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2(토)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배성산

실시간뉴스

실시간 배성산 기사

  • 예수의 삶과 죽음
    오랜 기다림에서 예수님의 성탄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림절이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로 고백하는 믿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을 나름 경험해야 한다. 약속된 메시야가 친히 이 땅에 오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으로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 강림하신 그를 믿는 믿음으로 감사해야 한다. 한층 대림의 의미로 성탄절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탄생하기를 대망하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는 일과 연결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전망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그러므로 대림절 기간에는 정중하게도 회개하는 태도로 우리의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며 그리스도가 나의 마음 , 삶속에 탄생되기를 바라는 믿음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비추어 보면 구약은 메시아(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기 전의 약속이며, 신약은 예수께서 오신 후의 약속의 성취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메시아(히브리어)라는 뜻으로 그리스어 의역이다. 그리스도교란 메시아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한다. 예수는 구약에서 부터 예언한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태어 낳는데 혼인 전에 임신을 하였으니 혈육으로는 요셉과 무관한 것이다. 천사의 말과 같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되었는데 요셉은 약혼녀가 잉태 된 것을 알고는 파혼을 하려고 하였다.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였다. 그 때에 주의 천사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이르대 ‘네 아내 데려 오기를 두려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하셔서 오신 메시야 인 것이다. 그를 성자 하나님이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된다. 당시 예수를 해치려하는 헤롯왕 시대에 예수의 모친은 천사에 의해 예수의 어머니는 애급으로 피난하게 된다. 예수는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 와 살며 30세가 되어 예수는 공인으로 공생애의 삶으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도 하며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어 금식을 한다. 그의 하늘 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시작으로 그의 하늘복음은 시작이 된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임과 율법에 대한 옳은 이해를 증거하고 여기에 율법사와 바리세인과 사두계인들의 잘못을 책망하기도 한다. 그 후 예수의 12제자들을 불러 제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한다. 그 후 유월절을 맞아 제자들과 최후 만찬으로 떡과 포도주로 성만찬을 하고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만찬을 한다. 여기에 우리의 주로서 오신 주님의 “죽음”을 깨닫게 한다. 형극의 십자가로 죽음과 3일 만에 부활하신 삶으로 모든 생명과 죽음의 유일한 본체이심을 드러낸다. 사시다가 하늘로 오르시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심으로 재림의 약속을 하신다. 예수께서 저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약속하신 구원의 말씀은 하늘의 백성들이 사는 삶은 나 있는 저곳 하나님의 집으로 안내하는 말씀을 약속하심에 우리의 믿음을 둔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전파하라.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지은 죄를 받으리라.....” 하셨다.부활후 의심한 도마에게 보이시며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후 사명을 주셨고 그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昇天) 때 천사들이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재림(再臨)하심을 약속하신다. 그 후 사도 요한에게 밧모 섬에서 계시록에 기록하도록 계시 하신다. 이것이 두 번째 오심을 약속하신 것이다. 약속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확신하게 한다. 밧모 섬에서 유배된 사도 요한은 순교를 당하면서 요한이 받은 계시의 하나하나를 기록하면서 영원한 세계를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간증하는 중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2-10
  • 역사는 시간의 구원을 보게한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주님의 오른 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신학은 넓은 의미에서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구원을 본다. 예컨대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이다. 성서신학은 성서의 부문과 전체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일을 한다. 그것은 교회의 설교, 교육, 예배와 활동의 기반이 된다. 역사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의 여러 기간 동안에 교회가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해석한 방식,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 왔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 교의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을 해명하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언어로 검증하는 일을 담당한다. 실천신학은 교회와 그 성원들의 실천의 규범과 원칙에 관한 연구이다. 이것은 교회론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교회의 존재 이유를 구현하기 위하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본질적이며 필수적이며 마땅한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예는 설교학, 예배학, 교육학, 목회학 등을 통해서 알게 한다.성서 창세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첫말은 모든 피조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무로 향하는 경향성을 가지며 그로 인해 늘 비존재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존재를 받지 않으면 모든 피조물은 그대로 비존재인 채로 남는다. 피조물이 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존재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께 끊임없이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조물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에 피조물은 응답해야 하고, 이를 통해 완전한 창조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하나님의 창조물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다. 즉 창조 이전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무로 향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경향성은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과거는 이미 가고 없는 것이며, 현재는 찰나에 불과하기에 다만 이 현재로 계속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시간의 흐름은 비존재로의 흐름이다. 여기에 시간에 대해 이렇게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관적 시간론을 주장한다. 시간은 인간 영혼에 의해 과거는 기억함으로, 현재는 목격함으로, 미래는 기다림으로 체험되며, 영혼의 연장을 통해 측정된다는 것이다.시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은 창조 이전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가 무시간적 영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 안에는 무시간적 영원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6일간의 창조 간의 모순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6일간의 창조 이야기와 한 순간에 이루어진 창조 이야기의 조화 문제가 들어있음을 알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떠한 간격도 없이 어떠한 시간적 지속도 없이 동시에 이룬 창조를 가리키는 첫 창조와 끊임없이 피조물에게 존재를 부여시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통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창조 때에 미리 형성되었던 창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 방식인 종자(種子=seed)적 이성 개념을 도입한다. 하나님께서 종자적 이성으로 첫 창조 때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나중에 통치로서 종자적 이성을 다스린다고 말한 점을 유의한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창조자요 지배자로서 당연히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과정으로부터의 구별되고 자유로우며 절대적 주권으로 이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가리킨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2-03
  • 한번의 삶으로 일생을 사는 삶
    사람은 흙의 원소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흙을 먹고 산다. 사람의 성분은 광물질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요오드, 규소, 망간, 구리 등이 미량 함유되어 있으며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17가지 성분이 흙의 성분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 호흡을 하며 살아가게 한다. 사람이 문자적으로 흙을 직접 먹고 소화 흡수 할 수 없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과일이나 식물들을 통해서 흙의 영양소로 섭취할 수 있어 아주 자상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흙의 요소로 살게 하심에 유의한다. 또한 이 생명은 스스로 물체, 동물, 식물, 미생물을 섭취하도록 설계를 하시어 삶(生)을 함께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건강한 사람이라면 입에서 식욕에 따라 당기는 대로 음식을 섭취하면 필요한 미네랄 뿐만 아니라 다른 영양소들까지 자동적으로 섭취하도록 창조해 놓으셨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삶은 이 땅에 태어나 한 번의 삶으로 일생을 사는 주어진 고귀한 일생의 생명임을 알게 하고 지으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입김으로 부여하신 땅의 주변에는 생명으로 살아야겠기에 숨을 쉬는 호흡으로 모든 원소가 가동하며 생명이 작동하는 삶을 영위하게 되는 이치를 알게 한다. 오늘의 구약 본문은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 하심을 주목하게 하며, 신약에서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성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죽은 자에 입김을 부어 호흡하게 하심을 알게하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시간 개념은 삶에서 수직선적인 개념으로 세월을 알게 하다. 한 번 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월을 막을 자 그 누구도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윤회설로 이를 해결하려 하나 여기에 히브리서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한다. 여기에 구약의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12:1에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하라”고 한다. 인간인 ‘나’(我)는 누구이고 ‘왜’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삶의 정체성으로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여기서 ‘자아(自我)’란 ‘사회적 관계에서 생성되는 존재론적 의미’이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객관화되고, 타인의 침탈에 의해 물질화되는 것을 방어하며’, 영적 존재로 실현될 때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존재인 것을 인식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자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정제(精製)되는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우선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이고 ‘나’라고 부르는 정체성확립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함은 삶에서의 나아갈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나’(我)는 누구이고 ‘왜’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자의식’(自意識) 때문이다. 주어진, 제한되어 던져진 기성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삶”, “사는 삶의 힘의 원천을 알게 하며” 살게 하는 진정한 의미론적인 본연의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왜 사는가?’란 곧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지양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 하라고 삶의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기본적 욕구로부터 말하면 생리적 욕구, 안전욕구, 애정욕구, 자존의 욕구는 자아실현욕구이다. 여기서 자아실현 욕구란 자기 자신이 잠재적으로 실현 가능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아실현욕구가 잘 충족된 사람은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1-20
  • 품바 인생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믈러 있어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저는 이번에 기회가 주어진 시간에 ‘가장 낮은 자의 가장 높은 신명의 소리’라는 제하의 제목 “품바”를 서울 대학로에 두레홀4관 공연에 초대되어 그 명상의 일단을 관람하고 여기 그 후감(後鑑)을 여기 밝힌다. 연극의 원작자 김시라 품바 작가로 70년의 그의 삶을 통해 ‘걸통과 사랑’을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빈 걸통과 사랑만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 그 외 아무것도 없소. 우선 나의 할 일이란 이 빈 걸통에 믿음이든 물질이든, 정신이든, 지식이든, 합당한 것을 채우는 일이요. 그러나 이 걸통은 일종의 일시적인 보관창고이기에 그 안에 들어온 것은 음식과 같아 오래 보관할 수가 없기에 진정 나의 할 일이란 여기에 채워놓은 모든 것을 내 사랑이라는 유일한 재산으로 포장하여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정성껏 전함이요”라고 하면서 “그 때야 그 모든 것이 비로서 나의 것이니 나의 것을 많이 가지시오. 채우지 않음 또한 죄악이나 채워놓고 부패시킴은 더 큰 죄악이 아니겠소.” 그는 평생 걸통을 지니고 사랑을 전하며 ‘품바의 인생의 삶’의 변을 누려 놓는다.본문 마태복음 본문을 이해하고 일평생 삶을 사랑의 믿음으로 산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자 성자로, 기독교 역사 상 가장 빛나는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가 27세이던 1209년성 메시아의 날인 2월 24일 성 프란체스코 포르지운콜라(Porziuncola)라는 작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던 중 그리스도가 그의 사도들에게 가르친 오늘의 설교 본문의 말씀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는 그 즉석에서 가르침대로 신발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지팡이와 지갑을 버렸으며, 한 벌 옷만 걸치고 끈으로 가죽 허리띠를 대신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1226년에 사망할 때까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가슴과 마음으로 사로잡았다.이를 보면서 오늘의 우리의 삶을 보게 된다.70 년 전 해방 후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속도가 급속하게 변화했다는 이유로 그 특성은 가치갈등과 가치체계의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다. 특히 사회 속에서 물질만능주의로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본다. 여기에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대접한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 꽃을 소유하기 위하여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왔다면 그것은 이미 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꽃을 죽이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물질은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로 가는 이 사회는 팽배해져 돈을 섬기는 배금주의가 삶의 가치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가치는 물질가치로 인격가치는 상품가치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러한 가치의 혼돈에서 인간의 생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고 강제로 취득하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다. 예컨대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신앙도 다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는 사기행각으로 사회는 만연되어 버렸다. 이는 소유의 가치가 지배적이고 존재의 의미는 상실하는 시대적 여건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배경을 보면서 1960년대 이후 정치 지도자들은 경제성장 제일주의로 국가적 과제로 삼고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 풍요, 경제적 성장만을 위주로 살아 온 바 삶의 질, 복지문제, 정신적 및 도덕적 삶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무시한 채 통치자들은 철학 부재, 도덕적 이념 부재로 삶의 최고의 유일한 가치는 물질의 풍요로 이해 되었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차이에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오늘의 사회는 서로의 갈등으로 소통 부재의 비극의 현상을 보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1-12
  • 이산가족 상봉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아래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성서의 말씀입니다.요즈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북한이 갈라진 채 통일되지 않고 지금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희생이 있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참된 자주독립의 날이 온다. 70년을 헤아리는 세월은 한 민족의 한(恨)이 맺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진수이다. 부활이 진수라고 하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고통 없는 환희는 없다. 조개의 아픔 없이 진주는 없다. 분단을 마감하는 길은 우리나라의 통일도 십자가의 아픔을 동반한다. 민족통일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민족의 십자가이다.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오늘의 남과 북은 예전에 비하면 통일의 길에 훨씬 가까워졌다. 배를 타고 금강산을 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육로로 하루 만에도 남녘 동포들이 북녘의 금강산을 다녀오는 시대가 되었다. 인적 교류가 몇 십배, 몇 백배로 늘었고 물적 교류가 늘어, 남북협력 사업으로 이제는 개성공단에서 남과 북 형제자매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저들 가운데서 남남북녀가 서로 만나 결혼할 날도 가까워 오고 있다. 이제는 지금부터 통일 논의에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족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현실로 하나의 민족이 분단체제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 구성원 다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의사결정과정에서 늘 소외되어 온 민중인 국민의 참여는 물론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우선적으로 여기에 참여없이 어느 특정층에 의해 그리고 외부의 간섭에서 이를 행사하려고 하면 통일의 길은 요원하다. 오늘의 우리의 형편은 통일의 기회가 가까이 되어가고 있고 오늘의 남과 북은 예전에 비하면 통일의 길에 훨씬 가까워졌다. 여기에 길은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이다.십자가는 참여다. 희생을 감수하는 참여, 아픔을 동반하는 참여이다. 힘들다. 고달프다. 이미 통일의 개척자들은 다리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 몸을 짓밟고 넘어가기에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지친다 하더라도 희생이 없는 것은 십자가는 없다. 통일 운동하는 이들에겐 육체적인 아픔도 있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많다. 외롭기도 하며, 때로 분노가 치솟는다. 그리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십자가는 가교의 역할이다. 예수께서는 다리(架橋)가 되기 위해 성육신(成肉身) 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 (빌립보서 2:5-11) 우리도 성육신 해야 한다. 먼저 찾아가 만나야 한다. 만나면 괴로움도 있지만 기쁨이 있다. 보람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 실천은 내가 먼저 형제와 막힌 담이 있으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높이셨다. 눌린 자를 해방하셨다. 부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의의 선포자요 실천자 이셨음을 배워 한국교회는 몸소 실천해야 한다. 십자가를 질 때 한 가족이 되고, 통일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식구가 된다. 형제의 사랑공동체가 한국교회이다. 우리는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민족적 숙원이며 소원이다. 분단으로 한 민족이 갈라선 채 두 민족으로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으로 이산가족의 상봉은 정치나 군사적 의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혈육의 한 지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동족의 공동체 인식을 가지고 사랑의 실천 장을 한국교회는 마련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0-29
  • 산상수훈의 삶
    예수님이 산상에서 설교하신 시대적인 삶은 유대인들이 처하고 있던 때와 로마에 의한 압제상황에 따른 시대적인 삶에 대한 가치관을 일깨운 설교이다. 참된 삶의 행복은 그 시대가 일군 가치관 형성에 삶의 인식이 다름을 알게 한다. 가난한 자, 의로움에 굶주린 자, (그러므로) 슬퍼하는 자, 핍박받는 자들에게 내려지며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이 주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 다가오는 삶의 위기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다.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임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인간의 결단과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에 이어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적 삶이 피력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삶이 구약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기준인 사랑으로 완성하려는 것임을 밝히면서 삶의 질 향상은 물질적 풍요나 인간다운 삶의 필요 요건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오늘에 처한 세상에서의 삶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삶의 질’ 지표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최근에는 ‘삶의 질’ 지표로서 풍요성·안정성·보건성·능률성·쾌적성·도덕성 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여기서 풍요성(abundance)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안정성(safety)이란 주민들이 신체나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환경적 조건을 말하며, 보건성(health)이란 주민들이 위생적인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말한다. 또 능률성(efficiency)이란 통근·통학 등 일상 생활상의 편리 뿐만 아니라 생산·유통 등 경제적·사회적 활동상에 능률이 보장되게 교통·통신 수단의 확충, 각종 시설의 설치 등을 의미하고, 쾌적성(comfort)이란 사(私)생활의 비밀보장과 공(公)생활에서의 도서관·공원·극장 등 문화시설의 설치를 통해 주민들에게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도덕성(morality)에서 오늘날 생활인으로서 자칫 소홀하기 쉬운 인간성의 회복과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 그리고 직업윤리·생활윤리 등의 준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피조물로서의 인간관을 살피면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자리를 옮길 전이(轉移)상태로 변화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면모를 알게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자기의식이나 자기초월, 그리고 자유에 있어서 다른 동물들과도 다르며 역사를 가지고 있고 도덕적 결단을 하며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한계에 이를 때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란 복음의 선포와 들음을 통한 인간의 믿음을 여기에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그 성취가 하나님에게 부합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 그 삶이 이루게 됨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는 삶의 질(質)을 중요시하는 이른 바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 전개되고 있다. 즉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안정을 제일의 관심사로 여기던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의 문제로 관심이 서서히 옮겨진 것이다. 미국의 한 사회조사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 국민의 실질소득은 70% 증가하였는데도 이 기간 중에 ‘아주 행복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그 인구 비율이 40%에서 30%로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인간은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이 입증된다. 근대 기술이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머리와 손을 이용하여 창조적이고도 유용한 일을 하는 즐거움을 앗아간 대신 전혀 즐겁지도 않는 종류의 일을 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혀 생산 활동과는 관계없는 일로 무척 바쁘고 있다. 일찍이 인도의 간디는 세계의 빈곤은 대량생산에 의해 의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생산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대중에 의한 생산체계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자원, 즉 모든 사람들이 보유할 수 있는 그들의 현명한 머리와 정교한 손과 좋은 도구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대량 생산 체계 하에서는 기술이 본래부터 폭력적이고 생태계의 타격을 주며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대해서는 자기 패배적이 되어 인간을 무능하게 만든다. 훌륭한 현대 지식과 경험을 잘 이용한 대중에 의한 생산 기술은 분권화를 촉진하고 생태계의 질서에 적합하며 자원의 사용에 신중을 기하여 인간을 기계의 노예가 되게 하는 대신 그것들이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창조되어 있다는 이치를 알게 한다. 이제는 19세기의 거대주의와 물질주의를 거쳐 오는 동안 이 거대주의의 폭력으로 부터의 탈피하여 오늘의 우리의 삶은 축소 지향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 가지 않으면 살아 남기가 어렵다. 구약성서에서의 전도서는 ‘만물에는 계절이 있고 하늘 아래서는 모든 목적에 때가 있다. 파괴 할 때와 건설할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서 한 곳에 모을 때가 있다’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우주의 거대한 리듬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지침을 일러 준다. 우리 삶의 생존 경제를 가르치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을 얻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시대가 삶의 지침을 여기서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눈을 뜰 때 우리 주위에 펼쳐있는 세계를 본다. 우리는 그 세계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보는 수와 양의 비율이 다른 비례(比例)와 시야는 여러 물체와 나 자신과의 관계, 거리, 높이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육체적 시각은 어렸을 때 그대로이며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는 세계의 중심이다. 지평선은 내가 서있는 곳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사물이 우리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기준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처음부터 나는 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인 것이다. 성서에서 죄과의 문제는 죄의 결과이고 죄의 행위에 대한 죄인들의 책임을 알게 한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부자와 강자와 현자와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골라서 특별히 단죄했다. 이는 죄의 더 큰 결과에 대한 그들의 책임 때문에 그러했다. 삶은 익을수록 단순해지고 진리는 높을수록 순수해진다. 그래서 값진 것일수록 양이 적고 금언일수록 문장이 짧다. 시대의 삶은 이러한 삶으로 살아야 하며 겸손의 태도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 부족을 부족으로 알기에 사실을 사실로 시인하고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여 사는 삶을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작은 것 살피는 삶의 양(量)을 알게 한다. 산상수훈은 삶을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삶을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한 생동하는 삶의 지침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0-16
  • 인간이 산다는 것은 - 배성산목사
    그리스도교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말하고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알게 하며 구원받는 인간으로 이를 총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의 궁극적인 근원과 의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하고, 이를 위해 흔히 말하는 유기적이고 심리적인 존재로서 현상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인간을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이유에 이르게 함을 알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죄인이며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주인으로서 창조자와 구원자로서 입장을 가지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좋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고, 인간이 미완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이 삶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는 성서의 증언은 매우 분명하게 이를 삶을 통해서 알게 한다.세상의 삶의 모든 것은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없다. 이를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산상수훈에서 알게 한다. 하늘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어 표명하시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소금과 빛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등. 이 팔복을 소유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임을 지적하신다. 이 사람은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사람을 지적한다. 소금이나 빛은 자기 삶을 녹여내는 희생의 제물임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삶은 세월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익혀내는 삶의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혹은 먹이사슬 최상위 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등등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인간은 생태계에 악영향만 줄 뿐인데 차라리 없는 게 더 낫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다른 여타 동물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생명의 고통을 공감해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배려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가진 만큼 적절한 이기심도 가지고 있기에 생각만큼 되지가 않기에 불의를 저지른다. 대부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언론에 나오는 여러 문젯거리를 항상 안주삼아 입에 달고 이야기하고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문제를 인식했다면 그것을 해결로 실천해야 앞으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텐데 모두가 들어서 보고 말로 옮기는 것을 위주로 상식이나 된 것 처럼 일상의 말로 모든 문제를 아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삶은 마치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마시며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순리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뿌린 것이 없으면 거두는 것이 없다는 것이 순리이다. 이치는 심어 거두게 하고 심는 만큼 거두며 때를 따라 시절을 알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이 이치이며 순리가 된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의지에 조화롭게 맞추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인간이 참으로 깨달음은 순종과 불순종, 또는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과의 말씀에 연관된 인간의 책임이 지니는 합의이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을 행사하여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래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신학에서 부터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 존재이어서 인간은 그가 살아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삶이 세월을 따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을 익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0-10
  • 일흔 번이라도 용서
    본문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광복70년! 분단 70년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빛이요 분단의 용서이다”. 예수는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드러내 보이시고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약속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순교로써 그분이 가르친 진리와 사랑을 증언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믿어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밝히 드러내셨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셨고 이우 형제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사람의 잘못을 깨닫도록 함께 하시고 범한 죄는 회개를 통해 용서 받음으로써 양심을 전화시키시니 감사하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죽음심이 우리 죽음을 대신하셨으니 감사해야 하며 '너희가 내 말에 머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이로써 너희는 자유롭게 되리라 “하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소신임을 알아야 한다. 2015년은 ‘광복70년! 분단70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의 빛이요 분단의 용서이다”는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한국은 북한의 폭격 도발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매일 하루의 살이가 군사적 긴장으로 높아가고 한 민족의 한 백성으로 일촉즉발에 대한 염려를 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불안과 초조의 불안도 중요하지만 대립된 민족의 형제 싸움을 거는 것 같아 한민족의 서글픔을 가진다. 막 말하고 막 싸우는 오늘의 사람들의 삶에서 막가는 행동의 연속처럼 느끼면서 힘겨루기, 여기에 부추기는 구경꾼들의 어설픈 말 작란이 나타나는 승부에 힘을 실어 막무가내로 세상이 시끄럽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사적 긴장을 고조 시켜가는 일체의 언행을 삼가하고 냉정한 명철을 기다려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의 삶을 질식시키고 동여매는 가장 비극적인 요인은 반평화적인 민족의 분단에 있다. 남북의 허리를 두동강이로 갈라놓고 형제간에 동족 간에 총질을 하는 전쟁과 같은 대결상황은 민족의 비극임을 알아야 한다. 민족의 살을 위해 오늘 필요한 중요한 사항은 남북 간의 전쟁의 방지요 분단의 극복이요 통일의 성취이다. 한국의 교회는 민족주의적 입장이나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동질성의 민족의 삶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며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고 교회가 이를 접근하도록 힘써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분단 시대에 살면서 분단 자체를 악으로 보지 못하고 분단의 결과들만을 악으로 보는 착각으로 살아온 것이 문제임을 지난 세월동안 많이 보아 왔다. 북은 그 동안 공산독재정권수립, 민주세력의 숙청, 6.25전쟁과 동족상잔, 한반도의 국제 전쟁화, 냉전체제와 간첩, 게릴라 파견, 핵무기 보유,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 한계선을 침범한 사건과 그 무력 충돌 등은 분단의 결과이지 분단의 원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분단 자체를 악으로 보지 말고 분단의 결과들에게 대해서만 비극의 원인을 보려고 할 때 분단 극복의 길은 트이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평화적인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통일은 커녕 민족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아니 된다. 오늘 우리는 형제가 형제를, 동족이 동족을, 배반하고 죽였던 골육상잔의 비극 앞에 서 있다. 이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광복70년! 분단 70년! 은 남북회담, 경제교류, 이산가족상봉, 금강산 관광 등으로 삶의 피부를 가까이 하는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금번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광복70주년 펑화통일기도회”의 주된 기도와 선언문은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였으며 평화통일의 첩경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용서하고 한 형제자매로 만나고 사랑하는데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면 이를 위해 교회는 기도하고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나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통하여 남과 북을 넘어서 온 세계에, 온 지구에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0-02
  • 화성도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신학에서 전개되는 모든 전제들의 출발점이 되는 근본적이라는 점을 필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 천체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조론은 성육신 사건, 구원과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전제가 된다. 이것은 또한 근대과학, 기술 그리고 세속주의의 토대에 놓여있는 서구적 사고의 기초로도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이성이나 과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계시, 즉 성서에서 입증된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알 뿐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간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성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의 절대적인 근원이며 그것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자연의 보편적 주로서 그리고 성서에서 개념은 창조는 계약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을 밝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창조론은 공간과 시간, 에너지, 물질 , 생명,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진 우주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들이 하늘과 땅의 생명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창조 질서를 어기고 자연 생명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는 것은 재앙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는 혈실을 생태계의 현실에서 이를 잘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창조자요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음을 먼저 알게 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천지창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자연발생적이나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준비에 의하여 만들어 졌고 그 만들어진 순서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창조질서가 누구에 의하여 움직이는 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큐리오시티'(화성탐사로봇)가 8개월의 우주 비행을 마치고 2015년 8월6일 화성에 한국시간으로 2시시31분에 무사히 화성에 착륙했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거리는 대략 1억9,102만 킬로미터로 화성을 향해 3년 전인 2011월에 발사되어 익년 8월에 화성에 도착한 큐리호시티호는 화성의 표면에서의 약 8km의 거리를 이동해서 목적지인 샤프 산에 이른다. 그 산은 거대한 크레이터(crater)의 내부에 지층을 조사하면 화성의 연대별 환경변화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탐사로는 화성에 미생물의 존재 가능성을 묻는 환경에 해답을 못했으나 이번에는 착륙지점의 크레이터 지층조사 결과 몇 십억 년 전에 존재했을 호수에 생명에 불가결한 담수(淡水)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 가운데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천명한다. 그리하여 창세기1:1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를 전제한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창조의 관계를 알게하고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生命= 삶은 명령)과의 관계를 알게 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자유와 욕망, 충족의 욕구를 자제할 줄을 알아야 한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결단이 "창조신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타 생명에 관하여 속되게 경시하고 전 우주의 생명에 관하여는 소홀히 하고 생명계의 한 종(種)에 대해서 이분법적 이론으로 일관되어 온 과거를 알게 한다. 이는 비교 우위론에 의하여 여타 생명들의 가치적 평가는 상대적으로 철저히 비하하고 평가 절하에 논리적 구조로 취급되는 태도는 이제는 말아야 함을 보게 한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인간은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만 취급하여 인간의 생활영역 확대로 하는 것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발생을 면하기 어려움에 화성탐사에서 깨달았으면 한다. 이는 우주의 생명사상에서 모든 만물을 바로 보아야 할 위급한 위기를 맞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9-17
  • 잘 익은 신앙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언젠가는 빈손으로 떠나야 할 나그네로서의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노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이 쌓아 올린 지식이나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늘의 노인들은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향후 2020년에는 18.5%까지 늘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서 노인시대를 맞는 마음은 만감이 교차하는 착잡한 심정이다.여기서 노인의 심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향유하는 모든 능력은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어느 무엇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시한부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흔히 인간의 삶은 하루 세끼 먹고 계절을 따라 옷 입고 하루 잠자는 것으로 세월을 사는 것이 인생살이기 때문이다. 이 인생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창조자의 의도를 따라 사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영적교제를 가져야 하는 서로의 관계된 삶을 갖게 한다. 흙으로 빚은 질그릇 같은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영을 지닌 존재로 사람다운 삶으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의 목적이요 삶의 가치임을 알게 하기에 영국의 심리학자 브롬리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eing),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한다.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노욕이 생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 자기에만 집중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지고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페이탈리즘(fatalism)에 빠질 수 있다. 이는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 일 중심,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초라해 진다. 이는 사람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값비싼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주님을 위해 값비싼 희생과 헌신의 삶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 되어야 한다. 롬6:4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또한 빌립보서1:21에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리고 신약성서 빌립보서3:12에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말씀은 ‘나’가 사나 죽으나 나는 그리스도인의 사람임을 알게 한다. 빌립보서의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이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예수 오심의 성육신의 신앙으로 이 세상의 삶의 바탕에서 구원의 생명을 키워내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살아가는 사는 삶의 방법을 보면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이기주의(egoism)로 사는 삶,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개인주의(individualism),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려고 하는 합리주의(rationalism)이다. 이 세 가지 태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으로 이타주의(altruism)는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바라지 않는 봉사하는 마음이다. 삶의 늙음에 주의하는 것은 보상심리를 어떻게 잘 조절해 나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잘 이겨 내는 것이다. 이를 이겨내는 것만큼의 기대를 잘 조율할 줄을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이겨내는 이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야 삶이 잘 익혀진 신앙인이 된다. 잘 죽는 것(Welldying)은 좋은 열매를 보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9-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