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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제39회 총회장 이원영(李源永)목사
    경북 안동 이퇴계의 후손이원영목사(1886. 7. 3~1958. 6. 21)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조선의 거유(巨儒) 이퇴계(李退溪)선생의 14대손, 이관호(李觀鎬)씨를 아버지로, 김영(金永)씨를 어머니로 1886년 7월 3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15살에 이종헌(李鍾軒)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불행하게도 결혼한지 3년만에 18살의 청년으로 부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곧 고성인(固城人) 이승건(李乘建)씨의 차녀와 다시 혼인을 하였으나 다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년 이원영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시 경주인 이한제(李翰濟)씨의 장녀 김기출(金其出)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이원영은 1911년 3월 24일 사립 보문의숙(寶文義塾)을 통해 한학을 연수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보문의숙에 들어가기전 1891년 3월(5세)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그의 총명함이 들어났다고 한다. 1908년 4월 5일에는 봉성 측량강습소(鳳城測量講習所)를 이수하고 졸업하였다.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화 된 조선의 뜻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민족은 드디어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기미년(己未年)에 전국적인 독립만세 사건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하던 때에 이곳 안동군 도산면(陶山面)의 다수 종족(宗族) 중에서도 단신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위국충의(爲國忠義)의 불굴의 정신으로 시위를 하다가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으며, 감옥에서 복역(服役)하던 중 동료들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고 기독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3·1 독립만세로 첫 투옥출옥 후부터 열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20리나 되는 원거리에 있는 예안교회(禮安敎會)에, 매주일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교사상으로 짙게 물들어 있는 종중(宗中)어른들의 비난과 가족들의 반대로 한때는 역경과 핍박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가까운 친족들과 가족들이 합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퇴계 선조의 후예로써 서양종교인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수치요 우리 조상들에게는 용납못할 죄악이니 문중(門中) 밖으로 축출하고 족보(族譜)에서 제명한다는 위협을 당하였으나 이원영의 결심은 이미 죽음이라도 각오한 듯 불변의 신념으로 믿음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결단으로 지금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맞은편 담촌(錟村)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드디어 1921년 1월 8일 예안교회당에서 권찬영(Rev. Crothers 權燦永)선교사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입문이 되는 세례(洗禮 Baptism)를 받았고, 이듬해 1922년 2월 25일에는 안동성경학원(安東聖經學院)에 입학하여 봄과 가을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계속해 우수한 성적으로 1925년 12월 23일 졸업하였다. 이어 1930년 3월 12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경안노회(慶安老會)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같은해 6월부터 강도사로써 영주중앙교회와 용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2월 18일 경안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31년 12월 28일 안동 인노절기념성경학원에 교수로 취임하여 열성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1932년 12월 20일 안동읍에 위치한 안기교회(安奇敎會, 안동서부교회 전신)와 신세교회(新世敎會 현 동부교회 전신)의 시무목사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1934년 12월 19일 제24회 경안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젊은 이원영목사는 선비의 후손으로 본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교정의 한 가운데 서게되었다. 1939년 5월 31일 드디어 전국을 휩쓸던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문제가 안동지방에도 불어닥치게 되어 이원영목사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안동경찰서에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혹독한 고문과 극악무도한 체형(體刑)에도 의연한 태도와 어조, 그리고 부동의 신앙으로 무정한 법관도 신앙의 숭고성에 머리를 숙였고 미약한 성도들에게 격려의 경종(警鐘)이 되어 당시 조선 교계에 신앙의 정맥을 보존케 하였다. 그러나 연약한 육체는 악형(惡刑)을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폐렴과 건성근막염으로 몸이 쇠약해져 사람을 식별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보는 이들이 모두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야만적이던 일본경찰당국도 할 수 없이 보석(保釋)케 되어 본가에 돌아오게 되자 병세도 많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6명의 딸만 있던 집안에 유일한 후사가 될 아들 요한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천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보게 하였다. 1941년 7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안동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어 가족들도 모르게 포항 영덕 경산 등의 경찰서로 전감(轉監)되면서 무쌍(無雙)한 고문을 또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님을 향한 돈독함은 변함이 없었고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좌지우지 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제하 36년의 지옥같은 생활에 벗아난 해방과 함께 드디어 16일 출옥하게 되자 당일부터 여러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침체된 교회와 오염된 신앙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죽었던 것 같았던 교회들이 생기를 얻게되고 우후죽순격으로 부흥되어 신앙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교계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게 되었다.경안고등성경학원 창설해방된 이듬해 1946년 9월에는(5일) 경안노회의 이름을 따라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해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처음 입학생이 18명이었다. 이들을 학생으로 받아 제1회 개학식을 안동교회에서 거행하고 성경학습은 교회 하층에서 시작하였다. 19명이 기초가 되어 매월 한 두명씩 불어 나더니 나중엔 30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기적이 따로 없었다. 이목사의 강의는 하루도 빠짐이 없었고 한시간도 결강이 없었다. 하교시간이 되어도 이목사는 귀가할 줄 모르고 늦게까지 학교를 지키며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그의 이런 완벽한 준비와 기도로 진행되다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안동지방의 기독교지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세기의 미국에 침체된 교계에 디·엘 무디(D.L. Moody)목사가 세운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출신들이 쇠퇴해 가던 미국교회에 새바람을 이르키며 세계선교에 이바지 했던 역사가 경산도 안동에 있는 경안고등성경학원에 같은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교계지도자를 키웠다. 그 결과 1975년 현재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목사의 수가 46명 지도사 100명이 넘고 있다. 그는 1950년 11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세번째 경안노회장에 피선되어 1953년 11월까지 4차, 5차 노회장으로 노회와 안동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섰다. 그리고 전쟁이 겨우 휴전으로 진정된 직후 혼란기를 맞이했던 1954년 4월 23일에 한국장로교회의 최고의 명예로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총회장시절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서 채택그가 총회장으로 수고하던 그해에 결의된 안건들을 보면 ①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② 신사불참배 교역자와 신자, 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학교 각기관에 명하여 그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하였으며 ③ 제38회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한인교장 박형룡박사, 이사장에 안두화 선교사를 선임하여 대구서문교회에서 정식 취임케 하였고 ④ 경기노회를 경기 강원노회로 분립을 결의하였다. 그는 올곧은 정의로움과 관용의 선비 정신으로 어떠한 불의와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종된 사명을 다한 진실한 지도자였다. 서울영락교회 한경직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추모하는 글에서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런 성직, 실로 값진 것은 한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하나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라고 썼다.또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한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이목사님은 참신자, 참 애국자, 참목회자라고 평가하였다. 한 지방에서 평생 친구로 동역자로 안동교회 원로요 증경총회장이었던 김광현목사는 첫째, 애국자이셨다. 둘째,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광복 후엔 경안성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로 서부교회를 개척성장시켰으며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하였다(영원한 스승 이원영목사 김성년 외 공편 기독교문사 2001 p.15, 45). 이원영목사는 무엇보다 한지역에서 평생 헌신한 지도자였고 교회를 세우며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양성으로 교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일제 당시 당국으로부터 당한 체벌의 영향으로, 또 광복 후엔 교회재건과 뒷수습에 전력을 쏟아부어 헌신하였으나 이로인한 과로와 노쇠로 육체의 질환의 재발로 3년간 누워 지내며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58년 6월 21일 그가 그렇게 사모하며 바라던 주님의 영원한 품에 고요히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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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1
  • 7. 제65회 총회장 이영수(李榮壽)목사
    이영수목사(1928~1987)는 1928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383번지에서 부친 이운성집사와 모친 장성금집사 사이에서 3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15세 때 세례(洗禮)를 받고 안동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1955년 경안(慶安)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군목(軍牧)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군목 재직시 여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1957년 11월 예편과 함께 대구에 있는 봉산교회에 부임했다가 만 12년이 되던 해에 대전중앙교회 양화석목사 후임으로 부임하여 1987년 작고하기 전까지 시무하였다. 그가 봉산교회에 부임 후 노회 안에서나 총회 안에 서서히 그의 정치력이 발흥하였고 그의 박력있는 리더쉽에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영남지방의 중심지 대구에 있던 그에게 그의 대전중앙교회의 부름은 지역적으로나 그의 능력으로 보아 교단 전체를 이끌어가고 아울러 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갔다.대구 봉산교회에서 대전중앙교회로대전에 부임한 그는 교회성장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교인 증가로 새로운 예배당 건축 과제가 대두되었다. 대구보다 영역은 좁았지만 대형교회로 선두를 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그의 목회 리더쉽은 자연히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른바 교정(敎政)의 무대 한 가운데 중심 인물로 부상되어 간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영남지역 거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반대 세력의 J목사의 말 “내가 교단내 모든 사람들을 다 이겼지만 이영수목사에게만 졌다”고 실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목사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이룰 정도로 서로 달랐지만 그의 지도력에 의해 교단을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이끌어 가며 교단의 구심점이 되어 예장이 한국 전체 교단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하여서 만은 양쪽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교단 안에 끼친 대표적인 인들로는 교단부흥의 기초석이 된 일만교회운동 전개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973년 여의도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Billy Graham Grusdde)와, 그리고 이듬해 8월로 예정되었던 전국규모의 Explo’74전도대회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이끌고 있는 김준곤목사의 야심찬 계획을 간파한 이영수목사는 1974년 1월 17일 교단 지도자 20명을 대전 유성관광호텔에 초대하여 교단의 진로와 발전을 위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비생산적인 교권쟁탈전을 탈피하고 교단의 힘을 전도와 부흥, 교단발전을 위하여 힘을 모으자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지도자모임의 산물이 <일만교회운동>이었던 것이다. 1만교회운동 전개여기에서 다짐한 결의문을 보면, (1) 우리는 우리 총회의 부흥발전을 열망한다. (2) 우리는 1980년대까지 일만교회운동을 전개한다. (3) 우리는 국내의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합의가 그해 9월 총회에서 교단정책으로 채택되어 교회성장운동과 교회개척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일만교회운동의 실행위원과 기획실장을 맡아 전국교회로 하여금 교회개척과 적극적인 전도운동과 더블어 해외선교와 병행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순회집회와 교단 소속 부흥사들을 동원, 도시와 농촌을 무론하고 교회 확장운동과 전도집회를 이끌어 갔다. 이 운동은 단순히 숫자적인 <일만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합동측 교단 안의 모든 개교회로 하여금 선교와 전도, 구제와 봉사,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확인과 실천에 지대한 각성과 결실을 가져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운동이 자극제가 되어 장로교의 타교단에서도 3천교회운동, 5천교회운동, 300만달성운동으로 확산되어 가는 불씨가 되었다. 이같은 일은 이영수목사의 리더쉽이 이끌어낸 전도운동이었다.총회회관 건립다음으로 이영수목사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총회회관> 건립을 들 수 있다. 그는 총회 일만교회운동을 이끌어 가면서 교단의 발전에도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목사는 합동교단이 장자교단을 자처하면서도 마음놓고 총회업무를 볼 수 있는 건물이 없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즈음에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이미 총회회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총회회관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목사는 1959년 총회가 분열되면서 당시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던 선교부가 통합측으로 가버린 후, 예장은 총회가 업무를 볼 안정된 장소가 없어 장충교회에 사무실을 대여해 이곳 저곳으로 보따리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총회회관 문제는 1968년 5월 제53회 총회에서 결의되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3년 7월에 영등포구 여의도동 1-708번지 203평의 부지를 매입, 총회센터 건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후 이목사가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총회를 섬기면서 1980년말 지하 2층 지상 10층의 건물을 건축하기로 했으나 각종 건축규제가 심해 여의도 부지를 매각하고, 1981년 8월 당시로서는 허허벌판이었던 강남구 대치동 산 36-4번지에 560여평의 현 총회회관 부지 매입을 주도하였다. 이때 반대 세력들은 이목사의 독단 무모한 사업계획을 우려하면서 재정적 도움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목사는 이곳이 곧 서울 강남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오늘의 총회회관이 이미 설계되어 있던 설계대로 교단 행정 중심센터로 자리잡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보면 그의 패기와 선견지명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총신대학교의 양지캠퍼스 마련세번째로 그가 이룩한 업적이 있다면 오늘의 교단 인재 양성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총신대학교의 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목사는 자기의 모교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총신을 아끼고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인물이요 지도자였다. 그가 총회직영신학교 재단 부이사장과 이사장 시절 1981년 3월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 41-1번지의 22만3329평의 야산을 매입하여 동작구 사당동 캠퍼스에 이어 제2대학캠퍼스를 꿈꾸며 총신대학교를 세계적인 청교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요람으로 우뚝 서게 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영수목사는 정부가 대학 지방 분산 정책을 발표하기 전부터 탈(脫)서울 계획을 세우고 총회센터 부지와 함께 동시에 신학교 부지 물색을 진행시켰다. 학교당국은 여러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적당한 땅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용인시 양지에 당시 백화소주사장 강정중씨 소유 야산이 회사의 채무관계로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영수목사는 즉시 강사장을 만나 구매 교섭을 하였다. 5억짜리 땅을 깎아 4억2천만원에 매입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그중 5천만원은 강사장이 학교에 기부(헌금) 하기로 해 실제 지불액은 3억7천만원에 해결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땅에 이미 심어놓은 유실수 및 관상수가 당시 싯가로 1억원에 이르는데 이것까지 넘겨 받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2억 7천만원에 총신부지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총회 세계선교부 창립또 한 가지를 이야기 한다면 총회세계선교부(G.M.S)를 말할 수 있다. 이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대전중앙교회에서 1983년 정홍권선교사를 미국에 흑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었고, 1985년엔 김효곤선교사를 독일에 파송한 바 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교단차원에서도 선교사 파송의 필요성을 느낌과 함께 선교사 양성을 위해 초교파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총회직영 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1972년에 조직된 한국해외선교단체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고, 그런 토대 위에 오늘의 총회산하에 있는 세계선교훈련원의 기초와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2013년말 한국교회가 해외파송 선교사 총수 23,331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예장합동 소속선교사임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찬송가 통합에 공헌마지막으로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통일찬송가의 발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개편찬송가’로 나뉘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 일에 주도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여러가지로 나누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단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찬송가’로 묶는 작업은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기여하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뒤늦게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국찬송가공회의 공동회장이 된 이목사는 교단의 힘을 배경으로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찬송가를 통한 복음선교와 교단간의 일치와 연합뿐 아니라 선교에 큰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찬송가공회 이름으로 통일찬송가 10만부를 인쇄해 군선교회에 기증한 것만 보아도 찬송가연합의 일이 개인적인, 또는 개교단적인 소승적인 이익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 유익과 미래선교의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갔으나 그가 끼친 복음의 열정과 확산 인재양성의 높은 이상은 길이길이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할일을 다하고 1987년 12월 2일 한참 일할 나이인 60세로 생을 마감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는 또힌 짧고 굵게 살아간 교단의 걸출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한국교회의 거인(巨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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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6
  • 6. 제63회 총회장 한병기(韓秉奇)목사
    한병기(韓秉奇 1913. 4. 16~2004. 11. 4)목사는 1913년 4월 16일 강원도 희양군 내금강을 끼고 자리잡은 기독교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금강 산자락에 위치한, 교회가 운영하는 영화의숙(永華義塾)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14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고배(神戶)에 있는 중앙신학교 학생이었던 김성태의 주선으로 그곳에서 한인교회인 이마미야(今宮)교회에 출석하며, 야간에 한 소학교에 다니며 정규교육을 받고 난 후, 세미기(成器)상업학교로 진학하여 5년간 다니고 졸업하였다.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는 다시 북부교회로 옮겨 이 교회에서 입교(入敎)문답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으로 성실하게 봉사하며 헌신하였다. 세이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요대학(關西大學)에 입학하여 조국해방 후를 준비하기 위하여 법학(法學) 전문부 3년과 6년간 법률학을 전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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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7
  • 5. 제44회 총회장 양화석(梁華錫)목사
    1959년 9월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소위 합동(合同)과 통합(統合)이란 아리송한 이름으로 두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갈라져 나간 에큐메니칼 지지파 쪽에서는 이창규(李昌珪 1886-1982)목사가, 보수를(N.A.E측) 지향하는 합동측 총회장에는 양화석(1902-1987)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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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 4. 제9회 총회장 김익두(金益斗)목사
    김익두(金益斗, 1874~1950)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김익선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집안형편이 좋은 가정이어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해 갔다. 그의 나이 여섯에 서당(書堂)에 다니며 한문을 익히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너끈히 떼내어 주위로 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익두 소년에게 생각지도 못한 갑자기 부친을 여의고 13세 나이에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야 하는 세상 물정도 몸소 겪었으며 때로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깡패처럼 살아가는 모진 인생사를 겪기도 하였다. 한편 장래의 큰 희망을 품고 선비의 꿈을 가지고 과거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맛보기도 했다. “너는 살아가면서 사람구실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는 어린 익두가 13살 때 아버지가 임종에 가까워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한 유언이었다. 익두는 아버지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때로는 생활이 어려울 때도 있었으나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어 아들을 한문서숙에 보내 가르쳤으며 개인적으로 아들에게 한문과 산학(算學·산수)을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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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5
  • 3. 제13, 33, 34회 총회장 이자익(李自益)목사
    이자익목사(1879~1959)는 1879년 7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부친 이기진(李基珍)과 모친 박정근(朴定根) 사이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였다. 출생한지 두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일찌기 고아가 되어 살길이 막막해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가, 순천을 거쳐 전남 일실군 신평면 하천리에 도착,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후 일자리를 찾아 하동과 남원을 거쳐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가게되어 삼거리에 있는 지주(地主)로서 마방(馬房)을 운영하는 조덕삼 집에서 마부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주인과 함께 교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조덕삼은 당시 금산 일대에서 성행하던 금광사업에도 손을 대서 재산을 모았다. 조덕삼은 장날만 되면 비단을 마차에 싣고 전라도 각 지방을 다니며 장사를 했고, 큰 배나무과수원과 더불어 논농사와 마방을 운영하였음으로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1-29
  • 2. 제1회 총회장 언더우드목사
    1901년 출발한 선교사공의회 시대가 1911년으로 마감되고, 1912년 9월1일~1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열렸는데,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1859~1916)목사가 선출되었다. 언더우드(元杜尤, H. G. Underwood)는 인간생태 차원에서는 청교도 출신 크리스챤이자, 사회생태학 차원에서는 앵글로색숀계의 피를 타고난 아메리칸이요. 유럽계에 속하면서도 세계인이며 자연생태인으로 산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 언더우드(1827~1881)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Grant Maire Underwood)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죤 언더우드는 인쇄용 잉크와 타자기, 타자기 리본, 안전수표용지 등을 개발하여 영국 왕실예술원으로부터 공로 메달과 표창을 받기도 했다. 훗날 죤 토마스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맏형 1857~1937)는 부친의 사업을 계승하여 유명한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경영하게 되었고, 그 기금으로 연희대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선교자원운동이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며 인도선교사를 꿈꾸었다. 하지만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뉴스에 접하고 조선선교사를 지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1-16
  • 1. ‘예장(합동) 총회장 열전’을 연재하면서
    교회연합신문 독자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필자는 본 교회연합신문 지상에 만 2년동안에 걸쳐 한국기독교 고대역사에 관계된 이야기를 100회 연재한 바 있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사 관계 학자들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경교(景敎)이야기와 가야(伽倻) 시대와 단(檀) 지파와 도마사도가 일찌기 한반도에 전래된 흔적에 관한 이야기가 신교(개신교) 구교(천주교) 양쪽의 관심있는 연구자들에 의해 학위논문을 비롯 여러 학술모임까지 결성되어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봅니다. 이에 지난번 연재는 기독교 선교100년을 넘긴 한국교계 지도자들과 연구자들이 많아지게 된 것을 보면서 공식적인 선교역사(개신교 130년, 천주교 230년) 이전에 한반도 특히 남부지역에 기독교가 전래된 흔적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전기를 마련해 보고자 시도했던 바 였는데 예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킨바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독자 여러분들의 기도와 성원에 힘 입은 바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필자의 의사에 의해 연재된 글이 아니었고 본지 발행인의 요청에 의하여 전개된 일이었음을 여기에 밝혀둡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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