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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0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0. 복음성가로 병들어가는 교회 예배 기독교 신앙은 비교적 지성적이면서도 영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그런데 요즈음 기독교의 예배가 다분히 감성적인 분위기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아서, 의식 있는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에 큰 부담과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려지는 예배에 있어서 ‘감정’ 혹은 ‘감동’이라는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라면 적극 장려할 일이고 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들이 급속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어서 그 영향이 교회의 성도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음악의 영향과 감화력목사의 50분 설교가 마친 다음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아멘’ 소리 보다 성가대의 5분 찬양 후에 나오는 ‘아멘’ 소리가 더 크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목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가사도 없이 연주되는 악기의 소리만 들은 후에도 청중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다. 그만큼 음악이 미치는 감동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적 마귀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음악을 통해서 성도들의 심령과 삶을 오도(誤導)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된 록(Rock) 음악은 보컬 리드와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이렇게 네 가지로 짜여진 팀이 강렬한 소리와 함께 특유의 강한 비트로 젊음의 기쁨과 욕구 불만 등 감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세속 음악이다. 그 후 레게(Reggae), 힙합(Hip-hop), 랩(Rap) 등의 음악이 전 세계의 청소년들의 정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그들의 감정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음악이 그러한 음악 장르에 영향을 받으면서 교회 음악 고유의 리듬과 박자가 서서히 사라지고, 가사만 기독교적 용어일 뿐, 음악의 형태와 분위기는 세속 음악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성가는 록음악을 불러들이는 문(?)경건한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타락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여 서서히 영성이 약해지고 신앙적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 조금씩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는 집단도 마찬가지다. 모든 타락과 세속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안에 록 뮤직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소위 복음성가, 혹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라고 하는 음악이 교회에 유입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록 음악의 요소인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이 교회 단상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1970년 이후로 세계로 확산된 복음성가는, 예배에 사용되는 전례용 음악인 찬송가와 다른, 단지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대중음악이다. 그러니까 복음성가는, 대중음악이라는 그릇에 기독교 메시지를 담아 놓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노래에는 기본적으로 ‘곡조’가 있고 ‘가사’가 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더 강한 영향력이 있는가? 아마도 ‘곡조’일 것이다. 아무런 가사 없이 악기로 하는 연주만 들어도 감동이 깊이 오는 것을 보면, 곡조에 포함된 리듬이나 박자 등이 사람의 감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노래의 가사는 지성에 영향을 주고 곡조는 감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가사가 아무리 기독교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곡조가 세속적이면 육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교회에 깊숙이 들어온 크리스챤 록이제는 기독교 음악의 장르 중에 ‘크리스챤 록’(Christian Rock)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상당히 세속화된 복음성가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크게 자리를 잡고 있다. 기독교 청년들이 주관하는 축제에 록 음악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점점 광란의 지경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집회에 참석한 후에 과연 성령 충만한 평안과 기쁨과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한 청년은 그러한 집회에 참석한 다음, “그 수련회는 음악이 나에게 주는 흥분이 독약임을 깊이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교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새 신자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듣고 다음과 같이 그 느낌을 표현하였다. “제가 교회에 들어와서 가장 놀란 사실은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나 들었던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그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예전에 술 마시고 춤을 추면서 가졌던 느낌과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복음성가(福音聖歌)’라는 용어에는 문제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복음을 담은 거룩한 노래,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그 복음성가의 가사를 록 음악의 선율, 리듬, 화음, 악기, 연주법 속에 대입하여 부르면 결코 성가(聖歌)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탄의 영이 이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감성을 가진 인간은 듣는 음악의 성격에 따라서 심장 박동과 혈압, 신경계, 소화, 근육, 인체의 호르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사탄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육체적 원리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타락과 멸망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복음성가, 무엇이 문제인가요즈음 복음성가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록 음악은 비트가 강한 것으로 이러한 음악을 오래 듣게 되면 우리 신체의 근육을 약화시킨다는 결과가 있다. 이러한 록 음악의 생활화는 청소년들의 심성을 변화시켜 인내심이 없어지게 하거나 정서 불안의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 크리스천 록 음악의 특성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과도한 싱코페이션(당김음)의 사용이다. 이는 악곡의 변화와 긴장감의 증대를 위해서 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쾌감이 있다고 과도히 사용한다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에 효과적이며, 반응이 빨라 말씀보다, 성령의 일하심보다 능동적이어서 은혜의 경험이 감정적이고 인간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일시적이어서 지속성이 없거나 약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옥성호,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0), 326,327.> 음률과 템포와 악기가 록앤롤 스타일의 음악이면 두뇌에서는 성적 충동과 마약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에, 그러한 음악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은 교회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는 찬송가의 곡조나 가사에 흥미를 잃게 된다. 더 나아가 영적인 사물에 대한 감지 능력이 약화되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록 음악에 익숙한 청소년들을 교회로 인도하거나 교회에 머물러 있도록 하려면 교회에서 그런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합리화, 혹은 정당화 한다. 그러나, 결과는 두 가지일 뿐이다. 그런 청소년들은 교회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교회의 분위기를 세속화시켜 평균 영적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경건한 예배 분위기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는 점진적으로 세속적인 감흥이 발동하고 말씀의 영성과 능력이 서서히 고갈된다. 이제 교회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회가 대중 음악에 물들어 세속화되는 것을 계속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판단하여 어떤 과감한 조치를 내려 이제부터라도 변화와 개혁을 시도할 것인가?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0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9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9. 이단을 너무 쉽게 만드는 한국교회의 경솔함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단’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이 단어는 매우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가볍게 경솔하게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교회처럼 이단을 쉽게 만들어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박영관 씨가 이단이라고 정한 개인이 118명, 예장통합 총회 사이비이단문제상담소가 만들어 낸 이단이 73명, 한기총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가 결정한 이단이 42명이다. 이 외에도 소위 이단 감별사들과 이단연구단체에서 생산해 낸 이단도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들을 가려내는 일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는 도(道)를 넘어도 한참 넘었고, 마치 상거래 하듯이 쉽게 이단을 만들기도 하고 풀기도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어서 교회의 장래가 심히 우려된다. 이에 한국교회의 이단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1)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은 이단 문제와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이단 감별사마다, 이단연구소마다 이단을 정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고 통일성과 객관성이 없다. ‘이단’이란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만 규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설교 중에 말실수 한 것 몇 마디 가지고도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이단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니까 눈금이 일정하지 않은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평가하여 이단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장로교 단체가 주최한 이단 사이비 세미나의 한 초청 강사는 ‘이단의 확인법’을 강의하면서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지 않거나 유아세례를 부인하면 이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장로교 중심의 기준이다. 침례교회나 그리스도교회 등 세계 개신교(新敎)의 절반 정도는 사도신경이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초청강사의 기준에 의하면 개신교의 절반 정도는 이단인 셈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신조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개인이 이단이다. 그러므로 이단을 규정할 때에, 가장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객관적 기준은 성경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2) 이단 규정은 전문성을 가진 신학자들이 해야 한다한국교회에서는 대개 각 교단의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 아니면, 소위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정하여 발표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면면(面面)을 보면 대체로 신학적으로 전문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상당한 비난과 저항과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감수할만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단을 가리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단에서 나와 정통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단을 비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단을 제대로 연구하여 규정하려면, 그리고 그 결과들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소위 정통교회라고 하는 각 교단 신학대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협의체를 구성하여 이단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3) 이단을 규정하는 과정과 절차에도 객관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에서 이단을 규정하는 절차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너무나 형식적이고 졸속으로 처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 교단이 모 교회나 개인을 이단으로 정죄할 경우, 그 대상에 대하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연구하여 총회에 상정을 하면, 총회 대표자들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진지한 토의도 없이 결의해 버린다. 그 순간에 또 하나의 이단이 탄생하여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의 치명적인 문제는 당사자와는 한 마디 대화나 변명의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를 한다는 것이다. 종교암흑시대에도 종교재판을 받을 만한 혐의가 발생하면 당사자를 불러다가 고문을 하면서라도 본인의 의사를 묻고 혐의를 인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단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하여 당사자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이고 부실한 연구 결과물을 가지고 이단으로 규정한다. 아직 이단으로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단이라고 확정하여 이단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모순이다. 법정에도 범죄 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의심받는 순간부터 이단으로 단정해 버린다. 이것은 상식과 도리를 벗어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다. (4)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 그리고 힘의 논리성경은 하나인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 종파는 수천 개에 달한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각 교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다.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한 것인가? 뚜렷한 기준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정하는 양상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이 어떤 한 교파가 자(自) 교파의 신조를 기준으로 하여 신조를 달리하는 타(他) 교파를 이단으로 정했을 경우에 그것을 상대적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상대적 이단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이단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힘없는 소수가 이단이 되고 힘 있는 다수가 정통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단을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가톨릭을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할 무렵, 이미 거대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세력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권력을 이용하여 격렬한 핍박을 가하였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절대적 이단을 가려낸다면, 가톨릭이 분명한 이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초기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당은 그 당시 유대 사회나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스러운 교리를 전하는 이단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는 누명을 썼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동안 ‘이단’이라는 말에는 힘의 논리가 작용해온 것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기준으로 가려져야 한다. (5) 이단 판별 기준 예시(例示)이단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미국의 행크 박사(CRI : Chritian Research Iinstitute 회장)는, 이단을 규정할 때에는 성경의 본질적인 문제와 비본질적인 문제를 구별하여, 본질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으면 이단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하면서, 다음의 8가지 본질적인 대목을 제시한 바 있다.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가. ② 인간이 태어날 부터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③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하는가. ④ 삼위일체를 믿는가. 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가. ⑥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가. ⑦ 지구가 재창조 될 것을 믿는가. ⑧ 예수 재림으로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종말론을 믿는가. 상당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불가피하게 이단을 가려낼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 이단을 규정하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다음의 성경절들을 염두에 두고 심사숙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5-1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8
    38. 성서적 종말신앙의 부활이 필요하다 현재 기독교계 안에 상존하고 있는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종말’ 사상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종말’이라는 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역사를 세 단어로 압축하여 설명하였다. ‘창조’(Generation, 창조로 인류의 세대가 시작되었다), ‘타락’(De-generat ion, 그 세대가 타락하였다), ‘회복’(Re-generation, 타락한 세대가 다시 회복 된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역사는 ‘회복의 역사’이다. 죄인이 의인으로 회복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한 상태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고, 죄로 인해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회복되는 마지막 순간을 인류의 역사의 종말, 혹은 하나님의 왕국의 시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종말 사상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 전체는 두 개의 큰 약속이다. 첫 번째 약속의 책 구약은,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멸망당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을 따라서, 그리고 구약의 수많은 구절 속에 예언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성취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일이라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늘날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연대가 그분의 오심을 중심으로 ‘주전’(BC :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주후’(AD : Anno Domini, 라틴어 주님의 연대)로 나누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인물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무죄(無罪)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다. 또 다른 위대한 약속, “내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남겨 놓고 가셨다. 두 번째 약속의 책인 신약에는 예수 재림의 약속과 관련된 구절이 300회 이상 나온다. 그러니까 구약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시겠다는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악 세상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내용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구약에 기록된 예수 초림의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신약의 재림 약속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 재림의 시간이 곧 인류 역사의 종말이다. 재림 시에 일어날 사건들예수 재림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절은 요한복음 14장 1~3절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이 시점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의 날”(욜 3:14), “마지막 날”(요 6:40), “심판 날”(벧후 2:9), “진노의 날”(계 6:9),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등 여러 가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 재림 시에 이 지구상에 일어날 현상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 날이 지구 종말의 시간이 될 것을 확실하게 예감할 수 있다.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벧후 3:10)날 것이다. 계시록에는 그 날에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계 6:14)워 질 것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승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고, 그 후로는 “항상 주와 함께 있”(살전 4:16,17)게 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살후 1:8,9)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의 순간은 천지가 개벽하면서 온 인류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운명의 시간이 된다. 역사적 종말과 개인의 종말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예수 재림의 순간을 역사적 종말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은 개인의 종말이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예수의 재림 시에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종말은 곧 역사의 종말이기도 하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는, 그 수술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수술실에 들어갈 때의 시간 개념으로 연결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종말 개념은 개인의 생명이 끝나는 종말과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종말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질문할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2, 35, 37). 여기에서 우리가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긴 역사에 비해서 한 인간의 삶은 매우 짧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 삶의 연륜과 경험을 가지고 예수의 재림이 더디다거나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는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신앙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막 13:37)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제자들 세대에는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그러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살다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무덤에서 잠자던 의인의 부활로 연결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살도록 교훈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에, 재림이라는 미래의 사건을 현재적 시제로 보는 지혜와 신앙이 필요하다. “내가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는 재림의 소망이 오늘 나의 현재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미래에 있을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재림이 아니라, 그 재림의 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진실하게,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서적 종말 신앙이다. 베드로는 예수 재림에 관하여 설교한 다음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는 질문과 함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고 권면하였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거의 사라진, 예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하고 준비하라는 메시지의 부활이 시급하다. 예수의 초림 맞이에 실패한 유대인의 운명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5-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7
    37. 기복신앙으로 천국의 방향을 잃은 한국교회어느 지역이나 국가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가면, 이전부터 이미 토착화 되어 있는 토속신앙과 융합을 이루어 본래의 종교 이념이나 형태와는 색깔이 다른 제 3의 종교가 만들어진다.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기독교 역시 한민족의 토속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샤머니즘의 기복주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이유 중의 하나도, 기독교 본래의 정신인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이 발전되고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신앙인들 각자에게 있는 것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여 성도들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목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배양된 샤머니즘적 기독교샤머니즘이란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부터 인간의 삶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내려 온 원시종교의 한 형태이다. 심성이 연약하고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나 사물에 대하여,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절대신(神)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종의 신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 신앙은 주로 현실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위험이나 불안이나 재난 등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더 나아가 삶에 필요한 것들을 신의 손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생존의 본능과 관련을 갖는다. 반면, 기독교는 매우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치밀한 질서와 이론과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종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경배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막연한 신(神)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통해서 계시된 구체화된 존재이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경우에 다양한 형태로 인간들에게 현현(顯現)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교제하고 소통하면서 궁극적인 구원의 도(道)와 현실적인 삶의 원리를 제시한 지성적 존재이다. 그리고 현재의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복에 대하여 언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현실적인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주문을 외우듯이 반복하여 간구하면 그 마음의 간절함이나 성의를 보고 내려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얻어지는 결과적인 선물이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5).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원리가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언약의 말씀을 잘 깨닫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그 열매로 나타나는 올바른 행실과 성품의 변화를 가르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적 번영과 복 받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강조하므로 샤머니즘적 기복 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와 넓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기독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것도 오랜 세월동안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던 샤머니즘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샤머니즘에서 사용하는 ‘주문’(呪文)이 기독교의 ‘기도’와 접목되어 샤머니즘적 기독교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의 기능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이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이 성경절에서 “내 이름으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 혹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라는 의미와 함께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뜻대로” 구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사람의 의식주에 대하여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6장의 내용도 그 핵심에는 33절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에 먼저 구해야 할 “그의 나라와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도와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성경절의 의미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인간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조건 아무 것이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기적으로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복은 현재적 삶에 필요한 물질적 복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복신앙에서 복음신앙으로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현실 생활에서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참된 복음의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복음의 진수는 죄인이 예수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로 죄를 용서받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극복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서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복을 누리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계명들은 사람의 건강과 행복과 평안과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이 왕에게 한 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으실지라도) 왕이 세운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겠다는 이 단호한 결심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모든 백성에게 필요한 절대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추구하는 복은 너무나도 물질적이며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다. 심지어는 복음 전도와 성품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능력으로 내려주신 성령의 선물도, 치유의 은사, 방언의 은사, 귀신 쫓는 은사 등 왜곡된 방향으로 치우쳐 있어, 정작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와 같은 은사는 희귀하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도래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현실적인 구원자를 찾다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참 메시야를 거절하였다. 신약에 예언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이 현실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기복 신앙에 눈이 멀어 천국의 방향을 상실하고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는 일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4-26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6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6. 개신교와 천주교, 하나 될 수 있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 ‘개신교와 천주교가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 일치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종교개혁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이 현상을 보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개신교의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이 천주교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천주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천주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천주교가 ‘종교의 얼굴을 가진 국가인가?’ 아니면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종교인가?’ 라는 이 두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아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천주교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국가이다. 천주교는 지금 엄연히 지구상의 한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다. 천주교 국가로서의 바티칸은 이태리 로마의 도심에 0.44㎢를 차지하고 있는 초미니 국가이며 인구는 늘 1000명 이하이다. 그러나 177개국과 외교적 수교 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하고 있는 범세계적인 국가이다. 이 지구상에 천주교의 바티칸 외에는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종교는 없다. 다만 몇 나라들이 종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을 뿐이다.천주교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천주교 탄생은 서기 4세기 초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가 당시 경쟁자 멕센시우스와 전투 대치 중에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속에서 본 그리스도(XPIΣTOS, 크리스토스) 이름의 첫 두 글자 X(키)와 P(로)를 겹쳐서 군호를 만든 다음, 그것을 군인들의 철모와 방패에 써 붙이도록 하여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콘스탄틴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200년 이상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던 기독교를 향하여 자유를 선포하고(서기 313년 밀란칙령) 성직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본인도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면서 기독교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국가적인 분위기와 함께 당시 로마의 또 다른 거대한 종교집단이었던 미스라(태양신교) 종교의 지도자들도 신도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태양신 종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원래의 기독교 분위기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큰 비율을 이루고,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전에 이교도일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오류와 타락이 홍수처럼 교회에 밀려들었다.”(Wharey’s Church History, p. 54).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타락하고 배도한 기독교의 풍토에서 발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교리나 풍습이 교회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의 신조라고 할 수 있는 미사나 화체설, 고행, 고해성사, 연옥설, 일요예배, 마리아 숭배, 등 이러한 비성경적인 모든 교리나 풍습들은 이방종교나 헬라 철학 사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천주교는 기독교 보다 불교에 더 가깝다. 두 종교의 성직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녀와 여승이 있다. 묵주가 있고 염주가 있다. 향을 피우고 제사를 드린다. 돌이나 나무나 철로 형상을 만들어 경배한다. 개신교회가 이러한 천주교와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고후 6:15)할 수 있겠는가? 현재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1968년 이래로 천주교는 소위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신교를 천주교와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고, 현재 개신교와 천주교의 일치 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517년 루터에 의해서 천주교와의 사이에서 촉발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서 칭의(Justification) 교리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1999년에 양측이 ‘의화(義化)교리’에 합의함으로 일단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 7월 한국의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 세계감리교협의회가 ‘의화(義化)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동참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천주교가 자신들의 일부 교리를 수정하고 타협하면서 개신교와의 일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이에 발맞추어 2014년 5월 2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 교단들이 서울시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의 활성과 증진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가칭, 한국신앙직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 직제협의회 안에는 예수교 장로회 통합, 기독교 대한 감리회, 한국기독교 장로회, 한국 구세군, 대한 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 기독교 한국 루터회, 한국교회연합회 등 유수한 교단과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다.또한, 세계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통합(흡수)운동(“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에 개신교를 대표하는 미국 내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합선교회(Cooperative Evangelism), 빌리그래함 협회(Billy Graham Association), 트리니티 방송 네트워크(The Trinity Broadcasting Network), 약속이행자들(Promise Keepers), 이해와 협력위원회(한국) 등 유력한 개신교 단체들이 개신교를 흡수 통합하려는 천주교의 강력한 추진력에 동조하거나 굴복하고 있기 때문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통합은 시간이 문제일 뿐 이미 기울어진 분위기인 것 같다. 더 이상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stant, 저항)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 채 종속되어 가고 이 현실을 보면, 종교개혁 500년을 지나면서 개혁의 기운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든다. “개신교의 죽음”(The death of Protestantism)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향후 로마 가톨릭의 목표는 무엇인가오늘날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교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인식 중의 하나는, 가톨릭은 단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국가라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천주교는 바티칸이라는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국가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배후 조정하는 막강한 세력이 바로 제수이트(예수회)이다. “그들은 지금 막강한 권력, 세계적인 조직망, 정밀한 정보, 막대한 금력을 가지고 마치 첩보 기관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전략을 사용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장악하고 세계의 종교들을 가톨릭 안에 묶는 일을 줄기차게 진행하고 있다.”(데비드 차, 마지막 신호, 225). 이렇게 세계의 종교들을 통합하고 나면, 정치적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가톨릭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거대한 부채 국가인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열강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세계적인 시간 주간 잡지 타임(TIME)은, 2015년 9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를 방문하여 이루어 놓은 성과를 평가하면서 9월 26일자로 발행된 잡지에 교황을 표지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문제는 표지의 타이틀이다. 「The New Roman Empire」(신 로마제국)이라는 제목과 함께 “The Global Reach of Pope Francis”(교황 프란시스의 세계적 성과)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다. 우리는 이 타이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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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4-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35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5.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는 설교단의 허약함 설교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바 되었다. ‘믿음’이라는 것도 단지 예수를 통해서 죄의 사유함을 얻고 그 결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므로 설교자의 중대한 사명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설교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설교자 자신의 의견이나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설명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이나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풀어서 가르친다. 성경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거나 상실되면 그 ‘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는 ‘사람의 말’이 되어 버린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 강단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목사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예수가 드러나야 하고 그분의 말씀이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청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예수 대신, 정치 사회 이야기, 목사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들, 현실 생활에 얽힌 잡다한 설화들이 나누어지고 있다. 때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빙자하여 그 말씀을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삼아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청중들이 설교자의 말을 수용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2004년 8월 18일 기독교회관에서 「기독교사상」이 주관하여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여기에서 지적된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은 “신학의 부재와 교회중심론 탓에 교회는 역사의식, 즉 설교의 예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학의 부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이 되겠지만, 설교자들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말씀의 부분적인 내용들을 다루기 때문에 성경의 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전달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교회를 출입하며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게 된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외치며 예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목사들이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망하게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호 4:6)한다는 이 말씀의 일차적인 책임자는 강단에서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목회자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에 있어서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그 동안 종종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하여 강의한 경험과 자신이 추구하던 부분들을 토대로 목회자와 설교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 놓는다. 설교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가짐 (01) 설교는 목회에 있어서 생명줄과 같은 것이고, 교회 차원에서는 심장과 같은 것이다. 설교에 능력이 있고 영성이 있으면 교회에 생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설교에 영성과 능력이 없고 내용이 빈약하면 교회는 활력을 잃게 된다. 교회 성장은 목회자의 설교에 영향을 받는다. (02)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에 만족할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와 보라’는 초청을 하게 될 것이고 선교 정신이 살아나게 된다. 설교의 흐름이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03) 설교는 목회자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영감을 받아야 한다. (04) 설교 준비는 펌프의 마중물과 같은 것이다. 설교는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생활 속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말씀과 삶(지하수)을 끄집어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 목사의 인품과 신앙과 영성이 설교의 절반이다. (05) 설교의 근원은 철저히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설교는 인간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원은 반드시 성경에서 나와야 하며, 그 주어진 말씀을 채색하고 꾸미기 위하여 인간적인 언어의 기교나 미사여구를 삼갈 것이다. (06) 설교를 전달하는 언어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며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설교가 준비되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빈약하면 설교의 효과는 매우 허약해진다. 힘 있는 음성, 정확한 발음, 강약고저의 조화, 적당한 속도, 적절한 예화나 비유, 확신에 찬 모습 등이 필요하다. (07)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상시 설교자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의 삶이 백성들에게 감동이 되고 모본이 되면 청중은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설교에 동화되고 감동을 받는다. 직설적으로 견책하는 메시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08) 설교를 할 때에 설교자도 그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으로 인식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분’이라는 표현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 명령형(하십시오) 보다는 청유형(합시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09) 설교 내용은 지정의(知情意)의 단계를 포함하는 것이 좋다. 지적인 깨달음을 주고(知) 정서에 감동을 주고(情)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意)해야 한다. (10) 설교를 위하여 단상에 오르기 전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교통을 나누는 것은 영감적인 설교에 필수 요소이다. 말씀의 능력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목사는 죄로 인해 죽을 뻔한 사람을 말씀을 통해서 살게 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교회에 나와서 살 뻔한 사람들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할 때에는 말씀에 담겨져 있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여 성도들을 영육간에 치유시키고자 하는 치열한 투쟁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히 4:12)기 때문에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죄인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심령 뿐만 아니라 삶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큰 골짜기에 산적해 있는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겔 37:10)가 되었던 그 역사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일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성장용 설교가 아닌 영혼을 살게 하는 생명 있는 설교가 오늘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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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30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4
    34. 한국교회 목사의 자질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이 지구상에 한국만큼 목사가 되기 쉬운 나라가 있을까? 한국처럼 교단 분열이 심하고 이에 따른 목사 안수와 그 수준 또한 천태만상이다.‘의사’가 사람의 일시적인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면 ‘목사’는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성업(聖業)이다. 목사는 한 개인의 현실적인 생활과 미래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사는 인간의 구원과 영생의 도리가 설명되어 있는 성경의 진리와 교리와 원리들을 올바르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 통찰하여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마 15:14)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겨우 신구약 성경의 장절이나 찾고 기도할 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버젓이 … 목사들로 활동하고 있”(강춘오, 변환기의 한국교회, 124)어서 한국 교회의 미래가 매우 염려된다. 한국교회의 신학교육과 목사 안수 실태한국교회의 목사 배출이 부실한 시스템을 갖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 전쟁 이후 60~90년대에 이르는 거의 40여년의 기간 동안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목사의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고, 둘째로는 교단분열이 심화되어 그 여파로 갈라져 나온 교단들이 자기들 교회의 목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한 신학교를 급조하여 운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80년대 말에 5만 명에 불과하던 목사의 수가 현재 약 10만명이 훨씬 넘고 있으니, 한국교회가 얼마나 쉽게 목사를 만들어 냈는지, 그 목회현장의 실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교회의 사찰집사가 어느 날 목사가 되어 있다. 한 때 기도원 원장, 가정 제단 제단지기, 교회의 집사 혹은 권사로 봉사하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고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목사가 되었는지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겠지만, 상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지금 대략 360개의 교단이 있는데, 정식으로 국가의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은 50여개 정도된다. 그 중에서도 절반 정도는 대교단 소속이다. 그렇다면, 360개의 교단 중에 정상적인 신학교육 체계를 갖춘 교단은 25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약 330여개의 교단은 무인가 신학교를 통해서 목사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커리큘럼에 의한 신학교육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고 학교가 요구하는 등록금만 내고 졸업장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강춘오, 상동, 131). 최악의 경우는 교인도 몇 명 되지 않는 개 교회가 신학교 간판을 걸고 신학생을 모집하여,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수진이 부실한 교육을 제공한 다음 목사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목사의 평균 자질은 저하되고 사회로부터 경시당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기독교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를 지도하면, 우격다짐으로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고 기복신앙을 강조하면서 미신적인 개신교 신앙을 만들어 전파할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지성인들이 목사의 수준에 실망하여, 평균 이상의 교육수준이 있고 자격을 갖춘 신부들을 찾아서 천주교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낭설이 아니다. 교단분열과 명예욕, 그리고 무책임한 양심이미 언급한대로 한국의 개신교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기도 쉽고, 해체하기도 쉽다. 정당한 명분도 뚜렷한 원칙도 없는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교세를 이루고 있고 편견의 여지가 거의 없는 장로교의 분열이 가장 심각한 상태이다. 현재 장로교 교단은 대략 300개로 헤아려 진다. 일단 모교단에서 분리되어 새 교단을 설립하면, 정식 인가된 학교 설립은 조건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자체 교단 내에서 통용할 수 있는 신학교를 급조하여 운영할 수밖에 없다. “몇 십개 몇 백개 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교단을 만들고 신학교 간판을 달고 목사 안수를 한다.”(강춘오, 상동, 110). 이러한 패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장로교 군소교단의 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폐단을 만들어내는 교단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주된 요인은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인 명예욕과 권세욕,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간의 불화와 불목(不睦)이다. 교단 총회장 선거에서 당선이 안 되면, 자신을 지지하는 교회들을 모아서 별도의 교단을 만들어 총회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회 경력 중에 명예로운 직함을 하나 더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되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 교단에서 감투가 떨어지면 다른 교단으로 옮겨가 총회 임원 감투를 얻어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인사들”(강춘오, 상동, 26)이 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교단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현상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교단 분열이 계속되는 한 부실한 무인가 신학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의 평균 자질은 낮아지는 것이다. 신학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성경 중심의 복음적인 설교를 할 만한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과 영생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과 손실을 가져다주는 무책임한 양심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대책이 있는가이와 같이 분별없이 목사를 양산(量産)해 내는 한국 개신교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고 목사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지만, 막상 그 방법이나 대책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말해서 그저 막연할 뿐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이 목사 안수 문제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그 해법이 묘연하다. (1) 우선 교단 분열을 막아야 한다- 예수의 12 제자들 중 11명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제사를 삼으셨고, 1명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천(自薦)하였다. 결과를 보면 자천한 1명, 가룟 유다만 실패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성공적인 제자가 되었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예수 정신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특징은 ‘겸손’이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섬기는 종으로 세상에 오셨다. 총회장 선거에서 자천(自薦)하여 금품을 사용하면서까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교단의 분열이나 교회의 분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교회의 직책과 직분은 다른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2) 대교단의 희생과 협력이 필요하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목사를 양성하는 법적인 절차를 통일할 수 없다면, 현재 300여개 교단이 난립하여 제 각각 목회자들을 배출해 놓은 이 상황에서, 대교단들이 협력하여 목회자 재교육 과정을 설정하고 일단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목회를 하고 있는 장로교 목사들이라도 정규적으로 보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3) 공동의 협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적어도 장로교라는 명칭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교단들만이라도 다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목회자 양성 과정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추진하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지금 보다 더 심각하게 기독교를 경시하고 외면하기 전에 실력 있고 능력 있고 인품을 제대로 갖춘 건전한 목회자 양성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22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3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3. 예수님이 대형교회를 좋아하실까 정확한 통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 100대 교회의 50%는 한국에 있다고 한다. 기뻐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교회는 매우 특이한 형태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는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가 많다. 성경 중심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대형교회는 성서적인가?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한국에 계신다면, 대형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행 2:46, 47)는 것이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다. 지금의 대형교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다. 물론 초기 교회와 현대 교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과 기능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성도들이 모여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헤어지는 장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용서하는 연습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회가 대형화 될수록 교회 본래의 기능은 약화된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대형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1. 건실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고 있다(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리고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몸으로 비유된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면, 성도들은 몸의 각 지체에 해당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와 일체감을 갖고 상호 작용을 하면서 몸을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의 손님처럼 왔다가 교회를 떠난다.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 큰 교회를 이끌고 운영해 나간다. 가정으로 말하자면 자녀들이 너무 많아 부모가 돌 볼 겨를이 없어 아이들이 방치된 상태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 2. 죄악을 징계하고 치리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의 다양한 기능 중의 하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악습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교회도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그칠 사이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사회에서는 주변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죄인이 있으면 재판을 하고 감옥에 넣어 사회와 격리시킨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죄인들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물론 징계와 치리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여 징계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에는 최종적으로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되어 있으나, 교인수가 많을수록 치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형교회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3. 개인 우상화로 발전될 가능성이 많다. -교인수가 많을수록 당회장은 교인들과의 개별적인 접촉이 어려워지고 목사의 권한은 더욱 비대해진다. 목사도 죄인의 속성을 가진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되면 교만해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거대한 교회당 중심에서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하는 목사를 멀리서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목사는 다소간 신비스러운 존재로 느껴진다. 목사도 어떤 면에서 자신이 그러한 존재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마치 목사가 주인처럼 행세하고 예수의 섬기는 정신을 망각한 채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야말로 교인들의 우상처럼 존재하며 권세를 부리게 된다. 4. 교회가 상업화될 소지가 충분히 있다.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교회가 대형화되면 소위 말하는 상거래의 규모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구조를 이용하여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도 늘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성전에서도 그러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상인들과 제사장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서로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혹자는, 교회 세습도 이 먹이사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대형교회를 지도하는 청렴하고 경건한 목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인품과 신앙과 능력이 교회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한 것이다. 지금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신다면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고 하시지 않았을까? 5. 재정문제로 인한 불화의 소지가 상존한다. -일반적으로 대형교회의 특징은 사람이 많고 돈이 많다는 것이다. 돈과 사람이 얽히면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 많은 헌금을 지출하는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무슨 용도로 그 재정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늘 문제의 핵심이다. 물론 회의체가 있고 절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불화와 분쟁과 비리의 소지는 상존한다. 대형교회가 헌금의 상당부분을 주변의 불행하고 불쌍한 이웃들이나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했다면, 아마도 교회의 이미지는 현재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 규모와 현상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초대형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고 있다. 때로는 그 재정의 크기와 용도가 불의하게 처리되어 발생하는 문제도 비일비재하다. 교회와 목회자 모두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급기야는 교회의 그 재산권과 함께 교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도 하게 된다. 6.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되기 어렵다. -성경은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목자의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성경 시대의 목자는 양과 생명을 나누는 밀접한 관계이다. 양의 수가 많아도 목자는 양을 개별적으로 알고 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요 10:2) 낸다. 참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요 10:14).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대형교회가 되면 과연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가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요 10:11)릴 각오가 되어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목사가 늘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살펴야 할 주제가 있다면, ‘혹시 내가 내 양을 잘 모르는 삯군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7. 교회에 불충실한 교인들이 양산(量産)된다.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직임과 직분을 가지고 충실하게 일을 하면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교적 사명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기능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엡 4:12)는 것이다.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성도들 각자가 이러한 선교적 사명과 직분을 가지고 충실하게 봉사하며 전도하는 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형교회 성도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으면 관리가 어려워지고 조직에 대한 개별적 충성도는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얼마 전 신문(조선, 2017.11.24.)에 500년 전 루터와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를 각색한 기사가 있었다. 루터가 교황에게 말했다. “교회는 로마 성 베드로 성전을 짓느라 교회의 분열이라는 값을 너무나 비싸게 치렀습니다.” 교황이 대답한다. “저도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태도는 거대한 건축이 아닌 이웃을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옛날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성당 건물과 오늘날 개신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0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2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2. 돈과 명예에 병들어가는 목회자들 인간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는 ‘생명’과 ‘물질’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있고, 그 물질을 획득하고 확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돈과 관련이 있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돈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돈 때문에 자살도 하고,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돈 때문에 이혼도 한다. 심지어는 정치에서도 대부분의 정책이 경제와 돈 문제에 관련을 갖는다. 종교 단체에서조차 돈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목사들도 돈 문제로 법정에 서서 세상의 재판을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목회자와 돈에 대한 성경의 원칙교회에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교회마다 이 헌금과 교회의 재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거의 모든 경우에 교회 재정 문제의 핵심에는 목회자가 관련되어 있다. 목회자가 돈을 탐하거나 돈에 욕심을 내면 그 자신과 그가 담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돈이나 재물에 대하여 시종일관 초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 목회자에 해당하는 레위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재산을 분배받지 않았다.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경쟁하며 투쟁하며 먹고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열 한 지파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분부하셨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레위 지파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업이 번성하여 부요하게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저 굶주리지 않고 평범하게 먹고 사는 정도의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나 신약시대 이후의 목회자들에게 바라시는 뜻이다. 돈 때문에 병드는 한국교회사람이 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교회 사업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잘 못 사용하면 그것이 재난이 되고 재앙이 된다.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시험에 들어 본인도 수욕을 당하고 교회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목회자가 재물에 치중하게 되면 성경의 용어로 ‘목자’가 아니라 ‘삯군’으로 전락하게 된다.그러한 삯군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다보면 교회는 병들게 되고 성도들의 신앙은 피폐하게 된다. 물욕을 극복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주저함 없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 실적에의해서 교인들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목회자를 바라보는 신도들은 실망하여 분노하며 목사와 투쟁하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결국 구원받는 성도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교회가 일반적인 사교(社交) 집단으로 전락하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황량한 교회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청렴결백한 모습으로 적절한 사례비 외에는 사양을 하거나 아니면 선교지에 후원하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목회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고 비위(非違)나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목회자들은 언제나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급속히 신뢰를 상실하며 선교의 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세습도 그 핵심에는 재산에 대한 목회자의 탐욕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목회자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3대 덫이 있다면 ‘돈’과 ‘여자’와 ‘명예’일 것이다. 이 중에서 돈과 여자에 관련된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은 곧 정죄를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명예’를 탐하고 추구하는 것은 좀처럼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명예라는 것의 바탕에는 소위 ‘자만심’과 ‘교만심’이라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에서 매우 엄격하게 정죄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이 세상에 최초로 악의 씨를 뿌리기 시작한 루스벨도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명예를 탐하는 교만심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심지어는, 인류의 조상 하와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창 3:5) 된다는 말,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잠 16:5)신다. 범 교단적인 큰 행사를 하게 되면, 일일이 살펴보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수많은 임원들의 이름들이 광고지면을 가득 채운다. 각각 무슨 역할들을 하는지 잘 모를 일이다. 목사들의 명함에는 별로 의미도 없고 뚜렷한 역할도 없는 직함들이 즐비하다. 더욱이 영어를 거의 못하는 미국산 박사학위 소지자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총회장 선거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정상적인 일처럼 벌어진다. 중상모략, 흑색선전, 금품살포 등 세상의 눈으로 보아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난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모습은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이하고 이질적이다.목회자의 모델–목자장 예수 그리스도루스벨의 교만심의 결과로 초래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아주 가난하셨고 겸손하셨고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셨다.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은 사탄과는 반대되는 정신, 곧 “하나님과 동등됨”(빌 2:6)을 포기하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셔서, 한평생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시다가 마침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심으로 철저한 희생적 삶을 사셨다.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를 지도하고 성도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목사들이 본 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 땅에서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교회를 목양하는 모든 목사들은 날마다 목자장이시며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며 그분을 닮기 위해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고 가난하셨는데, 나는 어떠한가? 그분은 참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겸손하셨는데, 지금 나의 모습을 어떠한가? 그분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셨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개혁은 목회자의 심령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2-2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1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1. 한국개신교 여전히 ‘오직 성경’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한국 개신교회가 진지하게 자문자답 해 보아야 할 명제가 있다. “한국개신교 여전히 ‘오직 성경’인가?.” 종교개혁은 성경의 본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버린 타락한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저항(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명분은 언제나 ‘오직 성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정신은 ‘오직 성경’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 가장 현저한 증거 중의 하나가, 하나의 성경을 두고 2000개 이상의 수많은 개신교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다른 하나님오래전 어느 개신교회 남자 안수집사 한 분이, 필자가 강의한 성경연구 테이프를 듣게 되었다. 테이프의 분량이 24개 정도 되는 꽤 길게 이어진 강의였다. 한 20개 정도의 강의를 들은 다음, 필자와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인 그분으로부터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어느 날 상면하여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나에게 여운으로 남아 있다. “목사님의 강의를 듣기 전에 제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목사님의 강의를 들은 후에 깨닫게 된 하나님이 서로 다르네요.” 그분이 그 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인식하게 된 하나님과 필자의 강의를 듣고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르건 상관없이, 두 가르침 중의 어느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 하나님이 아닌, 다소간 왜곡된 하나님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지금 개신교 안에는 이러한 현상이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목사가 성경의 말씀 중에서 어떤 면을 강조하고 확대하여 설교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이 배우고 깨닫는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자신이 잘 못 깨달은 진리와 하나님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성도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비극이다. 목사가 잘 못 깨달은 진리를 설교한다면 그것은 오류의 독소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이다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예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예수께서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고 그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요 17:17)이라고 하셨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 ‘말씀’이 모양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난바 되었는데, 그가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여기에서 ‘말씀’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생각과 품성과 뜻이 형체가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품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5:39)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에 대하여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가르치거나 예수를 믿는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으려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한국교회 다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성경의 오묘한 모든 말씀을 100%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이미 이해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말씀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다른 빛들이 더 밝게 비춰지면 새로운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래의 의미, 그 진의(眞義)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연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탈을 벗고 편견 없이 성령의 지도하심을 따라서 정직한 양심으로 성경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올바른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이러한 일을 시작하려면, 일단 목회자가 성경에 기록된 올바른 원칙과 가르침을 따라서 설교하고 성도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양심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목사의 가르침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진위(眞僞)와 옥석(玉石)을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으면 목사에게 질문도 하고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려는 열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목사는, 성경 본문과 관련하여 평신도가 질문을 가져오면, 성심을 다하여 가르쳐 주고 본인도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겸손한 태도로 연구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어떤 신실한 교인이 성경을 공부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질문을 했다. 대학 교수인 이 평신도는 목사에게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목사가 설교하고 가르쳐주면 그대로 받고 믿으면 되지, 성경을 뭐 그렇게 깊이 알려고 하십니까?”. 이런 대답은 종교암흑시대에 신부들이 하던 대답이다. 목회자는 ‘오직 성경’ 대로 신앙을 하기 위해 탄생한 개신교회의 지도자들이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성경을 정확하게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목사에게 질문을 하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고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신학대학 교육의 문제개신교의 근본정신 ‘오직 성경’이라는 대명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곳은 신학대학이다. 요즘 신학대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본문을 깊이 이해하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 가르치는 일보다,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진 ‘신학’이라는 학문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학과를 졸업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은 현대신학의 사조나 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은 많이 알고 있으나, 정작 그들이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매우 피상적이고 부분적인 지식만 습득하여 교회의 목회를 시작한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과 결함 때문에 목회자는 저마다 ‘자기 신학’과 ‘자기 학문’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자기 교회’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요즘 교인들은 성경 지식이 매우 박약하거나 왜곡된 신앙의 틀에 갇혀서, 진리와 오류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 그래서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교파에서 성경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가르치면 수많은 기성교인들이 그리고 쏠려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단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이나 일단 넘어간 교인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어떤 논리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교회에서 평상시에 성경을 제대로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잘 가르쳐서, 어떤 교리적 공략이 있을지라도 흔들림이 없는 교인들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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