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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교회-2
    일본에서 복음 강연을 여러 번 가져본 이들은, 그 참여하신 분들에게서 지역적인 도넛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참여하신 분들이 거의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거주하는 마을 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알게 되면, 죽어서도 마을 묘지에조차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크리스천들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국민은 모두가 천황을 숭배하던 터이라서, 일본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란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천황 숭배를 당연히 거절하게 되므로, 종교 때문에도 매국노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일제 강점기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애국이요 애족의 행위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 읽은 성경은 출애굽기였다. 기독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실제로 옥중에서 돌아간 신도들은 나라사랑과 신앙이 일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톨릭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사람의 순교자도 배출하지 못하였음은, 저들 지도부가 이미 일제와 천황숭배를 비롯한 조약들을 맺은 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적인 부끄러운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혁신적인 실천으로 인해서, 지나간 과거가 모두 묻혀 지고 씻은 듯이 부끄러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김 추기경은 독일 개혁교회의 신학원에서 개신교신학을 연구하였고, ‘내 탓이요’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벌이면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가톨릭이 되게 한 것이었다.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인들과 크나큰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은, 저들이 부끄러움과 패배감 때문에 결코 다시 재건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론적인 생각들은 모두 시간 속에 묻혀져 버리고, 오늘의 독일은 유럽의 지도자 국가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진 것일까? 더욱이 유대인들이 600만이란 희생을 감내하였지만, 오늘 날에 가장 자신들을 존중히 여기고, 자신의 동포들을 지극하게 사랑하고, 소통이 잘되는 민족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도 못 받아 들였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해서 열 가지 계명을 스마트하게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에게서 신명기 서신의 저주는 온데간데없는 것 갔고, 신명기가 예찬하는 실제의 행복감이 가득 넘치는 세상을 일궈냄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더더욱 1퍼센트에 육박하는, 성령을 체험한 메시아닉 쥬가 일어나는 이유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종교 개혁이 독일의 한 지역에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할 즈음, 로마 공교회는 제도적으로 수많은 결함들을 들어내고 있었다. 한 때는 ‘팍스 로마’라는 평화가 온 유럽에 영향을 주어서 사람들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하였지만, 시간을 보내면서 내부의 타락과 지도자들의 탐욕은, 주변 지역들의 제후들과의 불편한 관계들을 가져왔고, 전체주의에 신물이 날 정도였으며, ‘공교회’의 제도에 모두가 얽혀져 있어서, 불편한 관계가 중첩되자, 사람들은 뒤집힐 날만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이 때에 황제의 칙령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일반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위에서 온 권세 있는 ‘하나님의 복음’을 루터가 선포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늘에서 내린 포고령이었는데,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이 신의 계시의 칙령을 완수할 사도는 바로 루터이었던 것이다.루터의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남’을 사람들에게 계몽하고, 누구든지 이 복음 선포를 수행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입게 됨’을 성경을 번역하고, ‘바빌론 포수’와 ‘만인 제사장’ 등의 계몽서적을 발간하여 읽히게 함으로써 이뤄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력은 당시 ‘우리나라 우리 민족 끼리’라는 구호와 공감대를 가지면서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Needs와 맞아 떨어져서 커다란 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역기능적으로 보여 진 이들에게는 세월호 같은 운명이 라고 생각 될 수 있겠지만, 누가행전의 통찰력을 도움 받는다면, 이 한국교회에 승선한 모든 승객들과 승무원들을 구해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레데 섬을 떠나, 이탈리아로 항해하던 600명 가까이 승선한 배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몰타 해협에서 파선하였지만, 숨은 은둔자인 죄수 바울만큼은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고 있던 터이었다. 이 배에 승선한 이들은 바울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모두가 살아남아서 로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간 십삼 년 넘게 ‘영성논단’을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다음 날을 기약합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8-01-18
  •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교회-1
    마태의 산상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집약시킨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해를 맞으면서, 교회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을 먼저 구하기 십상이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우선시함에서 비롯됨일 것이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전에, 교회 지키기에 먼저 마음을 빼앗겨 왔다. 이는 교회론 적이고 교회주의에 중점을 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이른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야 새 집을 이루듯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남으로써 광야를 넘어서 약속한 곳에 들어갔듯이, 모세가 광야 저편 끝까지 나아갔듯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영문 바깥으로 나가서 십자가를 졌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려면, 저마다 자신의 교회에서 떠나, 그리스도가 지시하시는 멀찍이 떨어진 그 곳을 바라봐야 할 시점인 듯하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회 되려면, 교회를 떠나야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교회되도록,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씻기시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내어주심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결코 이래서는 자기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몸뚱이에서 흘러내리는 보혈로만이 거룩한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교회가 상당히 존재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외부가 알아차릴 만큼 성장하였을 시기에,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묶어서 세상에 내 놓았다. 저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집중된 나머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겠기에, 교회를 가르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오셔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의를 이룬다.’하였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임하시어 그 위에 거하시며,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다.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의 공생에 사역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구원사역이다. 죄에서 인류를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하나님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신 구속사역이다. 바빌론 음녀로 인해서 더럽혀진 나라를 제거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신도들의 중심에 등극하심으로서, 비로소 그가 구체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이 같은 나라를 건설함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법과 칙령이 있게 되고, 시민들은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노예 민에게서의 출애굽과, 저를 세우는 십계명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에게는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 의의 질서를 세워가려면, 그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의’에 관한 보편적 지식을 모두가 공감하도록 정의를 내리려면, 구약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떻게 역사적으로 일반화 하여 왔는가를 살펴보면, 명백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의’와 ‘하나님의 복음’은 갑작스레 상정된 것이 아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이후 바울에게 이르기 까지, 많은 선지자들과 시인들, 수많은 지혜 자들은 기나긴 세월의 통찰 속에서 자신들 만으로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지켜 갈 수 없음을 애통해하였다. 저들의 결말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가져왔고, 자신들의 지혜와 실천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질 못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더 크신 의로우심을 소망하고 기다려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얻어서 평안에 들어갈 것이고, 그 이름은 야훼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렘 23:5-6; 단 9:15-18)’ ‘하나님의 의’란 곧, 죽을 수밖에 달리 방안이 없는 저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 되심의 크신 은총이었다.우린 ‘의’에 관한 개념을 법정 개념에 한정시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입으면’ 죄 없음으로만 인식하고서는, 그 것만을 내세우며,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좁은 의미의 구원을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고귀한 희생이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을 한다거나, 책임을 지는데 까지는 나아가질 못하였다. 마태에서 ‘크리스천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선언 되었는데, 이는 ‘바리새인의 의’가 율법에 응답함을 말함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복음’에 응답함을 이른다. 우리는 저마다 예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질서를 파악조차도 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8-01-04
  • 성육신한 예수교회-66
    출애굽기 20장을 낭독하는 자나 듣는 이스라엘이라면, 이 열 마디의 말씀이 얼마나 무겁고 거룩하고 경건하며,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주는 말씀임을 확실하게 알 것이다. 지금의 이스라엘도 과거 출애굽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게, 이 열 마디 말씀에서,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함을 명명백백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의 헌법 첫째 문장이, ‘우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이다. 이 열 마디로 되어 진 문장은 이 땅의 어느 막강한 황제라도 흉내를 낼 수 없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칙령이다.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이스라엘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 첫마디 말씀을 동의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겨레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맹세 없이는 이스라엘 시민이 되질 못하기 때문에, 이 칙령과 같은 선포문의 중요성과 가치는, 인간의 가치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이 치리하시는 나라의 시민 십이란, 바로 이러한 바탕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출애굽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 열 마디 말씀을 지켜내질 못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빌론과 페르시아와 로마의 통치로 넘겨졌고, 이천오백 년을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AD70년, 로마군대에 의해서 성전과 함께 돌 위에 돌 하나 쌓이질 않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점령되자, 그즈음 이 광경을 목격한 증인들 중에 한 사람이, 온 지역에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야훼 하나님의 칙령과 복음을 선포한다. 바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붙드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시어, 모든 인류를 더럽혀진 죄악에서 정결하게 씻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저들을 아들의 우편으로 끌어 올리시기 위해, 야훼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등극하신다. 바로 이 복음서가 히브리서이다.이 복음서를 뒤이어 나온 요한의 묵시록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세밀하게 계시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써 죄인들을 속량하셔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하셔서, 산 자들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통치하시기 위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거머쥐셨다. 이 요한묵시록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석에 등극하시는데, 그가 바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놓아 보배로운 피를 흘려,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나사렛 예수이시다. 자신의 백성들을 죄악과 음부에서 구원하시어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려고, 늦도록 문을 여신 채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은 점점 더, 바빌론 음녀와 진한 진노의 잔을 마시며 취해가고,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명예를 탐내는 자들로 밤이 깊었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자신의 일곱 교회를 돌보시며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신다.우리가 신약을 읽는다면서, 황제의 칙령보다도 엄위하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복음’ 선포를 게으르게 직면한다면, 저는 사망과 음부를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묵시록에 흠뻑 젖어든다면,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을 우회할 수 없으리라. 더욱이 히브리서를 가까이 하는 이 역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붙드시기 위해 등극하신, 조물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를 모른다고 하질 못할 것이고, 마태복음을 직면한자 역시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질서를 세움에 있어서 결코 머뭇거리질 않을 것이리라.바울은 백주의 빛보다도 더 밝은 성령의 빛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 받았다. 저는 보좌 우편에 즉위하신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성별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사도로 부름 받아,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다. 바울은 이제껏 붙들고 있던 모든 가치관을 폐기처분하였음은, 그만큼 그가 알게 된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절대 주권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포한 이 ‘하나님의 복음’의 칙령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들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리라. 백주의 빛보다도 더 밝은 성령의 빛만이, 이 깊은 잠에 취한 그대를 깨울 수 있으련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22
  • 성육신한 예수교회-65
    인류의 문명을 앞당긴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자동차 문화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국가의 흥망성쇠도 이와 함께 하였다. 지난 한 세기동안에 우리의 자동차와 관련된 노사 관계나 사회적 시스템은 선순환 방식으로 학습되질 못하였고, 그 결과 우리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남아공과 같은 가장 밑바닥 수준이 된 것이다. 이러한 좀비현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서로 맞물려 있어서,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적 디폴트 현상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국가의 사회적 갈등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소진되어서 많은 비용을 탕진하다 보니, 이미 힘을 잃고 추락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뒤이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형편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교계도 이와 다르질 않다. 지난날 세월호가 전복될 당시, 그 배에는 아이들만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교리에서 빗나가긴 했어도, 기독교란 이름을 가진 단체가 운영하는 선박이었다. 뚜렷하게 들어나진 않았어도 교회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전복되자, 저들 중에 지휘 책임을 가진 자들은 아이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교계의 스피커들이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송사에 출연해서 ‘우리가 안했다’고 하는 사오정 이야기처럼, 이 회사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단체라고 꼬리를 자를 뿐이었다.히브리서를 읽노라면 당시 교회는 외형적인 오늘의 교회처럼 형성되진 못하였어도, 누가 보더라도 교회라 할 만큼의 공동체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지중해 주변의 이러한 교회들에게 전반적으로 위기가 들이 닥친 것이었다. 신도들이 다시금 유대교로 합류하려는 조짐이 있었고, 복음의 중심 가치가 흐려져서 슬그머니 기본적인 신앙생활에서 도덕적으로 이탈하는 자들도 눈에 보일만큼 증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재빠르게 인식한 한 지도자는 각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서신으로써 처방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들은, 맨 처음 복음을 전해주었던 분들은 거의 돌아갔고, 복음을 전해 받은 후대들이 교회를 책임 맡았을 즈음이었다(히 2:3). 이 서신의 저자는, 서신의 서두에서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송영을 올려드리고,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만물을 확실하게 붙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셨음을 선포하였다. 이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통치자로서 오른 손에 홀을 붙잡고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신가? 저는 친히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지상으로 내려와 마리아의 몸에서 적신으로 태어나, 몸소 인간의 고난을 모두 몸으로 체휼하심으로서 인류의 대표성을 가지시고,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아, 죽음으로서 세상의 죄 값을 모두 치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다. 이 서신의 가르침에서 가장 무겁게 다루는 죄악은 사람들이 침상을 더럽히는 것들이었다. 간음 같은 범죄는 늘 상 이방인의 종교 제전에서 행사의 하나로 있어온 것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좀 다른 면은, 당시 사회는 사회적 윤리가 오늘 같이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한 가정에 다수의 부인들이 있었고, 종교 행사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너나할 것 없이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도들이었지만, 주변의 문화에서 자유롭질 못하였다. 신도 개개인들이 누차 순결이 더럽혀지고, 공공연하게 죄악들이 들어나자, 부담을 덜 느끼는 종교로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몸단장을 갖추도록 도덕적인 표준을 제시하였지만, 저들은 이겨내질 못하고 부끄러움만 가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주는 지도력이 부재하다 보니, 죄책감이 조금은 덜하고 상대적으로 대충대충 무늬만 있는 신앙인들로 전락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서신의 지도자는 교회론적인 가치로 도전하기 보다는 그리스론적인 도전을 시도하였다. 오직 복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개개인이 저마다 그리스도를 대면하도록,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나갔다. 하늘의 지성소에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직접 들어가셔서, 우리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모두 씻어내시고, 천국시민권자로 끌어 올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만 바라보게 하였다. 더욱이 신도들에게, 인도하는 자들의 본을 받으라고 한 것을 보아서, 지도자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순결을 잃지 않았고, 신도들이 복음을 구체적으로 학습하며 적용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으로 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14
  • 성육신한 예수교회-64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도회가 11월에 21일간 개최되었다. 10,060교회 350,000의 신도들이 함께 공간을 뛰어넘어서 기도의 향연을 베푼 것이었다. 누구 하나 억지로 되기보다는 순수하게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이 기도회를 더 높게 타오르도록 하신 스피커들은 순도가 높은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참여하였지만 정치적인 냄새가 전혀 없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는 순수한 기도의 향연이 되었다. 으레 매스컴에는 교단을 정치하는 이들의 소식이 오르고, 교단이나 단체를 대표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빠짐없이 정치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의 손에는 부귀와 권력과 명예와, 그에 합당한 모자들을 쓰신 분들이다. 이러한 이들로 조직된 단체들에도 기도회라든지 부흥성회라든지, 회개운동 같은 것들이 거듭 있어왔으나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그런데 이번 기도회에서 마지막 간증하는 시간에 나오신 분들의 간증은 기도의 뚜렷한 열매들을 보여주는 표적이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복음서를 비롯하여 사도들의 행전에서 표적과 기사와 성령의 나타남을 항상 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처럼, 감동과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 도시에 바울 사도가 잠시 머물다가 떠난 적이 있었으나,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믿었고, 사도들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도들이 되었던 것이었다. 사도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권능과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살전 1:5-8).1907년의 부흥은 인위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 혹은 점심을 건너뛰면서, 혹은 저녁 시간에 저마다 삼삼오오 모이면서 먼저 회개가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되는 마음이었다. 원산을 비롯하여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온 땅에 거룩한 설렘과 무언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와 울렁임이 있었던 것이다. 국모가 시해되고 국가의 주권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허탈감과 상처와 고통 중에 있었던 이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신도들 가슴에 불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룩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다니엘 2017기도회’의 21일 간증을 듣고 또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삼천리강산에 성령께서 아직도 머무르고 계심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의 법궤를 원수에게 빼앗긴 소식을 듣자, 그 순간 엘리 사제의 목이 부러졌던, 그 암울한 시기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음이 천만다행임을 알 수 있다. 이날 한 목회자는 21일 동안 기도하는 도중에 심장에 이상 증세가 있어서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도 다니엘 기도회 스마트폰 영상을 보며 참여하는 중, 한 강사가 치유를 선포하자 즉시 완쾌된 것이었다. 또 한 사례 자는,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인데, 임신을 하여 함께 단상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한 개척교회 목회자는 기도회 기간 동안에 세 들어있던 예배당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번 하였는데, 법적 등기를 마치고 하나님께 나아와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힘든 분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저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질 않으신 것이다. 모두가 치료되어서 회복되었고, 구원을 경험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지는 그 비었던 자리에 든든하게 서는 것이었다.우리는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한 가정의 불임이 치료되어서 출산 날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고,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사선에 섰다가, 건강한 주의 종으로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보았고, 풍전등화처럼 쇠약해진 교회가 단단한 반석위에 우뚝 선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한국교회에 표적으로 나타나신 주님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다니엘의 기도는 예사로운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오나라의 배도 같은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수많은 정부와 권력과 계파가 흔들고 털어도 먼지하나 안날 정도로 온전한 신앙인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다니엘을 밟아보았지만 그는 항시 살아서 새롭게 들어선 정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일군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계략의 덫이 있어도, 초지일관 예루살렘으로 향한 높은 성루의 열린 창에서, 큰소리로 또박또박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신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기도자의 21일이란 그 기도가 응답되는 하나님의 시간이기에......,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07
  • 성육신한 예수교회-63
    세상이 총체적으로 어두워져서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하지 못할 때에는 75, 80세의 노인에게서 다시 시작되거나, 출생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을 거쳐 하란마저 떠나서 가나안 땅에 기거하던 이야기나,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하는 이야기는 노인들에게서 시작 된다. 그것도 어쩌다가 잠시 동안만 등장하는 조연 역할이 아니라, 주연으로 등장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의 땅에 나타남에 있어서, 노인이 주역을 맡아야 했음은 왜일까? 노인의 등장은 불가불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저 멀리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메시아를 내다보면서, 그렇게 기뻐하며(요 8:56), 오직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홀로 믿음으로서 걸어갔다. 모세는 팔십 노인으로 자기 것도 아닌,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이다가, 야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는데,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가 노예 민들을 억압과 고통의 이집트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세워갈 수 있었던 근저에는, 겸손이라는 인격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겸손이란 출생으로 얻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닦여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겸허함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사십년간의 광야를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리라. 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아 백성들의 진영에 내려왔을 때는, 그 땅은 이미 범죄와 타락으로 인한 광란의 제전이었다. 야훼 하나님은 결코 이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다. 야훼께서는 저들에게 진격하여 하나도 남김이 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진노의 파도를 잠잠히 가라앉힘도 모세의 간절한 기도였다. 어디 이 뿐이랴, 자신을 절대 신뢰하는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미련 없이 느보산에서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넘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다윗에게 칠십이 다가오자 그를 짓누르는 피할 수 없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나......, 충신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가 솔로몬에 집착하여있고, 나단 선지마저 궁중을 떠나질 않고, 후대가 솔로몬이어야 함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윗은 옛적 사울의 전장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골리앗의 환영을 보았다. 아주 어린 나이의 한 소년이 대담하게 물맷돌을 다섯 개 챙기고서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서더니, 만군의 살아계신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달려가 물매를 날려 골리앗의 이마에 박았다. 골리앗의 머리를 칼끝에 세워 백성들에게 보인 것이었다. 이 환영을 다시 본 다윗은 더 이상 염려하질 않고 솔로몬을 왕위에 앉혔다.이스라엘의 신화와 같은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질 않고 솔로몬에게서 새롭게 꽃을 피운다. 솔로몬은 왕위에 앉았으나 그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었다. 알렉산더가 델피 신전의 사제에게 신의 신탁을 받으려 하였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야기만 들었다. 그래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다시금 기자로 향하여 거기 사제로부터 신탁을 받았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함을 입은 자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왕권이 유지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였다. 솔로몬도 혼란스러운 정세에서 모든 것을 잠재울 신탁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솔로몬의 즉위식이 마쳐지자, 저는 기브온 산당에 올라 수많은 제사를 야훼 하나님께 드리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시간이 가득히 채워졌는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입히신 것이었다. 세계의 모든 군왕들이 흠모하는 은사를 위로부터 입게 된 것이었다.정계의 기라성 같은 자들이 어린 솔로몬을 하루도 가만 두질 아니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를 서로가 자기 아이라며 싸우는 두 여인을 데려 와서는, 왕의 법정에 세운 것이었다. 솔로몬은 머뭇거리질 않고서 그 아이를 절반 갈라서 공평하게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온 궁정이 물 끼얹은 듯 긴장이 고조되더니, 조금 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어린 것이 별 도리가 있을라고......, 그 참에 다시금 울부짖는 고성이 나더니, 한 여인이 소리쳐 말하기를, ‘지금 자세히 보니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요,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임금의 공평하신 판결에 찬사를 보내며 이르기를, 아이를 그냥 주질 말고 공평하게 갈라서 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6초가 지난 듯 모든 문무백관들도 알아차렸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저 여인이니라. 어서 이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렸다.’ 이날 그 아이만 어머니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만백성이 진정한 어버이를 선물로 얻은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1-24
  • 성육신한 예수교회-62
    한 지역의 목회자들이 격주로 모여서 온 종일 성경말씀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새벽기도회 시간에 맞추어 흩어지던 시기에, 안성지역의 목회자가 집에서 키우는 닭 몇 마리를 잡아 가져와서 저녁 만찬을 차려 놓았다. 그가 닭들 가운데서 어느 닭을 잡을까 하며 생각하다가, 그래도 목회자들에게 대접하는 것이니,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튼실한 녀석들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놈들이 선별 되었다. 그중에 한 녀석은 수탉이었는데, 세 마리 중에서 벼슬이 가장 아름답고 위품 당당하여 모든 암컷들을 거느리고 돌보는 닭이었다. 보름 후 기도회에 다시 모였는데, 그 목회자가 자신의 닭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었다. 단지 15일이 지났는데, 남은 두 마리 수탉 중에서 한 마리가 유난히 벼슬이 다시 갖추어져 왕관이 씌워지고 황금색 깃털로 의전을 갖추더니, 전혀 이전의 수탉 같지 않게, 더욱 당당하고 품위 있는 몸가짐을 하고서는 새벽마다 아침이 오는 것을 고하는데, 온 마을에 닭 우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것이었다. 이전에 위세가 눌려 있을 때에는 벼슬도 모두 뜯겨 나가서 볼품이 하나도 없던 그였는데,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 이 목회자의 가슴은 새로운 기운이 입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닭을 사육하면서 닭장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어떤 때에는 기이하기도 하다. 수탉이 거느릴 수 있는 닭들은 오십 마리가 한계인 것 같다. 그 이상을 넘으면 전혀 질서가 잡혀져 있지 못하다. 오십 마리씩 수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마련해서 그 닭장 안에 수탉 서너 마리와 암탉들을 넣어두고 시간이 얼마 경과되면, 그 닭장 안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늑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닭장 안에 저녁이 되면, 열 마리씩 잠을 잘 수 있게 높이가 다르도록 여러 줄을 가지런히 세워두면 서열대로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자리를 잡는데, 그 군락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이 장 닭은 세 번째 가운데 줄에 자리를 잡고, 밤이 맞도록 그의 가족들을 살핀다.아침에 닭장으로 들어가 사료를 주면, 그 장 닭은 책임감을 느끼는지, 모든 닭들이 안전하게 먹이를 먹을 수 있게 주변을 경계하며 살핀다. 닭들의 식사가 모두 끝나 가면 그제 서야 식사를 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 장 닭에게서 오는 기운이 어찌나 마음 든든해 보이든지......, 혹 가다가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옥수수 등을 던져 넣어주면, 낯이 설은 것이라서 그런지 수탉이 그것을 살펴보고,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를 살핀 이후에야 모두가 달려들어서 먹는데, 이 새로운 음식도 가장 나중에 가서야 남은 찌꺼기를 먹는 것이었다.암탉들이 일 년 동안 달걀을 내어 놓는데, 일 년이 찰 즈음에는 생산 능력이 떨어져서, 경제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즈음에 이르면, 닭을 키우는 주인은 아침마다 닭장에 사료를 갖고 들어가서 ‘앞으로 7일 뒤부터는 금식을 한다.’고 닭들에게 고한다. 매일 금식 날짜를 짚어서 마지막 날이 지나고 나면, 금식 당일부터는 사료 통을 들고 들어가더라도 잠을 자는 자리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주인에게 몰려들지도 않는다. 물만을 공급해주고, 열흘 정도 금식 기간이 끝나면,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서 공급하는데, 그 시기부터는 빠져나간 깃털들이 다시 나고, 얼마가지 않아서 맨 처음처럼 달걀 생산 능력을 회복한다.닭들을 키우면서 사람이 배움을 얻는 것은 이 뿐 아니다. 암탉이 어느 정도의 달걀을 낳으면 알을 품기 시작 하는데, 꼬박 21일간을 품는다. 병아리가 태어나기 까지 그 스무하루동안을 온 힘을 쏟아 온기가 골고루 가도록 알들을 굴린다. 병아리가 태어나고 나면 그 어미 닭의 몸은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겉모습이 깃털로 덥혀 있어서, 주인이 알아채질 못하다가, 태어난 병아리들을 보고, 너무나 대견해서 어미 닭을 안아주려고 붙잡는 순간, 그 주인은 깜짝 놀라는데, 어미닭의 몸이 아주 가벼워 진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교계에서는 처처마다 기도하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린다. 삼천리 방방 곳곳에 자리 잡은 일만 교회, 35만의 성도가 ‘다니엘 21일 기도회’를 갖고 있다. 나라를 위해, 교계를 위해, 교역자들을 위해, 통일과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등장하는 강사들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다. 어쩌면 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이 땅에서 목회자로서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것인지를 기도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아는 것 같다. 스무하루가 지나면 황금빛으로 새로 난 깃털, 위품 당당한 벼슬, 우렁찬 새벽 울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리라. 성도들 모두가 야훼하나님의 군대로 재무장됨을 보게 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1-16
  • 성육신한 예수교회-60
    에스겔서에서, 그에게 지속적으로 보이는 환상들은, 죽은 시체더미가 쌓였던 해골 골짜기에서 해골들이 일어나 정예한 군대로 조직되고, 짓밟혀지고 더럽혀진 고토가 탈환되고, 그 도시 중앙에 제단이 다시 수축되어 거룩하게 된 후, 시민들과 국가가 재건되는 일들이다. 이러한 꿈을 간직한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가 꾸던 꿈을 현실적으로 오늘의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하였다. 이들은 600만이라는 동포들이 희생되는 처참한 역사적 경험을 감내한 터인지는 몰라도, 이들이 앞으로도 세워 나갈 도시나 국가란, 오늘의 인류가 기대하여 온, 가장 이상적인 스마트한 국가로 건설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든다.신약을 신중하게 검토해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좀 더 높은 버전들을 내어놓은 느낌이 든다. 교회라는 것이 거룩함을 전제한 제도이긴 하지만, 그 제도도 역시 사람들로 이뤄진 시스템이라서, 제도권으로부터 가장 고귀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사제들이라 할지라도 타락을 하게 되면, 야훼 하나님이 그 곳에서 떠나시기 마련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교회란 죽은 생선 같아서 사람의 더러운 것과 악취만 남기 마련이다. 그렇게 유대 종교는 변질되었고, 교회만 붕괴된 것이 아니라, 국가마저 파괴되어 국민 모두가 주변국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포로가 된 이 백성들은 전과는 전혀 다른 꿈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던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높은 곳에 우뚝 선 시온 성전 문지방에서 샘물이 솟아나, 그 산 아래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전인가? 요한계시록에는 더 아름다운 아주 완벽한 환상이 열린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강물들은 광야 같은 척박한 땅을 살려내서 열두 과일을 맺는 과수들이 경작되고, 어부가 그물을 치는 곳이 되며, 온갖 짐승들이 거하는 에덴동산이 된다. 그런데 아뿔싸, 그 아름다운 꿈이 저세상에서나 이뤄지는 꿈이 된 셈이다. 현실이 너무나 버거워서 묵시록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죽어서나 가는 교회로 바뀐 것일까? 우리 한국교회 어른들은 천당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한정하였다. 죽어서나마 요단강을 건너가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나온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이렇다 보니, 천당은 죽은 자의 것이 되었고, 지금 여기에 사시는 분들은, 천당을 현실적으로 구경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교회에서 가끔 예배 때에만 들을 수는 있어도, 천당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만 것이리라.요즈음 죽어서 가는 천국을 미리 보고 온 사람들의 유투브에 올린 동영상을 듣노라면, 아예 천국이란 저 세상에나 있지, 전혀 이곳에는 없는 것처럼 인식되어진다. 요한계시록이 밧모 섬에서 기록되어 세상에 퍼져 나간 지 십년이 흐르자, 새로운 복음서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는데, 바로 그 경전이 요한의 복음서이다. 이 요한의 복음에는 교회가 건물에서 개인으로 변환된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이신 거룩하신 영이 사람에게 임하신다. 사람의 인격에 임재하시고, 사람과 소통을 하시며, 그 사람 안에 계시며, 또한 그 사람도 예수의 영 안에 거한다. 그가 누구이든지(배웠던지 못 배웠던지,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혹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신 유일하신 독생자(獨種子)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그도 그의 배(人格)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흐른다. 요한은 이에 대한 주석을 붙이기를, 각 사람이 받을 성령이라 하였다.요한의 복음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은사와 직임을 받는다. 그가 예수로부터 받은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 생명이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얻는 생명이며, 이 땅에서 만이 사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마땅히 교회에서 샘물이 흘러 나와서 온 땅을 적셔내고, 그 물이 강물이 되어 사해를 살려내고, 어부들이 그물 치는 곳이 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꿈이 지속적으로 좌절되어온 것이다. 에스겔 이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교회도 역시, 헤롯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정치권의 마수를 벗어나진 못하였다. 그 성전도 파멸된 이후, 이천년이 흐른 뒤에, 마침내 유대인 개개인들이 교회로 건설되었다. 그들은 개개인과 가족들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시간의 지성소와 말씀 앞에 선다. 유대교 버전 3.0, 이제야 아주 스마트한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집을 나간 둘째가 돌아온 듯하다. 이들에게 마무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이 임하시면, 신부 같은 교회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0-26
  • 성육신한 예수교회-59
    증기기선이 발명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서 미 대륙으로 이동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서 인간이 그가 속해있던 집단이나 사회제도에 얽매여 있던 신분에서 벗어나서, 그 스스로가 수고하고 노력한대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 것이었다. 개인의 소중함이 기지개를 피기 시작하였고,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었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들을 갖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된 이동이, 개인의 자유를 얻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이렇게 지난날 산업물자를 이동시키고, 사람을 이동시키던 대형 기선들이 인간의 문명을 새롭게 일으키게 되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오천 명이나 팔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루즈 선을 타고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문화를 탐방하고 즐기는 여행객들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여행객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한 주간 혹은 두 주간 여행을 즐기려면 뱃멀미를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이 문제가 사업자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맨 처음 발명된 기술은, 배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자이로(gyro) 장치이다. 이러한 장치는 오늘에 와서는 항공기에도 응용되고 있고, 지진 설계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이로 장치를 배 아랫부분 양 쪽에 설치하는 데에 드는 시설비용이나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력에 부담이 되었다. 거대한 기선의 무게에도 부담이 되었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신기술이 생긴 것이다. 배 아래쪽에 비행선과 같은 양 날개를 달았더니, 대형 선박이 파도와 진동을 이겨내는 데에 효율적이었다. 이로 인해서 선박 운영자나 이용객들은 경제적이고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에게는,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커다란 위험이 항상 기다리고 있고, 다양하고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힘쓰고, 끊임이 없는 연구와 새로운 기술들을 익힘으로서, 자신들의 고객인 여행객들에게는 편안함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서는 즐거움과 행복을 서비스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험악한 환경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란, 무엇보다도 항시 사회적 안전을 가져오게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기술과 장치일 것이다.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주 작은 위험에서 조차도 세월호처럼 전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지난 세월호의 전복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이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사회적 구성원의 도덕 지수와 감정 지수도 지능 지수만큼 높아져 있어야만, 보다 안전한 항해가 이뤄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항시 불안의 상태가 가중되게 되면 기존 질서는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질서가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이에게 사회적으로 권위를 보다 많이 부여 받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법조계이다. 이 집단에 부여된 권위만큼 더 큰 권위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부여된 권위만큼 법조계 집단의 통합적 지성도 탁월하다면, 시민들에게 전반적으로 신뢰와 안전을 구축하는 커다란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울을 잡고 있는 집단이 도덕성이나 감정지수가 시민들 보다 낮다면 그 사회의 질서는 세월호 만큼이나 신속하게 전복되어질 것이리라.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는 넓은 길로 가질 말고, 좁은 길로 가라’하신다. 이는 우리게 항상 새로운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리라. 어느 위인이 잠시 세속을 떠나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가 지금까지 길들여진 잣대로 생각되던 고정 관념이 무참하게 붕괴된 것이었다. 천국에 있어야 할 분들이 지옥에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는데, 그는 남이 보질 못하는 새로운 저울과 지식을 갖게 된 것이었다.왜 아브라함은, ‘네가 사는 곳, 아비와 친척과 논밭을 버리고, 그 도시에서 떠나, 야훼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을까?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고 멀리 나가게 되었는데, 이를 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고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하시는 말씀은 곧,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라는 뜻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어서 한쪽으로만 공이 구르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는 교육환경과 제도, 원수 갚는 일에만 집착된 세속에 익숙 되어 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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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3
  • 성육신한 예수교회-58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우선시 하였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이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정착시키고, 새로운 질서로써 시민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동력인 기도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가져 오려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운동력을 살펴보면 ‘우리 승리 하리’라는 짧은 노랫말과, 단순한 리듬과 곡조로 운동력을 극대화 시킨다. 다니엘은 세이레를 기도하면서, 기도의 능력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데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어짐을 잘 이해한 것 같다. 다니엘은 자신의 기도 행위에 딴죽을 건 정적들에게, 보란 듯이 구체적으로 창문을 열고 기도함으로써 일인 시위를 시작하였다.다니엘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 이야기 문장에 나타난 대로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온 세상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고 있을 때에,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온성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예전과 같이, 흐트러짐이 없이, 천천히, 큰소리로, 또박또박,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오늘의 어느 종교단체에서 확성기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큰 소리로, 모든 시민이 인지되도록 ‘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를 기도하였다. 정적들은 다니엘의 성격이나 의중을 잘 파악하였기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체포하였다. 다니엘의 기도운동은 힘이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칭할 때에는 ‘힘이 있으신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기 시민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리라.오늘 어느 교회들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알아차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린 계시의 말씀 인 듯, ‘세이레 다니엘 기도운동’을 일으키는데, 참가 교회들이 일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어느 교회에서는 ‘통일 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그 때마다 거두어들인 통일 기금이 상당하게 비축되고 있음을 물론이고, 함께 호흡을 맞추는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무슨 운동력이 기지개를 편 듯하다. 이 뿐만은 아닌 것 같아서 이야기를 숨길 수 없는 것이, 한 지상에서는, 목회자들이 40일 금식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한 그룹은 이미 그 기도 기간을 마쳤는데,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주중에 하루 이상의 금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도 운동은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가중되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밀려오는 기쁨을 이겨낼 수 없다. 한주에 3일을 금식하고, 4일은 약간의 식사를 하면서, 14주간을 기도 한다니, 무려 100일간 지속되는 기도이기에 동력이 크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믿음이 든다.이참에,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면, 최소한 몇 개의 기둥으로 세워야 하나를 논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람이 적어도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적어도 세 사람이 같은 마음과 생각을 일관성 있게 개진할 때에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이다. 우리 교계가 무너지고 더럽혀진 제단을 다시 쌓고,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텐트를 치려면, 최소한 몇 개의 기둥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와 그의’로 새로운 질서를 온 세상에 세워갈 때에, 최초로 사도들은 세 개의 간략한 기둥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먼저 그들의 입으로, 그들이 본 바요 들은 바요 아는 바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전하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될 것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전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처음 보게 된 이들은, 그들의 입으로 선포되는 복음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들이 있었는데, 복음을 선포하는 이마다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확연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소위 하나님나라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사도들이 세 번째로 갖춘 기둥은 ‘성령의 선물들’이었다.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 바울도 그렇지만 베드로도 그랬다. 그들은 기라성 같은 인물이 되어 있었으나, 온갖 악취에도 아랑곳 하질 아니하고, 변방의 무두장이 집에서 거처하면서 전하는가 하면, 항시 그들의 복음 선포에는 ‘성령의 나타남’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사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기본으로 갖춰진 기둥들이, 내게도 갖춰져 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고, 만일 놓친 것들이 있다면 돌이켜 재무장해야 할 것이요, 이 세 기둥이 생소한 것들이라면, 아버지 집으로 돌이킨 탕자처럼 새로운 사귐을 시작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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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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