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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29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려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가 유아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율법은 모세로 인하여 왔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로 인하여 왔다함은 또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는 빛과 어둠으로 그가 주장하려는 논제를 이분법적으로 이끌어 간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한다.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최고봉 니고데모를 책망하고 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알지 못하느냐? 저를 호되게 꾸짖으며, ‘위로부터 난자라야 하나님나라를 본다.’ 하였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지루하게 여겨질 만큼 또 다시 육으로 되받는다. 사람이 어떻게 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것이 될법한 말씀이십니까? 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자아의 탄생을 경험하지 않으면, 또 다시 옛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의 내면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알고 있다면, 그의 교회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만큼 유기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의 내면에서 퇴색되어 가고, 세속적 가치관에 희석이 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역시 예수가 허물려던 교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의 교회가 60주년이 될 당시, 그 보다 앞서서 세상에 나온 복음서들에서 비쳐지고 있는 교회 모습을, 마치 옛날로 되돌아 가는듯한 느낌을, 요한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 같다. 복음서마다 12이란 숫자를 특정화 시키고 있고, 일곱이 그 12와 비교될 때에 결코 뒤처지질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관심에서는 일곱 집사의 빛이 바래져있다. 당시의 세속적 수준을 넘어서질 못한다. 특히 요즈음 우리 토양에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던 사람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의 범위 보다는 성령의 면적이 작아진 듯 하고,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듯하고, 종내는 성령의 흔적마저 지워지게 된다. 그리스도론적인 교회론은 종교개혁을 할 즈음에 잠시 몇몇 개혁자들에게서 형성되는 듯하다가, 찻잔이 식기도 전에, 로마 가톨릭이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성령마저도 이 한국 땅에 들어서시자마자 교회의 포로가 되신 듯, 일부 목회자들이나 몇몇 학자들의 작은 관심만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타락한 교회들에 의해서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성령의 사역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 모습은, 마치 제사장 엘리가 죽던 날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서 떠나가지 않았던가? 만약 한국교회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길에서 돌아서질 못한다면, 개신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신도들은 로마가톨릭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어느 미래학자의 주장 같이, 개신교는 500년간 진화되어온 로마가톨릭보다 심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소리침은 왜일까? 당시 교회들이 유대교의 박해보다도 더 위험한 요소가 교회 내부에 자리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을 복음서 맨 앞에서 그렇게 선포하셔야 했을까? 요한의 공동체에서는, 전례만 있던 교회가 변하여서 성도 개개인의 인격과 삶에서 생수가 솟아나 강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가 있다. 교회가 전례로 사용하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모든 하객들의 흥이 떨어진 잔치 집에, 다시금 흥을 돋우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야곱의 우물에서만 물을 길어먹던 사마리아 인들이 비로소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된 영생의 이야기가 있다. 요한의 교회에는 특별히 어느 공동체보다도,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어 드린다. 왜 하필이면 기름을 발에다가 부은 것일까? 적어도 왕으로 그의 왕국에 입성할 채비를 차리는 것이라면 머리에다 기름을 부어야지, 어찌해서 발에다가 기름을 부어드린단 말인가? 요한의 교회는 위에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저들 모두가 ‘본 바요, 들은 바요, 만진 바요, 아는 바라’하였다. 요한 공동체 개개인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며, 피와 부활하심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텐트가 그의 백성을 덮으신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교회에서 기름을 발에다가 붓는 까닭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이라야 비로소 하늘의 시민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1-0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8
    우리가 성경에서, 지식인들이 그들이 배우고 익힌 지식의 한계에서 맴도는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모세와 같은 인물은 이집트의 궁중에서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익힌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동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여 당시 어느 제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든 국민이 평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개개인들이 누구의 억압이나 통제 없이도, 스스로가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회집단을 이룰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일반적으로 당시의 제국들의 종교는 제국 안에 귀속된 종교들로서, 제국을 위한 종교로서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데에 급급하여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에만 연연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였다. 우리 역사에서도 보여 지듯이 ‘안국사’와 같은 절은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주는 절로서, 종교가 국가를 위한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가 한 국가적 이기주의를 넘어서질 못하면 타락하기 마련이다. 종교가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도구화 되면, 그 국가 사회도 타락하기 마련이고, 백성들도 그들의 종교를 집어내 던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종교가 타락을 하면 국가 역시 병들게 되고,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 요소들이 타락하여져서 더 이상 그 사회를 유지하기에 버거워지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몰락은 모두 그 당시 종교와 역학 관계에 놓인 것이다. 조선이 들어설 때에 아예 불교를 내던지고 유교를 받아들인 이유도 나라를 살려 보려고 한 결과였다. 어디 이뿐이던가? 조선 말기가 되면서 국가가 기울어지게 되자, 유교를 내어던지고 기독교로 시집을 오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음을 역사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얼마 전 공공연한 TV 강좌에서 한 유명 강사가, ‘기우제를 지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제사상을 뒤엎는다.’ 하였다. 종교가 마치 인간의 복리에 길들여진 그 무엇처럼 되어 진 모양새이다. 요즈음 우리의 기독교는 머리 위에서 비쳐주는 빛과 같이,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내어주고, 생명의 가이드라인처럼 비쳐지기 보다는, 사람들의 소유욕에 도구화 된 듯한, 마치 유대교가 소금이 제 맛을 잃은 나머지 길가에 버려져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겪이 되었듯이, 로마 제국 하에 붕괴된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의 종교와 흡사하다.젊은 랍비 예수에게 찾아온 유대 최고봉의 학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흘려버리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종교가 위의 차원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땅에서 익히고 경험된 것만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가면, 그 백성들도 땅에서 위로 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위에서 오는 것으로 우릴 세상에서 구원하셨다. 위에서 오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십자가로 포용하고, 땅에서 번쩍 들리어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에 속한 시민들이 되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공생에 기간 동안 줄곧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는데, 그가 본 것이 바로 ‘십자가’이었다.유대 랍비들은 듣고 가르쳤다. 그들의 전통과 선배 랍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대로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예수가 활동하던 세상은 다윗 같은 정치적 메시아나,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흉내 내는, 짝퉁 메시아들에게 식상한 세대들이었다. 쿰란으로 잠적한 공동체나, 이집트로 철수한 70인 경을 번역한 제사장 그룹들이 이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적어도 스룹바벨의 제 2성전 이후, 유대백성들은 마카비우스 형제들의 난을 겪게 되면서 실망한 나머지, 다니엘이 말하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메시아인 바로 그 ‘인자’를 기대하게 되었다.오늘 우리 대다수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자’이신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위로부터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을 간과하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실패한다. 수가성에서 정오에 예수를 직면한 사마리아 여인과 그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지만, 산 위의 동리 유다 성의 랍비가 다시 어둠에 묻힘은 왜일까? 우리가 오늘도 니고데모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대표자들이 왜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그들의 교회 규격에 맞추려 하는 것일까? 신학자들마저도 교회론에 길들여진 성령을 주장함은 왜일까? 저들마저도 어둠속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니고데모의 후손이기 때문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0-29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7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은 간접적으로 완곡하게 정보를 주는 정도로 표현되어있으나, 고정관념을 뒤엎고, 발에다 기름을 붓는 이야기는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었다. 왜 그런 것일까? 2008년에 상영된 영화중에, ‘The Express’라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갤러거의 자서전 <어니 데이비스 Ernie Davis : Elmira Express>를 영화화 한 것이다. 뉴욕 주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흑인, 어니 데이비스는 인종차별의 벽에 맞서 싸우며 미식축구선수로, 1958년 시라큐스 대학의 백인 코치 벤 슈왈츠왈더에게 발탁되어 러닝 백으로 성장한다. 어니가 라커룸에 들어가자 그의 라커에, 전설의 축구선수 짐 브라운 선수의 백넘버 44번 셔츠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백인 선수들은 ‘어째서 유독, 저 흑인에게 기름을 붓느냐? 하며 열을 내었다. 라커룸의 동료들이 눈살이 찌푸리는 중에, 어니는 코치에게 들어가 ‘나는 짐 브라운이 아니다. 내가 왜 그의 번호를 달고 뛰어야 하느냐?’ 하고 항의 하였다. 슈왈츠왈더는 맞받아서 ‘그래 44번은 짐 브라운 번호가 아니라, 너의 번호니 제발 좀 짐 브라운처럼 되질 말고,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되라.’ 하고 소릴 질렀다. 어니는 시라큐스 대학의 미식축구팀 오렌지맨(Syracuse Orangemen)을 이끌고 1959년도 전국 챔피온십 디비전 결승전에 진출한다. 1960년과 1961년에는 각각 ‘코튼볼(Cotton Ball)’과 ‘리버티 볼(Liberty Ball)’에서 2년 연속 MVP 선수로 선정되었고, 같은 해인 1961년, 흑인 최초로 대학 미식축구 최고의 명예인 하이스만 트로피(Heisman trophy)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기름부음’이 바로 스포츠 훈련과 경기와 맞물려서 영화 장면에 더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 같다. 발에다가 기름부음을 받은 이가 우리의 주변에 있다면 누가 떠오를까? 우리의 삶과 역사의 자리에서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과,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저들의 발을 보고 있노라면 감동 그 자체이다. 차라리 경건하다고 할까나......, 마땅하게 표현할 말을 잃는다.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면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분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저들의 머리에는 모자가 하나가 아니다. 어떤 이는 모자를 열 개를 쓰고서도 또 쓰려는 것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모자를 쓰려고 하는 이들이 노회에서도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고, 총회에서도 연례행사이다. 요즈음 우리교계에서 가장 부끄럽고 보기 싫은 행사 가운데에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내 개인적인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총대가 되면 이러한 연례행사에 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요즈음은 연금재단에서도 서로 모자를 쓰려고 줄을 섰으니, 예수 당시 성전 금고지기가 그 당시 종교 권력서열 2위였다 하니 이러한 현상을 알 것만 같다. 마치 저들의 말로가 유병언의 주검과 흡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이 세상에서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지금도 서유럽에서는 왕위에 오를 때에 기름부음을 받음과 동시에 왕관을 씌우고, 즉위식 찬양이 이어진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즉위식의 영광과는 달리, 실패한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짝퉁 메시아들도 등장할 때는 그 시작들은 요란하였지만, 퇴장할 즈음에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지도자들도 즉위식에서는 그들의 비전들이 얼마나 요란한가? 허지만 그들의 머리에 얹혀있는 것들이 여러 상황을 만나면서 왜곡되어지고 퇴색하여져서 후에는 자리에만 연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유향 한 근을 준비하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아와는 다르게 예수의 측근인 제자들은, 너무나 값싼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몰두한 나머지, 예수가 진정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것은 알아차리질 못하였다. 헬라에서 올라온 이들도 예수가 처형될 것을 미리 알고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즉각 거절하고 선언하시기를 ‘한 알의 밀알이 죽지를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 하였다. 마리아는, 안석을 끼고 평상에 비스듬히 누워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 뒤로 가서, 옥합을 깨트리어 순전한 나드 한 근의 기름을 모두 예수의 발에 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깨끗하게 씻기었다. 아마도 이 땅의 모든 인류가 지금까지 지켜본 장면 가운데에 가장 거룩한 모습이었으리라. 그 발에 부어진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힘을 얻으셨을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0-1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6
    요즈음 워킹 맘들이 유리천장을 뚫어내는 사례들을 매스컴에서 접하면서, 세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좋아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요한복음을 읽노라면, 2천년 이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우리 세상의 여성들 이야기를 기록하여 놓은 듯 하는 착각마저 든다. 요한은 당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그의 복음서를 구상하면서, 다른 기자들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는 누구보다도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소개하였다. 마리아는 흥이 깨져가는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의 끝자락에 서서 그들의 실제적인 상황과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한다.가나의 잔치가 예수의 시간은 아니었어도, 마리아는 그녀의 시간대에 예수를 놓치지 않고 초대한 것이었다. 복중의 쌍둥이 아이들 중에서 하늘의 부름을 입은 자를 식별한 리브가처럼, 그녀의 민감함을 말한다면, 마리아는 베드로와 비중을 같이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선지자요 사도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울적하여진 구름이 덮인 세상이 금방 해가 밝게 빛나도록 상황을 뒤바꿔준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어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신 그 순간에, 요한은 마리아를 그의 교회의 지도자(어머니)로 모신다. 요한 공동체가 모친으로 모신 마리아는 그 공동체의 비중을 보아서 수장일 수밖에 없다.이 뿐만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성을, 율법의 수장 니고데모보다도 먼저 앞세워서 세상의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직면하게 하고, 눈을 뜨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적어도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는 것도 여성이고, 예수의 부활 이후 하늘과 땅의 심판주이신 예수와의 첫 번째 만남을 얻은 이도 여성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을 들어서 새롭게 복음을 진술하시는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시 세상은 남성 위주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요한복음서에서 만큼은 남성을 차선에 둔다. 심지어는 마리아가 주연이고 베드로는 조연이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지루할 정도로 수천 년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하며 지치지도 않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여성들이 말을 하고 앞에 나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이는 아래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이들은 남녀노소 차별이 없고, 배움을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님나라의 영생을 얻은 이들이다. 오로지 이들의 가치는 위로부터의 태어남이며, 이들의 삶의 장막과 기준은 오로지 인간의 세속적 가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태어나야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면, 성령이 바로 그 공동체의 시작이고 근본이며 척도이다. 그래서인지 저들은 예배에 대한 가치관이나 개념이 바뀌었다. 육신적인 사람들이야 말로 예배당을 궁전처럼 지어놓고 예배하는 것을 영적인 것인 양, 슬그머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려 하지만, 요한 공동체는 이에 속지 아니하였다. 저들은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이념을 파기하고, 오로지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일시적이고도 그림자 같은 거짓된 세속적 가치를 식별하고, 영적 실체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것이다.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집중하면 예수께서 삼일 만에 세우신 교회를 접할 수 있게 된다. 요한은 이 교회의 실상을 바르게 직면할 수 있었기에 요한복음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이 바로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이고, 요한 공동체가 바로 성령이 임재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자들이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요한복음을 읽는다면, 예수님이 허물려 하는 교회는 다시 세우진 않을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다시금 육으로 태어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지 육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전례를 행하고, 금방 성찬에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회 임원을 조직하고 총회 총대를 선출하고, 연합 단체의 임원을 조직할 때에, 우리는 교회의 직제와 직임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주님을 즉각 범하게 된다.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가 불가한 죄가 되는데도 지치지도 않고, 굳이 주님이 허물은 성전을 다시 세우려는 자야말로, 무너뜨린 여리고를 다시 세운 자에게 미친 그 형벌보다도 더한 벌을 피해 갈수는 없을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0-10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5
    A.D. 70년 이후 예루살렘이 붕괴되고 성전이 무너진 후에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유대 중심의 축은 제사장에게서 랍비들에게 넘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성전 중심의 유대종교가 막을 내리고, 유대교가 존폐의 위기에 서게 되자,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손자(가말리엘 2세)는 회당 예배에서 드리는 18기도문 중에 12번째에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을 이단으로 몰아 저주하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 기도문이 추가된 이후로는 숨어서 예수를 믿고 따르던 이들도 회당 예배에는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에 따른 기독교의 대처도 예민하여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이후 유대교와는 영영 결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시기에 등장하게 된 요한복음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거리를 두게 되는 차이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임재 하여 계심을 증언하고 설명하였다. 유대교와는 달리 그 걷는 길이 다르고 생명과 근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우리의 참 생명이시고, 우리가 걷는 참 길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임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특정한 인물 소수에게 나타났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믿는 이들은 누구든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되는데, 이는 우리 믿는 이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방문하셨을 때에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시는 생명의 본질이 성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고, 예수님의 말씀과 희생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질 시기에는 이미 구 성전이 붕괴되고 살아진 이후였다. 허지만 그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교가 붕괴된 자리에서 율법종교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요한복음 서두에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하신 선언은 요한 공동체가 유대종교에 대한 대처를 바르게 잘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예수를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도 ‘네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신 것이나, 수가성의 여인에게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신 말씀 그 모두가, 유대교는 지금까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만이 참된 하나님의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야 성령이 내재하시는 공동체임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의 거룩하신 영(聖靈)만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에,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그가 받은 성령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거주하시는 장막이 되고, 성령과 함께 걷고 사역하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저들이 모인 공동체 역시 성령이 내주하시고 운행하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가(organism) 되는 것이다.이 처음 원시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얼마나 강도 높게 경험하였던지, 저들은 말하기를 성령의 기름부음이 저들을 가르친다 하였다. 율법의 선생이며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다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독생자(獨種子)를 알아보질 아니하고 나무에 매달아 처참하게 희생시킨 자들이, 성령의 임재 가운데에서 그 일을 자행했으리라고는 만무할 것이다.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하였지만, 스데반을 돌로 희생시킨 사울과 산헤드린은 성령으로 하였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율법을 길로 알고 진리로 알고 생명으로 알았던 이들은 육을 따른 것일 뿐이다.오늘의 한국교회는 과거에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과 너무 흡사하다. 한국교회는 성령을 너무나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교회에 가둔 로마교회를 향하여 바벨론 포로에서의 자유를 선언한 루터는, 무엇을 어떻게 보았기에 그리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이 참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유기체라 할 수 있을까? 요한 공동체는 얼마나 민감하였기에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는 교회를 말할 수 있었을까?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교회, 에스겔이 보았던 생수가 솟아나 넘쳐흐르는 교회를, 과연 볼 수는 있는 것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0-02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4
    요즈음 계절이 바뀌면서 대형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한국교회들이 새벽부터 교회로 달려가 주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무적일 수밖에 없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우리게 종용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현 시점에서 보면 이보다 적절하신 말씀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주변국들이 변해도 너무나 과격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독일의 통일과는 또 다른 시간대에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한동안 지친 경우는 있었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두드려야 하는 입장이다. 우리의 자녀들과 저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것이리라.주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까지 지고 가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바울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선물로 내어 놓으신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일을 위한 기도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약 창세기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영성이 아주 민감하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리브가라는 여인일 것이다. 이 분은 자신의 신랑감 댁에서 오신 분이, 자기 마을 우물가에 당도한 것을 감응하고는, 용수철처럼 튀어서 우물가로 나온 것이다. 저녁시간이 이르자 우물가에 앉아서 기도하고, 이삭의 아내가 될,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브라함의 사람 엘리에셀은, 마치 공자님이 사람을 분별하던 방식처럼 이 여인을 관찰하였다. 마치 기도의 응답인양 이 여인네는 먼 길을 걸어온 나귀 때에게 물을 먹이고, 그 손님을 환대하여 자신의 집 사랑 방으로 모신다. 어디 이 뿐이랴 그 사람이 길을 재촉하여 당장 떠나자 하였을 때에, 두려움과 미련을 과감히 떨치고 따라 나선 것이다.우리는 그동안 우리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익숙해있다. 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시점에서는 괴리가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회막으로 향할 때에, 하나님도 모세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광의 구름 가운데에서 회막으로 내려 오셨다. 백성들이 볼 때에 마치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졌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려고 다가서면 만나 주신다. 이미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공로로,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갈라져 있어서 문이 열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지만 우리가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때에야말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와 관련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를 미리 당부하신 터이다.마리아는 최초로 주님을 몸으로 맞이하고 환대한 여인이다. 여인 중에 이처럼 명예로운 분이 어디 또 있을까? 세례 요한의 아비 스가랴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게으름 피다가 벙어리가 되어서 나왔지만, 마리아는 어린 처녀의 입장에서도 즉각 주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주님에게 다가가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에 ‘하나님은 숨기시고 왕은 그 숨긴 것을 찾아낸다.’라는 격언이 있음은 왜일까? 천국은 시간을 놓친 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마리아가 포착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심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도 돋보였다.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복중에서 낳은 아들이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성인이 되었을 때, 하늘의 뜻을 이루게 된 그 얼굴을 보려는 마음은 아무도 감추지 못할 것이다.예수가 건장한 청년들과 가나 잔칫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마침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진 상태였다. 마리아는 즉각 예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였다. 예수의 때가 아직 아니긴 하였으나, 마리아의 때인 것은 분명하였다. 유대인들이 결례를 위해 사용되는 물 항아리는 인간의 전례나 규례의 한계를 보인다. 초대된 손님의 발을 물로 씻긴다 하여서 흥이 되살아날까? 세례 요한은 이르기를 ‘나는 물로 너희를 씻기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너희를 씻기신다.’ 하였다. 흥이 깨진 잔칫집에 필요로 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포도주일 뿐이리라. 물이 포도주로 바뀌자 즉각 흥이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마리아의 순간 포착으로 흥이 살아났으니, 마치 그 잔칫집에 우리 민족의 통일과 같은 흥과 노래가 찾아든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9-17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3
    일부 성경 주석가들이 로마서 6장에서 7장을 건너뛰고, 8장으로 곧바로 연결하려는 심정을 토로하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로마서 7장에서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신음 때문이리라. 의롭다 함과 평안과 즐거움 안에 있어야 할 크리스천이 ‘곤고함’에 노출되는 것 같아서일 것이리라. ‘크리스천’이란,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일 년 간 학습된 분들이, 비로소 주변의 시민들에게서 얻은 칭호였다. 이들은 안디옥 시민들이 지켜보았을 때에, 자신들과는 달리 거룩하게 구별되어지는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의 차이점은 일반적으로도 쉽게 구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의 차이점은, 그 도시에 살았던 시민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고무적인 변화가,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드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바울에게서 복음을 학습한 사람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헬라인들도 있었고, 당시 그 도시의 주민들도 있었고, 먼 곳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자유인이나 노예들, 상인들도 있었으며, 우스운 표현이지만 여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나, 저들을 쉽게 하나로 호칭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그 칭호가 바로‘크리스천’이었다. 이런 칭호를 받게 된 사람들은 지역과 신분과 계급과 성차별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인격이나 공동체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바로 그 특별한 그 무엇들이 저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리게 하였던 것이다.만일 저들이 누가 보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할 정도의 사람들 이었다면 어느 누구도 저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의 모습을 유추하건데, 저들은 가르침을 받은 복음의 지식에 대한 가치관도 확고하였지만,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저들에게서 마음을 흔들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 서로 사랑함과 평안함과 자존감이 있었던 것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열매가 확연하였기 때문이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비교적 빠르게 정체성이 형성이 되었으나, 고린도 공동체의 형성은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안디옥을 비롯해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공동체들은 저마다 시간의 차이는 있었어도, 그 모두가 ‘크리스천’이라 칭함을 받기에는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지 않았다.로마서 7장에서의 ‘곤고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미처 알지 못해서, 율법에서 떠나질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사는, 율법에 고착된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 뿐 만 아니라, 더 넓게 본다면, 옛 아담 적 에고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예수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서질 못한 사람을 말한 것이리라.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 단계를 벗어나서 이웃에게 시선을 향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없진 않겠지만, 이전의 삶을 정리하게 되고, 이웃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으로 자신의 장을 넓히게 된다. 이전에는 예수의 희생에 안주하여 머물러서, 예수님만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으나, 이제는 나도 예수의 죽음 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안에서 나도 죽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예수가 주시는 구원 안으로 들어 왔다고 저마다 생각하지만, 아마도 전략적으로 예수와 타협한 것일 게다. 정치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이유 중에 하나는 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일 터이고, 연탄가게와 쌀가게 식당주인마저도 예수 보다는 이득을 쫓고 있다는 것에서 아주 자유로웠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저들을 교회당에서 볼 수는 있어도, 하나님나라 안에서 볼 수 없게 된다면, 분명히 가라지라는 판결을 받게 된 때문이리라.과거에는 아무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저의 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확실하게 보인다면, 저는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죽음에서 일어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의 나라로 이미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날마다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써 살아간다. 만일에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면서 곤고함에서 자유하지 못하였다면, 자신의 삶의 구조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역동이, 아직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따르면 ‘곤고함’이 사라지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9-04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2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롭다함을 입은 것과, 희락과 평안임을 주저하지 않고 항상 선포할 수 있었던 바울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실하심을 입은 자가, 희락을 누리고 평안에 거주하는 자임을, 항시 그의 삶과 그의 신도들에게서 확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접하기 전까지는, 율법이 그의 지켜야 할 길이었고, 그가 항시 붙들던 생명이었으나, 율법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부터 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종교나 사회적 계율을 통에서는 자책감과 정죄의 감시를 벗어나질 못하는, 수용소 내에 있는 죄인과도 흡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유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로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여 집사 뵈뵈 는, 바울이 보낸 복음의 사신으로서 ‘집사’라기 보다는 로마시를 복음화 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스데반을 ‘집사’라는 틀에서 보려고 하는 사고의 프레임으로는, 당시 교회를 진멸하려는 사울의 박해 공작으로부터 베드로 군(群)이 살짝 비켜간 이유와, 정면으로 복음과 율법이 충돌한, 복음 선포 자 스데반 군(群)이 직격탄을 맞고 순교를 당하거나, 주변 국으로 피신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가 옹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 집사 ‘뵈뵈’ 마저도 단순히 바울의 복음서를 전달한 밀사 정도로 본다면 크나큰 오해가 될 것이다. 당시 ‘복음’을 전달하는 자들은 복음의 모든 내용을 온전하게 학습한 달인들이었다. 복음의 내용을 온전하게 배우고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선교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전술도 뛰어났고, 인품도 바울 못지않게 온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전달자로서의 서비스로 그치질 아니하고 본을 보임이라든지, 사역에서 까지도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확실하게 시위하였다. 바울은 로마로 복음서를 보내면서, 복음을 숙지한 인격과, 복음을 왜곡하질 않고 온전하게 전달할 자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달변이라 할지라도 로마에서 일어나는 의혹을 잠재우고, 변론과 주장과 물리적 저항에 맞서서 끝까지 물러서질 아니하고 전선을 넓혀갈 용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바울이 이같이 ‘뵈뵈’를 선택한 것은 그녀가 인격적인 면에서도 바울을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의 복음을 소화하는 능력이나 전달하는 능력이, 다른 어느 사도들에 비해서 모자라질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뵈뵈’ 편에 보내는 복음의 수준에, ‘뵈뵈’의 인격이나 복음 이해도나 전달력이 수준에 못 미쳤다면, 바울이 수감된 지 3년 후,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에 볼 수 있었던 성과는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로마서 4장을 지나서 5장으로 나아가면,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요한이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들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한 바와 같다.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있어서,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 갈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시려고 임재하시는 광경을 누구나 볼 수 있었듯이, 크리스천들도 역시 역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내면적으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빌립보서를 전달하는 자가 기쁨을 보이고 전달할 수 없다면 빌립보서 사신이 아니듯이, 바울의 복음을 로마에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기지 못하였다면, 분쟁과 갈등으로 소란스러운 로마 도시를 평화스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뵈뵈’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구원의 선물을 풍요하게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개개인들이 서로가 존중 받고,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들을 절제하며, 옛 ‘아담 적 자아’를 어떻게 다스리는 법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맛보고 기쁨의 샘이 그 배에서 솟아나서 흘러나는 사람은 강물을 이뤄내는 법이다. 메말랐던 황폐한 땅을 적셔주고, 온갖 과일나무들로 주변에서 자라도록, 환경을 이끌어낸 것이다. ‘뵈뵈’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였기에, 옛 자아를 방치하질 아니하고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사지낼 수 있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것임을 보여줄 수 있었고, 그의 공동체는 차원 높은 평화와 연합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8-27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 21
    이 땅에 평화를 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베토벤의 교향시 No.9 을 지휘하는 지휘자나 그의 오케스트라만은 아닐 것이다. 유엔에서 앞장서서 활동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지휘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손에 들고 있던 칼과 창을 제단의 돌 위에 올려놓고, 질곡이 깊어진 두 사람, 남편과 아내, 두 마을, 두 민족들, 나라와 나라가 함께 모여 머리와 가슴을 마주하고, 말로서 토론하며 설복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고대인들의 염원을 실천에 옮겨보려는 시도가 U.N.기구를 창설케 된 이유일 것이다. 이 평화에 관해서는, 좀 더 많은 묵상과 구체적인 제안과 실천과 관련해서, 성경만큼이나 많이 다룬 책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경전이 묶어진 팔레스타인은 강대국들의 세력 확장에 교두보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언제나 평화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아브라함 족장시대부터 평화의 왕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평화의 도시로 일컫는 예루살렘의 고대왕국인, 살렘을 다스리는 임금의 이름이 멜기세덱이다. ‘멜기’라는 말은 ‘임금’이란 말이고, ‘세덱’이란 말은 ‘정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정의의 임금’이란 이름과는 달리,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 ‘왕 같은 제사장’ 사역이었다. 전쟁이 끊이질 아니하고, 강대국들의 대국굴기에 교두보로 이용되는 그 땅에, 정의가 실천되고 평화가 이뤄지려면, 칼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오로지 믿음과 말과 설복으로써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에서도 강조되는 바와 같이,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길은 원수 갚는 것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써 악을 이길 수 있도록 비결을 찾고, 위에서부터 공급되는, 차원 높은 전략과 전술 능력을 키우는 학습에 힘써야 했다. 검은 돌비에 그려진 하무라비 법전의 그림에서와 같이, 고대인들은 왕권과 지도력을 신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를 이용해서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신으로부터 그 왕권을 상징하는 동그란 원과 통치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받는 모습이 돌비에 각인되어 있다. 시편 110편에 기재된 노랫말도,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권능의 홀을 하사 받은 자라야 적들을 물리칠 수 있고, 바르게 의를 행사하여, 평화를 가져오는 임금이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멜기세덱 같은 임금의 등장을 노래함은 왜일까?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서 쓰라린 눈물을 맛보았다. 다윗의 왕조가 무너졌고, 제사장들 역시 타락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함께 무너진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제로 사람의 계열이나 집단에 대해서 많은 실망을 얻었다. 더더욱 마카베오 형제들이 왕권과 대제사장직과 성전 금고를 차지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시민들은 통치자에게서도, 종교지도자들에게서도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그래서 등장한 다니엘서의 메시아 상은 인간의 혈통을 배제하고, 오로지 위에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한다. 히브리서에서도 논증된 바와 같이, 사람의 계통을 밟은 지도자가 아닌,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제사장 같은 평화를 가져오는 왕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만들고 의를 세우는 사람의 하나님왕국을 선포하였다. 예수께서 오신지 이천년을 넘겼지만, 세상은 대부분 서로를 해하려는 칼을 하나님께 바치질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독일 교회는 무력에 의해서 갈라진 동서의 깊은 골을 기도로서 봉합하고, 굳게 막혔던 동서의 벽들을 허물어 낼 수 있었다. 이 화합의 환희는 어느 날 갑작스레 댐이 터지듯이 우리 인류에게 밀려들어 와서는 환희의 잔치를 배설하였다. 오늘의 독일의 수상이 홀로고스트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에서, 우린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갔다. 시편의 기자는, 권능의 홀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에게, 젊은이들이 새벽이슬 맺히듯이 그 앞으로 나아온다고 선포한다. 이 땅은 과거 백년 훨씬 이전부터, 새벽이슬이 대지의 산천초목을 흠뻑 적시듯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새벽이슬처럼 일어나서 아침이슬 같이 사라져 버렸다. 저들이 흘린 붉은 선혈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아직껏 우리의 땅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북에는 우리의 형제요 피로 맺어진 겨레가 처절한 기아와, 인권이 짓밟혀져 있기 때문이다. 광복 七0年의 아침, 남과 북으로 나뉜 조국의 대지를 새벽이슬 같이 흠뻑 적시는 청년들의 평화의 행진은 이미 시작된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8-13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0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은 자신이 신에게 바치길 위해 작곡한 NO.9 교향시를 친히 연주하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이제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비록 청각기능을 모두 상실하여서 듣지는 못하나, 친히 그의 손에 지휘봉을 잡았던 것이다.“환희여! 환희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모두 정열에 흠뻑 취해/ 빛이 가득한 지성소로 들어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놨던 자들을, 당신의 신비로운 힘이 결합시키도다!/ 당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드리운 곳에 모든 인간들이 형제가 되도다!/ 위대한 하늘의 은총을 입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인의 따스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의 환희를 마시라...,”“환희는 입맞춤,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조차도 환희를 맛보고,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태양이 광활한 하늘의 궤도를 즐겁게 날듯이,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형제여, 그대의 길을 힘써 달리라/ 모든 사람들은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이여 입 맞추라!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억만 인들이여, 엎드리어 경배하라! 온 세상이여,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라!”베토벤은 연주석에 숨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성공리에 교향시 연주를 마친다. 그의 교향곡 NO.9을 듣는 청중들은 감동과 선물을 이미 신으로부터 풍성하게 받아서인지,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흘러내리고, 왕의 가슴에도 짧은 시간이긴 하였어도 오래간만에 평화와 기쁨의 기름부음으로 가득히 채워졌다.한 지인이 지난해 정초에 어느 예배당에서 찬송을 드리는 중에, 동영상 같은 장면을 잠시 보았다. “통일 군(群)이 바로 성루 앞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기도할 때마다 멀리서 가물가물하게 보이던 행렬이었는데, 이제는 선명하게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성으로 들어오려는 군대의 행렬과, 드높은 깃발들이 펄럭이는 가운데, 줄을 지어서, 도성을 향하여, 군대가 행진하여, 도성의 열린 문을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후, 저가 예배당에서 새벽 두시 즈음에 결코 잊힐 수 없는 동영상을 거듭 보게 되었다. “황토 빛이 아침 햇살에 밝게 비취는 십차선 즈음 되어 보이는 신작로로, 북쪽 언덕에서 남쪽을 향하여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는데, 어떤 부인은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또 다른 손에는 아이를 붙들고, 어떤 이는 지게에 짐을 한껏 지고, 어떤 이는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어떤 이는 리어카에 짐을 가득하게 싣고서 아랫길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거대한 행렬이 밀려서 밑으로 내려들 오는데, 얼굴들이 저마다 잔치 집에 가는 양 함박꽃이 활짝 피듯이 웃음들이 얼굴에 가득하였는데, 마치 성소에 오르는 이들 같았다. 이러한 광경은 70년 전, 8.15가 되던 날과 다르지 않았다. 이 땅에 다시금 환희가 찾아온 것이었다.”“사람들이 북쪽 언덕에서 나타날 때에 하늘에서 베토벤의 웅장한 교황시가 연주되었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함을 입은 자로다! 하였다.” 이 같은 장면은 마치 우리 민족의 통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임을, 우리의 가슴들이 저마다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리라.베토벤은 그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 줄을 인식하면서 그의 하나님께 송영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시간이 꽤 걸리긴 하였어도, 그의 마음에 전심으로 신께 바치려는 송영은 비로소 열매를 맺어 교향시 NO. 9 을 완성하였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땅에 살고 있는 온 인류와 피조물들이, 가혹한 역사의 현실에서, 치유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 소외되어 있음을 실감하였다. 상처와 분노와 미움으로 인해서 질곡이 깊어진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인해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리라. 베토벤이 하나님께 올리는 송가란, 송가 자체가 아니라 송가의 내용이 이뤄짐으로써 비로소 송가가 되는 찬미였다. 인류와 피조물들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기쁨을 가득히 안고서, 영광이 가득하게 빛나는 지성소로 들어가,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주님께 경배하는 것이 그의 송영이었다.8.15 경축 70주년을 맞이해서, 교회들이 서로 모여 자신들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본뜻을 다시금 깨닫고, 몸가짐을 바르게 세우느라 열심들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릴 찬송이란 진정 무엇일까? 광장에 모여서 서로 포옹하고 입 맞추며 찬양을 올림도 마땅할 것이지만, 통일을 올려드림으로써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이 되지 않을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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