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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 제70회 총회장 박명수(朴明洙)목사
    경북 문경 출신박명수(朴明洙 1916.7.0~2008.2.21) 목사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밀양 박(朴)씨 문중의 박경문씨와 창녕 조(曹)씨 문중의 조옹중씨 사이에 3남의 맏이로 태어났다. 때는 3.1독립 만세 시위 사건이 있기 3년 전이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살림살이였으나 명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교육열에 대단했던 부모덕에 여덟살이 되던 해에 문경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新學文)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또 부모님을 따라 문경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에서 열리는 성경암송대회에서는 항상 일등이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으나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까지 나갔다. 당시 어머니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명수가 꼭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명수는 이 기도를 듣고는 어머님께 화를 내었다. 나는 커서 천한 남의 종은 되기 싫으니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명수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것이 마귀 집안에서 상전노릇 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의 이 기도는 박명수의 그후 그의 삶의 바탕과 틀이 되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명수는 강하고 큰 뜻을 품은 친구들과 흘흥야학회를 만들어 15, 16세들의 또래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며 야학에서는 토론회와 웅변대회를 열기도 했다. 여기에서 반일독립운동을 일깨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농촌교회는 8개처를 돌보는 전도사님을 모시는 형편이라 교역자의 얼굴을 한달에 한번 꼴로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명수 청년에게 종종 설교를 부탁했다. “가난해 두루마기 한벌도 없는 내가 어떻게 신성한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까? 저는 못합니다”라고 거절했다. 이를 안 부모님은 빚을 내어 두루마기 한 벌을 해주셨다. 성경학교 졸업 후 전도사로1934년 18세 때 명수는 총각 집사가 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안동에 있는 인노절(Rev. Winn Roers Earl ; 印魯節) 선교사 기념성경학원(記念聖經學院)에 입학하였다. 문경에서 안동까지 20여 리가 되는 먼 거리였으나 성경연구와 설교를 위해서 열심을 다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비와 식비는 남자 기숙사 취사를 담당해 해결하였다. 이러던 중 1938년 총회가 산사참배를 결의했다. 학교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게 되어 문을 닫자 명수 청년은 충북노회가 경영하는 청주성경학원으로 편입, 1941년 12월 15일 졸업했다. 명수 전도사가 19세 때 진병용씨의 딸 당시 만 17세의 진순례씨를 소개 받아 결혼했다. 그리고 20세가 되었을 때 선교부로부터 정식 전도인으로 임명을 받아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시장터에 있는 개척교회로 파송되었다. 1942년 4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본인은 장로교 출신이어서 성결교신학교가 싫었다. 그러나 그의 은사인 독립운동가 이원영(李源永) 목사, 송창근(宋昌根) 목사 등이 당시로서는 가장 복음주의적인 학교이니 가도록 하라고 권해 입학하였다. 1943년 12월 7일 일제 말기에 독립운동 한다는 죄목으로 문경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혐의가 없어 풀려 아미데라스 오가미(天照大神)를 교회에 모시고 예배 보던지 교회문을 닫든지 하라는 당국의 통보에 이방신을 믿기보다는 교회당 문을 닫고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폐쇄하는 아픔을 스스로 겪었다. ‘전국 신학교학우회’ 조직 복음전도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소식이 강산을 뒤덮었다. “나는 파출소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광복을 알리고 8월 17일 문경교회 재건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했는데 160명의 성도들이 모여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1945년 재건된 경성신학교에 복학 신학생으로 잠시 반탁(신탁통치) 운동을 했으나 이건 아니다 싶어 민족복음화로 방향을 선회 6월 전국신학교학우회(연합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이었다. 당시 참여한 학교는 경성신학교를 비롯 협성신학교(현, 감신대), 연희대학(현 신라대), 베나디여자신학(영락교회 운영),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등이었다. 전도회를 조직 전국각지로 나가 복음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1946년부터 경성신학교 구내의 아현성결교회 전도사가 되었으나 12월에 인천에 있는 장로교 송현교회의 부름을 받고 담임 전도사로 부임해 사역하던 중 1947년 8월 31일 성결교 중부지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송현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성결교에서 안수받고 장로교에서 목회 그후 문경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대우는 송현교회보다 못했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부임한 그 해 연말에 안동선교부로부터 일제 때 박해와 피해를 받은 문경교회에 당시 돈으로 1백5만원 전후 복구비가 배상되어 문경교회는 교역자 식량조달을 위해 논 1000여 평과 목사사택 1동을 그 돈으로 구입했다.1950년 예기치 못한 민족의 환란 6.25 전쟁이 터졌다. 주일새벽 미명에 북한괴뢰군이 3.8선을 돌파 파죽지세로 밀리고 밀려 문경도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박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김천으로, 대구, 온산과 감포까지 피난했다가, 정훈(政訓)이란 명분으로 군부대를 따라 문경으로 돌아왔다. 문경교회는 부흥해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했으나 경제가 어려웠다. 박목사는 가족들을 모아 ① 매일 한끼 죽을 먹는다. ②반찬을 사지 않는다. ③ 화장품을 사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주일날 온 교우들에도 함께 실천해 성전을 짓자고 선포하여 교회당을 지었다. 1957년 3월 노회에서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1962년 4월 유서깊은 경중노회 의성읍교회로부터 청빙이 와 의성(義城)으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일제 때 항일운동으로 유명한 교회였다. 한국교회사적으로도 농촌운동가 유재기 목사, 이영식 목사, 정일영 목사, 조선출 목사, 박병훈 목사, 조성암 목사 등이 목회하였다. 서울 장로교 청량교회 부임1968년 10월 9일 서울 청량교회의 부름을 받고 의성읍교회를 사임하고 부임하였다. 부임 당시 청량교회는 반지하교회였고 사택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 교회형편은 교인수도 적었지만 담임목사 사례비도 매월 정상적으로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다. 성실하게 말씀 중심목회로 심방하고 전도한 결과 교세가 점점 늘어났다. 부흥회 때면 강사들마다 “박목사님에게 무엇을 해드릴까요? 대우를 잘하라고 할까요, 성지순례 시켜 드리라고 할까요, 자동차를 사 드리라고 할까요”고 했다. 박목사는 그들에게 다 필요없으니 성경만 잘 가르쳐주고 가시라고 했다. 그래서 후로는 구속의 신앙, 십자가의 은총을 전하지 않고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부흥강사는 절대로 모시지 않았다. 자기교회 부흥시킨 양심적이고도 성경 잘 가르치는 목회자를 부흥회 강사로 모셨다. 청량리에 와서도 교회를 또 새로 지어야 했다. 마침 이희재 집사가 와서 목사님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저의 회사(주시회사 장자 회장)도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한다며 건축비 전체의 2분의 1을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1983년 어려움 속에서도 900여평의 대성전을 완공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목민학사·목민평화의 집 운영청량교회를 섬긴지 20년이 지나게 되었다. 은퇴준비를 하면서 은퇴 후에 할 일을 구상해 보았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자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떠올라 자기의 호(목민 牧民)을 따서 목민학사(牧民學舍) 계획을 세웠다. 교회은퇴금과 또 자녀들의 협력으로 1991년 2월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가옥 한 채를 구입, 농촌목회자 자녀들 중 서울로 대학진학한 자녀들을 받아 그들과 함께 예배하며 생활지도를 하기 시작했고, 또 1999년 2월 23일 한국농어촌선교회를 조직 농촌교회를 돕는 일을 병행하였고, 한평생 목회를 마치고 의지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여교역자들을 위한 목민평화의 집을 운영했다. 1985년 9월 17일에서 21일까지 당신이 시무하고 있는 청량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0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해외파송선교사는 본 총회 산하 현지노회에 가입토록 한다. ② 해외대회 참석시 총회를 대표하는 정식대표는 2명으로 한다. ③ 총회신학교 야간부는 폐지하기로 한다. ④ 외국영주권 및 시민권을 가진 자는 국내목회를 할 수 없다.(단 신학교수는 예외로 한다.) ⑤ 교단의 재단이사장은 교단대표인 총회장이 맡도록 한다. ⑥ 역대 총회록을 출판부에서 발행하기로 결의하다.박명수 목사는 본교회에서 1989년 2월 23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92년 6월 2일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남긴 ‘죽어야 산다’라는 짧은 여정기에서 자신의 목회신조(牧會信條)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진실과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살아왔다. 진실한 생활을 보이고 교회와 교인을 먹이는데 전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회신념(牧會信念)이다.”(목사 다운 목사 목민(牧民) 박명수 목사 추모글 모음집, 북코리아 2009, 서울 초판). 박명수 총회장은 2008년 2월 21일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93세를 읽기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6-16
  • 4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李文主)목사
    경남 합천 출신이문주(李文主, 1884.1.23~1945.6.16) 목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陜川)에서 1884년 1월 23일 태어났다. 이곳은 비록 산골이지만 이미 부산에 본부를 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그 힘든 오지 중에 오지 합천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마침 구식 교육기관이었던 한문사숙(漢文私熟)을 막 졸업하고 집에 놀고있던 이문주는 왕길지(Rew. G. Engel, 王吉志)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기독교에 입신하여 곧바로 합천교회(陜川敎會 1907. 9. 설립)에 출석하였다. 당시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회에서 1개월씩 소위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를 개설 운영하였다. 이문주는 이 과정을 매년 한번도 걸르지 않고 열심히 참석해 성경을 배우며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익혀 가며 자기의 신앙화 작업을 쌓아갔다. 그의 이러한 열심을 눈여겨 본 선교사들은 그를 선교사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임명하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후 호주장로교선교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신학(神學)을 공부하게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청년 문주(文主)는 그곳에서 신학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1918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제11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가 처음 부임한 곳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0여키로 떨어진 칠곡군 신동교회(新洞敎會)의 청빙을 받아 첫 목회지가 되었다. 후에 달성군 점산교회(오늘의 대구 북구 침산교회?)와 상주군 상주읍교회(尙州邑敎會)를 거쳐, 1924년 3월 대구읍교회에서 분립된 대구남산교회(大邱南山敎會 1915.9. 설립)에 부임하여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6월까지 시무하였다.그는 1936년 9월 10일에서 19일까지 광주양림교회에서 모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장 이승진 목사를 도와 교회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에서 16일까지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회원으로는 목사 82명, 장로 82명(미참 3명) 선교사 35명으로 모두 196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직전 총회장 이승길 목사가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17절을 중심 본문을 삼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성찬식을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총회장에 이문주 목사, 부회장에 홍택기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 중 헌의부에 이상한 안건이 하나 접수되었다. 내용인즉 임지없이 있던 무임목사가 장로로 피택될 수 있는가? 라는 질의성 안건이 올라 온 것이다. 이 안건은 각 노회에 수의한 결과 부결 처리되었다. 또 한 가지 큰 안건이 하나가 올라왔는데, 총회상설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폐지안이었다. 당시 이 부서의 상임총무는 배민수(裵敏洙) 목사였다.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폐지배민수 목사는 교육부 총무인 정인과(鄭仁果) 목사와 함께 흥사단 계열 인사로서 미국 유학파였다. 이때 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상임총무였던 배민수 목사의 사임에 이어 총회의 중요 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가 폐지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농촌부가 폐지된 이유가 겉으로 표면화 된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매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이 점점 대폭 삭감되고 있었고, 둘째는 농촌부 총무가 농한기에 개최되는 달(月)성경학교(聖經學校)에 가서 수강생들을 의식화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그동안 배민수 목사의 활동으로 농촌교회가 3배나 증가했다는 것이었다.일제를 돕는 일부 총회대의원들은 총회에서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농촌부를 폐지하기로 헌의(獻議)하여 투표한 결과 가표가 78표, 부표가 32표로 농촌부가 폐지되고 만 것이었다. 농촌부가 폐지된 후 배민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삼애운동(三愛運動 ; ① 하나님을 사랑하고 ② 땅을 사랑하고 ③ 생명(사람)을 사랑한다)을 제창하면서 개인적으로 농촌지도자들을 훈련해 배출하는 일을 전개하였다.이문주 목사의 교정(敎政) 후반기에 이르러는 정체의 변동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일제당국에 본의아닌 협력의 길에 들어서는 불가항력적인 일도 겹쳐지고 있다. 이문주 목사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수장이 되던 해에 일제당국의 종교정책 및 식민지 정책에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던 것이다.중·일 전쟁으로 친일화 강요1937년 7월 7일을 기해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하면서 아세아는 아세아인이 대동 단결하여 서양의 모든 세력을 몰아내자고 하면서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조선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한달 간격으로 창간 작업을 허락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기독교 계통(Mission School)의 교육기관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다. 그 결과 기독교 계통 미션스쿨들은 자진 폐교가 아니면 강제 폐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 당국은 전국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강제 해산 시킬려고 하다가 1년간 유예하였다. 왜냐하면 신사참배가 결의될 것을 알았던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자진해산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이와함께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조선말을 가르치는 일을 금지시켰다. 이러다보니 교회 안에까지 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문주 목사는 총회장에 취임한 그 해 1937년 3월 재단법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유지재단 이사에 취임했고, 1939년 9월 신의주 제2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朝鮮耶蘇敎長老會聯盟)을 조직할 때 평의원(平議員)으로 참여했으며, 그 해 12월엔 대구성경학원(大邱聖經學院)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경북노회지맹(慶北老會支盟)을 결성 할 때도 이사로 참여했다.기독교 친일인사로 전락1942년 5월엔 기독교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2일 장로회총회 상치위원(常置委員)으로써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주최 황군환자용자동차 3대 헌납식에도 참여하였다.1943년 4월엔 경북노회 상무위원(慶北老會 常務委員)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 24일 일본기독교(日本基督敎)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장(慶北敎區長)의 감투까지 본의 아니게 덮어쓰고 만다. 또 그는 해방이 되던 해 1945년 2월 경상북도 도청회의실에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 회의(朝鮮戰時宗敎報國會議) 경상북도 지부이사를 맡아 일제의 앞제비 노릇까지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857참조). 이는 그 시대를 지고 살았던 자들이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수치스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이문주 목사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무리이겠지만,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이끌어가는 교회의 지도자로써의 뒷모습이 씁쓸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회기의 중요 결의안 들을 살펴보면, ① 농어촌교회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연중 농사철 행사표를 제작 보급하기로 하다. ② 방지일 목사를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서양 선교사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중국 산동에 총회파송 선교사로 임명하다. ③ 최혁주 목사를 만주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가결하다. ④ 조선말로 기도와 설교 금지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왔었음을 공표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문주 목사의 작고 일시에 관하여 총회를 섬기는 일꾼들(2005 장로교출판사 p.117)을 쓴 교회사가 김수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총회장을 맡았던 이문주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몇 개월 앞둔 6월에 한국교회를 떠났다”라고 기록해 행방불명이 된 것인지, 이후의 사망일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제2권 p.857)에서는 분명하게 1945년 6월 16일 사망한 일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첨언해 둔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6-10
  • 46. 제24회 총회장 정인과(鄭仁果)목사
    평북 순천 태생정인과(鄭仁果 1888.1.9.~1972) 목사는 평안북도 순천(順天)에서 1888년 1월 9일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정의종(鄭鍾)이었으나 후에 인과(仁果)로 개명하였다. 영문(英文) 이름은 제임스 정(James Chung)이다. 그는 일찌기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40년 5월 고향에서 야소교 소학교와 1907년 6월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에 입학 1911년 5월에 졸업하였다. 그의 재능을 보고 인정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Seminary)에 유학 3년간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다시 뉴욕대학(Newyork Unirersity)에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8월까지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훌륭한 신식교육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미국에 체재하고 있을 때 1913년 10월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흥사단에 입단해 흥사단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1919년 4월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에서 안창호(安昌浩)를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특파원으로 파송할 때, 황진남과 함께 안창호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통합 개편될 때 외무부(外務部) 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1920년 10월 외무부 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과 정치사회학을 공부한 뒤,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말경 귀국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초판 p.475 참조). 정인과 목사는 1933년 총회 안에 상설부서인 농촌부(農村部)와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아 취임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가장 핵심적인 부서였고 종교교육부의 총무는 막대한 재정(財政)을 운영하는 요직이었기 때문이다. 총회산하의 각종 교재(敎材)와 찬송가 등이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인쇄 제작 판매되는 관계로 요직 중 요직이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교육부 총무자리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초대 종교교육부 총무1935년 9월 6일부터 13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81명, 장로 81명(미참 4명), 선교사 4명의 회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가 모였다.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한 후 회순에 따라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성로 목사를 따돌리고 정인과 목사가 제24회 신임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정인과 목사는 경기노회 총대가 되어 총회원으로는 처음 참석하였는데 부총회장 김석로 목사를 따돌리고 총회장에 피선되는 이변을 일으켰으니 한동안 총회장 내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초임 총대가 총회장이 되었으니 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의 위세가 어떠했던가를 말해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총회100년 역사상 정인과 목사시대 당시 이외는 지금까지 없었던 유일의 사건이 되었다. 부회장은 김성로 목사가 재선되었으나 그는 총회장은 끝내 못하고 물러났다. 갑자기 총회장이 된 정인과 목사를 미국 북장로교 소속 허대전(Rev. J.Godden, Holdcroft, 許大殿) 선교사가 옆에서 많이 도왔다. 허대전 선교사는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주일학교 교육사업에 투신 경험도 있었고,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직 시에도 일익을 담당한 바 있었고(1911. 4), 1932년까지 상임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부총무였던 정인과 목사를 훈련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판찬송가·희년 설교집 발행그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 사항 중 행정적인 것은 의산(義山)노회를 의산노회와 봉천노회로 분립키로 한 것 외에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총회 종교교육부편으로 출판한 신편찬송가(총400편)를 발행한 일이다. 이 찬송가가 한국교회 오늘의 통일찬송가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큰 사업은 이미 희년(총회설립)은 지났지만 총회 이름으로 희년기념 ‘목사설교집’을 발행한 일이다. 이후 정인과 목사는 1936년도부터 총회의 총대로는 출석하지 않았고, 이듬해 1937년에는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직도 사임하였다. 이후의 정인과의 후반기 활동은 친일(親日)로 일관하였으니 그의 인격과 신앙을 탓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인 시작에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전환되고 만다(총회를 섬긴 사람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p.106).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1937.6) 일경에 체포되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사업보고를 통해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戰勝), 무운장구기도, 전사병위문금, 국방헌금, 전상자와 유족위문 등 사적으로, 공동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도 표시되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할 때 애국운동에 주야로 애쓰신 지맹장 기타 간부 제씨와 활동하신 애국반 제위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 더욱 힘써 흥아사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결심하고 전보다 더 활동합시다”라는 장로교측의 부일협력 상황을 보고했다. 정인과는 같은 해 12월에 이 단체의 총 간사를 맡았고 이듬해 1월엔 감리교의 정춘수 목사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선임되어 노골적인 천일의 사역을 해나갔다.1941년 8월엔 장로회 중앙상치위원회에서 전시체제실천 성명서를 발표하는데도 참여하였고, 이어서 조선장로교신도 애국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과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달 삼천리사(三千里社)가 주최하는 임전대책협의회에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1941년 9월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 3일부터 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매일신보」에 종교계의 임전체제라는 시평(時評)에 “일본적 기독교로써 익찬일로(翼贊一路)의 신출발”을 기고해 기독교계의 부일협력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일제의 전쟁물자 동원에 기독교 이용이 글 결론부에서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 사이에 거교단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써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 철저화의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노력 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하여마지 아니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연맹 총간사로서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헌종(獻鍾)보고서 독촉의 건 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교회의 종을 떼어 전쟁물자로 바치고 보고하도록 독촉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19일 장로회 총회장 최지화 및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2대 기금으로 장로회에서 모금한 2만3221원28전을 냈다. 이 돈으로 자동차 3대를 제작해 같은해 11월 조선신궁에서 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로 헌납식 행사를 가졌다. 조선기독교의 일본화에 앞장1942년 9월엔 일본그리스도교단 통리 도미타(富田滿)가 만주국 10주년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가다가 경성에 들렀을 때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마련한 조선기독교의 일본화급무라는 주제의 간담회에 장로교를 대표해 최지화와 함께 참석했다.같은해 11월 조선군애국부를 방문해 지난 1년 동안 일본군이 전승을 거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밤 50석을 내면서 대동아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내의 신도 30만, 더욱이 부녀자들은 지극히 적은 돈을 각출하여 조선의 특산물인 평양율(平壤栗)을 조금이라도 더많이 병사들에게 맛보여 드리겠다는 생각으로 감격한 신도들이 승율(勝栗)을 모아 헌납하는 것이라고 유난을 떨었다. 1943년 2월에 국민 총력연맹 주최의 미영격멸간담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해 연맹 간부들과 함께 미·영폐풍의 교정에 합의하기도 했다. 해방후 1945년 10월엔 백낙준 김찰관 등과 함께 조선호텔에서 이승만을 면담했고, 11월엔 임시정부영수전국환영회 재무부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3.1동지회 중앙본부의 평남대표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조선신탁 통치 절대반대 임시정부 절대지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47년 4월 신진당(新進黨) 간부를 개선할 때 김봉준 김호와 함께 3인의 부위원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6월 독립협회확대준비회라는 임의단체를 결성, 회장을 맡고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렸으나 서재필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9년 2월 21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건강 때문에 보석으로 나왔다(친일인명사전 같은책 1960년경부터 1963년까지 3년간 경기도 문산법원리 장로교회를 담임하였다. 친일 인명사전에는 1971년 행방불명 p.497 참조)으로 기록되었으나, 김수진 목사가 쓴 총회를 섬긴 사람들 이란 책에서는 1972년 경기도 파주자택에서 영민하였다고 기록하였다(총회들 섬긴사람들. 김수진 저 p.109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6-02
  • 45. 제37회 총회장 김재석(金在錫)목사
    전라남도 광주 태생김재석(金在錫·1900~1959.10.6)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1900년 초에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부 소속 배유지(Rev. Eugene, Bell, 裵柚祉)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성실하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고 교회에 잘 다니는 그를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광주지역 선교부 책임을 지고 있던 배유지 선교사가 그가 설립한 숭일학교 초등학과에 입학시켜 졸업케 하였다. 이어 고등과에 진학 3년간 열심히 학업을 닦고 졸업하였다. 김재석은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 등을 통해 배운 유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새로운 근대지식을 맛보게 되었다. 그는 당시 숭일학교(崇日學校) 교장이었던 타마자(Rev. John Van. N. Talmage 打馬字) 선교사의 인격적 신앙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후일 목사가 될 마음을 가졌다. 숭일학교 재학시 학교 경건회 시간마다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자유가 없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기독교인들이 할 일이라고 늘 가르쳤다. 이 때 완고했던 고집과 유교 사고방식에 꽉 사로잡혀 있던 그도 나도 선교사들처럼 일본 식민지 아래서 억압받으며 소망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조선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수십번 마음 속으로 하였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안수이렇게 목회에 뜻을 두고 기도하던 중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30년 3월 제25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 동기들로는 나지환, 백남주, 이원영, 공성택, 이창호, 오윤호, 주남고 등 23명이 함께 졸업했는데, 그 중엔 제39회 총회장 이원영 목사도 있었다(한국기독교회사 총람, 이찬영 편, 소망사 1994. 서울 p.948). 김재석은 졸업하자 마자 고향이 가까운 전남 광산군 송정읍교회의 청빙으로 전도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그해 9월 전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1931년 봄 3월 정기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도사로 시무하던 교회의 정식 청빙을 받고 송정읍교회 위임목사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교역(敎役)에 힘을 쏟았다.신천읍 온천교회 부임그가 목회를 잘 한다는 소문이 황해도 신천읍까지 알려져 1935년 김재석 목사는 신천읍에 있는 온천교회(溫泉敎會)의 청빙을 받고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로 목회지를 옮겼다. 이 교회는 1914년 3월 3일 설립된 신천읍 송도리에 있는 교회로, 당시로써는 자립교회로 성장한 교회였다(예수교장로회연감 1940년간, 예장총회 발행, 황해노회 교회현황 참고).그는 이 교회에서 4년간 목회를 하다가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같은 신천읍 내에 있는 동부교회(東部敎會)로 임지를 옮겨 시무하게 된다. 이 교회는 신천읍 사직리에 설립된(1933.2.18) 교회로 온천교회 보다는 조금 늦게 세워진 교회이나 교세는 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을 맞이 했으나 한국사회는 준비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라 사회질서가 혼란에 혼란을 더해갔다. 북한지역에는 소련군이, 남한지역에는 미군이 각각 질서회복이란 명목으로 진주했으나 3년간의 해방공간의 무질서 속에 얼마 가지 않아 민족상잔의 상징인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남북 공히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였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의 힘을 빌려 공산당들이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미군들의 앞잡이로 몰며 공산당에 협력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특별히 조선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徒聯盟)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은 보통 고통을 받는게 아니었다. 공산당 탄압 피해 월남김재석 목사에게도 공산주의자들의 마수가 미쳤다. 몇 차례나 협력을 요청받았으나 신앙양심상 하나님을 배격하는 공산주의 무신자들에게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렵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와 교인들을 뒤로하고 1947년 10월 가족들을 이끌고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감시가 심해 몇 차례나 실패하였다. 얼마 후 인민군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고 전문 안내인에게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간신히 3·8선을 넘고 난 후 김목사는 두고온 신천읍 동부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하며 북쪽을 향하여 사죄의 기도를 올리며 안타까워하였다. 얼마동안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워했고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김재석 목사는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 서부교회(西部敎會)에 목회자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목사의 소개로 1948년 월남하던 이듬 해에 광주에 있는 서부교회에 부임하였다. 광주서부교회는 고향 출신 목사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전 교회가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 주었다. 김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교인들을 돌보며 제대로 된 목회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였다. 이렇게 피난 나온 목사가 성공적으로 목회가 자리잡아 나가자 노회 안에 자연히 목회 잘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전남노회가 개회되었을 때 자신이 예상도 않았던 전남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광주제일교회 시무 중 6·25 맞아그는 노회장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광주제일교회(光州第一敎會)의 청빙을 받아 교회를 옮겨 목회하던 중 통한의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들은 삽시간에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와 7월 22일에는 전남 광주까지 점령했다. 김재석 목사는 이미 북한에서 공산당을 겪었기에 광주에서도 정상적인 신앙생활과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가족들과 교인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조국과 교회의 운명을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다 북한에 두고온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죄스럽기 그지 없었다. 전쟁이 유엔(UN)군이 참전해 반전의 기회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상황이 호전되자 김목사는 광주제일교회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온 김재석목사는 전남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교회당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구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7회 총회에서 피선그의 지도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지 1952년 4월 29일에서 5월 2일까지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혼란과 혼돈의 와중에서 그를 지도자로 뽑아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고 부숴버린 교회를 재건하고 정비하는데 최전선에 세워 한국교회를 재정비하는 일에 쓰시었다.그가 재직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 의결사항들을 잠시 살펴보면, ①목사가 관공리나 국회의원으로 전직하게 되면 안수(按手) 목적에 위배됨으로 마땅히 성직(聖職)인 목사직을 사직해야 한다. ② 노회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평양, 평북, 안주, 평동, 용천, 황해, 황동, 평서, 함남, 함북으로) ③ 목사자격 시취의 건에 대하여서는 비상사태로 선언하다. 김재석 목사는 탁월한 언변과 행정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구비해서인지 총회장으로써만 아니라, 총회 정치부장으로 섬긴바 있고, 여러 기독교협의체의 의장직과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으며, 총회장이 되던 해에는 교단직영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이사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광주숭일중고등학교장에 취임 봉사하기도 했고, 1957년 4월에 총회산하 지방인재 양성기관으로 세운 광주신학교(光州神學校) 교장에 취임, 지방교회 인재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959년 10월 16일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그리고 그리던 주님의 품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민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한영제편 1981, 기독교문사, 서울 초판 p.278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5-19
  • 44. 제35회 총회장 최재화(崔載華)목사
    경북 선산 출신최재화(崔載華, 1892.12.18~1962.9.17) 목사는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산양리에서 부 최도원(崔道源), 모 우서원(禹誓原)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재화가 태어난 1892년은 구한말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외국의 압력에 의한 문호개방이 실시되고 있던 때였다. 일본을 비롯, 세계 열강들이 이 나라 조정에 자기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최재화의 조상은 선산(善山) 해평(海平)에서 8대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한 줄기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한 문중이었다. 이 지역에서 근 300여년을 살아왔기에 그 고을의 흥망이 최씨 가문과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최재화의 70평생은 한 마디로 민족과 교회라는 명제를 제외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재화가 살았던 선산에는 유교와 불교가 성했던 지역이라 유림에서 세운 여러 향교(鄕校)가 있었고, 서당이 있어 어린이들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며 명맥을 유지해 내려오고 있었다. 최재화는 부모의 농사일을 열심히 도우면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천자문을 비롯, 논어(論語), 맹자(孟子), 동몽선습에 이르기까지 수준급의 한학을 배웠다. 맏아들의 낭낭한 목소리로 글읽는 모습에 부모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였다. 선교사 부해리의 선산 선교로 복음 받아어둠의 그늘 아래에서 잠자고 있던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재화가 살고 있던 선산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는 1901년 고아면 괴평동에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Rev. Henry Munro Bruen, 傅海利)가 장로교회를 세우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1904년에는 선산읍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는 방혜법(Rev. Herbert E. Blarr 方慧法) 선교사가 뒤를 이어 군내 각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부해리 선교사는 1874년 10월 24일 미국 동부지방 뉴지지에서 태어나 프린스턴(Princetan) 대학교와 뉴욕에 있는 유니온(Union)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1899년 9월 29일 조선에 도착, 1899년 10월 26일 대구를 사역지로 하여 선교를 시작하였고, 1941년 9월 14일 선교지를 떠나기까지 만 40년간 대구지역의 토박이 선교사의 삶을 살다 간 충선된 주의 종이었다(최근 그의 선교일지 40yers Korea가 대구 남산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 5권으로 번역간행되었다. 필자주) 부해리는 대구지역 김천, 선산, 고령, 상주 등을 순회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대구 경북지방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선교사였는데, 그가 전한 선산 땅에서 최재화가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는 터전이 된 것이다. 청년 최재화는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최재화가 복음을 받아들였 때는 이미 경북일대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이 되고 날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골 청년의 눈에는 기독교란 종교가 바로 경이의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유교와 불교라는 전통문화에 젖어있던 재화에게는 자신을 깨트리고 새 세상에 나온 병아리 이상의 신비로운 영적세계를 깨달았고 보았던 것이다. 서울 경신학교 진학고향 선산에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접하게 된 최재화의 마음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찼다.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새로운 세계로 향해 눈을 뜨게된 재화는 배움의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이때 베어드(Rev. William M.Baird) 선교사에 이어 대구에 온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본 최재화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이때 안의와 선교사가 먼저 신학문을 배우는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재화의 아버지를 설득, 재화를 서울 경신학교(敬新學校)로 보냈다. 최재화는 기독교에 귀의한지 2년만에 안이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주선으로 이렇게 서울로 와서 연동교회를 보고있던 게일(Rev. James Gale) 선교사의 사택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1914년에 졸업하였다. 최재화는 경신학교에 다니면서 크게 감화 받은 두 분의 스승이 있었다. 한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체육을 가르친 김창환(金昌煥) 선생이었다. 이들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학문전승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폭포요 절규였다.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졸업 후엔 잠시 진주초등학교 교사로 1년여 봉직한 적도 있었다. 191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귀국해 모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경신학당 동창생인 이갑성(李甲成)을 만나 경신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대구·경북지방 3.1독립만세운동 주도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용상과 함께 대구 경북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의 책임을 지고 대구로 귀향, 대구읍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李滿集) 목사와 김태련(金泰煉) 조사를 만나 대구만세운동을 계획, 3월 8일 대구서문장날 계성·신명·대구고보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인해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는 현장에서 일경(日警)에 체포 구금되었고, 최재화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 선산으로 올라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3일 해평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에서 5월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감시로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그때가 1919년 6월이었다. 그는 학생모집을 위하여 수시로 국내에 잠입활동을 하다가 경북 상주에서 일경에 체포 구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감시의 허점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 그는 중국 상해로 가서 경신학교 은사였던 김규식 박사를 만나 항일 무력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본격적인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김규식의 천거로 의열단에 가입최재화는 상해에서 여운형 안창호 등의 다른 지도자들도 만나게 되었다. 최재화는 외교나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는 한계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회의를 가졌다. 독립이란 힘으로만 가능하며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의 무력을 통해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는 외교활동을 통해 조선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에 대하여 최재화는 탁상공론이라고 단정하였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무력 외에는 일본을 이길 길이 없다고 판단하였다.의열단은 김원봉(金元鳳) 양건호(梁建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일본 관리의 암살과 관청 파괴를 목적으로 한 무력적 항일항쟁 단체였다. 최재화는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거기 머물면서 북경을 근거지로, 미밀단원이었던 김원봉과도 가까이 지내며 의열단 활동을 했다. 1919년 겨울에는 북경에서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의열단의 계획 실천한 일들은 조선총독부 습격사건, 밀양경찰서 습격사건, 일본 이중교(二重橋) 폭탄사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들이 있다. 이들은 단원들을 모집 훈련시켜 국내로 잠입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화북신학교 졸업 목사안수그후 최재화는 의열단과 결별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 화북신학교(華北神學校)로 진학하였다. 1926년 졸업하고 화복노회(華北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산동성의 다의강교회(多義講敎會)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후 1928년 길림성 흥원진교회(興源鎭敎會)에서 시무하다가 1931년 10년만에 귀국하여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제일교회로 부임해 당시 선교사 측과 갈등을 일으킨 소위 자치파(自治派) 문제를 지혜롭게 깨끗하게 정리하고 1942년 부산진교회(釜山鎭敎會) 청빙을 받고 목회의 전성기를 맞이했다.한편으로는 과거의 반일활동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일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자 마자 임지를 대구 서남교회(西南敎會)로 옮겨 사역하던 중 그간의 그의 독립운동과 교회 사역의 활동을 인정받아 1949년 4월 서울 새문안(新門內) 교회에서 모인 제3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 재직했던 35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연합으로 합동찬송가를 발행하기로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금을 장·감·성이 7:2:1의 비율로 나누기로 하다. ② 그동안 사용했던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어 부르기로 하다. ③ 노회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황남노회와 김제노회). ④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변경하기로 하다. ⑤ 총회 기관지 ‘부흥’을 발행하기로 하다. 최재화 목사는 총회장 임기를 승리롭게 마치고 1954년 대구장로회신학교(현재 영남신학대학교와 대신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이사장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1955년 안의와 선교사와 신태식 장로, 김광수 목사와 함께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와 계명문화대학의 전신)을 설립, 지방의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9년 예장이 분열할 당시엔 예장 합동측에 남았고, 은퇴 후에는 낙향해 있다가 1962년 9월 1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 1980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백은 최재화 목사, 김남식 2003 베다니 재판 서울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5-12
  • 43. 제19회 총회장 홍종필(洪鍾弼)목사
    경북 울진군 평해 출신홍종필(洪鍾弼: 1887.9.24~1935.5.29) 목사는 지금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해 있으나, 당시 강원도 울진군 평해(平海)에서 홍재찬(洪在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한양에서 진사(眞士)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릴 때 한양에서 한성측량학교(漢成測量學校)를 졸업하였다. 13세 때 숙부(叔父) 홍재신(洪在信) 문하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1906년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일제의 횡포로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사촌형 홍종익(洪鍾翊)과 함께 한양에서 낙향해 간 곳이 전라북도 익산군 옹포면 재리였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터전을 내렸는데 농토(農土)를 마련해 생활터전을 넓혀 나가는데 성공해 그는 1년에 500석을 생산하는 중농(重農)으로 발돋음해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지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치안(治安)이 문란해 밤이면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생활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얼마 전 개항이 된 군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우연히 최홍서 조사를 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출석한 교회가 군산개복교회였다. 이때 마침 김필수(金弼秀) 목사가 개복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집례로 두 형제가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들은 재력가여서 교회를 신축할 때 금전적으로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개복동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군산 개복교회 2대 장로로 안수당시 상황을 1928년 총회에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 275p.)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群山郡 開福洞敎會에서 金弼秀 牧師로 委任하고 洪鍾翊을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로 組職하고 其後 牧師는 李元弼, 洪鍾弼, 長老는 洪鍾弼, 朴春五, 梁錫柱, 洪仁元 等이 次第視務하니라>. 이렇게 교회 건축하는 일과 봉사에 전력한 결과 그의 형인 홍종익은 개복교회 초대장로가 되었고 홍종필은 양석주와 함께 개복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던 것이다. 홍종필 장로는 머리가 명석하여 1916년 전북노회에서 장로로써 노회서기가 되기도 했고, 담임목사였던 김필수 목사의 많은 영향을 받아 1917년에는 자기 교회의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5년 간의 신학수업을 잘 마치고 1923년 신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군산 개복교회의 청빙을 받아 전북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받아 모교회에서 영광스러운 목회사역을 하였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그 후에도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김필수 목사(1915, 제4회 총회장 역임)의 후광을 받으며 전북노회 안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때문에 동료 목사나 장로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아 목사안수 받은지 1년만에 전북노회 노회장이 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서기, 이듬해(1924) 회록서기, 1927년에는 서기로 두 해나 봉사하였다. 홍종필 목사만큼 총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감연합공의회 이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편집위원, 기독신보 이사,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위원 등을 역임하며 대외적으로도 활동이 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 개복교회 안에 교육기관으로 영신여학교(永信女學校)와 영신유치원(永信幼稚圓)을 설립하여 교장과 원장을 역임했으며, 이 일로 군산 개복교회는 호남지방에서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닦였다고 하겠다. 교육기관의 융성은 인재양성의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일취월장 성장 발전하게 되자 군산 개복교회는 교계나 대외적으로 부흥발전하는 교회로 소문나자 당시 시무목사였던 김필수 목사가 제4회 총회장으로 피선, 교단을 위해 행정적인 봉사에 이어 1930년에는 제19회 총회장으로 홍종필 목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군산 개복교회 김필수 목사에 이어 한 교회에서 두 번째 총회장 배출한 세기를 넘긴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의 총회장이 나온 대형교회들이 더러 있지만 반 세기도 되기 전에 조선교회에 한 교회에서 두 사람의 총회장을 배출하게 된 것은 교계의 화제 거리요 자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경성의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번째로 탄생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1936년 제30회 전북노회가 1935년 4월 29일 갑자기 서거한 홍종필 증경총회장이요, 증경노회장이었던 전임 노회장에 대한 약력을 소개하면서 그의 인품과 사람됨에 대해 노회록에 남긴 평가를 인용해 보면 “先生은 천성(天性)이 沈眞하시고 言少遠念하사 진리를 敬愛함으로 一般信者에 根本이시였다.”(전북노회 제30회 회록)고 했다. 1930년 9월 12일에서 18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 모인 총회는 목사회원 64명, 장로회원 64명(2명 불참), 선교사 회원 32명 합계 21개 노회에서 158명 출석으로 개회한 가운데 총회장 차재명(車載命) 목사의 사회 하에 1부 개회예배를 드린 후 임원 선거에 들어 갔다. 이때 당시 홍종필 목사는 겨우 43세의 젊은 나이로 관서지방의 높은 벽을 뚫고 제19회 총회의 총회장으로 피선된 것이다. 그의 나이 약관의 40대 초반 젊은 목사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총회가 진취적이었고 혁신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임원이 개선된 후 사회봉을 잡은 홍종필 목사는 회원들의 어려운 질문들을 지혜롭게 잘 받아 넘기는 수완을 나태내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회원이 젊은 총회장을 시험이라도 한번 해 보겠다는 듯 손을 들고 다분히 짓궂은 질문을 했다. 회장님 장로가 안수 및 목사처럼 축복기도를 못하는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시요 라고. 이에 대해 홍종필 총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회 헌법에 명시된 대로 목사는 사도들이 행한 특권을 전수하였기에 목사 외엔 장로가 안수나 축복기도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명쾌하게 답했다.“장로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당회장 될 수 있어”홍종필 목사는 장로출신 목사였기에 이 질문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 간단명료 하면서도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종필 목사가 재직했던 제19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결의안들을 살펴보면, ① 당국에서 종교단체 법안을 제정해 종교단체를 감독할려는 일에 대하여 총회는 반대하기로 하다. ② 매년 3월 지키던 꽃주일(후에 어린이주일로 됨)을 폐지하고 그 날을 신학교주일로 하기로 변경하다. ③ 장로가 총회장은 될 수 있으나 당회장이 못되는 이유에 대하여 부득이한 경우에는 장로가 당회장이 될 수 있다고 결의하다. ④ 안수 및 축복기도는 장로가 할 수 없다. ⑤ 제주노회 설립을 허락하기로 결의하다. ⑥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해 종교교육(宗敎敎育)지를 창간하기로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병고로 인해 총회장직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 5월 29일 갑자기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일이었다. 당시 유족으로는 사모였던 김완윤(金完允)과 장남 창길(昌吉)외 1남6녀를 남기었다.(1940간 기독교연감 및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上 1928, 下 1968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4-27
  • 42. 제16회 총회장 김영훈(金英勳)목사
    평북 의주군 출신김영훈(金英勳, 1878~1939)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月華面) 호암동(虎岩洞)에서 당시 의주부사(義洲府使)의 장남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의주지방은 일찌기 기독교가 들어와 개화된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벼슬을 역임하고 있던 사대부 양반집에서 태어난 영훈으로서는 기독교에로 개종 내지 신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영훈은 자신이 1886년부터 1904년까지 한문을 배우며 작서(作書)하는 법을 사숙을 통해 익힌 터였고 스스로도 자기의 장기(長技)는 한문(漢文)과 시문(時文), 사자(寫字)라고 할 정도로 한학(漢學)에는 능했고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그가 기독교로 개종 및 입신(入信)하게 된 환경은 자신도 모르게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김영훈의 절친한 친구들인 한석진 김진근 양전백 등이 이미 평양주재 선교사 마포삼열(Rev. Samuel S. Moffett)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여 착실한 기독청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들 친구들로부터 기독교로 귀의할 형편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듯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의주부사로 있었던 부친에게 양반으로서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영훈에게 뜻하지 않던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마팻 선교사의 ‘신학반’에 있던 친구들에 의해 개종마포삼열 선교사가 1892년 자신의 집에 의주의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놓고 처음으로 신학반(神學班, Bible Class)을 개설하고 있었는데, 양전백과 한석진이 여기에 참가해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김관근이 함께 참여하게 되자 제법 신학반은 활기를 띄어가고 있었다. 김관근은 이들보다 조금늦게 참여했지만 이미 그의 부친 김유현은 만주 봉천(封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일로 김유현은 백홍준의 사위가 되었으며, 김유현의 아들 김관근은 김영훈을 개종시키는 일에 성공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가르쳐 여호와이레 혹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붙잡혔다고 해야 할 것이다(제주와 산동선교이야기, 민경운, 게노시스 2015. p.196-198).김관근은 부친의 개종과 함께 기독교 가정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서 당시 평양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의 긴 기간 신학수업(神學修業)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김영훈과 김관근은 같은 마을 이웃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김관근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개종사건을 이야기 하자 여기에 마음이 감동된 김영훈은 친구 김관근의 인도로 크리스챤이 된 것이다. 김영훈은 후에 의주지방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될 때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였으며 스스로 제자화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팻(S. Moffett)이 그냥 놔 둘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영훈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앞으로 조선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를 자신의 선교구역의 조사(助師, Helper)로 정식 파송하였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안수마팻은 그를 조사로만 놓아두지 않고 1908년 3월에는 자신이 세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시키게 된다. 김영훈은 장로회신학교에서 선교사들의 복음적이고도 수준 높은 강의에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살기좋은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미개한 조선땅에까지 와서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일에 너무나 감동하였고, 자신도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면 한국보다 더 어려운 지역에 가서 선교사로서 활동해야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였다. 드디어 1913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제6회 졸업생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의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총회 창립기념으로 해외지역인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목사와 함께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총회를 섬긴사람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74~75 참고).김영훈 목사는 평북노회 소속이다. 평북노회는 1912년 2월 15일에 창립된 노회이다. 김영훈은 1913년 2월 19일에 모인 제3회 평북노회에서 방효원(方孝元) 등과 함께 신학생 취교자(就校者) 명단 속에 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신학수업 계속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김영훈은 그렇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해(該)노회에서 호암교회(虎岩敎會) 장로 안수자로 허락을 받는다. 같은 해인 1913년 8월 26일에 회집된 제4회 평북노회에서 김영훈은 총회 명령에 의하여 중화민국(中華民國) 선교사로 임명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평북노회는 김영훈을 총회명령에 의하여 중화민국 선교사로 임명한다는 표현이다. 중국 산동성 총회 파송 선교사총회는 실제로 총회전도국(總會傳道局)을 의미하는 것이다. 총회 전도국의 명(命)은 곧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명령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시각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총회 산하의 각 부서가 추진하거나 파송하는 것은 곧 총회가 행하는 것이다. 1918년 상해 광학서국(廣學書局)에서 발행한 중화기독교회연감(中華基督敎會年監)을 보면 당시 조선교회가 중국 산동지역에 선교한 일에 대하여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 한국교회가 1912년에 전도부를 조직하여 중국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 둘째 그 선교 경비를 전국교회의 매년 감사절 헌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는 사실, 셋째 선교하는 일을 중국 화북대회(華北大會)와 협의해서 래양지역(萊陽地域)을 허락받고 선교를 시작한 사실, 넷째 그렇게 해서 1913년에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을 파견하여 전도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고 초기 조선해외선교의 상황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적고 있다. 초기 파송선교사들이 현지어인 중국어를 잘 못했음에도 어릴 때부터 한문사숙에서 배운 한자를 주고 받을 때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1917년 귀국 후에 의산노회에서 성역을 감당하다가 3.1운동의 민족대표로 가담했던 유여대를 도우며 의주지방 3.1운동에 가담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다.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사업회 조직이미 그의 이름이 총회적으로 알려진 관계로 1927년 9월 9일~15일까지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모인 제16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된다.그의 재임시 의결되었던 총회 결의안들을 살펴보면, ① 총대 1인이 두 가지 이상 겸직하는 것을 금하기로 하다. ② 최초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토마스목사 순교기념사업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③ 금강산에 교역자 수양관 건립을 허락함과 동시에 3만원 모금도 하기로 하다. ④ 교역자와 신자들을 위해 성경사전을 발행하기로 하다. ⑤ 예루살렘에서 모이는 국제선교대회에 참여하기도 하다. ⑥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조직하는 것을 허락하다. ⑦ 목사만 있고 장로(당회원)가 없으면 당회는 폐지하기로 하다. 김영훈 목사는 그렇게 조국 광복을 원하고 보기를 원했으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9년 61세의 연수를 다하고 하나님의 품에 영민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4-15
  • 41. 제21회 총회장 남궁혁(南宮爀)목사
    서울 출신으로 배재학당 졸업남궁혁(南宮爀, 1882.7.1.~1950.?) 목사는 경성(서울)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는 1881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교회사가 김수진 박사), 필자는 1979년 간행된 한국기독교순교사를 쓴 김광수(金光洙) 박사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 그는 어릴 때 한문서숙(漢文書塾)에 입학해 당시의 교육제도를 따라 인문교육을 받았다. 그의 가문은 한말 애국자요, 양반가문에서 큰 어려움 없이 부모슬하에서 자랐으며, 머리가 총명해 백일장에 나가 그의 글이 통과되는 영광도 얻었다. 그는 한문수학을 한 터여서 신학문에도 관심이 있던 차에 마침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해 서양 문물과 언어에 매력을 느끼고 졸업하자마자 인천세관에 관리로 취직하였다. 이 때가 1901년이었다. 잠시 세관원으로 이곳에서 일하다가 1903년에는 전라도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나 경성을 떠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마 9:9)를 부르신 것처럼 남궁혁이 목포에 와서 처음 만났던 외국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선교하고 있던 변요한(Rev. John Fairman, Preston 邊要翰, 1875~1975. 4.30) 선교사였다. 그는 변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는 목포 양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훈련을 받고 있던 중 선교사의 권고로 그 좋은 목포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하고, 목포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영흥학교(永興學校) 영어선생으로 취직하였다. 선교사들이 세운 영흥학교 영어선생당시 세관원의 월급이 70원이었는데 영흥학교의 월급은 40원이었으니 갑지가 생활비가 3분의 1이나 줄었던 것이다. 이때 자기를 지도해 주고 돌보아 주던 변요한 선교사가 1909년 광주에 있는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장으로 가면서 남궁혁은 변요한 선교사의 요청으로 숭일학교 학감으로 옮겨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이때 그는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 현 광주제일교회) 출석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 교회 장로장립을 받았다. 1917년에는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목사가 된 후에는 광주양림교회를 시무하였다. 그는 신학교 입학 전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영어실력이 뛰어나 젊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연이 되어 1922년 그는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기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1918년에 이기풍 목사가 갑자기 목소리(성대)에 이상이 생겨 전남노회(全南老會)에 휴직을 청원하게 되어 노회의 허락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이기풍 목사 대신 강단에 서서 설교를 대행하기도 했다. 프린스톤신학교와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졸업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서울, 정주, 대구를 위시 전국으로 확산되지 남궁혁도 학생들과 만세운동 모의를 한 혐의로 잠시 일경(日警)에 의해 구금되기도 하였으나 곧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당시에는 입학하기에도 힘든 장로교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신학교(Prinseton Seminary)로 가서 공부한 결과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이어 리치몬드(Richmond)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Seminary)로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약학(新約學)을 전공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낭궁혁은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도 북문안교회의 노라복(Rev. Knox. Rovert)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일하면서 노라복 선교사의 통역을 맡아하기도 했다.남궁혁 목사는 드디어 학업을 다 마치고 1925년 귀국하게 되는데, 입국하자마자 평양 장로회신학교 모교에서 한국인 최초 신약학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정식 신학박사로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게 되자 학생들에게 큰 인기만 아니라 선배로서 한국교회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교수에 전념하면서 다른 한편 성경번역과 주석사업에도 착수하였으며, 동시에 신학교 전문 학술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의 일도 맡았다.신학지남 편집인으로 활동 그는 또 후배들을 퍽이나 사랑한 도량있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자기집에서 환영 만찬을 하면서 신학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고, 김재준(金在俊) 박사의 생계를 위해서도 염려하였고, 이성휘(李聖徽) 박사, 송창근(宋昌槿) 박사 등 후배들의 진로를 후원해 줌으로써 한국교계가 크게 활기를 띄게 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그의 가슴은 넓고 따뜻했고 포용력이 컸다. 이로 인하여 동역자로부터 자유주의(自由主義)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이런 일화도 있다. 1948년 제3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때 이자익 총회장으로부터 설교요청을 받고 총대들을 향해 “신학(神學) 싸움에 선교사들이 어느 한 편에 치우치면 한국교회는 분열될 우려가 있다”고 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그는 한국교회의 분열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미리 진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그의 뒤를 이은 인물 중에는 보수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한국교회 미래와 앞날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싱해 임시정부로 망명 거류민 단장1938년 9월 2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사실상 학교는 폐교상태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대혼란의 시기였으며 명망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일제 당국으로부터 회유와 여러가지 모양의 유혹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궁혁 목사는 신사참배에 동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큰 결심을 하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곳으로 망명하였다.그는 조국광복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1945년에 접어들자 그곳에 망명 중이던 남궁혁 목사는 “조선인 거류민 단장”이 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보살피며 지내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이듬해 많은 조선인 거류민들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미 군청청 장관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赤産管理處長)에 취임하였다. 잠시 후엔 재무부 세관국장(稅關局長)의 직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속에서 더이상 몸담고 싶지않아 1948년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194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 하여 남산(南山)에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가 개교될 무렵이었다. 박형룡 박사가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그는 “나는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의 신앙을 의심한 사람도 있었으나 남궁혁 박사는 이미 한국교회의 분열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애국지사 이승만 박사가 일제와 싸우다가 망명길을 떠나면서 남궁혁 목사의 집에 와 신세를 진바 있었으나 그는 그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의 신세를 지려고 아니한 큰 위인이었다. 1932년 그는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9일~16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모인 제2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총대로는 목사 72명, 장로 72명(미참 9명 포함), 선교사 37명이 참석해 개회되었다. 중요 결의사항으로는 ① 비총대라도 총회상비부 회원은 될 수 있게 결의하다. ② 경기노회를 분리하기로 가결하다.(경기· 경청노회) ③ 신자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신앙생활(信仰生活)지를 창간하기로 하다. ④ 기독교교육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종교교육을 지도하기로 하다.남궁혁 목사는 부총회장을 거치지 않고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고 장로회신학교 교수신분으로 교단 행정직인 총회장으로 선임된 경우는 마포삼열(Samel A, Moffett) 박사 이후 두번째였다. 그가 총회장으로 선임된 후 9월 14일에 토마스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토마스선교사 기념교회>를 헌당하는 일이 있었다. 6.25 와중에 납북돼 생사 불명1938년 9월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4개 선교부(미국북, 미국남, 호주, 카나다)와 함께 운영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자진 폐교하고 선교사 교수들은 모두 철수하였다.남궁혁 목사는 다른 직책들은 고사하였으나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총무의 일을 1948년까지 봉사하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950년 6월 25일 남북의 전쟁 와중에 북괴에 의해 납북된 후 그의 생사를 알수 없게 된 것이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북한에서 종교인들, 특히 교회지도자들에게 가한 핍박과 회유에 응하지 않아 많은 납북 교회지도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한국기독교순교사, 김광수 저, 1979 한국교회사연구원 p190~194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4-06
  • 40. 제14회 총회장 임택권(林澤權)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임택권(林澤權, 1885~1950)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임택권은 어릴적부터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를 배우며 유교(儒敎)를 숭상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소안론(Rev. Willian L. Swalen, 蘇安論 1865~1954. 5. 8)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임택권은 당시 소안론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게 된다.소안론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1892년 11월 래한 서울 선교부에 소속되었다. 이듬해 1893년 1월 관서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받고 평양지방 선교사업에 집중하다가 나중엔 평양주재 선교사가 되었다. 1894년에는 잠시 강원도 원산 선교부에 파송되어 순회전도에 몰두하면서 교육활동에도 기여하였다. 1899년에는 다시 평양 선교부로 돌아와 숭실학교 관리 책임자가 되어 학교발전과 교육선교에도 이받이 했다. 또한 소안론은 1901년에는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기 이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長老會公議會)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내한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제하기도 하고, 선교지 활동상황을 점검하는 책임을 지며 교회행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03년 1월에는 마포삼열(Samuel Moffett)과 베어드(William M Baird)와 함께 평양신학교 개교에 힘을 모아 전도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착수했다. 소안론은 1932년에 필생을 다해 선교사역에 매진했던 조선선교를 마감하고 귀국한 조선선교사역 초기에 큰 자취를 남겼다.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받아임택권은 1902년도에 자기를 기독교로 이끈 소안론 선교사에게서 세례(洗禮)를 받았으며, 그의 신앙성장에 기대를 건 소안론 선교사는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사경회(査經會)에 열심히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그 결과 그는 소안론 선교사에게 지도자가 될 소양을 인정받고 소안론 선교사의 당회구역을 보살피는 조사(助師)로 채용되어 소안론과 함께 순회조사(巡會助師)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소안론 선교사는 그의 조직적인 사고와 두뇌를 인정하게 되었고, 또 그의 적극적인 복음사역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안신학교(安信學校) 교장으로 임명하여 일하게 하였다. 소안론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며 신학교 다녀임택권 청년 조사의 적극적인 활동에 감동한 소안론 선교사는 그를 자신의 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시켰다. 임택권 청년은 직분이 순회조사였기에 신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소안론의 당회구역을 순행하면서 학습자와 세례자 교육에 힘썼다. 소안론 선교사가 만들어 준 일정표에 따라 학습과 세례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 시켰다. 이렇게 열심으로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빈틈없이 일한 보람으로 소안론 선교사의 마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학교가 개교되면 임택권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이리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모두 이수한 임택권 조사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교회의 청빙을 받아 1914년 가을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은율읍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일본 고배 중앙신학교 유학그러나 임택권 목사는 다시 깊이있는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일본 고배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로 가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특별히 미국 선교사 홀튼(Fulton) 교수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매력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후일에 고백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20년 부터는 황해도 재령읍 서부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목회하였으며, 1924년 임택권 교장은 목사 신분이었기에 교내 채플(chaple)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꿈과 이상을 신앙으로 심어 줄려고 애를 썼으며 이로써 학생들에게 기독교적인 인격 도야을 위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그가 총회장으로 선출된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25년 9월 12일부터 18일까지 평양서부교회에서 목사총대 82명, 장로총대 78명(4명 미참), 선교사 대표 34명이 모여 개회되었다. 이자익(李自益) 목사가 성경 요한복음 10장 1~10절을 봉독한 후 ‘우리의 좋은 목자는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였다불신자를 위한 목사의 결혼 주례 금지임택권 목사의 재임시 총회 결의 사항을 몇가지 언급하면, ① 지금까지 지켜오던 꽃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해 부르기로 하다. ② 미션학교(Mission School)는 반드시 교목을 두어 성경을 가르치기로 하다. ③ 중학교에는 목회자 자녀들이 입학할 경우 수업료(修業料)를 면제해 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기로 하다. ④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 다른 교파로 이적해 가는 교인들은 제적하기로 하고, 철저한 장로교회 요리문답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인 관리에 철저를 기하기로 가결하였다. ⑤ 한센씨병 근절을 위한 근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⑥ 간도노회를 동만노회(東滿老會)로 이름을 변경하기로 하다. ⑦ 함북노회(咸北老會)를 분립(함북·함중)키로 하다. ⑧ 불신자를 위한 목사의 결혼 주례는 불허하기로 하다. ⑨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재단법인화 하기로 하다.한국 최초 신학자 남궁혁 박사를 초빙이외에도 최초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한국인 신학자 남궁혁(南宮爀) 박사를 신약학(新約學) 교수로 부임해 취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낭궁혁 박사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직영하는 리치몬드(Richmond)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Semirary)를 졸업하였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취임하게 되었다. 이 일로 지금까지 미국 선교사들이 독점했던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가 점점 변화 발전해 가는 모습이 전개되기 시작했다.남궁혁 박사는 1882년 7월 1일 서울 출생으로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귀국, 최초의 한국인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한국인 교수로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남궁혁 박사는 1932년 21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1938년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조치가 내리자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 8월 해방이 되기까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귀국해서는 교회연합사업을 위해 오늘의 NCC 로 불리우는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총무직을 맡아 봉사하던 중 1950년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고 말았다. 신천군 사평교회 재임 중 6.25 와중에 행방불명임택권 목사는 총회장으로서 임기를 마치고서 1926년 명신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재령읍 서부교회(西部敎會)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연구하기를 좋아해 서부교회를 맡아 시무하면서도 1928년엔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간 목회에 대한 연구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9년에는 신천군 사평교회로 임지를 옮겨 목회를 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로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전쟁의 와중에 1.4후퇴시에 월남한 장로교 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기독교연맹(朝鮮基督敎聯盟)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고 학살 당하였을 것이라고 전해 주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 한국교회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많은 지도자들의 상실이 아닌가 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3-24
  • 39. 제42회 총회장 전필순(全弼淳)목사
    경기 용인 출신전필순(全弼淳 1897.4.7~1977.2.14)) 목사는 경기도 용인시 외사면 석천리 농촌에서 전규식(全圭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일우(一愚)이다. 하나님 앞에 한 어리석은 인생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어렷을 적에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정평리교회 교인 심문택(沈文澤)이 세운 봉양학교(鳳暘學校)를 1912년에 졸업하고 가까이에 있는 실업학교(實業學校)로 진학, 1년간 잠업(蠶業)과 축산(畜産)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이 무렵 경성(京城) 연동교회에서 내려와 열심으로 전도하던 원세성, 박용희 등에게 전도를 받아 장평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1914년 당시 순회선교사였던 톰스(Rev.U. Selwys, Toms·都瑞元)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 간사로 있으면서 사립 아현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봉사하다가 나중엔 학감(學監)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 서기로 근무하였고, 1919년 1월부터는 연동교회 원세성(元世性)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助師)로 부임 11월까지 거의 한 해동안 사역하였다. 당시 3.1독립운동의 주역들이었던 함태영, 이상재, 박용희, 김마리아 등 연동교회 교인들의 연락을 취하는 책임을 맡았고, 3.1운동 후에도 독립탄원서를 미국 영사관에 보내는 한편, 민족대표 33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렸으며,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해갔다. 이 일로 인해 그해 11월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민족독립운동으로 1년간 옥살이1921년 5월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입학해 학업을 이수하고 1926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4월부터 연동교회 조사(Helper)로 있으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가서 교단 헌법에 따라 1개월간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27년 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묘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광화문에 위치하고 있는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출강했다. 1927년 일본에서 종교단체(통합)법안이 일본제국의회에 제출되자 장로교회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종교단체법안 제정 반대운동을 벌 이기도 하였다.문서선교기관인 ‘기독창문사’창설한때는 윤근(尹槿) 등과 함께 의논하고 조선예수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펼치기도 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박승봉, 유성준, 박용희 등과 함께 순수기독교 문서선교 사업기구인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 창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독교창문사는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세운 조선야소교서회(C.L.S)와는 달리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의 대표적인 출판물 가운데는 일제 당국에 의해 출판이 보류되고 있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를 출판하였고, 또 당시 성경번역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카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를 출판했던 것이다. 이 게일의 사역성경전서는 당시 한학에 능했던 이원모(李元模)의 도움으로 직역이 아닌 의역(意譯)을 추구한 한국 성경번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출판물이었다. 이렇게 볼때 기독교문화사적으로나 출판사적인 의미에서 보다라도 기독교창문사를 설립한 것은 이 게일의 사역성경을 선교사들의 공동성경번역위원회 회원 전체가 인정하지 않은 관계로 당시의 대영성서공회의 출판에 막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치호씨의 도움으로 게일의 사역성경을 기독교창문사 이름으로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묘동교회 사임 후 기독신보 기자 활동전필순 목사는 묘동교회를 사임한 후에는 기독신보(基督新報)에 기자로 입사해 사장에 이르렀고, 1933년에는 YMCA 이사, 피어선고등성경학원 이사장 겸 원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에 수송교회에 부임해 다시 목회사역을 감당했으며, 기독교사회복지 기구인 태화여자관 이사와 1937년엔 자기가 몸담아 일했던 기독신보 이사를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연동교회 100년사 고춘섭편저 금영문화사 1995, 서울 p.300-305,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 편, 기독교문사 1995. 5판 pp.824-825 참고).전필순 목사는 민족적인 수난 역사 한 가운데서 민족과 함께 목자로서 지도자로서 괴로운 순간이 많았던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이 만주땅을 항해 소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이를 지지 찬양하는 편에 본의 아니게 서게 된다. 당시의 언론매체 매일신보(每日新報) 7월 25일자 호외(戶外)에 ‘太陽은 蒼空에 높이 떳다’라는 제목의 그의 글이 실린 것이다. 그 달 26일 종로 YMCA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종교단체 연합시국 강연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감리교회 양주삼 목사와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강연했다. 친일 활동에 가담1938년 8월 윤치호 김우현 등과 함게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주최한 기독교애국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平議員)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대문교회(南大門敎會)에서 경성노회지맹(京城老會支盟)을 결성할 때에는 노회장으로서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른바 친일행위의 현장에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일본록기연맹에서 간행하는 <록기(綠期)> 1937년 11월호에 “日本의 진정한 적은 어디에 있는가?”란 글에서 일본이 막대한 물자와 고귀한 피를 흘리는 이유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성업(大聖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대업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가 적(敵)이라고 하였다. 1941년 4월 연동교회로 재차 부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경성노회 노회장으로서 총회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도 참석했다.그는 또 1942년 시국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했고, 같은 해 2월 갈홍기, 심명섭 등과 함께 “국민문학(國民文學)”에서 주관하는 반도기독교의 개혁을 말한다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부위원장을 맡았다.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일본기독교단 통리(統里) 도미타(富田蒲)의 래방을 계기로 기독교의 일본화의 급무라는 주제로 조선호텔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조선장로교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동참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주최로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개최된 황군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에 정인과(鄭仁果), 김응순(金應珣)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같은 달 안국동교회(安國洞敎會)에서 경성노회와 경기노회가 합동해 경기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립총력경기노회연맹을 맡으며 친일행각을 계속하였다.연동교회 목사로 재차 부임해방 후에도 계속 연동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4월 불구속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8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1953년 총회신학교 이사와 연세대학교 이사를 역임했고, 1957년 9월 19일에서 24일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그동안 일제 하에서 피치못할 정세 아래에서 죽지못해 친일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통열하게 뉘우치며 회개하였다. 애석하게도 전필순 목사는 1959년 9월 대전에서 모인(중앙교회) 제44회 총회가 정회된 후 당시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지했던 측이 서울에 올라와 전필순 목사가 시무하던 연동교회에 총회 속회를 하는데 동조함으로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가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당시 총회 결의안의 중요한 안건을 보면 ① 당시 동구권의 항가리 의거에 의연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며, ② 국제선교협력 모임었던 IMC대회에 한국대표로 한경직 목사와 유호준 목사를 파송하기로 하다. ③ 외국 선교부는 해체하고 협동사업부를 두기로 하다 ④ 교회안 강단 전면에 십자가를 부착하지 않기로 가결하다. 전필순 목사는 1961년 6월 그가 섬기던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와 동시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는 그의 사역의 공로를 인정,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으며, 1977년 2월 14일 주님의 품으로 영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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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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