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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0
    30. 개신교의 타락과 재림신앙의 부활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형성된 미국의 개신교가 타락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으로 변질된 배경과 흡사하다. 순수했던 기독교의 변질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계략으로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 내에 공존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종교 집단, 즉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와 태양신을 섬기는 미트라교를 통합하여 다스리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서기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공포한 다음, 거의 250년 이상 계속되던 기독교 박해를 중단하라는 명령(밀란칙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군복무 면제, 세금 감면 등 많은 특혜를 제공하였고 기독교를 우호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미트라교를 신봉하던 이교의 사제들이 기독교의 성직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를 얻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몰려들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개종한 이교도들의 세력이 원래의 기독교의 힘보다 더 커졌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는 이교도들의 관습과 제도와 교리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고, 급기야 교회는 기독교의 얼굴을 가진 이교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세력이 종교에 개입이 되고 순수한 기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가 혼합되면서 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극도에 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종교암흑시대’라는 쓰디 쓴 열매를 먹게 된 것이다. 미국 개신교의 타락1620년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 ‘기회의 땅’ 미국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신대륙 미국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대체적으로 개신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정치적 권한까지도 교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인이 아니면 국가 공무원이 되거나 어떤 확고한 지위와 신분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서 초기 미국 역사에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생존하려면 개신교인으로 개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뚜렷한 신앙적 체험이나 영적 회심이 없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개신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과는 뻔한 것이다.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다. 초기 교회 역사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진행되었던 교회 타락의 역사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명목상 교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정치적 세력이 교회와 결합되면 타락과 부패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고,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 반복된 현상이기도 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교회가 타락을 하면서 범하는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는 성경을 덮어두고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원칙들이 기록된 성경이 펼쳐지면 어두움에 빛이 비취는 것과 같아서 온갖 비리와 미신과 부패가 드러나기 때문에, 타락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성경을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끌어간 정신은 ‘오직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의 불꽃을 지속적으로 타오르게 한 동력은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자국어로 번역해 놓은 성경이었다. 1798년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가서 옥사(獄死)하므로 교황권이 몰락한 이후, 성경은 날개를 달고 세상에 전파되었다. 1804년에 대영성서공회가 발족되었고, 1816년에 미국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때마침 인쇄술이 급속히 발달하여 성경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펼쳐들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재림신앙의 부활신약성경을 펼치면 예수 재림에 관련된 성경절이 300회 이상 나온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시대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까 구약이 예수 초림에 대한 약속과 성취라면, 신약은 예수 재림에 대한 약속과 부활의 소망을 전하고 있다. 초림의 목적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라면, 재림의 목적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 죄악세상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재림 신앙은 퇴색되었고 재림과 부활의 소망은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개혁신앙을 주장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목숨을 포기하였겠지만, 대체적으로 일반 평신도들에게 재림과 부활의 신앙은 그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였다. 암흑시대가 지나고 성경이 펼쳐지면서 나타난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는, 재림에 대한 관심이 일깨워진 것이다. 요셉 볼프의 재림운동-히브리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일인이었던 요셉 볼프는 1821년부터 시작하여 약 24년간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아시아의 팔레스틴, 시리아, 페르샤, 보카라, 인도 등지에서 온갖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재림의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는 북미 합중국까지 건너가서 재림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볼프는 유대인들에게도, 배화교를 숭상하는 터키인들에게도, 힌두교인들에게도, 여러 종족과 민족들에게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였다. 영국의 재림운동-영국에서는 1826년 경부터 재림 메시지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국교회 성직자 약 700명이 그 당시에 재림과 관련된 천국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건너온 재림에 관한 책자들이 널리 배포되었고, 영국에서도 재림에 관한 서적과 잡지들이 발행되었다. 1842년에는 미국에서 재림신앙을 받아들인 로버트 윈터라는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재림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18세기말 남미에서 예수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스페인 사람 라쿤자가 저술한 재림신앙 서적이 1825년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배포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재림운동-학생시절 합리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던 가우센은,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재림이 절박하였음을 깨닫고 제네바에서 재림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가르쳤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아이들의 부모에게까지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의 예언 해석과 재림신앙을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널리 전파하여 스위스와 프랑스에 재림의 불씨를 지폈다. 스칸디나비아의 재림운동-재림의 소식은 스칸디나비아까지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신앙을 받아들이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이 운동을 반대하였고 재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투옥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국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이 일어나서 공중 앞에서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증거였다. 북미의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19세기 전반부에 북미에서 일어났던 윌리암 밀러(침례교회 교인)의 재림운동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5만~10만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재림운동에 가담하였다. 그가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하였으나, 북미 지역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재림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것은 특이할만한 일이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2-0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9
    29. 영국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1534년 국왕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성공회와 로마교회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그 후 1559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반가톨릭법을 강화시켜 교회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였다. 당시 성공회는 가톨릭에 속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개혁교회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정책은 영국 내에 혼재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이해하며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의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소위 ‘국교주의’ 사상이 개신교 전반을 지배하였고, 국가가 예배의식이나 교회 출석 등을 간섭하고 강요하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중심의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던 청교도들은 국가로부터 수색을 당하고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청교도들은 마침내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네덜란드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청교도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에 그들은 집과 재산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떠났다. 대체로 물질을 신앙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저들의 신앙은 참으로 순수하고 진실하고 담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청교도들은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이 생활하기에는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든든해지고 깊어졌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일부 청교도들은 더 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다시 신대륙(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떠날 때 그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존 로빈슨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의 고별설교의 일부분은 오늘날 현대 개신교회가 깊이 새겨보아야 할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다. “나 개인으로서는 개신교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해마지 않습니다. 그 교회는 한 때 신앙적이었지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 이상으로는 한 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형편입니다. 루터교도는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 칼빈파의 신도들 역시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남긴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밝게 비치는 빛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의 전부를 밝히 깨닫지는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희가 처음에 받은 빛 이상의 빛을 받고자 갈망할 것입니다.”(D.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1, 269). 암흑시대 동안에 훼손되고 가려지고 파묻혀버린 성경의 진리를 하루아침에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평생 동안 밝혀낸 성경의 진리는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리가 밝혀지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찾는 일을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실수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청교도들을 ‘분리주의자’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영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1620년 9월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여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수개월 간의 항해 끝에 12월 21일, 남자 78명 여자 24명, 도합 102명이 미국 버지니아 플리머스에 도착하였다. 겨울철에 도착한 그들은 초기에 뼈저린 고생을 하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나, 원주민의 도움으로 농사를 배우고 이듬해 봄이 되면서 비교적 안정한 삶을 시작하였다. 1630년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북쪽에 있는 한 지점에 도착하여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1640년 경에는 약 2만 여명의 영국계 이민자들이 새로이 형성된 뉴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되었고, 1691년에 플리머스가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에 통합되면서부터는 먼저 이주해왔던 분리주의자(청교도)들은 더 이상 분리된 상태로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의 종교생활을 주도하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도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박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들이 청교도의 정착촌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정착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청교도들은 다시 보복하였고 이로 인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원주민 인디언 추장 필립을 체포하여 그를 참수하였고, 사지를 네 방향으로 잡아당겨 찢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청교도의 기독교 정신을 상실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 먼 거리를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핍박을 가하였다. 교인들만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고 정부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의 종교 박해를 피해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또 다른 형태로, 자신들과 다른 신조를 따르는 신앙인들을 핍박하고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죄악의 본질을 타고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는 발전하지만 인간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만 다를 뿐이지 이러한 양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외친 용감한 투사신대륙에 영국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지 약 11년 후 로저 윌리암스라는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영적으로 성서적으로 매우 확고한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가 범죄를 예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규정하고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고 부당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정부가 정한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금을 가하거나 투옥하는 것은 영국의 국교주의와 같은 것이므로 결코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저 윌리암스는 결국 국가의 정치와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 인물로 간주되어 식민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고, 14주간을 혹독한 추위 속에서 피신하여 다니면서 기적 같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하여 생존하게 되었다. 때로는 인디언의 부락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하였고, 수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떠돌며 헤매던 끝에 근세(近世)에 신앙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장하고 승인한 최초의 주(州)라고 할 수 있는 로드 아일랜드 주(州)의 기초를 놓았다. 그 주는 당시 신앙 박해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번창하는 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州)가 표방하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마침내 북미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이렇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 풍요한 나라로 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 신대륙의 나라에 와서 신속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은 개신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신앙심 없이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신앙고백을 하며 신앙인이 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는 그들의 영향력 때문에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들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타락했던 역사가 미국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개신교계에도 새로운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1-22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8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8.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 종교개혁과 관련된 당시 유럽 국가들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일단 두 개의 거대한 권력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권력, 그리고 각 제국들의 정치적 권력이 서로 협조하거나 대립 양상을 띠고 있었다. 때로, 국왕들이 종교개혁 사상을 지지하고 협력하려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교황의 힘과 결탁하여 개신교 세력 박멸에 앞장서서 개혁운동을 저지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양상이 특이하였다. 이미 언급되었던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사건을 통해서 수만 명의 개신교인들을 학살했던 프랑스에 대하여 교황은 열렬하게 지지하며 축하하였고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양자가 서로 일치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후로 프랑스에서는 개혁신앙 자체 뿐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신앙 자체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비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앙의 양태(樣態)로 인한 부작용과 부패를 경험한 프랑스에서는 이제 신(神) 자체를 거부하는 무신론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교권주의 영향교회에서 가르치며 강조하는 모든 신앙과 교리의 원칙들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과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주장하고 추진해 나가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식이나 교리들 가운데 신앙의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들이 계속 발생하게 되면서, 이러한 것들을 감추고 가리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가 바로 평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성경을 펼쳐들고 개혁신앙을 주도하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운동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격렬하게 핍박하였고 살해하였던 것이다. 교황 측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개혁을 하게 되면 국민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기 때문에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함께 힘을 모아서 개혁신앙을 박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무시하고 덮어둔 채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회나 국가는 마침내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어두움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국가는 전반적으로 피폐해진다. 국민들은 부도덕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 전의 국가적 상황프랑스에 밀어닥친 개혁신앙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피하여 개신교인들로 불리어지던 위그노들이 고국을 등지고 주변의 여러 나라로 피신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양심적이고 능력 있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법률가들과 교사들을 비롯한 유력한 지도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특출한 인물들이 대거 이주해 나가면서 프랑스에는 일반적인 쇠퇴 현상이 일어났고 도시들은 타락하게 되었고 지방의 비옥한 토지들은 황무지로 변하면서 국민들 가운데는 도덕적 퇴폐의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왕들과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부자들은 호위호식하며 탐욕과 방탕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반면에 농민들과 가난한 자들은 약탈과 착취로 인하여 매우 빈곤하고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 기준과 국가와 위정자들에게 충성하는 정신을 일깨워주는 성경의 교훈들을 제대로 접촉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결국에는 부도덕하고 타락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국민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다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유럽에도 자유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프랑스의 농민들과 도시 평민들의 분위기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도자들에게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때마침, 1788년에 몰아닥친 유례없는 흉작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터지면서, 1789년 도시민과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일어난 폭력적인 혁명이 수 년 간에 걸쳐서 무자비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친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말았다. 수많은 살육과 폭력이 프랑스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프랑스가 로마 교회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화형주를 세웠던 그 자리에, 프랑스 혁명당원들이 부패 정권의 지도자들을 처형하는 단두대를 세웠다. 무수하게 많은 정부 지도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군중의 잔악무도한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의 폭력과 잔악한 행위와 살육은 이미 로마교회가 성경의 신앙을 고수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무자비한 행위들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를 거둔 셈이었다.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로마교회에서 배웠던 종교와 하나님 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들을 그와 같이 피폐하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한 기독교를 증오하면서 신앙에 기초가 되는 성경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불태워버리는 일을 자행하였다. 성경에서 유래한 1주일 7일 제도를 10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휴일은 방탕의 날로 보냈다. 이제 프랑스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과 배교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의회는 공공연하게 프랑스를 무신론 국가로 규정하고 ‘이성(理性)의 여신’을 신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의회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를 등장시켜 그 여자를 ‘이성의 여신’으로 받들고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는 의식을 감행하였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 사이를 통과하여 노틀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의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와 성경의 승리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잠 11:5).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과 갈등을 통해 또 다른 양상의 폭력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지방은 황폐하였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프랑스 국가 자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종교, 법률, 사회적 질서, 가정제도, 국가, 교회 등 모든 분야에 극심한 균열이 생기면서 국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쟁취하였지만, 내부적 갈등과 분쟁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투쟁에서 승리한 자코뱅 당은 독재 정치를 통해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냈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는, 1793년에 의회에서 결의했던,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지하는 법령’을 3년 반 만에 취소하고 다시 성경을 용납하는 의안을 결의하였다. 온 세계는 성경을 거절한 나라에 임하는 재앙과 재난을 목도하였다. 주 10일 제도는 원래의 7일 제도로 돌아왔고 성경은 이전보다 더 높임을 받았다.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가 조직되었고, 1816년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창설되어 유사 이래로 가장 많은 성경들이 수백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온 세계로 펴져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는 말씀의 성취였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1-0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7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7. 북서유럽 주요 국가들의 개혁운동 중세기 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가톨릭 세력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교권에 저항하여 기존의 신앙의 틀을 깨고 성경 중심의 새로운 신앙을 확립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극한투쟁이었다. 종교 개혁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종교개혁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유럽의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성경의 진리가 밝혀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진리’가 ‘목숨’보다 소중한 것임이 확인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예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불변의 진리이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교황권에 대하여 매우 격렬하게 항의하며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과감하게 공격하던 국가이다. 이러한 개혁의 성향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교사들의 활동은 시대를 통하여 계속 이어져 왔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이 번역해 놓은 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등 개혁사업을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로마교회의 박해를 통해서 화형과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중에서도 신자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였다. 그는 원래 매우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개혁신앙을 받아들여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25년간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개혁신앙을 전파하였다.네덜란드는 개신교의 교리를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고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검으로 죽이고 여자들은 산 채로 매장하여 죽였다. 어린 아이들까지 죽였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흘린 피는 언제나 씨가 되어 더 널리 퍼져나갔다. 마침내 윌리엄 3세(빌렘 3세)의 지도하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네덜란드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덴마크의 타우젠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개혁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유럽의 나라들에게는 비교적 복음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의 산실이었던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개혁주의 사상을 전파했던 것이다. 순박하고 용감한 북유럽 사람들은 로마교회의 미신적인 신앙과 사치와 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가르쳐주는 성경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덴마크의 개혁자로 널리 알려진 타우젠(Tausen)은 로마교회 승원장의 도움으로 가톨릭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쾰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신비설에 빠져있는 학생들의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로마교회에서 입학을 금하고 있는 루터의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가서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밀하게 개신교의 복음을 전하다가 승원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틈으로 동료들에게 진리를 전하였고, 승원 안에서도 개신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개신교 신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보호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떨어졌고, 타우센은 자유롭게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덴마크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결국 덴마크는 국가적으로 개혁주의를 받아들였다. 개혁운동의 보루가 된 스웨덴스웨덴에서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 가운데 루터와 멜란히톤의 가르침을 받은 탁월한 두 청년이 있었다. 올라프 페트리(Olaf Petri)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형제였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개혁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교회의 반대가 격렬했다. 신부들은 대체로 개혁신앙을 반대할 때에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도들을 충동하여 일하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자주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고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이 두 형제들도 폭도들에게 피습되어 목숨만 겨우 건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왕이 이 개혁자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동안 국가는 피폐해지고 국민들은 빈곤의 늪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상징과 의식으로 이루어진 예배에 길들여졌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다. 왕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여 개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력한 지식인들이었고 일반적인 학문과 함께 성경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국회에서도 개혁신앙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 두 형제는 왕의 지도를 받아서 성경을 스웨덴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제 스웨덴은 성경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개혁신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 1세기 후에, 스웨덴은 가톨릭 국가들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거의 망해가는 독일을 구해내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여러 나라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국의 웨슬리 형제와 감리교회영국 출신 윌리암 틴들(William Tyndale)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을 기초로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개혁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이다. 그 당시 성경을 보거나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틴들은 비밀리에 독일로 도피하여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는 성경을 번역한 죄로 1535년 네델란드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 성경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열렬하고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가 출현하여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는 여왕을 대항하여 과감하고 용감한 개혁 사업을 이루어갔다.영국에서는 개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로마교회의 박해는 미약해졌지만, 이제는 국왕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였다. 국교주의 정신으로 국가가 정해주는 방식에 따라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하였다. 이러한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북미에 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당시 핍박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John Bunyan)이 옥중에서 저술한 ‘천로역정’은 불후의 명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국교회(國敎會)에 의한 박해의 역사가 거의 100년을 지배하던 중에 나타난 영국의 위대한 개혁자가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형제이다. 이 두 형제는 남달리 성결한 마음과 경건한 행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의 부담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상태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가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기들과는 달리 아무런 동요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항해하고 있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의 노력으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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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2-2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6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6. 반종교개혁 세력-제수이트 오랜 세월동안 견고한 터를 닦아놓은 가톨릭 세력에 저항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릇된 교리와 관행들을 바로잡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여파로 가톨릭의 세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개혁자들과 개혁신앙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피 값으로 얻어진 열매였다. 그러나 그 막대한 권력을 소유한 로마 교회가 개혁 세력을 방치할 리가 없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혁을 저지하고 개혁 세력을 박멸하기 위하여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에, 종교개혁의 흐름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제수이트 단체의 출현이다. 제수이트(예수회)가 조직됨‘제수이트’라고 하는 단체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Loyla)라는 성에서 1491년에 태어난 ‘이니고 로페즈 드 레깔데’(Inigo Lopez de Recalde)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후에 가톨릭식으로 개명한 이름이 이그나시우스(Ignatius)이기 때문에,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욜라 출신 이그나시우스라는 의미일 것이다. 최초 6명의 단원으로 이 단체가 창설된 것은 1534년이지만 그 당시 활동에는 상당한 제한이 있었고 종교재판소의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540년 교황청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고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받은 후부터 가톨릭의 확고부동한 단체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저명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이그나시우스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처세술에 매우 능했고, 금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신비주의 성향이 농후하였고 아주 냉정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매사를 철저하게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이그나시우스의 이러한 성격이 제수이트의 특징과 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제수이트의 목적과 정신제수이트를 조직하게 된 주요 목적은 첫째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약화되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가톨릭 안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로 개신교를 핍박하고 견제하며 더 나아가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수이트 단원들은 철저한 세뇌교육과 혹독한 영성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교회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에 가정을 갖지 말아야 하며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상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과 ‘비밀유지’였다. 다음은 교육과 훈련을 마친 다음 제수이트 단원들이 서약하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나는 기회가 되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모든 이교도들, 프로테스탄트들, 자유주의자들과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키고 싸울 것이다. 지구상에서 그들을 전멸시키고 근절시키라고 지령받은 것들을 실행함에 있어 나이, 성별 혹은 조건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악명 높은 이교도들을 목 매달고 불태우고, 쇠약하게하며, 끓여죽이고, 채찍으로 치고, 가죽을 벗기고, 산 채로 매장해 죽일 것이다” (New World Religion에 게재된 ‘예수회의 최종적인 선서와 입단식’Oath of the Jesuits 내용 중에서).제수이트의 반종교개혁운동이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한 제수이트가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저지른 끔찍한 사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두려울 만큼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종교전쟁을 일으켜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고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정신적인 타락과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한 인구 감소와 함께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제수이트가 국민의 1/7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1572년에는 성 바돌로매 축일에 개신교도들의 대학살을 주동하였다. 축일 전날 밤의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그곳에 모여들었던 위그노(프랑스의 개신교도들)들 무차별 공격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의 위그노 학살은 7일간 계속되었는데, 처음 3일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였다. 그런데 그 학살 사건은 파리 시내를 넘어 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촌락으로 확대되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린아이, 노인, 농부들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무차별 살해하는 대살륙이 2개월동안 자행되었다. 국가의 귀중한 인적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망한 인재들을 포함하여 7만 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교황청은 매우 기뻐하였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축하 행렬이 이어졌고 그 대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고 기념벽화도 그려졌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폴란드, 영국, 아일랜드 등 유럽 각지에서 제수이트는 집요하게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개신교도들을 위협하였고 수많은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살해하였다. 제수이트의 선교활동제수이트는 단지 교황의 권위를 세우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다. 세계 각처에 진출하여 그들이 전개한 천주교 선교활동도 대단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교도를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것도 제수이트의 매우 중요한 사명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선교지역을 과감하게 해외로 확장하여 동양권에 포교하는 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그나시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프란시스 싸비에르(Francis Xavier)는 아시아대륙 선교의 선구자였다. 싸비에르는 인도로부터 시작하여 일본,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천주교 선교에 목숨을 걸고 헌신한 백절불굴의 투사였다. 동양권의 천주교 포교에서 그가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후일에 천주교 선교가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얼마 후 제수이트는 아시아 보다는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한 한 대륙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다. 특히 중미와 남미에서 제수이트의 선교활동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무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살륙하면서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중남미 대륙을 가톨릭화 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수이트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세력을 박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약 5000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고 중남미에서는 포교하는 과정에서 그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조인선, 기독교 죄악사, 상권, 320,332).이러한 전력을 가진 제수이트는 지금도 2만 여명의 회원들이 세계 각처에서 정치계,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과학계, 교육계 등 각 분야에 침투하여 조직적이고 집요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치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며, 그것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수회의 두 가지 최종 목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 목표는 세계정치권력의 장악이며, 두 번째 목표는 세계종교의 통합이다. … 그들은 지금 막강한 권력, 세계적인 조직망, 정밀한 정보, 막대한 금력을 가지고 마치 첩보기관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전략을 사용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장악하고 세계의 종교들을 가톨릭 안에 묶는 일을 줄기차게 진행하고 있다.”(마지막 신호, 209, 225). 향후 언젠가는 제수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의 세력이 세계를 장악하여 통제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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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2-1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5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5.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자들 칼빈의 활동이 시작됨가톨릭의 오류와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깨달은 칼빈은 이제 잠잠히 있을 수 없었다. 칼빈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단 한적한 도시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가정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가난한 집, 부잣집, 큰 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개혁의 복음을 전하며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놓았다. 기쁜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음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전해지고, 더 나아가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촌락과 도시까지 복음의 물결이 스며들었다.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칼빈이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에서는 부자들과 유식하고 유력한 사람들 사이에 성경을 연구하며 토론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와 배치되는 진리를 발견한 학자들은 가톨릭의 지지자들에게 저항하며 투쟁하는 일까지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은 여전히 집집을 방문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의 도리를 전해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프란시스1세의 누이인 마가레트도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나중에는 왕궁을 개방하고 설교자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반격과 선동의 결과로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평민들이 개혁신앙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프란시스 왕도 이에 동조하게 되므로 교황측에서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개혁자들과 그 신앙에 동조하는 자들을 화형시키는 일을 재개하였다. 칼빈도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를 체포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하여 포티어(Poitiers)라는 곳으로 가서 개혁사업을 전개하였다. 얼마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프랑스는 이미 개혁의 문이 닫힌 것을 감지하고 일단 독일로 들어갔다. 생지옥이 된 프랑스이러한 와중에 개혁운동에 찬 물을 끼얹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하루 밤 사이에 로마교회의 미사 제도를 반박하고 공격하는 격문(檄文) 벽보가 전국 각처에 붙여졌다. 심지어는 왕의 거실 출입문에도 그 격문이 붙었다. 이에 격분한 왕은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을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개혁교도들을 체포하여 화형을 시키는 일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왕까지도 이 일에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어 그 일에 직접 참여하고 간여하였다. 개혁을 주도하던 지도자들과 개혁신앙을 동조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조용한 기쁨과 관용과 용서의 정신은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되어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많은 학자들과 부자들과 유력한 자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심중으로는 개혁 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혁신앙자들에게 대한 철저한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들도 언젠가는 신분이 노출되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대학교수들, 학자들, 저술가들, 고급기술자 등 국가의 존경받고 인정받는 유력한 인물들이, 심지어는 왕궁의 신하들 중에도 프랑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로 인해 왕과 신부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었고 개혁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징벌하는 화형장의 검은 연기가 프랑스의 하늘을 뒤덮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게 자행된 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행위는, 장차 프랑스 혁명과 함께 닥쳐올, 무신론자들이 가톨릭교도들에게 저지르게 될 무시무시한 단두대 만행의 씨앗이었다. 개혁사업의 거점이 된 스위스의 제네바프랑스 종교개혁의 초기에 괄목할 만한 개혁자였던 러페브르의 제자였던 파렐은 매우 강직하고 용감한 개혁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한 때 스위스로 가서 츠빙글리의 개혁사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의 종교개혁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프랑스의 국경 근처에서 자국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독일의 개혁관련 서적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문서전도자들을 통하여 조국의 여러 지역에 보급하였다.파렐은 한 때 스위스의 한적한 지역으로 가서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동들을 교육하는 과정에 성경도 함께 가르쳤고, 그 영향이 부모들에게 확대되어 부모들 가운데 개혁신앙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얻게 되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부들이 미신적인 신앙을 하는 시골 사람들을 충동하여 파렐은 더 이상 그 사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옛날 예수의 제자들처럼 이 마을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마을로, 이 도시에서 박해가 오면 저 도시로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한 그의 집념과 노력의 결과로 가톨릭 신앙의 요새로 알려진 몇몇 도시들이 복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로마교회의 의식을 포기하고 우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파렐은 특별히, 제네바에 개신교의 깃발을 꽂으면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위한 개혁사업의 거점이 될 것을 예상하고 제네바로 들어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현지 가톨릭 세력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혁의지는 여전히 제네바에 머무르고 있었고 파렐의 개혁정신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비천한 신분의 한 연약한 젊은이가 아동교육을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아이들이 그 복음을 부모들에게 전하여, 부모들이 이 프로멘트(Froment)라는 교사의 성경강해를 듣기 위하여 학교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점점 증가하여 나중에는 교실이 차고 넘쳤다. 프로멘트는 이 과정에서 신약성경과 다량의 전도용 소책자들을 보급하였으며, 그 서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짐으로 제네바에 개혁사업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개신교 사업이 견고해졌다. 이 무명의 한 청년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이 바젤로 가는 길에 제네바에 들렀다. 칼빈을 만난 파렐은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제네바로 보냈다고 확신하여 그를 설득하여 제네바에서 자기와 함께 개혁사업을 할 것을 강권하였다.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칼빈은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서 회피하려고 했지만, 파렐의 강권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이곳에서 30년간 개혁사업을 주도하였다. 그의 개혁의 목표는 첫째,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둘째는 전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운동은 가톨릭의 세력을 저항하며 개신교의 원칙을 고수하는 보루가 되었고, 개혁신앙과 관련된 많은 책자들이 만들어져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 시대에 세상이 요구하는 진리가 이곳으로부터 방방곡곡으로 펴져나갔다. 각처에서 핍박받던 개혁자들이 제네바로 돌아와서 피난처를 삼았고, 다시 힘을 얻어 각국으로 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영국의 청교도들, 네델란드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이곳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에 불을 붙여서 들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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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4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4. 프랑스에서 진행된 종교개혁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 종교개혁은 거세게 저항을 받았고 때로는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고 고수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게 많았다. 그런데 이 개혁의 와중에 늘 문제가 되는 것은 개혁파와 로마교회 사이에서 세력을 행사하는 황제의 태도였다. 어떤 황제들은 로마 교황권의 압력 때문에 개혁 세력들을 핍박하였고 또 어떤 황제들은 개혁파를 도와서 개혁사업이 발전되도록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때, 독일에서는 카알 5세가 이단 박멸을 작심하고 개혁자들을 지지하는 제후들을 포로로 잡아서 이 성(城) 저 성으로 보내면서 큰 괴롭힘을 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제후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사라지면서 카알 황제는 쓰디쓴 패배를 경험한 일도 있었다.쯔빙글리에 의해서 꽃을 피웠던 스위스의 종교개혁 사업도 한 때 매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개혁사업에 헌신하던 많은 지도자들이 카펠(Cappel)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얼마 후 가장 영향력 있던 지도자 에콜람파디우스도 죽었다. 이곳저곳에서 개혁사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다시 가톨릭의 세력이 확장되는 듯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 개혁사업을 인도하고 계셨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가톨릭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될 것이고,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진리가 힘을 얻고 빛을 보게 될 날은 분명히 올 것이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시작됨당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터와 관계없이 거의 동시대에 사방에서 개혁이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성경의 빛을 명확하게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파리 대학의 러페브르(Leferve) 교수였다. 그는 매우 열심 있고 진실한 가톨릭교회의 추종자였으나 고대문학을 연구하던 중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빛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루터나 쯔빙글리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1512년에 이미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의, 곧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고 그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 후일에 개혁의 선두주자로서 활동한 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이다. 파렐은 사도 바울과 같은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러페브르는 주로 그의 제자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파렐은 그 진리를 들고 나가서 공중에게 큰 소리로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파리 근교의 모오(Meaux)라는 도시의 한 고위 성직자인 감독이 이들과 연합한 것이다. 개혁파의 가르침은 신속하게 전파되었고, 당시 왕이었던 프란시스 1세의 누이도 개혁신앙을 받아들임으로 개혁의 복음은 노동자로부터 왕궁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러페브르는 프랑스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모오의 감독은 자신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서 성경을 보급한 결과 모오에서는 농부들까지 성경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귀족 베르캥의 개혁사업당시 프랑스 귀족 가운데 최대의 학자로 알려졌던 베르캥(Louis de Berquin)은 매우 세련되고 용감하고 품위 있는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로마교회의 충실한 신봉자이도 하였다. 정직한 양심의 소유자였던 그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는 원래, 개혁자 루터를 증오하는 사람이었는데,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결과, 루터의 가르침이 로마교회의 가르침보다 성경에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개혁사업의 선봉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로마교회 교도들에게 기피해야할 매우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당국자들에 의해서 세 번이나 투옥되었으나 그의 천재성과 고결한 인격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당시 프란시스 왕이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베르캥은 주변의 상황이 악화되고 저항이 증가할수록 더욱 더 열심히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였다.당시 그의 대적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베르캥을 처형하고 싶었지만 왕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길거리에 세워져있던 성모 마리아상이 파손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 문제로 도시 안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베르캥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수도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사건이 마치 베르캥의 개혁사업의 영향이라고 거짓 소문을 내었고, 그 결과로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공교롭게도 베르캥의 수호자였던 왕이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그의 원수들은 베르캥을 신속히 재판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베르캥의 용모는 진리의 화신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평화스럽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고, 프랑스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개혁의 동지들에게 순교를 각오하고 개혁사업에 매진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였다. 파리와 모오 시(市)에서 핍박의 심해지자 개혁의 지도자였던 러페브르는 독일로 들어갔고 파렐은 동프랑스의 고향으로 돌아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여전히 개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핍박이 이르렀을 때에 유대와 사마리아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던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칼빈의 출현파리의 어느 대학에 매우 침착하고 총명하고 탁월한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충실한 신봉자였으며 개혁자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저들은 화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청년이 바로 요한 칼빈(John Calvin)이다. 개혁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그의 사촌이 파리에 살고 있었는데, 칼빈은 종종 그 사촌 올리베탄(Olivetan)과 만나서 당시의 종교적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칼빈은 그 사촌의 개혁적 사상이나 교리에 대하여 공감하지 않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예리하고 총명한 그의 마음 한 쪽에는 개혁사상에 대하여 무엇인가 끌리는 것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어느 날 칼빈은 우연히, 큰 광장에 나가서 이단자들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평화스럽고 빛나는 얼굴과 늘 어두운 그림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에 자신의 신앙에 분명히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순수한 신앙과 확고한 믿음의 기초가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칼빈은 본격적으로 순교하는 이단자들의 “기쁨의 비결”이 들어있는 성경의 참 진리를 찾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칼빈은 구원이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칼빈의 출현은 프랑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던 중에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성경의 참다운 진리를 깨닫게 된 그는 신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한 동안 법률공부에 치중하다가, 마침내 그것도 포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한 다음, 개혁신앙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소위 유력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 신앙을 포기하고 개혁신앙에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게 된 배경에는 언제나 ‘성경’이 있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2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3
    23. 음지에서 이루어진 큰 개혁운동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인류의 역사는 그 자유의지의 선택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진행과정이 극도의 죄악으로 점철되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할 정도의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역사를 반전시키신다. 예를 들면, 노아 당시에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든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다음에 새 역사를 펼쳐 놓으셨다.마찬가지 원리로, 종교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성경의 모든 진리들이 왜곡되고 가리어져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참 빛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곳저곳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무너진 진리를 수보하는 일에 착수하셨다. 프랑스의 왈덴스인들을 비롯하여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보헤미아의 후스와 제롬 등 유력한 개혁자들이 나타나 조만간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시작될 종교개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세례파의 출현이와 같은 배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대에 스위스에서는 칼빈이 독일보다 더 구체적이고 철저한 개혁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외치는 일단의 무리들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형제들’(Brethern)이라고 알려진 ‘재세례파’(Anabaptists)이다. 이 재세례파는 매우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개혁사업을 진행하였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삼은 것은 물론이고,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아직 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한 편,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은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하였다. 교회로부터 성상(聖像)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은, 이들이 가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물론이지만, 기존의 오직 성경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 등의 개혁세력에 의해서도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개혁 내용은 결코 비성서적이거나 기존의 개혁 운동을 무시한 것도 아닌데, 더 진취적이고 더 구체적인 개혁을 이루어가는 이들에게 기존의 개혁 세력이 핍박을 가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메노나이트와 아미쉬스위스에서 핍박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에 재세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네델란드)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재세례파 지도자 중에는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원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으나, 가톨릭 교리 중 화체설(化體說)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가톨릭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에 재침례파로 개종하였다. 시몬스는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재세례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경상의 세족예식을 비롯하여 새로운 개혁의 분야를 넓혀갔는데 이러한 개혁에 동조한 사람들을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들은 신대룩으로 이주하여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계속 강조하였고, 이들과 같은 계통으로 알려진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비무장 평화주의와 의료봉사를 통해서 미국의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현재에도 미국의 농촌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하고 있는 아미쉬도 스위스에서 발생한 재세례파의 일원이었던 암만(Jacob Amman)이라는 지도자에 의해서 더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개혁을 시도한 결과로 나타난 개혁파의 한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청교도 신앙의 회중교회와 침례교영국에서 성공회가 국교회로 자리를 잡고 국왕이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에,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Robert Boown)에 의하여 국교와의 분리를 주장하며 새롭게 형성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es)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속박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칼빈의 장로 제도를 배격하고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로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여, 그리스도의 언약 아래서 성경의 양심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또 다른 교회 조직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회중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영국에서 회중교회 신도들에게 가해진 핍박 때문에, 이들은 좀 더 나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랜드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영국에서 홀랜드로 이주한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 목사였다가 회중파로 개혁한 스미스(John Smith)의 지도하에 1608년 암스텔담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세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많은 감명을 받았고, 또 그들의 교리 중의 일부인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인정하여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의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칼빈의 예정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 그것을 자신들의 신조로 삼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베풀고 있는 물을 뿌리는 세례가 역사적으로 변질된 것이며 성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물에 잠기는 침례의식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침례교회가 된 것이다. 제칠일침례교의 탄생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고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특히 십계명의 요구사항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는 매우 중대한 요소임을 인식하여 그것을 순종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는 사실도 확신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십계명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일도 거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신념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오늘날의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던 중, 주일을 계명상의 제칠일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면서 받은 빛에 충실하던 성도들에게 또 다른 빛이 이르러 왔다. 영국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John Traske) 목사는, 그가 지도하던 밀 야드(Mill Yard) 교회 교인 중 한 사람인 잭슨(Hamlet Jackson)씨로부터 제칠일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트래스크 목사는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이를 올바른 성경적 진리로 인정하여 받아들였고, 마침내 밀 야드 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상 올바른 침례를 베풀며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제칠일침례교회가 되었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개혁세력보다 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름 없는 개혁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한 역사가 있다. 처음에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을 개혁하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 성경중심의 개혁을 이루어가는 신(新) 개혁 세력을 박해한 것은 아이러니다. 신성한 영역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악적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인간 세계의 비루함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파묻혔던 진리의 보배들이 하나씩 하나씩 밝혀져 마침내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1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2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2.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 독일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루터가 태어난 지 몇 주일 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 중에 있는 한 목자의 초라한 집에서 츠빙글리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름답고 웅장한 천연계를 바라보며 성장한 츠빙글리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조모(祖母) 곁에서, 순수하지만 웅대한 꿈과 포부를 가진 진실한 크리스찬으로 자라났다. 특히 그는 남달리 명석하고 매우 총명하였으며 그를 가르칠만한 교사를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3세 때에 당시에 스위스의 가장 우수한 학교들이 있는 베른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이 유능하고 뛰어난 어린 학생에 대하여, 당시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던 도미니크회(Dominican)와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는 경쟁적으로 이 아이를 자기들의 편에 두고자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의 아버지는 츠빙글리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산골에서는 이 츠빙글리의 지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바젤(Basel)로 갔고, 그곳에서 비템바하(Wittembach)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로마교회의 이단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도전사실상 그 당시 츠빙글리와 루터는 서로 교류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중에 츠빙글리는 루터의 서적을 통해서 자신의 개혁적 메시지가 서로 일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개혁자는 오직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전력질주 하였던 것이다.1516년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deln) 수도원의 설교자로 초빙되었다. 그곳에 하나의 명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상’이었고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연중 대절기가 되면 여러 나라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 미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부류는 그들의 고행을 포함한 순례 여행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에 크게 실망하였고, 또 다른 한 부류는 로마교회의 의식들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귀중한 복음을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서 그 소식을 널리 전파하였다.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전당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이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아울러 예물의 액수도 감소하였다. 이리하여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3년 후에는 당시 스위스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취리히(Zurich)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복음과 교권이 대립되다츠빙글리의 설교는 매우 개혁적이고 복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로마교회의 부패와 거짓 교리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정치가들, 학자들, 기술자들, 농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애굽의 암흑에서 인도해 낼 우리의 모세가 될 것이다.”(-D’ Aubigne, b.8, ch.6)라고 말하였다.이와 같은 츠빙글리의 감화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로마교회가 잠잠할 리가 없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금고를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면죄부 판매를 적극 추진하였다. 독일에서는 테첼(Tetzel)이라는 신부가 그 판매책임을 맡았고, 스위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수도사 삼손(Samson)의 지휘 아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관하였다. 한 지역에서 동시에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다. 츠빙글리는 면죄부 판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삼손은 한 장의 면죄부도 팔지 못하고 스위스를 떠났다.츠빙글리의 설교는 언제나 복음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은혜스럽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많은 청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는 루터가 교황과 교권에 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는 이제 츠빙글리가 교황의 권한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된 로마교회 측에서는, 당시 콘스탄스의 감독이 세 명의 사절을 취리히의 의회로 파견하여 츠빙글리가 사람들에게 교회의 법규를 범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질서를 파괴하고 있으니 그를 조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취리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평화롭고 범죄가 없었던 안정된 도시였기 때문에, 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츠빙글리의 활동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역전(逆轉)이 된 대토론회독일에서나 스위스에서나 개혁사업이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나, 이를 약화시키려는 로마교회의 노력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들이 츠빙글리에게 제안한 방법은 공개토론회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부적인 조작을 통해서 츠빙글리를 제압하고자 하는 음모였다. 바덴(Baden)에서 대토론회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츠빙글리는 직접 그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고, 개혁파의 대표로는 에콜람파디우스(Ecolampadius)와 할러(Haller)가 출석하였고, 로마교회 측에서는 학식이 풍부하다고 인정받는 에크(Eck) 박사가 나왔다.에크와 그 일행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단에 올랐으나, 개혁파의 대표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크가 만약 로마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성공하면 막대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좀 불리한 입장이 되면 상대방에 대한 모멸과 조롱을 서슴지 않고 퍼 부었으며 매우 오만한 태도로 상대방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개혁파의 대표자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오직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하였다. 토론회의 내용은 필기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으나, 한 학생이 몰래 모든 내용을 필기하여 그 내용을 밤중에 츠빙글리에게 보냈고, 츠빙글리는 밤새 그 기록들을 검토하여 그 다음 토론에서 주장하고 답변할 내용들을 작성하여 학생을 통해 전달하였다. 이 토론은 18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에크 일행은 매일 저녁 풍성한 식탁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개혁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음 토론을 위해 준비하였다. 토론회에 참석자 중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양측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에크의 주장들에 대하여 혐오스러운 감정을 갖게 되었다.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하였지만, 이 토론회의 결과로 개혁 사업은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중요한 지역인 베른과 바젤 두 도시가 개혁 사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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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06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1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1. 목숨을 걸고 진리를 수호한 루터 루터의 개혁적 영향력은 여러 나라에 확산되었고, 그 당시 가톨릭이 왜곡하여 가르치던 성경의 교리들과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부패와 타락과 비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웠고 하루 속히 루터를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새 황제 카알 5세가 즉위하였고, 교황권에서는 새 황제에게 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루터의 개혁사업을 막아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 그것은 빠른 시일 안에 루터를 처형시켜 달라는 당부였다. 새 황제는 그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독일 작센의 매우 학식이 높고 분별력 있는 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選帝侯,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로서 새 황제를 세우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인데, 오히려 루터를 옹호하면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조언하였다.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황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루터를 소환하여 제국의회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루터가 의회 앞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의 각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 시내의 악마가 비록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들어가리라.”((J.H. Merle D’Aubigne, Ho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7, ch.7). 루터는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하여 담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투사였다. 의회 앞에 선 루터의 담대한 증언루터가 의회에 출두하는 날, 의회로 향하는 모든 길은 로마의 권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이 용감한 수도사를 보기 위해 열광하는 군중들로 메워졌다. 루터가 의회의 재판관 앞에 서려고 하는 순간, 한 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만일 그대가 하는 일이 바르고, 거기에 대하여 그대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D’Aubigne, b.7, ch.8). 루터는 황제의 보좌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온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드디어 루터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곁에 쌓아둔 루터의 저서들을 가리키며 그 저서가 루터 자신이 것인지, 그리고 그 저서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시인한 다음, 그 내용들을 취소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대답을 해야 하므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할 것이니 잠시 유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대담하고 비타협적인 성격과는 무엇인가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고 성령의 감동이었다. 하루의 시간을 얻게 된 루터는 많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지나고, 이튿날 답변을 위하여 회의장에 나왔다. 고관대작들 앞에 선 루터는 아주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어제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서적들 중, 첫째 부류는 신앙과 선행에 대하여 기록한 것인데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취소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니 취소할 수 없다. 둘째 부류는, 교황권과 로마교회의 부패와 폐단을 폭로하는 것인데, 이런 저서의 내용들을 취소하거나 그 책들을 폐기하는 것은, 로마교의 악습과 악행을 더욱 조장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셋째 부류의 책들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악폐들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개인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좀 과격하고 공격적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취소할 경우 진리의 원수들이 더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취소할 수 없다. 그의 대적들이 가부간에 좀 더 명확한 입장을 요청하였을 때 개혁자 루터는 대답하였다.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서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또한 본인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하여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Stand. ‘저의 신조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라는 의미). 저는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D’Aubigne, b.7, ch.8). 온 회중은 성경에 기초한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와 답변에 대하여 경탄해마지 않았다.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한 황제와 루터의 죽음로마의 황제 카알 5세는 루터의 답변을 들으면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선조들의 모본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노라.” 성경에서 벗어난 선조들의 풍습과 부패와 타락과 오류들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정이었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는 주권자들은 온 시대를 통하여 늘 이와 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무엇이 정의인지 알면서도 불의의 세력에 예수님을 내어 주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던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분위기와 정서와 여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누(累)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정한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려면, 권세를 잡은 주권자들이 올바른 정신과 정의감을 가지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요시야 왕이 율법서를 들고 개혁을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세웠던 여호사밧에 의하여 유다 나라의 개혁이 신속히 이루어졌던 것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정의를 세우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의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을 통해서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의회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체포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산성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끌려가 비밀스러운 집에 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를 보호하려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만들어낸 조치였다. 오랫동안 루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루터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루터는 그 조용한 산성에서 소책자들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개혁의 불길을 이어갔고, 특히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인들의 신앙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1546년 그의 만년에 출생지 아이슬레벤으로 만스펠트 백작의 상속분쟁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그 해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아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안장되었다. 2002년 미국에서 제작된 루터 영화에 붙여진 “그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제목이 그의 업적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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