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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
    이제 필자의 나이도 어느새 노년에 접어들었네요. 거울을 보면 주름살이 늘고 얼굴이 까칠한 것이 노년티가 확연히 납니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데, 세월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가네요. 그나마 안정된 주거 공간에서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 절약 탓이 아닌가 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젊은 시절 고생이 노년이 되니 보약이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고교 동창들을 만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로마 병정 머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맞벌이였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지방으로 전근을 가면 주말 부부가 되어야 하였지요. 내 나이 삼십 대에 부부간에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부부 사이의 정情은 사랑의 욕망을 불태우지요. 어떤 날은 저녁 10시가 넘자 아내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더군요. “보고 싶다. 나 오늘 밤 당신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차를 몰아 원주에 있는 아내에게로 향하였습니다. 한겨울이라 차창 밖으로 세찬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차도 강풍에 약간 흔들렸습니다. 톨게이트를 벗어나기 전에 날씨가 염려되어 집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따뜻한 아랫목을 생각하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제쳐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를 반복하다가 그냥 속도를 내기로 하였습니다. 문막 근처를 지나는데 달빛에 하얀 것이 어른거리데요. 시속 140킬로미터 속도를 줄이려 하였으나, 이미 빙판 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가 미끄러져 다리 난간에 거의 닿을 뻔하였습니다. 헤트라이트를 끄고 창밖을 바라보니, 다리 아래로는 수십 미터가 넘는 낭떠러지였습니다. ‘야 이거, 삶과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로구나.’ 조금만 더 차도를 벗어났더라면, ‘아내를 그리워하여 시속 140킬로로 차를 몰던 남자, 강물 위로 추락하다’란 기사가 날 뻔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차를 몰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간호 장교.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위병소에 도착하니 시계는 12시를 훌쩍 넘었습니다. 위병에게 늦게 온 이유를 구차하게 늘어 놓고 아내를 호출하였습니다. 아내가 부시시한 눈으로 병원 문을 나서면서 좀 일찍 올 것이지 밤중에 웬일이냐며 하품을 하네요. 머리만 긁적이다가 모텔로 향하는데, 그 날 따라 대학 수능 시험 전 날이라 모텔마다 방이 없다네요. 할 수 없이 찾고 찾다가 시내 변두리의 욕실도 따로 없는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는데, 아내는 샤워도 제대로 못했다고 투덜대데요. 부랴부랴 부부간의 사랑을 하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새벽에 차를 모는데, 전 날 밤 죽을 뻔했던 다리를 지날 때는 운전을 하면서도 내 목을 만져 보게 되었지요. 주말이 되어 아내가 집에 와서는 갑자기 내 머리를 깎아 주겠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절약해야 나중에 조금 우둔한 우리 아이가 컸을 때 과외비라도 더 보탠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파란 보자기 위에 고개를 내밀었더니, 아내가 여학생 단발 머리처럼 머릿결 끝 부분만 겅둥겅둥 자르데요. 속으로 아내의 검약 정신에 감탄하며 월요일에 출근을 하는데, 버스에서 내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으면서 “로마 병정 머리다.”라며 킬킬거렸습니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데, 동료들이 내 옆을 지나면서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였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물었더니, “정선생. 거울을 좀 봐요. 정선생 머리가 꼭 로마 병정 머리 같애.” 그러면서 클클클 웃어댔습니다.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가서 내 옆모습을 보니 ‘로마 병정’ 얘기가 나올 법도 하였습니다. 엊그제 미국에 간 딸아이가 사위 머리칼을 깎아 놓고는 그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딸아이의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머리 밑부분을 면도기로 돌려 깎은 흔적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딸아이가 어떻게 가족 이발까지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우리 부부의 절약 정신을 닮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우리 부부는 나의 박사과정 학비를 대느라고 절약을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마트에 들렸더니 평소에 칠천 원 하는 수박이 조금 작다고 삼천 원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수박 한 통을 사서 들고 거실에 갖다 놓았더니, 아들 놈은 그걸 처음 보았던지 축구공인 줄 알고 발로 차면서 축구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아내가 수박 한 통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거실에 놓여 있는 수박을 보더니 아내가 대뜸 나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이거 얼마 주고 샀어요?” “삼천 원.” 그러자 아내가 “나도 이거, 삼천원 주고 샀는데, 우리 부부는 왜 이렇게 검약하는데 선수지.” 하면서 하하 호호 웃는 것이었습니다. 절약하는 습관은 가족끼리 서로 닮는 것 같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4-06
  • 키높이 구두의 비밀
    나이가 오십대 중반을 넘어서면, 여성은 남성 호르몬이 늘어 강해지는 반면 남성은 뱃살과 함께 여성 호르몬이 늘어나게 됩니다. 필자도 그 나이를 넘어서니 확실히 남성다움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사십대까지만 해도 여류 문인들 앞에서 몸부림춤을 추며 남성다움과 열정을 과시하였는데, 요즘은 눈가에 주름살이 깊어지며 노래 부르는 것도 어딘가 매가리가 없고 말소리도 조근조근해졌네요. 특히 아내 앞에만 서면 도도해진 여성상 앞에서 왜 그렇게 주눅이 들까요. 더구나 아내는 예순을 넘은 나이에도 당당하게 직장에 출근하는 반면, 나는 한 달 내내 책상 앞에서 자판을 두드려서 얻은 원고료로 생활하는 삼식이인지라, 이건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한때는 패기가 넘친 적이 있답니다. 특히 연애 시절이 그렇네요. 평소에 우둔하다고 평가받던 나는 H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아내를 만난 것이 기회다 싶었답니다. 어떻게든 남성다움을 보여 상대를 아내로 만들고 말리라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우선 당시 개그맨 제조기로 알려진 S예대 무용과에 무용 강습을 신청하여 고전 무용·현대 무용·발레·에어로빅 댄스·탈춤을 단기간에 익혔네요. 여성 무용수들 앞에서 청일점이긴 하였지만, 만년 노총각 신세를 탈출하기 위해선 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지도 교수가 무용 타이즈와 발레 슈즈를 안 입고도 반바지 차림으로 수강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나와 같이 입교한 체육 선생은 에어로빅 댄스를 배우러 왔다가 남성들이 없어 쑥스럽다며 중도 하차하였지만, 나는 끝까지 버텼지요. 그리하여 지도교수는 나의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도약이 처음엔 이십 센티미터도 안 되었는데, 수강 후 오십 센티가 되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무용에 자신감이 생겨 아내를 만난 지 일주일만에 종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데려갔네요. 노오란 조명 불빛에 보니까 아내가 그렇게 예뻐 보이데요. 기회다 싶어 팔을 풍차처럼 흔들고, 머리를 사물놀이하는 것처럼 흔들며, 허리를 고무줄 튕기듯 휘저어 몸부림춤을 추었지요. 이른바 느끼한 동작을 빠른 몸놀림으로 처리하는 저만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스코 타임이 끝나고 블루스를 출 때에는 아내도 내가 맘에 들었는지 푹 안겨오데요. 그리하여 아내와 처음 만난 지 사십여 일만에 결혼하였지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답니다. ‘아!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영리한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2세는 영락없이 똑똑한 아이가 나올 거야. 크하하하.’ 결혼식을 꿩 궈 먹듯 마치고 신혼 여행을 갔습니다. 신혼밤을 정신없이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서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어딨어?” 고개를 여기저기 휘둘러 보니 아내가 내 턱 밑에서 “나, 여기있는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내의 키가 나의 큰 키(178cm)에 비하여 작아도 너무 작았습니다. 거울을 통해 아내의 머리 끝이 내 어깨 아래에 닿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제서야 아내가 날 만나는 동안 줄곧 키높이 구두만 신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 나의 어리석음이여. 그대는 눈에 뭐가 씌워 아내의 키가 그렇게 작은 것도 모르고 사십여 일만에 결혼하여 아내가 구두를 벗었을 때의 키를 알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형제들에게 우둔하다고 일컬어 온 데 비하여, 아내는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는 사실. 아내가 결혼 후 이 년만에 큰 아이를 순산하였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우유 50cc를 단숨에 해치울 정도로 건강하였지요. 오십억 개의 정자 가운데 난자 도달에 성공하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나의 잔뜩 기대 어린 눈썰미를 받으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부터 이게 웬 일? 아이가 경기도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도 공부하는 게 더뎌 맨 날 다른 아이보다 한 시간 늦게 오더니, 집에서 한자 외우기를 여러 번 반복시켜도 외우질 못할 정도로 공부엔 영 신통찮네요. ‘이놈이 아내에게서 나온 게 맞아?’ 하고 아무리 관찰하여도 영락없이 날 닮은 국화빵이긴 하네. 아내의 몸에서 연이어 딸아이가 튀어나왔는데, 애기 시절에도 별로 예쁘지가 않데요. 영리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는 아이라면, 그 다음엔 어떤 아이가 나올 지가 뻔해 보였습니다. 나는 우둔함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 하도 고생하였던 터라, 고심 끝에 결정하였습니다. 더 이상 우둔한 아이가 나오게 할 순 없다. 그리하여 곧바로 병원에 가서 정관 수술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키높이 구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젊은 시절에 아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놈의 키높이 구두 때문에 내 눈에 뭐가 씌우긴 씌워진 모양입니다. 그래도 큰아이가 세상에 나와 비록 서른이 넘도록 취직을 못했어도 인성은 착하고, 딸아이는 결혼해서 미국에 유학 가 잘 사는 것은 다행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3-2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
    1960년대에 형들이 신문에 난 한 고등 학생의 주검을 보고 분노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때의 정황을 들여다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시민들은 부정 선거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경찰이 폭력으로 탄압하자 잘 조직되지 못한 시위는 곧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러나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당시 마산 상고 1년, 17세)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민중의 분노는 다시 폭발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저항이 누그러들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4월 18일 평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구타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쟁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전 날의 테러에 분노한 서울의 학생·시민들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고, 분노한 시민들은 마침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몰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경찰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피의 화요일’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항쟁은 부정 선거 반대를 넘어 이승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혁명은 학생과 시민 들이 광복 후 한국 사회에 쌓여온 모순에 맞서 싸운 것이기 때문에 독재 정권의 타도에 그치지 않고 민주?자주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어릴 적 보았던 형들의 분노를 돌이켜 보면 나는 개인에게도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에게는 불의에 저항하는 양심이 있는 것이지요. 그 양심은 언제나 인간 심리에 놓여 있다가 진리에 어긋난다 싶으면 가차없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지요. 내가 직장을 처음 잡았던 80년대 초에 옆 자리에 있던 동료인 E가 갑자기 짐을 싸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냐고 E에게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개인 사정 때문”이라는 짤막한 말만 남긴 채 떠나갔습니다. 몇 개월 후 나는 그가 직장을 떠난 것이 자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군부 권력이 정권을 잡고 있을 무렵에 그는 회식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가다가 당시 정권의 위선을 비판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던 운전수가 모범 운전사 자격이 되는 상점을 받기 위해 그대로 S경찰서에 신고하는 바람에, E는 그만 안정된 직장을 잃고 말았던 것이지요. 물론 E의 술주정이 섞이긴 했겠지요. 그러나 사석에서 말한 것까지 통제를 하는 권력을 보고 나는 개인에게도 힘이 있어야겠다는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 가운데 하나가 불의에 저항하는 양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남북 투쟁 시대에 유다 왕국의 아사왕 이야기는 나의 양심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비야의 아들인 아사왕은 41년간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한때 그의 어머니의 우상 숭배를 꾸짖고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사를 정도로,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58만 명의 군대로 100만 명의 세라 군대를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전략을 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전략이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유다의 성전으로 예배 드리러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경에 라마성을 건축하려 하자, 이스라엘 후방에 있는 아람왕에게 뇌물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전략의 성공으로 아사왕은 라마성에 있던 건축 재료들을 가져다가 자신의 나라에 게바와 미스바 두 성을 건축하였습니다(<역대하> 16:6). 이는 외교 정책으로 보면 아주 멋진 세상 지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하나니가 아사왕을 찾아가 책망합니다. 하나니의 책망은 이렇습니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의 바아사를 이기고 다메섹까지 영토를 넓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세상 지혜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의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계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개인에게도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진리가 있습니다. 외딴 섬의 기암 절벽에서 자라나는 풍란의 기氣가 있는가 하면, 시멘트 바닥의 틈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있는가 하면, 개로 태어난 동물도 있습니다. 연안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심해에서만 사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존재나 사물마다 살아가는 이치가 있는 게지요.이 가운데서 인간이 살 맛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정情이 진리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정이 지구 곳곳에 듬뿍 자라 누구나 행복을 누리는 삶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시골에 가면 평상에 앉아 나그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노인의 정, 직장 생활의 노고를 위로해 주는 직장 동료의 정, 아름다운 세계를 가꾸어 나가는 작가의 정들이 만나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3-17
  •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젊을 적에 성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문학 작품에 나타난 성을 분석하면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은 종족을 보존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관련된 긍정적인 면도 있고, 너무 국부적인 자극에 빠져들게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성은 하나님이 부부에게 부여한 창조의 질서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누가복음> 7:38)어도 이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어 릴 적에 나는 성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가풍 운운하며 ‘중매 결혼’이라는 규범을 지켜 달라고 자식들에게 주문하였습니다. 나는 막내이고 어머니 말씀에 잘 순종하는 편이라 이 규범을 지지하였고, 나중에 장성하여 결혼도 중매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서서히 연애 바람이 사회에 불던 때인지라, 형이나 누나 들은 이 규범을 잘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한 번은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데 나의 누나인 H가 남자 친구인 M을 집에 데려왔습니다. 누나는 대문을 들어서더니 대뜸 날더러 번데기를 오원 어치 사 오라는 겁니다. 나는 형들의 연애를 익히 보아 왔던 터라, 내가 심부름을 다녀오는 동안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약간 짐작이 갔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어머니는 H가 남자 친구와 영화 구경을 간다고 하면 나를 딸려 보냈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에 나름대로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누나에게 남자가 수작을 못 하게 하는 감시자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그 런데 H는 M을 데리고 집 안에 들어서더니, 대뜸 날더러 번데기를 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골목의 끝을 지나서 큰길가에서 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누나가 나 없는 사이에 ‘수상한 일(?)’을 벌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에게 밀려 왔습니다. 시장 가까운 골목 안의 번데기 장수도 있는데, 그보다 먼 데서 사 오라는 누나가 나 없는 사이에 내가 상상하기 싫어할 행동을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땀까지 흘리며 뛰다시피하며 사 왔더니, H는 “으음. 빨리 갔다 왔네. 근데 번데기가 너무 조금이다. 가서 더 달라고 해라.”며 다시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누나에게 직접 대 놓고 “누나, 다른 때는 그러지 않더니 왜 그래?”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쏜살같이 번데기 장수에게 달려갔습니다. “누나가 이거 적다고 더 달래요.” 그랬더니 번데기 장수는 제대로 줬다고 하고 나는 빨리 번데기를 더 받아 누나한테 칭찬받아야 하는데 안 되어서 답답해 하는 사이, 옆에 있던 복덕방 영감이 “거, 아이가 더 달라고 하는데 더 주시지요.” 하는 바람에 번데기 한 숟갈을 더 얻어서 갖다 줬더니, 누나는 그제서야 M과 툇마루에 앉아 해해거렸습니다. 나는 누나가 왜 심부름 시간을 길게 잡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였습니다.세 월이 흘러 나도 성담론을 연구할 정도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담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시행착오를 겪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때 인터넷 카페에 <탁구 삼국지>를 재미있게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가 너무 재미있다고 동호회원들이 우리집에 놀러온 적이 있지요. 달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가 무르익고 동호회장이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정박사. 직장 끝나고 밤에 작업하실 때 힘드실텐데, 좀 길게 쓰세요.이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남의 부부 관계까지 밝히고 그러나?’ 나는 기분 나빠서 내내 말을 하지 않으니까 회원들이 슬슬 내 눈치를 보면서 일어섰습니다. 그래도 나는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문간에서 동호회장에게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아니. 남의 부부 관계까지 회식 자리에서 밝히고 그래요?그러자 회장은 눈늘 멀건히 뜨고 한참 생각하더니, 말하였습니다.-아하, 밤에 작업한다는 얘기요? 그건 그런 뜻이 아닌데, 정박사의 탁구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는데 짧으니 작업할 때 힘들더라도 길게 써 달라는 얘기였는데요?그제서야 나는 회장의 얘기가 부부 관계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나 는 이 사건 이후로 회개를 많이 하였습니다. 내가 너무 성담론에 심취하다 보니까 사소한 일도 성과 관련시키는 우를 범한다 싶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성담론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나 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3-1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3
    성경을 읽다 보면 욥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너끈히 승리하는 삶 말입니다. 인간은 역경을 극복할 때 더 멋있는 것 같습니다. 베토벤도 귀머거리를 극복하였을 때 그 유명한 「심포니 5번」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고뇌를 뚫고 오르는 환희가 담긴 음률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다 가난을 겪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지하 자원이 적고 산이 많은 땅덩어리와 숱한 가뭄과 홍수로 인하여, 선조들이 보릿고개를 누구나 겪지 않았습니까?필 자도 대학 시절 가난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겨울은 지금 생각하면 매우 추웠던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는 연탄 보일러를 놓는 것도 돈이 든다고 해서 구들장이 있는 방 안에서 창호지 틈으로 들어오는 외풍으로 인해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고 견뎌야 하였지요. 저희 집은 성냥갑 같은 이층이었는데, 그나마 이층은 마룻바닥이었습니다. 나의 방은 그 이층에 있었는데, 석유 파동이 있던 때인지라 석유 난로를 피우는 것도 망설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구들장이 있는 아래층의 좁은 방 안에서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곤 하였지요. 그때 나의 아버지는 42년간의 교직 생활로 마련한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다 날렸습니다. 찬 바람과 함께 집안에 갑자기 가난이 몰려왔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 준 낡은 시계와 혁대를 몸에 지니고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시계는 시계줄 도금이 벗겨져 있을 정도로 낡았으며, 혁대는 가죽 껍질이 벗겨져 흉측해 보이기까지 하였지요. 가 끔 대학에서 치러지는 학술 경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나는 형에게서 양복을 빌려 입어야 했습니다. 나는 178센티미터의 키인 몸매에 172센티미터 키인 형의 양복을 억지로 꿰맞춰 입고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양복이 너무 작아 찰리 채플린 같다며 차라리 잠바를 그냥 걸치고 나오지 그랬냐고 귀띔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에게 옷이 없다는 것을 안 누님이 독일에서 청바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바지는 여자용이어서 나에게 너무 작았습니다. 의류 공장을 운영하는 선배에게 물어 보았더니, 여자 청바지는 남성용에 비하여 가랑이 높이를 2.5인치 더 높인다네요. 그러니 독일에서 온 청바지를 입은 탓에 나의 거시기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어떨 때는 너무 거시기의 동그란 부분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였지만, 새 옷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가정 교사 생활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지요. ‘이러다가 애도 생산하지 못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가끔 들었지만,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학 4년은 그 때문에 매우 아프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이 제 와서 생각하여 보니 그 가난은 나에게 역동적인 의지를 심어 준 것 같습니다. 필자가 오늘날 진정성 있는 평론가로 평가받게 된 것도 그 시절 가난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련과 역경은 그것을 극복하는 강한 정신적 에너지를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친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이라는 이상향에 가 닿을 수 있었지요. 그때 모세라는 지도자의 지도력이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데 한 몫을 하였지요. 그 모세도 광야에서 목동 생활이라는 단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였지요.우 리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험난한 역경을 거쳐 온 것 같습니다. 7,80년대에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는 말씀과 같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는 철학이 맞아떨어져 교회 부흥과 고도 경제 성장이라는 동반 성장이 가능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교회 부흥이 일어난 것은 순전히 가난이라는 역경을 극복하겠다는 성도들의 믿음과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요즈음 큰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요즘 성가대에서 찬양을 열정을 다하여 부릅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주님께 기도하여 봅니다. “하나님, 저 예뻐요?” 그러면 주님이 대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려운 시절 가난을 극복한 너를 내가 잘 안다. 애썼다.’한 해가 또 시작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푸른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 되면 결실의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면 흰 눈의 축복을 받는 한 해가 또 시작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지요. 이와 같은 계절의 순환과 인간의 생로병사가 다 하나님의 계획하에 전개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주님이 동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2-1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
    한때 성담론 연구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구가 빨치산 간부의 아내인 외서댁을 강간하고 나오면서 “고것 참 꼬막맛이네”라고 혼자 되뇌이는 것이 성 표현에서 일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바람둥이로 유명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주인공 발몽과 몰리에르의 희곡에 나오는 돈주앙을 고찰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자는 향유의 대상에 대하여 ‘부분부분’ 접근하여 가고, 후자는 향유의 대상을 ‘하나하나’씩 즐겼습니다. 발몽이나 돈주앙은 바람둥이의 표본입니다. 이들을 말하는 것은 이들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보고 적그리스도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필자는 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치관을 정립하고 싶었습니다. 성을 음욕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아울러 고찰하여 사람들이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지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성의 본질을 알아야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영화로도 나온 <젖소 부인 바람 ……>였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설마 이걸 알겠느냐 싶어 아들에게 비디오 가게에서 그걸 빌려 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아들은 쏜살같이 비디오 가게를 다녀와서 하는 말이, “가게 주인이 이걸 주면서 씩 웃던데 왜 웃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컴퓨터를 보다가 나는 아들이 야동을 본 흔적을 발견하고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너 한창 꿈을 가져야 할 나이에 이런 걸 보면 되니?”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 하는 말 “아빠는 예전에 안 봤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이미 초등 학생 때부터 성을 사회적으로 말하는 게 금기 사항인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날, 뜨거운 햇볕이 도로 위의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날, 가족들을 데리고 처갓집 나들이를 갔습니다. 차 트렁크에는 아이스 박스에 과일을 잔뜩 챙겨 넣고. 차의 에어컨을 틀어 놓고 한창 달리고 있는데, 택시들이 옆에서 빵빵거렸습니다. 내 차의 타이어가 펑크났다는 신호였습니다. 평소에 아내한테 기계치라는 소리를 듣던 나. 차를 길가에 세우고 바퀴를 보니 많이 구겨졌습니다. “할 수 있겠어? 지나가는 택시 운전 기사분에게 부탁하지 그래.” 아내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나는 목에 힘을 주고 트렁크에서 기구들을 꺼냈습니다. 이 기회에 가족들 앞에서 아빠의 위력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작키를 넣고 차를 들어올려 바퀴를 빼냈습니다. 나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봐. 아빠도 이런 걸 다룰 수 있잖아?” 그러고서 돌아보니 어느 것이 펑크난 것인지 구분이 안 갔습니다. 골라 잡은 하나를 끼웠는데. 아뿔사. 아내가 하는 말. “여보. 차가 다시 내려와요.” 펑크난 타이어를 또 끼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족들은 화를 내며 택시를 타고 가 버리고. 나만 홀로 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애비 노릇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색을 하고 바른 몸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의 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몸소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며 인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을 베푸셨지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복의 길을 열어 준 것이지요. 그러므로 말씀 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생활은 사실 인간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행복입니다. 이는 아버지 안에서 신자가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행복이고, 한편으로는 기쁜 신앙 생활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안에서의 행복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때에 “여호와 앞에서 뛰놀고 춤추”었습니다(<삼하> 6:16). 이를 보고 사울의 딸 미갈이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지요. 이로 인해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삼하> 6:23)었습니다. 이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타인이 곡해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성 가치관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부간의 성생활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창세기> 2:24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렇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데에는 성생활도 포함됩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지요. 상대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짝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필자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내에게는 세상 모든 여자들의 아름다움이 다 들어 있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내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2-0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1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을 칭찬하고, 한 달란트 받은 자를 혼내 주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부여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것이지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달란트를 부여받았습니다. 필자에게는 진실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달란트를 부여받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 나는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자랐습니다. 1960년대에 전주에는 성당이 두 곳 있었습니다. 중앙동에 있는 성당을 가려면 우리집에서 1킬로미터 남짓을 걸어서 중앙시장을 거쳐 가야 했고, 전동에 있는 성당은 집에서 가까워 종종 놀러가곤 하였습니다. 전동 성당은 돔식 지붕에 아치형으로 벽돌이 쌓여진 아래에 커다란 문이 있고 붉은 벽돌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서, 유럽의 멋진 교회 건물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성당에는 넓은 잔디밭 주위로 장미가 심겨 있어서 아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을 걸어보곤 하였습니다. 가끔 외국인 신부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 사제실로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그 성당이 있던 동네의 옆에 한옥으로 된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변호사가 멋있게 꾸미리라 작심하고 지은 집으로 넓은 마당에 심어진 과실수들이 유유자적하게 서 있는 한옥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87평의 마당에는 호도 나무·무화과 나무·감나무 등이 우람하게 서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온갖 화초들이 바위들 사이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판자 울타리를 경계로 하여 앞에는 양철 지붕이 있는 아담한 집이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앞집 지붕 위의 세찬 빗소리가 우리집에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넓은 마당에는 올챙이가 튀어오르듯 빗방울이 튀면서 땅바닥에 금새 물줄기가 생기곤 하였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멀리 옛날 이성계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승전가를 불렀다는 한벽루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시골서 올라온 사촌 K가 우리집에 하숙을 하여 종종 땅뺏기 놀이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뾰족한 돌로 넓은 사각형을 그려 놓고 한쪽 귀퉁이부터 공깃돌을 세 번 튕겨서 자기 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넓은 땅을 가진 아이가 유리하였습니다. 그 땅에는 공깃돌을 세 번 튕겨도 땅이 넓기 때문에 별로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단 마지막에는 상대방의 땅이 너무 좁기 때문에 실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땅뺏기 놀이를 하면서 개인도 뭔가를 가지고 있으면 힘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커 가면서 나는 개인에게 진실의 힘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맑게 개인 날 저녁에는 밤하늘 가득 별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평상 위에 누워 별들을 바라보며 저 하늘 위에는 또 어떠한 하늘이 있을까 하고 상상을 해 보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툇마루에 쳐 놓은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자다가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면서, 그만 잠자고 있던 H 누나의 배를 나도 모르게 누르게 되었습니다. “으악” 하는 비명이 들리고, 방에서 잠자던 나와 H를 제외한 2남 3녀가 어머니와 함께 몰려나왔습니다. - 난 도둑인 줄 알았당께로.- 어머이. 나, 간 떨어질 뻔 했당께. 형제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 아침이 되자, 식구들의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큰형 왈,- 어머이. 저 녀석이 다 큰 처녀 젖가슴 만져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 아닝가 싶소이잉.여기에 집안에서 제일 똑똑한 둘째형이 거들었습니다. - 내가 프로이트의 책을 얼마 전에 읽었는디, 어린애도 여덟 살만 되면 알 건 다 안단디요. 누님. 저 녀석이 누님 어디를 만졌당가요?- 배를 누른 것 같혀.형제들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가 한 마디 하였습니다. - 야 이 녀석들아. 허튼 소리 허들 말어. 얘는 어릴 적부터 내가 데리고 다녀서 잘 알어. 얘가 오줌 누러 오강 찾다가 그만 누나 배를 짚었다고 허지 않냐? 이 철 모르는 어린애가 니들처럼 엉큼헌 줄 아냐?이와 같은 어머니의 뼈 있는 한 마디로 나는 형제들로부터의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성에 대해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남녀 유별이 철저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진실이 사람에 따라 곡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요즘에도 진실의 담론을 정리할 때가 되면 어릴 적 양철 지붕 위의 빗소리처럼 어머니의 말소리가 나의 가슴에 촉촉이 적셔 옵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의 진실에 대한 신뢰가 오늘 작가로서의 달란트를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빗소리와 함께 나의 달란트를 발휘하는 행복을 꿈꿔 봅니다. 진리 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에게도 달란트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진실을 가꾸고 복음을 전파하는 길을 열어 보고자 합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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