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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 제53회 총회장 손계웅(孫啓雄) 목사
    경북 영천 고경 출신손계웅(孫啓雄·1905. 10. 18~1998. 4. 21)목사는 1905년 10월 18일 경상북도 영천군 고경면 우천동 315번지 손세욱과 박계화 사이에 2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손계웅 소년은 1931년 영천지방을 순례하던 미 북장로회 소속 안두화(安斗華 Edward A. Adams 1895~1965. 9)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세례(洗禮)를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아담스는 미국 캔사스 출신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푸 내지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마치고,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Mcomic Theological Seminary)을 졸업한 후, 192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해 처음엔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25년 대구선교부에 와서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동산성경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교육사업과 농어촌교회 등을 설립 하였으며, 1954년 2월엔 계명기독대학(현 계명대학교 전신)을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후엔 학장(1958. 9~1961. 9)으로 정년퇴임하고, 1963년 7월 귀국해 1965년 9월 오래곤(Oregon)주 로스버그에서 사망하였다. 손계웅은 1921년 2월 10일 진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2월 28일 대구고등성경학교(현 동산성서학원의 전신)을 졸업하고, 1943년 2월 1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내려왔다가 1947년 6월 5일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 손계웅은 경선신학교를 다니면서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 전신) 조사(助師)로 시무하였다. 당시 교회 집사 한 분이 이런 기회에 적산(赤山)집이라도 한채 마련해 교회개척을 하라는 조언을 했으나 그 당시엔 별 생각이 없었으나 몇날이 지나면서 적당한 집을 마련해 주일학교를 하다가 교회를 설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후 그런 건물을 물색하던 중 삼덕동(三德洞) 수성교 가까이에 유치원이나 교회로 사용할 만한 건물 하나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건물이 오늘의 대구 동부교회가 된 당시 천리교(天理敎)에 속한 경상교회(慶尙敎會) 건물이었다. 손계웅 조사는 이미 영천에서 농촌지방 전도사로 교역을 했던 경험과 동산병원에서 원목으로 목회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한 교회개척의 꿈을 지닐 수 있었다. 당시 천리교 경산교회 책임자인 일본인 여성 정상승의(井上升衣)씨를 만났는데, 당시 돈으로 1만원이란 너무나 벅찬 금액을 요구해 손 전도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 수 주일 후에 일본인 여 교주 정상씨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선생님께 이 건물을 맡길 터이니 일본으로 갈 여비(旅費)조로만 돈을 마련해 주십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짐작컨데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재조선(在朝鮮) 일본인들이 귀국해야 할 처지라 오히려 다급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손 전도사는 돌아와 자신의 소유인 당시 말총거리 덕산동에서는 약국을 하던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모아 1천원을 준비(당시 쌀 한말에 60전, 기와집 한채 600~700원)해 갔더니 그걸 받고서 경산교회 건물을 양도해 주었다. 천리교회당을 양도받은 1945년 10월 18일이 오늘의 대구동부교회(大邱東部敎會)가 첫 걸음을 내디딘 뜻깊은 날이 되었다.처음 시작했을 때는 정상적인 교인은 별로 없었다. 당시 신정교회 교인들이 본 교회예배를 마치고 오후 2시에 동부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신정교회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정분(情分) 때문에 오시던 분들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그 수가 줄어 들었다. 그 해(1945년) 겨울이 되자 김례석 장로 가족을 비롯 김옥화, 백남 집사, 김선이 권사 등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강대의씨, 박경련 집사, 함정애 권사가 나오고 몇개월 뒤에 김숙애, 장영근, 김병희, 김월희 씨 등이 출석하게 되어 교회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동부교회는 8.15광복을 맞이해 귀국하는 분들이나 만주(滿洲)에 살다가 귀국한 해외 이주민들이 많았다. 한편 신정교회 교인들도 신정교회 낮예배를 마치고 동부교회로 출석하는 분들이 중심이었다. 1946년 12월 11일 손계웅 전도사가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부교회 임시목사로 취임하였다. 같은 달 22일에 정두병, 권학윤 두 분이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손계웅 목사가 당회장이 되어 당회를 주관하게 된 것은 1949년 1월 17일 제4회 당회 때부터 정식으로 주관하기에 이르렀다.제1회 당회는 1947년 3월 31일 당시 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정재순 목사가 인도하였으며, 결의 안건을 보면 출석 당회원 3명으로 서기에 권학윤 장로가 피선되었으며, 4월 10일 개최되는 경북노회 파송 총대로 정두병 장로가 결정되었고, 김복주 집사의 집사직 사면을 받기로 결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계웅 목사를 동부교회 위임목사로 청빙하는 공동의회가 1948년 11월 28일(주일)에 열려 3분의 2가 넘는 절대 다수로 결의되어 이듬 해 1949년 7월 31일 위임되었다. 당시의 교세를 잠시 살펴보면 1946년도에는 제직이 남 5명, 여 5명이었고, 1959년에는 남 25명, 여 35명으로, 1960년도에는 남 25, 여 35명, 1967년도에는 남 40 여 80명으로, 1972년도엔 남 45, 여 95명의 제직이 선출되었다. 1976년도에는 남 45 여 115명으로 총제직수가 167명으로 주교 교사 60명과 중고등부 장년부까지 합하면 165명에 이르렀다. 1995년도에는 남 292 여 570명 합계 862명에 이르러 1946년도에 비하면 86배나 증가한 숫자이다.이렇게 순탄하게 성장해 오던 동부교회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차례의 큰 홍역과도 같았던 교회의 분립도 있었다. 첫번째가 1953년 1월 3일 다섯 분의 장로와 여러 교인들이 동부교회를 떠나 성락교회(聖樂敎會)를 조직하고 따로 예배를 드린 사건이다. 이 성락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소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두번째로 갈라나간 교회는 경북대병원 후문에 있는 수산교회(1965년 5월)이다. 처음 수산교회의 시작은 대봉동 수도산 부근에서 시작되어 수산교회(水山敎會)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수산교회 원로 조현식 목사 증언). 이 교회는 동부교회 소속교단인 예장합동에 소속되어 있다. 손계웅 목사는 사랑이 많은 목사로 지역에서 성자(聖者) 목사로 평가되고 있다.교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아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교인들은 내게 금싸라기라고 자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이 있으면 슬그머니 남모르게 쌀을 갖다주고 오기도 하고 집에 사람이 없을때는 봉창으로 방에 밀어 놓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번은 대심방 때 가난한 집사 댁에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가 앉은 방석밑에 봉투 하나를 놓고 나왔는데 이 집사가 심방대원들을 배웅하고 들어와 방청소를 하다가 손목사가 앉았던 방석밑에서 돈 봉투를 발견하고 급히 쫓아와 목사님! 목사님이 앉으셨던 자리밑에 이 봉투가 나왔다고 가져왔다. 손목사는 내 것이 아니올씨다. 그것은 주님께서 집사님께 주신것인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가시더라는 이야기다. 동부교회의 한 원로 장로는 손 목사의 인간미와 목회 스타일에 대해 이럽게 말하고 있다.목사님은 첫째 온순하다. 둘째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겸손하다. 셋째 교인들을 가족같이 사랑한다. 넷째 목사님이라기보다 친 아버지 같다. 다섯째 덕스럽다. 여섯째 원만한 분이시다. 일곱째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의 목회스타일은 첫째 설교위주 보다 심방위주였다. 둘째 설교는 예화보다는 성경강해식이었다. 셋째 숭늉같은 설교였다. 넷째 순박한 농부 서민 스타일이었다. 손목사는 걸어서 심방을 주로 했는데 집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대문을 열고 아이들이 나오면 손목사 왔다 갔다 캐라 하고는 다음 교인집을 향해 가곤 하였다. 문자 그대로 앉는 심방이 아니라 선 심방이 위주였다. 어른이 있을 때는 이 집사 아무일 없제하고 나왔다. 당시엔 모두가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부담을 안주기 위해 오랫동안 붙들고 앉아 예배드릴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키도 크고 인자하게 생겨 자애로운 아버지 모습이다. 한번은 심방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인데 대평로에서 어떤 여자가 “어디 갔다 오십니까?”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기에 교인인줄 알고 “집이 여기 있나”라고 했는데 “저희집에서 좀 쉬었다가 가세요”라며 손목을 잡고 이끌어 멋도 모르고 심방예배를 원하는가 해서 따라갔는데 가정집이 아니고 술집이었다고 한다. 손목사는 그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내가 목사다”라고 외치고 뛰어 나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교인들을 더잘 가르치고 지도해야겠다는 염원을 안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되어 1957년 4월에 대구대학 철학과(현 영남대학교 전신)에 편입해 공부한 후 졸업하였다. 친히 개척해 목회 한 손목사는 1945년부터 1976년까지 만 31년 간의 성역을 마치고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은퇴하였다. 그의 교정(敎政) 경력을 보면 1959년 경북 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1961년 대한장로회신학교 교수회 회장, 1962년에는 70회 경북노회장, 1963년 총신대학교 이사 및 대한장로회신학교 교장, 1964년 영남협의회 초대회장 및 1965년 영남협의회 2대 회장, 1966년 총회 영남대회 초대회장, 1967년 80회 경북노회장, 1967년 9월 예장총회 부회장, 1968년 9월 19일~24일 부산초량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인 총회장에 당선되어 예장총회를 은혜롭게 이끌었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53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보면 ①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총신 기숙사를 매각하고 새기숙사를 짓기로 하다. ② 대회 제도를 실시하기로 하되 5개 대회를 두기로 하다. 중부대회(경기, 강원), 충청대회(충청남북도), 호남대회(전라남북도), 영남대회(경상남북도), 서부대회(무지역노회 일원) ③ 예장통합측과 합동문제는 합동원칙과 세칙에 따라 합동할 것으로 총회장이 선언하다. 손 목사는 1998년 4월 21일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모하던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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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57. 제88회 총회장 임태득(林太得) 목사
    경북 청도 금천 출신임태득(林太得 1937.3.20~2009.12.2) 목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국의 운명이 이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지 오래였고, 고향 금천은 대구에서도 한참이나 남쪽 경산을 지나 첩첩산중이었다. 이곳엔 불교의 대사찰 가운데 특히 여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승가대학(僧伽大學)이 병설되어 있는 운문사(雲門寺)가 가까이 있는 시골이다. 이곳은 삼국유사(三國遺史)란 사서(史書)를 남긴 일연(一然)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만 해도 한 해가 멀다하고 찾아드는 가뭄 때문에 백성들은 문자 그대로 척박한 농토에서 나는 것으로 먹을 것이 턱없이 모자랐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소년 임태득도 이 비참한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 남의 땅 마지기 겨우 얻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임태득이 태어난 금천면 소재지엔 당시 일인(日人)들이 세운 소학교(김전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들이 아들을 이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태득에게는 학과목모다는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이럴 즈음 마을에서 대구로 나가 먼저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임태득 소년이 살고 있는 갈지 마을에도 드디어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다. 마을 사랑방을 빌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갈지교회가 된 것이다. 태득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교회에 가니 찬송도 배우고 성경말씀도 듣게되니 그렇게도 좋았다. 얼마 되지 않아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대구 동산성경학원 출신대구 대명교회에서 32여년간 목회교정(敎政)에 능해 총회 행정에 두루 책임 맡아지역노회와 무지역 노회간 이거 금지 결의총회은급부 벽제 추모관 매입 실패 사례도태득 소년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못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북장로교 대구선교본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구성경학교(동산성경전문학교)를 알게 되었다. 무조건 대구 남산동(南山洞)에 있는 성경학교를 찾아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했다. 담임전도사님의 추천을 받아 오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태득은 교회를 찾아가 전도사님에게 사실을 고하고 추천을 받게되어 동산성경학원에 입학, 그곳에서 고등과반까지 마치고, 대한장로회신학교(현 대신대학교전신)로 진학해 4년 간의 신학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서울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신학원에 진학하여 제60회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 대구서현교회에서 강도사로 시무하고 있던 중 1971년 4월 11일 대구 앞산(비슬산) 밑 미군부대(Camp Henry) 옆 대명교회(大明敎會, 1915년 11월 설립)로 임지를 옮겨(당시 박장동 목사 시무) 부목사를 거쳐 2005년 원로목사로 추대받기까지 31년 간의 목회생활을 명예롭게 바치었다. 임태득 목사는 1963년 양의순을 사모로 맞이하여 승리로운 목회를 했을 뿐만 아니라,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장남 임수진은 워싱턴 우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3남 임동진은 리치버그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임태득 목사가 대구 대명교회 오직 한 교회에서 32년 동안 승리로운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황소같은 우직함과 성실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음으론 그의 기도생활로 일관한 점과 한번 작정하면 끝까지 목표를 향해 밀어부치는 적극성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대명교회에 부임 이후 몇 차례나 성전건물을 리모델링을 하고 때로는 개축과 증축을 했으며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였다. 교회건물을 신축할 때마다 인근 주택을 매입하고 교육관을 지으며 부지를 확장할려고 해도 지주들이 비싼값을 요구했을 때 어처구니 없었지만 기간에 구애치 않고 금식기도로 때로는 산기도로 해결하였다. 박장동 목사의 사임으로 당회장이 된 임태득 목사의 위임식(1973년 4월 24일) 때 당시 중시찰 위임국장 이종호 목사의 사회와 당시 서현교회 담임목사였던 박원섭 목사가(내가 받은 성직, 고전 15장 9절~11절) 메세지를 전했는데, 후일 임태득 목사는 어려운 일을 맞이할 때마다 위임식 때 받은 말씀의 교훈을 되새기며 처음으로 돌아가 새힘을 얻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목회를 함께 지켜본 당회원 장로들과 권사들은 한결같이 임태득 목사의 의욕적이고도 진취적이며 열정적인 목회활동을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며,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그의 40일 금식기도 하는 모습이 성도들에겐 황소같은 기질의 기도와 목회의 뚝심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대명교회80년사, 1915-1955, 대명교회80년사편찬위원회편, 대명교회 1995, 대구 p.155-157 참조).임태득 목사는 자신이 비교적 많이 배우지 못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동들과 학생들 나아가서는 성인된 장년들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대명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유독 교육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고 어린이들을 위해서 유치원을 개설, 교인들의 자녀들과 교회인근 주민들의 자녀를 위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아 유치원을 열어 간접선교에 심혈을 기울이며 교회내 다음세대 육성을 위해 중고, 대학, 청년 뿐만 아니라 장년부 주일학교를 통해 성경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웃 노인들 선교를 위하여 매년 경로잔치를 열어 젊은이들에게 노인과 부모공경의 모습을 실천으로 산 교육을 하였다.지금은 그 풍습이 다 사라졌지만 교회 내 친교와 재충전을 위해 해마다 야외예배 행사를 통해 성도들 간의 우의를 도모해 갔으며, 새신자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교회의 풍습을 익혀 가게 하였다(대명교회80년사 같은책 p. 215). 뿐만 아니라 임태득 목사는 세계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우선 단독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이미 파송되어 있는 선교사들에게 협력 선교사로서 시작 선교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임 목사의 목회활동을 당회에서 인정하고 임 목사에게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목회대학원(牧會大學院) 입학을 허락하였으며, 또 한편 이스라엘과 애굽을 탐사할 수 있는 성지순례를 허락하였다(대명교회80년사 같은책 p.217). 뿐만아니라 1983년 6월에는 서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이 주관하는 하기 목회자 세미나 및 1992년 5월에는 L.A 소재 리품드대학(Reforned College)에 한 학기 수학하는 연수교육참여에 교회가 협력했다. 임목사는 개인적으로 늘 목회하면서 자기 개발에 힘썼다. 한편 그는 교정(敎政)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대명교회가 속한 대구노회 노회장을 비롯, 대신대학교 운영이사장 및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장도 역임하였고, 총회에서도 재정부장, 구제부장, 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세계 선교부 총재, 재판국장과 총회순교자기념 사업부장, 전국 영남교직자협의회 초대회장, 기독신문사 이사장, 기독교TV(CTS) 공동대표이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그는 2003년 9월 23일에서 26일까지 대구 동신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8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의 수장(首長)에 올랐다.그가 재직했던 제88회 총회에서 가결된 중요 안건들을 살펴보면, ① 군목(軍牧) 나이 수정의 건은 입대자격이 갖추어지면 안수하기로 가결하다. ② 부목사는 동일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을 수 없다. ③ 지역노회에 속한 교회가 무지역노회로 이거할 수 없다. ④ 무지역노회에서 무지역노회로의 이거는 절차를 밟아 옮길 수 있다. ⑤ 교회간 거리 위법의 경우 노회로 하여금 행정적 제제조치(당회장권 제제)를 하도록 하다. ⑥ 은급기금 관계없이 총회 모든 서류는 발급해 주기로 하다. 제88회 총회장으로 수고했던 임태득 목사는 총회장직에서 몰러난 후에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두 가지 사건을 두고두고 애석하고 안타까운 여운이 남아 있다. 하나는 사당동 총신대학교 채플시간에 여목사제도를 반대하면서 ‘기저귀’ 운운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총회장 재직시 은급부가 벽제 추모관 매입의 결과로 야기된 교단연금(유용) 사건이다. 그는 73세의 나이가 되기까지 교회의 지도자로 교단의 지도자로 살아오면서 늦게는 당뇨로 약간의 병고를 겪다가 소천하여 2009년 12월 2일 그가 평생 섬기었던 대구 대명교회에서 성도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회장(總會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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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9-23
  • 56. 제29회 총회장 곽진근(郭塡根) 목사
    전북 김제 만경 출생곽진근(郭塡根·1897~1941.12.13) 목사는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서 부농(富農)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9년 고향에서 만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도와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이 즈음 이곳 만경지역을 드나들며 선교를 하고 있던 군산선교부(Gunsan Station) 소속 선교사들 중 미국 남장로교 소속 부위렴(Rev. William Ford Bull, 1899~1941 활동)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동시에 만경교회에서 부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신앙의 은인 부위렴 목사는 미국 버지니아(Virginia)주 노포크에서 1876년 출생하여 1941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그는 1889년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북 군산 선교부에 부임하였고, 1902년 엘비(Albey Libbie. A) 양과 결혼하여 함께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지역인 군산에서 주로 개인전도(Field Work) 및 천막전도, 복음부흥전도단을 조직해 순회전도에 힘썼다. 한편 부위렴은 전킨(Rev. William. M Junc Kim 전위렴) 목사를 도와 군산지역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김제와 옥구(玉構)지방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또한 1915년엔 전라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되어 초기 조선교회 행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1920년에는 전북노회 회계로 재정담당 업무를 담당하며 노회발전에 기여를 하는가 하면, 1920년 전북지방 교회진흥운동을 제창, 교회성장과 노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사역으로는 군산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발전에 힘썼다. 1941년 미국으로 귀국한 후 그 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151-152 참조).곽진근은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전북지방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인 전주농업학교(全州農業學校)에 입학, 그 곳에서 5년간 교육을 받으며 조선민족의 살길은 농업뿐이란 생각을 불태웠다. 이 즈음 기도하던 중 소명을 받게 되어 선교사와 의논 끝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 낭독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1940년 제29회 총회서 43세로 총회장 당선신도의식 ‘미소기하라이’장려 앞장모든 목회자 창씨 개명 명령1923년 드디어 곽진근은 후일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길, 김충한, 장규명 등과 함께 제17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전북노회 산하 삼례읍교회(1903. 3. 5 설립) 청빙으로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정식으로 목회전선에 나서 교회부흥에 힘썼다.1925년에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金山敎會 1906. 2. 2. 설립)와 같은 면에 있는 원평교회(院平敎會 1908. 3. 5. 설립) 두 교회의 합동청빙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1937년에 와서는 정읍군 신태인읍교회(新泰仁邑敎會 1923. 5. 8. 설립)와 같은 신태인면에 있는 화호교회(禾湖敎會 1903. 7. 1. 설립) 양 교회의 공동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현장에 헌신하였다. 신태인읍이나 화호지역은 당시 일본인지주(日本人地主)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화호지역은 일본의 거대한 <구마모도> 농장(農場)이 있었다. 세계 제2차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 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던 때 그는 화호교회 당회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를 지지하자는 안건을 솔선해 전북노회에 제의한 적이 있는 터였다. 당시 전북노회에서는 이 안(案)을 받아들여 전주도제직회(全州都諸職會)에서 의견 수렴을 한 후, 1938년 9월 개최되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헌의했다. 당시 총회서기로 있었던 곽진근 목사는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을 친히 총회석상에서 낭독하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곽목사는 1939년에는 전북노회장에 선임되었고, 총회의 중책인 서기직을 두번이나 수행하는 수완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26~127 참조).곽진근 목사의 친일행각은 1939년 전북노회장에 재선된 같은 해 9월, 노회장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를 겸한 때부터라 보여진다.같은 해 10월 전주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지맹(全北老會支盟)을 결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에서는 최연소 총회장에 당선되는 영광도 누렸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182 참조). 1940년 9월 6일부터 13일까지 평양 창동교회(倉洞敎會, 1905. 1. 22. 설립, 김화식 목사 시무)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목사회원 91명, 장로총대 91명, 선교사회원 14명, 총 196명의 회원이 참석함으로 역사적인 총회가 개회되었다. 당시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는 성경 요한복음 21장 15절~21절까지를 봉독한 후 “봉사의 본질은 사랑”이란 제목으로 은혜로운 메세지를 전했다. 이어 회원 호명이 끝나고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총회장이던 경남노회의 김길창(金吉昌) 목사를 제치고 당연 43세에 불과한 젊은 곽진근(郭塡根)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회의 중에는 외부인사로 일본 기독교대회 가네이 목사, 일본신학교 무라다 목사, 복음신문사 주필 도가히가 참석해 각각 축사를 했으며, 일본 기독교대회에서 1940년 4월 개교한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 목사)에 1천엔(日貨)의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보고에 전 총회회원들은 기립박수를 했고, 총회에서는 총회장 명의로 감사장을 보내기로 가결하였다. 1938년 장로회신학교가 선교사들의 철수로 문을 닫게 되자, 소위 서북세력들의 교회는 평양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친일파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개교하였다.이 신학교 교장으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채필근 목사를 세운 것이다. 소위 이를 가르켜 채필근의 평양신학교라 불리게 된 동인이 된다. 이에 반응해 경성(서울)에서는 승동교회 1층에서 당국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이란 이름으로 등록하고 1940년 4월 개교를 단행하였다. 여기에도 친일적인 행각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총회선교부장 최지하 목사는 총회에서 “중국산동성 경내에 황군(皇軍)의 공헌으로 치안이 잘되어 선교사업이 편리하게 되는 일이오며”라는 아부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뿐만 아니라 1940년 12월엔 전선장로회 신도대회를 경성부민회관과 신문내교회(새문안)에서 열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으로 개편하여 자신이 이사장을 맡았다.1941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시로 각 노회장과 각 교회 애국반장 앞으로 계불(미소기하라이)의 점진적 보급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발송, 신도의식(神道儀式)인 미소기하라이()를 장려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같은해 4월 29일 천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신대대회>를 개최해 총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게 하여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또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써 “신체제운동과 총후에 처한 기독교인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국권을 상실한 시대의 현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한국교회로서 지도자들의 굴욕적인 친일활동은 두고두고 오늘까지 한국교회의 상처가 깃든 아킬레스건으로 이어지고 있다(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같은 책 p.182 참조).곽진근 총회장 재직시 총회의 중요 결의 사항을 보면, ① 용천노회의 분립을 가결하다(용천과 영구노회로). ② 이기풍 목사(80세)를 총회 원로목사로 추대하기로 가결하다. ③ 장로회보를 발행하기로 하고 이를 각 교회는 의무적으로 1부씩 구독하기로 하다. ④ 각 노회는 포교에 종사하는 교역자 및 포교자의 이력서를 수집 비치해 조사상 필요시 활용토록 하다. ⑤ 모든 목회자는 창씨 개명한 후 그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기로 하다. 제29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시대를 잘못 만나 친일적인 인사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간 불운의 지도자로 남게되었다. 역사는 곧 심판이라고 했다. 그는 1941년 총회장이 끝나고 그 해 말(1941. 12. 31) 4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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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9-08
  • 55. 제23회 총회장 이인식(李仁植) 목사
    황해도 황주 출생이인식(李仁植 1889. 11. 4~1950. 6)목사는 황해도 황주(黃洲)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1세 때에 전도사로 임명되어 선교사들의 지도로 사역한 바 있으며, 나중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17년 6월 제9회로 졸업하였다. 함께 졸업한 강규찬 김학린 김병조 김창선 김응규 박상순 변린서 이만집 등과 함께 평양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으며, 이들 중에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동기생들이 가장 많았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활동가는 경북노회 자치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만집(李萬集) 목사가 있고, 또 평북노회 의주읍교회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역사적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했던 33인 중의 1인이기도 하다. 한때는 황주읍 안성교착 교학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이사와 서울고등성경학교(高等聖經學校) 교장과 평양노회 노회장을 역임했다. 후에 경기노회(京畿老會)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78, p.683 참조).1934년 9월 7일 오후 8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3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되었다. 목사 회원 78명, 장로회원 78명, 선교사 회원 37명 합계 193명이 모여 뜻깊은 한국기독교선교50주년(禧年) 총회를 맞이 한 것이다. 이인식 목사는 이 희년 총회의 총회장이 되었다.제23회 총회는 제22회 총회장 장홍범(張弘範)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9장 11절~22절을 봉독한 후 “구원의 도는 피가 중심”이란 제목으로 총회장이 설교를 하였고, 총회장 장 목사가 개회를 선언하자 곧 임원선출에 들어가 투표하니 평양노회 기림교회(箕林敎會)를 맡아 시무하고 있던 이인식 목사가 제23회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34년은 최초선교사 알렌의 내한 50주년50주년 희년총회 암스트롱 박사의 희년 기념강연회필리핀 복음교회·캐나다연합교회·미국교회 대표 등 축사장로회신학교 초대 교장 마포삼열 목사가 축도총회 50년 약사 및 50주년 기념 주석 간행총회장으로 선출된 이인식 목사는 그 어느해 보다 의미있는 한해를 맞이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조선선교의 선두주자로 입국했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 : 알련 1984~1905)부산을 경유, 제물포(오늘의 인천)로 내한하여 경성(京城)에 입국한 첫 공식 선교역사(Public Missionary)를 쓴지 꼭 반세기(半世紀)가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의료선교사 알렌의 사역여기에서 잠시 호에리스 N. 알렌의 사역에 대해 언급해 두고자 한다. 알렌(Horace N. Allen. 1858. 4. 23~1932. 12. 11.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이 출생)은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Ohio Wesleyan)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졸업하자마자 1883년 마이아미 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박사(M.D)가 되었다. 1883년 10월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의료선교사로 처음으로 중국상해에 파송되었고, 1884년 9월 22일 조선의 첫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처음엔 아직 공식 선교사역이 어려워 공사관 소속 부속의사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영익이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해 준 사건으로 조선정부(朝鮮政府) 임금의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1885년 4월 10일 오늘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설 세브란스병원의 모체가 된 제중원(濟衆院 혹은 廣惠院이라고도 하는)을 설립하여 공식적으로 의료활동을 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동료선교사들과사이에 야기된 갈등으로 의료선교사역을 잠시 중단하기도 하였다.1887년~1889년 어간에는 조선 공사관 서기관(書記官)으로 미국 워싱턴에 주재하다가 공직을 사퇴했다. 이후 1890년에는 해외선교부 의료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직과 대리공사(代理公使)와 주한 미국공사(駐韓美國公使)를 역임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루즈밸트(D. Rosevelt) 대통령에 의해 공사직을 파면 당한 후 그해 6월 10일 미국으로 돌아가 의료사업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32년 12월 11일 고향인 오하이오주 도래도(Torede)에서 영민하였다. 알렌은 미국과 조선 사이에 의료선교사로서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혁혁한 공을 쌓은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와는 선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공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98 참조).알렌이 내한한 때부터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는 희년(禧年) 행사를 관리하기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선 총회로 모였던 평양 서문밖교회 정문에는 “祝 第23回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場”이란 글 밑에 1934년 9월 7일~14일 이란 글씨가 쓰여 있으며, 오른쪽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 왼쪽엔 <祝 五十週年禧年>이란 큰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총대들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이러한 프랭카드가 내걸린 것을 보고 모두들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총회에 임하게 되었다.희년 총회는 외국의 교단 지도자들 다수 참석조선장로교회가 희년을 맞이하자 외국으로부터 여러 교단의 지도자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해 축사를 하였다. 먼저 필리핀복음교회(Philiphine Evangelieal Church) 엄 리오팬도 목사가 첫번째로 축사하였다. 다음에는 카나다연합교회 대표요, 선교부 총무인 암스트롱(Amstrong) 박사가 축하인사를 하였다. 한국에 첫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 대표로 맥가피(Dr. Mcgaphy) 박사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여 총회를 더욱 빛내었다. 한편 회의 기간 중에 카나다 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박사의 희년 기념강연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 강연회에 참석한 총대들은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로서는 자랑스러운 강연이었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총회가 시작된지 사흘째 되던 9월 9일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운동장에 2만여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암스트롱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이날 행사는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희년행사는 계속이어졌다. 1934년 9월 9일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희년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평양시내 연합찬양대의 합창과 특별출연한 숭의여학교 찬양대, 숭실전문학교의 취주악단의 순서가 있었다. 이날 기념사는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맡았으며, 마지막 축도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창설자요, 초대교장인 마포삼열(Samel Moflett) 목사가 맡았다. 특별히 희년 총회를 맞이하여 이인식 목사는 역사의식이 강하여 평양에 있는 <마포삼열기념관>에서 각종 역사자료를 전시하였다. 이때 1873년 만주에서 활동했던 스코트랜드(Scotland) 존 로쓰(John Ross) 선교사의 성경번역에 대한 역사를 잘 전시하여 모든 총대들은 물론 평양 근방에 있는 여러 교회 교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05-106 참조). 이인식 목사가 재직했던 제23회 총회 결의안을 보면, ① 총회 50년 약사 및 기념화보를 제작 출판하기로 하다. ② 50주년 총회 기념 주석을 간행하기로 하다. ③ 의산(義山)노회를 분리키로 하다(의산노회·심산노회로). ④ 총회 산하 노회 중 재단허가 받은 노회가 10개 노회임을 보고 하다. 이렇게 희년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인식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곧 고향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교회 재건사업에 힘을 쏟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 생을 마감하였다(제100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총회사무국 편, 2015, p.16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9-01
  • 54. 제28회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
    3.1만세운동 가담 1년 6개월 옥고흥사단과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조달 가담미 프린스톤신학교 유학 후 신의주제일교회 담임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이사장 맡아 친일부역충북도지사·문교부 교과서 편 수관 등 지내 평북 의주 출생윤하영(尹河英 1889. 8. 6~1956) 목사는 1889년 8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 광명에서 윤연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까지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한문서숙(漢文書塾)에서 한학(漢學)을 익혔다. 1907년 구성으로 온 가족이 이사 나왔고, 이듬해 1908년 선천(宣川) 주재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램프(Rev. Henry Willard, Lampe. 남행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입신(入信)하게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 겸 조사(助師)가 되어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때마침 선천에 성경학원이 문을 열게 되자 이 학원에서 3년간 성경과 교양을 쌓았다. 1915년 8월에는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다음 해 4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1917년 8월에 정식으로 평북노회(平北老會)로 부터 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향 광명으로 돌아가 장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신학교에 복학, 1921년 6월 제14회로 김관식, 김응진, 이대영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평북 용천군 용계동교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1923년에는 같은 군 광화교회(光化敎會, 1905. 10. 19 설립)와 덕동교회(德洞敎會, 1909. 7. 12 설립)로부터 공동 초청으로 청빙되어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24년에 중국 난징(南京)으로 가서 어학(語學)을 준비하면서 1928년 8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청원하고 들어가 흥사단특별단우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잠시 남경대학(南京大學)에 적을 두고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조달 모금운동에 가담해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 주에 있는 유명한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목회하였다.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1938년 4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생일인 천장절에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韓京職) 목사와 함께 5월 신의주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후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곧바로 일제(日帝)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엔 전국교회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열심히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또 총연맹 이사장으로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 26개 노회장에게 공문을 보내 각 노회마다 노회지맹(老會支盟)과 각 교회 애국반을 조직하고 보고 하도록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19 참조.) 윤하영 목사가 신의주제일교회로 부임한 후 교회가 크게 성장, 의산노회(義山老會) 안에서만 아니라 예수교장로회 안에서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1939년 9월 8일 신의주제이교회에서 제29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성경 히브리서 11장 31절부터 12장 2절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어 임원선거에서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 교체가 끝난 후 9월 11일 윤하영 총회장 지도하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평생동안 친일부역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살게 되었다. 당시 결성식 사회는 곽진근 목사가 진행하였는데, 먼저 궁성요배를 하고 국가봉창 황국신민 서사제창, 찬송가 제창, 기도, 성경봉독, 취지설명 선언, 내빈축사 순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후 의산노회 총대로 총회에 몇번 출석하고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1941년 12월 8일 미일전쟁, 소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돌아온 윤하영을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신의주로 돌아오자 마자 즉시 미제국주의 앞잡이로 낙인찍어 그를 시무하는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쫓아내라고 외압을 가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신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마(白馬)라는 곳으로 갔다. 역시 미국에서 유학(프린스톤신학교)을 마치고 온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도 같은 처지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24 참조). 1940년 1월이 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지시에 따라 각 노회지맹(各老會支盟)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긴급공문을 보내 시국대응(時局對應) 제실시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본부의 지시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기원절 봉축행사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보내 행사 참여를 독려했다. 다음 2월에도 총회연맹 이사장으로부터 <황군(皇軍)을 위한 위문품을 위한 공고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기한을 정해 금품이나 위문품을 총회연맹 본부로 보내도록 했다. 같은 달 신의주에서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義山老會)지맹 이사를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이르러는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애국반장에게 <“씨”설정계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포교자(교회지도자)들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8월에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애국반 조직 독촉의 건>이란 공문을 보내 각 교회에 애국반(愛國班)을 조직해 보고하도록 하였다.1939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온 공문 70여통을 받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총63회의 통첩문을 보내 연맹의 지시와 통첩에 따르게 했고, 전국 26개 노회 전체에 노회연맹 지회를 조직케 했고, 각 교회에도 730여 개의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일제는 교회지도자들을 배일(排日) 혐의자로 모두 검속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일제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목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윤하영 목사는 그해 9월 신의주제일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다시 시작했고,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와 함께 뜻을 같이 하여 기독교사회민주당(基督敎社會民主黨)을 결성하여 정당으로 출발했다. 이후 갑자기 북한에 붉은군대 소련군이 진주해 와 종교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자 북쪽에서는 복음전도 활동이 앞으로 원만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직감하자 한경직과 함께 월남하기로 결심하였다. 월남해 서울에서 당시 남쪽에 진주해 있는 미군정청(美軍政廳) 공보부 여론조사과장의 직을 맡아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 2월과 1947년 2월 두 차례나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으나 1948년 11월 하순 무렵 구호물자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1949년 1월 충북지사직을 면직 당했다.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도쿄(東京) 주재 미군극동사령부(美軍極東司令部) 공보요원(公報要員)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자 귀국해 문교부(文敎部)교과서 편수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같은책 pp.710~711 참조). 한편 교계를 위해서는 기독교계명협회(基督敎啓明協會)를 조직 문맹퇴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했던 제28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황동노회와 평등노회 그리고 군산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② 평양에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본 총회가 직영하기로 결의하다. ③ 교역자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성(京城 서울)에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현재 한신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예장총회 사무국편, 예장(합동)총회 2013 서울 p.16 참조).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6년(월·일은 미상) 소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8-18
  • 53. 제32회 총회장 배은희(裵恩希) 목사
    3·1 만세운동 및 민족운동 신간회 참여전북 전주지역에서 목회 활동해방 후 ‘전북치안대책위원장’맡아 치안유지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1951년 달성군 보궐선거 국회의원 당선 경북 달성 출생배은희(裵恩希, 1888~1966.2.5) 목사는 1888년 구한말 경북 달성(撻城)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마을에 있는 한문사숙(漢文私熟)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를 익혔다. 17세 때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잠시 방랑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에 발을 드려놓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로인해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교회 안에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세워 피폐했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스스로 전도자, 학교장, 교사 등의 1인 3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의 교역활동은 자기가 살고 있는 달성뿐 아니라 경산(慶山)과 멀리로는 청도(淸道)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담임하며 순회전도자로써 열심을 다하였다. 배은희가 처음 공식기록에 나타나기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서 이다. 1912년(壬子) 全州郡 西文外敎會에서 牧師 金炳禮를 講聘하여 視務하게 하고, 其後 金仁全, 崔義德, 呂博師, 裵恩希가 相繼하였고, 助師는 崔祥燮, 李守鉉 等이 視務하니라(下券 p.171 참조)는 기록에 보이며 같은 책 전북 노회 기사 중 全州 西文外敎會에서 임시시무 하는 裵恩希를 該敎會에 정식 視務 허락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史記 下券 p.281 참조). 한편 배은희는 1920년 평양 장로교회신학교를 조선교회 영남지방에서 특출한 목회활동을 펼쳤던 기라성같은 김병호, 박덕일, 박문찬, 박명석, 염봉남 등과 함께 제13회로 졸업하고, 그들과 함께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는 기둥이 되었다. 신학교 재학시절에도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학생시위 운동에 앞장서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후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경의 눈을 피해 마산과 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당시 경주지역 계남교회 시무시에 전주 서문밖교회(全州 西文外敎會)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인연으로 1921년 고향을 떠나 전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목회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배 목사는 전주에서 목회하면서 1927년 경성(京城)에서 조직된 국내유일의 민족유일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신간회 발족의 근본 목적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굴레에 꼼짝 못하고 있는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예속의 굴래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일제 당국과의 어떠한 타협도 배제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좌익과 우익과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 되어 조직된지 4년만에 해체되고만 민족운동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662 참조). 교회 안에 유치원 설립과 무산아동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해 민족의식과 자립자활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앞장섰다. 야학은 한때 학생수가 5,6백명에 달하기도 했다. 또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나 전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협소한 기억자(ㄱ)예배당을 헐고 연건평 240평에 이르는 새 예배당 건물을 지어 호남지역의 굴지의 교회로 자리 매김을 하기도 하였다. 1938년 조선교회에 신사참배 바람이 불어닥치자 더 이상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이어갈 수 없어 유치원은 이창환에게, 무산아 야학(夜學)은 박심근에게 이양하였다. 배은희 목사는 1929년부터 신현창(申鉉彰), 유상백(劉尙伯), 강봉의(姜鳳儀), 김병수(金炳洙)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을 조직, 농촌교회부흥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대상지역은 전북 일대였다. 후에 전북노회측과 약간의 갈등이 생겨 독신전도단을 <복음전도단>으로 개편하여 재출발했으나 일제당국과 신사참배 문제로 또 갈등이 생겨 강제해산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때 김가전, 최양서 등과 함께 잠시 투옥되었다.1943년 일제 패망직전에 더 이상 교회에 머물며 정상적인 목회활동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전주교회를 사임하고 의사인 장남 배보석의 집으로 거쳐를 옮겨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배은희 목사의 몸이 지병으로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아들 의사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기에 이를 즈음,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는 1945년 8.15를 맞게 되었다. 그는 해방과 함께 독립치안유지를 위한 <전북치안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혼란한 정국에 치안평정을 위한 일역을 감당하였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기독교문사 1982. p.342 참조).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43년 5월 7일 일제당국의 조선 종교정책에 의해 총회장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교단을 해산해야 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본 제국주의 시책에 협력했던 총회장 김응순 목사는 새로이 출발하는 일본 그리스도교단(日本基督敎敎團)에 모든 교권을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교단이 출범하자 박학다식한 채필근(蔡弼近) 목사가 초대통리(初代統理 교단장)로 선임되었다. 이 일로 인해 채필근 목사는 죽을 때까지 친일부역자(親日派)라는 낙인이 찍혀 불행한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었다. 다시 1945년 7월 7일 일본 기독교조선교단(日本 基督敎朝鮮敎團)을 창설하여 초대통리에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일본기독교조선교단도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일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은 남부기독교회(南部基督敎會)를 재건한다면서 김관식 목사를 회장으로 재선임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회 쪽에서 이탈해 나가 조선감리교회를 재건하였다. 처음에는 장로교회도 참여했지만 배은희 목사는 남부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이미 전국에 조직되어 있던 교구(敎區)를 노회로 전면 개편하였다. 그런 후 1946년 광복 이듬해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를 개최 총회장에 배은희 목사를 선출하였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려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우연히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세우고 교육자가 되겠다고 평양 장로교회신학교까지 졸업하여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교육자가 된 입지적인 인물로 교단내 인사들로부터 그의 신앙과 능력을 인정받아 해방 직후 혼란기에 처했던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세움받게 된 것이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40 ~141 참조). 1947년에는 임시정부를 반대했다 하여 괴한의 피습을 받기도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반탁과 친탁으로 소란했던 해방정국이 혼란할 때 배은희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자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 고시부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51년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목사로써 해방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영광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에 국민부장을 거쳐 경남자유당 위원장을 맡아 국정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선거시 대구갑구(甲區)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배은희 총회장이 재임했던 제32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38선이 철폐되면 남북이 통일한 총회를 조직키로 하되 현이남 12개 노회가 총회를 조직, 회의를 진행키로 하다. ② 1938년 제27회 총회시 가결한 신사참배는 전국교회의 신앙부족으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저지른 잘못으로 알고 회개하고 이를 취소하다. ③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총회사무국 편, 대한예수교장로회교회 2013. p.17 참조). 남긴 저서로는 <나는 왜 싸웠나>가 있으며, 은퇴 후 자택에서 1966년 2월 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영민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8-11
  • 52. 제31회 총회장 김응순(金應珣)목사
    황해도 장연군 송천 출신김응순(金應珣, 1891.10.17~1958.1.6) 목사는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송천(松川)에서 태어났다. 호수 항부(航夫)다. 송천은 한글 소리음으로는 ‘솔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응순은 1910년 경성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8년간 고향인 황해도 장연에서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20년 사립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한적십자사 청년의용단원으로 단원모집과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채포되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20년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엔 고향 장연군 송천교회(松川敎會) 전도사로 1923년부터 사역했다. 조선 최초의 송천교회 전도사 시무의주에서 기독교 탄압이 자행되자, 송천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소래 출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자신들의 외갓집이 있는 송천으로 피신와서 그 곳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조선 최초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닌 토착민인 조선청년교인에 의해 설립된 장로교회였다.이 때 이 마을에 살던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조선장로교회는 이렇게 하여 자생교회(自生敎會)로 설립된 교회이다. 이는 선교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로교회보다 1세기 앞선 조선천주교회의 경우도 흡사하다. 이승훈이 북경 한 가운데 있는 북당천주교회를 스스로 찾아가 한문 필담으로 중국교회 신부들과 소통이 이루어져 천주학(天主學)의 도리를 깨닫고 성삼위의 이름으로 영세(領洗 Baptism)를 받고 ‘베드로’라는 영세명까지 얻어 귀국하여 오늘날 명동천주교회가 서 있는 역관 출신 김범우 자택에서 미사행위를 시작해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의 시원을 이루었다. 이 무렵 김응순도 송천교회를 다녔고 송천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경성제일보통학교(6년제)를 졸업한 것이다. 김응순은 1927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 황해도 봉산군 홍수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35년 9월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서기에 선출되어 총회를 받들어 봉사하기도 했다. 1936년 6월부터는 황해도 해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37년에는 황해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548 참조). 친일파 조직 평양 기독교친목회 회원으로 가입이 때부터 일제 당국은 그의 지도력을 알고 있던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평양 기독교친목회의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이 회를 창립한 인물은 숭의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오문환(吳文煥)이었는데, 오문환은 1938년 조선장로교회를 신사참배 쪽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목사 등을 인솔하여,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下開)에 도착,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교토(京都)에 가서 평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다시 도교(東京)를 향해 가서 오늘날도 일본 관료들의 참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전범까지 안치되어 있는 야스꾸니(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왔다. 그후 조선교회 목사들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37 참조). 총회장 당선 후 본견적 친일활동김응순은 1942년 2월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주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참여했고, 같은 해 9월 장로회 헌납 해군기(海軍機) 영명식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자 국민총력 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총회장이 된 후 교파합동, 규칙개정,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재래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본정신(日本精神)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日本的基督敎)를 새롭게 산출하여 수립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1942년 11월 12일 정인과(鄭仁果), 전필순(全弼淳) 등과 함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총회연맹 주최로 황군(皇軍)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갖고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고, 또 같은 달 1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기독교단 제1회 총회 축하사절단으로 김종대(金鍾大) 목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을 비롯 야수꾸니신궁과 메이지신궁까지 참배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1943년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경성 승동(勝洞)교회에서 일본정신(日本精神) 채득을 목적으로 한 전국노회장 대표 연석회를 개최하고, 참석자들을 친히 인솔하여 남산(南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국체 본의에 철저하고 대동아전쟁 목적완수에 매진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을 도모하여 본회의 사명 달성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전시 포교 지침 선언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같은 달 징병제도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여자 대표연성회를 경성 대화숙(大和熟)에서 열고 총회장으로써 훈사를 했으며,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총회 연맹이사장으로써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회’ 설립1943년 5월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단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이르러는 이동욱, 갈홍기, 채필근과 함께 조선종교단체 전시보국회 기독교위원으로 활동,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1945년 5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주최 지방순회 강연회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개신교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 할 때 조선교단의 고문 겸 황해도 교구장을 맡기도 했다.불행하게도 제31회 총회부터 모든 목사들이 약속이나 한듯 앞다투어 창씨개명(創氏改名)하는 풍조가 불어닥쳤다.심지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회의록마저 일본어로 기록 출판하므로 조선교회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애석했던 바는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총회 사회를 보면서 신사참배에도 모자란듯 일본의 전승기원예배까지 드린 일도 있었다.1942년 2월 10일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케 하여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정을 매입 기증했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육군환자용 엠블런스 3대, 9월 20일에는 함상 전투기 1대를 구입 기증했으며, 전국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의 종 1,540개를 모아 당국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 종이 어떤 종이었던가. 새벽마다 예배시간마다 신자들에게 모임을 알리는 복음종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시대적인 불가항력적인 전시환경이었지만 비극적인 사례들이요, 복음과 교회의 수난이었다. 교회는 드디어 1943년 일제의 강압적 종교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제31회 총회 당시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① 개회 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먼저 채택하고 총회가 열렸다. ②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를 병합하기로 결의하였다. ③ 1942년 9월 20일 해군에 헌납한 전투기를 <조선장로호>라 명명식을 가지기로 하다. ④ 총회의 회의록을 일본어로 정리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외국 선교사들은 전원 본국으로 출국하기로 하다. 광복 후 월남하여 인천서 교회개척김응순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계속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연맹(基督敎聯盟)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51년 1월 월남해 인천에 정착 후, 1952년 인천에 보합교회를 설립했고,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일하였다. 한편, 인천보합공립학교와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아 무산아동들의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지나간 역사이기는 하지만 제31회 총회야 말로 조선교회가 당했던 가장 수치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아니하는 총회라 할 만큼 치욕적인 총회였고, 총대들 스스로가 무능한 총회로 마감한 것은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과제를 던져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제31회 총회와 같은 총회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대 장로교가 지고 가야 할 사명의 멍에는 무겁고 버겁게만 해 보인다. 다시 한번 손양원, 주기철과 같은 신앙의 귀인들이 필요한 시대가 이 때라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7-29
  • 51. 제22회 총회장 장홍범(張弘範)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장홍범(張弘範 1878.2.23~1950.5.25) 목사는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1878년 2월 23일 태어났다. 젊은 시기에 친구의 권유로 당시 안악읍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자가 되었다. 이때가 1908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1909년에 안악읍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이수하고 안악읍교회(安岳邑敎會)에서 운영하던 안악보통소학교에서 1909년부터 1914년까지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게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이 국권상실의 비참한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었고, 우리가 힘을 합쳐 조선독립을 쟁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일하였다. 장홍범은 1914년 3월에 안악보통소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12월 3일에 안악군 북율면 상거동 예배당에서 모인 제7회 황해노회에서 당시 함께 장로회신학교 학생으로써 계속 추천받은 후보생 18명 명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하권, 한국교회사학회 편 1968, 서울 p.146).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 황해도 지역서 목회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9개월 간의 긴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안악지방과 재경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소안론(Rev. William L Swallen) 목사와 이길함(Rev. Graham Lee) 선교사의 당회 구역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9월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용문면 동창교회(東倉敎會 1910 설립)에 부임해 첫번째로 공식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재령군 남율면 해창리에 있는 해창교회(海昌敎會, 1899. 3. 3 설립)와 모동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1921년 모동교회 재직시에 황해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활동그는 특히 아동교육에 관심도 많았고 소질도 다분히 갖추고 있어 1924년부터는 전국 여러 지역 노회와 연합회로부터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요청을 받아 주일학교 부흥사역에 일익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는 동요도 잘 부르고 동화도 잘해 전국을 다니며 어린이전도와 부흥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그의 활동이 전국주일학교연합회(全國主日學校聯合會)를 창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는데 발기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위원회를 조직하고 드디어 1924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임기 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선교회 어린이교육과 영적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1925년에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북리에 있는 사리원 동부교회(1922. 1. 1 설립)에서 목회하던 중 황해노회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 총무로 발탁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도 다른 노회들에 비해 종교교육, 특히 아동교육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바로 황해노회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교육부 부장 선임장 목사는 보통소학교 교사로 봉직했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고 큰 자산이기도 하였는데, 본인에게 가르치는 소양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1925년 제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1932년 9월 9일 평양창동교회에서 모인 제21회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 종교교육부 부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른다. 그로인해 그는 이듬해 1933년 9월 평안북도 선천남부교회(宣川南部敎會)에서 모인 제2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총회는 목사회원 73명, 장로회원 73명(미참 2명) 선교사 회원 34명이었다. 제22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남궁혁 목사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 20장 17절~34절 본문으로 위기에 당면한 조선교회와 진정한 부흥운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새로 선출된 총회장 장홍범 목사가 회장으로 회의를 진행할 때, 각부에서 상정된 헌의안들이 기각되는 일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교인 1500명당 목사 장로 총대를 각 1인씩 파송하자는 안이 부결된 것이라든지, 특별히 함남노회(咸南老會)에서 상정한 여성장로 안수 허락의 건이 정치부에서 부결되었다. 이 안건은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노회에 올린 것인데 총회에서 부결됨으로 결국 교회 내에서 남성중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만 것이 아쉬움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의 총회장이었던 장홍범 목사는 평생을 후회하였다는 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 이단 규정제22회 총회 결의가 이러한 아쉬움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제22회 총회의 중요결의 안건 가운데는, ①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② 중국 산동(山東)에서 실시하게 해달라는 산동대회 개최는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③ 교단 최초의 면려회보를 창간하기로 가결하였다. 또 다른 총회에서의 기각된 안건 가운데에는 평안노회와 황해노회에서 공동으로 위임목사를 4년에 한번씩 시무투표로 하자는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그 외에 제22회 총회의 업적을 몇가지 남겼는데, 당시 개교회에서 무곡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제22회 총회에 와서 비로서 곡조(曲調)찬송가를 발행 보급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2년 간의 작업 끝에 1935년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신편찬송가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행한 것이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00-101). 총회 종교교육부 감사로 성경통신교재 발간장홍범 목사는 총회장을 역임한 후 사리원 동부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중에 1937년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였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총회 종교교육부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이긴 하였지만 목회현장을 떠난 장 목사에겐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목사는 이어서 총회 출판부장의 일까지 맡아 주일학교 교재와 성경통신과 교재 발간사업까지 맡아 교단의 교회교육을 도맡아 하는 중요한 과업을 맡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역량을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위해 목회의 소명과 버금가는 헌신과 희생의 사명을 감당한 지도자로 기록된 총회장 출신의 교회교육의 실천자이기도 하다.6.25때 행방불명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앞두고 일제당국의 형사에 의해 김선두, 강병주 목사 등과 함께 구금 당했던 일도 있었다. 출감 후에는 다시 총회 종교교육부의 일을 맡아 수고하다가 총회가 해산이 되자 경성(京城, 서울)을 떠나 고향 안악으로 귀향해 그곳에서 목회하던 중 1950년 6.25 동란으로 행방불명된 후 사망일자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기독교문사 p.649-650 참고).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7-19
  • 50. 제20회 총회장 장규명(張奎明)목사
    평북 용천 출신장규명(張奎明 1891. 11. 14~1950)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용천은 의주(義州)와 철산(鐵山)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선교사들이 주재했다.철산과 의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의 조사(助師)가 이곳에 드나들면서 복음을 증거할 때, 장규명은 위대모(Rev. 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의 어느 조사로부터 쪽복음서를 받고 완고했던 유교 집안에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장규명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모 목사(1870. 6. 7~1952. 5. 15)는 뉴욕주 부르클린 출신으로 1886년 뉴욕에 있는 파크(Park College)대학을 마치고, 1888년 그린위치 대학과 1892년 예일(Yale)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895년 유명한 유니언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이어서 1895~1896년 사이에는 다시 예일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896년 10월 2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으로 파송받아 평양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친 우수한 인재였다. 위대모 선교사는 1897년 평북지역 선천선교부 개설 책임을 맡았고, 동시에 선천지방 순회선교사로 활동하며 선천읍교회와 선천남교회를 개척하였다. 또 1901년에 이르러서는 선천지역에 본격적인 개척선교에 헌신하였으며, 1902년엔 의주지역 선교지를 책임지기까지 하였다. 1906년 선천에 신성학교(信聖學校)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였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서울 p.507~508 참조). 용천지방엔 많은 교회 설립돼정규명은 기독교로 개종 후 조사들의 안내를 받아 1898년에 설립된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유년주일학교를 다녔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성례전(Sacraments)을 베풀자 교회가 하나 둘씩 설립되면서 용천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1940년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연감 자료에 의하면 58개 교회가 기록되고 있다.제18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경성의 새문안교회를 시무한 바 있는 차재명(車載命) 목사도 용천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용천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일찌기 개화문화와 신문물을 받아들인 신흥지역이었다.교회 안에 신식 교육기관인 초등교육기관 병설용천지역에 교회가 점차 늘어나자 가까이에 있던 위대모 선교사가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초기의 조선교회가 대부분 그랬지만 이곳 용천지역에도 개척교회가 시작되면 교회 내에 자연히 부속기관으로 초등교육기관이 병설되었고, 이 기관을 통해 기독교교육이 실시되었다. 당시의 선교부 정책 가운데 하나가 교회 안에 설립 운영되는 초등교육기관 운영비가 별도로 지원되었던 것이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 세워진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통해 불신가정에서 출생한 자녀들이 배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자연히 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로 학생들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지사였던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장규명 소년 역시 용천군 양하면 시남동에 세워진 양시교회(楊市敎會) 유년주일학교(幼年主日學校)에 다니면서 성경도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보성학교(普成學校)에서 보통과 3년, 고등과 3년 과정을 공부할 때 성경과목만은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선천북교회 조사로 사역그후 장규명 청년은 모교인 보성학교 송자현 교장의 권유로 얼마동안 위대모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고, 그 후엔 1912년 3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역자로써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고, 위대모 선교사의 배려로 처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의 조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사활동을 하게 됨으로 학비문제가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으며, 또 평양과는 거리도 그리 멀지않아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신학교에서 선천북교회로 가곤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주일이면 예배를 인도했고, 토요일이면 교인심방을 열심히 하였다. 한편 그의 주일설교 준비는 항상 방과후 신학교 기숙사에서 원고를 완성했고, 원고는 책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주일 오전 11시와 주일 저녁 찬양예배는 설교원고 노트를 꺼내들고서는 열심히 그리고 쉽게 말씀을 전파했다. 그는 주일이 지나면 월요일엔 또 평양을 가야 했다. 드디어 1923년 12월 19일 이승길, 김충한, 이학봉, 김치근 등 31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장로회신학교 제17회 졸업생이 되었다. 선천북교회에서 그의 설교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영력(靈力)의 힘에 이끌림을 받았던 교인들이, 졸업하던 해에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용천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시무하였다. 이미 급성장한 교회로 잘 알려진 관계로 선천북교회는 양전백(梁田伯) 목사가 부임해 있었기에 장규명 목사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함께 목회를 하였다.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1년 유학이때 교회의 배려로 장규명 목사는 미국 남장로선교부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일본 고배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1년간 연구생활을 하게 되어 유학했다. 또한 당시 미국 조직신학계의 거장으로 있다가 신학교 교장으로 와 있는 홀튼(Holton) 박사의 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리며 신학의 세계동향도 파악하게 되었고 목회의 활력소도 얻게 되어 당시로선 좋은 대접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귀국 후 다시 선천북교회 동사목사로 사역하다가 당시 담임목사였던 양전백 목사의 배려와 협력으로 1930년 같은 용천군 용천면 운흥동에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개척당시 선천북교회의 교인 일부를 양전백 목사가 떼내 보내줘 큰 어려움이 없이 개척목회를 성공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선천중앙교회도 모교회인 선천북교회와 대등한 규모로 성장하고 자립해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소식은 장규명 목사가 앞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위한 지도자로 발돋음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개인에게도 큰 보람이 되었다.제20회 총회장에 선출,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파송1931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금강산 온정리에 신축된 총회수양관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0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 홍종필(洪鐘弼) 총회장은 성경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으로 산상성회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이어 회순에 따라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장규명 목사가 제2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이 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제20회 총회 결의안건들을 살펴보면, ①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김순호 양을 파송하기로 하다. ② 총회 발전을 위해 3년 진흥계획을 수립하기로 하다. ③ 조선청년면려회를 만국연합회에 가입하기로 결의하다. ④ 남만노회 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남만·북만 노회로) ⑤ 전남노회와 평양노회 재단법인 설립을 허락하다. 장규명(張奎明) 목사는 청년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에 자신이 시무하고 있던 선천북교회에서 선천YMCA를 창설하여 조선의 미래가 청년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공산당에 체포된 후 행방불명1945년 8.15광복을 맞이 했을 때 북쪽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그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과 한독당(韓獨黨)과 연락하였다는 허위 죄목으로 공산당(共産黨)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그의 가족상황 역시 파악할 길이 묘연하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수 많은 교계 인사들과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교계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서울 p.524~5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7-08
  • 49. 제27회 총회장 홍택기(洪澤麒)목사
    평북 신천 출신홍택기(洪澤麒 1893.5.11~1950)목사는 1893년 5월 11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고향의 유영제(流英齊)에서 한문사숙을 하였고, 선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여 고등과를 졸업했다. 후에 선교사가 세운 신성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2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1908년 8월 기독교에 입신하여 1910년 7월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에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3월 처음으로 교역자의 길인 전도사로 임명 받았다. 1924년 12월 19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김병희, 박승명, 박연세, 방경모, 소병권 등과 함께 제18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2년부터 1943년까지 평북노회 경내에 있는 차련관(車輦館)교회(1905.1. 30 설립)를 담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평북노회 서기를 지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평북노회장을 지냈다. 그의 본격적인 교정경력(敎政經歷)을 보면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서기(書記)를 시작으로, 1937년에는 교단 부총회장을, 이듬해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이 총회가 바로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지울 수 없는 오욕을 남긴 총회이다. 1938년에 모인 총회라고 해서 소위 ‘38총회’인데, 천추의 한을 남긴 신사참배로 교단적으로 공식 결의한 총회가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땅을 치며 가슴을 쥐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 당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사실 불가항력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총회가 개회도 되기 전 일본 경찰당국은 평양에서 모이는 전국의 총대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고, 개회 당일에는 총대 바로 옆에 일본 형사들이 끼어앉아 총회장이 가결여부를 물었을 때 형사들이 총대들의 팔을 잡고 손을 들게 하였다. ‘38총회’로 이름난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구성을 보면, 목사 86명, 장로 85명(1명 미참), 선교사 22명으로 총합계 193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설교를 맡은 이문주 목사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삼고 “신앙의 3대 요소”(믿음 소망 사랑)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가 투표를 하니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회장에 김길창 목사, 서기에 곽진근 목사가 당선되었다. 그 다음 날 9월 10일 오전 9시에 속회가 되었다. 박웅률 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 이어서 당시 평남지사(平南知事)인 이시다(石田)가 나와 축사한 후 임원 교체식이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 40분에 공천부장 한태영 목사의 보고를 받은 후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웅률 목사가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채택안을 채용하기로 제안하였다. 사회를 맡아보던 홍택기 총회장은 가(可) 부(否)를 묻기 전에 반대측에게도 발언권을 주어야 하는데 토론없이 즉석에서 성명서 내용을 가결시키고 말았다. 회의 원칙상 가(可)하면 ‘예’ 하시고, 부(否)하면 ‘아니요’라고 하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가만 묻고 부는 묻지도 않고 이 안건은 만장일치라는 누명을 씌운채 총회를 통과, 즉석에서 홍택기 총회장은 가결선포를 하고 다음과 같이 단상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총회의 성명서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連反하지 않는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에 神社參拜를 率先斷行하고 追히 國民精神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時局下에서 銃後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期함. 昭和13年9月10日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長 洪澤麒이렇게 총회장이 선두에 서서 신사참배 안건을 결의 선포하고, 서기가 이를 받아 대독하자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선교사회원들은 총퇴장하고 그 중 해밀톤(F.E.Hamilton 咸日頓) 선교사가 일어나 홍택기 총회장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법(不法)이요 라고 힘차게 외쳤지만 그를 경호하고 있던 경찰들의 제지로 아무런 효과를 얻지도 못하고 말았다. 총회 임원진과 각 노회장단, 즉시 평양신사 찾아 참배이렇게 혼란의 와중에서 신사참배 안건이 결의 통과 선포가 되자, 부회장 김길창(金吉昌) 목사는 임원회를 대표하고, 각 노회장들은 노회원들을 대표하여 즉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찾아 참배함으로 조선장로교회의 신앙의 등불은 이렇게 꺼지고 말았다. 이 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을 조선총독과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리대신, 척무대신들에게 전보(電報)로 총회장 명의로 발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게 되었다는 오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의 상징인 신사(神社)에 한국교회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끓게되는 비참함이 두고두고 한국교회사에 회자화 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만 것이다.이 사건으로 인해 부회장 김길창 목사(경남노회)는 평양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로 낙인찍혀 총회장에 여러 번 출마하였으나 그때마다 낙선되어 결국엔 총회장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역사가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이 신사참배 결의로 말미암아 4개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敎)는 즉시 폐교되었고, 선교사들은 신사를 참배하는 조선교회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야 말았다.평양 장로회신학교 폐교이뿐만 아니라 총회는 계속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국방 헌금을 했고, 전투기 2대를 구입해 바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감리교의 양주삼(梁柱三), 장로회총회 부총회장 김길창, 성결교회의 이명직(李明稙) 목사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신궁(伊勢神宮),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등을 직접 찾아가 참배하고 돌아왔다. 홍택기 목사는 1939년 9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평의원을 맡았고, 1940년 2월엔 국민정신총동원 평북노회지맹(支盟)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 1944년 8월엔 징병제 실시 기념강연회 연사로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했다. 홍택기 목사는 이렇게 철저하게 변질된 모습으로 총회를 친일적으로 이끌어 갔고, 5도 16개 노회 연합의 주최로 퇴수회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 이때 총회가 신사참배하고 난 후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감옥에 갔다 나온 이기선 목사의 간증설교는 참석한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해방 후(1945.8.15) 북한교회 수습방안이 대두되자 당시 만주 봉천에 있던 만주신학교 교수로 재직한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수습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홍택기 목사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은 조선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했다는 변명을 하였다. 애석한 일이지만 광복 직후 신사참배 문제로 예장고신 교단이 분리되어 나가게 된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 교역자들에게 자숙 요구옥중에서 출옥한 고난받은 성도들은 교회 정화의 논리로 일제하 신사참배 했던 교역자들과 신자들의 자숙을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신사참배에 동조한 자들은 일제치하의 감옥생활에 버금가는 고난 속에서 신사참배를 해 가면서 교회를 지켰다고 주장하며, 서로의 입장만 내 세우다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된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복음의 본질을 무시하고, 이해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덕을 피차 세우지 못하고, 상대를 용납하지 못한 결과로 분열하고 만 것이다.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 고난을 겪은 성도들이나, 또 당신네들은 감옥에 가서 고난을 겪었다지만 우리는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 부지해가기 위하여 감옥밖에서 그대들이 겪은 고난에 버금가는 수모와 역경을 지탱해 내었다고 하는 아집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분열되고 형제가 원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8.15광복 이후 홍택기 목사는 평안북도 월곡교회(月谷敎會)를 거쳐 철산군 점면 신곡동교회(1914.3.15 설립)를 담임하던 중 1950년 6.25전쟁시에 행방불명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한 교계인사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로당(南勞黨)으로부터 숙청된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어 그가 언제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의 한 장면인 것 같아 씁쓰레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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