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실시간뉴스

실시간 영성논단 기사

  • 성육신한 예수교회-46
    한 장로교단이 총회에서 ‘다시 거룩하기’의 표제를 내 건지 벌써 6개월을 넘겼다. 이 교단의 한 목회자가 교단이 내건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인이 되신 오병수 목사님의 꿈을 꾸었다. 겨울인 듯, 목사님께서는 여느 때 같이 외투를 입으시고 모자를 쓰시고, 교역자님들의 모임에 가르침을 주시려고 강사로 오신 것이었다. 주최 측에서 오 목사님을 반가이 맞이하며 강단으로 안내하여, 옷과 모자를 목사님 옆에 잘 정돈하였고, 말씀 강론이 시작되었다.오 목사님의 첫 번째 처녀 목회는 1943년 요동벌의 요양(遼陽)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터이라서,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수난은 피해갈 수 없었다. 오지의 한 교회의 교역자도 일제에 붙들려간 지 오래라서 교역자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 교회에서 만주신학교 학장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전도사를 보내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오 목사님께, 학장님으로부터 그 교회로 가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신도들을 치유하라는 것이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지 불과 일 년이 채 안되어서 담임교역자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학장님께 기도하며 결단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고서는, 밤새 예배당에서 주님 앞에 엎드리었다. 그러자 주님으로부터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을 들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서는 북간도 오지의 한 교회에 부임하신 이후, 조국의 광복을 경험하셨고, 성북교회에서 은퇴하시기 까지 초지일관 ‘그리스도 중심에서의 삶과 사역’에 전념하시었다.‘네가 내안에, 내가 네 안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울 신학에서도 들어난다. 모든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찾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형된 세속적 가치관에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짐을 ‘자연인’이라고도 하거나 ‘육적인’, 혹은 ‘육에 속한 사람’ 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성향을 보면 그 집안에 내려오는 가치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알코올 중독은 뇌와 유전자에도 각인이 되어서 후손들이 이 질병의 영향을 받게 되듯이, 사람의 육적 성향과 기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경에서 자신의 부모에게서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살던 고향 친척에게서 떠나서 낯선 땅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여간 고충이 뒤따르는 삶이 아니었다.바울은 자신의 율법적인 기질과 성향의 프레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가 학문적으로나, 서기관 급의 숭배를 받는 특별한 직위에서, 전통적인 사회적 관습과 기존의 가치에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속한 가문이나 그가 가진 학문적 토대가 흔들린다거나 무너진다면, 그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신앙과 가치관이 충돌하였던 첫 번째 접전은, 헬라말로 소통되는 유대 기독교인 집단의 지도자 격인 스테반과의 만남에서 발생하였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가장 위험한 집단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동력을 가장 래디컬하게 이어받은, 헬라 말을 하는 스테반 기독교인 집단이었다. 저들이 갖게 된 가치관과 신앙은 유대 정통에서 너무나 멀리 나아간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 수장 격인 스테반을 민중재판인 돌무더기로 척결하고, 기독교인들을 잔멸하였다. 저는 지방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의 싹을 잘라내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판단하여서, 이제는 지경을 넘어 다른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까지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 거리까지 진격한 것이었다.그런데 바울은 거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비추임 받으면서 성령의 지식을 얻게 된다. 사람을 자신이 살던 집단에서 떠날 수 있게 하는 운동력은, 경전에서는 모두 위로부터 오는 계시적인 지식으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도 영광의 하나님을 뵐 수 있었기에 갈대아 우르 땅과 하란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비 집과 친척과 문화와 종교를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보좌에 앉으신, 그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나사렛 예수의 영광을 본 것이었다. 바울은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이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고, 모든 죄 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 것이 바로 예수로 인해서 얻은 새 생명이며, 예수 안에서 시작되고, 예수 안에서 마쳐지는 새로운 삶이었다.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를 ‘말씀 가운데로 나아간다’로 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이라 함은, 곧 ‘거룩한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림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4-20
  • 성육신한 예수교회-45
    A.D. 2세기까지 내려오던 유대인의 미쉬나 중에는 63개의 항목으로 된 “피르케이 아보트”(Pirkei Avot)가 가장 유명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Ethics of the Fathers”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미쉬나의 1장 2항에 보면 이 세상을 받쳐주고 있는 기둥이 ‘토라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의 예배와, 친절한 행실’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둥이 서로의 중요성이나 가치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시대마다 어느 시기에는 성전 예배가 주를 이룬 적이 있었고, 성전이 붕괴된 이후에는 ‘토라’가 중심이 되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율법사나 서기관들이 제사장들과 쌍벽을 이루며 그들의 세상을 받쳐 주었는데, 역시 금전이 많이 흐르는 은행과 금고 역할을 하고 있던 성전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이나 성전 파수대장이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리더십은 한 사회 안에서 창끝과 같이 서열을 다투는데, 오늘날의 풍토에서도 비쳐지고 있듯이, 금전이 많이 흐르는 대형교회가 순위에서 가장 앞서고, 복음을 맡은 신학교의 교수들은 두 번째 순위에 있다. 만일에 복음을 맡은 자들이 윤리적 권위나 가르침의 권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적 권위는 가장 앞설 것이다. 그러나 사회 윤리적 기초가 되는 ‘토라’의 가치가 중요도에 있어서 성전에서 돌아가는 시스템보다 뒤떨어지게 되면, 그 사회는 오염되기가 쉬울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 많은 교회들이 도시 안에 포진하고 있고, 매일 같이 예배가 드려지고 사람들을 정결하게 씻기고 거룩하게 하지만, 오염되고 있는 속도와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였음이다.교회가 주축이 되었던 세상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복음(성경)’을 앞세운 것도, 교회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질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하고 세속에 물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교회의 제도가 모든 일에 있어서 앞서있다 보니,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의 횡포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성경을 뜯어 고치는 일들과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들이 빈번(頻繁)하였다. 이러한 경향들은 교회의 중요성을 우선시하고 성경해석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풍토가 고쳐지질 않다보니, 결국에 가서는 복음은 항상 차선책이 되었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다가 구색을 맞추게 되었고, ‘교회론적인 복음’이 되었다.지금의 한국교회가 ‘다시 거룩하기’를 내 걸고 갖은 애를 다 쏟는다. 하지만 이러한 슬로건이 교회주의를 우선시하는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요식행위에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비쳐질 때에, 겉으로만 거룩해지는 모습으로 치달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량의 소나기가 퍼부었어도 땅 속으로는 스며들지 못하는 현상으로 결과가 올 수 있는 것이다. 사막에 비가 내리면 상식적으로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 것 같지만, 비가 표면으로만 흐르면서 와디 같은 강을 만들고, 모랫더미가 흘러가는 것이다. 요즈음 신학자들이 교회의 강단에 서는 빈도도 잦아졌다. 정말 그 학자들에게서 순수한 복음이 선포된다하기 보다는 교회론적인 복음으로 포장되기가 쉬울 것이다.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는 지식인은 교회로부터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서 제한되기 때문이다.주후 80년경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된다. 이미 그 시기는 교회가 50년의 역사를 가진 때였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빌론 음녀와 함께 치부되고 있었다. 계시록 한 장 한 장이 펼쳐지면 심판의 막이 오르고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은 왜일까? 계시록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좌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고, 열두 가지의 열매를 맺는 강가에서 산다. 진정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교회의 모습이다.그런데 계시록이 기록된 지 10년 후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한에게서 재설정되어 세상에 나온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이면 누구든지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바로 그가 하나님 아들로서의 권리를 취득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론적인 개념에서 이동되어 개개인의 삶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교회 바깥의 개개인의 삶에서는 효율성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오늘의 교회는 생수가 흐르는 교회가 되든지, 신도 개개인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4-14
  • 성육신한 예수교회-44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한 임금이 잔치를 배설하였는데, 갑작스레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벽에 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 해괴한 사건이 일어나더니 다음날 임금은 폐위되었고, 그 국가에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었다. 한 선지자가 이 짧은 문장을 해석하였는데, ‘너를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구나!’ 라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집트 신화에도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이 땅에서 마치고, 사자(死者)들이 가는 곳의 문턱에 이르면, 심판관들이 있고, 그 곁에는 계측기가 있어서, 저마다 이 계측 과정을 피해 갈 수가 없다. 죽어서 온 자를 저승사자가 저울에 달아, 질량이 부족하게 되면, 곁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시커먼 짐승에게 즉각 잡아먹히고 만다. 우리 국가에서 권력의 자리에 오른 이들을 보면 저마다 힘든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 온갖 저울질을 권력자의 임기 초기부터 들이대는데, 마치 저승사자에게 붙들려 심판대 앞에 선자처럼, 언론을 비롯해서 정적들의 저울질로 피로도가 쌓여간다. 만일 이것이 이 땅의 피할 수 없는 통과제례라 한다면 소홀히 여길 일이 아닐 것이리라. 대통령 임기 초기마다 이 나라에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는데, 대구 지하철 참사나, 숭례문 방화사건 같은 것들은 불만 세력이나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병적 증상으로만 넘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이며,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이나, 세월호 침몰 사건은 우리 국가 시스템의 아주 취약한 점이 그대로 노출된 사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취급하는 방법들마저도, 언론을 비롯해서 사회학자들이나 기업가들도 건설적이거나 지혜로운 방안들을 전혀 내어놓질 못하였다. 단순히 한 풀이로만 끝이 나는 듯하다. 우리가 매해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서 치러야 하는 비용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출혈을 야기해서 결국에는 국가적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될 수 있다. 그간 우리 국가의 해결책들은 이성적인 방안이라 하기보다는, 아주 질 낮은 4-5년짜리들의 임시방편으로 해결되었을 뿐이었고, 모두가 권력을 쟁탈하려는 세력과 조직의 배만 불려주었을 뿐이었다.세계역사는 고사하더라도, 우리 국사에서 권력자에게 들이 닥치는 법칙들이 하인리히 법칙 같은 필연적인 통과제례처럼 굳어지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들어서게 되는 정부도 이런 통과제례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만일 지난 정부가 의로운 참모들을 많이 세워서, 이와 같은 역사적인 리듬이나 성향들까지 미리 예측하고 준비를 했었더라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참변은 겪질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성수대교가 붕괴 되었을 때에도 우리 국민들은 해외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어찌할 바 몰랐는데, 이번에는 또 어떠했을까? 정권을 맡은 책임자 몇몇을 척결한다고 모두 되는 것일까? 전혀 아닐 것이다. 우리 국가의 시스템이 취약하였음을 모두 들어낸 사건이기에,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도 국가적 손실은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을 보면, 저들은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아주 중요한 침묵의 시간들을 보냈다. 먼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은 7일간 성소를 떠나질 못했다. 만일 그 곳을 떠나게 되면 그는 죽음을 치러야 했다. 모세는 사십일을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름부음을 받으시고는 40일을 광야에서 보내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모두 이겨내셨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능력이 충만하신 가운데에 갈릴리로 사역에 임하셨다. 아주 중요한 시간대이다. 짐승들 가운데는 삼칠을 지내고 젖을 뗀다. 병아리를 품을 때도 품어주는 시간이 차야 생명이 태동된다. 솔로몬을 보면 기름부음을 받자 기브온 산으로 가서 일천제를 드리며 성소에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비로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품을 수 있었다.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모든 국민들이 거짓말에 휘둘리고, 검증되지 못한 공약들에 모든 시스템과 가치관들이 치아가 솟구치듯이 흔들린다. 벌써부터 교수들마저도 줄 대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시장(市長)에게 줄을 선자들이 시립대학들과 공공지역들을 점령했다더니, 점령군 낙하산들이 하늘을 덮고 내려오듯이, 그런 류들이 대한민국을 덮어버리는 것일까? 혹시나 공직자들이나 군경마저도? 이렇게 모두가 흔들리다 보면 견고해 보이던 진리의 말뚝들은 뽑히게 되고, 지탱해 주던 사회적 신뢰도는 모두 쇠약해져서 바다뿐 아니라 땅마저도 대한민국을 토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4-01
  • 성육신한 예수교회-43
    예전에 우리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느낀 점들을 미국에 보낸 서신들을 보면, 제임스 스카스 게일의 ‘코리아 인 트랜지션’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는 지식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 아마도 이는 유교에 영향을 받아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등의 슬로건이 생긴 것 같다. 그도 그렇듯이 적어도 과거에 합격해서 공무원 초급인 ‘진사’ 정도는 받아나야 양반 행세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인들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한글로 번역하질 아니하고, 한문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글과 지식을 특별 계급만이 독점하여 온 것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형편에서 나라가 기울고 일제에 국가를 찬탈 당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성경과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권서인(勸書人)들로 보급하고, 교회에서는 앞장서서 한글을 가르쳤다. 이러한 영향은 영국교회에서 내려오는 흐름에서 비롯되었다.영국에서도 틴데일을 비롯해 위클리프 등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나, 귀족에게 마저도 보급되질 못하도록 읽는 것을 금하였고, 읽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래서 영국에서도 영어가 보급된다든지, 성경의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영국에 부흥이 일어나면서, 휫휠드나 웨슬레가 교회당 바깥에서 설교 집회를 시작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와 설교를 듣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교회당은 대체로 특별한 직에 있는 이들의 가족들마저도, 예배당이 좁아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고, 마당에서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오늘의 교황이 광장에 모인 신도들에게 창문 테라스에서 몇 마디 하는 것은 예배당에 들어오질 못하는 이들에게 그나마 서비스하는 요식행위이다.그런데 과감하게도 상식을 깨뜨리고 야외천막에서 설교가 서비스되다 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성경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섹스피어 시대에는 국민들이 글은 몰라도 도시마다 3000-5000석의 극장들이 세워 졌는데, 연극을 듣기 위해서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글을 모른 터이라서 연극에서 주고받는 대사를 듣고서야 ‘자유와 책임’에 관한 지식을 넓힐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기위해 극장으로 간 것이라기보다는 듣기 위해서 극장에 모였는데, 매번 일 년에 여러 편의 섹스피어의 작품이 공연되었기에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도록 해주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조지 휫휠드와 요한 웨슬레는 모여오는 군중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히기 위해서 당시 방치된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 날의 초등(국민)학교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교회와 교회당 옆에 고아원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세웠는데, 이로 인해서 지식이 서민들에게 이동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는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거의 신학문을 접한 서민 출신들이었다. 우리 국민에게 한글이 전체적으로 보급된 것은 오로지 교회에서 세운 성경학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 학자가 세종 이후에 찾아 볼 수 없다가, 선교사들이 한글을 자국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한글 문법책이 보급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글학자들이 비로소 나오게 됨은, 역사학자들이나 교육을 하는 이들이 여태껏 숨겨온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다.이 땅에 한글과 성경이 보급됨으로서 새롭고도 스마트한 문명을 이룩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앞선 민족이 있는데, 저들은 다름 아닌 유대민족이다. 저들은 태어나자마자 모국어를 어머니의 무릎에서 자국어와 글을 습득하고, 자신들의 경전인 모세 오경을 3살이 되기 이전부터 외워서, 그들이 사는 나라가 어느 땅이든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시민이기에 앞서서, 하나님나라시민으로서의 기반을 이미 갖추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모세로 자유를 얻은 이후부터는 모두가 모세의 오경을 읽고 낭독하고 토론하고 외운다. 저들이 외우는 경전 중에 ‘레위기’가 있는데, 이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안내서이다. 저들의 성전은 붕괴되었고, 자국에서 흩어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성전에서의 제사법을 외우며 토론한다. 이는 말씀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지키며 걸어야 할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이후, 지성소의 휘장은 갈라져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가까이하게 되었건만, 우리의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외우지도 않는다. 지성소에서 매일매일 살아가야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 하는 크리스천들에게서 지성소의 예법이 천시되어 온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3-23
  • 성육신한 예수교회-42
    예전에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얼마나 크게 불이 번지든지, 강원지역에서 일어난 불길이 바람을 타고서 지경을 넘어 접경지역으로 불이 넘어오게 되는 형편이 되었다. 이 시점에 강원 도지사에게서 해당지역 도지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 내용인즉, 내일쯤이면 강원도의 산불이 그 도로 넘어가게 될 터이니 ‘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난 불을 그가 책임을 맡은 도에서 잡아내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갑작스레 생긴 것이었다. 도청에서는 불을 받을 준비를 하느라 갑작스레 긴급 상황실이 설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해당지역 도지사는 아내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밤을 지새우며 엎드리었다. 그러고 나서 아침 일찍이 재해대책 본부로 들어왔는데, 또다시 강원도 도청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이제는 불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지나간 밤에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지만, 바람이 힘을 잃고 잦아들어서 불을 모두 끌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야훼 하나님께 엎드린 기도가 상달되어서 강원도에 일어난 불이 잠재워진 것이었다.요즈음 우리나라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면 심상치가 않다. 국민들 모두가 불안해하는 요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한에서 사사건건 터지고 있는 일들이며, 중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수위를 높여가는 압박과, 일본의 우향우 행보는 웬만한 지혜나 능력으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정황이 된지 오래이다.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사정이 누구하나 섣부르게 다룰 수 없는, 커다란 힘이 표면적으로 대치되어 온 상태이다. 이러한 조국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서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역사적인 경험을 참조한다면 1940년 5월 10일에 영국의 수상이 된 처칠에게서 그 해법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처칠이 뒹케르크 만에서 두개의 독일군단에게 포위된 자국 군과 프랑스 및 벨기에 군대 338,000여명을 영국으로 무사히 철군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영국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게 뒹케르크에서 포위되었다는 정보를 접하였을 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영국의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뒹케르크 만은 해수면이 얕은데다가 모래톱이라서 그 많은 병력을 실어 나를 규모의 배를 근접시키기도 어려웠고, 그 많은 병력을 짧은 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영국으로 퇴각시킬 방안이 전무하였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로지 한 가지 방안에 집중하였다. 모든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여주기를 라디오방송으로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5월 26일에 시작된 철군 작전은 6월4일 완전하게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서 영국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철군하는 지역에는 해가 나 있었던 반면, 독일군대 지역은 지속적으로 비가 내려서 탱크와 군대가 이동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9일 동안에 걸쳐서 구축함을 비롯한 860여척에 달하는 아주 작은 다양한 선박들까지 모두 동원되어서, 총 338,226명의 군사(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가 탈출에 성공하였다.우리가 역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지혜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 의해서만 비롯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역사나 여호수아서의 역사들이 순전히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오늘 우리의 강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순순한 인간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힘일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 단순하게 우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맞질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땅과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강림하여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작금의 국내외의 사태를 보면서, 자칫하면 예전처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와 미국군대 할 것 없이 이 땅에 들어와 잔치를 벌이려는 기세이다.허지만 이 땅의 궁극적 주인은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이 땅이 토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공동체를 더럽혀온 역기능적이고도 부정한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이 세력들을 딱히 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청 앞 광장에 표면화된 혼탁해진 물길이다. 이 오염된 세상이 정화되고 질서가 잡히려면 필연적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이 있어야 하리라.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능력을 붙들 수밖에 다른 방안이 없으리라. 전에도 책임을 진 지도자들이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여 왔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밤과 낮으로 엎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3-16
  • 성육신한 예수교회-41
    오늘과 같이 우리 크리스천에게 지혜가 필요한 때는 또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말세에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너무나 짙은 나머지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질 않고 분별이 되질 않는다 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한다.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을 살피어 보면, 저들은 경건한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적들의 더러운 계략과 함정에 빠지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고난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지혜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너희는 야훼께 부르짖으라. 그가 너희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알게 하시리라(렘 33:3).”하였다.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하기에 앞서서 그의 교회에 보내는 회람용 서신에서, 고난을 겪는 그의 교회에게 깨우쳐 주기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겠느냐?’ 하였다. 수천 년 동안 믿음의 행보와 출애굽의 경험과 바빌론 포수생활을 경험하였고, 국토를 빼앗긴 상실감이나, 주권을 잃고 남의 나라의 속국으로 살아온 경험을 하였던 터이라서 그런지, 저들이 구하는 바가 단지 ‘지혜’ 하나로 표현된 것을 보아서, 지혜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며 바라며 사모해야 할 것이리라. 몇 년 전에도 유대 랍비의 강론을 경청한 적이 있는데, 말라기에서의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붓지 아니하는가 보라!’ 하신 선포가 ‘지혜’를 지칭하는 것임을 보면, ‘지혜’란 이스라엘 문학과 삶에서 가장 근저에 자리 잡은 가치인가보다.바울은 자신감 있게 고린도지방의 교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주님은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라고 했다. 뾰족한 창끝처럼 무엇이든지 뚫고 나가려는 저의 신앙의 의지가 확실하게 돋보인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적인 경험에서, 우리는 에스더 서신에서도 어둠의 계략과 하나님의 지혜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려고 온갖 계략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하만에게, 미리 아시고 넉넉하게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가 아하수로왕의 꾸밈이 없는 마음에 전이된다. 이날 모르드개는 높여지고, 하만은 장대에 매어달리고 말았다.오늘 날에도 법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항상 상기되어온 이야기가 있다면 솔로몬의 재판 판결에서 나타난 지혜일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어좌에 앉아서 정치꾼들의 농간에 좌우되질 아니하고, 치우침과 두려움 없이 국정을 잘 다뤄 갈 수 있었던 담력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마도 저는 필히 기도에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저가 어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낳아준, 한때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의 활략도 있었겠지만, 그의 아비 다윗의 영적 지지와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아비인 다윗도 역시 환란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사는 지혜로운 성군이었다. 솔로몬의 노랫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아비의 사랑을 입고, 배움을 받았는가를 엿볼 수 있다.다윗의 성장 과정에서도 보면 그의 주변도 역시 어두운 면이 짙었다. 사무엘의 눈에 들기까지 그는 집안에서 변두리에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였고, 항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서 있어서 백전백승의 사람이었다. 그가 이십 세가 채 안되었을 적에 골리앗을 쓰러트린 그 장면은 그의 뇌리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질 않았겠지만, 항상 그의 품에서 사랑을 받아 온 솔로몬의 가슴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약관의 나이에 대담하게 왕권을 거머쥐고, 정적들의 눈빛도 아랑곳하질 않고, 무엇보다 먼저 기브온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 나아가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는 마침내 이날 하늘로부터 나라를 통치할 크나큰 지혜를 입는다.이방인으로서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하며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그 역사적 시기가 깊은 어둠에 묻혀있던 때이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가 팽배한 흑암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선물로 내어놓으신 것이다. 성령이야 말로 종말의 시간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지혜의 선물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누구이든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 땅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법을 강같이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3-03
  • 성육신한 예수교회-40
    우리가 누가에게 고마운 것은,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행전에서 저는 교회의 주도권을 성령께 양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에 따라서 호흡을 맞추어 나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천국복음과 사역,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복음과 사역을 그가 기록한 덕에, 성령께서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는 히브리적인 문화와 율법적인 교회를, 헬라적인 문화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로 건설할 수 있었음이 오직 성령의 권능과 역동적인 사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증거 하였다.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그가 율법적인 제도와 전통에 갇혀서 주검 가운데 있던 유대적인 교회를, 그리스도론적이며 성령론적인 교회로 헬라문명에 컨버전 할 수 있었던 비결과 지혜를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을 역동적으로 이끌고 가시는 분이 성령이셨듯이,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고 갈릴리로 인도하고 계신 분이 성령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이긴 해도, 만일 누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성령의 부어주심과 오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건설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교회, 물이 샘솟아서 광야를 적시는 이야기는 에스겔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은 누가에게서 이다. 에스겔서에서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주검 가운데에 있는 해골들이다. 그런데 이 해골들이 서로 연결되어 골격을 이루고 군대가 되어서 잃었던 도성을 되찾고, 더럽혀진 땅의 수치를 벗겨주고, 다시 거룩한 도성을 세우게 되는데, 이와 같은 역사는 오로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었다. 성령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데, 이 새로운 교회는 성령의 바람과 복음의 선포로 그 기원이 열리는 것이다. 예전만 있었던 정적인 교회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서, 광야에 강줄기를 대고, 어부들이 살게 되는 세상이 현실화 되는데, 누가의 사역 현장에서 비로소 이뤄지기 시작 한 것이었다.누가행전에서 성령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성령이 임하시고 운행하시기 시작 하신 곳은, 성소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하늘에 좌정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불에 타나 살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라는 사람도 거룩하게 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렇게 되자 노예민은 자유민이 되어 거룩한 민족으로 태동된다. 마가의 집 이층에 모인 120여명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예수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다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자, 성령께서는 스데반이나 빌립집사를 체인지업 하여서 복음의 동력에 원심력을 갖게 하신다. 어디 그뿐이랴. 생각 밖의 율법학자에게 성령이 부어지시니, 저가 온 헬라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 교회를 확장한 것이었다.교회란 제도적인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결코 사제나 목사가 아니다. 성령이 교회로 교회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침체를 어떻게 벗어나고, 다시 새롭게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 이는 누가에게 해답이 있지 않을까? 예루살렘 교회가 지역에 한정되어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예루살렘 바깥 해변의 무두장이네 집에 묵고 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찾아 오셨다. 베드로는 레위기서의 정결 규례에 묶이어서 바깥세상으로 복음을 흘려보내질 못하고 있던 터이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베드로에게서 복음이 외부로 흘러가는 것은 불가해 보였다. 그러나 누가는 임신된 마리아를 요셉에게로 데려올 때에 천사의 조력이 있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 사자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너는 더럽다고 하는가?’라는 논쟁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이란 그의 친구들과 노비들도 모두 포함된 이방세계임을 시사한다. 베드로가 마지못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 집에 내려오시는 것이었다. 성령은 교회나 지도자들에게 길들이시질 않으신다. 누가가 선포했듯이, 우리가 성령께 민감하려면, 그가 선포한 ‘너희 각 사람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한 바대로, 필히 해야 할 일은 회개일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23
  • 성육신한 예수교회-39
    이스라엘 미드라쉬에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눈 성소의 휘장을 1m 간격으로 휘장을 겹으로 드리워서, 지성소로 제사장이 들어갈 바깥입구를 남쪽에 만들어 놓고, 휘장 통로를 지나서, 북쪽에 닿으면,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지성소의 휘장을 열어 놓았다. 아마도 처음에는 휘장이 하나일 것으로 설명되다가,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오늘까지, 한 번도 제사를 드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랍비들이 모여서 매일 같이 토론을 하다가 만들어진 궁여지책으로 나온 설명으로 보인다.하스모니안 가의 한 랍비는 필자에게 설명하기를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 휘장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환대를 받고, 하나님이 열어주신 휘장 안으로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 랍비의 설명이 더욱 경전의 전통과 일치되는 것은, 지성소 안에는 본시 등잔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기에 물리적인 방법으로 밝힐 수 있는 도구가 없는 터이었다. 오로지 사면이 막혀있는 방에 율법 궤와 그 위에 속죄소만이 있어서, 사제가 지성소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물리적인 빛은 없이, 영광 가운데에 계신 야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이다.랍비들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시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장하여온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으면 그 제물 위로 파리가 달려들질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제물에 불을 붙여야하는 제단의 불에는 비가 오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제단의 불 또한 화력이 다른 불들과는 달라서 제물들이 깨끗이 살라졌으며, 셋째, 제물들이 단위에서 불과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리는 동안에는 바람의 방해가 없이, 곧바로 그 연기가 하늘로 올려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소에서는 떡 상에 진열된 떡도 항시 신선도가 유지되어, 한주 후에 새로운 떡을 올리기 까지는 금방 구워낸 음식 같아서 사제들이 먹는 데에 신선한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에서는 속죄소 위에 천사 두 분이 마주보고 날개를 펴서 법궤를 드리우고 있는데,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진노하시게 되면, 서로 마주보며 율법을 읽고 계시듯 하던 얼굴이 서로 마주하질 못하고 다른 곳을 향하였다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이 되면, 미리 한주 전부터 성전에 올라와서 자신을 성결하게 관리하였는데, 혹시 첫 번째 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자가 열 분까지도 있었다 하니, 이렇게 자신을 성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제단의 불이며, 떡상위의 열두 덩이 떡들이며, 어느 하나라도 소홀이 되어 진 바가 없었다면, 야훼 하나님도 자신의 백성들을 만나실 채비를 단단히 하시질 않았겠는가?성소 바깥에서부터 온 땅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날이 되면, 어린아이까지 하루 종일 금식과 성찰은 물론이며, 속죄의 제물로 준비된 양들이며, 제사에 참여하려는 참배객들이 얼마나 많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던지, 요아힘 예레미아스의 견해대로는 사람들이 몸을 돌릴 수조차도 어려웠다고 하였는데, 성전 가까이에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붐볐던지 창끝으로도 틈을 뚫을 수 없을 만큼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엎드리어 경배를 드릴 때에는 공간이 넉넉하여 졌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 무너진 이후로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들로 성전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해내려 오는 성전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명절들과 유월절이나 속죄일을 직접 보고 참여하며 경험한다면 공감을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여 불러내시고 성별하셨다는 사실이 매일 매일 현실이 되어서,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 앞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하나님을 항하여 반듯하게 서서 나아가는 것이 나날의 생활이 된다면, 그 열매 또한 확실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들의 종교와 삶이 하나가 되어서 나타나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노벨상을 타는 이들의 점유율이 30%에 머물러 있고, 자신의 동족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들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돈이 없어서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가 없고, 학비가 모자라서 학업을 포기하는 자가 없으며, 지속적으로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이리라. 저들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함에 있어서 미련과 게으름을 피우는 것 외에는, ‘거룩’을 내걸고 행진하는 우리로서는 모두 본받아야 할 것 뿐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09
  • 성육신한 예수교회-38
    예수님이 하루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셨다. 씨와 관련해서는 창세기부터 기록된 바이지만, 씨란 사람에게도 해당되어온 이야기이다. 역대상 17:11의 씨와 관련된 스토리가 바로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씨를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300년 역사에 다윗만큼 잘 알려진 왕이 없다시피 한데, 그의 허리에서 모든 인류가 기대하는 인물이 태어나게 될 종자는 과연 어떤 종자였을까? 인간의 바람과 역사는 계속되어 진화하는 마당에 딱히 탁월한 씨앗이 관연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다윗의 허리에서 나오는 씨앗은 하나님나라를 견고하게 세우는 사역을 할 것이며,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어지게 되는데, 그의 통치가 영원히 견고하다고 하였다. 오늘과 같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안개와 연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세상이 앞날을 예측 못할 정도로 혼탁해지는 상황에서, 이런 좋은 씨앗을 구할 수만 있다면 겨울이 지나가고 다가오는 봄에는 땅을 더 깊이 기경하여 조심스레 뿌려볼만 할 것이리라.랍비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 중에도 씨앗 이야기가 있다. ‘네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자는 좋은 밭이 못되고, 이런 밭에 씨앗을 뿌린다면 그 씨앗의 열매는 소출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것도 네 것이고, 네 것도 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밭은 옥토와 같아서 많은 추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랍비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도 하신 바이고, 마태 공동체를 비롯해서 복음을 듣고 익히는 교회에서는 항상 가르쳐온 바이다. 가르침대로, 한사람 한 사람의 토질을 개량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하는데, 커다란 세상의 기후와 토양에서 해마다 파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국제열대농업연구소가 아프리카의 식량 해결을 위한 옥수수 품종 개발을 위해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연구진들도 지쳤을 뿐 아니라, 국제 옥수수 밀 개량 센터(CIMMYT) 아프리카 식량 조달을 위한 교잡종 옥수수 개발 정책이 이미 바꿔진 때에, 한국의 김순권 박사가 아프리카연구진에 합류했다. 옥수수란 냉대식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같은 더운 지역에서는 본시 적합하질 못하였으나, 그래도 옥수수만큼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서부지역도 옥수수로 식량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뒤늦게 연구진에 합류한 옥수수 김박사는 동료 연구진과 당국으로부터 여간 핍박이 아니었으나, 연구비의 절반이 준 상태에서도 옥수수 종자 개발을 해 보겠다는 김박사의 의지는 꺽질 못하였다.김박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연구실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이후에도 연구실에서 지냈다. 옥수수 품종개발을 위해 밭에서 무릎을 꿇는 일과, 엎드려 밭에 입 맞추는 일들은 흔한 일들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지성소란, 다름 아닌 연구소와 품종을 개량하는 밭이었다. 하루는 꿈에 옥수수를 결혼시키려고 주례를 서는데, 그 옥수수가 열대지방의 품종 1368과, 미국에서 가져와 개량한 9071품종이었다. 악마의 풀로 알려진 ‘스트라이가’를 이기고 자라나는, 적도지역의 식량을 해결 할 품종의 옥수수가 탄생된 것이었다.요즈음 우리나라는 가장 왜소해지고 허약해진 반면에, 우리 주변국들은 사상 최대로 강한 나라들이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은 역대 가장 커다란 쓰나미를 가져올 요인들을 이미 갖춘 것이다. 이 뿐 아니다. 세계전쟁의 요인들이 중동과 유럽에서 감소된 반면, 남중국해와 동북아에서 긴장이 증가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세계 정황이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우리 국가와 교계는 아무런 대책을 갖추질 못한 채 절제와 지혜는 온데간데없이, 당쟁과 헐뜯기와 더러운 추태를 서슴없이 하며 새해를 맞이한 것이다.고대 희랍의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이 모두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바빌론 포수 후에 아람어역 경전을 편집하였고, 그 이후 흩어진 유대인을 위해 희랍어로 칠십인역을 내어 놓더니,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지중해 야브네에서 구약을 재편집하여 경전화했다. 이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에 파종할 새로운 품종을 내놓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저지하려는 제자들에게 ‘한 알의 씨알이 그대로 있으면, 할 알 그대로이고, 한 알의 씨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을 마치시고는 십자가로 향하여 나섰던 것이다. 요한은 격동하는 새로운 세상에 “죽어서 다시 산, ‘좋은 씨앗’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03
  • 성육신한 예수교회-37
    새해가 되었으나 교계마저도 침울함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교계는 연합하는 데에 따른 불편한 것들을 정리하려고 애쓰는 듯하고, 한 교단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거룩’을 슬로건으로 들고 나선 것이다. ‘거룩’에 관하여는, 구약의 시대에 성소에서 경험하며 훈련되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학습하며 훈련되는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성소와 지성소의 정결규례가 오늘에도 시청각으로 경험되어질 수만 있다면, 어렵긴 해도 우리가 거룩하여지는 데에 한결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신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거룩함에 근접하려면, 제일 먼저 기름부음을 받은 교역자의 본보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럽혀진 요인은 신도들이라기보다는, 성소에 매일 출입하는 사제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도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가까이 함에 있어서, 복음서대로 하였다면 보다 쉽게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교회의 권위와 제도가 중간에 다리 역할을 자청하는 바람에, 가톨릭 같은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같은 제도에서 비롯된 폐해를 피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어둡게 된 데에는 우리 지도자들의 욕심이 지나치고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에 부흥이 시작되고 있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도들의 발 앞에 많은 것들을 가지고 왔다. 토지 문서도 갖고 왔겠지만, 이런 것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궁핍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 할 수 없었으므로, 공동체의 필요들에 부담을 가진 사람들은 토지를 급하게 팔아서 내놓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발 앞에 수**억을 가져다 놓는 일이 생긴다면, 그 순간 우린 돌아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흐름을 타고 틈새를 노린 한 부류가 있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토지를 팔아서 그 일부를, 그들이 판 토지 대금 전부인양 행세하며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사도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끼어든 마(魔)를 잡아채서 깨끗하게 제거하였다. 아마도 우리 같았으면 불가하였을 터인데, 주님이 빛을 비추시고 계셔서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회 안에서 싸늘한 주검을 맞이하였다. 마치 성소에 다른 불을 들고 들어간 나답과 아비후가 즉각 주검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당면한 시간대나, 나답과 아비후가 당면한 시간대가 거의 비슷하다. 하나는 구약교회가 시작되던 때이고, 또 하나는 신약교회의 출생 시간 때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비슷한 공통점을 갖는 데에는 우리에게 시사 한바가 크다.그동안 한국교회가 놓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교회의 부흥시기에 이러한 부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존 스토트를 비롯한 우리네 초창기 교계 지도자들은 이런 일들을 당면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저들은 당시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욕심을 덜어내면서 바람직한 교회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백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러한 부류에 노출되는 일들이 대표적인 교회들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루가 멀지 않게 매스컴의 표적이 된 교회들은 비리가 들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일반 시민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되도록, 그 미련함을 떨쳐내질 못하였다. 몇몇 교회들이 더럽혀지면서 결국에 가서는 한국교회 전체가 오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한국교회 역사 가운데서 반세기를 목회하면서 경험된 것은, 마치 사사기서의 말기를 보는 것처럼,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저마다 제 뜻대로 살려는 것을 보아왔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례대로 하나님께 나아오질 않는 것이었다. 교회에 들어와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모자 쓰는 일에 혈안이 되고 영악해지더니, 심지어는 거대한 교회 금고에 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천사 같은 위장을 하고 날개를 다는 것이었다.교계가 ‘거룩’이란 플래카드를 요란하게 붙이고 광고를 하는 것은 왜일까? 진정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가까이 하려는 것일까? 민수기 16장에서도 보면 고라가 다단, 아비람 등과 협잡하여 이스라엘 지도자 250명을 끌고 나와서, 저마다 지닌 향로에 불을 두고, 그 위에 향을 올려서 피우며 회막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회막 앞에 섰을 때에, 그렇게 힘 있고, 거룩하고, 위엄 있게 보이던 행렬이, 급하게 공격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불로서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저들이 하나님의 불이 아닌, 거짓된 불로 시위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 아닐까? 야훼 앞에 ‘거룩’을 꾸며대고, 사람의 생각대로 법궤를 길들여 보려고 하는 짓은 아예 그만두시기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1-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