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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 제92회 총회장 김용실(金容實) 목사
    충남 서산 출신김용실(金容實, 1945. 2. 10~) 목사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 역시 우리나라가 일제하에서 36년이란 긴 터널속에서 광복을 예상할 수 없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장래 역시 한치 앞도 가름할 수 없는 가난과 고통, 혼란과 배고픔 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고학으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태어난 충남 서산(瑞山)은 충남 서북단 반도부에 위치한 지역이나 동쪽으로 예산 당진으로 이어지고, 동남쪽은 홍성, 북쪽은 황해에 접해 삼면은 거의 바다에 싸여있어 해상교통의 요지이나 서울로 가는 육로는 그리 발달하지 못한 곳이어서 주민들의 말투가 상당히 느리다. 이런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어느 집에 남매가 있었는데 오빠가 군에서 휴가를 왔다가 기간이 다 되어 기차역에 나가 이별을 하며 동생이 오빠를 향해 ‘오빠 잘 가유’라고 하는 소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차내 방송은 다음은 용산역입니다. 내리실 분들은 소지품을 잘 챙겨 안녕히 가십시오 하더라는 웃으게 소리가 가끔 나이 많은 노인들 대화속에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을 박차고 서울에 올라온 용실 소년의 용기와 기개는 참으로 대단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변찮은 직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당시 광복 이후 설립된 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중앙신학교는 종로 세운상가에 이호빈 목사가 야간학교로 운영하고 있었다. 용실 청년은 이 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행복한 학창생활을 할 수 있어 그나마 고향을 뒤로하고 의지할데 없는 서울이란 곳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행운아였다. 그는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에서 교내 설교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훈련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장총회신학교에서 목회지망생 특별과정 모집 소식을 알고 응시하여 합격해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총회신학교 별과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는 1971년 3월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5일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이듬해 1972년 10월 16일 목사로 임직 받았다. 그가 총회신학교를 다닐 때는 서울의 성도교회 임묘선 권사님의 후원으로 신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신학교를 마친 김용실 전도사는 신학생 시절 후원했던 권사님의 도움으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2동 284의 40번지에 연정교회(姸正敎會)를 설립하여 부임하였다. 중앙신학교 거쳐 총회신학교 졸업성남시에 연정교회 개척 설립분당 신시가지에 대지 구입 교회 건축제92회 총회서 부 총회장 거치지 않은채 총회장 당선‘연정교회’는 ‘꿈과사랑의교회’로 명칭 변경땅을 기증한 임묘선 권사와 함께 1971년 5월 1일 교회를 시작, 6월 29일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입당예배시에는 새신자 3명이 참석하여 가족들과 함께 하는 감격적인 감사예배였다. 다시 1973년 2월 1일 수정구 신흥2동 284-37에 48평 부지를 매입하고, 1975년 7월 15일 본당을 증축했으며, 1977년 8월 1일 새성전 건축에 들어갔다. 같은해 11월 28일 새성전을 완공해 봉헌예배를 성황리에 거행하였다. 1984년 3월 4일 교회설립 후 처음으로 박재용 김정웅 장로 장립으로 조직교회로 발돋움하는 토대를 마련,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해 교회는 정상적인 행정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같은해 6월 12일 김용실 목사 위임식을 노회 위임국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루었으며, 조직교회로서 힘차게 출발하였다. 1985년 3월 16일 수정구 복정동 523-1 번지에 새로운 새 성전시대를 열기 위하여 대지 520평을 매입하였고, 1991년 6월 30일에는 교회설립 2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같은해 10월 31일 분당 신시가지 수내동 21블럭 630평의 대지를 다시 매입하였다.1992년 1월 8일 김노미 황선옥 김규례 김정희 유효순 박난양 최경란 황금순 권사취임예식이 있었고, 1994년 5월 1일 현재 대성전 건물을 착공해, 같은해 11월 28일 온 성도들과 함께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연정교회란 이름으로 설립된 교회는 중대형교회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2천년대에 이를 즈음엔 3000여명에 이르는 성도 수만 보아도 개척자인 김용실 목사와 당회원들과 성도들은 모두들 감사 감격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11월 26일 건축기술설계부문에 이름있는 정림건축설계사와 새성전 신축공사 계약 체결을 하고, 대지 1,000평에 연건축 면적 2,835평 규모의 교회건축에 들어갔다.2002년 4월 7일 김주량 집사를 장로가 장립됨으로 당회가 보강되었다. 5월 1일 교회건축허가가 구청으로부터 떨어졌고, 9월 2일 이레종합건설회사와 건축도급계약을 체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99번지에 새 성전공사가 착공되었다. 9월 8일 온 교우들이 모여 착공감사예배를 드렸다(현재 꿈과사랑의교회 Computor 파일에 담긴 내용 정리, 2017. 5. 26 정리함).9월 28일에는 남상목 조규술 장로 장립과 강두애 집사 외 55명의 권사 취임식이 있었다. 2007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본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92회 총회가 회집되어 본교회 담임 김용실 목사가 총회의 수장(首長)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 해엔 유독 목사 부총회장 후보가 4명이나 입후보해 3명이 제비를 뽑지 못하고 나머지 한명인 김용실 목사가 빨간색의 제비 구슬을 뽑아 예상 외의 인물이 부총회장 후보가 총회장으로 뽑힌 극적인 순간이어서 총회를 개최한 연정교회 교인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총회 대의원들은 모두가 놀랐다. 일부에서는 총신대학교 본과(신학대학원) 출신이 아니어서 불가 여론도 있었으나 총회장으로 당선 선포가 되어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꿈과사랑의교회 원로장로 김주량 장로의 증언 2017. 5. 1). 2009년 12월 16일 박주명 장로가 장립해 당회를 보강하고, 2012년 9월 2일 본교회 개척설립자 김용신 목사가 원로목사로 취임과 동시에 은퇴했다. 그 해 10월 31일 제2대 담임목사로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의 아들 김동원(金東元) 목사가 본교회에 부임하였으나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망하게 되어 잠시동안 교회는 검은 시름과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당회원들 중심으로 새로운 도약의 문턱에 큰 시험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며 기도하던 중 교회는 중의를 모아 2015년 1월 1일부로 그동안 사용해 오던 연정교회라는 이름을 ‘꿈과사랑의교회’로 바꾸고 새 헌신과 봉사를 다짐하며 기도하던 중 2015년 11월 1일부로 총신대학교 교수로 사당동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김동진 목사를 청빙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2016년 1월에 미국 유학(Fuller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육군 군목(대위 예편) 출신 박종건 목사가 수석부목으로 동사목사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매진하고 있다. 김용실 원로목사는 예장 총회산하 친목모임인 예장증경총회장협의회 회장(2015년)으로 인생의 남은 이력을 교단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있으며, 사모와의 슬하엔 1남1녀가 있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92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기간을 하루 연장하여 매년 9월 3차 주일 후 월요일 오후 2시에 개최하기로 하다. ② 대회제 실시는 제도적 요건을 충분히 갖춘 후 시행키로 하다. ③ 21세기 교단비전계획을 승인하고 총회임원에 맡겨 추진하기로 하다. ④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은 지속사업으로 민족복음화 대부흥운동을 추진키로 하다. ⑤ 영주권자도 총회상비부장 및 총회임원 입후보자 자격을 주기로 하다. ⑥ C.E(청년면려회) 연령제한을 50세까지 하기로 하다. ⑦ 이단관련 위위원회를 이단대책상설위원회로 통합키로 하다. 김용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에 투신, 오직 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물로, 후배들에게는 큰 격려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지도자로 한국교회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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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8-24
  • 87. 제67회 총회장 김현중(金顯中) 목사
    경북 상주 출신김현중(金顯中, 1922~2007. 1. 27) 목사는 경상북도 상주(옥산)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당시 조선의 청소년들에게는 암흑의 세계였다. 경제는 피폐했고 정치는 이미 일제의 손아귀에 휘여잡힌 뒤였으니 교육과 문화의 혜택이란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시기였다. 도시나 농촌 구별없이 막막한 처지였다. 상주라고 예외 일 수 없었다. 상주는 경상도 중서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오지로 알려진 곳이라 농업이나 교육발전이 뒤졌다. 상주는 안동이나 예천, 영주에 비해 기독교 복음 역시 비교적 늦게 전해진 것같다. 김현중이 태어난 옥산(玉山)엔 유림(儒林) 세력이 자리잡고 있어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었다. 그러나 김현중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어 서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친구따라 다니며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우며 공부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하고 교회에 나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성경이야기와 동화를 듣는게 그렇게 좋았다. 상주에 교회가 설립되기는 1910년 3월 1일에야 이루어졌다. 상주교회를 모 교회로 하여 인근지역에 세워진 교회가 부원, 북부, 지사, 능암, 병성, 외당, 엄암, 내곡, 서문교회 등 9개 교회가 세워졌고, 김현중이 살았던 옥산면 청리에는 1920년에 이르러서야 외지에 살던 김문석에 의해 교회가 서게 되었다.그는 고향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당시 경서노회가 운영하던 김천에 있는 경서성경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전도자의 길을 준비했다.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에 진학, 학업을 마치고 처음 교역자로 사역에 임한 곳이 항구도시 부산이었다. 그가 전도사로 첫번째 부임한 교회는 부산진구 당감동 253번지에서 출발한 피난 시절에 설립된(1951년 9월) ‘남도교회’였다. 그가 이 교회에 부임한 날짜가 1952년 3월이었으니 교회가 출발한지 채 1년도 안되었던때로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 교회는 당시 피난민 수용소에 살고 있던 박운수씨 댁에서 이중열, 김경도씨 외 몇 명이 참석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 문자 그대로 난중의 교회였다. 1951년 11월 정문교 전도사가 부임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교 부지를 기증한 백남조 장로(당시는 집사)로부터 군인들이 쓰던 군용천막 한 채를 기증받아 겨우 예배처소를 마련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교를 막 마치고 목사안수도 받기 전 이같은 어려운 개척교회를 물려받아 그는 예장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에 있는 당감교회(현 남도교회)를 거쳐 거제도의 장승포읍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있던 중, 1955년 12월 서울 청량리 전농동에 있는 전농교회의 청빙을 받아 상경하게 된다. 김현중 목사가 전농교회에 정식 부임한 해가 1963년 2월 17일이었다. 그는 상주에 있을 때 유림사회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끊고 매듭짓는 일, 즉 법적인 문제나 상식이 분명하여서인지 교단 안에서는 늘 법과 원칙을 잘 아는 법통으로 통하였다. 그래서인지 전농교회를 맡아 사역하면서 늘 엄격하고 복잡한 노회와 총회 문제 해결에 번득이는 그의 혜안과 지혜가 작용해 무난히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는 부임한 그 해 1963년 6월 21일 위임식과 함께 박주양 장로 취임과 조형모 김명진 집사를 장로로 장립해 당회를 보강하였다.1967년 7월 10일 예배당을 적벽돌 2층 으로 대지 188평 위에 연건평 172평의 새교회 건물을 건축했다. 1972년 4월 8일엔 윤재동 장로 장립과 김영복 권사 취임식이 있었으며, 1973년 2월 18일 김현중 목사 부임 성역 10주년 근속 축하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18일 박춘수 김대옥 장로 장립과 교회설립 2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또 1974년 5월 4일 교회성장에 따라 교육시설의 필요성을 느껴 4층 콘크리트조로 연건평 150평의 교육관을 건축하고, 1975년 2월 27일 성전봉헌 및 교육관 준공예배를 드렸다. 또 1980년 1월 17일 김성문 이문원 김태준 장로 장립과 김득상 김철규 김종훈 박무송 서주식 집사 안수식과 이차순 전덕순 박영운 권사 취임식이 있었다. 김현중 목사는 수도노회 노회장과 한국찬송가공회 공동회장을 역임, 교단을 대표하기도 했다. 1981년 9월엔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1982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군산개복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7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에 선출됐다(교회설립 55주년 기념화보집, 김광영 편, 예장전농교회 2008, 서울 p.6-7, 124-125). 그리고 1990년 12월 20일에는 전농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그가 남긴 설교 한편을 통해 그의 인생관과 목회철학을 짐작해 본다. 성경 출애굽기 19장 20절~25절을 본문으로 하여 ‘시내산’이란 제하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니 16절~19절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하늘의 높은 보좌에 계시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20장에 오면 십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구원 받은 백성이 순종해야 할 언약입니다. 오늘날 시내산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백성들과 함께하는 곳이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구원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시내산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시내산은 하나님을 높은 곳에 모신 곳입니다. 자식이 하나님보다 높다하면 불효자식이고 패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던, 믿지않던 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시내산은 신칙(信則)받고 삼가 조심해야 할 곳입니다. 신칙이란 알아 듣도록 거듭 훈계하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에게 알아듣도록 주의하고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대 하나님 앞에 방자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 앞에 죽을거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경거망동하거나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경고의 말인 것입니다. 셋째 시내산은 성결하게 해야 할 곳입니다. 22절에 보니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성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시내산은 곧 교회입니다. 시내산이 거룩한 하나님의 강림하신 곳이듯이 교회도 그렇습니다. 시내산에 구원의 하나님의 말씀이 있듯이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이 한 편의 설교를 보면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요 핵심인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신학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초판 p.101-105 참조). 그가 재임했던 제67회 예장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복구노회 및 지역노회 조직(한남노회, 한서노회, 충동노회, 서서울노회, 평동노회, 용천노회)을 허락하다. ② 한국찬송가공회 조직(공동회장으로 이영수 목사)됨을 보고하다. ③ 본 총회산하 모든 지교회의 부동산을 총회유지재단에 편입하기로 가결하다. ④ 총회 창립 7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로 하다. ⑤ 신개척지 교회 상호간의 거리를 500m로 재확인하다. ⑥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측) 유지재단설립 허가 받다 ⑦ 총신 이사는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만 파송하기로 하다. ⑧ 총회 유지재단 이사 9인을 15인으로 증원하다. 김현중 목사는 전농교회에 부임 후 만 27년을 한 교회에서만 충성한 후 2007년 1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충성을 다하고 자녀들과 가족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그의 장례는 총회장(葬)으로 치루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8-11
  • 86. 제60회 총회장 장성칠(張聖漆) 목사
    황해도 신천군 출신장성칠(張聖漆 1914~1986. 9. 17) 목사는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신천(信川)군은 서북쪽의 은율군, 북동쪽은 재령군, 남으로는 송학군과 벽성군이 인접해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복음이 평안도 다음으로 교세가 좋은 곳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개한 지역이나 민족들에게 기독교복음이 전파된 곳은 일찍부터 신식문명에 접하는 기회가 되었고 무식한 백성들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배우게 됨으로 마음이 열리고 머리가 깨어나 사리판단의 개념과 선악간의 개념을 바르게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새 세상이 보이게 되어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천이란 곳은 한편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경성으로 오르내리는 길목이 되어 일찍부터 전도자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었다. 신천읍 양장리에는 1911년 3월 15일 설립된 양장교회(良長敎會)가 있었고, 같은 읍 사직리에는 1933년 2월 18일 신천동부교회가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1883년 5월 16일에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인에 의한 조선의 어머니교회로 소래(松川)교회가 서경조(徐京祚)에 의해 설립되었다(韓國基督敎史總覽, 이찬영 편, 所望社 1994 서울 초판 p.937~943 참조). 그의 소년 시절에 이미 신천지역만 아니라 황해도에 한 노회가 조직될 만큼 황해도 전지역에 이미 예수교회가 곳곳마다 설립되어 있어 기독교에 쉽게 접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 계통의 교육기관을 통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권고로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와 장로회신학교 졸업황해노회서 목사안수 해방후 월남황해도 신천 출신들이 세운 서대문교회 부임경신중·고등학교 교목 및 한성신학교 교장 역임고려측 및 통합측과 ‘합동’ 논의장성칠 청년은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언어로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며 영어성경을 접하게 되고 도서관에서 외국어로 된 주석이나 기독교관계 서적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소명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활동만 아니라 복음 증거자로써 지도자의 자질을 쌓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숭실전문학교를 고학을 하며 졸업하자마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3년동안 신학을 이수하고 본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이환수 목사(47회), 문재구 목사(54회)와 함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43년 제38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이듬해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사이 전쟁이 끝나고 광복이(1945. 8. 15) 찾아 왔으나 북쪽에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이라는 좌우 이념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었다. 36년 동안 일제의 강점으로 언어도, 정치도, 산업도 다 앗아간 일본이 패전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을 맞이했는데, 좌우대립으로 해방정국은 점점 혼란만 계속되었다. 선거가 주일에 공공연히 시행되고 뜻있는 신앙인들은 하나 둘 3.8선을 넘어 월남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김경하 목사와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로 남하하였다. 서대문교회(西大門敎會)가 형성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해 보면, 공산주의 정권이 득세하던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황해도 신천읍 서부교회(장연군 장연면 서부리 소재) 교인들이 남하해 1949년 1월 서울 서대문구 교북동 100번지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된 이 연약한 교회는 당시 서대문 영천에 있었던 서대문형무소(현, 안양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있던 박상건 목사가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얼마간 기간이 지난 후 ‘인수학원’을 빌려서 교회를 이전한 후 조동진 전도사를 초청하여 설교와 심방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러던 중 1949년 8월 월남해 대구 침산교회에서 목회하던 고향 출신 김경하 목사를 청빙하였다. 여러번 예배처소를 이전하던 교인들은 교회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서대문 일대를 찾아다니다가 송월동(松月洞)112-2번지에 있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건물을 매입해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예배당 뒷마당에는 높은 종탑을 세우고 매일 새벽기도회부터 종을 쳐서 서대문 일대에 은혜의 찬송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황해도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황해도 신자들이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황해도 사람들과 인근의 장로교인들이 모여들어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거목들의 행진, 서대문교회 60년사, 이계홍 편, 서대문교회 간행 2009 서울, p.24, 28 참조).서대문교회 연혁(2017. 1 간행)에 보면, 1954년 5월부터 2개월간 송월동 112의 55호에 총경비 127만원을 들여 목조와 가 단층 55평 예배당을 신축하였다고 기록하고, 1960년 5월 제1대 당회장 김경하(金慶河) 목사가 사임하고 후임으로 장성칠 목사가 부임하다라고 적고 있다(서대문교회 2017년도 요람 p.9 참조). 교회는 임시로 조직을 갖추기로 하고 북에서 장로로 섬겼던 사람들인 김도측, 이춘화, 한철수, 김명원, 박태환, 문성훈 등과 함께 당회를 조직해 교회다운 면목으로 일신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18일 6명의 장로 취임식을 거행하였는데 바로 1주일 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을 빼앗긴 기간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복으로 다시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예배당을 수축하고 재건하는데 열심을 내던 교인들은 그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예배당을 뒤로하고 피난을 갔다. 1953년 공산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자 교인들이 돌아와 다시 교회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에 있는 교회 가운데 피난 갔다가 돌아와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가 서대문교회였다(같은 책, 거목들의 행진, 이계홍 편 p.32).1960년 11월에 부임한 장성칠 목사는 1963년 6월 18일 새예배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5월 7일 창립 15주년 기념 및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72년 3월 9일 미국으로 가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74년 5월 27일 교회설립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렸고, 이듬해 7월 31일 교육관을 완공하였다.그 사이에 장성칠 목사는 경신 중고등학교 교목과 경기노회 노회장, 경기노회 직영 한성신학교 교장 겸 교수를 역임하며 두루두루 교회 행정면에도 경륜을 쌓아갔다. 드디어 1975년 2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0회 총회에서 그의 덕망과 목회사역과 교단을 위한 수고를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자리인 명예로운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엄격하고 부리부리한 호상(虎像)으로 생겼지만, 자상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목자상이었다. 1975년 11월 8일 장성칠 목사 성역 37주년 및 서대문교회 시무 15주년 및 교육관 헌당식을 가졌다. 1979년 9월 3일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한국음악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80년 11월 교회본당을 증축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교세는 장청유년을 합해 5000명이 넘었다. 중형교회의 발판이 되었다. 1984년 5월 31일 연건평 598평 대성전이 완공, 교회설립 35년만의 대사였다. 장성칠 목사는 목회사역을 마치고 명예로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서울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퇴임후 2년 후 1986년 9월 17일 주님의 부름을 받아 가족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영면하였다. 그의 천국 환송예배는 총회장(葬)으로 치루어졌으며 그의 유해는 서대문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그가 재직했던 예장총회 제60회기의 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목사 인식년제도를 실시키로 하다. ② 한남노회 분립을 허락하다(한남노회·남서울노회로) ③ 전북노회 분립을 허락하다(전주노회·동전주노회·북전주노회) ④ 조직당회로 있을 때에 합법적으로 청원되어 노회가 위임을 하였으면 폐당회가 되었다 해도 그 목사의 위임은 해제되지 않으나 2년 내에 당회가 복구되지 않으면 자동위임이 해제된다. ⑤ 미주 중부노회를 조직하다. ⑥ 일만교회운동은 추인하고 적극 추진하기로 하다 ⑦ 고려측과 합동문제는 시기를 보아 추진키로 하고, 통합측과는 이미 합동원칙을 세운 바 그 조건이 가하면 합동키로 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7-27
  • 85. 제68회 총회장 배재운(裵在雲) 목사
    황해도 은율군 출신배재운(裵在雲 1913. -1995.2) 목사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殷栗)이란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은율은 산야에 가을이면 밤나무에서 밤이 많이 열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다. 은율군의 지형을 잠시 살펴보면 동쪽은 안악군, 서쪽은 송화군, 남동쪽은 신천군, 북쪽으로 황해와 대동강 하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 역시 가까운 평양에 기독교 복음이 일찍 들어옴으로, 일찌기 복음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와 전한 곳이다. 재운 소년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부모들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친구따라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에배당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계속해 교회에 다니다보니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어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처럼 재운 소년은 친구따라 영생의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되어 성수주일 지키기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제사를 못 드린다고 하여 부모님과 친척들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재운이 태어난 시대 역시 일제하여서 조선말도 못쓰게 하고 이름과 성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등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나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선교사님들이 조선말로 설교하는 말씀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도 하였다. 북한에서의 신앙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북쪽은 공산당들이 정권을 휘어잡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대립도하며 핍박하기 일쑤였다. 소련군들이 신의주와 평양을 점령하고 정치를 펼치기에 이르렀고 애국지사들과 많은 지주(地主)들도 앞다투어 남쪽으로 피난을 가거나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러시아로, 멀리로는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북쪽사회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리만큼 점점 혼란이 가중되었다.배재운 청년도 친지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와 잠시 서울에서 머물며 살고 있었으나 전세가 기울어져 남으로 남으로 정처없이 설음많은 피난민이 되었다. 그는 피난 중에도 다행히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된 총회신학교를 찾아가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3년 과정을 하나님의 은헤로 공부할 수 있었다. 전쟁통에 먹을 것, 입을 것, 거처하는 모든 것들이 원만하지 못하였다. 총회출판부에서 펴낸 ‘역대 총회장의 증언’이란 설교집에 단 한편 남은 설교를 보면 그의 일생을 그대로 토로한 것 같아 읽다가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성경본문 사도행전 7장 30절~38절, ‘광야교회’란 제목의 설교에서,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었다(38절).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하시었다. 이로 보아서 교회는 생명의 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제사와 경배를 드리는 장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선조들이 하신 일들을 더듬어 보고 오늘 우리도 거기에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첫째는 노아의 방주교회입니다. 사십일 사십야 내린 홍수로 온 세상이 멸망받았지만 노아의 8식구는 믿음을 지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6.25 피난 중 대구서 총회신학교 졸업부산 광안제일교회 피난민 교회 맡아 목회지역사회 봉사로 내무부장관 표창 받아“NCC계 교단과 강단교류 할 수 없다” 결의둘째는 아브라함이 드린 모리아 산상교회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에게 대신 수양을 예비해 아들 이삭을 살려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다니엘의 가정교회입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늘 기도했습니다. 사자굴에 던짐을 당하고 풀무불에 던짐을 당해도 기도함으로 살아났습니다(단 6:10~17). 넷째는 사무엘의 제단교회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도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화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이어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미스바와 센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썼다(삼상 7:5). 다섯째는 다윗의 목양교회입니다. 다윗이 양을 치면서 조용히 기도한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은 목양교회입니다(삼상 16장). 여섯째는 솔로몬의 성전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솔로몬을 낳기 전에 평강의 사람이라고 계시하고 알게 하시어 그로하여금 성전을 짓게 한 것이 솔로몬의 교회입니다(왕상 8장). 위의 교회를 통틀어 광야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 속에 배재운 목사의 생애와 신앙과 삶이 녹아진 핵심이 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못 배우고 못 입고 살았지만 여호와를 알게되고 예수님을 믿게되어 축복을 누리게 된 자신의 진심이 담긴 간증설교가 아닌가 생각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초판 p.106~120 참조).그의 목회사역을 잠시 일별해보면, 부산 수영구 광안4동 741-1에 있는 광안제일교회에서 한 생을 다했다. 이 교회 역시 6.25 전쟁으로 부산까지 남하했던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1955년 6월 6일 김감금 유정필 외 10여 명이 모여 한원돈 목사를 초대 교역자로 모시고 천막을 치고 개척한 교회였다. 배 목사가 부임한 날이 1963년 7월이었다. 신생교회로서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다. 13년만에 겨우 사택(5평)을 마련해 배재운 목사를 4대 당회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배 목사 부임 3년만에 77평의 교회당을 기공하여 그해 12월 29일 교회당과 사택(목사관)을 준공해 교회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이듬해(1967년) 12월 9일 성전봉헌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이명수 집사를 장로로 세워 당회를 보강하게 되었다. 1971년 11월 6일 임은식 장로 취임, 임창도 김동수 박정용 임성은 장로 장립이 있었고, 그동안 교인들의 증가로 1973년 3월 9일 새예배당을 지하1층 지상3층 연건평 200평 규모와 목사관 20평 관리집사 사택 10평 규모의 신축교회 기공식예배를 드렸다. 1974년 3월 1일 손성원 장로 장립과 황용이 장립집사 안수와 최강수 오진화 김은양 원미례 권사 취임식을 가졌고, 1976년 4월엔 목사관 2층 15평을 건축했고, 11월 10일 새성전 및 목사관 준공식을, 11월 27일 성전 봉헌예배를 노회와 당회가 주관 성대하게 치루었다. 1979년 12월 22일 황제면 안증임 이상덕 집사 장립이 있었으며, 1983년 11월 26일엔 안중일 이상덕 최동수 장로 장립이 있었고, 함께 황재홍 김철주 이한영 안수집사 장립과 조원숙 권사 취임식을 거행했다. 1985년 7월 11일 당회장 배재운 목사는 22년간 본교회 시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배재운 목사는 총신대학교 이사를 역임하였고, 내무부장관으로부터 지역사회 봉사경력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은 바도 있어 지역사회 유지들 사이에 덕망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광안제일교회 2017년도 요람 p.31-32 참조).이러한 그의 희생과 봉사를 교단이 인정하여 1988년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평안교회에서 모인 대한수교장로회의 제68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가 재임했던 제68회 총회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 개회일자를 9월 셋째 주일 후 화요일 오후 6시 30분에 개최하기로 하다. ② 1만 교회운동 중앙위원회 제1차~8차까지의 경과를 보고 하다. ③ 통일교 호칭문제는 문선명집단, 문집단으로 칭할지언정 통일교단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의하다. ④ 군산노회 분립을 허락하다(군산노회·이리노회로) ⑤ 청년회를 청장년회로 개칭하고 회원의 연령은 20세~45세까지 하기로 하다. ⑥ 선교100주년기념<한국교회교육100년사>를 발행키로 하다. ⑦ 재판국을 제외한 16개 상비부원 수 27인을 33인으로 규칙을 수정하기로 하다. ⑧ 무지역노회는 가급적 속한 시일내에 지역노회로 귀속하기로 하다. ⑨ 강단교류 할 수 있는 교단은 비NCC계의 교단이며 본 총회가 규제한 NCC교단 인사를 초청하여 학술세미나도 못한다(단 총회가 인정하는 연합집회는 예외로 한다.)배재운 목사는 월남하여 고학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오직 한 교회에서 평생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마치고 1995년 2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7-14
  • 84. 제74회 총회장 이성택(李聖澤) 목사
    평남 대동군 출신이성택(李聖澤 1919. 2. 17) 목사는 평남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 역시 조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참담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철없는 어린 시절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기독교의 요람이었던 평양인근에서 태어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평양은 평안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대동군에 둘러 쌓여 있으며, 남쪽은 중화군(中和郡)에 접해 있고 4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서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기자, 조선, 낙랑,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며, 조선개국 이래 북쪽의 관문 의주로 연결되어 있어 대륙으로부터는 조선 입구의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1866년 중국에서 선교하던 로버트 토마스(Rev. Robert Jermain Thomas, 崔蘭軒) 목사가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병사들에게 배포하다. 순교의 피를 흘린 이래, 복음의 사역자들이 이곳을 향해 계속 들어와 폐쇄사회로 일관했던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목숨을 받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복음의 선각자들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어질만큼 평양은 어두운 18세기 역사를 뒤로 하고 서서히 밝고 희망찬 새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의 답사 이후 마포삼열(Rev. Samuel Moffett 1864. 1. 25~1939. 10. 24) 선교사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조선의 기독교의 복음의 횃불을 들었던 것이다. 소년 이성택이 태어난 대보면은 평양에서 그리 멀지않은 진남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이어서 자연히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았고, 급기야 고향 대보면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고향교회에 출입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었고, 이웃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취명학교에 입학해 1932년에 졸업하였다. 1948년 2월 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운동1·4후퇴 때 가족 두고 혈혈단신 월남피난 중 대구에서 총회신학교 졸업김제 가실교회·대구 신일교회·서울 평안교회서 시무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창립 멤버암울한 일제하에서나마 건전한 신앙 덕택으로 애국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를 기독교 신앙을 통해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해방 이듬해 1946년 평양노회에서 운영하던 득신고등성경학교에 입학, 복음전도자 수업을 닦기 시작했으며, 1948년 2월 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가 12명의 동료와 함께 중퇴하고 만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해 10월 UN군 참전으로 북진하는 국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어 회복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대포면에서 평양으로 나와 잠시 머물며 전세를 광망하였다. 그때 미8군 부대에서 노역(勞役)을 하던 중,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그 해 12월 중공군의 합세로 밀려나자 이듬해 1월 4일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당시 평양에 진주했던 군당국에서는(헌병대) 짧게는 7일, 아니면 늦어도 한달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온 가족을 북한에 남겨둔채 혼자 성경 찬송만 손에 들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고, 언필칭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이성택 목사는 모든 면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그의 마음과 얼굴 한 구석에는 남이 알 수 없는 수심이 드리어져 있다. 그는 월남한 후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눈물의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대구에까지 내려가 전쟁 중에도 대구서문교회(당시 명신홍 목사 시무)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 “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 예과에 입학, 고학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1956년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가실교회(김제시 진봉면 가실리 92)에 부임하여 만 3년 동안 열심으로 섬기었다. 이곳에서 사역하던 중 피난민들 중심으로 갓 출발한 대구 신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목회지를 전북에서 대구로 옮겨, 이곳에서 16년간 독신의 몸으로 최선을 다해 목회의 황금기를 보내었다. 1956년 당시 한국교회 월남교역자들의 중혼문제가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등에서도 불거져 큰 이슈가 되고 있던 터다. 예장 교단 안에서도 문제가 되어 재혼한 목사들 중엔 개교회를 사임하기도 하고, 교단으로부터도 징계를 받는 일들이 생기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성택 목사는 지혜롭게 독신으로 일관하여 주위로부터 성자(聖者)라는 칭송을 받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잠시 전란을 피해 고향을 등진 것이 50년, 60년의 세월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성택 목사는 피난해 나온 이후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온전히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과 경건함을 인정받아 교단을 이끌어가는 총회장에 이른지도 모른다.1976년 대구 신일교회 사역을 마감하고 증경총회장 김윤찬 목사(제49회, 52회 총회장 역임) 후임으로 서울 평안교회(중구 순화동 6-9) 담임목사(1976. 9. 10)로 부임 원로목사(1996. 1. 2)로 추대되고 퇴임하기까지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마감하였다.그는 일선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속한 평양노회와 예장총회를 위하여, 또 사회선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섬김의 본을 보이기도 했다. 1978년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동평양노회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82년 총회군목부장으로, 1987년 군복음화후원회 이사로, 1988년 9월에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이듬해(1989년) 9월 12일에서 22일까지 모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4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인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총회장을 역임한 이후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교단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그의 목회철학을 엿볼수 있는 설교 한편을 요약해 본다. 성경 누가복음 5장 1~11절을 본문으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그의 신앙과 인생관, 목회관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씀 속에 베드로의 속마음과 신앙이 주님의 마음에 꼭들어 맞았다고 설파한다. 이 말 속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명에 따라 그물을 던진 그속에는 배 두 척도 모자랄 정도로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란 고백 속에는 입버릇처럼 하는 껍데기 회개, 입술로만의 회개류에 속하는 회개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과 순종은 꼬리가 아닌 머리되는 지름길이요, 이것이 제자 아닌 수제자의 길로 가는 지름길임을 그는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고온 가족들, 성도들, 교회를 생각하면 이성택 목사는 늘 하나님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 밖에 고백할 말이 없었다고 생각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서울, p.150-153).그는 평안교회를 사임한 후 지금까지 교회의 성원과 배려로 평생을 가르치고 설교했던 주옥같은 성경적 메세지를 <나의 경건생활>이란 제목으로 책을 간행하고 있다.(제1권 2015년 3월, 제2권 2015년 9월, 제3권 2016년 7월, 제4권 2017년 6월 간행되었고, 제5권이 이어 간행될 예정이다.) 그 내용을 살펴 보건대 군더더기 없는 순수성경본문 중심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목회자들과 한국교회를 향한 저자의 필생이 담긴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성광문화사, 2015 서울).그가 재임했던 예장총회 제74회 총회 결의안을 몇가지 요약하면, 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인준하고 총회장은 대정부 대외관계에 자유로이 참여하도록 하다. ② 녹화방송예배는 예배모범에 위반된다고 결의하다. ③ 동서울노회 분립을 허락하다(동서울노회, 서울동노회) ④ 강원노회 분립을 허락하다(강원노회, 북강원노회) ⑤ 총회에 은급부를 신설키로 가결하다. ⑥ 김기동씨를 이단으로 규정하다. ⑦ 십자가 강단 부착건은 1957년도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부착할 수 없다고 결의하다. 이성택 목사는 퇴임 이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평안교회와 교단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 남북통일의 그날을 기대하며 쉬임없는 기도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이 이성택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7-06
  • 83. 제54회 총회장 문재구(文在球) 목사
    전남 구례 출생문재구(文在球 1902.4.24-1981.2.4) 목사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출생하였다. 구례(求禮)는 동으로는 하동군, 서는 곡성군, 남은 승주군과 광양군 북은 남원군과 인접해 있다.이 지역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찌기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보면 이 지역에는 1908년(戊申年)에 장성(長城) 율곡리교회, 강진(康津) 학명리교회, 장흥(長興) 석금리교회와 더불어 구례읍교회가 설립되었다(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 上, 차재명 편, 기독교창문사 1928, p.259-262 참조).문재구 소년이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왕조가 500년 간의 수명을 다하고 외부로부터 개방을 요구받으며, 미래를 내다 볼 수 없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한말의 어수선한 시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정치가 혼미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먹는 문제와 생활에 여유가 있을 수 없었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희망이 있을리 없었다. 당시의 경제사정은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어가고 있었고, 관리들의 학정이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봉기로 이어지고, 외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남해안과 서해안을 제집 드나들 듯 날뛰고 있으니 일반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이럴 때쯤 기독교 복음이 조선의 남단 전라도에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전해졌다. 목포와 광주에 이어 전주와 순천을 거쳐 이곳 구례땅에도 구원의 복음이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전파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이 지방에 첫 발걸음을 내대딘 선교사는 배유지(Eugine Bell, 1868.4.1-1925.9.28, 裵裕祉)였다. 배유지 목사는 1868년 4월 1일 미국 캔터키주 스코트선교구에서 출생, 1891년 센트럴대학교를 졸업한 후 1894 켄터키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73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나주, 목포 등에서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이다. 그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먼저 여의고 잠시 귀국했다가 1904년 12월 다시 내한하여 수피아 여학교와 숭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광주기독병원 설립에 공을 세우기도 했고, 1911년 10월 15일 전라노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이어 1914년 선교사로 예장 제3회 총회장이 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191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1925년 9월 28일 광주에서 오랜 격무로 병고로 사망했다(내한서교사 총람, 김순태 박혜진 공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123 참조).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38회 졸업 목사안수순천신학교·총회신학교 강사 역임“절대신앙, 절대순종”이 목회철학“WCC·NCC에 가담한 목사 강사 초청 않기로김화복·박덕종·양춘식 등 신비주의 운동가들 집회 강사로 초청 불가”구례읍교회 설립과정을 잠시 살펴보면, “求禮邑敎會가 設立하다 先堤에 本郡居高鉉表가 多年 外國에 체류하다가 歸來後 救世軍이라 自稱하고 同地에 傳道하야 信者가 百餘人에 達함에 六拾圓을 捐補하야 鳳南里에 家屋을 買收하고 禮拜堂으로 使用하더니 義兵의 亂을 因하야 敎人은 離散하고 禮拜堂은 日兵의 占據가 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上 1928, 기독교창문사, p.262 참조).재구 소년은 고향에 설립된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영적세계와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21년에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이듬해 1922년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1923년 선교사들이 세운 순천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4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38회로 졸업하였다. 그해 가을에 목사로 장립받고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고향의 구례읍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23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농촌진흥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45년부터 1963까지 순천노회가 세운 순천보통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46년부터 1966년까지 순천시 가곡교회(1920년대 설립) 위임목사 시무 후 원로목사로 추대받았다. 1954년 순천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그는 총회장이 되기 전에도 이미 1957년엔 순천신학교 이사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58년에는 한성신학교 이사와 같은 해에 교단내 호남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운영하는 총회신학교 강사와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다시 1968년 예장 제53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1969년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장충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4회 총회에서 역경과 고난 가운데 부름받아 신앙의 맥을 세운 그에게 교단의 수장(首長)의 위치인 총회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그의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설교 한편을 요약 소개한다. 성경본문 시편 116편 12절을 통해 <여호화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제하의 설교를 살펴보면, “부족한 종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감사하고 더우기 늦게나마 종의 직분까지 주셔서 주의 몸된 교회를 봉사할 수 있게된 것은 제가 받은 축복 중 축복입니다. 내가 걸어온 신앙의 길에는 물론 부끄러운 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간증할 수 있는 몇가지를 피력하고자 합니다.”라고 전제하고서는, 그 첫째가 예배 성수의 문제(主日聖守)가 가장 큰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통의 어려운 핑계로 성수주일을 범하지 않는 기쁨과 감사로 평생을 보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로 생각하였다.둘째로는 평생을 교역자이면서도 타교역자의 요청이나 상회 지도자에게 존경과 순종으로 일관해 살아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며 살았다. 셋째 자기의 삶이 과연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희생과 봉사의 자세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주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였음을 설교문을 통해 고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결론적으로 문 목사는 자기의 지나온 길을 가만히 돌아다보면서 늘 감사한 것은, 불충분하고 불의한 종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늘 붙들어 주셨다고 진솔하게 설교에 나타내보였다. 이와같은 절대신앙과 절대순종과 헌신이 바로 문재구 목사의 철학이요 목회관이었다고 생각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편, 예장총회 출판부 2015 서울, p.55-58참조).마지막으로 문재구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임했던 제54회 예장총회 결의안을 잠시살펴보면, ① 차남진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하다. ② 전북대회 조직을 허락하다. ③WCC와 NCC에 가담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지 않기로 하다. ④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박형룡 목사를 인준하다. ⑤ 산아제한에 대한 문의건은 성경원리상 불가하다. ⑥ 대통령·정부·국회에 다음사항을 정책부에 맡겨 심의 건의하기로 하다.(문화재란 명목하에 사찰에 국고를 지원하고 있는 일, 예비군 훈련에 있어서 목사 전도사는 훈련에 있어 대신 교양지도를 할 수 있게 해 주실 일, 교회당 300m 부근에 오락실을 설치하는 일, 지방신학교와 성경학교에 당국이 간섭하는 일, 주일성수 문제에 관한 일, 군목·군승의 공동의식 반대에 관한 일). ⑦ 주일에 일반학교에서 각종행사를 하는 일에 대하여 정부 당국에 건의토록 하다. ⑧ 성직자 활동 한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확인하다(목사의 정치활동에 관하여서는 제38회 총회결의대로 한다. 정교분리와 양심자유의 기본원리를 존중하되 집단조직 행동에 참가하지 못한다. 성직자는 언제나 복음설교와 말씀을 파수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신성과 권위를 위해 조심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한다.) ⑨ 불경건한 신비주의 운동과 김화복, 박덕종, 양춘식 씨와 WCC, NCC 노선에 가담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는 일과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금지하기로 하다. 그 어느 총회보다 교단 내외의 이슈가 많았던 총회였던것 같다. 문재구 목사는 목회자의 모범을 몸으로 실천해 승리한 지도자요 한 생을 오로지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만을 외치다가 간 우리 목회자들의 전형이었다. 파란만장한 한 시대를 살며 복음의 역군으로 우뚝선 호남의 대표적인 초기 교회지도자였다. 1981년 2월 4일 79세의 일기로 그렇게 소망하며 살다가 주님의 나라로 영민하였다. 그의 아들 문인협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서울 강일교회를 섬기다가 일선에서 은퇴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저, 성은출판사 1978 서울, p.354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6-22
  • 82. 제75회 총회장 유인식(兪仁植) 목사
    전북 김제 출생유인식(兪仁植 1928. 12. 30) 목사는 전북 김제에서 1928년 유영근(兪永根)의 5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불신가정에서 혼자 예수를 믿던 할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다녔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판사(判士)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서울법전(法傳)에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않아 6.25 전쟁의 발발로 남침한 북한 인민군에 쫓겨 죽을 고비를 몇차례 겪은 후 생각지도 못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로 인도했다. 전쟁 와중에 피난온 대구에서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후원하는 성경구락부(聖經具樂部) 교사로 고학을 하면서 신학훈련을 받았고, 1956년 28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군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로 장립을 받고 부임한 첫 목회지가 이리북일교회였다. 여기서 8년동안 목회사역을 하면서 노회 서기로 봉사하기도 했다. 1963년 광주 중흥교회로 전임해 16년동안 목회활동을 하면서 교단 인준신학교인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 전신) 강사로 봉사하였고, 1965년엔 광주시 연합제직회 부회장, 1968년 전남노회 정화동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1974년엔 동서선교훈련원(원장 조동진 목사)에서 운영하는 세계선교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76년엔 조선대학교 법정대학과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行政大學院)을 수료하였다. 후일 본교단 정·부회장을 역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총회적으로 규칙부장과 고시부장을 역임하였고, 규칙부장과 전북신학교 교장으로 총신대학교 운영이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또 총신대 부설 교역자 재교육기관인 목회대학원 원장과 총회유지재단 이사장, 교단지 기독신문 발행인 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호남협의회장과 남북통일기도협의회 총재를 역임하였다.1978년 6월 17일 중흥교회를 사임하고 김제시 요촌동 김제중앙교회(1910년 7월 7일 설립)로 부임해 1998년 12월 31일 원로목사로 추대 되기까지 신실하고도 성실한 목양일념의 철학을 펼치고 은퇴하였다.교회사가(敎會史家) 김요나 목사의 평대로 그는 “여주동행(如主同行)을 신조로 평생을 목양일념(牧羊一念)에 불태운 전라도가 배출한 특출한 교회지도자요 행정가였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편저, 김제노회 역사 편찬위원회 2002, p.740-741참조, 한국교회인명록 유상일 편, 크리스챤라이프 편 1987, p.128). 김제중앙교회 재임시에 1988년 교회당을 신축하였고, 1989년 예장 제74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고, 이듬해 1990년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김제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5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인 총회장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1년 11월 5일 새성전 건축 기공예배를 드린 후 연건평 1,049평 규모의 대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렸고, 아울러 정종엽 김두환 정창규 박영호 김길수 김형천 황석진 장로장립과, 이효현 송준식 고석만 임채태 서낙원 윤영석 정수곤 한상수 김태환 이종진 안수집사 임직과 구정순 백금옥 안영자 안정순 정창자 강화정 서예순 권사 취임식을 함께 거행하였다. 김제중앙교회는 유인식 목사 부임 20년만에 교세도 3,000여명으로 증가하여 노회 안에서나 총회 안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유인식 목사 시무 중 특기할 사항은 첫째, 1992년 3월 7일 교회 부속 교육기관으로 선교유아원을 설립 교회내외 어린이 대상 간접선교의 장을 펼친 것을 들 수 있고, 둘째 해외선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1994년 1월 1일 브라질에 박동실 목사를 단독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같은해 2월 9일엔 필리핀에 최무림 목사를 선교사로 선정해 파송한 것을 들 수 있다. 셋째 1994년 8월 21일 본교회 선교지인 필리핀에 아세아선교훈련원을 설립하여, 교회 종교법인 평화교회(C.O.P)를 설립하였고, 동시에 아시아 크리스챤아카데미(ASIA CHRISTIAN ACADEMY)를 설립하여 유치원과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인가를 취득한 것이다. 이어서 아시아신학대학과 대학원설립과 세계선교대학원(World Theological Semindry)을 본교회에서 설립 운영하기로 결의하고 초대 이사장에 장경현 장로, 서기에 문용언 장로를 임명했다. 전북지역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미래적인 선교 프로젝트로 여타 교회들이 눈뜨지 못한 신선한 해외선교전략을 펼친 것이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편저, 같은책 p.398-399 참조). 이러한 유인식 목사의 목회사역의 성공을 인정해 미국 켈리포니아 주에 있는 크리스챤대학교(Christian University)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다(1977년 가을).유인식 목사의 인생관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설교 두 편이 있다. 예장총회 100회 기념 설교집(역대총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누가복음 18장 1-8절 본문으로 “기도응답 비결”이란 제목하의 그의 설교를 보면, 기도응답의 비결에 대하여 ①항상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눅 18:1-8).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의 예를 들어 쉬지않고 구하는 자에게 또 부르짖는 자에겐 꼭 들어 주신다고 했으며, ②믿음의 기도여야 응답됩니다(마 21:22). 신자들이 기도할 때는 무엇이든 무르짖는 자에겐 꼭 들어주신다고 했으며, ③서원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신다(심상 1:10-11). 한나의 기도 예를 들면서 제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헌신하게 하겠다고 서원한 예를 들었다. ④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하신다(시편 81:7). 아삽의 예를 들면서 고난 중에도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⑤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고 눈물의 기도를 할 때 응답하신다(사28:1-8).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예를 들면서 위기 속에서도 눈물로 회개하는 기도를 한 결과 히스기야를 살린 것처럼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눈물로 돌아오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고 강조하고 있다. ⑥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 받는다(요한 16:24). 성도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할지라도 눈물로 간절히 간구할 때 응답받는 신앙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유인식 목사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설교이기도 하고 자기의 목회철학이기도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두번째 설교인 성경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의 자랑>이란 제하에, 가문좋고 학벌좋고 로마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문에서 싫어하고 로마에서 죄인취급을 당하면서도, 죄인으로 취급받아 사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이 자랑할 이유가 무엇인가? 반문하면서 설교를 이어가고 있다. ①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자랑해야 된다. ②사죄와 생명을 주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천하인간에 다른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된다. ③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사랑한 표증이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한다. ④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승리하였다는 표증이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한다. ⑤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자랑했다. 바울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신자가 되어야겠다고 했다. 유인식 목사 자신의 목회사역의 중심점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설교라 하겠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저, 예장총회출판부 2015초판, p.167-173참조). 마지막으로 그가 재임했던 제75회 총회 주요 결의안을 정리해 보면, ①이단연구가 탁명환씨를 본교단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가결하다. ②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70세 정년제 건은 2년 후부터 시행하기로 하다. ③양인노회를 북강원노회로 명칭 변경을 허락하기로 가결하다. ④은급국을 설치하기로 가결하다. 유인식 목사는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은혜롭게 잘 감당한 후 1998년 12월 31일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남은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며 후임(김춘식 목사)의 목양 승리를 위해 뒤에서 기도로 지원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1999년 12월 70세 정년은퇴하면서 그가 속한 김제노회로부터 공로목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사모 박양자 사이에 5명의 자녀가 부모들의 신앙지도 아래 자라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6-09
  • 81. 제85회 총회장 김동권(金東權) 목사
    충남대전 출생김동권(金東權 1941.1.5~) 목사는 충청남도 대전에서 태어나 영동에서 자랐다. 불신가정이였지만 어린 시절을 꽤 똘똘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10대 후반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따라 처음 교회에 발을 드려놓았다. 그 후에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좋은일이 어디 있겠는가? 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그에겐 청소년기에 흔히 몰아닥치는 방황의 시기를 큰 어려움 없이 잘 넘기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그때가 하나님의 부름이 아니었나 생각하였다. 그가 태어났던 시대적인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 동·서 냉전기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고, 대한민국 역시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 주위 강국들의 패권을 겨루는 환경 가운데 이 나라 역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좌왕우왕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어느 누구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두움의 그늘이 짙어만 가는 미래가 보이지 아니하는 암울한 시기였다. 김동권 목사는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9년 경남 진주 출신 사모와 결혼한 후 진주 지역에 있는 칠암교회(1955년 3월 6일 설립) 부교역자로 부름받아 진주땅을 밟게 되었고 3년동안 사역한 후 지역 내의 모교회격인 진주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 2007년 2월 12일 원로목사가 되어 은퇴하기까지 32년동안 오직 한 교회에서만 목회사역을 감당한 목회자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시무했던 진주교회는 호주장로교선교회 소속 거열휴(Dr. Hugh Currell, 巨烈烋, 1902-1943) 선교사와 박성애(朴晟愛)가 전도하여 북문(北門) 안에 초가 3칸을 예배처소로 정하고 예배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1906년 진주읍 대안면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18년 진주읍교회가 전도회를 조직하고 여전도인 김성심(金誠心)을 청하여 진주지방에 본격적인 전도를 하였다. 진주에 복음을 전해준 거열휴는 아일랜드 로얄대학(Rayal College)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02년에 내한하여 1915년까지 의료선교사로 사역하였다. 처음엔 부산지부에서 활동하며 조선어를 익혔다. 당시 부산에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이미 의료선교를 하고 있었음으로 커렐은 진주로 임지를 옮겨 진주지부를 이끌어가며 선교하였다. 1907년 안동학교와 정숙학교를 설립하였고, 1911년엔 본국에서 모금해 와 베돈병원(Payton 기념)을 완공하였으며, 1913년 세브란스전문학교 교수와 진주성경학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15년 8월엔 진주읍교회를 조직 교회화 해 초대 당회장이 되어 오늘의 진주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1994, p.191 참조). 진주 지역은 호주선교사 거열후가 씨 뿌려진주교회 맡아 32년간 한 교회서 목회성경이 가르치는 농사의 원리 따라 ‘평생목회’총신대 재단이사장 및 운영이사장 역임“한국교회 강단에서 ‘내세신앙’ 훼손되고 있다”김동권 목사는 진주교회를 목회하며 명실공히 경남서부지방의 모교회로써 선교와 교회성장의 모범이 되었고, 교회가 성장해 감에 따라 교단 대사회적인데 이르기까지 역할을 단단히 감당해 나갔다. 그는 진주노회 구성원으로써 후배들에게도 존경받는 지도자로 발돋음 하게 된다.그의 경력을 살펴보면, 진주교회를 섬기면서 그가 속한 진주노회의 노회장으로 10회기가 넘는 노회의 성장 발전에 이받이 한 것만 보아도 그의 인화(人和)와 지도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얼마전 ‘평생목회’ 기자와 대담을 하면서 그의 목회관을 피력한 글을 옮겨본다. 그는 평생목회를 하면서 오직 성도를 위한 기도와 강단목회를 했다. 심방과 말씀을 잘 먹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회를 하였다. 거처가 지방이어서 서울에 있는 총회나 여러 선교단체에서 활동해야 하느라 여러가지 어려움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 앞에 겸손해야 한다. 정직한 목회가 가장 바람직한 목회다. 물질과 생활에 정직함은 물론이며 모범적이어야 한다. 거짓은 사탄의 속성이다. 정직함은 성령의 은사다. 하나님 앞에 충성도 책임감이다.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격월간 평생목회 2016년 10월~11월로 p.35 참조). 그는 최근 증경총회장 설교모음집에 기고한 갈라디아 6장 6~10절을 본문으로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제하에 바울 사도가 언급한 농사의 원리를 인용, 그리스도인의 삶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첫째, 거두기 위해서는 심어야 한다. 본문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로다. 둘째, 심는 씨의 종류대로 거두게 된다. 본문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셋째, 때가 되면 거두게 된다. 본문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폐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며 거두리라. 넷째, 심는 씨는 작으나 거두는 것이 많다는 원리이다.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심는 것이 있어야 때가 되면 심은 종류대로 거두게 된다. 그러나 농부는 씨가 부실하고 성장 가능성 없는 것은 뽑고(눅 13:7) 새로 씨를 뿌리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pp.277~280 참조). 이 설교에서 그의 신앙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상하고 다정다감해 많은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불의와 진리에 어긋날 경우엔 무서우리 만큼 단호하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 아닐까? 그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과 운영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총회정치부장, 교단 원로목사 회장, 교단선거관리위원장을 비롯,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장을 역임하며 교단의 대외적인 위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그가 진주교회 재임시엔 진주교회 70년 연혁사(1976. 12. 28)를 비롯 진주교회 80년사(1985. 11. 27)를 편찬, 교회의 과거사를 정리하였다. 1994년 6월 18일 현 예배당 기공식에 이어 1997년 3월엔 선교장학회를 조직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1997년 11월 15일엔 현 예배당 건축을 완공하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99년 1월부터 중국인선교회를 조직하여 고국을 떠나 진주지역에 기거하며 생활하는 다민족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중국어예배를 시작,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2000년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김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진주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5회 총회장에 당선됨으로 교단의 수장자리에 올랐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목회자가 소명을 잃어버리면 국가와 교회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두고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이라 생각된다. 그는 또 한국교회 강단에 내세신앙이 훼손되고, 보이는 현실에 치중하는 한국교회를 질타한다. 보는 예배가 아니라 겸손하게 희생이 따르는 드려지는 예배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지금은 물질에 집착하는 불신앙적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는 1938년 9월 27일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사건을 두고 그 날이야 말로 한국교회 치욕의 날이었다고 갈파한다. 작금에 이르러 해노회와 총회가 제명했던 주기철 목사의 복권선언이 있었지만 해벌 받아야 할 당사자도 없고, 당시 책벌에 앞장섰던 당사자(총대)들도 없는 장소에서 후배들의 복권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한국교회의 원로로써 후배들과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한국교회는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그가 재임했던 제8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 임원선거를 제비뽑기로 하기로 가결하다. ② 미주지역 노회와는 친목유대 관계만 유지하기로 하다. ③ 총회주일 세례교인 의무금 불이행교회는 총대권 제한 및 제증명 발급을 중지하기로 하다. ④ 한기총과 한장연에 소속한 교파와는 연합운동을 지속하기로 하다. ⑤ 본 총회가 허용치 않는 여목사와 여장로는 강단에 세울 수 없다. ⑥ 본 총회가 설정한 윤리에 위배된 교직자(주초)는 강단에 세움을 금한다. ⑦ 여교역자가 여전도회 임원이 될 수 없다. ⑧ 목사 결혼 주례건은 신자에게 당회장은 재량으로 하기로 하다. ⑨ 교단 기관목사로 70세 정년제도가 적용되는 것으로 가결하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2016, pp.34-35 참조). 김 목사의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으며 모두가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아 사업과 신앙에 매진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6-01
  • 80. 제89회 총회장 서기행(徐基行) 목사
    전남 무안 출생서기행(徐基行 1935.10.24) 목사는 전라남도 무안군 몽상면 사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몽탄면 사천리는 무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소재지이기도 하고, 사천리 북쪽으로는 전주와 함평이 있어 이곳엔 이미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비교적 기독교 복음을 접할 기회가 잦은 곳이었다. 이는 기행 소년에게는 일찌기 서구문물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무안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광주(光州)와 목포(木浦), 영암(靈岩), 함평(咸平)을 비롯 1900년대 초부터 여러 곳에 이미 교회가 설립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비금, 금성, 해제, 망운, 청계를 비롯 면소재지마다 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서기행 소년이 살고 있는 동탄면에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무안과 신안 지역에는 당시 성결교 출신 문준경 여전도사의 맹렬한 전도활동으로 100개의 섬마다 문전도사의 선풍적이고도 희생적인 헌신으로 예수를 모르는 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복음의 바람이 지역 고을마다 세차게 불어 닥쳤던 것이다. 기행 소년이 살았던 고향 동탄 지역만 해도 면소재지인 사천리에 몽탄중앙교회, 명산리에는 명산성결교회와 명산중앙교회, 양장리에도 양장성결교회가 설립되었고, 학산리에는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오늘처럼 산업과 농업이 발달되지 못하고 교육시설의 미비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여건 속에서도 기행 소년에겐 이미 복음의 씨앗이 마음밭에 떨어져 믿음의 싻이 뿌리를 내려 미래에 대한 소망이 불타고 있었다. 아울러 청년의 열정과 배움의 갈망이 예수를 알게된 기행 청년을 가만두지 않았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이 그의 젊음을 불태웠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열망은 신앙생활과 교회봉사를 통해 점점 활화산처럼 속으로 그칠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었다. 서울 이태원 대성교회서 목회사단법인 찬송가공회 회장 역임해외선교에 많은 관심 선교사 지원은퇴후에도 교단 내외서 열정 봉사그가 태어난 1930년대의 조선은 일제의 학정으로 조선청년들에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절이었다. 학업을 마음놓고 할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고, 주위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일본군대로 징집이 되어가고 젊은 소녀들은 취직을 미끼로 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시대였다. 방방곡곡마다 세워지는 소학교나 중학교들도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보다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우리 조선의 자녀들은 전시에 필요한 물자공급의 심부름꾼으로 이리저리 내몰려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판국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나 성경을 배우고,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이 서기행 청년에겐 유일의 소망이었고 위안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고 세례를 받은 그날 주님의 소명을 받았다.그는 대한의 청년이면 모두가 가야 하는 군(軍)에 입대해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바로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에 진학했다. 처음 부름 받았을 때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962년 총회신학교(오늘의 총신대신학대학원 전신)를 마치고 전도사와 강도사를 거친 후, 196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목포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전도사와 강도사로 2년 간은 김제 송지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65년엔 목포 동문교회를 거쳐 1967년 9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대성교회(大成敎會)에 부임하여 2005년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목회했다. 서 목사가 부임할 당시 대성교회는 오늘의 예장합동측 교단 소속이 아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측 총회 소속 교회였다. 서기행 목사가 부임한 후 교회 공식의결 기구인 공동의회에서 그 해 연말 호헌총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한국장로교회의 모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경기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대성교회를 경기노회 소속으로 복귀시킨 후, 부임하던 그 해 11월 연건평 84평 2층 예배당을 신축함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데 힘썼다. 그리고 1969년 6월 17일 노회의 허락으로 위임식을 가졌다.다시 1970년 9월 10일 다시 연건평 340평 4층 예배당 건축 공사를 착공하였다. 1977년 4월엔 이태원동 301-1의 땅 154평을 매입, 교회지경을 확장하였다. 1981년 5월 24일 목사관을 연건평 70평으로 완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에 3,500평 수양관 대지를 매입해 이곳에 1983년 7월 30일 수양관 별관 건물(식당 및 주거방)을 완공하였고, 같은해 11월 10일 김무열 장로 장립이 있었다. 1985년 6월 7일 처음으로 필리핀에 배상호 목사를 1대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85년 11월 9일 하태초, 박광수, 허기식, 조남성, 장기서 등 5명의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1989년 4월 25일 교회설립 35주년 기념식과 서기행 목사 성역 23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고, 같은해 이태원동에 아파트 1동과 수양관 가건물(본당의 105평)을 신축하였다. 1989년 10월 17일 필리핀 선교지에 선교대지 및 건물을 구입하고 복음선교교회를 설립했다. 1990년 4월 4일 지청진 장로 취임이 있었고, 11월 3일엔 조만제 장로 원로장로 추대와 이순노 장정수 집사 장립이 있었다. 이어 1992년 11월 9일 이태원동 303-25번지를 매입, 이듬해 1993년 9월 11일 지금의 대성전 건축 기공예배(연건평 1200평, 지하 2층, 지상 5층)를 드리고, 1994년 4월 24일 교회설립 40주년 기념주일 감사예배를 드렸다. 1994년 10월 31일, 서기행 목사가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6년 7월 21일엔 제3차 아프리카 케냐에 이종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지원하였다. 1997년 9월 11일 서기행 목사 근속 30주년 기념예배와 동시 미국 Belhaven 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수여 감사예배를 함께 드렸다. 1999년 8월 1일 제4차로 호주시드니 고강완 선교사를 본교회에서 후원하고, 2000년 12월 14일 교회 가까운 지하철 녹사평역과 자매결연을 맺고 선교의 지역 확대를 기하기로 하였다. 2001년 5월 16일 서기행 목사는 한국찬송가협의회 회장으로, 다시 5월 17일엔 한국찬송가공회 회장(19차)으로 피선되어 교계를 위해 봉사하기도 하였다.2003년 9월 23일 제8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2004년 9월 21일에서 24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9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서기행 목사는 목사로 준비한 몇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있는 대성교회라는 한 곳에서 자기의 사역에 최선을 다한 목자였다. 그의 강직함과 정의감과 지도력은 총회장을 역임하고 은퇴한 후에도 교단의 원로로, 고문으로 열정을 다하고 있다. 총회장의 직임을 다 한 후 2005년 10월 24일 대성교회는 그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그의 교회를 위한 수고에 예를 갖추는 아름다움을 표하였다. 그가 재임했던 제8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총회임원 선거규정을 개정하기로 하다. ② 상비부장 총신 운영 이사장 기독신문 이사장, 사장,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을 제비뽑기로 하기로 가결하다. ③ 목회자 생계비 최저생활비선은 정부 발표선으로 하고 노회와 총회가 적극 지원하기로 하다. ④ 개혁 개정판 성경은 공적예배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 ⑤ 중보기도란 용어 대신 이웃을 위한 기도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다. ⑥ 회의 용어 중 ‘자벽’을 지명으로, ‘지시위원’을 광고위원으로 하기로 수정하다.서기행 목사의 슬하에는 2남1녀가 있으며 두 아들은 각각 개인사업에 종사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고, 사위 문석호 박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서기행 목사는 부임 당시 개척교회나 다름없던 작은 교회를 대형교회로 부흥성장시켰으며, 교단 내의 지도력과 봉사를 감당해낸 저력있는 뚝심이 그의 삶과 목회에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목회철학을 보면 교회 안의 성장과 대외적(해외선교) 성장의 조화를 기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5-18
  • 79. 제48회 총회장 이수현(李守鉉) 목사
    전북 군산 출생이수현(李守鉉 1895.5.8-1984.5.28) 목사는 전북 군산시 구암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나이 7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12세 때 군산(群山)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해리슨(Rev.W.B. Harrison, 1894~1928 河緯廉)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하위렴(Harrison) 선교사는 군산에 오기 전 서울에서 어학을 익힌 후 전주에 파송되어 오늘의 신흥중고의 모체가 된 아이들을 모아놓고 주간학교(Weekly School)를 개설,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다. 1898년 같은 군산지부에서 활동하던 데이비스(Miss. Martha. V. Davis)와 결혼, 부인은 전주로 옮겨 아이들과 부녀자 및 병든 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본인은 군산에서 장터전도에 매진하였다. 1903년 부인이 사망하자 계속해 군산과 목포지역을 오가며 선교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다가 1928년 과로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한 후 생을 마감하였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1884~1984), 한국기독교연구소 1994, p.256).수현 소년은 선교사의 손에 이끌리어 14세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해리슨 목사의 주선으로 군산영명학교를 마치고 광주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순천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1916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근속하였다. 이후 일제의 학정에 견디지 못해 만주로 피신하여 그곳에 있는 만주신흥군관학교에 입학, 조국광복의 꿈을 꾸며 공부하면서 한편 봉천에 있는 한인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후 귀국하여 평양에 있는 기독교 계통 학교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18년 2월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경찰당국에 의해 다른 동료 24인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이로인해 건국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특별 표창을 받기도 했다. 만주신흥군관학교 거쳐 독립운동 가담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전남노회서 목사안수부흥사로서 국내외 초청집회 활동36년간 군산에서 목회이때부터 이수현 목사는 자신을 드려 일생동안 전도사업에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후일 밝인 바 있다. 그는 곧 평양장로회신학교로 가서 교역의 길을 준비하여 입학해 열심한 결과, 1925년 평양신학교를 제28회로 졸업하였다. 동창생들의 면모를 대강만 살펴봐도 길진경 김방호 양화석 이기혁과 같은 한때 한국교계를 움직였던 지도자들로서 기라성 같은 어른들인 것을 한 눈에 알아 차릴 수 있다(야소교장로회연감, 1940 야소교장로회총회 발행 참조). 졸업한 그 해에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광주중앙교회로 부임하였다. 1929년 마산문창교회로 전임했다가 1931년 순천중앙교회를 거쳐 군산 개복동교회와 군산중앙교회에서 23년간 시무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관계한 연유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과 문화부장을 역임하였고, 5.10선거 당시에는 군산지구 선거위원으로 봉사한 바, 건국공로자로 군산시장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매년 성탄절 때는 군산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5공군 부대에 성가대를 동원 위문한 공로로 미 제5공군 사령관의 표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교육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광주에서 사범학교를 나온 덕에 순천매산학교 봉천동하현 한인학교, 평양순덕학교 등 교사로, 광주 숭명학교에서는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수, 순천,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등 부흥사로도 전국을 향해 뛰며 한국교회 지도자로 봉사하였다. 일본, 동경, 대만, 중국 서탑교회 등 수많은 집회초청을 받아 활동하였고, 광주 도제직회 회장을 비롯, 군산 NAE회장, 순천노회 주일학교 대회장, 순천노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대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남노회장, 순천노회장, 전북노회장, 군산노회장과 평양신학교 이사와 군산 맬볼딘여학교, 군산영명학교 이사를 역임하였고, 군산YMCA 회장으로 대사회 봉사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다양한 교회 내외 단체에서 행정경험을 쌓았고 교정(敎政)의 경험을 맡았다. 드디어 1966년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숭동교회에서 모인 제4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총회장이 되기 전 총회 안의 여러 부서에서 진심어린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총회 협동총무로, 총회 전도부장, 부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군산중앙교회를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노회에서는 공로목사로 추대받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2권, 한영제편, p. 1255 참조).그가 오래 섬기며 목회했던 군산중앙교회를 개척 설립하면서 회상한 글 한편이 남아 있어 여기에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 처음으로 군산에 올 때 기억을 그는 이렇게 썼다. 경성에서 장항선을 타고 달리면 열차는 장항역에 도착한다. 장항역에서 연락선을 타고 도착하는 곳은 군산항이다. 한국 서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유명한 군산은 옛날 백제 의자왕 때 나당연합군에게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패하자 3천 궁녀가 백마강에서 몸을 던졌다는 그 백마강이 흘러 들어오는 곳이 군산이다.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망국의 역사가 스민 광경을 지켜보던 역사의 시간은 흘러갔을지라도 그 흔적을 어찌 잊겠는가?이러한 숨막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독교 복음의 사자들이 찾아들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결과 이곳저곳 언덕받이에 교회들이 드러선 5대 항구도시로 발전한 고장이다. 이수현 목사는 전도자일 뿐 아니라 그는 음악도 좋아해 목소리도 곱고 찬송가를 잘 불러 음악가 목사로 알려져 있었다. 위에 기록된 군산을 비롯 여기저기 목회를 했으나 결국 45년의 목회활동 중 36년 간을 고향 땅 군산에서 목자의 역할을 했으니 그에겐 군산에서의 회포가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건물없는 군산중앙교회에서 그가 당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한민국 온 민족이 기다리던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블어 군산지역에도 여러 개 교회가 여기저기에 개척설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수현 목사 역시 개복동교회를 사면하고, 1947년 4월 20일 중앙교회 개척을 결심하고 맨손 들고 개척을 시작하였다. 주일이 되면 건물이 없어서 산과 들을 찾아 장소를 옮겨가며 예배를 드리고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고 피눈물나는 하소연의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군산시내에는 높고낮은 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데 왜 우리에겐 저런 건물을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기도하고 마음놓고 예배할 수 있는 예배당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교인들의 기도를 듣는 목사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게 하고 서글프게 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개복동교회를 나와 몇몇 교인들이 울부짖던 기도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간의 노고를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함께 교회를 이룩하기까지 고생했던 교인 중 심학륜이 장로가 되고 지금은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이금은 임정덕 장로 등이 기도와 봉사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다. 이 목사를 도와 함께 개척한 초기 신자들이 오늘 중앙교회 이곳 저곳에서 믿음의 기둥들이 된 것에 대하여 평생 감사할 조건이라고 이 목사는 회고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편, 성은출판사 1978, p.666~668참조).그가 재임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8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개혁파 교회 세계대회에 본교단도 가입하도록 결의하다. ② 정치 제12장 2조 총회총대 10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을 7당회로 개정키로 하고 각 노회에 수의토록 하다. ③ 총회창립 50주년 기념화보를 발간하기로 하다. ④ 문교부에 사회단체로 등록해 정식으로 허가받기로 가결하다. 이수현 목사는 전도자로, 독립운동가로 지역사회 지도자로, 교단의 지도자로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봉사한 교단의 지도자로 헌신하다가 1984년 5월 28일, 89세의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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