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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여설(如說) - 배성산목사
    관계의 돈독성이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버지를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기보다 스스로 마음가짐이나 생각들을 달리 표현하고 갖추는게 훨씬 더 좋은 방법 일 수 도 있다.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시든, 아버지랑 진지하게 얘기를 하든 , 평소 몸에 배어 있는 습관과 생각, 행동들은 한 사람을 표현하고 더 나아가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좋게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과거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현대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어가고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가장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 가부장제적 사회를 옹호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재 비행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에 대한 범죄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과거처럼 자식교육을 어머니 혼자서 전담하는 것은 무리이다. 대체 아버지의 역할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사회적 위치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보면 자기만족보다는 나이들면 자기 얼굴 책임지라고 아주 많이 강조되지 않나 생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위 또는 삶의 완성 단계에 접어드는 중년 때에 자녀에 대한 중압감, 아내의 만족을 위한 또는 가족모두의 지위상승 효과에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 우리는 자녀에게 진정 사회적 성공만을 강조하는 스스로의 아버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요즘 사회에서 번지는 사회적 문제는 "현재 비행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에 대한 범죄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 스스로 사회적 일탈 행위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격고 있는 시대적인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 모든 이의 정서 혼란기가 조속히 시대에 모두가 적응하는 정서의 확립으로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2-18
  • 약속과 구원은 믿음 - 배성산목사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고 희망이 없기에 약속이 없는 사람이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알고 약속하며 기다리는 자이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희망을 갖는 기다림이 있는 자 이다. 약속이란 서로가 믿고 오랜 기다림을 통해서 만남을 갖게 하여 그 믿음을 실현을 보인다. 삶이 아무리 쓸쓸하고 외로워도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만남을 고대하고 설레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 삶의 미래를 위하여 약속을 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아들 예수를 약속으로 하고 이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 예수를 믿는 자는 복음의 그 약속을 믿고 보고 미래를 기다린다. 신약 성서에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약속을 믿고 보고 기다렸고 안나는 금식하며 약속을 준비한다(눅2:25). 동방박사들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목자들은 양을 치면서 주의 오심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모든 사람들은 이 기다림이 없이는 약속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 땅의 모든 생명은 창조로 지음을 받았기에 창조의 의도를 따라 실현하는 약속을 보여 준다. 약속은 한 공간에서 시간을 알아야 약속이 실현한다. 이것이 “기다림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세상에는 삶의 목적을 모르고 현재만으로 살아가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치 앞을 모르고 구렁텅이로 가는 소경과 같은 행로를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 약속에 구원이 없이 살기에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고 까마득히 삶의 의미를 잃은 체 세월의 시간을 살아가는는 군상들의 삶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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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산
    2014-12-12
  • 대림절은 때를 알게 한다 - 배성산목사
    기독교는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믿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면서 그의 삶을 따라 살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특별한 역사적 지식이 없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획기적인 기회를 열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인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얼마나 가까운가? 지금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멀리 있는 것 같다. 교회력은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부터 시작한다. 마침 연말이기도 하여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오심과 새해를 기다리면서 살려고 한다. 지금도 흘러가는 세월이라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을 번갈아 가며 살아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2-06
  • 값비싼 은혜 - 배성산목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 에서 제자직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을 본다. 그는 종교적 교리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신앙 행태를 아주 값싼 은혜라고 규정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용서를 전하며, 신앙의 훈련 없이 세례를 주고, 신앙 고백 없이 성찬을 행하며, 통회함이 없는 데도 사죄를 선언하는 마치 싸구려 행상인의 물건처럼 시장 바닥에서 바겐세일 하는 은혜를 말하는가 하면, 반면에 값비싼 은혜는 삶에서의 삶의 구원이 값진 것임을 알게 한다. 그 삶은 십자가로 희생하는 값비싼 은혜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에게 그의 아들을 대가로 요구하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값비싼 은혜”란 교리, 윤리적 원칙, 종교 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삶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의 삶을 요구한다. “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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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산
    2014-11-27
  • 용서하는 자 - 배성산목사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천국행 열차를 타고 믿음으로 간다고 하지만 실로 생각해 보면 지옥행 열차를 타고 회개하지 않고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회개하지 않는 용서란 무엇인가?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는데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를 말씀하셨는데 무한의 용서를 말한다. 이 용서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용서하는 신앙이지 용서받는 신앙이 아니다. 나는 귀한 존재이지만 자기를 부인하는 죄 많은 존재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義)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흔히 용서란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으로만 안다. 그러나 용서는 남이 나를 용서하도록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용서는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항상 용서의 자리는 내가 남의 잘못이나 행위를 이해하는 것으로 알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고 그 배신에 몸부림치는 고뇌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사실로 느끼며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 삶의 자리를 남에게 내어 주고 남의 간섭에서 종노릇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찾아내는 근본적인 본질이다. 그런데 ‘나’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본 모습을 잊고 있기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는 전제를 알게 한다. 인간은 “용서 받는 자”의 입장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어 “용서하는 자”라는 자기 부정의 입장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1-21
  • 죄는 사랑의 자리를 보게 한다 - 배성산목사
    요즘 항간에서는 ‘뇌사 도둑에 논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의 집에 침입한 도둑을 몸싸움 도중 뇌사 상태에 빠뜨린 20대 집주인에게 징역형이 선고된 사건과 관련, 검찰이 이례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은 `속칭 ‘뇌사도둑’ 사건 보도에 대한 원주지청의 입장을 통해 “단순히 상해를 입힌 정도에서 훨씬 더 나아가 김 모(55·도둑)씨를 의식불명 상태(식물인간)에 빠뜨린 점 등을 미뤄 최 모(21·집주인)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원주지청은 “최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김씨를 제압한 후에도 10여분 동안 발로 머리를 걷어차고 빨래건조대, 허리띠로 내리치는 등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고 설명하면서 지난 3월 최씨가 집안에 들어온 도둑 김씨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흉기 없이 도주하려던 도둑을 과하게 폭행했다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최씨를 기소하고, 8월 춘천지법 원주지원은 최 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여기에 ‘뇌사도둑’ 논란이 일고 있어 세간에서는 ‘뇌사도둑에 논란’이 되어 그 죄에 대한 적용이 ‘정당 행위’인지 ‘과잉행동’인지 요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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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산
    2014-11-17
  • 어떻게 살아야 하나? - 배성산목사
    인간의 구성요소에 관해서 성서는 지정의(知情意)가 겸비한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격자를 가르치고 있다. 신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로서, 우리는 신자란 영적인 일들에만 관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성도들을 영적인 차원에만 관심하시는 분이신 것으로 생각하려는 잘못된 태도를 알아야 한다. 즉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들이고, 육신의 일들이나 물질적 생활은 세속적이고 죄악된 일들이라고 구분하는 헬라적 영육 이원론(二元論)의 관점에서 신자의 생활을 해석하기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의 부분을 간과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영혼구원이라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역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으나, 그와 함께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전인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총체적 사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세움을 입은 무리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정체성의 출발은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0-31
  • 겨울이 오기 전에 - 배성산목사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딤후 4:21)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에 보낸 편지로 가을의 정취가 바울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이나 자연 환경의 분위기나 처지를 생각하면서 메시지를 디모데에게 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딤후3:1)”와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하신 말씀으로 바울의 가을 정서에 젖어 신앙으로 부탁하는 말씀을 알게 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갈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적 삶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가을에는 수확이 있고 단풍이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란나무에는 가을정취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단풍의 화려함과 얼마 후에는 다시 낙엽으로 시절을 따라 땅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덧없이 버림받아 땅위를 구르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저 가련한 낙엽처럼 가버릴 거라는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가을이다. 자연에는 가을이 있기에 무더운 여름의 낭만을 추억할 수 있고 인생에는 생각하는 힘이 있기에 삶의 자체를 갈대로 비유한다. 인생의 모든 것은 무상하여 슬픔도 가고 기쁨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모두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가고야 마는가! 행복과 불행도 가고 돈과 명예도 가고 어느 날에는 인생의 전부가 가버릴 것이다. 아득한 세월 속에 여기 그렇게 자리 잡아 온 산·바다·강·들, 매일매일 이어지는 새벽·낮·저녁·밤, 해마다 되풀이되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그것들과 어우러져 흘러가는 우리들의 삶 또한 늘 그런 것이지만, 늘 그런 가운데 스스로 새록새록 새로움을 맛볼 수 있어야 정말 사는 것이 아닐까! 산과 바다, 강과 들이 있는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0-24
  • 사니까 사는가? - 배성산목사
    “사니까 사는가” 주제는 그저 사니까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나 맹목적으로 사는 어리석은 삶을 알게 한다. 그러나 삶이나 생명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창조된 것은 온 우주에는 하나도 없다. 창조된 모든 것은 제조자의 의도에 따라 기능이 움직이게 된다. 그리하여 창조되어 나타나는 삶에 그 질서의 이유도 모르고 사는 생명은 “사니까 사는 것이다” 생명은 사는 것으로 창조자의 의지에 따라 삶을 움직인다. 예컨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창조주께서는 시공간을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아 시절을 따라 성장 성숙으로 열매를 거두고 씨를 남겨 또한 한 생명을 낳게 한다. 이는 연속적인 속성으로 생명의 삶의 진리를 펼친다. 여기에 우리는 ‘아! 아름다워라 찬란한 생명이요’ 하고 감탄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움이다. 생명. 삶, 죽음의 큰 문제를 놓고 인생의 삶은 사는 것에서 나름의 한 세상을 평생으로 산다. 거기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인륜(人倫)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질서로 이륜(彛倫)이 있다. 그래서 이를 천륜(天倫)으로 부자(父子)의 관계를 알게하고, 형제 사이에 사랑의 약속을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알게 하여 서로 삶을 사랑으로 관계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0-15
  • 하루가 천 년같이 - 배성산목사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은 창조적 사관으로 먼저 창조가 있고, 마지막에 종말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있어 알파와 오메가로 이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루의 삶을 영원한 삶으로 사는 것이다. 성서는 여러 세대의 사건을 기록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성과 현재성”으로 깨닫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역사라는 “과거의 기록”을 읽는 시각과 “미래”라는 사람이 알 수 없는 때의 일로 여겨왔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말은 이 땅에 서서 사는 세상 모든 인생은 반드시 주어진 오늘 “하루”밖에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만 주어진 인생에게 “영원”한 “하루”를 살라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말씀은 곧 우리들의 삶에서 생명이 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을 과거와 미래의 기록으로 만 성서를 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삶에서 생명이 되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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