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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 아래 있는 인간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은 피조물이다”는 전제하에 죄에 의한 실존론적 인간 이해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오늘의 인간의 삶을 사는 해석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그 의미에 뜻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다른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로 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그 특징이 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다만 인간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 현실을 그대로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인간 삶의 현상을 지적하려는데 유의해야 할 것은 죄라는 개념을 밝히는데 있어서, 법이나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거나 또는 죄의 현실을 밝히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죄로 부터의 자유와 해방, 여기에 죄를 묻는 근본적인 그 목적과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시키려는데 그 의의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죄론은 구원론의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묻는 것은 곧 ‘회개’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됨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 에게 비로소 구원의 믿음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구원론에 있어서 죄를 가장 문제시함에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함에 이르고자 함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죄”라고 함에는 우선 일반 ‘법’으로 이해하여 세상 법만 어기는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문제는 ‘법’을 어겼다는 사실만으로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법의 기본 정신과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한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문제 삼는 것도 죄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문제로 보는 죄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선 차원의 죄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묻는 근원적인 죄가 무엇인가? 그 ‘죄’는 종교적인 영역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 곧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인간의 잘못된 힘’을 알게 한다. 세상 맨 처음 창조의 에덴동산에서 간사한 뱀이 이브를 꼬일 때 사용한 유혹의 말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인간의 죄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유혹의 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인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소외’(estrangement)를 말하는데 하나님을 가리켜 “존재의 근거”,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가 되는 바로 그 존재의 근거자체로 오만 불손으로 멀어져 소외된 존재로 자처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여기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비존재의 유산을 그대로 안고 있어 유한성에 얽매여 있는 존재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참된 자기’를 창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존적인 자기로 부터 탈출하여 미래를 지향하려는 자기 아버지 하나님 되신 초월의 관계하고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유한성과 자유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는 것을 인간의 삶의 자세로 그리스도인 삶을 영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본 뜻은 ‘불신앙’에 있다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죄의 물음을 반도덕적인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다. 불신앙(비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단순히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전인적으로 떠나 있는 상태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를 가리키기에 우리는 새해 벽두에 참신한 그리스교의 교인의 한 인간으로 무술년 새해를 맞아 “죄 아래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01
  •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
    사람이 목숨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다가 삶으로 가는 로드 맵(road map)’으로 흔히 ‘인생 칠십 고래희’하여 [두보의 시 곡강]에 나온 말로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살기란 예로부터 드믄 일이라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이 삶의 한계를 넘어 100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은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로 그 인생관으로 인생의 존재가치, 의미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새해를 맞아 삶의 전체적인 사고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문제를 알게 한다. 본래 철학적으로는 그 근거 추구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여기에 따르는 개념이나 사상의 바탕에 근거하여 근거 추구를 하기에 삶의 구조와 그 의미에 대한 자기 이해를 묻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추구하며 산다. 이는 곧 현대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인생관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해석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여기에 크리스천이나 비크리스천이나 구분 없이 가릴 것이 없다. 이는 곧 여기에 그 근본적 해결의 문제는 오늘의 인생살이에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오늘의 삶이 안고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 중점이 되고 있고 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 중심 자료는 구약 창세기에 나타난 {에덴의 설화}가 그 중심의 자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태어남은 아버지(부성)없이는 태어나지 못함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논 할 때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을 알게 한다.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로 이를 말할 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라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과 무관한 인간의 세상살이는 상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과 무관한 모든 관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인간의 인생살이의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바탕이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연구되고 말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라면 사람에 관한 신학적 개념, 명제, 진술들이 인간학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을 믿게 한다. 여기에 인간학은 인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거쳐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게 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이를 본업으로 삼아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 전체를 거기에 준한 목적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철학은 인간을 인간 자체, 존재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그 삶의 자리를 검토 비판하고 인간을 그의 삶의 자리, 곧 사회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이해하려 하며 인간의 인생살이는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풀어 보려는 것을 우선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를 가리켜 항상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사람을 그 자체로서 단독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을 전제로 한 인간 이해라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이해를 돕는데 절대적인 필요와 사람의 주체성 확립뿐만 아니라 인간이 세상살이를 통해서 하느님은 방법상으로나 상징적으로도 중요성을 알게 하고 믿게 한다. 그 증거는 하느님이 인간들의 아버지이심으로 사람의 사랑의 아버지로 드러나게 하는 인간학적 의미가 있음을 신앙하게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해에 있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자녀로 조명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절대적 초자연적 존재에 예속된 인간, 그 말씀에 순종한 인간을 의미 한다면 여기 절대자인 하느님은 궁극적 실재, 궁극적인 관심, 존재의 근거, 등 개념으로 신앙하는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신앙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는 첫째가 인간은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다. 두 번째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스런 존재라는 사실로 인생의 유한한 존재임을 인생살이에서 알게 한다. 신학적 해석에 의하면 창조론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세상살이에서 이를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인간을 피조자로서 창조주 하느님을 믿게 한다. 이는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를 알게 하는 것이다. 한해 365일의 인생살이를 기본으로 하느님의 나라 일에 삶을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1-18
  • 한 해를 보낸 소고
    가고 오는 해에 겸손하게 나의 덕담을 피력한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갖는 신앙에 ‘언령신앙’(言靈信仰)이 있다. 말에는 혼, 영, 즉 보이지 않는 ‘힘’이 붙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언령신앙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특히 강조했고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도록 풍습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말과 언어에 대하여 전래되어온 속담이나 격언 중에는 來語不美 去語何美 去言美 來言美(래어불미 거어하미 거언미 래언미 :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조심의 경고). 晝語雀聽 夜語鼠聽 晝言雀聽 夜言鼠聆(주어작청 야어서청 주언작청 야언서령 :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言他事食冷粥(언타사식냉죽 :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이다). 饌傳愈減 言傳愈濫(찬전유감 언전유람 : 음식은 갈수록 좋고 말은 갈수록 는다). 於異阿異(어이아이 :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은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상대가 받아들이는 기분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항상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그런데 요즘에 와서 우리나라 정초 새해인사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는 이 새해 인사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베개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수저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심지어 어느 화장실에도 ‘복’자가 붙어 있다. 복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자.”라는 인사의 시작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히 산업화 이후에 생겨난 인사라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이런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은 복을, 그것도 물질의 복을 ‘많이 받자’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런데 ‘받으세요.’ 그랬다. ‘준다’는 말은 없다. 받기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식이 우리 민족 속에 깔려 있다. 미국 사람에게는 이런 인사가 없다.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이다. 하루 좋은 날을 보내면, “Have a nice day.”, “Have a good day.” 이렇게 말한다. 서로가 행복한 새해, 좋은 하루를 갖도록 하는 인사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설날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덕담을 나누는 날이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이 덕담이 우리에게 인사로 표현되어야 되는데, “너 돈 잘 벌어라.”, “너 금년에는 주지 말고 받기만 해라.”, 이런 인사가 어디에 있는가. “새해 행복하세요.”라고 해야 할 텐데,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광복 이후, 우리가 서구화 도시화 산업화되면서 얻게 된 구조적 변화는 한국국민의 욕구의 수준을 높이 상승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인해서 개인이기주의와 구조적 부조리가 번창하여 개인의 범죄와 제도화된 부정부패가 오늘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정당하게, 착실히 밟으려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편법주의가 팽배하고, 또 사회의 질서도 혼란스럽고 안전을 무시해 버리는 이런 근본적인 것이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부분에서 적용되는 문제의 해결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말로 고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을 현실적으로 더 가미해서 말씀을 드려보겠다. 인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한결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인사는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을 향한 따뜻한 관심이다. 신약에서는 ‘마카리오스’라고 썼다. 이는 축복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영적인 의무로 승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로 만들어 주는 것, 좋은 일로, 의로운 일로 만들어주는 것을 ‘복’이라고, ‘마카리우스’라고 말했다. 신약성서를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전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거꾸로 이다. 뒤집어서 복이라는 이해를 우리에게 새롭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에서의 ‘복’은 ‘아슈레’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번영된 행복, 그것을 일컫고 있다. 구약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장수한다든가, 자식을 많이 낳는다든가, 현숙한 아내와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존경을 받고 신임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런 뜻에서, 복이라는 말로 대신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1-04
  • 빛과 생명으로 오신 구주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서 말한 절기이다.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이며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음을 부언한다. (대림 첫째 주일은 11월27-12월3일 사이의 주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 지도 2000년이 되셨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빛과 생명에게 까지 하느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빛과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빛과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빛과 생명은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고찰하면 인간 사회의 삶에서 삶의 구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이는 빛과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생명의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빛과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생명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삶은 ‘빛’과 “생명의 삶”이 필요하다.하나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새로운 삶의 탄생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이 주어져 생명이 되는 신앙이 된다. 이제 두 가지의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악과 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인류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썩어져 가는 인류를 지식과 은총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목적에 합당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빛이 어둠에 가득한 이 세상과 이웃에게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22
  • 예수 삶의 길
    한글개역성경에 누가복음의 9장 본 문에서 주님의 ‘제자 됨’의 길을 생각해 본다. 누가복음 전체의 ‘제자’라는 말이 누가복음 9장에만 11번 나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제자 됨으로 사역이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생활하는 제자가 아니라 제자 됨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본문 9장을 살피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난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제자됨의 선한 의도나 받은 영광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한다. 제자 됨의 생활은 문화생활의 일부나 시간이 남으면 사역하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 됨은 나이(연령) 여하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삶이나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해 최우선 순위에 두는 그런 삶으로 생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시듯이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되는 길도 열어 보이신다. 57절- 58절에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제자의 사역(使役) 길을 위해 거처도 없는 생활수단도 없는 그의 삶을 확실히 보여 주심에 인지(認知)하게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다. 예수님의 삶은 가르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스승이요 그 분이 내안에 사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순간마다 자기를 인도하시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하신다. 예컨대 바로 그 순간 부싯돌에 부딪치듯이 섬광과 같이 빛나는 광채를 본다. 이는 생명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자아, 그분의 인격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디트리히 본 회퍼는 삶을 말하면서 항상 “그분께서 제 안에 계심을 느낍니다. 그분은 순간마다 저를 인도하시고 제가 말하거나 행해야 할 바를 알려주십니다”라고 한다. 아직도 우리 인간들은 생명에 대하여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삶의 명령을 받아 자기의 삶을 책임 질 줄을 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살아있는 인간을 통하여서 삶을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삶의 에너지는 창조 그 자체에 의해서 의지하고 이 삶 조각의 에너지는 우주 에너지에 의해 흡수된다. 창조는 인간에게 어떤 명령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모양새에서 그의 말씀과 질서를 통해서 창조의 삶의 목적을 갖게 한다. 이 창조는 어떤 모습으로 한정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은 자유롭고 기쁘게 삶을 살아간다. 생명은 여타 생명과의 서로 생명작용에 의한 고유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개체물질의 총칭으로 정의하고 생명은 모두가 창조적인 삶을 스스로 꾸려 갈 수 있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능력인 영 혹은 영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을 대할 때는 목적으로 상관하여야 하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아니 된다. 생명은 서로 간에 사랑에 의한 나눔으로 모두가 평등한 생명공동체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추구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는 ‘아름다운 살림살이’이다. 이 ‘살림살이’는 생명의 살림을 조화롭고 건강하게 꾸리는 모습, 그 모양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정상적인 생명으로 생명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생명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배려가 전제되는 살림의 생명이다. 이 삶은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 암적 존재로서 이를 죽임의 생명을 말하게 한다.베드로는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리하여 수제자까지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고 그리하여 사단과 관련된 책망까지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육체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인의 구원자였고, 이를 위하여 혼연히 먼저 죽음의 길을 가셨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치르게 하시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행하심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그분께서 당하실 일에 반대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려고 오셨다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14
  • 생명의 의미
    생명은 시간이고 역사이며 기억이고 연대이다. 땅의 진화의 오랜 시간이 축적되어 ‘나’라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내가 존재함으로 조상과 후손이 연결된다. 여기에 생명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이 창조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앙한다. 사도신경 역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사도신경 신경을 고백한다. 이 창조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고백이다.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오늘의 삶을 살기 위하여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에 허황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윤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생명의 의미를 알고 생명과 관계되는 요인들을 드러내고 역사, 공동체, 환경 등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발적 활동과 경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정체성의 힘(the power of identity)이며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질적 존재를 초월하여 신령적(numinous)이다. 즉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인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전제를 수용하면 여기에 나 생명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된다.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즐기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의 생명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한편 성서의 말씀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모든 생명을 다스려라” 명령했기에 흔히 인간이 만물의 지배자라고 오해하여 자연을 훼손해도 좋은 냥 인간 중심으로 착각하여 이 시대의 문명권을 지배하고 왔음을 부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다스림’의 위치만을 착각했다는 점을 깨닫고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사랑과 정의, 돌봄과 섬김에 근거한 다스림이지 결코 지배와 억압에 의한 다스림이나 오만 불손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기를 학수고대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로마서에서 바울의 회심을 통해 아는 것은 로마통치하의 세계는 피조물조차 ‘사멸의 종살이’에 시달리는 모습을 알게 한다. 당시 세계는 로마의 폭력이 두려워 잠잠한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생명은 전적으로 ‘허무를 만드는 힘’으로서 로마의 무력을 인정하는 대가로 보장되는 것이었다.이러한 평화, 즉 ‘죽음과 같은 고요’를 이룩한 로마 황제에게 지고의 존재로 숭배되었다. 이러한 세계에 당시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바울의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같은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한다. 이는 바울의 중생, 또한 이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살리는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 생명운동은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며 바로 그러한 위기의 원인으로서 인간, 인간중심주의로 더 나아가 근 세대적인 욕망의 위기를 보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로마의 도처에 일어난 만연한 죽음의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죽임의 체제 곧 팍스로마나(Pax Romana)의 본질에 접근 하며 바울은 생명운동에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는 삶의 태도에 ‘생명을 살리는 삶을 보이신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07
  • 내 이웃 사랑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강토와 민족은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휴전선으로 반 동강이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념의 갈등보다도 조국이 먼저 있었다. 정치적 대립보다도 민족이 먼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과 정치에 사로잡혀 조국도 민족도 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같은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았는가! 우리는 강대국의 대결 사이에서 우리의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무력의 대결이 곧 평화의 길인 줄 잘못 알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돌이켜 보면 해방이후 54년간 우리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동안 우리는 국내외에서 몰아치는 이념과 정치대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이처럼 해방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분열과 증오가 심화되면서 우리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니, 민족적 정통성의 확립이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게 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과 민족적 단합과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원시 되었을 뿐 아니라 위험시되기 까지도 하였다.이제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으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재를 뒤집어쓰고 민족과 조국을 분단으로 밀어 넣은 우리의 잘못을 통회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움을 털어놓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아왔다. 상대방의 피 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여 상대방이 쓰러질 때 우리는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승리이며 누구의 기쁨이 될까? 우리가 남의 힘을 빌려 자기 형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으니 이 세상 어디에 이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여기에 우리는 분연히 역사의 새벽을 밝혀야 한다. 이 지구상 또 어디에 분단의 땅이 있는가? 이 세상 또 어디에 분단의 민족이 있는가?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그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며 그 조국은 우리의 조국이 아니다. 우리의 땅은 만주벌판까지였으며 우리의 조국은 하나의 조국이었다. 북은 남의 반쪽이었고, 남은 북의 반쪽이었다. 우리가 나뉘어져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제 남(南)은 북에게, 북(北)은 남에게 그 땅을 되돌려 주어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한다. 분단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고 분단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비극의 원인을 보려고 할 때 분단극복의 길은 트이지 않는다. 반평화적인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통일은커녕 민족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아니 된다. 오늘 우리는 형제가 형제를, 동족이 동족을 배반하고 죽였던 골육상잔의 비극 앞에 서있다. 이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소원한다.이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크게 다섯 가지의 원칙아래 진행되어 왔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이 제시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인도주의 원칙과 민중우선의 원칙을 덧붙인 것이다. 남북 간의 교회는 이러한 5대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뢰 회복을 위한 실천 과제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신뢰관계의 구축, 평화구조의 정착, 각종 교류의 계속적인 추진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민족이 분단된 지 반세기를 넘기면서도 아직도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그동안 남과 북의 교회는 8.15 직전 주일을 평화통일을 위한 공동 기도주일로 정하고 공동의 예배문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 왔다. 그 동안 드려온 기도의 성과를 모아 8.15광복절을 계기로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영적 일치를 이루어 분단의 벽을 허무는 대사역을 시작했다. 이러한 취지아래 1993년 8.15에 KNCC 등 종교계를 비롯한 민간 통일운동단체 회원 5만 여명이 독립문에서 임진각까지 48Km에 이르는 인간 띠를 만들어 우리의 통일 염원을 담아 가지고, 49개 개신교 교단과 13개 사회단체들이 각계각층을 총망라하여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를 가지고 시위(示威)를 했다. 평화통일의 인간 띠로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주로 고백하는 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손에 손잡고 참여 했다. 신앙의 진보와 보수를 떠나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소망임을 고백하면서 누구나 다 참여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24
  • 이산가족 상봉 ②
    참 행복은 둘이 하나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가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 나와 나 아닌 것 중에서 나 아닌 것이 결코 나 아닌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부여 해주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고 그리고 형제간이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형제자매의 우애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부모 형제가 결코 남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살림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 ‘二而一’는 나와 나 아닌 것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一而二’는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사랑의 신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살림의 신비 안에서는 남을 사랑함이 곧 나를 사랑함이 되고 나를 사랑함이 곧 남을 사랑함이 된다. 이러한 삶의 뿌리는 한 가정 안에서 화목한 가운데 식구끼리 하나 됨을 맛보는 데서 찾게 된다. 뿌리 없는 삶은 온전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 뿌리가 심히 썩고 있고 심지어는 죽어 있는 뿌리가 많다. 결혼은 남과 여의 이성의 만남으로 성 놀이의 리크레이션이 아니다. 가정은 생명이 약동하는 사랑의 보급자리이다. 여기에 수신해서(修身齊家) 가정을 이루면 온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治國平天下)고 한다. 오늘의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현주소는 삶의 뿌리가 망가진 채 표류하고 있으며 살림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음을 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은 생명의 한 삶을 산다.인생이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왕을 만나고, 씨앗은 땅을 만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만남의 역사는 시작되고 생활의 좋은 살림은 좋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좋은 부모 만남은 좋은 자녀, 좋은 선생 만남은 좋은 제자, 좋은 친구 만남은 좋은 친구, 좋은 왕의 만남은 좋은 백성이 되고 좋은 씨앗은 좋은 땅을 만나야 좋은 열매를 거둔다. 서로의 관계회복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알게 하고 여기에 깃들게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참 행복은 둘이 하나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가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소통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여야 한다. 강이 흐르듯이 아래로 향하여 잘 내려가는 강을 알게 한다. 삶에도 뜻이 통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오고 가는 삶의 소통을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은 가시는 삶으로 하나님의 삶을 나타내는 관계를 알게 한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자녀의 사이로 인연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창조의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자녀는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이 관계를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소중한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이치가 된다.참 행복은 둘이 하나 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 이 삶은 모든 것의 소통을 알게 한다. 이 소통은 존재가 실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실존은 ‘밖에 나타난다’는 뜻으로 본질에 대한 현실 존재라는 의미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남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주체성으로 그 실존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의 중심’의 사상은 우리시대 사람들이 많은 지식은 가졌으면서 실존하는 것은 잊어 버렸으며 그렇다면 그 주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면 키에르케고르는 ‘결단을 내려 너 자신을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실존하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세 가지 근본 형태로 말한다.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신앙적 단계로 주지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은 무엇을 받았느냐에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떠맡았느냐에 있다고 말함에 유의하는 것이다.우리 민족의 관계개선으로 이산가족 상봉 확대를 위해 새롭게 도입된 방식인 화상상봉은 이산가족교류 교류 차원에서 상봉, 생사확인 규모의 확대와 거동이 불편한 이산가족들에게 화상으로나마 상봉의 기회를 마련해 이산가족 문제해결에 한 민족의 피붙이를 정서로 풀어 경직된 막힌 담을 허무는 기회를 서로가 만들어야 한다. 이 만남의 평가와 함께 통일 환경 개선과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는 길만이 오로지 통일정책이 접근 가능함을 기도로 우리 그리스도인과 함께 남북한 민족이 하나 되는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음을 기도해야 한다. 서로의 싸움은 전쟁으로 가능하나 피붙이 인 같은 민족의 정서나 그 이유는 불문하고 한 피부로 동질성회복의 치유를 갖게 됨을 확신해서 이산가족 상봉의 로드 맵(road map)을 상기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6
  • 목회는 쉬운 것이다·45
    우선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분이 조선일보에 소개된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분의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답변이 “농촌 목회요? 그냥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거죠.”그 냥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냥이란 말을 잘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이 목회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간암 수술을 세 번째 했습니다. 그다음 검사에 왜 자꾸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사와 면담 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물어보았습니다. 10여 년이 넘도록 만난 담당 의사의 딱 한 마디, “함께 사는 겁니다”라는 귀중한 답변을 들었습니다.만일 나에게 목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저는 그냥 대충 사는 사람입니다.이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영화 상영하고,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미생물을 이용한 농업 기술을 강연하고, 수목 조성과 들꽃 축제를 열고, 아이들과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등하교 버스 운전까지 한다는 것입니다.이런 일을 하는 분은 보령시 천북면 들꽃마당시온교회 김영진 목사입니다. 들꽃마당시온교회는 들꽃과 나무천지인 평화로운 농촌교회의 담임인 김영진 목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쁜 목사입니다.주민들이 내 집처럼 교회에 드나들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끊어다가 스크린을 만들고 빔프로젝트를 사서 영화 상영을 하여 노인부터 동네 꼬마까지 예배당 ‘마을극장’으로 모여들게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네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과 추수한 것을 모아 감사하고, 고기도 굽고, 전도 부치고, 두부도 하고, 송편도 함께 하여 교회마당의 들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힘을 합해 들꽃 축제도 열어 보령시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재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다른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습니다.“농촌목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도시 교회처럼 생각해서 혼자 열심 내고 그러면 3년을 못 넘기고 좌절과 실망, 낙담해 떠나게 될 것입니다.“농촌에 오면 농촌의 속도로 사는 게 좋습니다.”농촌교회는 주민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낙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목회는 의욕이 아닙니다. 내가 처해진 환경에 흐름을 같이 타야 합니다.종교적 열심을 말할 때에이슬람교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슬람교의 기본원리는 6신(信) 5행(行)이 있습니다. 즉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행합니다.6신이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선지자이다, 꾸란 만이 성전이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 심판을 믿는다.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모방해 창시된 것입니다.5행이란 신앙고백입니다(항상 중얼거리면서 신앙을 고백한다). 기도입니다(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다). 금식, 구제, 성지순례입니다.이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 종교의 하나일 뿐입니다. 알라라는 신에 맹종할 뿐 그 열심히 결국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일머니라는 검은 물결의 세계에 깊이 잠입하고 있음은 무서운 사건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신앙생활이란 열심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이 이방 종교와 이단들의 형태로 바뀌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목회도 대부분이 열심히 했다고 고백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힘을 다했다고 말하면서 목회 성공을 회상합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결과가 현재의 성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이 무슨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인가 말입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출처가 자기 자존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말입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6
  • 이산가족 상봉 ①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Ich und Du=I and Thou, I and it) 는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인식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제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름이 하나 됨을 알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로 향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현대문명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격적 주체인 ‘너’로 보지 않고 도구적 존재, 수단적 존재, 사물적 존재인 ‘그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현실로 알게 하는 말로 ‘나’와 ‘그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와 ‘그것’과의 관계로 인간은 타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인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는 관계회복으로 이끈다. 이렇게 마틴 부버는 한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두 겹(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원초적인 관계성과 그 차이와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우리의 삶의 인식에 있어서 생명 살림의 부재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의 나 된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함’이라 한다. 부버는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에게서 만난다”고 한다. 인간은 영원자 너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 가고 자기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과 구별되는 초월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만날 때 거기서 신앙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성품, 속성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인연(因緣)인 것이다. 나의 나됨은 바울이 말 한대로 당신인 네가 있기에 가능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너’가 있어야 ‘우리’가 될 수 있다. 고로 우리가 ‘너’는 ‘나’와 만남은 아무런 원인이나 까닭이 없는 우연(偶然)이 아니라 사이를 맺어지는 연줄과 같은 인연(因緣)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여기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하지 않는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하신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나’와 ‘너’와의 점 하나의 관계이다. 서로의 사이는 관계이다. 그래서 人間(인간)이라는 말은 서로의 관계를 알게 한다. 함께 사는 삶에서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통하는 것은 서로 관계하며 산다는 것이다. 소통은 살림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음이며 죽음은 살아있음이 없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너 없이는 내가 없고 나 없이는 네가 없음을 안다. 네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서 내 마음이 되고 내가 네 마음으로 들어가서 내 마음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마음의 상태를 일컬음이다. 서로의 사이에는 들어오고 들어가는 관계의 소통이다. 성서의 전면(全面)은 이 관계에서 수립된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또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고, 둘째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무슨 일에나 행동의 중요한 지침이 되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 행동의 지침으로써 예수님은 스스로 삶의 자세가 ‘자기 비움’(케노시스)임을 보여 준다.예수님의 첫 번째 출발은 ‘자기 비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한다. ‘너’와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자기의 지위와 권세와 위치의 모든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려놓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흔히 사람의 욕심은 그릇이 너무 커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비우면 사람의 마음의 그릇은 커지고 욕심의 그릇은 작아진다. 여기에 모든 만족과 감격이 찾아 든다. 반면에 자기를 비우지 못하면 마음의 그릇은 작아지고 욕심의 그릇은 커져만 간다. 여기에는 자기만족이 없다. 행복은 여기에 찾아오지 않는다.인생을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왕을 만나고, 씨앗은 땅을 만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만남의 역사는 시작되고 생활의 좋은 살림은 좋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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