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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가 찼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4:12-17; 눅4:14-15)고 했다. “때가 찼다.” 신약에서 새로운 약속의 시작의 말씀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다. “때가 찼다.” 이 말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때가 찼다”에서의 “때”는, 역사가 말해온 바로 그 때이다. 찼다는 것은 바로 그 “때”가 마침내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 “때”란 어떤 경우나 부분을 말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데 알맞는 기회나 적당한 시간으로 말하지만 대체로 시기. 시대. 연대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성서는 수시로 변하는 현 시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삶의 진정한 의미와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구도서로써 누구나 삶에서 가까이 할 수 있는 책이다. 성서를 보면 한 저자의 책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많은 저자가 있어 그 당시의 저자들이 삶을 사는 생활에서 사회. 정치. 문화. 경제적 시대적 정황에서 나름대로 경험한 하늘에 계신이의 하늘의 활동을 각자의 신앙의 결단에서 각자가 터득한 신비한 시대적 체험을 자기 문체로 표현한 작품들이 모아져서 말씀이 약속이 되기 위해 구약인 히브리어의 성경이 되어 히브리어로 씌여 졌지만, 신약의 복음서는 코이네(koine)라고 알려진 표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이는 곧 시대의 그 “때”가 있어 살아 있는 신앙들이 나름대로 삶에 구사(驅使)하는 힘이 되어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로 약속의 실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다양한 문화를 배경으로 여러 시대를 거쳐 다수의 관점에 의해 쓰인 하늘의 활동인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활동이 경전화 된 것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국적인 세계상을 드러낸다. 전도서 제3장에서는 매사에 때가 있다고 한다. 1: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2: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3:죽을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고 성서는 이를 챙겨서 “때”를 말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이상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때가 찼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시대정황에 매우 민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은유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시대변화의 흐름과 감각에 둔한 사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꾸짖은 바 있다. “너희가,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심에 주목한다.시간의 두 개념은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 이다. 수평적인 시간 혹은 직선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물리적인 시간개념이고 카이로스는 적절한 순간, 초월적인 순간이란 뜻이다. 성서에서는 “카이로스”로 자주 쓰인다. 일차원적이고 연속성을 가진 흐름으로 이해되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흐름보다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수직적인 의미로 그 뜻을 삶에서 이어간다. 사람의 삶에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0년이다. 이 100년은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우리의 삶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쏜살같이 날아간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잠에 들어 있을 때나 기계적인 시간으로 흐른다. 그리고 삶의 끝이 다가온다. 이는 의미 (뜻)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시간으로 지나갔을 뿐이다.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땅의 썩을 것을 위하여 아무리 애쓰고 성공한 것들이 많아도 카이로스 시간의 저울에 달아보아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 그냥 버려진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일생의 한 번의 삶은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 약속을 믿는 삶을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생명이 있는 생물에게는 생로병사의 일생이 주어진다. 자연의 공부는 결국 시간의 탐구와 같은 말이 된다. 삶은 주어진 시간(일생)만큼 자연을 영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원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이다. 생명나무의 씨앗이 땅속에 묻히며 잎과 줄기를 내보이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씨알을 남기며 죽음이라는 시간을 맞이하듯이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의 부활로 넌지시 “때가 찼다”는 “구원의 때” 를 보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07
  • 부활 모르쇠 믿음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무덤들이 열리고 무덤 속에 잠자던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리라는 이미 예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대 낮에 해가 빛을 잃고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을 하고 바위가 터지니까 놀라서 그제야 ‘아!’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알게 한다. 그리하여 무덤 주변에 있던 주의 제자들이 3일 동안 있다가 3일후 성 안으로 가서 예수 부활을 증거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사람의 존재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우주 천체에 하나의 점보다 적고 작은 존재라는 ‘나’ 사람이라는 존재는 예수님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신령체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긍정적인 자부심이요 곧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이를 믿는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종말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영생의 몸으로 변화 부활시켜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삼는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건성 건성하게 믿고 있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정성으로 다 하지 않고 겉으로만 믿노라 하며 생활태도에 아무런 변화 없이 부활신앙을 가진다. 이는 신앙에 대하여 굳게 믿지 않고 그 가르침이나 그에 따르는 신앙생활에서 확실하지 않기에 ‘부활’ 자체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믿음을 가진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들 하는데 육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오셨고 오시고 있고 재림하신다. 그리하여 종말론은 조직 신학의 중요한 주제요, 그 성서적 근거가 풍부하다. 종말론이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세기말 이후였다. 이는 과학 및 기술의 발전과 제3세계 태동 등으로 인한 현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 신학이 종말론과 관련하여 제기한 문제는 종말을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미래로 이해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종말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되어왔다. 현대 종말론의 중심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그것의 현재성과 미래성 중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종말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과 심판이 있기에 여기에 주목하게 한다.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에 빠진 세계의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는 그 성취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보이면서 또한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도 하여야 하기에 부활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성서적-신학적 종말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로 ‘때와 시간’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창조, 타락, 십자가의 구속, 재림을 직선적인 시간의 진행 쪽으로 이해하면서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신자들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이 매우 짙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적 종말론은 ‘때’ 중심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중심이다. 종말론의 핵심은 어느 때 , 어느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예정이나 계획에 매달리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다는 말이다. 특히 복음서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그 청사진을 우리에게 제시하기보다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시한다. 성서적 종말론은 언약적 ? 구속사적 - 승리의 종말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라 이루어진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초림에 따라 ‘이미’ 이루어졌으나 재림과 더불어 완전히 이루어질 온 세상의 대 변혁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성을 무시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른 변화에 맞추어 그리스도인들과 이 세상에 일어난 종말론의 변혁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4-23
  • 돌들이 소리지른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지질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흙은 암석이 풍화 작용이나 열이나 공기 그리고 수분 또는 생물 등의 작용에 의하여 부서지거나 분해 되어 생기는 것이다. 바위는 깨져서 돌이 되고 돌이 깨져서 자갈이 되며 자갈이 깨져서 모래가 되며 모래가 깨져서 흙이 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존재가 바윗돌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귀중하고 불가결한 존재이지만 돌이 소멸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인류의 선험적인 신념은 태양의 덕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처럼 돌의 혜택을 생각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태양의 따뜻한 광선처럼 넘쳐흐르도록 많기 때문에 돌은 인류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기 보다 거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돌 없이 존재할 것이 무엇인가? 만유인력을 생각해 보자. 무의미한 존재같이 보이는 돌의 존재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돌이 우리 발밑에 큰 덩어리로 모여 있지 않는다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引力)을 발휘할 물질이 없을 것이다. 바위는 인력(引力)의 근원이다. 우리의 삶의 발판이 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고마운 존재다. 바위가 없다면 인력 없이 상하좌우가 없는 공간만이 도사려 우주는 영원히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고 하신 말씀은 삶의 의미로 와 닿는다. 예수님의 이 상징적인 행위는 세계를 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백성은 이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고 환호를 하며 예수를 맞는다. 그 당시에 초라한 모습의 예수의 입성은 깊은 역사의 통찰을 갖게 한다. 우리가 역사를 들쳐 보면 진리를 정면으로 보고 듣기를 싫어하는 지배층, 그들은 진리를 가장 싫어했다. 새로운 것이 들어옴으로써 그들의 기존의 위치가 무너질까 위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의 소리를 비판의 소리로 들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런 증거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당시의 사회의 지배층인 바리새파인들이 예수에게 항의를 한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짧은 말속에는 진리는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엄숙한 선언이다. 폭력으로 뇌물로 저들의 입을 봉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다. 돌들은 역사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다. 증언은 입으로 한다. 그러나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귀를 꼭 닫고 있다. 그러면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귀가 안 되면 눈에 그것도 안 되면 감각기관에 호소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의 은폐는 소용이 없다. 예수의 입성자체는 결코 공격이나 항의가 아니라 그저 진리를 증거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역사에 있는 것이다. 이 자리는 지배자나 피지배자에게 있어 똑같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항거하고 귀를 막고, 입을 틀어막는 일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목격자는 증인이 될 것을 강력히 나타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고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는 중요하고도 엄숙한 그런 의미이다. 분명히 그리스도 교회는 정치나 사회사업만이 목적이 아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의 마지막이자 절정이었고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가 마침내 왕위등극을 위해 오시는 승리의 입성이었다. 그러나 예수 자신에게는 자신의 겸손과 평화, 죽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인류구속사역을 위해 죽으신 수난의 입성이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은 어떤 성명을 발표한 것도 아니지만 곧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말 못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른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 하고 가슴에 품고 있으면 독이 된다. 끝내 하지 못하는 소리들이 한데 뭉쳐서 마침내 유혈의 폭동이 일어난 것이 역사의 과정임을 세상은 다 보고 알았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에 역사의 증언에 우리가 존재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4-01
  • 신세를 지고 사는 삶 - 배성산목사
    신세를 지고 사는 삶산다는 것은 신세(身世)를 지고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먼저 창조하고 사람을 나중에 창조한다.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신세를 지고 사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몸은 이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요 영혼은 저 하나님의 나라를 상대하고 사는 삶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삶은 서로의 삶에서 신세를 지면서 서로의 삶을 관계하며 신세지게 한다. 그 이치를 깨닫는 이성(理性)과 열성으로 사는 세상의 삶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을 사는 이치를 알게 한다.성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의 실상(實狀)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한다. 믿음은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목적을 이룬다고 한다. 믿음은 실제의 상태를 알아보는 실상이기에 그 증거로 '신세를 지고 사는 삶'으로 사는 것이다. 앞서간 선진들이 이렇게 살았다. 신세란 ? 자기 한 몸에 관한 처지와 형편으로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괴로움을 끼치는 일로 '신세를 진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미(性味)를 갖지만 인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신세를 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삶의 자리는 이세상과 저세상, 이것과 저것을 상관하며 산다. 살아가는 길에 있는 삶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으로 저 세상의 고향의 삶을 그리워한다. 여기에 삶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쏠리며 그 가는 곳이 어딘지를 믿게 하고 세상을 지으신 분을 알게 하여 세상 마지막 하직하는 날 하늘나라로 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신세 진 것을 아는 것이요 이것이 믿음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서 신세를 지고 와서 저 세상으로 가는 신세로 산다. 가진 것 없이 세상에 태어나 가진 것 없이 가는 삶이기에 태어남과 돌아가는 삶은 신세를 짐으로 이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인생임을 본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사는 오늘의 세상살이에서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저버린 흔적들로 가득하다. 서로의 불신의 벽의 골이 너무 깊어가는 현실을 본다. 먹고 살만 할수록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패륜(悖倫)의 사실은 검게 타 오르고 있다. 인간의 패륜의 세력은 배움도 가짐까지도 상관하지 않고 흡수한다. 오히려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기승을 부린다. 여기에 먹고 살기가 바쁜 이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가진 것이 많아 문제 되는 죄의 경우가 너무 많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天倫)과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인륜(人倫)을 따라 살아간다면 복이 있겠지만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면 결국은 피차가 망하는 경우를 보고 살아가고 있다. 정초부터 한 해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결단이 여기에 있다. 세월을 붙잡아 때를 알고 바라는 소망과 순리에 따라 희망을 얻어 새 한해를 살아야 한다. 이는 천하만사가 하늘의 뜻에 의한 이치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트이며 삶의 처음 바탕이 되어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인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인 하나님의 형상회복으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얻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사회는 이웃사람들의 삶의 은혜에 감사하고, 행동을 통하여 헌신과 희생을 실천하며, 기쁨과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인격의 실체인 이성에 그리스도인의 이성인(Logos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부정적 감정이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 속죄의 언약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은혜의 언약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모든 언약에는 약속과 요구가 있다. 은혜언약의 약속은 나와 너와 네 대대자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있으며 이 언약의 요구에 응함으로 언약의 약속이 충당하는데 여기에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을 받아 들여서 그 삶은 생명에 이른다.내삶의 오늘이 신세타령으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지만 말고 자기 자부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부인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아버지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사는 삶”으로 사는 믿음이 증거되어야 한다. 내 삶의 처지는 그 인생살이가 매우 초라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사는 믿음은 내가 세상을 지으신 주인의 자녀임을 알 때 아버지의 자녀의 기쁨은 섬광과 같이 빛나며 내 마음에 기쁨과 희망이 넘칠 것이며 이 자부심은 어느 누구도, 무엇도 나를 넘어뜨리지를 못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3-06
  • 하필(何必)이면 ‘사람’은 ‘사랑’인가? - 배성산목사
    ‘사람’과 ‘사랑’은 글자가 비슷하고 발음이 어찌 그리 닮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랑’이 두 단어가 “하필이면 사람은 사랑인가”를 알고 싶다. 사람과 사랑사이에는 피치 못할 관계를 알게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경우에는 입 모양을 다물게 되고 ‘사랑’을 발음하면 입 모양이 열리게 되어 있다. 사람이 산다는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내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음을 알게하고 외면으로는 그 형상이 ‘사랑’으로 나와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에 기준을 두고 필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여 꼭 그렇게 하라는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사랑을 내어서 해 본다. “하필이면 ‘사람’은 ‘사랑’인가?”를 알게 한다. 그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으로 그 물음의 답이 외면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람이 겪는 삶의 문제의 답은 먼저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먼저이어야 한다. 그 것은 사랑이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인 내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로 그 의미를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서로 관계하는 삶이다. “하필이면 ‘사람’은 ‘사랑인가’?” 물음의 아마도 대화로 시작되는 소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2-27
  • ‘설 주일’을 지킨다 - 배성산목사
    교회의 일년 동안 주일 수는 52-53주를 주일예배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으로 예배한다. 일년 안에 시기별 특징에 따라 절기를 정하고 예배와 생활의 규범으로 하는 의도에서 교회력에 따라 주일예배를 드린다. 이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교회력에 준한 예배행사를 한다. 교회력의 전통을 존중하여 그에 따른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시편 교독과 설교의 성경본문 및 찬양 또는 찬송을 교회력에 맞게 채택하여 쓰고 있다. 예컨대 설교의 바탕인 성서본문은 항상 세 가지를 택하여 쓴다. 여기에는 성격상 성경말씀을 3부분으로 나눈다. 첫째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복음서」이다. 둘째는 이 복음서를 해석해주고 신학적이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서신서로 이 두 부분의 합본이 바로 신약성서이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한 구약성서를 중심한다. 따라서 설교본문도 이 세 부분을 항상 포함한다. 한국교회의 경우 교파적 분열은 심각하지만 이처럼 절기중심으로 똑같은 설교 성경본문을 택하여 쓸 수 있다면 말씀을 통한 일치가 크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특성을 살려 3 ,1절 기념주일, 8,15 광복절 기념주일 등은 별도로도 지킨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2-16
  • 지금 바로 여기서 - 배성산목사
    인 생은 타이밍이다. 삶에는 늘 타임만이 있다. 선택과 약속의 시간이다. 여기에 때를 따라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 삶은 약속이고 그 약속의 시간 안에서 살게 된다. 그리하여 하루에는 밤과 낮이 있고 여기에 따라 시간이 때를 알게 한다. 그 때는 일 하는 것과 쉬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게 되어 있다. 이 때를 아는 것은 생명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삶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1년 365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찾기 위해 정초에 사자성어를 두고 새마음 다하여 삶을 영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서에서 믿음의 선인들이 그 실행을 하기 위해 말씀을 약속하고 지키는 일이다. 이를 우리가 오늘의 삶에서 실행하고자 하려면 “지금 바로 여기서” “때”를 알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려는 요령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2-05
  • 양심과 영혼이 사는 삶 - 배성산 목사
    지난 한 해동안 우리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세우며 거두는 일로 바삐 살아왔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며 썩어질 것만 위한 일로 질주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마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눅17:27). 이미 노아 방주의 삶의 형편은 온 인류가 살아 온 것에 대한 심판의 사건으로 첫 형편을 우리에게 거울처럼 보여 주는 교훈이 된다. 이 일이야 말로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과 닮아 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관계를 이루는 공동체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양심은 자아 중심적 고립이 삶을 파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간의 양심은 유기체적 연계성을 끊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양심은 생명의 끈이 잘릴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양심은 모든 부조화를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삶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신학이나 과학, 철학, 문화, 인류학의 기본적인 물음으로 인간의 내적인 구조와 가치에 대한 의문으로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다. 여기에 인간의 삶의 구성 요소는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영혼(靈魂)’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과 ‘혼’, ‘육체’의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1-29
  • 새 하늘과 새 땅 - 배성산목사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새해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회복해야 한다. 죄악으로 오염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될 온전한 세상(계 21:1), 이 새로운 세상은 종말에 나타날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것을 그리스도인은 믿는다.(마19:28; 벧후3:13; 계21:1-17). 이에 따라 현재 인간이 살아가는 타락하고 부패한 우주 만물은 소멸되거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세상(우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세상은 만유의 회복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구원받은 자들이 장차 들어가 살게 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우리는 믿는다. 모든 생명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한 생명의 일생은 나서(出生), 살다가(存在), 죽어가는 소멸(消滅) 등 3단계로 간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죽음으로 인해 불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알려진 과정을 거쳐 지옥으로 가거나 종말이 올 때 까지 일종의 기다림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주장을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이라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생명사상의 관점으로 이 생명은 영속적인 살림살이의 순환으로 규정한다. 이 삶과 죽음은 또 다른 역할 또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생명의 순환과정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이라는 점을 밝힌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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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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