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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57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문을 보면, 발신자가 바울과 그의 동역 자인 실루아노와 디모데이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이 후에도 문제들이 발생하면 즉시 달려가서 ‘하나님의 복음’으로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이 세분의 열정과 마음의 소중한 것들이 이 서신들에 잘 배어있다. 우리 교역자들이 다시금 시간을 내어서 이 서신들과 함께, 바울의 서신들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왠지 오늘날 우리 교회의 해결점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데살로니가에서 이 세분이 복음을 전하면서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사역의 요소들 중에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이 세분 중에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이 교회는 손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잘 훈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세분이 복음을 전할 때에, 기본에 있어서 의심을 야기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청중들이 저들의 복음을 들을 때마다 아주 커다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담아 이뤄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복음’이 되었기 때문이다.셋째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악을 대신하여 충분한 값을 치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나타난 것이었다. 저들은 단순하게 립싱크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내재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위되는 시간과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저들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성령께서 저들의 입에서도 나타나고 손에서도 나타났으며, 특히 저들의 본보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넷째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주장들을 알뜰히 내려놓았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하루하루 먹고 입고 잠자는 적은 비용들 까지도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부담하였다. 이 복음 전도자들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와 그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오직 영혼 구원’에만 두었다. 한 두 사람만 본을 보인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항시 바울에게서 거론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본을 보임 같이 그들도 역시 꼭 같은 본을 보였던 것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모두 그리스도께 담보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나는 문제들은 소소한 것 까지도 발견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오늘과 같이 색을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색에 빠져있던 이들도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은, 복음 전도자가 권세가 있었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르는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 안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울 이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복음전도자들의 그림자나 옷자락만 덥혀도 병인들이 회복되는, 권세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다는 보고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사로이 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는 온 힘과 서비스가 동원된 것이었다. 그가 로마로 보내는 편지도 역시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도 달려가서 거룩한 성과를 얻으려했던 것이다. 바울은 적어도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였듯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망토가 입혀지고,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안수가 있었듯이, 로마교회에도 역시 성령의 은사를(Impartation of the Holy Spirit) 나누어 주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었다.‘하나님의 복음’에는 그가 지식인이든 무식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을 하지 않고, 출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예수를 믿으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담지 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라는 허물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 짓자’고 하는 무리나, ‘율법을 폐기하는 자’라는 오해와 반대를 해소하고, ‘하나님나라와 그 의’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하는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이 폐기처분 되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9-21
  • 성육신한 예수교회-56
    출애굽기에서 야훼하나님의 ‘열 마디 말씀(십계명)’을 살펴보자. 맨 처음 말씀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나는 야훼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내었다),’이다. 우리말과 히브리말과의 어순차이가 다르다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이 열 마디의 말씀의 권위와 무게를 어디에 어떻게 두고 있음을 분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어법과 어순은 항시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나, 그의 사도들이 자신을 드러낼 때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 열 마디 말씀은,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하신 이름과 권능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음에 역사적 기반을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다.여느 나라의 헌법을 보면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된 국가들이 있으나, 유독 이스라엘 국가의 헌법 제1조는 야훼하나님에게 근거한다. 이스라엘의 헌법이 ‘종 되었던 이집트인의 땅에서, 야훼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된 백성임’에 근거한 것을 보아, 저들의 정체성이 오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선포되었고, 야훼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적인 개입에 의해서 구원을 입어 형성된 백성에게 명령하신 말씀이다. 세계에 흩어져 유랑객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이천 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건국된 것도 야훼하나님의 은총으로 형성되었음을 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게 결속된 국민을 찾는다면 바로 이들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평생토록 세계 각지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로마서에서도, 이 모세오경의 말씀의 형식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에 이르는 문장 형식을 보면 세 가지 포고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만주의 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만왕의 왕으로서 왕관을 쓰신, 이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권자요 온 백성의 통치자이심을 알리는 포고문이다. 두 번째 포고는, 바로 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 이 ‘하나님의 복음’을 만 천하에 알림과, ‘믿어 순종케 하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실천하기 위해 특별히 세움을 받은 전권대사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 번째 선포는, 바울이 선포하는 이 ‘하나님의 복음’을 누구든지 믿으면,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야만이든지 차별되지 않고 구원을 입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나라의 시민 됨을 선포한 것이다.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따로 세움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로마를 수차 방문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질 못하자, 서신으로써 그의 로마 방문 목적을 알린다. 그의 사역과 신학이 총 정리된 로마 서신에는, 그가 평생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이 명료하게 조목조목 기록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나무에 달림으로써 희생된 나사렛 예수의 피 값이, 저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죄를 없이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그를 구주와 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롭게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헌신하고 거룩하게 응답해야 함을 구체적으로 명하였다.모세 오경이 독립된 다섯 권이 아닌, 한권의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드렸듯이, 이 말씀 안에는 창조와 타락과 회개와 구원과 윤리와 심판이 모두 녹아들어있다. 오경을 받아들이고,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이스라엘 시민이 된 개개인은 저마다 이 열 마디의 말씀을 모두 수용하는 시민이다. 이 열 마디 말씀이 오경 전체에 365개 소극적인 말씀과, 248개의 적극적인 말씀, 도합 613가지 말씀으로 세부화 되었으나, 이 모든 말씀들을 잘 숙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야훼하나님의 구원과 명령의 말씀들을 수용하질 않는다면 팔레스타인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저들에게서 모세오경이 요구하는, 시민권자들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점을 찾아내려 한다 해도 쉽지 않은 것은 이 이유에서일 것이다.구원론에 의해서만 형성된 집단들에게서 나타나는 부실함이란 사회적 책임감의 허술함에 있다. 구원 받았음에만 만족을 하고, 구원으로 인해서 새롭게 형성된 그리스도의 주권과 심판,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책임과, 성령의 훈련에 대해서는 눈과 귀와 몸이 게을렀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인간처럼 된 상태에서 한국교회가 속히 벗어나려면 새로운 신학적 각성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그 신분에 합당한 의무를 강력하게 명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9-11
  • 성육신한 예수교회-55
    성경에 ‘거룩’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안식일’과 관련해서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가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백성들에게 거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곳이 지상에 위치를 두게 되었는데,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텐트를 치신 성막이었다. 이 세 가지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유대 교부들의 윤리인 Pirkei Avote를 보면 세상을 떠 바치는 세 개의 기둥을 다룬다. 이 중에 한 개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고, 남은 하나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선한 행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떠 바치는 세 가지의 기둥 중에 한 개라도 부재하면, 저들 이스라엘은 존속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중의 한 개가 제 2성전이 건축된 이후 다시 무너진 것이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붕괴된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워지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려면 거룩하여져야 하는데,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인 성전에서의 예배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성전의 역할이란, 하나님께 백성들이 나아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다시금 야훼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계약을 갱신하며, 그의 부르심과 의무에 충성을 다짐하며, 야훼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새롭게 짐을 지고,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과 기능인 제사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 야브네에서의 랍비 공동체는 바빌론 포수기와 같은 대처를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용어를 ‘말씀’앞에 나아간다는 용어로, 성전 제사를 모두 ‘기도’로 대치하였다.‘성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장소에 국한되던 성소 개념을 ‘시간의 지성소’인 ‘안식일’로 대치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말씀’과 ‘기도’와 ‘선한 행실’로 전환하였다. 이는 거룩한 처소 역할이 장소에서 시간으로 넘어가게 되고, 예배가 의로운 선한 행실로 넘어감으로써, 장소에 관한 경비와 관리 유지부담이 절약되었고, 신앙생활이 더욱 내실을 다지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다짐한 랍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비량으로 말씀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다.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도시에서는 회당들이 건축되어서 이를 더욱 뒷받침을 하였다. 이렇게 전환된 신앙인들의 경건생활은, 안식일이 성전에 다가가는 거룩한 시간이 되었고, 말씀 앞에서 야훼하나님을 직면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거룩한 예배가 된 것이다.예루살렘이 붕괴되던 1세기 유럽에서도, ‘정의’개념보다는 ‘선’의 가치를 보다 위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는 사회적 가치관에서 ‘정의’가 ‘선’보다는 한계점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가 ‘공법을 하수 같이’ 흘려보내다 보면, 피비린내가 땅을 덮게 되고, 더럽혀진 땅은 항시 희생된 자의 고통소리로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질문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에 대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기 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내가 곧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야훼하나님은 ‘항상 인자를 원하시고 긍휼을 들어내시는 분’이셨다. 저들은 야훼하나님을 곧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였다.하루는 모세가 극도의 혼란과 낙심 중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기를 요청한다. 결국 모세는 야훼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그 때에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긍휼하심이 끝이 없으심’을 인지하게 된다. 요한복음에 와서도 그와 그의 공동체가 목도한 하나님아들의 모습은 ‘은혜’ 그 실체였다. 십자가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란, 바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찾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시고 긍휼하신 본질’의 나타냄이시다. 신랑이 한 여인과 정혼을 하게 되면, 그 여인은 오직 그 신랑에게만 헌신된 거룩한 신부이다. 유대인들은 이 ‘거룩하다’는 말을 오직 정혼된 여인을 칭하는 용어로만 사용하였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라 함은 이와 같은 선에 있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거룩하심’은 저를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심’에 있다. 우리가 보아온대로, 궁전 같은 성전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통치자가 죄수가 되고, 장군들이 이등병이 되는 것이 세속의 역사라면, 우리가 다시 써 내려 가야할 거룩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8-24
  • 성육신한 예수교회-53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명령을 내린 것에 관하여, 구약의 서기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고레스’라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대관식을 갖는 통치자에게 항상 붙여온 칭호였다. 이 칭호에 관련해서 오늘의 21세기 통치자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특별히 불릴 만한 이름이 있다면, 이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 일 것이다. 그녀는 백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여 독일의 인구 감소를 해소하고,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과, 차세대의 든든한 기반이 된 어린국민들을 갖출 수 있게 하였고, 인류 역사상 100만이나 되는 난민을 자국의 시민으로 모두 수용한 정부와 국가가 지금까지 없었으니, 참으로 온 세계에 귀감이 되는 인류애의 공덕을 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평생 선포해야할 직무를 지닌 자라면, 모든 인민을 구원으로 초대하고, 저를 믿는 자에게 천국시민권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왕국의 통치자로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의 선언문인, 로마서 서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단순하게 사람의 구원을 다루려고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가치를 개혁자들의 가치관과,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시대적인 토픽 관심사에 머물다가 보니,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복음’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퇴색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제도적인 교회를 굳히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하고, 교회론적인 성경 해석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들을 교회를 위해 사장시켜 왔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새로운 교회들도 역시, 한 편으로 치우친 교회론적인 성경해석에 중심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난당한 자가 그 지경에서 잠시 벗어났다고 해서, 더 크게 둘러싼 세속적인 미로에서 쉽게 빠져 나온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듯이,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왜곡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질 못하였다.바울이 선언한 ‘하나님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이 복음은 ‘바울의 복음’이 되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복음’의 미션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 아버지 보좌 우편에 등극하시었다. 이를 칭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였고, 혹은 ‘십자가의 복음’이라 하였으나, 거의가 구원론에 편중되었을 뿐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임을 받은 이후,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평생 자신이 전해야하고 믿고 실천하는 ‘바울의 복음’이 된 것이다. 바울은 평생 죽음을 맞이하기 까지는 이 책무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모세 오경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유대 서기관들은 모세 오경을 모두 한권으로 인식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려면 출애굽기 하나만으로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로만 인식하는 데에 그친다면, 아마도 2차 대전에서 빚어진 600만 홀로고스트 현장에서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 최근에 우리 한국교회는 세월호가 바다에서 전복되자, 그 선박을 운영하는 단체와 꼬리 자르는 일에만 급급했다. 한국교회는 한 이단 종파의 구원론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결과가 오늘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전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미 맛을 잃은 소금 같이 되어서, 세인들에게 짓밟힌 지 오래다. 육백만이 희생된 유대인들마저도 우릴 꾸짖을 명백한 신학적 오류들을 잘 알고 있고, 세인들마저도 공개적으로 우리 꾸짖는데, 우리만 우리의 잘못을 아직도 바로잡질 못하고 있다.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신 예수의 피로써, 죄 값을 지불하고 산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책무를 맡기고,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주어 참여케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는 광명의 빛’을 그의 마음에 비추임 받은 이후부터는, 하루도 그를 부르신 주님에게서 빚진 자로서의 책무를 잊은 적이 없다. 바울이 이방인을 구원하여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었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이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초대된 자들에게, ‘당신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부름은 무엇입니까?’의 질문에 대답하고, 순종하는 시민이 되도록 더욱 훈련에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7-27
  • 성육신한 예수교회-52
    바울이 돌아가기 직전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디모데후서를 보면(딤후 3:9-18), 그가 떠나가기에 전 까지 함께한 자는 ‘의사인 누가’였다. 이 사람은 바울을 끝까지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주제로 기록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켜본 바울 사도는, 신학자들의 견해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수난의 메시아’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난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한 나머지 비롯된 주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복음서들은 복음을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선포하였고, 사도들은 복음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주장은, 바로 최근까지 알려진 견해이다.그런데 신약신학자들은 이차대전 이후부터, 오늘의 한국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지만 열매가 약하다는 것이 공통적인 평가이다. 복음에 대한 이해를 마치 한 이단종파의 구원론 같은 정도로만 인지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긴 하지만, 열매가 없는 이런 이유에 관하여 그 근원을 신학적인 통찰에서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해서, 지난 한세대의 신학적인 논쟁 결과로써,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면, 저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칭함 받고,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옮겨진 천국시민권자가 되기 때문에, 저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과 소명에 따른 책임을 갖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시민이 된 것이다.‘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구교인 가톨릭에서만 왜곡되었던 것이 아니고, 종교개혁 가운데에 있는 개혁교회들에게서 있어온 것이다. 가톨릭이 ‘좌향좌’ 이었다면, 개혁교회는 ‘반 우향우’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으리라. 바울은 로마서 서론에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 하였으나, 개혁 학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치중하다 보니 ‘성령에 의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능력 있는 아들로 선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홀히 하여 왔던 것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자기 백성들을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써 값을 치르시고,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여, 하나님나라의 통치 아래로 옮겨 놓으신 사건임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다.복음서 중에서도 절반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초점을 둔 요한복음서 마저도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였다. 우리는 복음서가 먼저 쓰인 이후에, 바울 서신이 쓰인 것으로 착가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이지만, 기록의 역사에서는 바울서신이 제일 먼저 선포된 복음이다. 누가가 증거하는 사도들의 행적들에서 바울은 얼마나 역동적으로 사역을 하였는지, 후진들인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다. 이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알던 지식과 경험을 모두 오물같이 여기고 폐기 처분 하였다. 이는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이 스펙으로 여기는 학력과는 정 반대이다. 저는 오로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앞세웠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에 죽은 자가 일어났고, 병인들이 치유되었고, 심지어는 사도들의 그림자가 자신들에게 스쳐가기를 바랬고,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뒤를 밟아 순교됨으로서 음부의 권세가 교회에 굴복되었다.하나님나라가 서려면 주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시위된다. 군대가 징집되고 지휘관들이 임명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로부터 지휘관들이 먼저 권한과 능력을 받는다. 이는 오늘의 사관학교 졸업과 함께 지휘관 임명 절차에 잘 나타나 있다. 기름부음에 있어서만큼은, 모세와 아론의 대관식에 짝퉁 불이 등장할 수 없었던 바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대관식에도 짝퉁 기름부음이 불가하였다. 친히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시는 그리스도께 기름 부어진 것이다. 사도들도 그러했고,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부어졌다. ‘하나님나라’에 있어서 오늘의 개혁교회가 슬며시 포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희가 성령으로 권능을 받고, 나의 증인이 되리라’일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7-14
  • 성육신한 예수교회-5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전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이 진정 복음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는 있는 것일까? 만일 이러한 갈증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복음서에서는 먼저 희년의 축복을 들고 나갔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그들이 지은 죄와 채무를 탕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이 피폐해진 상태에 있던 분들이다. 38년간 거동을 하질 못하고 누워서 사는가 하면, 나병에 묶인 나머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고통을 짊어진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장애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었는데, 시각 장애자와 언어 장애자, 청각 장애자와 같은 이들이었다. 성경에서 희년이라 함은, 남의 집에 종으로 묶여서 자유를 제한 받고 있거나, 재산을 모두 탕진했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모든 것을 탕감하고, 맨 처음 상태로 복귀시켜주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맨 처음 상태로 복귀시키는 시켜주는 것이어서 고난과 억압과 가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눅 4:16-21).그런데 팔레스타인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경제권보다는 우선적으로 죄와 그의 잃어버린 건강에 대한 채무를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저들에게는 인간성의 회복의 첫걸음임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경험은 예수께로 믿음을 갖고서 다가오는 사람들 개개인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복음서 기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리를 얻고, 하나님의 영생을 기업으로 받는 자 됨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서 구원 받은 표징들이 나타난 것이다.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후,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에 훈련된 사람들에게 자주 얼굴을 보이시고, 저들 보는 앞에서 하늘로 높이 올리셨다. 이 일이 있은 후, 열흘간 예루살렘의 마가의 집 이층 거실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사람들에게,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성령이 내려오셔서, 각 사람에게 불꽃으로 임하셨다. 이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요엘의 증언을 들어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특정한 임무를 띤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선포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먼저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우리가 짐 진 모든 채무들을 탕감하신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증거로 각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내어주신 첫 번째 선물이라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선물은 성령님이시다.누구든지 그가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탕감 받으면, 하나님의 신이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계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이 한정된 지성소에 계시던 것과는 달리, 각 사람을 성전삼아 그의 내면에 임재하신 것이다. 이 복음으로 인해서,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인권과 가치가 보편적으로 많이 회복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었다. 지배자나, 글을 아는 이들이나, 뛰어난 이들에게만 구원이 독점 되었고, 일반적으로 서민들에게나 여인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하였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하늘의 은총을 받았고, 자신들도 영혼이 있고, 구원을 받았음을 확증할 수 있었다. 성령이 자신들에게 임하신 증거들이 방언이라든지, 병 고침의 은사라든지, 예언의 은사라든지, 각양 은사들이 각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적인 교회가 구성되었고, 이로써 이들에게서 나타난 공통점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권 안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이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수용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룬 이들에게, 서서히 죄에 관한 성찰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율법으로 길을 걷던 이들도 점차로 복음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이 일상화 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옛 사람과 그의 율법적인 삶이 폐기된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단의 권력 아래에서 품삯을 받으며 종노릇하던 이들이 예수의 피 값으로 모든 채무가 탕감되어서, 죄와 사망으로 억압되던 흑암의 권력에서 해방되어, 용서와 수용과 사랑으로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안으로 들어와 사는 거룩한 시민권자가 되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6-22
  • 성육신한 예수교회-50
    바울이 그의 목회 사역이 후반기에 들어서자, 그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전한 그의 복음을 로마로 보내는 서신에 총정리를 하게 된다. 우리가 논문을 쓰게 되면 서론을 맨 나중에 쓰면서, 논문의 주제와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읽는 이들로 하여금 먼저 논문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듯이, 바울도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에 잘 안내하여 주었다. 그가 지금까지 열성적으로 전하게 된 복음은, 모세 오경과 선지자들과 시 문서들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에 관한 소식으로서, 저가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인되신 메시아이신 예수에 관한 것이었다.바울은 이 메시아이신 예수로부터 사도직을 받아서, 모든 인류에게 이 소식을 선포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 오신 것을 가르쳐서 믿게 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예수께 순종하도록 하려는 사명을 받은 자임을 명료화 하였다.우리가 여기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우리의 주님 예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로서, 인류를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하는 사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뤄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는 오늘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다시피 하는 이때에, 목회 사역의 전열을 재정비 함에 따른 절실한 요청 때문이다.바울은 복음을 시리아와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와 고린도에 전하면서, 그 자신 혼자서 사역을 하질 않고, 팀 사역을 하였다. 로마서와 목회 서신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역자들이 바로 그의 동역 자들이다. 저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지나온 자리에 남아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놓은 사람들이다. 후에 문제가 있더라도 아프터 써비스를 단단하게 해서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는 오늘의 기업인들이 마치 로마서를 터득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동역 자들이 갖춘 요소들을 보면, 첫째로 그들이 인류에게 전하려는 복음의 내용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전했다는 것이다. 마치 항공모함의 함장과도 같은 책임을 맡은 자 같고, 저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모함을 따라서 움직이는 함장들과 같이, 문제와 상황을 잘 파악하고 대응하는 능력들을 갖추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에게서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들어나는 외적인 모습들이 있었다면 군인들 모두가 제복을 착용한 것 같이, 저들 모두가 한 결 같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항시 강조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것처럼 그의 동역 자들도 바울을 본받으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질 아니하고, 겸손하고, 주의 깊게 경청하여 자기에게 다가오는 혈루증 연인까지도 놓치질 아니하고 삭개오 같은 이도 편견 때문에 잃어버리질 아니하고, 수가성의 남편을 여섯 번째 둔 여인마저도 포용하고 녹여낼 수 있었던 온유함을 갖추고 있었다.바울이 로마서 서신에 밝힌 것처럼,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려 해서 평생을 달려 왔고, 로마서도 그래서 기록했으며,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만을 전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을 잘 인지하고 훈련되어 있다는 말도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재주나 지혜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복음을 막상 전하려 하면, 복음 자체가 스캔들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설득하고 믿음을 일으키고 순종을 이뤄내려면 사람의 재주로는 어떠한 변증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성령과 항시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바울의 복음 전달 능력에 있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지식만으로는 설명이 될 수 없고, 그가 보여준 본보기도 한계가 들어나고 있기에, 저는 그의 사역 중반부터 세상에서 쌓은 스펙과 소중한 것들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하나님의 영에 바싹 붙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말씀하시며 보여주시는 것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사역의 비밀을 우리와 공유한 것처럼, 아버지가 말씀하시질 않고 보여주시질 않은 것은 하질 않았다는 것이다. 저가 사람들에게 복음뿐 아니라 성령의 선물까지도 전달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성과를 이뤄낸 것도 모두가 이 사역의 비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6-09
  • 성육신한 예수교회-49
    교회가 60을 넘기면 얼마나 성숙해지는 것일까? 구약에서 보여주는 광야 교회가 가장 비중 있게 보여주는 그림은 성막일 것이다. 이 성막 안에서 매일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번제를 비롯하여 속건(배상)제와 감사제등, 이와 같은 여러 제사 행위를 통해서, 백성들은 저마다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 행사를 치르면서 절정에 이른다. 대제사장은 이날 백성들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씻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가 속죄의 피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뵙고 나오게 되면, 모든 백성들은 다시금 거룩하게 되어서, 거룩한 도시, 거룩한 시민, 거룩한 국가 시스템을 단단하게 갖춘다.이스라엘의 시스템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에게 나아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제사장, 임금, 선지자였다. 시기마다 상황에 따라서 주도권이 옮겨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안정된 평화 시기에는 조화를 잘 이뤄 있었다. 백성들이 평상시에는 임금의 통치를 받는다거나,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였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백성들과 상관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실천하도록 함에 있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분들은 지극히 소수였고, 백성들 모두는 몇 안 되는 이들을 잘 따라 주었다.우리가 모두 아는 바이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A.D. 30년 이후 모두 해체되고 붕괴된다. 한 사람만 출입하던 지성소 휘장을 찢어버리시고, 누구든지 들어 올 수 있게 하신 것이었다(눅 23:44-46). 이에 관하여 당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라(히 10:19-20)’ 하였다. 특정화된 한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모든 것이 움직여지던 시스템이 바뀐 것이다. 아직도 원시적인 사회나 국가는 피라미드 구조와 같은 조직으로 형성되기 일쑤지만, 시민 개개인 모두가 빠짐없이 은사를 부여받고, 각자가 가진 은사와 재능이 활성화 되어서 효율적으로 활용되고 통합되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누가는 그의 복음에서 이러한 역사가 어떻게 진행이 되어 진 것을 두 권의 기록을 통해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한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계시는 구약과는 다르게,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임을 갖는 회중 개개인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여 계시는 것이었다. 맨 처음 성령은 각 사람에게 불꽃으로 나타내셨지만, 성령의 임재가 내면화 되어서, 모세나 다윗에게 나타나던 영적 은사가, 저들에게도 확연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란 자와 흰 자로만 구분되었던 달걀 같은 단세포에 지나지 않던 교회가, 분화와 통합을 거쳐서 병아리로 탄생되듯이, 머리와 손과 발이 모두가 갖추어져 있는, 성령으로 소통되는 유기적 공동체가 탄생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사회는 전통적인 조직에서 벗어나질 못하지만, 새로 탄생된 교회에서는 각자에게 부여된 은사들이 활성화 되었고 존중되었다. 새로 탄생된 교회는 개개인에게 어떠한 규칙이나 제도를 세분화 하는 것을 절제하였다. 몇 가지 단순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옭아매질 아니하였다. 요즈음 우리네들이 모이게 되면 일상으로 회장을 뽑고, 조직을 두는 것과는 전혀 모양새가 달랐던 것이다. 만인에게 열려진 지성소와,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됨으로서 인하여 오는 영적인 변화와 흐름을 교회가 통제하질 않은 것이다. 교회가 환갑을 넘길 즈음,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의 비결을 교회와 나누었다. 베데스타 못에서 38년을 거동하질 못하고 누워있기만 하던, 한 병인을 구원하였는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라서 논쟁과 소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관련한 그리스도 사역의 비결을 공개하였는데, 이는 환갑을 맞이하는 당시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리스도가 그를 보내신 하늘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과, 아버지가 보여 주시는 것에서 벗어나질 않았고, 항시 그가 듣고 본 그대로 사역했던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그렇게 하였고,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사역 까지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며, 아버지가 보는 것을 같이 보았다. 모세에게 불꽃이 일어나는 떨기나무가 지성소였다면, 그리스도의 지성소는 바로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던 겟세마네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누구에게나 지성소를 여심은......, 당신과 나를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이 계시는 지성소로 초대하심은 왜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6-01
  • 성육신한 예수교회-48
    야구 게임에서 7회 콜드게임같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난 팀은, 그 다음 경기는 대부분 게임이 지지부진하다가 버리게 되는 결과가 허다하다. 촛불 집회도 끝이 났고, 대선도 끝이 났다. 지금까지 밀려오던 에너지의 파동이 갑작스레 조용해 진 것이다. 이러한 잔치가 끝난 다음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이 되는 것일까? 누적된 상처와 고통들은 치료되질 못하고 방치되기 십상이다. 미주에서도 경험된 것인데, 한 지역의 제방이 무너지고 미시시피가 범람한 이후 다가온 것들은 정치로도 종교로도 해결이 되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와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점령한다. 요단강을 건넌 것은 믿음의 성과였다. 모세가 죽은 이후 오로지 여호수아만의 리더십에 의해서, 황톳물이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넌 것은 모든 시민들에게 커다란 신뢰를 가져온 것이다. 자연적인 장애를 믿음으로 뛰어넘은 첫 번째의 열매였다. 백성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들을 성결하게 하고, 법궤를 앞세워서 메마른 땅 같이 요단을 건널 수 있었다. 요단을 건넌 후에는, 광야 길을 건너느라고 40년 가까이 할례를 하지 못하였는데, 길갈에서 적진을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군대가 모두 할례를 행한 것이었다. 전투력이 제로에 치닫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그만큼 저들의 신앙은 고양되어 있었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고양된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마저 무너뜨린다. 법궤를 앞세워 나팔을 불며 여리고 성을 돌더니, 마지막 날 새벽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았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 기다렸던 모든 군대가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는 무너져 내렸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와서 첫 번째로 치룬 전투였는데 승리를 가져온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해 보면 여리고가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를 방금 알아차리게 된다. 요단강의 하류일 뿐 아니라 모든 무역상들이 들렀다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성안의 시민들은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는 모양새였다. 오랫동안 광야에서 머물다가 모처럼 문명의 도시를 처음 접수한 이들의 눈은 값지고 기름진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의 첫 번째 것은 신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되질 못하였다.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값지고 탐스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은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 것 같아서 지도층에서도 눈치를 채질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해서 그 다음 번, 아이 성의 전투가 패배를 가져온 것이었다. 기본이 되는 것들을 관리하질 못하여서 치명적인 손실이 일어나는 경우는 허다하다.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을 잘 지켜내는 시민들과, 공공의 질서를 무시하고 임의로 행동하는 백성들과의 차이는 너무나 현저하게 차별화되는 것이다.1990년 9월 12일 새벽 3시 50분, 행주대교 남쪽 1㎞ 지점. 닷새 동안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강물은 일산 제방을 무너뜨리고 기름진 평야를 삼켰다.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과 지도읍 일대 83개 마을에 수마가 들이닥쳤다. 원당읍까지 일부 침수되고, 파주군에도 물길이 차올랐다. 고양군 전체의 65%가 물에 잠긴 것이다. 새벽 2시40분께. 비상근무에 들어가 제방구간을 순찰하던 장병들이 자정부터 순찰을 돌던 끝에, 조그만 물이 솟는 구멍들을 발견하여 긴급보고를 올렸으나, 농경지는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네덜란드에는 물이 새는 제방을 발견하자, 밤새 손으로 막아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았다는 한스 브링카라는 소년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국토가 바다보다 낮아서, 국토의 25%가 물에 잠길 수 있는 요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둑이 무너지지 않음은 왜일까?오월이 되면서 휴일이 어느 때 보다도 많아졌다. 시민들이 평시에도 산을 덮듯이 산으로 몰리지만, 이번은 어느 때 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선거철이라 들썩이는 것은 매스컴뿐만이 아니었다. 여느 시기보다도 지켜질 수도 없는 선거 공약들이 홍수를 이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러시아 군대는 함경북도 변방 경계 지역에 집결, 중국군대의 15만여 병력은 압록 강변에 집결하였고, 일본 병력과 미국군대의 동해 집결은 모두 선거의 물결 아래로 잠겨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더니, 5월 6일 산불이 전국에서 일어나서 번지는데 종잡을 수가 없었고, 결국에는 민가들을 삼키고 만 것이었다. 행객들의 담뱃불과 농민의 소각으로 인해서 비롯된 재난이었지만, 저들만 해이해진 것은 아니다. 국민 전체가 너무나 오랜 기간 들떠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후에, 이 나라에 발생되어진 국가적 사회적 재앙들은 감당하기가 버거울 만큼 강도가 높아져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5-18
  • 성육신한 예수교회-47
    요즈음 종교들의 가르침을 보면, 경전의 가르침들을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듯, 서로의 장점들을 채용해서인지 비슷한 점들이 많아졌다. 각 종단에서 심리학을 적용해서 신도들을 치료하는 것들을 보노라면, 개신교라고해서 별다른 것이 없다. 신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걷는 구원의 길이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개신교 신학을 수강했듯이, 유대 랍비가 신약성경과 주석, 신학 서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의 가르침은 백성들을 인도하는 점에 있어서 버전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마다 공통점이 있게 되고, 사회성이나 공중 도덕성에 있어서 저마다 품격이 높아지고 스마트해진다면 사회는 전반적으로 좋은 세상을 지향하게 될 것이리라.이미 오래 전 일이다. 세계적인 도시의 한 쌍둥이빌딩이 공격을 받은 때이다. 이 기관의 책임자인 회장이나 수석 부회장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이날 한 사람은 출근을 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침에 마신 주스로 속이 불편해 져서 화장실에 드나들다가 조금 늦게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의 공격을 목도하게 되었다. 한 분은 유대 율법을 실천하는 자이고, 한 분은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다. 이 두 분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책임감이 높고, 지구촌에서도 귀감이 될 만한, 도덕적 지수도 높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화를 입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구약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었고, 한분은 신약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중이었다. 한분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한’ 경제면에서의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고, 한 분은 그 논문을 읽고 그를 채용한 분이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이렇게 탁월한 분들이 한 곳에서 공통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조화를 이뤄 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리라.바울은 다양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시에 ‘로마서’ 서신을 여 집사로 알려진 뵈뵈를 통해서 전달하였다. 이 시민들 중에는 신앙문제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자, 로마당국으로부터 그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이들이다. AD 80년 즈음, 지중해 연안인 야브네 랍비들 그룹에서 사람을 한 지역에 파송할 때에는, 파송된 자는 랍비의 권위를 갖고서, 랍비의 지침과 명령을 전달하였다. 파송 목적이 달성 되었을 때에는 그 특별한 권한이 종료되거나, 지속적으로 그 지역의 영적 권위자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던 로마 분쟁 지역에, 사도 바울은 남자도 아닌 여인에게 자신이 평생 사역하며 가르치며 전파해온 ‘그의 복음 로마서’를 넘겨주고서는, 미련 없이 훌쩍 사지(死地)로 나간 것이었다.로마서 서신이 끝나가는 결미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라성 같은 분들이 이미 로마에 들어가 있었다. 네로 황제의 등극과 함께 로마 수도로 기독교 유대인들이 귀환하였을 때에는 저들은 이미 소수가 되어있었다. 잠시 떠나있는 동안에, 로마인들로 구성된 크리스천들이 상당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귀국한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율법만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한 도시에 살게 되었으니 분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이미 국외로 추방되었던 경험을 한 터이라서, 고린도나 빌립보나 에베소에서 같이 지나치게 소란을 떠는 일들은 없었다. 그러나 조용한 듯이 일어나는 분쟁일지라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유대인들이 모일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되는 바람에 가정집에서 모여야 했고, 이 같이 조심스러운 환경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다. 서로가 절제된 펀치를 날리게 되었을 것이고, 질서 있고 신사적인 토론으로 인해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어서 공동체는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요즈음 랍비들이 그들 신도들중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을 보면, 613가지 율법 중에서 ‘하지마라’는 365조항에 저촉된 생활을 하는 부류를 가리키고, ‘이렇게 하라’는 248가지의 조항을 적극 따르는 신도들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 안에서 장사지내고, 다시 사신 예수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가치관’을 지향하는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다룬다. 이렇게 상이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바울의 ‘복음’과 그가 전해 주려하는 ‘성령의 은사들’을 여 집사 뵈뵈가 어떻게 전하였기에, 바울이 도착한 항구에 저렇게 밝은 얼굴들로 나와서 사도를 맞이하게 될 수 있었을까? 이는 필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본을 보인 뵈뵈에게서 그 비결을 찾아야 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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