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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8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피부는 바짝 말라 있었고, 입가와 눈가에 주름살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이거, 내 얼굴 맞아? 웬 할아버지가 여기 앉아 있지?’ 보고 또 보아도 분명 내 얼굴이 맞는데, 엊그제까지만 해도 지인들이 나의 얼굴에 동안이 남아 있다던 소리를 듣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딸아이가 한 마디 거듭니다. “아빠 솔직히 말해서, 요 몇 년 사이에 아빠 얼굴이 확 늙어 버렸어.” 나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래방에서 내가 계발한 몸부림춤을 추면 좌중이 웃음 바다로 변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동호외원들 앞에서 노래를 하며 춤을 춰도, 사람들은 웬 주책이냐는 듯, 자기들끼리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이거 안 되겠다. 이대로 내 젊음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습니다. K부장이 교내 S 도서관 개관 기념식 때 공연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내 젊음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노래는 잘 알려진 한명희 시, 장일남 작곡의 ‘비목’을 준비하였습니다. 마침 같은 부서에 있던 여선생이 악보를 구해 피아노 반주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유명 인사들도 오는데 더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절은 여선생이 피아노 연주를 하고, 나는 무용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랫만에 춤을 춰 보는데, 청년 시절 지도 교수가 춤을 잘 춘다고 칭찬해 주던 추억까지 떠올랐습니다. K부장도 내 춤을 보더니 괜찮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외부에서 국회의원과 기관장들이 오시니 연습 많이 하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대화도 화끈하게 진행되고, 하던 일도 술술 풀려 학생들 앞에서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 콜롬보>(1971-2003)의 주인공 피터 폴크 흉내를 내 가며 강의도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2주간의 준비 기간이 훌쩍 지나가고 드디어 개관식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연장에는 국회의원인 안** 선생을 비롯하여 유명 인사들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사회를 보던 K부장이 이정길&#8228;나훈아&#8228;김흥국 등 유명 탈렌트와 가수 들을 배출한 학교여서 개관식에 공연을 준비하였다고 하면서, 노래와 무용을 선보이겠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재단의 실세인 K이사도 무대의 맞은편 정중앙에서 잔뜩 기대를 하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유명 성악가 흉내를 내 가며 멋지게 ‘비목’을 불렀습니다. 이제 2절에서는 무용을 할 차례였습니다. 무용 타이즈를 입고 발레화를 신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몸의 가운데가 튀어나오면 꼴불견일 것 같아 와이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준비하였던 한국 무용을 시작하였습니다. 발을 들고 치마를 살짝 집어올리는 부분도 완벽하게 소화하였고, 관객석 아래의 넓은 데로 가서 어깨를 45도 각도로 회전을 하면서 뒤로 두 번씩 스텝을 밟아 뒤로 2미터 가량 물러서는 동작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장이 무용복이 아니어서 그런지, 안의원은 나의 무용을 보지도 않은 채 옆 사람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고, K이사도 자리를 옮겨갔습니다. 무용이 지속될수록 공연장에 침묵이 잔뜩 흘렀습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K부장이 재단 이사장실에 들어가 얼굴이 굳어진 채 나와도, 나는 그가 K이사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물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K부장은 평교사가 되었고, 나 역시 과장에서 밀려나 퇴직할 때까지 평교사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명퇴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마무리를 잘 하여야겠다며,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주말이면 퇴직 후에 거할 집필실도 알아 보며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퇴직을 한 달 앞두고 강의 시간에 학생들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들도 내가 도서관 개관식 때 와이셔츠 차림으로 무용을 하였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열화같은 성원을 마다 할 수도 없었고, 그들은 인터넷으로 내가 좋아하는 송창식의 ‘고래 사냥’도 틀어 주었습니다. ‘교실에서 강의 시간에 무용이라.’ 나는 학생들을 다독거렸습니다. “애들아. 참아라.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보기라도 하시면 놀라 자빠지실 거다.” “아니예요. 저희가 망 봐 드릴 게요.” 십여 분을 설득하였지만, 도저히 강의가 더 지속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잘 하던 몸부림춤을 선보이기로 하였습니다. 교단을 몇 번이나 도약하면서 몸을 사물놀이 하는 것처럼 흔들어대자, 너무도 신기한 광경에 학생들이 내 주위로 바짝 다가섰습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오 삼등 삼등 완행 열차 기차를 타고 오오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1-02
  • 기독교인의 행복론 -27
    사실 따지고 보면 주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셨으며, 성령이 함께 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보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행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화평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복해 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회개하여 죄의 암흑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시고, 천국으로 가는 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얼마나 멋지고 위대한 일인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자 합니다.‘사랑’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감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권택영,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 이론>, 민음사, 1997 참조)이 있습니다. 오레니카는 비 오는 날이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가난한 노천극장 지배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여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게 삽니다. ‘연극을 보아야 우리의 삶이 풍요해집니다. 연극, 극장표…’. 입만 뻥긋하면 그런 단어들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연극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노천극장 지배인”이었기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객지에 나갔다가 돌연 사망합니다. 목재 상인이 그녀의 슬픔을 위로해 주자, 그녀의 입에서는 ‘목재는 어느 철에 나와야 좋고 건축 자재로는 어떤 게 좋고’ 등, 건축, 목재값과 같은 말만 튀어나오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행복한 어느 날 목재 상인은 감기에 걸려 앓다가 죽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집에 하숙을 하던 수의사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아내와 별거하고 아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부쳐주며 혼자 사는 수의사에게 그녀는 부인과 화해하라고 충고했었습니다. 수의사가 벗이 되자 그녀의 입에서는 다시 ‘어느 집 개가 무슨 병으로 앓고 가축의 돌림병에는 어떤 게 있다’는 등, 가축, 축사, 돌림병 등의 단어만 튀어나옵니다.그러던 어느 날 수의사는 부대 이동으로 그 마을을 떠납니다. 이제 그녀는 말을 잃고 쓸쓸히 살아갑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기쁨이 사라지고, 주름살과 피곤이 쌓이며, 누구도 그녀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집은 돌보지 않아 서까래가 내려앉고 먼지가 쌓입니다. 그녀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텅 빈 공허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의미는 연인들에 의하여 채워졌던 것입니다. 텅 빈 그녀에게 어느 날 수의사 가족이 찾아옵니다. 부인과 화해한 수의사는 아들의 학교를 위해 그 고장에 머물게 되고 집을 세준 오레니카는 그의 아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제 그녀는 두렵습니다. 언제 그들이 아들을 데리고 훌쩍 떠나 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연극에서 목재로, 다시 가축으로 왜 의미가 바뀔까요.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지인들에게 말하는 화제가 달라질까요.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따라 지인들에게 말하는 화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레니카의 사랑은 다섯 남편을 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으로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의 대상을 찾아야 하지요. 나의 마음에 영원한 사랑으로 남을 당신. 주님이 바로 내 옆에 계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사탄을 이길 지혜를 주시고, 나의 삶이 영원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11).나는 한때 대학 교수가 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따고 시간 강사 생활도 20여 년 하였습니다.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강의를 나가는 고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네 군데 대학 강의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C국의 선교사로 일하시던 형님이 잠깐 귀국하여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형님은 이러저런 얘기 끝에 나의 소망을 들어 보더니,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따로 있을 테니 내 의지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라고 권하면서, 자신도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얼마 후 실로 기적처럼 나에게 전업 작가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매일 아침 영감을 받아 노트에 적어 내려가고, 오후엔 산책하며 헬스를 즐기는 건강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몸에 있던 병도 치유되어 간다는 의사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증후군이 없어지면서 일상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문이나 문예지에 연재하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0-21
  • 기독교인의 행복론 -26
    기독교인의 간증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이 있었는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거슬리게 행동하였던 사람이 반전하는 존재로 변화될 때, 청중은 그에게서 역동적인 힘을 발견하게 되지요. 인생 역전, 그것은 반드시 간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도 반전은 있고,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문열의 「익명(匿名)의 섬」에는 성폭행을 당한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정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작중 화자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화자는 “백여 호 정도의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로 부임하여 갑니다. “드물게 보존된 동족 부락”인 그 마을에는 “깨철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요, 무슨 남 안 가진 기술이 있지도 않았으며, 재담이나 익살로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일도 없었”지만, “마을 전체의 부양을 받으며 마을의 성원이” 되어 “하루 세 끼의 밥과 저녁에 누울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을 아낙네들과 간통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성불구자라고 치부하며 대충 얼버무려 버립니다. 그것은 그가 간통 혐의를 받고 “젊은 남자”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깨철이가 성 불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화자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군에 간 약혼자가 월남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의 휴가를 서술자와 보내기로 하여, 그녀는 “1주일을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냅니다. 그러나 약혼자가 끝내 오지 않자, 그녀는 그만 허탈감에 빠져 돌아오다가 깨철이한테 겁탈당합니다. 이를 통하여 그녀는 깨철이가 동족 부락에서 “마을 아낙들의” “잠재적 연인”으로 살고 있음을 직감합니다.내가 주목한 것은 작중 화자가 자신의 과거를 그냥 추억의 한 토막으로 넘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아픔을 슬기롭게 잘 넘겼습니다. 그 극복 과정은 생략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회개하고 치유의 과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당한 억울함을 누군가가 인정하고 치유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내 불행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줄 존재입니다. 주님은 신자에게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중국에서 합작 은행인 K은행장까지 지내신 형님이 목사가 되어 C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시다가 순교하셨습니다. 그는 한때 일류대학을 나와 외환 딜러의 전설이 되어 미국과 독일과 중국을 전전하며 생애 최고의 호강을 누린 적도 있습니다. 여성들의 로망이 되어 멋지게 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부르시기에, 그는 회개의 가정을 거쳐 육십대의 나이에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변변찮은 음식을 먹으며, 말씀 보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복음 전하는 활동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형님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이를 보고 서운해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주님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썼다. 이제 선교사업은 가족들에게 맡기고 천국으로 들어와라.’ 우리 형제들은 주님이 이렇게 인정하셨다고 믿고 그를 영원으로 보냈습니다. 그가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믿음이 없었다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회개는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문입니다. 나는 한때 노래를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KBS 전국 노래 자랑 1500회’ 특집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지인들 앞에서 ‘뭇여성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방 가수’라고 자부하며 몸부림춤을 추고 구성지게 노래불렀습니다. 그리고 교회 대예배 헌금송 시간에 마이클 잭슨처럼 자리를 흔들며 복음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나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건강하던 나에게 갑자기 통풍과 고혈압과 만성신부전증 같은 대상증후군이 생겼습니다. 직장을 명퇴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으며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나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찬양대에서 주님께 예뻐 보이는 찬양을 드리고, 전업 작가로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행복한 일상을 신자들이 감지하도록 영감과 필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주시는 영감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망나니 역할로 사람들을 웃기게 하려 했던 저를 회개의 과정을 거쳐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0-1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5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Patricia의 소설 『검은 집 Black House』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꿈의 공간을 잘 보여줍니다. 사건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면 선술집에 모여 마을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오래 된 폐가에 대한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 폐가와 관련된 마을의 전설이나 어린 시절 모험담이 마을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곤 하였지요. 이 집은 어떤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지요. 그곳에 가는 일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고, 한편으로 그 집은 젊은 시절 추억을 연결해 주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에서 제일 예쁜 소녀와 어떻게 최초의 성 관계를 가졌는가, 그곳에서 어떻게 처음 담배를 피웠는가를 끊임없이 늘어놓곤 하였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젊은 엔지니어가 그 마을에 이사왔습니다. 그는 ‘검은 집’에 관한 전설을 듣고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공표합니다. 다음 날 저녁에 이 수수께끼에 싸인 집을 탐험해 보겠다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암묵적으로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젊은 엔지니어는 사람들에게 말한 대로 그 집을 찾아갑니다. 그는 뭔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잔뜩 긴장한 채 어둡고 낡은 폐가에 접근합니다. 그는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방마다 모두 살펴보지만 마루 위에 있는 몇 개의 썩은 매트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곧바로 선술집으로 돌아와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검은 집’에서 신비스럽거나 매력적인 것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엔지니어가 그곳을 나가려 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매섭게 그를 공격합니다. 그리하여 그 엔지니어는 불행하게도 그곳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그마을 사람들에게 ‘검은 집’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검은 집’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無”를 의미합니다(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시각과 언어, 1995 참조). 곧 ‘검은 집’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향수 어린 욕망과 왜곡된 추억들을 투사할 수 있는 하나의 빈 공간 구실을 하였던 것입니다. 젊은 엔지니어는 그곳이 그저 낡은 폐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설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환상 공간을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현실로 환원시켜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환상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공간은 때론 추억이나 이상을 담아 놓고 욕망의 대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거지요. 그런 환상 공간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신 세계가 주는 신비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맥없는 인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자, 그럼 이야기를 기독교의 세계로 돌려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신 후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지요. 그때 베드로가 선지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17). 신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신자들은 “환상”과 “꿈”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이라면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는 때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매일 새벽에 꿈결에서 깨어날 즈음, 그 날 써야 할 글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이를 위해 책은 어떤 것을 읽고, 일화는 어떠한 것을 예로 들어야 할 것인가 하는 영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두어 시간 묵상을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떠오르고, 어떠한 장르의 책을 언제 어디서 출간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이 일을 위해 적절한 때에 예산이 마련되고, 관계자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주님께 간구합니다. “주님. 오늘은 어떠한 제목의 글을 쓸까요.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어떠한 성경 구절을 인용할까요. 출판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까요. 출판사는 어디로 정할까요. 예산 마련을 위해 누구를 찾아갈까요. …” 참으로 신기하게도 적절한 때에 그동안 써 놓았던 글들이 모아지고 책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주님이 나를 전업 작가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전업 작가라고 해서 베스트셀러로 돈을 벌거나 갑자기 유명 작품이 창조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작가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동행하시니, 이처럼 소중한 직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9-2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4
    결혼한 지 30여 년이 지난 남자로서, 연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행여라도 아내가 이런 이야기로 서운해 한다면 차라리 이 이야기를 안 꺼내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지요. 대체로 아내들은 남편이 자신만 평생토록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러나 남편의 속마음을 속 시원하게 털어 놓을 남자는 없지요. 괜히 자랑 삼아 연인 이야기를 꺼냈다간 평생 책 잡힐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소설 얘기로 상상 가능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내가 꺼내 든 책은 애니타 브루크너의 『달라진 상태 Altered States』(London: Penguin Books, 1997)입니다.이 소설의 주인공 앨런은 신중하고 고독을 즐기는 법무관으로서, 육감적인 사촌 새라와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매우 신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사랑이었던 새라는 외국으로 이사를 가 버리고, 앨런과의 연락도 끊어 버렸습니다. 앨런은 실연의 아픔을 딛고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새라의 친구 앤젤라와 결혼하지만, 은밀히 새라를 연모합니다. 그는 행여라도 새라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파리에 가 보지만, 그가 상상했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앨런이 집에 없는 동안 앤젤라는 아이를 사산하고 깊은 실의에 빠져 자살을 감행합니다. 앨런은 나애의 죽음에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새라에 대한 몽상을 그치지 않습니다.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중년이 되었을 때 앨런은 새라를 다시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라는 아름다움을 잃어 버린 뒤였습니다. 그는 예전의 그녀에게서 느꼈던 매력이 가셔졌음을 알게 되고, 새라도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앨런은 새라를 향한 사랑을 온전히 져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상당히 매력적인 여자 친구를 만날 때에도 그는 그녀와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과거의 열정적인 만남에 관한 기억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앤젤라의 죽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실망합니다. 더구나 남편이 자신의 친구였던 새라를 끝까지 못 잊어 하는 것을 보고 허무와 공허 상태에서 자살을 택하게 됩니다.이렇게 볼 때 남자에게는 마음 속에 간직해 놓은 연인이 있는 모양입니다. 남자는 그 연인에 대한 향유를 욕망하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경우가 있는 거지요. 이와 같이 남자는 끝없이 향유의 대상을 연모하고 살아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남자는 늙어 죽기까지 연모의 대상과 가정의 아내라는 이중화된 파트너를 몽상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이때 작용하는 것이 남자의 슬기입니다. 남자는 자녀들을 키우는 가정 생활을 하면서 아내에 대한 정도 커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때로는 바가지 긁어대는 아내가 밉다가도, 이부자리 속에서는 행복을 나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해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궁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지요. 나이 들어 얼굴이 쭈글쭈글해져도 변치 않는 것은 부부애요, 믿음입니다. 남자는 아내와 멋지게 살아왔다는 자긍심으로 대인 관계도 원만해지는 거구요. 거리를 지나다 보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남녀들이 잘도 어울려 다닌다는 생각이 듭니다.어쩌면 주님은 저렇게 딱 한 사람만 골라 평생을 같이 살게 하였을까요?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세기> 2:24-25). “둘이 한 몸”이 되고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부부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지요.가끔 아내가 나의 배려가 없다고 서운해 할 때면 고스톱을 치자고 합니다. 형제간 모임에서 그 기술을 익혔던 지라 나는 아내의 돈을 딸 기회가 많습니다. 화투의 좋은 짝을 아래쪽에 몰아 놓고 아내한테 패를 떼라고 하면, 스마트폰에서 눈을 데지 못하던 아내는 늘 위쪽만 떼어놓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화투패는 선이 유리하도록 놓아지는 것이지요. 점수가 많이 나는 쌍피 말입니다. 때로는 내가 너무 많이 따도 곤란합니다. 내가 딴 돈으로 군것질을 많이 해서 몸이 부실해진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내가 기분 좋게 잃어 주는 배려도 한답니다. 이제 연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지요. 남자는 마음 속에 연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연인을 마음 속에서 온전히 지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극복의 길이 없지 않습니다. 아내 안에 세상 모든 여인들의 장점을 다 갖다 넣는 겁니다. 그러면 아내가 예뻐 보이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나이 들어 주름살이 늘어가도 변하지 않는 게 부부애인가 봅니다. 앞으로 백이십 세까지 사는 알파 에이지 시대가 된다는데, 부부간에 해로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9-23
  • 기독교인의 행복론 -23
    조선 시대에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청계천 광교 다리 밑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전기수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청중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여 가는 직업 말이지요. 나도 그 전기수 역할을 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 택한 이야기는 발자크의 『사라진』(1830)(권택영의 『후기 구조주의 문학 이론』, 민음사, 1990 참조)입니다.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립니다. 밖으로 튀어나온 발코니의 창문턱에 걸터앉아 비단커튼 주름 뒤로 몸을 감추고 화자는 시끄러운 파티의 한가운데서 몽상에 빠집니다. 밖엔 죽음의 춤이 어른대는 어둡고 앙상한 정원이나, 안에는 파리 최고의 가문과 재산을 자랑하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호화스런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엔 춥고 음울한 영상과 왼쪽에는 호사한 삶의 영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화자는 한쪽 발은 추위에 떨고 다른 쪽은 열기에 젖어 있습니다.풍요롭고 아름다운 무도회장에서, 사람들은 마담 란티 자녀의 교양과 미모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한편, 란티 가문의 근거와 재산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이때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납니다. 파티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불협화음을 몰고온 노인에 대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런 가운데 화자는 자신의 파트너인 마담 로체피트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로체피트는 노인 옆에 대조적으로 놓여 있는 아름다운 아도니스의 초상화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에 화자는 그 그림의 비밀을 로체피트에게 알려 줍니다. 그 초상화는 어느 여자의 조각을 본뜬 것인데 그 여자는 마담 란티의 친척이었습니다. 마리아니나는 노인을 뒷문으로 내보내자, 젊음과 미모로 화자를 애태운 마담 로체피트는 노인에 대한 비밀을 당장 알고 싶어하지만, 화자는 그 다음날 그녀의 방에서 단둘이 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에 걸맞지 않는 괴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반항적이고 몽상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성향이 야성적으로 폭발되는 충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부 시간에는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방자한 그리스도상을 새긴 죄로 학교에서 추방됩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이 유명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유학 생활 중 조각만이 그의 전부였던 그가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이 됩니다. 쟘비넬라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고 각오하고,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감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깁니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에 호응한 듯, 잠비넬라는 그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합니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그녀에 관한 사실을 귀띔하는 데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였습니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그는 살해됩니다. 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습니다.이 작품에서 주목할 대목은 화자가 창턱에 걸터앉아 파티장 밖의 차가움과 안의 열기를 동시에 감지한다는 사실과 함께, 쟘비넬라가 거세된 남자로서 태생은 남자이나 여자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마담 로체피트도 아도니스의 초상화에 대하여 처음에는 미적으로 바라보았다가 그 사연을 알고 나서 실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존재에는 상반된 감각과 태도와 감정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사물을 어느 한쪽으로만 바라보는 편협함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볼 때 세상에는 분명 미와 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지요.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9-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22
    내 가 읽었던 책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드는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성애 문학의 저자입니다. 그의 소설 <미덕의 재난>은 1787년에 발표되었으며, 이듬해에 단편집 <사랑의 범죄>가 나왔습니다. 그 후의 작품으로는 <쥐스틴>(1791), <쥘리에트>(1798)가 있습니다. 사드 가문은 콩데 왕가의 친척인 귀족가문이었습니다. 사드는 1754년에 군대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7년 전쟁이 끝난 후 군대를 떠나 돈 많은 부르주아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방탕한 생활과 창녀들에게 가학적 성행위를 한 그의 행위가 추문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로즈 켈러 사건이었습니다. 1768년 부활절 주일에 젊은 창녀 로즈 켈러에게 했던 그의 성적 학대 행위가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투옥되었고 이후에도 추문과 투옥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생활의 지루함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성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과 희곡을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가학적 성애는 ‘가학적 성애를 통한 즐거움 찾기’라는 심리학적 용어를 낳았고, 철학에서도 “욕망의 대상 전체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이라는 ‘사드적 운동’(알렌타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참조)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드의 이야기들이 욕망의 대상에 대하여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나아가는 데 비하여 ‘돈주앙적 운동’은 향유 대상에 대한 ‘하나하나’의 반복적 즐김을 의미합니다. 라 클로의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발몽의 경우가 전자에 해당합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메르테유 부인은 투르벨 부인을 유혹하려는 발몽의 계획을 듣고 내기를 합니다. 투르벨 부인이 발몽에게 단지 절반의 향유(demi-jouissance)만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발몽과 메르테유의 음모에는 사랑은 기계적으로 산출되고 규제될 수 있으며, 사랑의 불꽃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 타오를 수도 쇠약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발몽은 투르벨 부인이 그와 사랑에 빠지도록 결심하며, 전략을 짜서 이를 체계적이며 단계적으로 이행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으면서. 투르벨 부인이 실제로 그와 사랑에 빠지자, 그는 메르테유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메르테유가 벨르로슈와 관계를 맺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연인들을 자신만이 지배하면서 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던 발몽은 메르테유에게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상대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와 같은 줄거리에서 발몽의 유혹 패러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하나’씩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러나 투르벨 부인을 향한 욕망의 전략에는 ‘조금조금’의 논리로 그녀를 유혹합니다.몰 리에르의 희곡 『돈주앙』에 나오는 돈주앙의 향유의 대상 접근 방식은 전자의 발몽과 다릅니다. 그는 신화에 나올 정도로 바람둥이의 전형입니다. 그는 발몽의 경우와 달리 수많은 여인들과 ‘하나씩하나씩’ 관계를 맺어가지만 온전한 향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의 바람둥이 기질은 이렇습니다. “나는 다른 여자의 매력을 보는 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녀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바치는 거야.” 이와 같은 궤변으로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농락한 것입니다.두 인물을 보면서 나는 나의 스승이셨던 故 조연현 선생님이 강의 시간에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순수 소설의 기준은 이렇다. 가령 선한 주인공이 작품의 흐름 중간에 죽고, 마지막에 지독하게 악한 인물이 결말에 가서 활개를 친다고 하자. 이를 통속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발몽과 돈주앙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욕망이 있습니다. 이 욕망을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에 대한 경계,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할 마음이지요.성 경에는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이 나오고, 하나님의 의에 위배되는 사탄도 종종 등장하지요. 이와 같은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기도해야 하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었지요. 오히려 이를 비웃는 다윗의 아내가 애를 못 낳는 벌을 받았지요. 한때 나는 개구쟁이 어른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동호인들 앞에서 몸부림춤을 추고, 시낭송을 하면서 그럴 듯한 가수 흉내를 내기도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푼수짓이냐고요? 아닙니다.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을 보시어요. 유재석 등 유명 개그맨이 망가지는 모습에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지요. 우리가 예배를 볼 때 영과 진리로 경건하고 진지하게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예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9-01
  • 기독교인의 행복론 -21
    내가 가사 도우미 신세로 전락한 것은 명퇴를 하고부터입니다. 명퇴는 나의 간절한 바램과 희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총각 시절부터 글만 쓰는 전업 작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벤치에 앉아 인간미 있는 존재를 사색하며,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잡지사에 보낼 글을 쓰는 일은 나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런 로망을 꿈꾸며 집안에서 여유를 찾으려 할 즈음, 아내의 바가지 긁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집에서 삼식이가 되어 비생산적인 글만 쓰지 말고 나가서 단돈 백만 원이라도 벌어와 봐요.” “아, 생활비는 매달 적당하게 들어오잖소.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래요.” “당신 방구석에 들어앉아 글만 쓰면 병날까 봐 그러지요. 좀 나가서 움직여요. 무브(move).”아내의 바가지에는 묵묵부답으로 있는 게 상책입니다. 딸아이는 이런 내 신세를 『허생전』의 ‘허생’에 비견하였습니다. 7년 동안 아내의 바가지에 시달리다가 홧김에 나가서 돈을 왕창 벌었다는 허생. 그러나 글쟁이는 글만 쓴다고 당장 돈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하늘 아래 멍석 깔아놓기입니다. 뭔가 좋은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망한 일에 기운을 소진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동안 부지런히 문예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시집과 평론집을 한 권씩 출간하기도 하였지만, 문학에 관심이 없는 지인들은 나의 책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런 무반응을 오랫동안 겪다 보면, ‘야. 이거 내가 작가 맞아?’라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은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으니, 아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볼멘 소리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내 뿐만 아니라 코미디 각본을 쓴다는 후배 작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선배 하나가 “이번 시집은 읽을 만하다”고 하자, 후배 작가 왈 “그걸 읽기는 했어요?” 하고 반문하는 것이 기증 받은 내 시집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다고 후배에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고. 아무튼 명퇴한 지 삼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방구석에서 혼자서 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겠다’ 싶어 신나게 글을 쓰다가도, 열흘이 지나면 ‘에이.’ 하면서 고개를 가로젓던 일이 수십 번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안 일을 하라는 아내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더 버틸 수가 없겠다’는 자조감이 몰려왔습니다. 딸아이까지 “아빠. 직장 그만두면, 가사 도우미 되기로 했잖아.” 하는 데엔 빠져 나갈 구멍이 안 보였습니다. 막상 집안에서 삼식이 노릇을 하다 보니, 아내의 힘이 세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형제들 모임 때, 여자의 힘에 대해 형님께 살짝 의견을 물었더니 형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야. 여자가 강하게 나올 땐 무조건 엎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아니나 다를까. 형수는 형님이 집에서 그렇게 번쩍이게 가구들을 닦아 놓는 데도 “형님과 같이 살기 싫다”고 투덜대는 걸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편들이 기죽어 지내는 게 보편적인 현상인 모양입니다. 연로하신 은사인 예술원 회원 M시인도 아내 앞에서 아이 취급 당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신혼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내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였지만, 집안 일은 청소하는 시늉만 하면 되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차려다 준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나서, 아내가 깎아 온 사과를 입에 넣으며 “당신도 들어요” 하면 행복해 하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남편 공경하라’는 어른들 말씀을 귀가 닳도록 들었는지, 말끝마다 경어체를 붙여 주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엔 꼭 내 의견에 따랐었습니다. 그랬던 아내가 언제부턴가 가정에서 왕비로 군림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집안의 대소사에 대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아내. 집 안의 소소한 것에 대하여 야무지게 닦달하는 아내의 카리스마에 나는 언제나 기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역발상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느니,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가사 도우미가 되자. 전철을 타고 가다가 비닐 앞치마를 파는 상인에게 오천원을 주고 두 벌을 샀습니다. 하나는 빨강, 다른 하나는 파랑 꽃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설거지를 할 때 물이 옷에 튀는 것을 예방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파랑 꽃무늬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였더니, 처음엔 아내와 딸아이가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봅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세척제를 묻힌 수세미로 닦아냈더니, 아내가 내 옆에 다가와 말합니다. “다 씻은 그릇들은 흐르는 물에 놓아 두어야 씻기가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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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8-18
  • 기독교인의 행복론 -20
    서울 명동 근처 충무로역에서 내려 남산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와 포플라가 늘어선 그윽한 가로수길이 나옵니다. 남산의 한 자락으로 왼쪽은 숲, 오른쪽은 공공 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 막다른 곳에 예전에 안기부장 공관이었던 ‘문학의 집’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클래식 음악 선율이 묻어나올 것 같은 그윽한 잔디밭을 지나 여느 현관 같은 곳을 들어서면, 사무실 오른쪽에 작은 공연장이 있습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세 시가 되면 그곳에서 좋은시 공연문학회의 시낭송회가 있지요. 몇 개월 후면 200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지요. 나는 거기서 몸시를 발표합니다. 1971년 9월 15일부터 2003년 1월 30일까지 미국 NBC에서 방영되었던 피터 폴크 주연의 <형사 콜롬보>. 후줄근한 옷차림에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 놓다가, 날카로운 질문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LA 경찰청의 형사 콜롬보 흉내를 내며 멘트를 해 봅니다. “독자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독자를 문학의 場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고 관객을 바라봅니다. 관객들의 시선이 나의 눈가에 머뭅니다. “시낭송에도 탈경계가 필요합니다. 원시 종합 예술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흥이 나면 신나는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뭔가 주문을 읊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시낭송의 새로운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러면서 고개와 팔을 풍차 돌리듯 휘젓는 몸부림춤을 추고,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구성지게 부르고 나서, 진지하게 시를 낭송합니다.너는 깡마른 연어다해발 6300미터를 날아올랐다가태풍과 몸을 섞는 여유그래서 너는 현실이 되고때가 되면 고향으로 회귀하는 귀한 몸이다근육을 찢어 닭가슴을 여미고멋으로 태어나는 사나이 배짱그 때깔로 삼바춤 추며흥겹게 두드리지 책상노래와 호흡 맞춰라 착하기도 하지 너의 입피어오르는 스프링큘러로너의 잔디밭을 적셔라발레의 자유로움으로 태평양을 건너는지느러미의 역동함에 적당히 살을 키우고 빼는 몸은 살아 있다 - 졸시,「몸」전문그렇습니다. 총각 시절 배운 무용 덕분에, 회갑을 넘긴 나이에도 살아 있는 몸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나요. 나 홀로의 멋에 취해 시를 읊조리고, 남산에 흐르는 그윽한 정기에 젖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설사 홀로 적막 가운데 놓인다 해도 시가 있는 한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당신에게 감동을 주지 않더라도 기억할 겁니다. 나의 몸시. 이 몸부림에 당신 안에 숨어 있던 열정을 실어서 한껏 날려 보내도 좋을 겁니다. 상상의 날개를 타고 아름다웠던 추억의 장면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거구요. 어릴 적 전축 앞에서 추었던 나의 몸부림을, 어머니가 칭찬해 주었습니다. 장성해서는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나의 예술끼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칭찬 덕분일까요. 요즘 나는 글 쓰는 멋에 취해 삽니다. 글 속의 화자가 되어 세상을 향하여 소리지르기도 하고, 나쁜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질책도 하면서, 참 맛있는 사색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걸 몸이 담고 있습니다. 몸을 통하여 나오는 노래와 춤과 낭송이 나를 멋지게 합니다. 나만의 멋진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아 행복합니다. 그저 밋밋한 나를 이토록 멋진 세계에 들게 해 주신 분은 당신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당하여 소외 가운데 있던 삭개오를 향하여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리라”며 손을 내미셨던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 주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더욱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아침엔 영감으로 당신을 맞이하고, 오후엔 사색으로 당신과 걷습니다. 당신이 예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몸부림춤을 추며 몸시를 낭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주신 행복에 물들며.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8-11
  • 기독교인의 행복론 -19
    내가 바둑을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형 S가 생전에 즐기던 취미 활동이어서 그렇습니다. S는 W은행에 입사한 후 독일?미국?중국 등에서 외환 딜러 업무를 보다가 중국 칭따오에서 한중 합작인 K은행 행장까지 역임한 수재였습니다. 비교적 우둔한 편인 나로서는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S가 하는 취미 활동까지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칭따오에 내가 여행갔을 때에도, 그는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바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후 나는 귀국하자마자 매일 인터넷에 들어가 한 시간씩 바둑을 두었습니다. 바둑 판세를 훑으며 상대가 두고 싶어하는 곳을 가려내 예상치 못한 곳에 착점하는 재미는 스릴마저 있었습니다. 더구나 수를 빨리 읽는 편인 내가 속도를 내어 착점하다 보면 상대로 내 페이스에 말려 착점 속도가 빨라져 승리를 따내곤 하였습니다. 내가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오전에 바둑 두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바둑을 두면서 세운 기세는 대인 관계에서나 협회 일을 볼 때에도 유용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가령 선배가 여자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말해 주면 상대가 안정을 되찾기도 하고, 협회 일을 할 때 서로간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원만한 일처리를 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바둑에서 얻은 기세 덕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바둑의 기본은 자신의 집을 상대보다 넓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놀이 가운데 하나였던 땅뺏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커다란 사각형 선 안에서 작은 돌을 어느 방향으로 굴려야 자기 집을 확장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돌을 굴려야 하지요. 처음엔 욕심을 내지 않고 돌을 조금씩 튕겼다가 나중에 자기 땅이 넓어지면 마음껏 돌을 튕기게 되고, 끝에 가서 상대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는 세밀하게 돌을 튕겨야 온전한 자기 집이 되는 거지요. 바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상대의 집이 넓다고 그곳에 끼어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차분히 넓은 안목으로 자기 집을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이 부동산으로 돈 벌었다고 나도 무작정 뛰어들었다가는 실패하기 쉽지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달란트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감동을 주는 설교로 교세를 확장하고, 작가는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문장을 가다듬지요. 사람들이 다 자기 전문 분야가 있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선교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세계의 오지에 직접 뛰어들어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는 반면, 국내에서 선교 헌금과 기도와 편지로 지원하는 교인도 있고,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외국에 나아가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선교 사업 가운데서도 바둑의 이치가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바둑에서 상대의 수를 간파해야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선교 대상지의 실정 파악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몽골에 비전 트립을 갔을 때의 이야깁니다. 그곳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 때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허가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봉급을 받는 집사를 적정 인원 두어야 하고, 세금 내는 것도 감사를 받아야 하며, 교회 통장을 따로 만들어 관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 외에도 그곳의 인종적·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노화 현상이 빨리 오는 편이고, 가을에 낮과 밤의 온도차가 매우 큰 것도 지역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지요. 또한 그곳 사람들은 어학적 두뇌가 발달하여 한국어를 매우 빠르게 익히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선교하기 이해서는 아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데, 시행 착오를 겪는 교회가 없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많은 선교 헌금을 보내 큰 교회를 지었다가, 겨울에 석탄 연료비를 감당 못하여 어린이 예배실에서 주일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동네의 근거리에 서로 다른 교파가 교회를 따로 지어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경쟁하듯 전도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는 선교 대상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무작정 돌진하는 데서 오는 시행착오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블론과 납달리와 같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자가 많은 곳에 오셔서 그들에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음식을 제공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는 치유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에도 40년의 궁중 생활, 40년의 광야 생활, 40년의 지도자 생활을 하게 하였지요. 주님은 상대를 아는 바둑의 이치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자도 이웃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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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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