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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심의 가책과 믿음 2
    믿음은 죄를 알게 한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에서 그 존재가 규정되고 그 운명이 결정됨을 알게 한다. 성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그리고 그 밖의 문화 사상 전반에 인간화를 실현하는데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고 역사적 인간으로 사는 그 이면을 성서는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구약, 신약 모두가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구약, 신약이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는 역사의 말씀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구약성서는 출애굽의 해방사이며 신약성서는 역사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지 않았다면 계시나 구원의 역사, 혹은 교회나 믿음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성 때문에 죄의 문제의 해결이라는 모양으로 구원의 섭리는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양심은 자아 중심적 고립이 삶을 파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간의 양심은 유기체적 연계성을 끊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양심은 생명의 끈이 잘릴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양심은 모든 부조화를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삶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이 믿음은 죄를 가진 인간에게 구원의 사실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도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즉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한다. 사랑하면 기쁘고 화를 낼 때에 괴롭고 부정한 일을 보았을 때 분개하고 자기를 희생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에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양심이 이르는 일을 거역하고 배반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힐 뿐 아니라 이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양심이 이르는 바를 따르면 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밝히고 그 힘의 능력의 빛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과 명성은 두 개의 사물이며, 양심은 너희에게 돌려야 할 것이고 명성은 너희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고 함을 알게하며 여기에 톨스토이는 “육체에 꼭 맞는 옷만을 입지 말고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도록 하라”고 하면서 ‘좋지 않는 행동을 숨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자랑하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한다’고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에 따라 제한을 받으며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은 이후에 아무조건이 없이 의롭다함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양심은 이것과 반대되는 믿음에는 죄로 인해 자신을 살펴 크게 회개에 그 비중을 두게 하며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된다.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의 제한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양심의 가책과 믿음’은 사랑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는 나 자신과 하나님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한 방향을 위해 있는 서로가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관계는 믿음으로 유지 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마음의 주인이 바뀜으로 성품과 행실이 바뀌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나타난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나와 하나님을 겸하여 마음,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유지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얻거나 유지 될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은 믿음으로 만 극복된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7-29
  • 맥추감사절의 소고(小考)
    맥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와 광야 40년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농작하여 얻은 농사가 보리와 밀이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보리와 밀을 가지고 감사의 절기로 지켰다. 이 전래가 지금에 와서는 수확한 과일, 곡식을 가지고 제물을 드리려 나타내는 예절로 예의(禮儀)를 갖춘 것이 맥추감사절이 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감사절 절기는 맥추절, 초실절, 칠칠절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맥추절은 유대교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초막절에 속한다. 이러한 구약의 절기를 지켜온 오늘의 교회가 지키는 것은 교회의 절기 문화로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을 지켜오고 있다. 이는 18세기에 영국이 북아메리카 땅을 정복하면서 인디안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뺏은 기념일을 지키는 미국의 감사절이기도 한다. 영국에서 미국행 청교도 이민자들에게서 유래한 감사절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지켜야 함을 깨닫게 한다. 처음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왔을 때 수확한 것에 대한 감사해서 유래한다. 개신교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와의 갈등으로 미국의 플리머스로 이주하여 인디언들로 부터 배운 경작법으로 봄에 옥수수를 재배하여 가을에 풍년을 거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교도들은 농사 기술을 배운 인디언들에게 축제로 그 감사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며 과일과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 축제를 하는 전래(傳來)가 되었다. 최초의 봄에는 '맥추감사절'로 가을의 추수를 거두며 '추수감사절'로 지키어 오늘의 교회가 감사제를 지키어 왔음을 알게 한다.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서 착취하고 식민지배 하면서 살아왔던 영국이 유럽공동체를 탈퇴하게 되었음을 본다. 이번에 EU 탈퇴를 투표로 보여주는 영국을 보게 한다. 지금 와서 영국은 유럽에 널려 있는 이민자를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지금 영국에 사는 젊은이들의 생각은 독일에게 EU 연합이 유리해지는 현실에서 이민자 문제에 민감하여지고 이민자가 많아지니까 이민자가 일자리를 뺏는다는 의식이 노동시장 저임금화를 초래하고 이로 인해 사회갈등 요인이 생기며 EU의회 의석수도 사실은 9.7% 밖에 안 되니깐 경제문제로 협정문제에 민감한 태도로 영국은 EU 탈퇴를 가지게 되어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영국이 지금까지 대영제국이라는 전제된 의식에서 식민 지배 하면서 잘 살아왔다는 점을 엿보이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애굽의 땅에서 430년 동안 바로의 종살이를 했다. 모든 주권을 빼앗기고 남의 땅에서 종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야 40년의 고난의 과정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씨뿌려 얻은 보리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하고 고난을 함께 한 이웃에게 대한 감사를 나눔으로 함께했던 그 공동체의 그 소감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오늘의 교회는 예배와 문화의 갱신이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교회의 절기에 대한 이해하여야 할 것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교회의 본래의 의미로 되돌아가 '이웃과 민족을 위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 예로 교회 운영구조의 민주적 개선과 교회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예배와 문화의 갱신으로 절기문화를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서구문화 중심의 예배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심점으로 드려지는 예배 진행의 절차를 심도 있게 신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시회봉사와 선교에 사용하는 선교 지향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미대륙으로 건너 와서는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그 대신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청교도 문화를 새로이 하여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면서 크리스마스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개신교의 추수감사절의 계기는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그 결과로 얻은 소출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으며 감사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성서의 추수절은 정당하게 땀 흘려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고 바친 그 곡식을 남종과 여종, 나그네, 과부, 고아 등과 나누도록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이 추수제의 원형이다. 추수제는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나눔의 감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감사제로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7-08
  • 예수 제자로 사는 삶 2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 자기의 삶에서 존재가치를 드러내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 세상 천지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 하나 뿐인 생명(生命)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오직 자기생명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돌아보면 세상에 거하는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시장에서 그 사물의 시장가격을 정하여 가지고 거래를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이 생명만은 그 값을 매길 수 없다. 사람의 생명(生命)은 가격을 매기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존귀하다. 생명은 살아 움직이고 있는 힘이다. 생명은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에 하늘이 내는 것이어서 사람만이 유일한 목적가치요 사람 이외의 사물의 가치는 삶을 위하여 수단가치에 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이 사회에는 조직과 제도가 있으며 정치와 경제가 어울려 생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목적과 수단의 가치와 질서가 바로 서지 못하면 사람이 사는 삶의 사회에는 비극과 문명의 위기가 닥친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에는 나의 뜻이 아닌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결심과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책임 하에 ‘자기’라는 존재만으로는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으로 살아가며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으로 타의(他意)에 의한 결정으로 된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 사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한문으로 生命 즉 그 생명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의지로 우주를 지배하며 인간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획을 이루려는 뜻이 있음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삶을 말씀하시기를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불신자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 됨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친히 보여 주시는 것 그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9:58)라 말씀이시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문화생활의 일부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처 놓고 예수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라고 하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책임진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3). 다만 생활의 보장을 위해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생각해 볼 일이다. 노숙자의 처지가 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로 제자 됨의 삶을 선택해야 할 준엄함을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리라 하시니라” (눅9:62). 제자가 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으면 이것이 삶의 전부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당시 예수님의 심정을 4복음서가 일제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 19:41-42에 주목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하시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때 예수께서는 수많은 인파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설교를 하신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말씀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씀 하시고 “내가 곧 가더라도 성령이 와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내 말씀을 지키는 것인데 새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탁의 말씀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마지막 권면의 말씀을 제자되는 믿음의 삶으로 “예수 제자로 사는 삶”을 깨닫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6-30
  • 예수 제자로 사는 삶 1
    ‘예수와 함께 죽고’는 본회퍼의 묵상집이다. “주님을 따르려거든 주님과 함께 죽으라”는 말로 “나를 따르라”고 외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회퍼의 뜻을 알게 한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성질, 본질, 죄, 수난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준 귀감되는 이 말씀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삶을 사랑으로 자신을 보여 주신다. 이는 사람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심에 주목한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의 삶은 사람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아니라 삶의 현실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정이시다. 이 긍정은 사람과 함께 한 고난당하는 자의 적극적인 긍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적극적인 긍정은 삶으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문제들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는데 이 모든 문제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일상의 삶을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책임은 자신의 몫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살이의 문제를 내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됨을 알게 한다.예수님의 일생 중에서 3년의 공생애를 통하여 자기의 이러한 생명의 삶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세상살이 가운데 마지막 한 주일의 삶을 보면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형편에서 수많은 회중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환영하는 인파와 그의 삶을 축제 환호로 화답하는 회중에게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목하게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실 때 한 사람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하며 자기가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결심에 대해’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급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시고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따른다고 하는 사람이 말한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말한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에게 분명히 말씀 하신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심에 주의한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를 잃고 있음을 보게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의 마음대로 자기 뜻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의해서 되는 것임을 알게 하고 먼저 부르심을 받은 거기에 소명(召命)이 있고 나서 제자됨의 길로서 사명(使命)이 주어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예수 제자로 사는 삶”의 길을 오해하고 있음에 대한 삶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 자신은 머리 둘 곳 하나도 없이 살아가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고 하신 점이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축복이나 받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려 함에 착안하시어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한다. 누가복음의 9장 본문에서 주님의 ‘제자됨’의 길을 생각해 본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제자됨으로 사역이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생활하는 제자가 아니라 제자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본문 9장을 살피게 된다. 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주로 4권의 공관복음서에서 똑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 실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 목숨에 생명(生命)을 불어 넣으신다는 것과 같이 태어나는 명령으로 숨으로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고 거기에 사명(使命)과 자기 구실을 다하도록 소임(所任)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 의미도 목적도 보람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한 생명으로 태어나 존재의 이유를 알아 삶의 가치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6-16
  • 우상화와 성령 2
    일반 종교적 관념에 의하면 “신의 완전성”은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는 데에 있다. 우리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길은 이러한 신을 닮는 데에 있다. 이 신과 같이 속세의 모든 것을 해탈하여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자극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예수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돌로 지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20).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이다(막 14;5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어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그리스도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전이다(고전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하심에 주목한다. 성령 강림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감과 외로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한 다락방에 모였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깨우쳐 주시던 주님을 잃은 슬픔에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로가 없었다. 유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 날 이들에게는 예정되었던 성령의 강림이 임하게 되었다.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금요일에 한 알의 씨앗으로 예수가 심어졌고 부활의 아침에 그 씨앗은 생명의 꽃을 피워 내었다. 그리고 이제 오순절 날, 한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 위에 그 생명이 꽃이 향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향기를 맡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니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났다.하나님은 죄인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자기를 떠난 탕자를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교회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도 계시고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난에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 계시듯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있고 또한 몸속에 있다고 한 말은 “정신이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고, 이 정신의 에너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다”라고 한 말에서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한 삶”의 의미를 가져본다.성령 강림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잊어버린 진실을 증언하게 한다.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우리들이 변화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좁은 생각의 반경이 넓어지고 우리의 닫혔던 마음이 열려 갈등과 분열 폭력과 미움 그리고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로서 감싸 안았던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6-10
  • 우상화와 성령 1
    철학에서 우상(idol)이라는 용어는 명석한 사고를 가로 막는 그릇된 정신 경향을 가리킨다. 편견이나 잘못된 관념으로 흐르는 경향을 우상화라 한다. 성령과 삼위일체의 다른 2위격의 관계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 온 반면,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 왔다. 여하간에 가톨릭과 동방정교의 교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사변보다는 교회의 성사생활에서 성령을 더 체험해 왔다. 사도시대 이래로 세례의식문은 삼위일체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 성령강림을 비는 기도)를 드릴 때 성령이 예배를 드리는 교우, 성찬의 빵, 포도주에 강림하는 역할을 강조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바쳐야 하는 확신, 충성, 헌신을 창조주에게만 바쳐야 하나, 이를 피조물에게 바쳤을 때는 교활한 우상숭배가 된다. 성서의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을 중재하고 행위가 자동적으로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을 거부해 왔음에 주목하는 것이다.“그 날에 인간의 거만이 꺾이고 사람의 거드름은 풀이 죽을 것이다.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우상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사2:17-18). 10계명의 제1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우상숭배를 금지한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과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에는 영구불변의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원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다만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7).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훌륭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세상의 창조주 주님을 찾아 모든 사람은 주님에게 헌신하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 참된 교리라 할지라도 그 자체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가리키지 못하면 우상숭배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이 성서로 불리는 것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제함이 없나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다. 곧 자기의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이 끌리는 대로 하는 행위가 우상화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사랑에 대하여 무언가 갚아 줄 수 있는 자를 사랑한다. 자기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자에게는 주고, 되돌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줄 수 없는 자에게도 그의 사랑을 준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는 곧 자기와 원수된 자를 사랑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기적이요 속되다. 갖가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한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 성(性)에 대한 소유욕, 권력과 지위에 대한 소유욕, 명예에 대한 소유욕 등 갖가지 욕심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대개의 경우 우리 인간은 이 욕심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더럽고 속된 존재 일상적인 존재가 된다.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자기를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선다.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의 자리에 선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보잘것없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예언자를 보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냈었다. 우리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그리하여 희로애락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여지고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고통이고 또 고통을 유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 세상살이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에 비하여 하나님은 완전하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6-02
  • 성령의 역사(役事)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영성을 알게 한다. 부활절 50일째 되는 주일로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하는 기념으로 축제를 한다. 오순절 이전의 성령의 나타나심과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나타나심의 사이에는 그 차이가 있다. 바울은 자기의 사신들을 통하여 성령의 위치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가르침과 화해를 이루면서 성령의 은사를 영적 능력으로, 내적 기쁨으로, 윤리적 정결 및 신앙적 성결과 연관지음으로 이를 알게 한다. 성서는 영성이라는 명사에 대하여 나오지는 않으나 '영적'이라는 형용사로 자주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의 특성을 서술하는데 자주 사용됨을 알게 한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을 자신의 삶의 핵심적이고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영성은 예수에 의하여 생명의 주요 특성이었다는 사실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의 강력한 요구에서 분명하게 하고 이것이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중생이라는 진리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게 한다. 즉 성령의 작용들을 보면 성령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 안에서 분명히 찾아 볼 수 있다. 즉 개혁자들이나 혹은 은사를 받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 안에서 성령의 은혜의 선물들이 각기 다른 모습들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언자는 이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 속한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예언자적 타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도행전11:28에 나타나는 바 아가보라는 예언자로 부터 시작하여 12세기에 수도회 수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거쳐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 밖의 다른 예언자들은 경건주의나 청교도주의 및 앵글로-색슨족의 자유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신약성서는 믿는 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롬 8:1-27; 고전 12-14장).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성령의 충만을 받고’(엡 5:18),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가르쳤다(엡 5:18). 여기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롬 8:9-10). 성서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성령이 충만하여) 큰 능력을 발휘하는 등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들을 감당한 믿음의 용사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오늘날도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과 믿음의 용사들을 통해 세계 도처에서 쉼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 계시(啓示)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제 내용을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서 알게 한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해석해 온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을 이렇게 하였다. 그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은 3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중적인 존재로 스스로 드러내신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경험으로 세 가지 유형을 보게 된다. 이들은 세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로 알았다. 또한 예수의 제자들로서는 하나님이 예수의 삶과 전도와 그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남으로 알았다. 그리고 사도로서 그들은 그들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영(靈)이 그들의 사명을 행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알았다. 후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경험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를 해석하려고 하였으며 이 증거가 이치에 합당하게 할 최선의 처방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실로 신약의 증거에 대한 결과였지만 신약은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경험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형태로 연관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모든 경험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발전에 갈등은 신성의 단일성에 대한 강조와 신성의 분화(차별성)에 대한 강조 사이에서 늘 논란이 되어 오고 온다. 아버지 신은 아들신의 바탕이며 이는 전제조건이고 아버지신과 아들신은 성령신의 바탕이며 전제조건이다. 아들 신은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의 하나님이며 성령 신은 아버지와 아들 신의 또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나온 신으로 신앙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것을 시간적 우선순위나 종속관계는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5-19
  • 민심은 천심이다
    2016년 4월13일 제20대 극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은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2000년 제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정국이 열리게 되었다. 야권분열에도 상관없이 새누리당이 참패를 당하면서 민심이 현 정권의 심판에 대한 의도를 보여 주게 되었다. 여권은 과반의석이 미달인 현실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야권은 의회에서 정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번 선거는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교훈이 되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관용구에 있는 말 그대로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과 같다’는 뜻으로 백성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 백성의 마음인 인심을 수습하는 것은 민심을 얻는 것. 민심을 선동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함을 본다. 여기에 천심은 이미 백성들 마음 따라 변했고 임금이 될 징조는 사람들이 원망하는 기운을 몰래 좇아 녹아버린다는 엣 말을 알게 한다. 민중은 역사를 창조해온 직접적인 주체이면서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실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지배관계에서 종속계급, 피 지배계급에 속해왔다. 민중은 고정된 계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파악되는 유동적인 계급, 계층의 연합이다. 여기에 근대 사회가 민중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의 모순된 위치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민중과 대중의 다른 점은 대중은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여 서로 분리된 채 조직도 없고 단합한 행동능력도 없는 집합체를 말한다면 민중은 정치적으로 활성화 될 잠재력을 지닌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의식을 가지고 실천지향적인 집합체로서의 특징을 알게 한다. 세상만사가 정치와 얽혀 있어 선정(善政)이 펼쳐져야만 국민들이 편해질 수 있고 역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현실임을 알기에 유권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치권은 정책과 인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는 자는 자기 인생관과 확실한 철학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민심의 소재는 나라의 장래보다는 눈앞에 닥친 민생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정치는 있으나 소통이 없고 정치는 있으나 포퓰리즘(populism)인 즉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형태인 대중주의, 인기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포퓰리즘에 머물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우에서 보수로 보수에서 진보로 가는 것처럼 그 진로를 가야 하는 이유를 국민들이 스스로 내면적인 성숙을 위해 생각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말은 국민이 주인이 되어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말하며 민주주의( Democracy) 민중 또는 다수를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를 합친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민중 또는 다수를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를 합친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한다. 1863년 11월 미국 대통령이었던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아주 유명한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민주주의를 한마디로 잘 설명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 그 자체가 민주의의이다. 독일의 히틀러의 나치제도도 민주주의의 국가였으며 히틀러를 뽑아 준 것도 국민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서 보았듯이 국민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도 사실로 말하면 독재이다. 여하 간에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은 대략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 선거권을 통하여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 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민권을 보장하여야 하는데 이 민권에는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포함되며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 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5-12
  • 인공지능은 사는 이유를 모른다 2
    오늘의 우리 시대는 유전자와 염색체의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게놈(genome)으로 모든 생물의 세포에는 핵이 있고 핵 속에는 일정한 수의 염색체가 있으며 염색체 안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정보를 가진 DNA가 있다. 이제는 인간 유전지도인 게놈도 완성되어 오늘의 컴퓨터의 엄청난 발전을 본다. 그러나 아직도 밝히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가정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 무엇인가?”하는 것과 인간적인 문제를 비롯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생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가?”하는 문제들은 삶에 던져진 물음들이 산재(散(在)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현명하고 지식이 높다고 해도 언제인가는 죽음에 이길 자 어느 누구도 없다. 삶에 대한 물음에 천태만상의 답을 가지고 자기 아집으로 집착하여 일생을 살아간다. 전도서 8장9절에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고 전도자는 말한다. 성서에서 보면 개미는 이성이나 감성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일부 물려받았다.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밝히신다. 성서에는 사람이나, 땅에서 사는 것, 그 밖의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록되도록 영감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읽고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자체는 ‘자기생각’이 없다. 동물은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 비판하지도 못하며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처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원리원칙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과정으로 질서와 규칙이나 규범이 있기에 여기에 따르는 길이 참삶의 생활이 된다. 이것을 아는 인간은 철학적으로 회의(懷疑)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생각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고생을 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또 다른 삶이 있는가?”하는 문제를 알고 해답을 하려는 여기에 철학의 자리가 놓인다. 소크라테스의 회의(懷疑)가 그리스 철학을 탄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신학의 발단이 되었고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철학의 기본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이 사유(思惟)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할 줄을 안다” 여기에 철학은 인간정신과 삶에 생활의 필수 영양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철학은 회의하고 대답을 하고 또 다시 질문을 한다. 이는 철학이 삶을 반성하게 하고 질문을 갖게 하여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런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으로 나누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가치관, 감정, 이성, 지혜, 사랑도 믿음도 없다. 철학을 Philosophy라 하는데 philos와 sophia가 합친 뜻은 에로스보다 더 높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알게 하여 철학이라 이름한다. 이는 인생이나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확실하고 엄밀하게 인식 비판하여 근본적으로 삶을 해결 하도록 현실에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과 구분된다. 많은 지식을 쌓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답을 지식은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모든 이치에 의하여 잃고 얻는 것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리(事理)를 밝히고 잘 처리하는 재능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즉 지식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실력을 지식이라 한다. 여기에 지식은 그 한계가 있다. 이는 지식으로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유능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지혜는 일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경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고로 지식은 어떤 것을 넓게 안다 하지만 지혜는 어떤 것을 깊게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4-15
  • 인공지능은 사는 이유를 모른다 1
    2016 년 3월9일 -15일까지 대한민국 바둑의 프로 기사 9단 이세돌 기사와 인공지능(AlphaGo)과 대국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생방송으로 중계되며 첫 대국은 대한민국의 한국방송공사에서 생중계를 통하여 인간을 이기는 AlphaGo의 게임을 가졌다. 이로 인하여 한 세기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알파고의 알고리즘(algorithm)은 부여된 문자가 수학적인든지 비수학적이든지, 또 사람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컴퓨터로 해결할 것인지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이 알고리즘은 방대한 분량의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인 머신너닝(Machine Learing)과 트리 순회 기술을 조합, 인간과 컴퓨터 모두와의 대규모의 연습과 결합한다는 것으로 얽힌 방대한 분량의 축적된 데이타로 이번 첫 번째 게임에 대하여 영국의 BBC는 " 이번 대결은 컴퓨터 알고리즘과 인간 직관력의 대결이다"고 한다. 오늘의 인간들의 삶의 시대는 '인공기능대행시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진다. 기계 지능이 기하급수적 성장 곡선을 따라 발전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는 삶의 포부와 그 위대함을 한 생명으로 가는 길, 진리, 생명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야 한다.본인은 ‘기능만이 우선하는 세상’(2011. 6. 26 나의 인터넷 칼럼)에서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가 우선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가치가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이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교육만으로 환영 받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도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보다는 지식기능만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 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생명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현상으로 달려가고 있고 사회풍조가 영악하고 재치 빠르고 이기적인 사고능력자를 우선한 현상을 보면서 차제에 기능만이 우선하는 세상에서 삶의 철학을 제의(提議)하는 바 이다. 삶을 진리에 서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사리(事理=일의 도리)를 알도록 “철학이 있는 삶”을 피력(披瀝)했다.그리고 그 이후 2013년 7월20일 인터넷설교에서 "창조적 가치 추구"에 대하여 설교한 바가 있다. 인간의 삶은 보람을 창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보람에 두고 살아야 하되 올바른 목표, 바람직한 목적이 있는 삶을 피력한 바가 있다. 결국 산다는 것은 목적을 갖고 사는 것이요 그 목적한 바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태어났다. 자기의 뜻한 바를 완수하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본래의 창조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창조함을 받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생명은 삶의 절대 가치이다.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절대가치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생명은 절대 가치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나타나는 능력이나 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나타나는 능력이나 힘인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으로 생명의 능력으로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히11:1-2)고 함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자리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물질적인 형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것이다. 엡4:24, 골3:10에서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은 의와 진리와 거룩과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인 것을 밝힌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가 인간의 합리적인 품성으로 의롭고 지혜롭게 삶의 목적인 인격적인 본연(本(然)인 본디 그대로의 것으로 사람의 품격인 인격을 갖추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만 갖추어져 이 성품으로 창의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점은 태초의 처음과 나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 이시다. 생명의 주관자이시요 절대적인 가치 추구자이시며 창조의 태초자로서 본연의 아름다움을 삶에서 사랑으로 키우신 분으로 창조의 힘이 되심을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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