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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약속의 성취 - 배성산목사
- 까?” 하박국은 “왜 당신은 불복자를 내려다만 보시고 간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삼킬 때에 잠잠히 계시나이까?” 예레미야는 “당신은 나에게 기만의 시내가 되시렵니까?” 욥은 “나는 나 생활에 이제는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내 불편을 마음대로 표시하겠습니다. 나는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께 말하련다. 이렇게 당신의 종이 하는 일을 압박하고 멸시하고 간악한 자의 계획을 좋게 여기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보십니까?”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무거운 시련의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많은 성서의 선진들도 이렇게 절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 보면 삶을 익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모든 생명에 시련은 성장의 법칙이요, 인간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키일케고르는 자신의 시련과 번민 속에서 마침내 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육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믿음에는 시련이 필요하다. 명예, 행복, 건강, 평안한 환경은 인간의 영혼을 잠들게 한다. 사람은 죽은 뒤에만 비로소 평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시련에 의해서 평등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시련에 의해 성장하며 성숙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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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약속의 성취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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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삶 - 배성산목사
- 성숙한 믿음은 그 삶이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만 고집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같이 하여 성숙된 삶으로 그 인격이 신앙생활에 나타나야 한다. 인격은 그 사람의 품격을 말하며 윤리 면에서 도덕 행위의 주체와 심리적으로 지·정·의로 주체가 나타나야 하고 법률로서는 법률적 행위의 주체이어야 하며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공동생활의 주체로서의 인격적 삶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서 품격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한 개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는 것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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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삶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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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약속의 성취 - 배성산목사
-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이 담겨 있는 말씀이고 그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자임을 믿는 사람들과 다시 언약을 하여 이전 약속은 구약이 되고 새로운 약속은 신약이 됨을 본 히브리서는 말한다. '"그 첫 번째 언약에 결함이 없었더라면 두 번째 언약이 생길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며 믿음으로 이를 성취하신다. 또한 믿음을 사회심리학에서는 개인의 특정한 믿음이 사회관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결정하거나, 고정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성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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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약속의 성취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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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의 일치 2 - 배성산목사
- “다양성 안의 일치”는 이 시대에 처한 오늘의 세계교회에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은 십자가에서 그토록 장엄하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증거이다. 교회는 국가적, 문화적, 혹은 지역적 고립주의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판단과 목적과 행동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국적이 다른 해외신자들과 함께 섞이고 함께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일치된 연합으로 전 세계적인 선교에 저해 요인이 될 별도의 국수주의적 관심사를 조장시켜서는 절대적으로 안 된다. 지금 이 시대에 범세계적인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협력을 지향하는 에큐메니즘 운동은 (ecumenism) 그리스도교회들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당위적인 이 시대의 하나님의 선교이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일치운동, 프로테스탄트측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회’(Edinburgh 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시작, 가톨릭 측의 원칙은 1964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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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의 일치 2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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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의 일치 1 - 배성산목사
- 오늘의 시대에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 됨과 만민이 형제 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선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더욱 완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 세계를 온전하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분열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일치와 하나 됨은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이미 주어져 있고 이 신앙에서 하나 됨을 드러내고 가시화 하여 실현하는 교회의 일치운동임을 알게 한다. 나아가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는 세상을 하나님과 일치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열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분열되어 신음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되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불의, 폭력, 부도덕 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죽음은 인간과 세계를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일치의 길은 현재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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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의 일치 1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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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절대가치 - 배성산목사
-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 가치가 있기에 그 죽음을 통하여 삶을 다시 사는 절대적인 가치를 기준하여 보여 주신다. 삶의 절대적인 가치는 참된 길, 참 진리, 참 생명으로 구원을 얻는 가치이기에 삶의 행로에 절대적인 가치로 믿음을 부여(賦與)하며 사는 삶으로 증거를 삼으신다.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창조자의 본디대로 사는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이를 수용하여 절대적인 가치관을 형성해야 한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삶을 영위(營爲)하기 위해 삶의 현실을 판단하는데 두 가지 판단기준이 있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다. 예를 들면 여기 꽃이 있음을 표현하는데 ‘이 꽃은 장미꽃이요'하는 사실 그대로의 판단으로 알게 하고 '이 꽃은 아름다운 꽃이요’하는 것은 가치판단을 알게 한다. 우리 인간의 사회생활은 이러한 판단에서 살아간다.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이 물건은 편리하다, 불편하다. 이 행동은 옳다, 그르다. 이렇게 삶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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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절대가치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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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준가치 - 배성산목사
- 인간에게는 지구생명의 나이만큼이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자연을 터득해 온 옛 사람들의 삶의 방식들로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삶의 기준으로 살아왔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온 생활의 삶에서 우주의 생명으로 공기, 물, 땅이 삶의 근본임을 알고 이 삶은 공존 공생하는 생명공동체로서 생명작용은 보완, 의존적인 관계로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살아왔다. 이 생명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공동운명체로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짐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 생명이 어떤 형태이든 그 가치와 존엄성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고 각기 안전한 삶을 꾸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에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모든 존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하여 생명 사랑을 구현해 왔다. 오늘의 현대 사회는 인간중심의 생명기준으로 살아온다. 오늘의 이 세상은 삶의 행동 기준이 달라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생명의 답을 잃어버린 공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오늘의 우리 현대 사회와 세계와 인류를 중심 원리로 한 코스모스 폴리스적 개방 사회로 달려가고 인류의 기준과 출발점을 여기에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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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준가치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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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유추(類推) - 배성산목사
-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왜 사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는 문제는 '나'를 "믿음의 유추(類推)"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고의 신이나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내적 태도에서 신념이나 신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의 은총을 강조하는 신앙에서 믿음은 신이 직접 주는 내적인 확신이나 사랑의 태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인 역사적인 계시에 대해 하나님의 감동을 나타내는 인간의 반응을 알게 하며 인간의 궁극적인 관계에 관여하게 하는 믿음으로 이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관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삶을 사는 인생관과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으로 참 인생의 삶의 의미를 가진다. 인생의 모든 삶의 문제가 생명의 기본적인 것이기에 생명관으로 사는 삶을 살게 한다. 이는 올바른 생명관으로 살아야 자연의 피조세계와 더불어 사는 생명관으로 공생의 삶의 둥지를 틀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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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유추(類推)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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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약속된 은총 - 배성산목사
-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나 사라지는 것은 만고불면의 법칙이며 한 생명은 땅에 심어서 거두는 생명의 이치에 따라 반드시 생명의 열매로 씨를 품고 다음의 생존의 삶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는 죽어야 사는 생명의 원리를 터득한다. 참 아름다운 노년의 사람이란 마음이 잘 익은 사람이며 그러한 사람은 노년의 삶에서 얻어 낼 수 있는 소중함과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다. 사실로 늙는다는 것은 제아무리 근사한 말로 합리화 시켜보아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삶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노년은 그 삶이 여물 줄 알고 더불어 빛 밝은 성숙한 삶의 희열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노년은 소외되는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만의 삶에 영글어 간다. 생존을 위한 환경 적응과 두드러진 품위나 처지에 진중한 성찰을 한다. 인생의 노년은 그 깊은 심연의 끝자락에 숨죽이고 있는 찬란한 진리의 빛 밝음으로 노년의 일상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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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약속된 은총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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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 배성산목사
-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를 방문해 보면 한국의 척박한 삶의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교회가 개화기에 한국 사회에 어떤 삶을 가질 것인가?” 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사랑의 나침반’역할을 하다가 이 땅에 묻힌 그들의 묘지를 보면 많은 감회를 갖게 하고 숙연한 마음 그지없다. 자기 나라를 떠나 어둠 가운데 헤매는 우리 민족을 위해 빛으로 삶의 길을 열어 보인 숭고한 신앙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이 오늘의 교회를 깨우치게 한다. 구원의 나침반으로 하늘과 땅의 방향을 열어 보이신 위대한 신앙의 삶이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한가를 알게 하여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를 서울교회 창립주일에 생각해 본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 그 몸이란 유기체이다. 유기체는 전체성을 존중한다. 손가락 하나의 아픔은 그 아픔을 손가락 하나에 국한시킬 수 없다. 몸 전체가 아픈 것이다. 그리고 유기체의 각 부분은 전체의 균형과 발전을 위해 기능 한다. 교회를 몸으로 이해한 것은 바로 단합된 유기체적 공동체임을 뜻한다. 이 공동체는 몇 가지 의식(意識)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공동체는 신뢰의식이 생긴다. 신뢰의식은 자기를 비우는 용기를 요청한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초월하여 다른 경험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하신 당신의 뜻이다. 이러한 공감대 형성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귀하다고 가르치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그 삶을 친히 보여 주셨다. 이 신뢰의식이 공동체를 안으로 튼튼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면 사명의식은 밖을 향하여 예언자적 외침을 외치게 하는 의식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공동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는 사명의식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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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 배성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