀 가슴에 애국하는 마음과 왜 공부해야 하지 그 이유를 가르쳐준다면, 그 자부심으로 자녀들은 공부를 잘 하게 되고, 우리나라는 곧 세계 최고의 나라로 올라설 것입니다. 역사와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밥만 먹이면 돼지가 되어 나라와 부모도 모르는 짐승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실제로 정치인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찾기 힘들어 아마도 ‘암살’이란 영화에 온 국민이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의 영화니, 자녀들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가셔서 애국심을 키워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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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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