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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을 잘 쇠다
    양력설을 보내고 나면 음력설을 맞게 된다. 수십 년을 이중 과세로 설을 쇠게 된다. 우리 민족 대부분이 구정을 설로 쇠어 온다. 설을 지내는 것을 ‘설을 쇠다’고 한다. 한문으로는 ‘과세’(過歲) 라고도 한다. 이 말들은 설날에는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조상에게 감사하여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부부간 형제간에도 서로 세배를 한다. 이것은 새해를 맞아 경하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인사가 된다. ‘설’의 의미는 새해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설날에는 몸가짐에 그릇됨이 없이 ‘조심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되며 이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설날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사회가 디지털화 되어감에 따라 설날이 주는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옛날에는 설날의 세시(歲時) 풍속으로 설빔, 차례, 세배, 세찬, 덕담, 문안비, 설 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 귀쫓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많은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게 전래되었다. 그 중에서 주목해 보는 것은 차례이다. 이는 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설날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묘를 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교통혼잡을 무릅쓰고 원근거리 상관없이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미풍양속이 되었다. 이렇게 쇠는 ‘설을 잘 쇠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여 못난이로 취급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가정이 안정되어야 모든 것이 안정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나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곳으로 수신제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의미이기도 하며, 성서적 가르침임을 알게 한다.가정이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남녀부부를 사람으로 세우시고, 한 가정 안에서 자녀를 만들어 가게 했다. 이 세상의 어떤 제도보다 먼저 존재한 가장 기초적인 사회체계가 가정이다. 그리하여 이 가정 속에서 국가와 사회와 교회의 원형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설을 잘 쇠다’의 의미는 가정을 살피고 ‘설을 잘 쇠어야 함’을 알게 한다. 금년 설날은 주일날이요 설이 함께하는 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과 설날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함께하는 날임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지내어야 한다. 가정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래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 옷을 입고 마음 단장도하며 설빔을 갖춘다. 설날 차례를 마친 후에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 방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조부모, 부모님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른들의 덕담이 따르게 되어 있다.인생을 논하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하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인간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세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올린 후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과 인사를 한다. ‘과세 안녕 하셨습니까?’ ‘새해 돈 많이 버세요!’ 로 새해를 기원하고, 서로 한살 더 먹음에 축하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설날에 가정예배로 세시풍속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우리 사회는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가정이 망가짐으로 교회도 그렇게 가고 있기에 잃어버린 가족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를 보면서 설을 맞이할 때마다 '설을 잘 쇠다' 에 해당되는 의미를 알게 한다. 365일 설 한번으로 가족공동체가 이루어지는 현상 속에서 무너지는 공동체의 사회를 위해 우리의 시선과 이를 극복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가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접하게 되는 최초의 사회이며 삶의 장이고 최초로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원초적인 생활공동체의 장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끝을 맺게 되는 인간의 전 삶을 통해서 이어가는 삶의 구심체이다. 이 가정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살아가면서 언어와 생활 습관, 문화를 배우고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의 완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삶의 모태가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31
  • 성육신 신앙
    구주 오심의 달을 맞으며 하나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시어 그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그 비유로 성육하심에 그 의미로 그 참된 삶을 요한복음서에 의해서 알게 하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속성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위일체의 제2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서 말한 절기를 맞게 한다.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은 예수 오심의 의미는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이며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음을 부언한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까지 하나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에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생명은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고찰하면 인간 사회의 삶에서 삶의 구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이는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생명의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생명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과 아름답게 이 땅에서도 성육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이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으로 위격의 일치라고 언급되어 온 삶에서 인격적 일치로 구주 예수 안에서 연합되었음을 믿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삼위의 일치라고 언급 되어 온 인격적 일치(하나)로 예수 안에서 결합되어 두 본성이 인격적 일치로 그 정체로 이어오고 있음을 믿게 한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성부와 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합해 왔으며 그가 복음을 선언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함에 유의하게 한다. 여기서 ‘성육신’은 본질상 하나님이고 하나님 (성부) 과 동등 하지만 조의 신분으로 나중에 하나님과의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자녀의 입장으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이를 관계하게 함에 유의한다. 여기서 이를 깨달아야 함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여러 경향들이 있어 왔지만 이후의 신학에서 이를 바로 잡아 신학을 세우게 된 것은 칼케돈 공의회의에서 그 정의를 반영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그의 인성에 중요한 영향의 역할을 알아야 함을 정의하게 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17
  •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실천
    생명이 살아 있음은 사랑실천이 그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은 그 사랑 실천함에 있다. 우리나라 말로 전하여 온 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사랑은 없다’는 말로도 그 의미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사에 오셔서 삶을 보여 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에 근거하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기에 창조자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가 사랑에 있기에 우리 사람은 사랑의 자식으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침(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침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오심의 그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은 이기심으로 생명의 속성이기도 한다.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속성은 이기심이기에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사랑을 둘러싼 동 서양 사상이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기에 동양에서는 인(因)을 ‘어진 인’으로 ‘자비’라는 사상으로 공자는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에서도 부모 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까지 넓혀가는 것이라 하여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짐’의 인의 시작으로 말하고 묵자는 친족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로 말하는 것은 ‘자’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된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에서는 마태복음25:35-45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38)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9)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또 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 하였고(41)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3)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그리스도교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질적 차이” 가 있다고 함에 예의 주의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만이 존재함을 필히 알아야 함에 예의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가페적인 사랑관계임을 필히 알게 함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자아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고조도 열광적인 해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둘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존재하는 경우에만 이웃사라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 필리아의 사랑도 마주하고 존재하는 데에서만 이웃사랑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보면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 간에 성립된 우애임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03
  • 구주로 오시네
    메마른 광야 땅에 비가 와서 메마른 땅을 적시면 생명들이 살아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약동하는 생명들의 힘을 본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보고 오시는 하늘의 하느님을 알아서 오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한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그의 영광과 함께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젖을 것이며 그는 죽어가는 땅을 생명의 물로 촉촉이 살려 죽음을 삼켜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심에 대한 찬양이 그의 믿음의 고백에서 이를 기뻐하고 찬양하며 이를 감사하며 기뻐하고 이를 믿음으로 고백함에 예의 주시 하게 하신다. 이는 ‘오시는 하느님의 구원’에 경험을 갖게 한다. ‘구주로 오시는 하느님’의 그 은혜에 대한 신앙의 예우를 다 하게 한다. 지금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구주 예수의 탄생으로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로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지도 2000년이 되셨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까지 하느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에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함을 이미 만물의 첫 창조하신 에덴에서 생명으로 삶의 의미를 보여 주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느님을 의존해야 삶을 구원할 수 있음을 함을 알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라는 증거를 알게 하신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느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만 구원의 삶을 살게 하신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이 낮은 땅에 내려오심을 찬양하는 계절이다. 온통 이 지구 땅에 세상은 구주 오심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상관없는 축제에 빠져서 호화찬란한 네온사인과 흥청망청 축하연으로 들뜨고 있음을 본다. 그 옛날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든 천사들이 온 누리의 백성들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구주 탄생에 대한 찬양’ 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소식이야말로 얼마나 기쁜 소식 인가! 생각하게 하는 크리스마스! 아! 생명의 계절인가? 생각하게 한다. “Merry X-mas!”“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 멘.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2-21
  •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구주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 의한 절기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 등으로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가신지도 2000여년이 지나게 되었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의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어두운 인생들 ‘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의 바탕에 같이 함으로 그 생활에서 자신의 삶의 전체의 자세를 표방하며 이를 친히 그 삶에 함께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는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빛으로 그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기에 빛으로 그 삶의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빛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빛은 그 빛을 받은 모든 면은 그 빛에 의하여 나타내 보이게 되어 있다. 본문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빛이다’라고 말하시면서 예수 자신의 성격을 10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생명을 얻게 됨에 의미를 함축하게된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생명이신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느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삶은 '빛'이 되는 "생명의 삶"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온전하고 건강하여 속죄 받은 사람, 우리가 이런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될 것이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이렇게 새로운 삶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러한 삶의 신앙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이 오심은 어두운 삶의 태도를 밝히심에 그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러한 변화된 삶이 신앙이 된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악과 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어두운 빛을 잃은 인류의 삶 어두운 삶 속에서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썩어져 가는 인류를 밝은 빛의 은총으로 변화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교회의 큰 직임을 맡은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이러한 빛의 은총이 없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교훈이나 수단도 이는 참다운 빛 외에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빛을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웃에게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2-14
  • 용서로 가꾸는 삶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관계가 있다. 하나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이다. 수직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등을 말 한다. 여기에 수직적 관계로 말하면 감사와 존경을 의미 한다. 수평적 관계는 친구나 동료로 여겨 이웃 간에 화목하고 갈등이 없는 관계를 알게 한다. 수직관계는 영광이라는 감사와 존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평관계는 화목으로 용서가 필요하다. 서로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삶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삶에 평안을 얻어 삶이 활성화 한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전반적 형편을 살펴보면 내일을 위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나와 다른 관계와 관계를 맺으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용서하며 사는 삶의 사회를 염원하게 된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관용은 그 의미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수용하는 용서의 아량으로 너그럽게 이해함에 있기에 서로의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마음이 등장하고 시대가 바뀌는 문명의 교차점에서는 필히 ‘용서하는 마음’이 삶의 태도로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서로의 관계에 용서 없는 획일주의 문화는 배타의 거부와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며 부정의 참신한 수용의 문화를 잃게 된다. 다양성과 자유가 통제된 사회는 다양성을 죽이고 창조성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옴으로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려면 이념의 자기주장과 생각과 견해가 동일한 사람들끼리 대화를 통하여 절대 선이나 진리의 독점을 권장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에 삶의 이치로 알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절실하게 알게 하는 것은 삶에 수직적인 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진리를 알게 한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가 앞세운 십자가의 의미는 수직과 수평의 관계로 하늘의 마음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개선에서 그 의미를 새긴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관계는 수직적인 강요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필히 알게 하는 것은 민주국가와 민주사회발전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의지가 용서하며 수용하는 용서의 이해에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 아들이 친히 내려 오셔서 그 마음을 열어 삶으로 친히 보여 주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 삶을 익혀가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국민이 주인 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적인 피조물의 공동체임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새로 거듭 난 새로운 인간의 삶의 형성을 요구하기에 삶의 정항을 이룬 그 자리가 중요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보이셨던 종 됨, 자기의 비움, 봉사와 섬김을 삶에 사랑하는 마음의 가치로 삼는 인간성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삶의 자리는 온 우주 세계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의 자리로서 그 자리에 사는 인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지금에 와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 우주세계를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보게 하는 통찰력으로 그 신앙을 갖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삶’으로서 우리는 우주와 만물을 단순히 물질의 세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보살펴서 함께 살아가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가치를 구원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심의 하늘의 뜻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를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이라 한다.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피조물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주전체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음을 받은 몫이 있는 삶의 피조물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삶으로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깨달아야 한다. 이는 곧 인간이 모두 영원한 시간 안에 생명의 삶을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시간 안에 잠입해 있는 시간과 역사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30
  • 평화! 새로운 시작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믿음은 장래 결과를 미리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서로의 마음에 약속들을 새겨 믿음을 낳으시고 다양한 일들을 일으켜 믿음을 도우신다.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이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돕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만이 우리의 몫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기다려야 할 일들을 보아야 한다. 이는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자는 어떤 핍박도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외부와의 몇 가지 연관관계를 통하여 민족 자신이 자기의 존재(또는 특수성)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의식을 각성하게 될 때 가능해진다. 민족의 경계설정에 사용되는 지표는 사회생활 전반에 걸치는 것도 있고 사회생활의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것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의복, 언어, 가옥형태, 일반적 생활양식 등의 명시적인 것도 있고 추상적으로는 가치관·윤리관·행위기준 등 문화내용적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민족 범주와의 사이에서 인원의 개별적인 이동·접촉·혼인·동화 등의 현상이 생겨 민족성의 지표가 되는 문화특징 자체가 변용된다는 것이다. 민족 범주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구성원과 비구성원 사이의 이분화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다. 평화는 상대 개념으로 쓰이는 전쟁의 목적, 원인, 방법 등의 변화와 더불어 평화의 개념도 달라진다. 평화를 뜻하는 말로 유대교의 샬롬(salom), 그리스의 에이레네(eirene), 로마의 팍스(pax), 중국의 화평. 인도의 샹티(santi), 각각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평화의 주요소로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서양 문명권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실현.(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질서유지(pax Romana)라는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 영향권에 있던 인도에서는 마음의 평안함을 목표로 하는 내향적, 비정치적인 태도로 평화를 추구한다. 이는 경제가 공유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범죄가 없는 사회라는 그러한 정의로만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전체의 의미를 알아 평화의 개념을 사회 정의에서 찾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실행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과거 6·25전쟁을 생각해 본다. 이는 같은 민족끼리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오늘에 와서야 그 평화가 열리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16
  • 구원의 감사
    사람은 일생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한 번은 사람으로 태어나 존재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인간으로 태어난 삶으로 사람답게 생각하고 보람 있게 하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한 길을 찾아 사랑과 믿음으로 거듭남을 알게 한다. 인간은 높은 존엄과 품위를 간직하고 자아실현을 위하여 삶의 길을 가는 인간으로 그 삶을 알게 한다.또한 여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삶은 “구원의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익을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 이는 인간 본능에 의한 사람의 행동이다. 무엇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만은 언제 까지나 마음속에 오래 오래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간직된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에 감사”에 오래오래 간직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생활은 하느님에게서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하느님의 생명의 은인이기에 모든 생명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삶을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이 간직된 사랑이 살아나는 것으로 필히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원본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감사는 삶의 희망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후손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유전되어 태어났기에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기에 배려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봉사와 희생을 자처(自處)하는 감사의 자초지종인 사랑받고 태어남을 믿고 알게 한다. 사랑의 마음은 곧 감사이다. 여기서 이를 “구원의 감사”로 ‘하느님 마음’ 을 알고자 한다. 이는 사랑 실현에 감사를 잘 살펴서 간직 하는 것으로 삶을 잘 챙기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하느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가 이를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세상사는 삶의 이치이다. 즉 이는 하느님의 신묘막측한 구원의 계획과 창조는 창조질서를 행하여 생명은 서서히 사랑으로 감사 하고 살아야 한다. 이를 알고 감사하면 세상에서 삶은 불평이나 불만은 없어 질 것이다. 변하지 아니하는 세상살이에 이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날마다 새로운 감사를 알게 된다. 이 감사는 세상의 한낱 괴로움을 이기고 인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이 세상에서의 감사의 조건들은 변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이 “구원의 감사”는 믿는 자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것이며 살아가는 날 동안 드려도 한없이 부족한 은혜로운 감격이다.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서 자연의 길이요 질서이요 생명이 된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하려면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보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감사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하기에 씨를 뿌리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감사의 씨를 뿌려 거두려면 반드시 때가 지나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지만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한다. 또한 뿌린 씨가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 것이며 모든 일에 이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얻지 못해도 결국 뿌리는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농사의 법칙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것이다. 종자대로 심으면 종자대로 난다. 소가 돼지를 낳을 수 없듯이 결국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는 이치를 보고 심고 거둠의 여기서 심는 자는 반드시 종자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도 주의하여 본다. 이렇게 세상만사의 이치가 ‘심는 대로 거둔다’ 사실이 진리인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종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구원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수하는 비법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 으로 삶을 거두어 심는 것만큼 이루어 거두게 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로 하늘의 씨(복음)를 받는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잘 가꾸는 심는 자가 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직함으로 “구원의 감사”로 한 삶을 꾸려 나갑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08
  • 민족이란?
    우리말에 ‘겨레’라는 말이 지닌 그 의미는 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 동포, 민족을 말하며 “배달겨레”로 알게 한다. 여기서 그 삶의 살아가는 형태를 보아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함으로써 언어나 풍습 따위 문화내용을 함께하는 인간. 집단. 겨레를 가리킴에서 그 삶의 내용을 엿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단일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차지하고 있거나, 한 민족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상태의 국가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한 민족의 공통적 감정, 언어, 풍습, 생활환경 등을 기본으로 하여 그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기에 여기에서 그 민족문화의 특성을 알게 한다. 곧 이는 그 민족이 겪어 온 역사가 경험되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민족 문화적 공통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밖의 생활양식 등이 포함된다. 민족은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된 범주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관념 자체가 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을 분류할 때 같은 언어가 주된 기준으로 사용됨에서 이를 알게 된다. 언어는 민족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이고 사람의 사고방식과 심성(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 지능적 소질, 습관, 신념(정신적 특성) 참된 본성, 잘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 민족의식은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됨을 알게 한다. 현대에 와서 민족의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여하간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민족은 공동사회적 성격을 갖춘 사회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료의식을 갖고 있다. 사실로 민족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면서 서서히 그 집단적 확대와 통일을 실현했으며 대민족으로서 명확한 민족의식(자기 집단이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근대에 와서이다.외형적인 조건으로서는 중세 말기 이후 상품생산의 편리한 교통과 국왕으로 부터 절대적인 왕권확립과 가톨릭교회의 분열 등으로 사회적인 상황을 알게 한다. 이에 따라 민족 구성원 상호간에 전체적인 접촉이 촉진되어 집단적 협동이 강화되었기에 그 결과 능동적인 민족적 자의식이 성립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민족의식에서 합리적.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체계화이며 이는 곧 민족주의임도 알게 한다. 현대에 와서 민족의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여하간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민족은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적 성격을 갖춘 사회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료의식을 갖고 있다. 이를 성서에서 살피게 되면 구원의 역사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상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으로(신 7:6) 친히 택하셨음을 거듭 선포함을 알게 한다.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번역한 곳에서는 “백성” “민족”으로 이해하여 ‘한 지역의 전체 주민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구약과 신약에서는 인류의 각종, 민족 구분에 놀랄만한 관심을 가진다. 성서에 나타난 등장인물을 보면 하나님, 민족들,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민족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삶의 모체이며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소명의 근거가 됨을 알게 한다.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이야기들 속에 히브리인의 조상들을 포함한 70이상의 다른 종족의 집단들이 언급되어 있다. 성서에 계시된 선사시대 세계의 제1기가 노아의 대홍수로써 막을 내린 후 인류는 노아로 부터 새 출발을 시작하여 종족들, 언어들, 나라들, 민족들로 분화한다(창 10:5, 20, 31).이 범주들은 각각 인류의 특성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류의 삶과 역사의 바탕이 되는 무한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표현들이 생겨난다. 구약과 신약에서 보면 인류의 각종 민족 구분에 놀랄만한 관심을 나타낸다. 특히 구약은 인종에 관한 다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0-19
  • 한반도의 분단을 생각해 본다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베버’(Max Weber)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은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의한 것이며 이 가치관 수립에 비합리적인 요소인 종교가 그 기반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을”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그는 이를 해명함에 대하여 이 문제를 다시 비교사회학적인 <세계 종교와 경제 윤리> 연구로 전개시켜 종교사회학에 필요한 많은 관점과 개념을 밝힌 바 있다. 오늘의 분단된 우리민족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그 삶을 손수 경험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체재에서 해방을 맞은 기쁨에 이어 우리 민족의 조국 해방이라는 민족적 희열과 더불어서 생겨난 비극적인 이념적인 문제로 한 민족의 아픈 분단의 역사에서 살아옴은 민족의 부끄러움임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우리 한 민족이 그동안 분단을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면서 통일에 대한 진정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문제의식이 없이 살아 왔던 그동안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평양의 인민들이 남한의 대통령에 대단한 환영으로 그들의 뜻이 삶의 비교의식에서 보여줌은 통일에 대한 그동안 우리의 무심한 태도에 우리민족 서로가 부끄러움을 갖는다. 이렇게 분단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같은 민족으로 긍지는 고사하고 두 동강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질적 형편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자아 분열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분열로 이어 지기 때문에 그동안 분열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삶이었음을 통감한다. 이는 통일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슬쩍 스치며 살아왔다가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결속한 만남은 오늘의 민족통일이라는 명제를 두고 오늘을 잘 살아가는데 한 민족의 만남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생각하며 삶의 경제적인 면에서의 그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기 확립의 힘이 없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데 힘이 부족했음을 알게 한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에게 자기 확립의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해방은 민족의 자기 확립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니다. 분단은 민족과 국민의 주체적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삶의 모든 태도가 타의 의존에서는 아니됨을 알게 된다. 삼천리 반도로 국토를 금수강산을 이루고 살아 온 우리 한 민족이 나눠진 체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 모두가 8.15 해방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잠정적으로 그어진 3.8선으로 말미암아 그어진 분단이 오늘날에까지 오게 된 것, 그 모두가 한반도의 지도자들이 민족분단 극복을 위한 한 민족의 삶에 그 사명감을 인식하지 못하고 차일피일로 민족통일의 때를 가누지 못함에 있어서 이를 반성하게 한다. 따라서 해방 후에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적인 근대에 맞는 삶을 회복될 뻔했으나 그 당시 근대 국가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당파에 얽힌 권력 때문에 통일의 꿈이 사라졌음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온 삶을 알게 된 것은 부정적인 정치이념과의 관계에 의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정치이념은 결국 분단을 고착화 시켰으며 그러므로 이 부정적인 이념은 남과 북이 이념적으로 서로 달리하여 체제를 굳히고 부정적 이념들이 서로의 주장들로 일색이 되어 주체성이 손실되어 오다가 민족주의가 사라져 왔음을 보게 한다. 국가주의(Nationalism)로 이는 우리말로 여기면 ‘국민주의’, ‘민족주의’라 한다. 여기서 챙겨 보면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첫째 지금 한반도에 동질성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민족의 이질화를 막아야 한다. 한반도 안에 남과 북의 언어도 점차로 이질화 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 지금의 남과 북은 자주적인가? 생각해 보면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해방된 우리 조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과연 독립했는가? 현실로 경제적인 면을 보면 북은 외국의 빚에 압박을 받고 있으며 남은 외자 중심의 경제 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남쪽의 경제성장이 민족 자본에 의한 자주적인 성장이라 하겠는가? 자주 경제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 민생을 증대시켜주는 지는 의심스럽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정치적인 뒤에 나타난 제국주의는 ‘신제국주의’라는 이념이 국제경제질서를 꿈꾸며 나타나고 있기에 오늘의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갱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다만 민족 경제와 민족 자본이 반드시 민중을 위한 것 일 때 바람직함을 알게 한다. 이는 곧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역시 그것은 ‘민중’이 주인 됨을 알게 한다. 우리는 ‘한 조국이 분단을 넘어서야 한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위한 기도”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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