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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실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배성이다. 이 사회 속에서 사는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직화 시키고 있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부패 요소를 개혁해야 할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삶을 헌신적으로 받아 수용하고 믿음으로 이를 승화시켜 가야 한다. 비인간화 하고 하나님을 우상의 대상으로 전락 시키는 어떠한 인간의 법이나 제도에 대해 이를 변화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자기의 삶을 마감한 나사렛 예수,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침묵하시면서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중요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깨우치는 믿음으로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삶인지를 십자가를 지신 그의 삶을 제시하신다. 그리스도교의 표시인 십자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시는 십자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와 교회를 동시적으로 연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물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극복해야 하는 고통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맞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부활절 전 40일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이다.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교회력의 절기를 말한다. 재(Ash)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리스도인들은 재(ash)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40일간 묵상하는 사순절 의미를 생각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절을 앞두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내어 주신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식을 행한 것으로 부터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 했던 것이다. 수난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수난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면서 회개하고, 각성하며 절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오늘 본문에서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또한 성서에서 십자가의 이미지는 수난과 어떤 경우에는 순교로 이어지는 사도의 신분의 표시였다(눅9:23).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서에서 십자가의 이미지는 수난과 어떤 경우에는 순교로 이어지는 사도의 신분의 표시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이것을 십자가에 대한 매일의 결단으로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다”는 표현은 십자가에 못 박힐 자가 가로 지른 나무를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가는 보통의 처형 습관을 상기시킨다. 그러한 요구는 예수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수난 받을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을 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말씀을 믿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의 귀감이 되어야 함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이러한 수난을 당하시면서도 예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으셨다. 이 점을 수난주간에 은혜로 감사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행하는 것은 그 믿음이 빚진 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3-24
  • 죽음에서 부활신앙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을 해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이해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멸절하는 비존재, 허무의 권세로서 인간의 삶에 대결해 있다. 어떻게 이 죽음의 권세에서 희망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정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그리스도교는 삶과 죽음의 구원자인 하늘과 땅의 창조자요 지배자이신 하나님이 이 죽음을 어떻게 하시는가?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이를 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고난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음으로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인 인간을 위한 죄인으로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고 죄인의 선고를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여기서 인간은 모두가 인간의 심판과 죄는 물러가고 인간은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신앙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약속된다. 그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약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으면 또한 그와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독일의 성서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교의 죽음에 대하여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하는 가운데 플라톤이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이라 한다. 이러한 논리로 삶은 영혼의 죽음이 되고 죽음은 더 높은 삶으로 비약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요 육신으로 부터 분리된 영혼은 죽지 않고 파멸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이원론의 입장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눈물로서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요청하신 점을 알게 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시고 부르짖는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다. 비존재(Non-being)에서 왔다가 무(Nothing)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비존재의 시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내적 삶의 시간과 그의 목적적 뜻의 시간인 것이다. 사람의 시간과 탄생은 하나님과 땅과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순리로 신앙하게 한다. 사람은 유한하고 죽는다.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은 그의 참된 교제하는 상관자로 선택하심을 알게 하신다.예수의 부활체를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일체의 입장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반대된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얼굴과 음성으로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더욱이 몇몇은 그의 몸울 만져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의 목전에서 먹었고 또 같이 식사를 나누었다. 여기에 예수는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이 살과 뼈가 없느니라고 하신다. 여기에 도마는 상처 자국을 만져보고 확인을 하자고 까지 했다. 사람의 몸을 지닌 그리스도가 무소부재하게 되었다면 그의 참 인간성은 소멸되고 승천도 실재 사건이 되지 못함을 여기서 확실히 하고 싶다. 예수의 몸은 살과 뼈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영화롭게 된 조건 속에 있었으며 시간과 공간의 법칙에 무관하게 활동할 수 있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영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체의 형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영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체란 하나님의 영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몸을 의미한다. 우리는 유한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가장 놀라운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할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더불어 죽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죄의 짐이 없는 생명세계로 돌입하여 자유와 영광으로 하나님의 부활체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죽음과 삶의 분리를 떠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생명을 지속하는 삶에 부활신앙이 되는 믿음을 회복하는 “부활절”로 지키기를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3-17
  •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의 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가지려 한다. 이는 구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삶에 의미를 가지려 한다. 삶이 힘이 들고 무기력 해 질 때 늘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묻는다. 이는 여기에서 세상사는 힘이 이 때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이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듯이 그것은 대속(代贖) )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요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하심을 볼 수 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는 중심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가 믿는 도리를 십자가의 도리를 '십자가의 말씀'이라 한다(고전1:18).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 되었을 때 정치적인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이는 자기의 목숨을 온 세상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드리우게 된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가로놓인 죄를 용서하심이요 사랑의 증거요 화해의 역사라는 것으로 구원의 반열에 앉게 하심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교의 복음은 가로막힌 사이의 관계를 십자가로 화해로 구원에 이르게 함을 믿게 한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게 될 때에 세상 여론이 예수 자신을 누구라 하더냐? 하는 물음에 제자들이 들려주는 말은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하니,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말씀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씀이 끝나기도 바쁘게 주님은 자기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말씀 하시기를 “인자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비로소 예수께서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열어 보이신다. 여기에 베드로의 반응은 육적인 축복으로 받은 은혜만을 생각한 정도의 고백을 하게 된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반응이시다. 마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의 유혹처럼 느끼는 점에 단호함을 보이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고난은 이기적인 고난도 아니고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는 그러한 수난도 아니다. 그는 수탈당한 민중(百姓=나라의 근본)을 보고 깔보고 억누르고 있는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하는 기존의 사탄 세력에 고난을 당한 이의 형편을 돕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의 모습이 십자가의 고난에 숨겨져 있다.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으로 사랑의 낮은 자리로 옮기심을 보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일어 난 구원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이 하늘 공간에 계신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계시면서 현재의 삶에서 나타내 보이시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역사의 현재 속으로 바로 지금 오시고 이 삶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사람이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데 삶 속에서 감정과 이성이 늘 따른다. 여기에 그 삶이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리기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선택의 요구를 하게 되는 일을 여기서 경험하게 된다. 예컨대 이것이 이치에 맞는 행동일까? 하는 삶의 물음에 놓이게 된다. 이때 이는 본질적인가? 이치에 맞는 행동인가? 하는 물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비우는 선택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비우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3-10
  • 정신차린 믿음
    바울이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AD 37-44) 왕과 로마를 대표한 총독 앞에서 전도할 때 바울이 이렇게 변호하니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베스도 총독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精神)으로 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정신으로 바울은 참 말을 한다. 이는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하늘의 뜻이 있으면 거기에 따른 삶으로 말하는 참된 진실이 담겨 있다. 삶은 이 뜻을 따라 살아 가는대에 생명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을 이끌어 가는 기본적인 삶으로 정신(精神)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생각이나 감정의 작용을 다스리는 인간의 마음을 말할 때는 정할 정(精)과 하늘의 신(神)자가 들어가 精神을 말한다. 국어사전에 정신(精神)이란 단어의 뜻은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가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 또는 각오로 말하며 정신세계. 정신 자세. 건전한 정신. 희생정신이 여기에 해당하고 두 번째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 예로써 '정신을 차리다. 정신이 없다'를 말한다. 세 번째는 이념이나 사상을 말한다. 그 예로서 삼일정신, 나라나 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말할 때 쓰인다. 한다. ‘정신을 잃다’는 말은 의식을 잃거나 얼떨떨해질 쓰인다. 또한 속담에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그 의미가 잃었던 의식을 되찾거나 정신을 가다듬거나 하는 경우에 쓰인다. 이렇게 정신(精神)의 포괄적인 의미는 사고나 감정의 작용을 다스리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며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나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이나 또는 그런 작용을 하며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의의나 목적을 알게 하여 마음의 자세나 태도를 희생의 정신, 신앙의 정신을 불러일으키게 함을 알게 한다. 이 정신이 예수의 정신이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삶의 정신을 말한다.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이치를 추구하는 것이 그 정신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에서 세상을 위해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삶으로 친히 살아오신 예수님의 행적과 그의 생명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불변하신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능력의 힘을 믿게 한다. 여기에 그가 세우신 교회는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말씀의 선포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라고 말씀하심은 영성이 훌륭한 사도바울도 이렇게 고백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사도바울의 고백은 "율법아래 있을 때 사망의 몸 안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망의 멍에 에서 우리는 이미 해방 받았다"고 회개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짓지 않게 삶에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죄를 짓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으며 여기에 정신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이 함께 하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능력인 “믿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精神)의 포괄적인 의미로 사고나 감정의 작용을 다스리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며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나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 또는 그런 작용을 함으로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의의나 목적을 알게 하여 마음의 자세나 태도를 희생의 정신, 사랑의 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곧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섭리 안에서 사랑하고 평화롭고 스스로 자유롭게 서로가 스스로 사는 삶을 살도록 존재의 의미를 부여 하신 믿음을 갖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바울의 절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2-26
  • 설과 믿음의 자리
    본래 ‘설’이란 “섧다”라는 뜻으로 새해의 첫날에 일 년 동안에 아무 탈 없이 무사태평하게 보낼 수 있도록 근신(謹身)한다는 뜻으로 몸차림이나 행동을 삼가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동양에서는 해(年)의 주기를 음력 기준으로 ‘설 쇠다’로 말한다. 말하자면 새해를 맞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는 의미로 말한다. 그리고 새로 맞이하는 새해의 첫머리를 한 해로 ‘설’이라 한다. 새해가 낯설어 ‘낯설다’는 어근에서 ‘설’이라 한다. ‘설익다’의 설이 그런 의미인 것처럼 일년 내내 삶이 익어가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을 알게 한다. 설익는 삶이 아니라 삶을 잘(=익숙하고 능란하게, 아주 적절하게, 만족스럽게 충분히) 익는 성숙한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설날에 고향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삶의 자리인 탯자리에서 지금 고향을 찾아 나의 삶 성숙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끼고 어른들께 효성에 곁들인 자기 정체의 본래를 찾는데 그 뜻이 깃들어 있다.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불의 근원은 태양을 향하여 있기에 불을 붙이면 불은 태양이 있는 위로 솟아오른다. 물의 근원은 바다에 있기에 물은 바다를 향하여 물의 근본을 따라 물은 아래로 바다를 향하여 내려간다. 고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은 삶의 근원을 찾는 마음이며 자연에 솟아 있는 나무는 그 생명의 뿌리가 땅에 박혀 있음을 알아 땅에 내려진 흙에서 솟아 자란다. 이렇게 고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이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한 존재의 삶의 가치가 생명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성서에서 역사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약속 되어진 생명의 진가를 통해 하늘의 구원의 사실들을 알게 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첫 구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부터 시작함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예수의 족보로 부터 하나님과의 믿음의 약속으로 대장정을 펼치는 이유를 알게 한다. 모세의 소명 기사나, 조상들의 믿음의 생활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야기와 출애굽의 삶의 ‘속 내평’(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의 실상)을 믿음의 덕담을 늘어놓는다. 이는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본향을 향한 그리움의 마음이며 고향의 자연적인 산천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원한 본향을 그리는 삶의 자리인 탯줄을 찾는 본능을 깨닫게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아버지 하나님의 의미는 자기 핏줄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림 사랑의 고백을 의미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대대로 내려 온 믿음의 자손들이 살아 온 삶의 고백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문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말씀하신다.전래로 내려 온 조상들의 얼이나 남겨 주신 믿음의 유산을 기리면서 삶의 역사는 생명의 얼이 새겨있는 지혜를 알게 하고 어른들의 사랑의 삶을 사는 곳에서 사랑의 체험을 통하여 힘의 근원인 하늘의 기운을 터득하게 한다. 이는 어른들의 삶에서 느끼며 일어나는 마음, 친근감으로 사랑의 가치를 느끼는 마음의 정을 터득하게 되어 옳고 그름의 판단력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생활 속에서 효행의 삶을 익힌다. 익히는 것은 삶의 근본인 믿음을 배우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 하늘과 땅으로 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天地)라 한다. 햇빛과 공기, 그리고 물과 땅이 없으면 생명으로 사는 모든 것, 그리고 자연은 살지 못한다. 이 세상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천지가 따른다. 천지에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때를 형성하여 삶을 거두고 생사화복을 거느리신 분 바로 그 지으신 이가 나의 삶을 믿음의 관계로 이끔을 알게 한다. 이 우주에 거하는 세상의 이치는 하늘의 섭리와 은혜로 그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삶은 생명의 근본을 알게 한다. 한 사람이 갖는 그 인품은 그가 살아온 가정의 공동체에서 보고 듣고 깨우치는 삶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삶의 바탕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이것을 가정의 본보기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오늘의 이 시대의 삶은 새로운 가치구조를 형성하지 못한 채 방향을 찾지 못하고 서로가 불신사회의 늪에서 헤메이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에 생명의 삶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2-18
  • 삶은 시간에서 산다 2
    삶을 시간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삶을 행복하게 살 권리는 자기정체성의 문제를 알게 한다. 삶은 누가 내 대신 살아준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것이다. 이 삶은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삶을 사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그 삶을 놓으신 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놓으신 분의 뜻을 찾는 것은 그 분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삶”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여기에 구원 얻은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삶은 곧 그 길을 찾는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가 자기 스스로는 삶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산다. 길은 어디에나 가는 길이 아니다. 가는 목적을 따라 가야 한다.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터득해야 하고 그 진리는 생명으로 가는 삶의 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나그네 같은 삶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고 지름길로 들어서는 진리의 터득이 한 생명으로 참되게 사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앎은 무엇이 옳은지 알아야 하며 여기에 따르는 행동을 제시하는 안내 표시판을 보고 따라가야 한다. 죽음을 이겨 삶의 길을 제시하신 이의 뒤를 따라 가야 한다. 여기에는 안내자도 필요하지만 동행자도 같이 가면 삶이 넘친다. 이는 우리의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줄을 모르고 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된다. 세상이 있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하는 것이다. 세상은 홀로 살 수 없음이 세상살이다. 한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지어서 삶의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것은 삶의 목표를 찾아 길을 가게 하는 지으신 분의 뜻을 이렇게 헤아리게 한다. 삶의 길에는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은 생명의 방향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의 자리는 살아있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 던져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산다는 것은 살아있어 생동감이 넘치어야 한다. 그냥 주어진 한 생명을 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삶의 자세로 되어야 한다. 예수가 생명을 얻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친히 보여주는 점이다. 예수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서 나눔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의 답을 죽음과 연결하는 죽음은 나눔의 정점을 보여준다. 나눔을 지향하는 그의 삶은 곧 죽음을 향하는 길에 구원의 사실을 일깨운다. 이는 생명의 삶을 내어주며 스스로 보여주는 삶이 “삶은 시간에서 산다”라는 것이다.흘러가는 시간으로 세월(歲月)을 경험하게 하고 삶을 사는 까닭을 알게 한다. 이것은 '지금'이라는 눈 깜짝할 삽시간의 순간(瞬間)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다시 삶을 세우는 일로 어떤 사물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를 순간으로 찰라를 스치게 한다.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지금” 내가 챙겨야 할 시간이다. 예수의 죽음은 의미를 깨우친다. 생명을 위해서 썩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이 어떻게 사는 법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의 삶은 이러한 포기를 드러냈으며 이 포기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포기의 순간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이어진다. 예수가 생명을 얻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점이다. 예수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서 나눔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의 답을 죽음과 연결하는 죽음은 나눔의 정점을 보여준다. 나눔을 지향하는 그의 삶은 곧 죽음을 향하는 길에 구원의 사실을 일깨운다. 하나님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하나님의 가능성을 부어 주셨다. 그 가능성을 실행하면 그 가능성은 기적처럼 성령으로 역사하여 모든 능력을 이루신다. 삶의 문제를 해결 하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지혜의 시스템이 작동하게 하여야 한다. 그럼으로 그 카이로스의 시간의 삶은 삶의 길, 삶의 진리, 생명의 삶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성서는 이를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고, 성서만이 진리의 기준이다. 그럼으로 그 카이로스의 시간의 삶은 삶의 길, 삶의 진리, 생명의 삶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2-04
  • 삶은 시간에서 산다 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사도 바울은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하셨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 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말씀하신다.산다는 것에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삶의 시기와 때도 필요하며 여기에 시간속의 순간의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순한 것에 집착하며 만족하는 시기도 그 나름의 수준에서는 복잡하고 깊은 삶을 위한 준비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삶을 회복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삶은 내가 존재하는 삶에 의미를 찾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것과 관계되어지는 모든 삶의 형태에서 스스로가 행복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한 생명으로 부지(扶持)하는 동안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그 삶이 공동체이며 삶의 바탕이 관계에 기인하기에 개인의 삶이 곧 사회이며 나라이고 이 세상이다. 여기에 따라서 삶은 끊임없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 사회와 한 나라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삶에서 주어진 시간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 보면 ‘지금(只今)’이라는 이 순간에서 “지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이라는 풀이는 (只)’다만’이라는 말로 이제 ‘금’이라는 말로 ‘지금부터 시작하자’는 부사로 ‘이제’라는 말을 더 붙이며 상용하는 언어에서도 이를 알게 한다. 먼저 순간(瞬間)이라는 말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뜻으로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순간은 깜짝 지나가는 것이기에 ‘다음’이 없다. 이는 시간성과 무시간성의 통일성으로서 현재의 사실성의 순간을 잘 이용하면 영원한 현재로 심화시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 삶의 역사는 시간의 지나가 버림과 버린 시간의 의식이며 그와 동시에 내가 그러한 시간을 파악해야 하는 특히 옳은 순간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의식을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야 말로 한 현상으로서 지나가 버림과 그러한 현상을 통하여 또한 영원한 존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시간성과 무시간성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으로 충만된 시간적 그 특성이 영원한 존재 현상으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그러한 영원성은 순간에 절대적으로 결합되어 그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순간과 영원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진리를 “바로 지금”이 터득하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헬라어에 시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이다.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이름 자체가 시간이라는 뜻이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초에 나오는 신으로 크로노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시간을 의미한다. 부언(附言)하면 자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통해 결정되는 시간을 말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나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시간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에 ‘카이로스시간’은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기회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여기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똑같은 하루 24시간을 살더라도 어떤 사람이 느끼는 24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의 시간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이의 한 시간의 느낌은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든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그 시간의 삶은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 그 시간은 카이로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자기의지와 결단에 의해 달려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육체적으로만 크로노스로 산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삶은 흘러가 버린 모든 것, 잃어버린 모든 것, 또한 아직 다가오지 않는 모든 것 들까지 불러 모아 하나로 일치하게 한다. 그럼으로 크로노스에 의해 산산이 부셔져 버린 반면에 카이로스 시간은 그것이 가진 의미와 삶의 가치들을 드러낸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일찍이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 때요 “바로 지금”이 삶의 구원의 날이라 고 힘주어 삶에 시간의 중요성을 말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1-22
  • 한 해가 왔다
    한 해가 가고 새해 “한 해가 온다”는 말씀으로 살려 한다. 오늘에 와서 새해 365날을 어떻게 맞을까? 하는 마음으로 새 해의 삶을 생각해 본다.한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구분한다. 이렇게 시절을 두는 것은 그 계절의 시기나 때가 있어 그 제철에 알맞은 시절을 따라 때를 찾아 사는 삶으로 사는 것을 살게 한다. 철이란 꽃피는 동산이나 흐르는 냇물에도 그리고 눈 내리는 골짜기 안에도 있다. 얼음이 풀리면 한 철이 지나가고 꽃이 피면 서서히 한철이 들어온다. 그리고 한 시절이이 가고 오는 것은 자연을 품는 때를 안다. 사람의 몸에도 머릿속의 혈관과 같이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가고 철이 들어온다. 자연의 과일 속에 시절에 따라 철이 익혀 가듯이 인생의 삶에도 그 때의 철이 가고 때가 들어와 생명이 익혀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 기력이 약해진다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는다. 철이 드는 익은 과일은 향을 내고 아름다운 열매로 그 시절의 자태를 들어낸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 익힌 삶이 늙어가면서도 삶을 익히는 것이다. 하루를 ‘한 날’이라함도 하루를 더 묵고 가기로 하여 하루를 이해하는 것으로 밤을 맞으면 어두운 밤이 지나 그 모양대로 있다가 있는 그대로 자다가 어제처럼 마냥 아침이 오니 또 하루를 산다. 이렇게 지나고 또 하루아침이 오고 밤을 지새우며 하루를 보내면 마침내 아침은 오고야 마는 신비를 깨닫게 한다. ‘한 해’를 말함도 ‘해가 가고 오는 때의 한해가 그 바뀜’을 가지고 한 해가 오는 의미를 알게 한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 삶의 밖에서 흐르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강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일년 달력이 한장 한장 넘어가다 새 달이 오고 1년의 한해는 가고 오는 것으로 새해를 가리킨다. 그저 일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남기고 싶은 의미도 있어 메모들이 남기고 간 기억들로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한다. 어제도 먼 과거처럼 뒤로 물러나고 지나온 세월이 까마득한 시절처럼 지내려 하지만 추억은 저 혼자 남는다. 마치 달리던 선수처럼 두리번거리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새해엔 마음껏 살아 보려는 새 각오가 생겨나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지금(只今)이란 말은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되는) ‘시간’으로 현재를 말하고 시방(時方=바로 우리들이 떠날 때다)을 의미하여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권세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때 죽은 이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한다. 그 후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며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공이라는 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그의 목적을 수행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과 하나님의 특성은 역사의 마지막 상황에 표출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한다. 예수 안에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 주장들이 가리키는 마지막 일들은 현재의 사실들이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 동참하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심판과 부활과 영생을 알게 하는 “바로 지금” 이라는 시간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행위임을 안다. 생명의 의미를 성서로 부터 정리해 보면,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음을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자발적 활동과 경험에서 이를 가리키며, 또한 생명은 다른 개인들과 공존(Co-existence)으로 서술함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를 초월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신령적으로 이해함도 알게 한다. 이 생명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람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없고 다만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실 수 있을 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한다. 그러면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1-12
  • 한 해가 간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지금 세상은 엄청난 빠른 속도로 빠르게 변해간다. 한 해에도 새로운 버전들의 스마트폰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그 안에 탑재되어 있는 어플리케이션들을 찾아가지 못하면 또래 집단 안에서도 소외되는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현재의 거대한 혼돈의 물결 속에 숨어 있는 기독교 진리와 배치된 여러 사상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여져 서로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가 살아가는 동안 그 생각과 삶의 기준이 서로가 다르다. 민족과 문화의 동질성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가 다른 삶을 피차간에 따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이세상의 삶을 사는 동안은 그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갖게 한다. 이는 영원이라는 시간 가운데서 우리가 사는 삶은 잠시 한 동안의 삶이라는 시간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 삶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피할 수없는 현실이라는 삶의 단면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그 죽음을 극복하려고 온힘을 다하며 살려고 한다. 이는 삶이 생명이라는 사실로 삶을 부지하려고 허둥대며 살고 있다. 생명이라는 이 진실 된 가치를 알고 세상을 사려고 하지를 않는다. 한 목숨을 지탱하려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 있으면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고 성취욕으로 수단과 방법을 헤아리지 않고 소유만이 삶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본다. 이 욕망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만을 위한 욕망이다. 여기서 알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생명은 구원의 비밀을 알게 한다. 오늘의 본문 에베소에서 이를 알게 한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어 영원을 산다.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에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구원받지 못한 삶의 상태를 말하여 구원받게 하려 함에 있다. 여기서 구원받지 못한 상태는 이 세상의 풍속으로 살려는 삶을 지적하며 땅에서 사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치관을 말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요 육신에 의해 지배당하는 생활은 구원을 잃어버린 삶의 태도를 밝혀주는 교훈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영생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의 원인이 소멸되어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한 시간에 참여하는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하나님의 지으심에 목적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아 삶의 의미와 거듭나는 삶의 믿음으로 그 가치인 능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구원의 가치와 누림이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금년의 한 해는 기울어지고 한 해 시작의 끝의 마지막에 와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 해의 삶을 어떻게 보냈는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는가?를 반성하는 시점에 다달았다. 인생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 살아간다.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 때를 알려면 주어진 삶의 깊은 곳에 넓은 눈으로 낮과 밤을 흐르는 '해'처럼 밝음과 어둠의 시간을 응시하고 길고 넓은 공간을 넘어 저 피안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영원무궁하다. 여기서 구원은 나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 가는 것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2-30
  • 구주 오신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오는 2015년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찬양하는 날로 세상이 흔히 말하는 세칭(世稱)으로 말하는 '성탄'입니다. 온통 세상은 크리스마스 축제에 빠져서 호화찬란한 네온사인과 흥청망청 축하연으로 들뜨고 있습니다. 누구의 생일을 맞아 생일 케이크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캐럴로 노래 부르고 축하하는 모습인지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가를 불러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찬양을 부를 때에 믿음의 고백으로 불러야 될 줄로 압니다. 그 옛날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던 천사들이 온 누리의 백성들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구주 오심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온 우주에 까지 미치고 있고 우리가 그분 오심을 기뻐하고 찬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만 백성” 모두에 해당하는 우주적인 사실을 설명함(Joy to the world)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구주 오셨네”를 “구주 오신다”로 과거의 한 시간의 이해를 역사의 시간 이해로 이해하여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강생)믿음의 의미를 가지고 오늘의 삶을 지키려고 하는 의미를 가졌으면 하고 권해드립니다.“구주 오셨네”를 “구주 오신다”로 과거의 한 시간의 이해를 현재의 역사시간 이해로 이해하여 현재의 "구주 오신다"로 성육신의 의미를 가지고 오늘의 삶을 형성하려고 하는 의미를 가졌으면 합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위대한 한 성자의 탄생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 사람의 죄를 용서받는 세상 창조 이후로 인류의 구원자로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교회는 교회의 교회력에 오시는 삶의 성탄절과 용서의 대역으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죽으심은 3일간으로 다시 살아 부활의 삶이 구원을 보게 하는 구세주의 부활절을 기준으로 교회력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그 기준에 따라 절기를 구성하고 지키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중심으로 대림절과 현현절이 자리하고 있고 부활절을 중심으로 사순절과 부활절, 성령 강림절이 결정됩니다. 주님의 삶이 오심으로 하는 탄생과 죽음으로 가시는 구원의 사역은 삶의 영원성을 간직하게 된 의미를 지니어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시는 재림주로 오실 분의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인은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한 시점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구원의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의 크리스마스는 사실로 보이신 성육신의 출발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통해 확장되며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러 부활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통하여 완성되기 때문입니다.이 완성을 향한 출발의 과정 속에 우리가 서 있으며 새로운 시간과 삶을 통해서 우리도 성육신의 사건 전 과정에 참여하도록 초대 받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적 시간이라는 거시적 시간을 가지고 예수가 태어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구원의 역사적 사건이 이 세상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이미 예정되어진 약속의 실현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필연적인 사실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하를 호령하듯이 온 세상을 흔드는 놀라운 사랑의 힘이 하늘에서 부터 이 땅으로 쏟아져 내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미시적(微視的) 탄생으로 오심의 구주 예수님을 그 깊은 뜻과 의미를 세밀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오신다는 고요함과 낮고 천한 자리로 오신 미천함의 예수 탄생의 기사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온 세계의 모든 존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우리는 그 자녀가 된다는 신비롭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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