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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은 소유가 아닌 사랑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상은 사람들의 정신력은 퇴조되고 생활이 바빠지면서 성격도 급해져 근면 성실은 없어지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복권, 경마 등으로 한탕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되어 있다.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물음이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문제는 상관없이 사는 삶을 생각해 보며 사회의 현실을 알게 한다.오늘의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은 소유라는 명분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은 상대방보다 더 나아지려는 경쟁으로 자기를 구속하고 압박하며 강제하여 결국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려는 의지로 이기적인 삶을 본다. 이와 반대로 여유롭게 생각하고 심사숙고하여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가지려고 하는 삶은 한 치의 양보도 볼 수없는 지금 우리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사랑의 에너지를 방전하려는 의도는 하나도 없다. 이는 삶의 이치를 모르는 소치(所致)이다. 사람의 본질이 소유양식이 아니라 존재양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기인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이 소유양식으로 인식될 때 사랑의 본질은 훼손되고 인간관계도 붕괴된다. 소유 양식적 삶이란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집착하는 삶을 말한다. 오늘의 사회가 소유라는 명분으로 사랑한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상대방을 구속하고 압박하며 강제하여 결국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려는 짓을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다. 그 중에 하나의 현상으로 자살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방기구)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10만 명당 33.5명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살증가 속도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10대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로 나타나고 있으며 가장 왕성한 노동연령층인 20~39세 국민의 사망원인 1위도 바로 자살로 나타나고 있다. 연구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 증가추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 됐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큰 원인으로 인구의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자살률이 급증한데서 찾을 수 있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차례에 걸친 경제위기는 전통적으로 경제적 책임을 크게 느껴온 중장년층 남자들의 자살률 증가세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자살률은 여자보다 남자에게서 더 높게 나타나는데 우리나라는 특히 남자로서 고등학교 학력, 무직, 유배우자인 경우 자살자 수가 많았다는 통계가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하루에 평균45명이 자살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행복도가 낮은 편으로서 세계에서 행복도가 가장 낮은 나라는 우리나라이며 반대로 가장 행복도가 높은 나라는 방글라데시이며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 즉 북유럽, 유럽, 미국, 일본 등은 행복만족도가 낮은 나라들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국민소득 2만 불 이상이면 선진국으로 분류 한다. 보통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 되는 나라들은 국민의 물질생활 수준뿐만 아니라 기타 사회기반시설이 비교적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 이 다. 지금 2만 달러 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30개국 정도 로 보고 2만 달러 되면 선진국이 아니라 30위 이상 돼야 선진국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데 프랑스 영국 같은 나라는 3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고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도 10개국이 넘 는 다 한다. 우리나라가 2만 달러 달성해도 순위가 현제 50위 정도인데 그래서 50위라면 선진국이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진국은 상대적 개념 으로 통해야 한다. 일단 국민소득순위 상위권이 필수적조건이 사람의 삶의 수준도 선진국 기준에 맞아야 한 다. 잘 산다고 무조건 선진국이 아니다. 그 이유를 한국 사회에서 본다. 지난 세기 동안에 근대화라는 구실로 경제성장이라고 사회 구조적 변화로 정치구조의 민주화, 경제구조의 산업화, 생태구조의 도시화, 계층구조의 평등화 등으로 사회변동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해방 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속도가 급속하게 변화했다는 이유로 가치관의 혼란을 맞고 있다. 특히 사회 속에서의 삶이 물질만능주의로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본다. 여기에 따르는 현상으로 사람들은 가진 것 즉 소유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물질의 많은 것을 소유하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8-27
  • 광복70년, 분단 70년 민족의 화해
    우리 민족이 일본에 의하여 침탈당하고 살았던 일제 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으로 36년이다. 생각하면 일본은 1910년대 무단통치시대(헌병경찰통치시대), 1920년대는 문화통치시대(민족분열통치시대), 1930년대는 민족말살통치시대(병참기지화정책, 민족문화의 말살, 인적, 물적, 자원의 약탈)로 36년간의 민족의 말살 정책은 참혹하리만큼 한 그러한 시대를 알아야 한다.우리 한민족이 오즉했으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지만, 여기에 더 가세한 일본은 1919년 8월 29일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을 맺어 500년의 조선왕조역사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으로 편입시키는 일제 강점기를 역사적으로 아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의 결의를 모으는 민족의식을 고취해야 현 시대의 결단 의지가 필요하다. ‘광복70년, 분단 70년의 의미’는 민족긍지와 자긍심을 고취하고, 민족이 하나 되는 국운융성의 기운을 발양(發揚)해 궁극적으로 통일로 가는 삶의 이정표를 정립해야 한다. 우리는 해방과 분단70주년을 맞아 민족의 근본을 알고 하나 되어야 한다. 뒤틀린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고쳐야 한다. 이를 행사하는 주인은 백성인 국민이다. 남한은 민주공화국, 북한은 인민공화국이라 한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체제를 달리하고 있을 뿐 하나 된 민족의 분단의 잘못을 보고 있다. ‘공화’의 나라라는 말이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공화(Republicanism)라는 말인데 공화국, ‘공화국’이라는 말은 주권이 다수의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공화제의 나라라는 말로 그 정체를 이름한다. 이 의미는 정의와 공동 이익을 서로 나누는 그 정체를 뜻한다. 이 근원에 뜻을 달아 이를 인정한 나라라는 말인데, 서로 이념을 달리해 내 세우고 분단 70년의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 삶은 한 민족의 피맺힌 일제 강점기는 둘이 하나 되어 온 수치와 고난의 형극을 같이 해 온 민족의 한(恨) 맺힌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 ‘70’ 이라는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강점기의 수난은 누구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형제의 아픔이요 나라를 빼앗긴 땅은 나, 너의 다른 땅이 아니라 우리의 같은 땅이다. 잃었던 국권을 다시 찾는 광복(光復)과 국토분단(分斷)의 빛과 그늘에 함께 빛을 받는 광복이 되어야 한다.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 왔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아왔다. 상대방의 피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승리이며 누구의 기쁨이 될까 우리가 남의 힘을 빌려 자기 형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으니 이 세상 어디에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또 있겠는가. 한국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은 아직도 민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와 민족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민족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사는 사회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행동해야 할 때인 것을 깨닫고 민족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분단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고 분단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비극의 원인을 보려고 할 때 분단극복의 길은 트이지 않는다. 반평화적인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통일은커녕 민족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는 형제가 형제를, 동족이 동족을 배반하고 죽였던 골육상잔의 비극 앞에 서있다. 조국광복과 더불어 우리가 건설하고자 했던 올바른 민주주의, 활기에 넘치는 시민사회, 그리고 정의로운 경제 질서를 구축하고, 이데올로기의 냉전체제를 부추기지 말고 민족적 화해로 국민정서를 도출하며 마침내 우리의 힘으로 민족공동체를 이루어 통일을 향해 힘찬 행보를 내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그 땅은 우리 땅이 아니며 그 조국은 우리의 조국이 아니다. 70년 전 분단의 치욕을 벗어나 분단과 냉전으로 심화된 분열과 대결의식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결의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통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통일의 방향과 방법이 기독교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며 그 원칙은 화해이다. 통일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고 평화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통일 문제를 평화문제와 연결시키는 과제가 교회의 사명이다. 평화는 적대관계와 원수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와 대화의 정신을 가질 때 이룩된다. 서로간의 오해와 편견 증오심을 청산하는 것이 화해의 조건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8-14
  • 내리사랑과 치사
    우리나라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독일 속담에 `한 부모가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그렇다. 이는 사랑이나 인정(人情)은 본디부터 지녀 오는 사람의 마음이기에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는 쉬워도 역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수직적인 관계에 기인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어버이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다는 의미로 예기(禮記)에 나온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으므로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 하고 효도하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면서 사회가 존속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현상을 보기도 하고 과거 전래 생활 풍습에서 보기도 하였다. 실로 사랑과 효도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여질 때 빛이 난다. 그런데 사랑과 효도는 달리 이상하게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내리사랑은 그 도가 지나쳐 자녀를 나약하게 하고 버릇없는 아이로 길러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치사랑은 교육을 통하여, 서책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조장하여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로 오늘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성서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무조건 주는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가페가 사랑받을만 한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에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담는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쫓겨나거나 자신의 권력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에 포기만큼 적당한 단어는 없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드러난 권력 포기의 명백한 모습이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의 삶은 이러한 포기를 드러냈으며 이 포기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포기의 지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이어진다. 예수는 삶 속에서 죽음을 실현하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꽃피움으로써 죽는 방법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갖 능력을 드러낸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無力)하게 잡히고 무력하게 십자가를 진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무력은 예수가 생명을 얻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기도하러 올라간 겟세마네에서 무장한 적들에게 잡힌다.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은 요란한 무기를 들고 예수에게 왔다. 예수는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순수하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히 이러한 내어줌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결코 자포자기나 절망과는 다르다. 예수는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나눔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 피조 세계에 내재하는 분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임재하는 분으로, 그리고 역사에 개입하고 활동하는 분으로,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가 지니는 목적은 성령에 의한 섭리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현존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나타나고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 이전에는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택, 구원, 계약과 섭리적인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나 결혼관계의 사랑에 견주어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성서에서 누가는 사랑의 속성을 누가복음서에 나타내 보인다. 서두에 해당하는 눅2:14의 천사찬송 구절 속에 예수 탄생의 전체적 의미와 활동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이렇게 담고 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기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만드는 수직적 기능을 수행하려고 이 땅에 왔다는 점에 유의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7-30
  •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
    종교 중심의 중세시대가 끝나고, 인간중심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 가장 힘을 받았던 사상은 이성주의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감성과 이성으로 정신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근대에 와서 인류가 발전을 하기 위하여 이성주의에 매몰되고 있다. 이 이성주의는 베이컨의 경험론과 자연과학의 발달로 극대화 됐다.그러나 실로 이성주의는 크게 모순을 유발하고 있다. 이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의 현장을 보게 됨으로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하며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부하던 인간들의 눈에 비이성적인 참상을 당하고 나서 그 답을 세계인들은 감정에서 찾게 되었다. 요즘 세상사 살아가는 꼴을 보고 있다. 학식으로 인간을 설득시키려는 논리와 합리가 극대화되고 있지만 감정은 메말라 감성만이 중요함을 사회생활에서 느껴본다. 그 예를 들면 친구끼리 다툼이 났을 때 잘 설득되는 이유는 감성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보자면 자기만이 옳다고 자기의 주장과 근거만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우겨봐야 다툼하는 것으로는 결과가 없다. 감성적으로 양보와 포용만이 이성의 논리를 이길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그 사랑은 서로가 같이하는 성격이기에 자기만의 고집으로는 되지 않음을 감성으로 처리하게 된다. 오늘의 시대는 무지와 혼돈의 시대를 넘어 理性의 시대에서 感性의 시대로 가는 것은 본래 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으로 본성으로 이행되고 있다. 이성만으로는 방향을 이끌어낼 뿐 세계를 변화시켜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을 변화시켜내는 힘인 사랑, 즉 감성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理性과 感性의 바탕의 주인공이며 그를 조율할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진정 필요한 시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욕망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성을 늘 목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속화된 종교와 정치권력은 그 파괴적 자본주의의 충실한 종으로서 많은 이들을 혼돈과 무지 속에 가두고 이성적인 생활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본래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의 주관을 잊으며 삶을 이기려 한다. 인류의 진화는 理性이 남성성의 시대로 그리고 感性이 여성성의 시대로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으로 그 어울림은 그 둘이 어우러지는 시대를 살아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감과 공감은 결국 누구든지 함께 더불어 공유할 때만 일어나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이성은 방향을 이끌어낼 뿐 세계를 변화시켜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을 변화시켜내는 힘은 결국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랑, 즉 감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욕망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성을 늘 목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속화된 종교와 정치권력은 그 파괴적 자본주의의 충실한 종으로서 많은 이들을 혼돈과 무지 속에 가두고 있다. 지금은 진정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그 발현이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동, 감격, 공감 같은 것을 제외하면 인간에게서 분발심이나 자기혁신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에서 인간이 이룩한 풍요를 누리면서도 사람 사이의 정에 굶주리는 인간소외에 괴로워하면서 정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본다. 정을 찾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감성의 욕망을 전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감성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는 끝이 없고, 하나의 정이 이루어지면 싫증을 느끼지만 그것은 다시 재생산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감정에 복받치면 이성을 잃고 어떤 일을 저질는지 모른다. 감정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감정이 안정되어야 이성도 작용할 수가 있다. 무시되었던 인간의 감정이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사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과학은 감성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시작하였다. 심리학에서 감성이란 기본적으로 감각기관에 기초를 두는 심리적 작용임의 하나임을 밝혔다. 감각기관으로부터 독립된 능력인 이성과 구별되고, 일상생활에서 인정, 향수, 애착, 정감, 동정심, 미의식이나 상상력 등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동, 감격, 공감 같은 것을 제외하면 인간에게서 분발심이나 자기혁신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7-23
  • 남북 간 동질성 회복
    정부는 올해 남북 간 동질성 회복의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여 한반도 통일시대를 개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년은 해방 70년이자, 분단 70년을 맞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리는 민족 동질성 회복과 실질적 협력으로 여기에 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정부는 인도적 지원이나 협력에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남과 북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민생협력을 추진하고 사업의 범위와 그 폭을 넓히고 사회문화 교류 및 인도적인 사업을 확대하고 민간 교류의 참여도를 넓혀 광복 70주년의 기념으로 북한과 함께 추진할 수 있도록 남북관계 발전이 이루어져 서로의 협력의 관계로 이산가족의 만남을 숙원 한다. 남과 북은 한 조상 때부터 살던 한 나라의 조국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모여 살아 온 한 자손의 배달민족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민족으로 그 문화와 삶의 역사가 같다.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의 시작은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합법적인 진출로 일제는1894년 갑오농민항쟁(동학)을 핑계로 청일전쟁이 발발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통치권을 장악하며 농민군을 유인해 전멸에 가까운 결과와 소탕작전을 펼친다. 일제는 열강들 간의 힘겨루기에 활로를 모색하던 중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듬해 1895년 명성황후를 난도질하여 살해하고 불태워버리는 을미사변을 저지르고 이로써 친일내각의 기틀을 완성한 일제는 대부분의 시설권, 개발권을 우선 점유하고 실질적 대리통치를 자행하고 형식상의 일제강점기에서 제외된 구한말의 식민지수탈은 본질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청산리대첩과 헤이그특사(고종황제 밀명으로 특파)의거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독립투사들의 첩보와 거사) 등의 조선독립의지는 남과 북의 분명한 비사도 같다. 이는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초강수로 친일내각 마저 해체되고 고종황제의 실질적 통치권은 박탈되고 만다. 이도 남과 북의 한일합병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 역사도 같다. 이에 1919년 3.1조선독립선언과 독립항쟁이 최소 2개월 이상 지속되고 600만 명 이상의 시위가 역사에 남는 기록도 같다. 1919년 3.1독립항쟁으로 무차별 총기난사와 구속투옥 및 학살 등으로 국제적(특히 러시아 등)으로 비난받자 1920년부터 문화통치라고 미화해서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투사들이 망명하거나 국경을 넘어 만주와 러시아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독립투사들도 같다. 1943년 일본이 하와이로 지칭되는 진주만 폭격을 감행하고 선전포고도 없었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대대적인 전쟁참전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본강제 징용과 학도병 징집 및 일본군위안부 징발 등이 이 시기에 자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노예에서 직접적인 전쟁노예로 전락하던 대사건의 역사까지도 같다. 상해임시정부를 주축으로 항일무장전쟁사의 큰 획을 기록한 대한광복군과 미 해병대 소속 한미연합특수부대가 탄생했던 이유이다.항일전쟁선포는 축소되고 가려졌지만 상해임시정부의 가장 구체화된 한국해방전략의 전술도 남과 북의 역사도 같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의지와 꿈을 이은 정통세력은 임시정부에서 ‘해외파’로 김구와 이승만을 포함하고 ‘국내파’로 김일성을 포함한 독립운동자들을 생각해 보는 해방운동의 선봉자로서도 같은 인물들이다.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1945년 해방 후 한반도의 북한은 공산당이 포진하고 남한은 이승만이 기득권을 잡으며 대립하는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 다른 쪽으로 갈라지는 남과 북의 다른 정부가 되어 하나의 나라가 둘이 되었다. 과거의 동지가 해방된 후 적이 되어 세상에서 물과 기름처럼 순식간에 민족이 갈라지는 1950년 6.25 사변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민족이란 이해를 언어, 공통의 문화유산, 종교, 관습과 같은 객관적인 기준이 민족을 형성한다고 보는 것에서 민족은 나라에 선행하며 공통의 역사적 가치와 사회적 유대에 기초를 둔 “실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민족이란 국가나 정치형태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민족의식 혹은 민족주의라는 것도 이런 원초적인 동질성에서 점차 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공유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되는 집단. 이 경우의 문화란 언어·종교·세계관·사회조직·경제생활 및 그 밖의 생활양식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뜻을 지니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7-08
  • 우월감과 어울림
    이번 주 서울교회 전체 방에 목사님 ‘심방 문자’란에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은사는 남보다 우월함이 아니고 어울림입니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 말씀에 힘입어 이번 주 설교문입니다. 온통 세상 사람들은 자기 우월증에 빠져 있고 이 자신의 우월감에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이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 드는 것이 우월감이며 바로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것임도 알게 합니다. 이 우월감은 만으로는 세상을 사는데 권위를 내세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현실을 경험한다. 우월감 자체는 사실로 무엇을 모르는 데서 오는 감정이기에 열등감에 빠질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예컨대 가장 똑똑한 사람과 가장 멍청한 사람이 통할 수 있고 지능이 발달한 사람이 지능이 거의 없는 동물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자연을 보고 짐승들을 보면 어리석게 보이는 것들이 그들 나름으로 똑똑하다고 보는 점은 나름대로 생각한 관념으로 행하는 나쁜 습성은 서로의 관계에서 멀어진다. 세상은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에 변화하며 이어가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서 일구어 가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 서로의 관계는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여기에 나온 성서의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후예로서 바벨론에 대한 슬픔을 한 몸에 입고, B.C.53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적의 방해에서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며 다리오 왕 치하에서 총독의 자리에서 선지자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 선지자들의 변함없는 격려에 성전 재건은 BC515년에 완성되어 스룹바벨의 역할과 그 공을 인정하기에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도 하였다.오늘의 본문은 스가랴서의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하고 외칠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본래 어울림은 화해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 자연의 이치는 서로가 함께하는 화해에서 어울림을 깨닫게 한다.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끝내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할 그 이름, 영원한 지혜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는 것이다. 그 영원한 지혜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혹자는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으로 이야기하지만 기독교는 엄밀히 따지면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통하여 계시해 일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영으로 계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고 참되기 읽고 깨닫고 날마다 말씀으로 깨우쳐 사는 삶의 생활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믿음의 은혜로 사는 삶이다. 자신의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벗어 버리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십자가의 도리를 몸에 지니는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는 해”에 하나의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해로 계시 받는 통일을 위한 기도하는 2015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소중히 추구하는 남북의 지도자가 평화주의자로 거듭나는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통일을 기도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른 듯 하지만 한 뿌리에 있다. 이는 삶의 정체성을 가로 막는 무덤과 같다. 부활의 길로 나가는 자는 자아를 벗어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길로 나가는 주님의 길, 진리, 생명의 길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불리는 6.25사변은 하나의 민족이 존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같은 형제도 상관없고 우리끼리만 잘 살아야 한다는 자기 이익추구에만 매몰되어 가는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은 이웃사랑을 내세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일러준 교훈마저도 사회도 교회도 그 말씀을 잃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화해와 용서 이해와 관용이 필요한 때이기에 우리는 어울림의 자기를 찾아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다 지우고 광복 70년을 맞는 해에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서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6-29
  •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성육신 신학
    한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직후에 호주 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에서도 각각 선교사들을 파송함에 따라 서로간의 선교적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선교사공의회’를 조직(1893)하고 선교구역을 분할하였다. 이 네 선교부는 결국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 함께 모여서 ‘독노회’를 설립하면서 단일교단을 형성하였고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장로교회의 신학적·제도적 특징은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혁교의 일반적 전통에서 서로 다르지 않는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와 그가 세운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건이 분열의 원인이다. 1953년 당시 김재준 목사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한국 장로교는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분열했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성장하던 시기는 19세기 구한말부터 일제의 식민시대를 거쳐 해방과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던 요동기였다. 한국신학의 발달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전개되어 왔으며 국가 민족 문화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민족적 위기를 겪으면서 신앙과 교회 사상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그 나타남은 '첫째는 개인의 영적구원과 소망에 중점을 둔 교회의 내적 운동이고 둘째는 현실의 고난과 부조리를 극복해 나가려는 외향적 신앙운동이며 셋째는 한국의 전통문화 및 종교와 기독교 복음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문화전체의 의미와 구원을 모색하는 신앙운동이었다'고 유동식 신학자는 말한다. 이 세 가지 신앙운동은 다시 세 가지 신학의 흐름으로 전개되어 보수적 근본주의신학,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의 신학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여기에 박형룡은 신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장로교 계통의 신성중학교 평양숭실전문을 졸업했고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 루이빌의 남침례신학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장로교총회로부터 표준성서주석위원장을 맡아 9권의 표준성경주석을 펴내고 역저 ‘교의신학’을 집필했다. 박형룡은 1953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입장에서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선교사에게서 받은 신학을 지키며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낳았다. 이때문에 그를 가리켜 한국 칼뱅주의 신학의 기수요 보루라고 한다. 박형룡의 신학을 이어 받은 대표적인 교단이 예장합동, 고신개혁 등 보수 교단들이다. 여기에 진보적 사회참여신학은 ‘삶’이 사회적 살림살이를 통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려는 신학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예수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할)은 바로 이러한 삶의 역사적 실현이다. 따라서 성육신의 사건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참여가 뒤따랐다. 이 신학적 전통을 낳은 대표적 인물이 김재준이다. 김재준은 한국 진보주의 신학의 기수로 불린다.1901년 송창근목사의 전도를 받은 김재준은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숭인상업학교 교사로 재직 중 그는 평양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에 모두 6편의 논문을 발표,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과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라는 논문인데 동정녀를 방년의 젊은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1945년 조선신학교가 서울 동자동에서 새 출발을 하자 교장에 취임하고 조선신학교의 신학이념을 발표했다. 그것은 첫째 조선 전체 교회가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세계수준에 도달할 것, 둘째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어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할 것, 셋째 교수는 학생들의 사상을 억압하지 말 것, 넷째 칼뱅주의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 할 것 등 이다. 이 이념은 조선신학교의 모든 교수들의 공통된 교육이념으로 오늘까지 한신대학교에 남아있다. 여기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신학은 대부분 진보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활동한 교회로서 기독교장로회는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기독교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당시의 사람들, 즉 민중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등, 기존 보수적 개신교계가 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적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6-18
  • 망가진 세계 치유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생태계가 서로 하나 되고, 서로 교제하며 살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런 코이노니아의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서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의 바른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궁극적인 관계임을 생명 중심적 환경의식의 변화와 기독교 환경윤리로서의 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의 지배 개념이 아닌, 가꾸고 보존하여 상생하는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가기 위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지도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삶의 행위’때문이라는 실제적인 사실을 알게한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임을 성서는 이를 알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높은 지식에 처하여 있는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오늘의 세계관이나 세상살이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본다든가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행위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행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기에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살아 있는 생명을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삶의 현장에서 그의 삶의 행위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 세계의 문제를 치유하는 행위였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그저 독립적인 해석이 아니라, 창세기 2장과 연관지어 바른 해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배’와 ‘통치’의 의미가 아니며, 창세기 2장과 연계하여 해석할 때 ‘돌봄’과 ‘지킴’의 의미로 해석되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보전 사상은 구약의 율법서, 성문서,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서신과 요한문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전통적 구원론은 구원을 인간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제한하며 자연의 세계를 소외시켰으나 성서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우주적 구원론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희망하는 인간과 모든 창조 세계의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우주적 세계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에 있어서도 성령은 창조사역에 참여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새 창조의 사역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며 동시에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성령을 통하여 자연에 현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며 ‘성령의 전’을 파괴하는 악행인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가치관의 문제임을 고려할 때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창조 보전(保全.integrity)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윤리는 청지기 윤리와 생태학적 윤리 그리고 생명공동체 윤리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6-10
  • 가정부재 현상을 보며
    '가정부재’란 가정의 기본적 구성원인 부모가 장기간 주거를 이탈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중요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가정을 말한다. 가정부재(家庭不在)도 따지고 보면 결손가정의 한 유형이지만 결손가정은 부모의 부재현상이 영구적인데 비하여 가정부재는 일시적이라는데 차이가 있다. 가정부재는 자녀들과 부모의 접촉기회가 적어 상호간의 의사소통, 모성애 등이 결여되고 자녀의 교육문제 및 건강관리가 방임되며 가정 내에서의 자녀들의 일상생활이 파괴하게 되어 반사회적 비행화의 우려가 되는 가정부재 현상을 말한다. 오늘의 이 사회는 세속화 속에서 공업화, 도시화, 핵가족, 세대문제로 가정부재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정부재 현상은 가정이 비인격적 집단으로 변하고 있으며 교육을 가정외의 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음에 그 문제가 있음도 알게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기독교 교육의 차원에서 예일대학의 신학부의 '랜돌프 크럼프 밀러'는 기독교교육의 난제를 풀어 줄 단서를 말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삶을 위한 교육에서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며 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다. 즉 화해의 목회차원에서 가정을 구속적 세포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정은 기독교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가정의 부모들은 가정을 대화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고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때에 그 대화의 내용은 삶의 물음과 삶의 목적과 삶에서 참을 추구하는 대화와 만남의 공동체로 삶의 가치와 역사의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이는 사람은 측량할 수 없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이 사상과 삶,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주권적 하나님께 예배, 불가학력적인 은혜, 세상은 부정적인 죄에 속한 곳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현존임을 의식하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 그리고 여기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이고 적용과 선포, 자유적인 여유로 삶을 실현하는데 신앙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기독교교육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게 하며 삶과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 양식과 문화를 세우고 전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오늘의 사회 현상은 교회의 가정 신앙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한 점은 옳다. 이것은 가옥구조의 변화, 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믿음의 약화에 기인하며, 교회의 미래는 가정에 달려 있고 그 미래는 자녀에게 달려 있기에 가정 공동체 안에서 상호 인격적 성숙을 위해 구성원 서로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기다움을 잃지 않아야 하며, 특히 가정공동체는 진정한 부부 사랑의 결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상의 선물인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도록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가정을 말한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준비는 혼인하기 전부터 이루어진다. 가정은 자녀 출산이 부부 사랑의 절정이라면, 자녀 교육은 부모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요 의무이다.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 생명의 전달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본질적인 것도 알게 한다. 부모는 자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전인 교육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진심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가정은 성장기의 자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며 체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부모는 사랑에 대한 일차적 교사이며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행동과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부부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가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는 것이고 이를 체험한 자녀들은 자신들이 성장하며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랑과의 관계의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엮어 나가는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는 인간 삶의 갖가지 어려움과 시련들을 이겨 내고 힘 있게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녀가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독립할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화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삶이 익혀 나가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27
  •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뜻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이를 믿는 자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닮은 형상이 삶의 관계에서 이를 실행함을 의미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며(히1:2)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기한이 차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다.(갈4:4),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다(막14:36). 요한복음15:15-16절에 보면 "15;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 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너희가 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는 창조자를 말한다. 창조자는 세상을 제조하신 분으로 이를 주관하는 자이고 주인이시기에 세상을 사는 살림살이는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삶의 주관자이시며 그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소유이다. 세상에 모든 것은 사람의 것 아닌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내 것이 아니기에 삶의 마지막에는 빈손으로 간다. 다만 아버지의 상속자뿐이다. 소유권은 세상의 것이 아니고 그 소유권은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은 관리자로서 상속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성육신 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순수한 보편적 인간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삶으로 보여 주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은 그 자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들이 탄생하여 우리도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을 거쳐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끝내는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오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하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누구든지)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분뿐이시다." 하심에 주목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토기장이와 진 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권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만 알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흔히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아빠(ABBA) 아람어로 호칭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 모두가 우리를 하나님 사이를 새로운 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로서 삶을 베푸시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이해한다.'아버지'를 한국 국어사전으로 보면 남성 어버이, 아들이나 딸을 가진 남자. 처음으로 어떤 일을 개척하거나 크게 베푼 사람을 말하고 창시자로 이해하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친근하게 일컫는 말로 "아버지여 제 소원을 들어 주소서"로 쓰임을 알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의 관계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은 없다. 그러기에 부모와 자녀가 사는 가정을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간다는 뜻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한다. 서로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다르면 그 집안은 불안에서 살 수 없다. 서로의 소통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집은 무너진다. 이 관계를 '물과 어름'으로 그 이치를 비유하고 싶다. 물은 어느 모양의 잔에 부어도 부딪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어느 모양의 잔과도 생각과 뜻을 같이한다. 곧 이는 소통이 가능하고 어울림이 가능하다. 하지만 얼음은 그렇지 못하다. 네모난 얼음을 둥근 모양의 잔에 담는다면 잔을 부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얼음이 둥근 잔과 서로 함께 닮으려면 자신을 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둥근 잔에 들어와 잔을 채우는 둥근 물이 된 후 다시 자신을 얼게 하여 둥근 얼음이 된다. 얼음이 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과 얼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이한 두 가지 실체가 아니라 서로의 실체이라는 관계를 알게 한다. 다만 상이한 사물이나 현상이 처해 있는 모양인 그 상태(狀態)로 다르게 존재한다. 얼음과 물의 변화는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그 상태의 변화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얼음과 같은 마음과 물과 같은 마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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