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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 제15회 총회장 김석창(金錫昌)목사
    평북 철산 출신김석창(金錫昌, 1876-1950)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 마을에서 운영하는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을 습득하였다. 당시의 천자문 교육은 모든 향교와 개인사숙에서 밥벌이를 위해 학교 기초교육으로 문자를 암기식으로만 가르치는 교재가 아니었다. 천자문은 한 면에 8글자로 이루어진 125개의 문장으로써 이 문장을 통해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문학적인 요소가 가득담긴 책이며, 논어(論語)에서 주역(周易)까지 3500년 동안의 동양철학(東洋哲學)을 총망라한 인간교육을 위한 최고의 고전입문서이다. 김석창은 어릴 때 이미 인간의 귀중함과 윤리도덕의 기초를 잘 다졌던 것이다.그는 아버지와 함께 농토를 일구어 가면서 생활하다가 고향에서 결혼한 후에 전 가족이 선천(宣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미 이곳 선천은 미 북장로교가 선교부 자리를 잡고 선교에 몰두하고 있었다. 청년 김석창은 때마침 선천 선교부에서 선교에 힘을 쏟고 있는 위대모(Rev. Norman C. Whitmore, 魏大模)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 길로 부모들과 함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선천읍교회에 출석하였다. 신성학교 설립해 민족지도자 양성김석창은 그때부터 위대모 선교사를 뒷바라지 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이 무렵 선교부에서는 이곳 선천에도 미션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기에, 그 결과 1906년 드디어 남자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곳에는 1900년에 선천읍에 여성교육 기관인 보성여학교(普成女學校) 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때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지만, 남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도래된 것이다. 이름하여 신성학교(新成學校)가 설립된 것이다.김석창은 신성학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이 겨례를 사랑하는 민족지도자를 기르는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랫고, 이 일을 위해 자신도 이 학교를 위하는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선천선교부는 김석창의 선교열의에 감동을 받았고, 위대모(N.C. Whitmore) 선교사는 김석창에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교회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회자의 길로이를 쾌히 허락한 청년조사 김석창은 곧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열심으로 정성을 다해 학업에 임하였고 교역자로써 필요한 신앙적인 인격도야에 최선을 다한 결과 1911년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11년 3월 제4회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평북노회에서는 그를 졸업과 동시에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를 개척 설립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석창은 그해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 설립한 선천남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김석창 목사는 젊은 청년시절부터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가 관계하고 있는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전개된 1919년 3.1민족독립운동이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을 때, 김석창 목사는 신성학교 교사이면서 자기 교회 교인이었던 홍성익, 김지웅, 양준병 등과 함께 모여 의논하였다. 선천에서도 이미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1만세 시위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3.1만세운동과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구속드디어 선천지방에서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 경찰 당국은 평소 사상을 의심하고 있었던 김석창 목사를 지목해 그를 구속하였고, 그와 함께 모의했던 양쪽 학교의 교사들까지 구금, 평양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듬해 1920년 4월에는 신성학교 출신인 박치의에 의해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에도 일제당국은 김석창 목사가 연계되었다며 그를 끌고가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결국 김석창 목사는 이 일로 인해 8년간의 긴 옥고를 치루었다. 김석창 목사는 이때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파로 평생동안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지날 수 밖에 없었다.선천남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김석창 목사를 위해 옥바라지 하는 것은 물론 그의 가족들을 지극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일에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석창 목사는 그가 석방되던 해에 평북노회장에 당선되었고, 그는 이미 1919년과 1940년에 두번이나 노회장을 역임했으니, 이번에 세번째 노회장이 된 것은 지역내 교회들이 김 목사의 신앙 인격과 지도자로써 존경해 왔던 증거라 하겠다. 공산당의 피습으로 병고 얻어해방 후 1946년에는 곽산교회(郭山敎會)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해 오랫동안 병고를 겪기도 하였다. 1947년 진갑을 맞이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이곳에서는 공산당의 횡포로 앞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것을 예견하고 모두들 남쪽으로 월남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위하여 교인 한 사람이라도 남이 있으면 목자로써 끝까지 돌보아야 할 임무가 있음으로 월남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였다.6.25전쟁 중 공산군에 총살 당해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중에 북한 공산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그가 총회장에 피선되었던 해는 1926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던 제15회 총회였다. 당시 참석한 총대로는 목사 86명, 장로 86명 선교사 36명이었다. 이때 카나다장로교 선교부가 1925년 7월 본국에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연합해 카나다연합교회선교부로 개칭되었다. 이를 반대했던 카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들은 일본으로 선교지를 변경해 재일조선인교회를 지원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로 정상적인 목회활동은 못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선천남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듬해 1946년에는 성역40주년 기념표창을 받기도 하였고, 집으로 귀가 도중 공산당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들을 예수의 사랑으로(마 5:44~45) 용서해주었다.총회장 재직시 금강산수양관 설립결의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활동을 기억하고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15회 총회 결의 사항을 살펴보면 ① 강원도 금강산에 교역자 수양관을 설립하기로 하다(대지 8,000평, 석조본관 2층 건물, 기숙사 및 정원을 조성하기로 함.) ② 1928년 7월 미국에서 개최될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대표로 파송하기로 함. ③ 총회 개최일자를 9월 제1차 주일 후 금요일 하오 8시에 개회하기로 의결하다. 일제하 어려웠던 동토의 식민지 시절에 이어 1919년 3.1민족독립운동과 6.25전쟁을 겪는 와중에서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이끌어온 한국기독교선교100년사에 아름답게 한송이의 백합화가 되어 한국교회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한 위대한 교회지도자로 대를 이어 향기를 발하고 있는 김석창 목사 같은 순교자적인 희생과 헌신 모범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김석창 목사야말로 우리들의 영원한 목자장(牧者長)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목자였다고 하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羊)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6)는 말씀대로 순교를 각오한 성실하고도 진실된 참목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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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0
  • 37. 제11회 총회장 김성택(金聖澤) 목사
    평안도 평양 출생김성택(金聖澤, 1875~1939.7.1) 목사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한문서숙(漢文書塾)에서 천자문, 사서오경 등을 익히며 한학을 갈고 닦았다. 유학에 심취해 있던 어느 날 평양시내를 돌아 다니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석진(韓錫晋) 목사일행을 만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한석진을 만난 것이 기독교로 입신(入信)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년 김성택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 넓다리교회(후에 장대현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가 26세 되던 해에(1901년) 그가 전도받은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교회 집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1906년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받았다. 1914년에는 강동군 소재 송오동교회 조사(助師)로 임명받아 목사도 되기 전에 설교자로, 전도자로 훈련을 받게된다. 1922년엔 마팻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후 제15회로 졸업을 하자마자 목사로 장립을 받고, 조사 때 시무한 바 있었던 강동군의 송오동교회로 다시 부임, 본격적인 조선야소교회장로회 소속 목사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해에 김성택 목사는 평양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김성택애개 있어서 기독교 진리는 복음 중에 복음이었고 영혼을 소생케 하는 진리 중의 진리였다. 그는 기독교 진리에 몰입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진리의 핵심을 터득하면 터득할 수록 너무나 기뻣고 감격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쁜소식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열심히 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셨던지 26세의 나이에 젊은 장로로 임직을 받았고, 당시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가 세례 받은지 5년만에 장로가 되었다고 모두들 부러워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당시 평양선교부에 주재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e) 선교사는 너무나 기뻣다. 자신이 전도한 청년이 장로로 자신이 안수하여 교회의 기둥이 되고 전도에도 열심하니 이에 더 무엇을 바랬을까? 마팻선교사는 마음에 점을 찍어 놓고 유심히 지켜보아오던 차에 교역자로써의 자질까지 엿보이게 되자 서슴없이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으로 천거했고, 장로로서 송오동교회 조사로서 너무나 성실하게 주의 종으로서 모자람이 없이 봉사하는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1922년 평양노회 노회장 재임 중에 제11회 총회장 피선김성택 목사는 1922년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던 그 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경성의 승동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날 지방에서 참여한 총대는 목사 70명, 장로 70명(1명 불참), 선교사 31명이었다. 총회장으로 당선된 김성택 목사는 이미 장로로서 총회 총대로서 참석했던 일이 있었기에 의외의 인물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들 훌륭한 인물(人物)이 선출되었다고 당시의 총대일동은 환영했다. 그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장으로 선출되던 그날 마침 축하 사절단으로 내한한 사람 중에 만주주일학교연합회 회장 피어스 박스가 참석해 외국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있는 조선교회 신임총회장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있자 모든 총대들은 뜨거운 박수로 함께 축하하였다. 김성택 목사가 목사 되기 이전에 이미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서 그의 봉사와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의 삶을 마펫 선교사가 눈여겨 보고 있었던 차에 장대현교회 교인들과 마팻 선교사가 한 마음이 되어 더 큰 인물을 키워야겠다는 마음들이 모아졌던 것이다.마팻 선교사가 믿고 키운 인물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김성택 목사를 1914년엔 그의 책임당회 구역인 평양교외에 자리잡고 있던 강동군 소재 송오동교회(松吾洞敎會) 목사를 임명 일하게 하였으며, 1917년에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장로회신학교로 진학시키면서 그 교회를 지키도록 하였고,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주중에 기숙사에 머물다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송오동교회로 돌아와서 가족을 돌볼 시간도 잊은채 교인들을 심방하고, 심방이 끝나면 설교준비를 하였다. 또 주일 설교가 끝나면 다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노회의 일에 이르기까지 열심을 다하였다. 그 결과 교역자인 그가 신학교에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알차게 계속 성장해 갔다. 김성택은 이로써 그의 목회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 마팻에게만 아니라 평양교계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김성택 목사가 송오동교회 지도자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 목사로 장립되자마자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리더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과 어떠한 목사인가를 잘 평가해 주는 대목이요, 그의 총회장 피선은 이미 그는 평양노회에서나 장로회신학교에서 이미 검증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응 말해 주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1923년에는 진남포 미석리교회 목사로 전임하였고, 그때 그는 평서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듬 해 1931년에는 평서노회장에 재선되어 그의 리더십이 더욱 빛나는 계기가 되었고 교단 총회 총회장을 준비하는 훈련의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1934년엔 같은 진남포 지역의 억이기교회로 전임하였고 이후 말년에는 안주노회(安洲老會)로 이적하였다. 총회장 재임시 조선 주일학교연합회 설립그가 총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 가운데는 ① 전국의 교회가 성장해감으로 총회에 파송되는 총대를 제한하기 위하여 5개 당회에서 목사와 장로를 각각 1명씩 총대로 선출하던 일을 10개 당회로 개정한 일과, ② 전남노회를 (전남·순천노회) 분립하기로 하였고, 한때 러시아 정교회로 이적해 갔던 최관홀 목사를 10년만에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받아주기로 한 일 ③ 함북노회를 (함북·시베리아노회) 분리하기로 하다. ④ 미국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희사금을 장로회신학교 신축기금으로 받기로 가결하다. ⑤ 무임목사라도 해노회가 총회 총대로 파견하는 경우 투표권을 주기로 하다. ⑥ 시베리아로 김현찬 최홍종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하다. ⑦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YMCA를 설립하기로 하다. 김성택 목사는 1939년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았고, 만주노회로 이적한 후에는 정식 교회를 맡아 담임하지는 아니했으나 그 지역에 교회를 방문해 돌보고 있다가 1939년 7월 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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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2-26
  • 36. 제87회 총회장 한명수(韓明洙) 목사
    황해도 연백 출신한명수(韓明洙, 1933.12.5~2012.3.25)목사는 평양 다음으로 기독교세가 강했던 지금은 망향의 땅이 된 황해도 연백에서 1933년 섣달에 태어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개가 비슷했지만 어린 명수에게도 어린 시절은 행운아가 아니었다. 고향에 있는 국민학교를 나와 백천(白泉)중학교에 진학 공부하던 중, 18세 되던 해에 미래를 꿈꾸던 소년 명수는 3.8선을 넘어 단신 월남하였다. 그때가 한창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의 인민군대가 부산을 향해 밀물처럼 밀려 내려오고 있던 와중이었다. 1951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땅 강화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고아 아닌 고아생활을 하며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1952년 전효순이란 이웃에 사는 교회 권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에 입신(入信)하게 된다. 담임 이병설 목사에게 학습(學習)을 서고 당대의 부흥목사였던 박용익 목사에게 세례(洗禮)를 받았다.한명수는 어릴 때 꿈이 있었다. 그것은 유명한 기계체조 선수가 되어 국가를 빛내야겠다는 것과 통일은 내가 이룩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군(軍)에 입대해 위험한 적진 후방에 투입되어 아군진지를 구축해야 하는 특수부대(겔로부대)에서 3년간 군생활을 한 것이었다(한명수, 하나님이 너무 오래 참으셨지요? 1993 참조).장로교에서 세례받고 감리교에서 신앙생활그가 처음 기독교에 입교해 군생활하는 청년기의 신앙생활은 감리교회에서였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여러 위험한 경우를 만날 때마다 주님에게 매달렸고 군생활을 하던 중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처음 입학한 신학교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던 기독교성결교회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서울신학교였다. 당시 국내 신학교 가운데 총회신학교 다음으로 보수적인 학교가 서울신학교였다.군복을 입고 서울근고에 있는 군부대와 학교를 오가며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두 가지 업무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주위에서는 감리교신학교로 가야 한다고 원하는 지도자들도 있었으나 당시 전국적으로(초교파적으로) 유명했던 이성봉 목사, 이명직 목사, 김응조 목사 등이 서울신학교 교수로 있었던 부흥사로써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 교단을 뛰어넘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1957년 1월 황연숙과 결혼하고,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총회신학대학에 편입,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론을 접하게 되는 일대 개인적인 인생과 목회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가 1964년도였다. 수원 상이군인 마을에 교회 개척그 때 경기도 수원시 연무로 26지역에 6.25전쟁의 와중에서 부상을 입은 제대군인들과 남편과 아들을 잃은 전쟁 미망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살고있는 소위 상이군인 마을로부터 교회개척 의사를 밝혀와 그해 4월 26일 전도사 신분으로 후에 평생사역지가 된 오늘의 <창운대교회>의 개척 깃발을 꼿게 된 것이다. 아직 목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을 채 체득하기 전의 일이었던 것이 가난하고 의지할대와 위로와 돌봄이 필요했던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원호교회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느 교단 어느 교회나 지방회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주위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의 돌봄과 권고로 개척한 이듬해 1965년 10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함남노회에 정식으로 가입, 감리교회 신자에서 성결교회 서울신학교와 예장 합동소속 총회신학교를 거쳐 드디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 목사가 된 것이다. 그는 느즈막하게 목회를 시작했지만 학구열만은 열화같이 타 올랐다. 창훈대교회 주변의 도시화 현상으로 교회도 성장해 안정을 찾게되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진학, 상담심리학으로 문학석사(M.A)학위를 받았다. 그가 상담심리학을 택한 것도 목회하면서 교인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문제만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 Fuller신학대학원으로 가서 목회학박사(D.Min)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역시 목회사역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 해결을 위한 일연의 노력이었다. 끊임없는 학구열로 목회학 박사학위 취득한명수 목사의 목회철학을 잠시 살펴보면, 첫째 지역사회 봉사, 둘째 조국통일독립, 셋째 말씀의 세계화(창훈대교회50년사 2014. p.69)이다. 이같은 비젼(Vision)을 수행하기 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는 실천사항이 있으며, 성숙한 성도 양성을 위해 지켜야 할 7가지 신앙생활 신조를 제시하고 있다. ① 성품-성도는 거룩해야 하고(레19:2) ② 성경-부지런히 성경을 보고(행19:11) ③ 기도-힘써서 기도하고(엡6:18) ④ 주일-거룩히 지키고(출20:8) ⑤ 십일조-온전히 드리고(말3:10) ⑥ 전도-열심히 전도하고(딤후4:2) ⑦ 생활-동정하는 자가 되자(딤전6:18) 라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을 제시하며 평생을 목회하였다. 그의 교회관을 잠시 언급해 보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모습을 보면서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이끌어갈 중심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으며, 지도자들과 한국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봉사의 직분으로만 다짐한다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국교회 미래는 목회자의 책임”그의 저서 <한국교회에 보내는 속달편지>에서 첫째, 한국교회의 미래가 목회자의 책임이라고 볼 때,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해 교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의 사모는 종가집 맏며느리처럼 교회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궂은 일을 돌보며 교회가 평안하고 화기애애 하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장로의 직분은 교회와 성도들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넷째, 재정부장은 투명한 재정집행으로 겸손한 자세로 심부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에는 여성이 많은데 이는 남성들이 가정을 신앙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책임의 결과이다. 여섯째, 평신도들도 교회에 할말을 해야 한다. 한명수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귀족화는 대중에게 괴리감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외적 성장 중심에서 내적 성장으로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창훈대50년사 같은 책, pp.62-63)한명수 목사의 국가관은 그의 고향이 3.8 이북이서만은 아니겠지만 통일지향적이다. 그로 인해 종종 한 목사는 죄파적이 아닌가 의아해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당시 시대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호혜평등원칙에 입각한 상호방위 개념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종속적 동맹 및 지배구조의 조약으로 이어졌거나 일방적으로 변절되는 경우 거부되어야 하며, 동족만한 우방은 없다는 원초적 이유에서 남북공조와 친북은 그 어떤 국제관계 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남북공조를 좌파시 하거나 반미 혹은 비애국적으로 폄하하려는 풍조는 그 자체가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이므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KLO부대 출신 반공투사한 목사는 이북 고향에 계신 부친이 남한의 첩보원을 도와주고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내무서원에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지팡이로 몸을 의지해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목사는 이에 복수심에 볼타 즉시 미8군 극동사령부 소속 K.L.O부대(속칭 캘로부대)에 자원입대 해 휴전 직전까지 수차례 북녘땅을 드나들며 반공투사 역할을 했다. 이런 와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전도사가 되었고 그 정의감을 신앙의 정의로 승화시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이러한 그의 행적을 알게되면 그가 주장하는 민족통일과 동족간 화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그이 생존시 교계(노회와 교단 및 타교단)의 활동영역을 보면 그의 신앙철학을 읽을 수 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수원 YFC 이사장(1977), 수원기독교연합회장(1979), 경기도청자문위원 및 법무부 수원교도소지도위원(1984), 경기도경찰청경목위원(1977)(2001), 수원노회장(14대), 예장총회선교부 총무(1975), 기독신문 주필(1995~1999), 예장총회 부회장(2002), 총회장(2002~2003), 수원신학교 교수(1997~2004), 총신대 재단 및 운영이사(1981~2003). 한기총 초대 총무 등 교계 연합활동 활발기독교계를 위해서는 한기총 초대 총무(1989), 한국찬송가공회 대표회장(2001~2004), 교단장협의회 상임대표(2002),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대회장(2003) 등이다. 그의 활동범위는 가히 전천후적이며 그 흔적이 뚜렷하다.그가 재임했던 제87회 총회의 결의안을 일별 해보면, ① 기독교영성훈련원(대표 박철수)와 교류를 금하기로 하다. ② 예장혁신총회 남서울신학교는 이단성 있는 단체로 규정하다. ③ 대신대, 칼빈대, 광신대 신학대학원(M.Din) 졸업자들은 심사후 총신대신대원 편입 1년간 30학점을 이수토록 하다. ④ 중·경기노회 분립키로 하다. ⑤ 서울노회를 분립키로하다.(서울·서울북) ⑥ 사회법정에 교단문제를 상습고소자는 엄중 징계하기로 결의하다.한명수 목사는 자신과 민족이 겪은 6.25전쟁을 겪고 어려운 처지가 된 전쟁 미망인들과 고아들을 위해 창훈대라는 신앙공동체 안에 불러들여 한평생 한 교회를 위해 자기의 능력과 소신 그리고 신앙의 열정을 불태운 정의감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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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8
  • 35. 제4회 총회장 김필수(金弼秀) 목사
    경기도 안성 출신김필수(金弼秀 1872.7~1948.10.30) 목사는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군(安城) 삼죽면 죽사리에서 출생하였다. 윤택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청운의 꿈을 품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의 지도자였던 박영효(朴泳孝) 등과의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해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동안 몸을 피했다가 조선으로 다시 귀국한 뒤에는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D. Reydds, 1867~1951)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어 전주에 머물렀다. 이후 상경하여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될 때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12명의 창립이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다시 전주로 내려가 완산교회(完山敎會)의 장로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는 진안(鎭安), 무주(武朱), 장수(長水)를 비롯, 군산(群山)으로 개척 전도사로 파송된 후 군산 개복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가 전주에 있을 때는 전주서문교회를 시무하였는데, 서문교회 재임시 이눌서(李訥瑞, W.D. Reynolds) 선교사 구역인 완주(完州), 임실, 김제지방 일부를 맡아 조사(助師)로서 교회를 돕기도 했다(기독교대박과사전 제3권, 1982, 기독교문사 p.308).‘기독신보’ 창간 편집인1915년 장로교, 감리교 두 교파가 연합하여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에는 이 신문의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YMCA의 일요강사로 봉사하기도 하며, 사경회(査經會)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조직과 동시에 제1회, 제2회, 제3회까지는 선교사들이 총회장을 맡아 이끌어 갔다. 제4회 총회가 1915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전주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총대는 목사 60명, 장로 60명 동수였으며, 선교사 50명으로 170명의 총대들이 참석해 배유지 총회장의 사회로 제4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그동안 부총회장으로 섬김 바 있었던 제1회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들 중 길선주, 한석진, 양전백 목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회장이 선출되지 아니하고, 예상 외의 제2회 졸업생이었던 김필수 목사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총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1911년에는 군산에서 개복동교회와 구암교회의 청빙을 받아 두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기도 한 김필수 목사가 전라노회의 총대로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총회장 선거를 한 총대 자신들도 놀랐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역할과 인물됨이 어떠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눅 13:30)이미 부회장을 역임한 선배목사들이 있었지만 그가 총회장에 선출된 것은 그가 충분히 검증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필수 목사는 제1회 총회 때는 부서기로, 제2회와 제3회 총회 때는 서기(書記)로 각기 임원직을 경험했던 관계로 회의(會議)를 잘 진행하였던 것이다(총회를 섬긴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27).YMCA를 중심한 민족운동 지도자김필수 목사는 1918년 3월 26일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경성YMCA회관에서 조직되었는데, 이때도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조선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선봉에 서서 지도자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만세운동 당시에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YMCA 청년지도자로써 언론계와 강연 등으로 민족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1920년에는 YMCA 전국순회 전도단을 조직해 활동을 했는데 그 단장으로써 크게 이받이 하였다. 또한 금주(禁酒), 금연(禁煙), 절제(節制), 물산장려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칠 때는 주강사로써 맹활약을 하였다. 아울러 YMCA에서 기관지 <靑年>지를 발행했는데, 그는 이 청년지의 주필로써 맹활약을 하기도 하면서 민족자립 갱생의 정신과 독립을 위해 뭉쳐야 산다고 외쳤다. 일제 말기에는 모든 현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을 추수리며 살았다.당시에도 총회 공금 유용사건 있어그가 재임했던 제4회 총회에서는 오늘날 동성애와 비슷한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총회는 ① 교회 내에서는 의동생이나 수양아들 혹은 수양동생같은 비도덕적 행위를 금지하기로 의결 하였으며, ② 당시 전도국 회계로 있던 박치록 장로가 공금 2,500원을 유용한 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100여 두락에 이르는 답토(畓土)로 대신해 상환금을 받아낸 것, ③ 개교회에서 장로 선출시에는 회원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된다고 결의한 것이 장로회 헌법에 삽입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④ 재임시 보고에 의하면 당시 서간도에 사는 조선인 10만명, 교회개척 53개 교회, 교인수 2,739명이라고 보고 되었음. 북간도 지방의 조선인은 14만명 교회개척 14개처, 교인수 5,000명이라는 보고를 볼 때 초기 조선교회의 전도열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라 생각된다. 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교단지였던 <예수교회보>를 재정난으로 당분간 폐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일제 당국도 해마다 미션계 학교가 왕성해지자 이를 제제하기 위한 조치로 예배(chaple)와 성경(Bible)교육을 10년 후인 1925년부터는 폐지하라는 총독부의 결정이 시달(示達)되었다. 제4회 총회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主日學校)를 소아반(1~13세), 유년반(14~20세), 장년반(20세이상)으로 분류 운영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비교적으로 교세가 약한 호남지방에서 총회를 개최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호남지방 전체 교회가 총회를 계기로 분발해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총회의 배려였다. 그의 말년에는 사역하던 군산지방의 교회를 사임하고 곧 상경하여 <기독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문서선교에 힘썼고, 친히 동 신문사의 주필로서 활동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고종명이란 축복 속에 살다가 노환으로 1948년 10월 30일 자택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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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34. 제25회 총회장 이승길(李承吉) 목사
    황해도 해주 출신이승길(李承吉·1987.7.13~1965.2.18) 목사는 1887년 7월 13일 황해도 황주군 구성면(九聖面) 서성에서 부 이정건(李正建)과 모 동신행(東信行) 사이에 3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문사숙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비범한 생각과 행동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96년 이길함 선교사(Rev Graham, Lee 李吉咸)에 의해 온 가족이 복음을 받고 교회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1901년 헌트 선교사(Rev. William Brewster, Hunt, 1897)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수세 후 그는 황주에 있는 3년제 양성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한 후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 중등과에 진학 1905년에 졸업하였다.졸업하자 마자 사리원 광성교회에서 운영하는 광성초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이 기관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1910년에는 이른바 안명근(安明根)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이란 징역형을 선고받고 경성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7년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당국의 감시의 눈길은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있어서 국민들의 올바른 사상지도와 구원의 길은 오직 기독교 신앙운동에 있음을 통감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23년 12월 30세가 훨씬 넘은 나이로 제17회 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조선야소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이때로부터 오로지 기독교 복음사역자로서의 노력을 다해 헌신하였다.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이승길 목사는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巨星)이라 할만한 인물이었다. 1936년 9월 11일에서 19일까지 광주양림교회에서 모인 제25회 총회에서 부회장을 거치지 아니하고 총회장에 오른 위인이요, 교계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 서슬퍼렇던 일제하 감시의 눈을 피해서 단 한치의 흔들림 없이 총회를 무사히 이끌어 갔다. 이듬해 1937년에는 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노회장으로 1935년에 이어 노회장으로 재선되어 어려웠던 시기에 노회 역시 은혜롭게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면모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1935년부터 일제 당국은 한국교회를 향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해 옴에 따라 당시 평양노회 노회장이었던 이승길 목사는 이를 반대하는 임시노회를 개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목사는 일경(日警)에 연행되어 평양경찰서 고다니 서장과 담판하는 평양교회의 선봉에 서서 맹렬하게 투쟁하였다. 이승길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과는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교단역사에 뚜렷하게 각인된 지도자요 인물이다. 그는 목회자로 교정가로써만 평가할 수 없는 특출한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7년의 옥고와 예비검속 등 무려 38회나 잡혀가총회 100년 역사 가운데 43년 간의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과 서기로 2회, 평양노회를 비롯해 노회장으로 12회, 부노회장으로 4회를 역임하였다. 또한 일생을 통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일이 있을 때마다 예비검속 되거나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의 건으로 구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유치장으로, 때로는 형무소 드나들기를 무려 38회나 되는 이력을 지닌 애국자요, 기독교의 진리사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아니하고 항상 선두에 선 인물이다. 일제패망 직전에는 소위 정방산(正方山)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붙들려 가 투쟁하는데 고난을 받기도 했다.1945년 초 일본 헌병대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형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옥해 고향인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읍으로 돌아왔다. 옥고 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일도 잠시였고 우리나라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의 귀국으로 경성으로 올라가 잠시 경교장(京橋莊)에 머물고 있던 김구 선생을 보좌하였다. 이승길 목사는 이렇게 애국운동에 몸을 담기도 하였으나 정치에서 손을 떼고 다시 본업인 복음전파 사역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전도단을 조직하여 복음이 미치지 못한 황해도 연안인 옹진지방을 복음전파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도여행에 나섰다.‘토마스기념전도단’만들어 황해도 지역 복음전도당시 동참했던 전도단원으로는 이승길 목사를 비롯, 김낙영 목사, 이삼성 목사,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수명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조직된 ‘토마스기념전도단’은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 6월까지 2년여 동안 그 어려운 교통사정과 단원들의 숙소문제 기후조건을 극복하면서 오직 죽어가는 내 동족을 말씀으로 구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연백, 옹진 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이르렀고, 도합 14개처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발휘하였다.대표적인 교회들로는 본영교회, 한동교회, 용천교회, 연평교회, 부토리교회, 연안읍교회 등이다. 이 때에 전도 받아 복음사역에 헌신한 대표적인 청년들이 이삼성 목사, 정문호 목사, 전종훈 목사(학익교회), 박용규 목사(전 성남교회) 등이 있다(인천제2교회40년사 p.165~166참조). 이승길 목사는 해방을 맞이할 당시엔 겸이포중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지만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김일성을 앞세워 괴뢰정부 수립을 시도함에 따라 정상적인 자유로운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월남을 결심, 1948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고향땅을 등지고 내려온 교인들을 중심으로 믿음의 둥지(교회)를 인천항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1949년에는 고향땅을 등지고 월남한 황해도 출신 목사들과 함께 황남노회를 조직해 초대 노회장이 되기도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부산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으나 9.28수복으로 인천으로 돌아와 현재 통합측에 속한 인천제일교회 교인 일부가 나와 1951년 인천제2교회를(현 예장합동) 설립하고, 1955년 11월 6일 위임목사가 되어 1965년 2월 18일 79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한 교회에서만 목회 하다가 은퇴하였다. 그가 25회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안건들을 잠시 살펴보면 ① 종교교육부가 청원한 <기독교보>를 총회 기관지로 할 것을 결의 하다. ② 불신자가 집필한 신편 창송가 발행은 불가하다. ③ 경북노회 분립건(경북·경동)은 허락하기로 하다. ④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구역을 철폐하기로 가결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성실한 목회사역을 감당하여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도자로 살았다. 1977년엔 그의 나라를 위한 애국충정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우리시대의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요 교정가(敎政家)였다. 지금의 인천제2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건영 목사는 그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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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2
  • 33. 제7회 총회장 김선두(金善斗) 목사
    평양 출신으로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작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요람지로 알려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1년 처음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였다. 또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출입하다보니 평앙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에 진학, 숭실 사범 강습과(講習科)를 졸업하고, 1907년부터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봉사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장로로 장립되었다. 같은 해 숭덕(崇德), 숭현(崇賢)학교 교감으로 봉직하기도 하였다.한편 1909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의 장로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교회에서 섬기는 장로직(長老職)을 겸임하면서도 선교사의 권고로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고 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그해 6월 조선장로교회 목사로 안수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 안수를 받자마자 바로 평양 서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1915년엔 또 모교인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의 초빙을 받고 강사를 겸하였고, 같은 해에 평양노회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19년에 3.1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김 목사는 어느 누구 보다도 적극적으로 가담 활동하였다. 이때에 장로회 평양신학교 요청으로 출강하기도 하며 한편 송산리교회, 신암교회도 시무한바 있으며,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장으로, 평양노회 경내의 욱정교회, 봉천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특히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가 일제로부터 강요 당하자 김선두 목사는 이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이의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잠시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귀국하니 이미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어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그동안 일제 당국의 잔학한 학정이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북쪽에서의 심상찮은 기독교 박해 분위기를 느끼고 드디어 남한으로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교회사대사전 제1권 강병도편 기독지혜사 1994. 서울 p.292 참조).김선두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제1,2,3,4,5회 졸업한 선배들을 제치고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부회장은 자신의 은사였던 마팻(Samel Moffett) 목사가 선임된 것을 보면 선교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1918년 제7회 총회장으로 선출그가 총회장이 된 해는 1918년 9월 31일에서 9월 5일 사이 선천북교회당(宣川北敎會堂)에서 모인 제7회 총회였다. 당시 사회를 맡았던 김선두 총회장은 각 교회에서 공예배시에는 반드시 한글(당시엔 언문이라 하였다)성경을 사용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한글찬송가 제창이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고,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한글을 몰라 찬송가도 자유로이 부르지 못하고 성경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없었던 평신도들 대상으로 개교회적으로 한글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자는 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자각은 1930년대에 이화학교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여름방학 때마다 한글계몽운동이 일어났던 일들이 동기가 되었다.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선봉에 섰던 최용신 양의 열화같은 농어촌의 생활개선과 일손돕기의 일환으로 전개된 봉사활동 속에는 무료로 의료봉사와 한글공부가 주요 활동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기독교계 안에서도 배민수 박사와 유재기목사를 비롯 농촌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확산되었다고 본다. 한글보급운동 적극 권장우리 현대사에 한글보급운동에 가장 크게 공헌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성경을 우리 글로 읽고 찬송가를 한글로 부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한국교회였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의 야학(夜學)으로 이어졌다.제7회 총회에서는 또 한편 북간도 용정(龍井)에 김내범 목사, 중국 단동 봉황성(鳳凰城) 관천에 차형준 목사, 북간도 목능현에 백봉수 목사를 선교사로 각각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중국산동성(山東省)에 중국인(漢族)을 상대로 선교를 계속 지원하기 위해서 홍승한, 방효원(方孝元) 목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제7회 총회에서는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함으로 목사직을 휴직하게 하기도 하였다.이때 오늘까지 한국교계 전문신학 학술지로 이어오고 있는 신학지남(神學指南)을 3월에 창간하기로 결의했다. 교회행정으로는 평북노회를 평북과 의주노회로 분립하기로 한 것인데, 장로교 초창기에 노회분립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초대교회의 열심과 부흥 발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총회석상에서 한센병(Leper) 환자들을 위한 특별헌금을 시행하는 등 교회 주위에 있는 소외 계층에 대한 선교열의를 엿볼 수도 있다. 김선두 목사는 총회장 재임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평양에서 전개된 3.1독립운동에도 자신이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으며, 독립운동 주모자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이로인해 이듬해(1918년) 제8회 조선야소교회장로회 총회시 총회장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개회예배 설교를 하지 못하였다. 이를 지켜본 주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 가석방이라도 시켜 총회를 개회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0월로 연기해 놓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3.1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서 3년간 옥고3년 간이란 긴 옥살이를 끝내고 출옥한 김선두 목사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에 있는 송산교회(松山敎會)를 담임하면서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출강했다. 1926년에는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있는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1933년에는 함경북도 성진(城鎭)에 있는 옥정교회를 시무하였다. 그리고 이어 1935년부터 만주 봉천교회(奉天敎會)를 시무하였고, 1938년에는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었던 만주신학원(滿洲神學阮)을 설립하는데도 한 몫을 감당하였다. 김선두 목사는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를 적극 반대하면서 원만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단독으로 도일(渡日)해 일본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교 정치인인 이비끼(一四信亮)와 마쯔야마(松山常部) 장로 등을 만나 그 뜻을 이루고자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김선두 목사는 부산으로 귀국하자마자 일본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즉시 유치장으로 끌려가 투옥됐다. 감옥에서의 그의 고통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자 바로 월남해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 현 총신대신대원 전신)을 재건하는데 참여해 힘을 합하였다. 김선두 목사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아들 김성락(金聖樂) 박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 김성락 박사는 1924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1927년 장로회신학교를 21회로 졸업하고 도미해 신학박사(Th.D) 학위를 마치고 미국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하였다. 그는 서울에 재건된 모교 숭실대학교 이사회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1958년 숭실대학교 제2대 학장(1대는 한경직)을 역임하고 한국교계와 교육계에 크게 이받이 하기도 하였다. 김성락 박사는 임기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평생 그리던 고향땅 평양을 방문, 아버지 김선두 목사가 이루지 못한 실향의 서러움을 이루었다. 방북했을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김 주석이 김성락 박사에게 식사기도를 해달라고 하여 기도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월남해 통일을 바라며 기도했던 김선두 목사는 그리워하던 평양의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으나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주님의 품으로 1949년 6월 25일 73세를 일기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거룩한 생애를 마쳤다(총회를 섬긴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39-4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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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2
  • 32. 제6회 총회장 한석진(韓錫晋) 목사
    평안북도 의주 출신한석진(韓錫晋 1868.9.6~1939.8.20)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부동에서 양반가문인 청주(淸州) 한씨 한지운(韓祉云)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9세 때부터 19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종교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유교에 염증을 느끼고 의주에 있는 석숭산(石崇山)의 금강사(金剛寺)에 다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력(生命力)이 없음을 깨닫고 도교(道敎)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부친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때 이미 만주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돌아온 백홍준과 서상륜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기독교에 관한 생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또 의주의 김이련(金利鍊)으로부터도 기독교에로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유 받기도 하였다. 그는 1884년 고향 인근에 살고 있는 이일심(李一心)을 만나 결혼하였고, 기독교로의 개종에 대하여 부친의 만류로 머뭇거리다가 1887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한약재(漢藥材) 장사를 하면서 속국의 한을 깨닫고 기독교에 입신(入信)하게 된다.마팻에게 세례 받고 장로회신학교에 입학1891년 마팻 선교사가 의주에 오자 정식으로 기독교로 전향하겠다는 서약과 문답을 하고 세례(洗禮)를 받게 되었고, 그때 함께 세례 받은 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김정현과 김석례였다. 그는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마팻(S.Moffett)의 조사(助師)가 되었고, 평양에서 그와 함께 장대현(章臺峴)교회를 설립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석진은 1901년 마팻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장로회신학교(처음엔 신학반)에 입학,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예로운 한인 교역자가 되었다. 그는 계속 경성(京城)에 남아 마팻으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고 1893년 3월 6일 마포삼열과 그래함 리 스왈론과 함께 평양으로 올라갔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한석진의 이름으로 집 한 채를 구매하였으나 관찰사 민병석(閔丙奭)의 훼방과 주민들의 항의로 집을 물리는 바람에 처음 계획했던 전도활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선교부로부터 한석진은 평양에 교회개척의 명을 받고 의주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평양으로 불러와 거처를 정하고 5월에는 정식으로 살림집도 구입해 선교기지로 삼고 1893년 6월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이것이 넙다리골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1893년 6월 평양 넙다리교회 설립그러나 1894년 이듬해 5월 10일 새벽 감리교 전도인 김창식(金昌植)과 함께 관찰사 민병식이 보낸 포졸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사형을 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홀(W.J.Hall), 알렌(J.Allen), 스크랜턴(Scranton), 마팻(S.Moffett) 등의 노력으로 구출되었다. 1984년 6월 청일(淸日)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융진(隆眞)으로 피난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희생적으로 전도한 결과 1898년에는 교인수가 950여 명에 달하였다. 그후 1899년 3월 장대현으로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1900년 6월 장대현교회 건축기공예배를 감격스럽게 드렸다. 또한 그는 1896년 10월부터는 평양의 동쪽구역을 맡아 전담하였는데, 그때 소우물(將泉)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03년 6월에는 이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이때에 구동, 신의, 신애, 명의 학교를 세워 4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또 1908년 경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회의 규칙위원장을 맡아 민족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말 사실상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그는 1907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독노회가 설립될 당시 최초의 서기(書記)로 선출되었으며, 독노회 회록 서문을 기술하였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이천교회의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장로회 총회 창설때까지 그는 독노회 서기로 일하면서 전기한 노회록의 서문뿐만 아니라 신경(信經) 제정위원, 과정위원, 사무국위원 등으로 초기 조선장로교회의 체제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교단지 ‘예수교회보’ 창간독노회는 1909년 <예수교회보> 발간을 그에게 맡겼으나 그해 10월에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모임을 교회로 조직하여 ‘동경한인교회’를 설립하고 3개월만에 귀국하여 1910년 2월 29일 그에게 맡겨졌던 <예수교회보>라는 교단지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총독부에 의해 신문 압수사건이 터지고, 그해 말 사장직에서 물러나 의주 맞은편에 있는 만주땅의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1913년에는 교회를 신축하였다. 1912년 9월 역사적인 제1회 총회에서 서기로, 11월 경충노회에서는 노회장(老會長)으로, 1913년에는 부총회장으로 1917년에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17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6회 총회는 목사 장로 총대 76명과, 선교사 총대 42명이 모여 부회장이었던 한석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선교를 위해 큰 공을 세웠던 언더우드(G.H.Underwood) 목사가 1916년 소천하자 그의 정신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의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중요 안건들 가운데에는 ① 함경노회(함북·한남)를 분립하기로 하다. ② 전라노회도(전북·전남) 분립하기로 하다. ③ 총회산하 소학교가 544개, 학생이 16,742명으로 보고되다. ④ 천주교회 교인과 결혼하는 일은 위태한 일이기 때문에 당회가 성혼이 되지않도록 권면하기로 하다. ⑤ 불신자와 혼인한 사람에 대한 책벌과 해벌기간은 당회에 맡겨 처리케 하다. 불신 결혼은 부모까지 책벌당시 불신자와 결혼한 교인은 부모까지 책벌하였는데 배우자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 해벌해 주었다. 권징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는 현대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겠다.총회장을 역임한 한석진 목사는 마산교회(현 마산문창교회)를 사임하고 3.1운동에 가담했던 신의주교회 김병농 목사가 채포되어 교회가 빈 김목사 후임으로 부임해 김병농 목사의 옥바라지를 하며 목회를 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교회가 계속 부흥성장 하자 1921년에는 신의주 제2교회로 분립해 주기도 했다. 한편 한석진 목사는 1917년 총회장 재임시절에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창설 주도함으로, 오늘날 에큐메니칼 정신인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앞장선 선견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총회에서 강원도 금강산 온정리에 세우기로 한 총회수양관 건축준비위원장을 맡아 수양관 건립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 목사의 모금운동과 노력으로 1930년 8900평의 대지 위에 2층으로 연건평 232평의 총회수양관을 <기독교수양관>이란 이름으로 완공하였다. 한국교회 사가인 김수진 박사는 한석진 목사에 대해 평하기를 “한석진 목사는 사상가나 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 깊이 생명을 귀히 여기는 제일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이 설립하고 건축했던 장대현교회가 자체 분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측과 교인측 양자를 설득해 3년간 지속되었던 교회 내부 알력을 인내와 사랑으로 해결해 낸 온유한 마음의 지도자였다”라고 했다. 이러한 한석진에게는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선교사들의 지나친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질책했고, 기득권을 내놓고 조선교회를 섬기라고 호령했다. 자기가 여러 곳에 교회개척을 할 때마다 선교사들이 건축비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거절하고 한국교회 자력으로 완성하였다. 선교사들을 향해 당신들이 할 일을 다했으면 속히 조선을 떠나라고 다그친 인물이 한석진 목사였다. 한석진 목사는 1939년 8월 20일 간경화 증세가 겹쳐 집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나이 71세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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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2-30
  • 31. 제82회 총회장 신세원(申世元)목사
    경북 의성군 출신신세원(申世元 1935.7.17~2015.7.13) 목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81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국민학교를 거쳐 1949년 9월 의성중학교(義城中學校)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교회(의성읍)에서는 소년부에 속해 열심으로 신앙생활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후 1950년 의성읍에 새로 오로교회가 세워졌는데 신세원은 교회를 오로교회로 옮겨 출석하였다. 그 이유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그해 겨울 조성암(曺聖岩) 목사로부터 학습과 세례(洗禮)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에 몰두하였다.1952년 2월 의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를즈음 1953년 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해 1956년 졸업과 함께 서울로 바로 올라와 앞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꿈을 펼치고자 기도하던 일이 그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낸 권정달씨가 그의 안동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신목사는 당시 서울 남산 위에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 예과에 입학하였다. 예과 과정을 마친 신세원은 1957년 6월 총회신학교 본과에 진학하자마자 군(軍) 소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여 만3년간 복무한 후 1960년 2월 대한민국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제대 후 그해 9월 서울 용산역 앞에 임시교사(校舍)로 있던 총회신학교 본과 1학년 2학기에 복학해 본격적인 교역자 훈련을 받았다. 신세원 목사는 1961년 1월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勝洞敎會)에 시무하고 있던 이대영(李大榮) 목사의 부름을 받고 승동교회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면서 1962년 12월 총회신학교 본과를(제65회)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전임전도사로서 장로회 총회신학교대학원(神學碩士 과정)에 입학하여 1965년 의성읍교회에서 모인 경중노회(慶中老會)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았고, 1966년 3월 안계교회에서 모인 경중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대구 협성재단 교목으로 출발목사안수를 받자 신목사는 서울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대구에 있는 협성교육재단의 신진욱(申鎭旭) 장로의 부름을 받고 협성교육산하의 10개교의 신앙교육을 위한 교목(校牧)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동시에 대구에 있는 본교단 소속 지방신학교 가운데 하나인 대구신학교(大邱神學校, 현 대신대학교 전신)에서 히브리어(Hebrew)와 헬라어(Greek)를 비롯 칼빈주의(Calvinism)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8년 협성재단의 교목직을 사임하고 같은 시내에 있는 대구 문화교회(文化敎會)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목사로는 최초의 단독목회 생활이었다. 문화교회를 담임하면서 미래의 한국사회와 목회현장을 내다보면서 뜻한 바 있어 당시 전국 유일의 한국사회사업대학(韓國社會事業大學, 현 대구대학교 전신)에 학사 편입으로 특수교육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수하고 1972년에 졸업하였다. 신세원목사가 정신지체자를 지도하는 이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앞으로 전개될 산업사회에서 발생하게 될 정신박약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세원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이 일은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대구문화교회 시무한편 신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 문화교회의 당회에서는 신세원 목사의 학문적 재질을 인정하여 미국유학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79년 5월부터 1981년 6월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Pasadena)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한국교회의 설교 형태 분석을 주제로 목회학 박사학위(D.Min)를 취득하였으며, 미국 유학중에는 예장총회 소속 미주대회가 운영하는 미주신학교(美州神學校)에서 칼빈주의를 강의하기도 했다. 신목사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얼마되지 않아 서울의 창신교회(昌信敎會)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후원으로 유학을 했기에 당장 옮길 처지가 못되었다. 4년이 지난 1984년 11월 30일 대구 문화교회를 사임하고 창신교회에 부임했고, 같은해 12월 20일 위임식을 하였다. 서울 창신교회 부임 후 교회를 강남으로 옮겨 헌당창신교회에 부임 후 첫번째 맞이한 큰 행사로는 교회설립 50주년 기념 희년행사였다. 기념예배를 비롯 50주년 기념화보집 간행과 교회 신축 등 과제가 산적하였다. 신목사가 부임한지 7개월만에 당회에서 종로구 숭인동 312의 2에 있는 교회건물을 매각하고 강남구 서초동 515번지로 건축이전 할 것을 결의하고 진행 중 1988년 봄 드디어 숭인동의 구 교회 대지가 매각되고 당년도 11월 20일에 이전예배를 드리고, 같은 11월 27일엔 미완공된 신축건물에서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드디어 1990년 5월 5일(토) 오전 11시 헌당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창신교회 70년사, 홍치모, 새한기획 2006. p.203 참고). 신세원 목사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는 초기 한국교회사 관련 사료(史料)를 평생 수집한 8만여 점 자료를 그의 모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경기도 용인시)에 기증, 그의 호를 따 이름지은 문소기독교박물관을 만든 문화사역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박물관 제1전시실에 는 주로 초기 신학고서들과 주일학교 공과가 체계적으로 수집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기독교회 관계 초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예배용품을 비롯 세계 각 선교지용품들이 수집 전시되어 있어 목회자들과 신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역사의 귀중성을 일깨워주는 한국교회 신앙관련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특이한 자료들로는 초기 평양신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수들 강의안(Print물)이 이채롭다(교회와 역사 : 박정규 목사 고희기념논문집 2009, 에덴닷컴 p.237). 그의 생존시에 남긴 말 가운데 개인적인 관심과 취미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교회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말한바 있다(기독교신문 2014. 5. 25 요즈음 어떻게 지나고 계십니까, 인터뷰기사 p.3). 그의 이 말은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명구라고 생각한다. 문소기독교박물관설립해 출신모교에 기증신목사는 1997년 9월 23일 서울 충현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2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총회장에 선출되어 교단 행정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2005년 10월 27일 창신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에게 뒤따르는 별명이 있다. 키가 크고 인물됨이 준수함에 기인한 것이지만 선비목사로 어떤 때는 영국신사처럼 깔끔해서 울어나는 신사목사로 후배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가 가고 없는 지금도 지인들이 만나면 회자화 되고 있다. 그가 이끌었던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안건들을 열거해 보면, ① 타교단과의 강단교류를 본 교단과 신앙고백이 같고 성경관과 구원관이 동일한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건전한 교단은 해 교회 당회장이 책임지고 교류하도록 한다. ② 전북노회를 (전북·호남) 분립한다. ③ 빈야드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자는 다락방운동에 참여 하는자에 하는 것 같이 징계하기로 한다. ④ 개혁합신(合神)측과 본총회 출신은 영입하기로 하다. 개혁신학(합신)을 졸업한 목사는 총회신학원을 1년 수료하기로 하다. ⑤ 편목의 목사임직과 위임 기산는 정치 제15장 13조에 의하여 하기로 하되 강도사 인허때부터 교단가입으로 한다. ⑥ 외국 국적을 가진 목사 후보생(신학생)은 총신에서 각각 노회로 보내어 관리하기로 한다. 신세원 목사의 사역 전반부는 협성교육재단 산하의 교육목회와 대구문화교회의 학구적인 조용한 목회였다면, 후반 목회사역은 서울의 창신교회에서 꽃피운 목회황금기였다고 하겠다. 서울에서의 그의 목회 외적인 활동도 대한성서공회 이사를 비롯 기독교방송 등 기독교 관계의 여러 기관에 참여한 활동과 교단내의 경북노회 서기, 노회장, 노회록 출판위원회 출판부장을 비롯 총회에서도 고시부장, 서기, 부총회장, 기독신보 이사 등 여러 부서에서 교정(敎政)을 성공적으로 펼쳐 나갔기 때문이다. 전술한 대로 그의 사역 가운데 한 가지 의미있고 역사적인 열매는 소천 직전까지 교단지인 기독신문 지상에(문소칼럼)을 연재, 지도자들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명칼럼을 연재한 열정을 불태웠던 일이라 하겠다.(기독신문사에 의해 문소칼럼집이 2권 간행됨)필자는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옆에서 지켜본 신세원 목사야말로 전형적인 칼빈의 후예요, 인자하고도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요, 겸손의 미덕이 그의 언어와 행동에 물신 묻어나는 본받고 싶은 전형적인 장로교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어려움을 안고 시도 때도 없이 후배들이 그를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공적으로만 아니라 때로는 사적으로도 따뜻한 손길로 혹은 사랑의 대접으로 서운하지 않게 돌려보내는 모습을 필자는 여러차례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세원 목사도 하늘나라에 쓰일 곳이 더 있어서인지 지난 2015년 7월 15일 자택에서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생의 부름을 받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2-21
  • 30. 제76회 총회장 이봉학(李鳳鶴)목사
    경북 군위군 우보면 출신이봉학(李鳳鶴 1919.1.9~2004.2.6) 목사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월 9일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우곡리 636-1번지에서 이군이씨와 정윤택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은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1904년 일제는 러시아에 전쟁을 도발, 조선은 일제의 전쟁기지로 화하여 일본군대에 유린되는 동시에 이땅에 통감부가 설치되게 이르렀고,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차례로 침탈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항일 무력투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당시 황성신문(皇成新聞)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다.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도 늑약(勒約)의 무효를 주장했고, 전국의 유생(儒生)들과 원로대신들까지도 이 협약(協約)을 규탄 상소하는가 하면 의열사(義烈士)들의 자결 순국사건들이 줄을 이어갔다.1910년 8월엔 한일병합으로 조선의 국권은 명일천하(明日天下)에서 날강도질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의 앞날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조국의 현실 속에서 이봉학은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군위(軍威)는 경상도 오지 중의 오지였고,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중앙선 철도조차 없었던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너나 할것없이 먹고 살기가 힘든 농촌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 가는 열악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제는 공출이란 명분으로 농산물을 탈취, 일본으로 빼내어 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대구의 인근 지방인 경산(慶山) 자인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엔 친척들도 살고 있었지만 큰 도시 가까운 지방으로 나오면 벌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해서였던 것이다. 그 때가 이봉학의 나이 16세 때였다. 자인(慈仁)지방은 유림(儒林)들이 많아 향교도 있었으나, 비교적 교육환경은 그리 좋지않은 지역이었다. 이봉학은 자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래에 비해 비교적 머리가 좋아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1940년에는 대구공립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중등교육을 무난히 마치고 졸업하자마자 자기가 살고있던 자인면 사무소에 서기로 취직, 젊음을 불태우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고, 청년기의 나이가 되어 결혼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마침 당시 경산과 인접해 있는 경북 청도(淸道)에 있는 신읍교회 유정순목사의 수양딸 김계희씨를 만나 천생의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다. 면서기를 거쳐 경찰학교 졸업이봉학 청년은 키는 보통이었으나 타고난 건강이 있어 무슨 일에나 적극적이었고 한번 마음 먹으면 기어히 해 내고야 마는 강직함이 그에겐 있었다.이후 면사무소 서기 자리에 얽매어 일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좀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침 경찰전문학교(국립)에 응시해 면서기직을 사임하고 경찰학교로 진학 2년의 전과정을 마치고, 첫 임지로 경북 청도경찰서로 임명받아 갔다. 청도는 평야는 30% 정도, 동쪽으론 거의 산지 형태의 지형이다. 유명한 일연(一然)의 고향이요, 그가 도를 닦았던 운문사(雲門寺)가 있고, 이곳엔 여승을 교육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명찰 가운데 하나요, 불교박물관이 있다. 이봉학에게는 개인적으로는 처가가 있는 곳이요, 부임하자마자 신읍교회에 나가며 열심으로 공무(公務)와 함께 신앙생활에도 적극적이었고 청도대성교회에 교역자가 이동되고 공백으로 있을 때엔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說敎者) 역할을 하는 일에도 빛을 발하였다.그에겐 5남1녀의 자녀가 있다. 청도경찰서에 근무할 때, 장남 재문이 1941년 12월 23일 태어났다. 처음 아들이요 기도로 얻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특한 자녀이었겠는가? 장남 재문(在文)은 초등학교를 청도에서 마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대구에 있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유명한 계성학교(啓聖學校)로 진학했다. 그리고 학업을 마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까지 이수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사가 되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성역에 충성을 다하였다. 대구서문교회 부목사로 시작, 안수를 받은 후엔 대구봉덕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노회와 총회 고시부장을 비롯, 중직을 맡아 대구교계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아버지 이봉학 목사의 총회 총무일을 볼 때와 부총회장과 총회장의 일을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고, 아버지에게 힘이 되었고 동역자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이재문 목사는 대구 대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임강사로, 조교수로, 정교수가 되어 그가 퇴임하기까지 많은 후배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이봉학 목사는 바쁜 공무원생활 가운데서도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가정에서는 일찍 홀로된 처형을 사별할 때까지 24년 동안 한 울안에 모시고 살았으며, 사모(김계희)는 집에서 잠자는 기억을 교인들이 모를 정도로 자녀들과 남편의 사역을 위해 평생 교회에서 철야하며 기도로 뒷받침한 기도의 어머니로 기도의 역군으로 그를 아는 신자들의 입에 회자화 되었다.이봉학은 목사가 되기 전엔 교역자 없는 교회의 강단을 지켜낼 정도로 설교나 강의 봉사에 항상 열심이었고 적극적이어서 장로(長老)로 교회를 섬기면서도 보통사람들보다 배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경산경찰서로 전근되어 와서는 공무원으로써 장로로 경산중앙교회를 비롯해 청도대성교회와 안계중앙교회를 설립 하기도 했고, 청도대성교회에서는 자그만치 7년간 강단을 지키기도 했는데, 이봉학 장로가 성직자(목사)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경찰관 신분으로 있을 때는 경상북도 최우수 모범경찰상을 받기도 했으니 그의 성실함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50대 후반에 경찰공무원직 사임하고 신학교 입학드디어 그는 경찰공무원직을 사임하고 대구에 있는 당시 대한장로회신학교(현 대신대학교 전신)에 진학, 신학훈련을 받으며 목회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50대 후반이었으니 그의 결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총회신학교를 거쳐 드디어 자기가 속한 경청노회(慶淸老會)에서 목사장립을 받은 후 의성 안계교회와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 및 경산중앙교회의 위임목사로 그의 마지막 인생을 목숨을 걸고 목회사역에 열정을 다하였다.압량제일교회 재직시에 총회 총무로 2차(6년간)나 봉사하였는데 총회 행정과 재정자립을 닥는데 큰 이바지를 하였다. 이런 그의 강직함과 성실과 실천력을 인정해 그는 총무직을 마친 후 바로 교단 행정의 길인 부총회장(1990. 9)에 피선되었으며, 이듬해 1991년 9월 대구 동신교회에서 열린 제76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말년에 경청노회의 노회장을 비롯 경청노회 직영 성경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노회와 총회 안에 일어나는 잡다한 일들에 관여, 명쾌한 해결사로 혹은 협력자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그의 봉사직으로는 경중노회장, 경중노회고등성경학교 교장, 경청노회장,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및 감사, 대신대학교 강사, 교단지인 기독신문 실행이사 등. 그가 총회 총무 재직시엔 총회회관 건립시 11억원의 부채를 해결해 교단 행정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경청노회 총대로 20년간 연속 봉사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찬송가협의회 회장, 한국찬송가공회 공동회장(4회), 러시안선교회 총재, 사랑누리선교회 이사장, 북방선교대학원장, 총회원로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이러한 그의 공력을 인정해 미국장로교신학대학으로부터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총회장 재직시에 결의 시행된 안건들을 보면, ① 노회분립(한남, 중부, 군산과 군산남, 수원노회를 남수원, 서수원으로) ② 노회조직(동남아) 및 노회북구로는 여수노회 ③ 이장림씨를 이단으로 규정하다 ④ 할렐루야기도원 생수에 신유능력, 유·무건은 비성경적임으로 금지하기로 하다 ⑤ 공예배 사용성경은 개역성경만을 사용하기로 하다 ⑥ 총회신학교에 입학할 편목대상 교단은 고려파, 예성, 기성, 감리교, 구세군 기타 장로교회로써 우리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같이 하고 학력과 자격을 구비한 자들에게만 응시키로 하다 ⑦ 모든 출판물은 총회가 직영하되 총회 임원회와 출판부가 협의하여 출판부를 관장하기로 하다 ⑧ 은급기금 조성을 위하여 각 교회 경상비 예산의 0.2%를 책정하여 납부하기로 하다. ⑨ 제7대 총무로 최병환 목사를 인준하다 ⑩ 기독신보사 사장, 주필은 사장과 주필 이외에는 타 부서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다 ⑪ 계룡교회 건축비 모금을 위해 목사장로 권사는 2만원 이상, 전도사는 1만원 이상 거출키로 하다 ⑫ 문서규정과 보수규정을 제정키로 하다.이봉학 목사는 운동으로 평소 늘 자신의 건강을 관리했는데, 특히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특기가 탁구다. 그가 제직한 교회들마다 젊은이들이 그를 이겨낸 적이 없었고, 그가 총회 총무로 봉직할 때에도 총회의 젊은 직원들이 그를 이겨 본 적이 없다는 일화를 남기었다. 한마디로 그는 겉으로는 경찰관 출신이라 차가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그를 대했던 주위의 모든 교계 인사들의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외유내강한 분으로 그를 기리게 된다는 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2004년 1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순간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12-10
  • 29. 제51회 총회장 박찬목(朴燦穆)목사
    황해도 안악군 출신박찬목(朴燦穆 1915.11.4~1979.2.8)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출생하였다. 박찬목은 1932년 안악읍에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를 졸업하였다. 젊은 나이에 믿음이 좋다는 평을 듣게 되었고, 교회 영수로 임명되어 시골교회를 돌보다가 소명을 받게되어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다짐하고 194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폐교를 당한다. 이 학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학교인데 보통 이 학교를 언필칭 후 평양신학교라 일컫기도 한다.당시 서울(京城)에서는 김재준, 한경직, 송창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설립되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에서 평양장로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한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김석창, 윤하영 같은 민족주의자가 신학교 운영 책임을 맡은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무허가(無許可)를 빌미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신학교측은 일본 당국과의 마찰을 피해 신학교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에 있는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1940년 2월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신학교를 시작하고 당시의 교권(敎權)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 평양신학교’를 “채필근신학교”라 부르기도 한 것이다.1941년 6월 대금교회 전도사로 출발박찬목은 1941년 6월 안악군 대원면 대금교회 전도사 사역을 시작으로 줄곳 38년간의 길고도 먼 목회자의 험난한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박찬목이 태어나 성장한 황해도 안악(安岳)은 민족운동의 본산지라 할만큼 일제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안악 사건과 소위 105인 사건의 중심인물과 활동 근거지가 바로 이곳 안악이었던 것이다.안악 사건은 1910년 12월에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그 배경은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을 때 국권이 완전히 일제당국으로 넘어가고, 구국계몽운동이나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할 수 없게 되자 국외에서라도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하여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안중근의 사촌이 되는 안명근 의사가 자기의 고향인 황해도 안악을 중심으로 안악과 해주의 부호들을 상대로 자금을 염출해 내는 일을 진행하였는데 이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소위 안악 사건(安岳事件)이라 부른다. 다음으로 105인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일제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조선민족 독립운동들이 줄기차게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우후죽순처럼 퍼져 나가자 항일운동의 목표를 꺾어버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 이유를 당시 신민회 활동의 근절과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자들 105인을 지목해 반일민족운동 기운을 잡아볼려고 음모한 사실이 후에 탄로나 “105인 사건”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사실 이 두 사건은 당시의 신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혼합되어진 배경이 겹쳐있어 일제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 속에는 안악지역 민족세력들의 인격형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때 일찍이 기독교 복음을 통해 얻은 민족자의식과 신앙의식의 협동력으로 도출된 결과라고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신앙의 자유찾아 월남박찬목 목사는 한평생 목회자로써 한 길을 매진하였기에 그의 생애사(生涯史)에 큰 굴곡은 없는 것 같다. 그는 1945년 9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본과 40회로 졸업, 그해 11월에 황해노회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대금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1942년 2월에 해주보안서에 잠시 구금되어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는 북한에서는 기독교신앙의 탄압의 서곡임을 깨닫은 박찬목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드디어 월남하게 된다. 월남한 그는 전남 광주(光州)로 간다. 1947년 9월 당시 지명으로는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교회에 부임했다. 이곳에서 1949년 9월까지 사역하다가 1949년 10월 30일 광주중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된다. 당시 광주중앙교회는 자유주의신학, 소위 신신학의 조류가 밀어닥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박찬목 목사에게는 이것을 수습해야 하는 대명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후 1959년 9월 서울 염광교회로 임지를 다시 옮기게 되었고, 1959년 5월에는 그의 마지막 목회지가 된 혜성교회로 임지를 옮겨 1979년 2월 64세로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열심과 성의를 다해 희생적이고도 모범적인 목회자로 살았다. 목회자, 보수신앙 수호자, 교정가교회사학자요 언론인 출신 김남식 박사는 박찬목의 사역을 일컬어 목회자, 보수신앙 수호자, 교정가로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회(2015.11.4 혜성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박찬목은 한평생 보수신앙 수호자로 헌신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전도사 시절의 구금 사건이나 공산치하에서의 구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 색채보다는 보수적 신앙수호의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월남하여 목회자로 헌신하면서도 보수신앙 편에 서서 예장합동 교단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남았다.”1959년 WCC 신학문제로 통합측이 이탈해 나갈 즈음에 총회 서기직을 맡아 서울의 이환수, 부산의 노진현, 광주의 정규오 등이 정치적 또는 사상적 동지였고, 후에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지도를 받았다.당시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은 통합측이 WCC를 지지하고 나갔을 때 적은 수의 무리였지만 총회의 정통성을 파수하고 이것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박찬목이란 거목이 항상 서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1979년(대구 동부교회에서 모인) 총회 당시에도 이른바 비주류 측이 이탈해 나갔을 때도 잠간이나마 행동을 같이 한 것에서도 그의 이 보수신앙수호의 자세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박찬목 목사는 순수한 목회자였지만 교회 정치에는 무리하게 활동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1953년에 전남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고 그해 9월 제39회 총회에서 회록서기로 피선되었다. 그후 1966년 교단의 분열 파동이 지나간 후 제5회 총회장에 피선되어 교단 정치의 핵심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교단정치와 행정에 관여하기는 총회의 서기와 회록서기 자리를 여러 번 오르내리며 봉사하였으나 늘 교단 발전과 화목에 앞장섰다.그는 총회 임원직 외에도 경기노회장(1972, 1972)으로 1967년에는 총회신학대학 이사로, 1965년에는 기독신문 이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월남 후 서울에서 목회할 때는 좀더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경희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고, 1973년에는 미국 lmanuel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Honorary Doctor) 학위를 수여 받기도 하였다. 박찬목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와 기도회는 매우 경전하였으며 엄숙하였다. 성도들은 그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에 참여하고 감사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고 증언한다.국내외 선교사업에도 늘 앞장그는 국내외 선교하는 일에도 늘 앞장 섰으며, 총회가 파송하는 선교사업에는 교회 각 기관을 독려해 기도와 헌금으로 돕는데 앞장섰다. 1977년 1월 14일 심근경색으로 잠시 육체의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건강을 회복한 박목사는 1979년 2월 4일 주일에 <초점과 그리스도의 존귀>라는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가 그의 고별설교가 되었고, 마지막 그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지난 2015년 11월 4일 그가 목회를 했던 혜화동의 혜성교회에서 그의 유작 설교집 ‘시대의 경고’가 발간됐다. 이는 현 당회장 정명호 목사의 배려로 재판 복고하는 박찬목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예배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 책의 발행인 정명호 목사는 선임자였던 박찬목 목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첫째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보수개혁신학에 근거한 신앙운동가로, 둘째 본 교단의 신학적 순수성을 지키는데 헌신한 분이었다고…(시대의 경고, 박찬목 저, 혜성교회 2015 p.5~6참조).그가 재직했던 제51회 총회 결의안을 살펴보면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예배를 드리다. △이북 출신 교역자들의 중혼 문제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4장 6항의 이혼 조건 두 가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다. △채은수 목사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키로 결의하다. △세속화 운동에 가담하는 자는 엄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보수교단(본교단, 고신, 예수교성결교) 연합기구를 조직하기로 하다. △헌금통일안을 가결하다. △회의경상비 10분의 1을 상회에 상납하기로 하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번역 출판하기로 하다.박찬목 목사의 유해는 원래는 서울 청암교회 묘지에 안장하였다(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뇌조리산 1번지, 박형룡 박사 묘소 오른쪽). 최근 서울 혜성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그의 유고로는 1978년 5월 31일 발행된 ‘시대의 경고’란 설교집이 있으며, 2015년 8월 31일 혜성교회에 의해 증보판이 나왔다(참조 자료: 혜성교회 65년사, 광주중앙교회 80년사, 박찬목 목사 탄생 100주년기념예배 순서지 기념강연 김남식 박사 글).박목사의 슬하에는 2녀1남이 있는데 아들 박윤철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미국에서 목회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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