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8(화)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독인의 행복론 기사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8
    다윗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9-42).다윗이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전전하며 동굴에서 잠자던 사울을 해하지 않고 살려준 후의 일이다. 마온에 살던 나발은 갈멜 지역에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 되는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다. 그런 나발에게 다윗이 소년 열 명을 보내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였나 보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이란 사람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겠느냐며 거절하였다. 이에 다윗은 사백 명의 용사들을 대기시키고 나발의 종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들녘에서 일하는 나발의 종들을 지켜 주었는데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에 다윗은 매우 불쾌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위기를 간파하고 다윗을 설득한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그녀는 서둘러 많은 양의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볶은 곡식과 건포도를 준비시켜 다윗을 찾아가서 다윗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말을 하면서 선을 베풀어 달라 한다.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발의 종들이 죽게 될 위기를 벗어난 줄 알라고 한다. 그 사건 후 하나님이 나발을 치자, 다윗은 전령을 보내 정식으로 아비가일에게 청혼하여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중시되는 것은 바로 다윗과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에서 나발의 괘심한 행동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고, 아비가일도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았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가 방점을 찍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행동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따라서 행동하는 데 그 윤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세상 도덕과 괴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보아도 엄연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네 이웃에 대하여 거진 증거하지 말라”,“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 세상 도덕과 보편적으로 통하는 점도 많이 있다. 아비가일 사건도 그러하다. 남편과 오랫동안 쌓은 정도 있을텐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남편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여서, 나발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나님은 곧바로 나무라셨다. “여호와께서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사무엘상> 25:38). 나발의 잘못은 자신의 종과 목축을 보호해 준 다윗에게 서운하게 대한 데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한 데 대한 엄정한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다윗은 한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성전에 있던 음식을 먹기도 하였으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깊이 회개하는 일도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여러 시행 착오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윗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사울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다윗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심성을 주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달란트를 주셨다. 성직자에게는 영성을 주셨고, 작가에게는 영감을 주셨으며, 과학자에게는 사물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 자녀에게 내려주신 달란트를 주님 영광을 위하여 발휘할 때 거기에는 축복이 따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삭에게는 온유를 심성으로 주셨으며, 야곱에게는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알리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주님이 주신 영감의 달란트로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이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시어 나의 의지를 생동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한 나는 주님이 인정하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2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7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뿌리내림으로써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그 신념으로 인하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오늘날 세계 10위 안에 드는 무역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교계에서도 대형 예배당이 수없이 많이 늘어났다.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 가서 보아도 대형 예배당들이 눈에 확 들어 올 정도로 많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목회자들은 “장막터를 넓히자”며 예배당 확장을 위하여 건축 헌금을 하자고 제의하는 경우가 많았고, 교인들도 이에 잘 호응하였다.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진다는 기도는 교회의 대형화를 가능하게 하였다.해외 선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은 교인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와 헌금도 잘 이루어졌다. 고통받으면서도 유럽 곳곳에 교회를 세워 가는 바울의 선교는 교인들에게 매우 인상깊게 다가와서, 한국은 해외 선교에 대한 지원을 잘 하여 3만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양상이 달라졌다.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해외 선교를 위한 퍼주기식 선교가 한계에 다달았다. 몽골의 경우를 보자. 교단별로 세웠던 신학대학이 국내에서의 지원이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자 모 교단에서 세운 신학교는 폐쇄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울란바토르 지역에 지원하여 세웠던 대형 예배당에서는 신자 수가 많지 않아, 겨울이면 석탄 연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좁은 유치부실에서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몽골의 종교 정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세운 교회에서는 무거운 세금 폭탄으로 인하여 교회 문을 닫아야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인들에게 꾸준히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킨 교회는 성장하여 갔고,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몽골 변방으로 간 몇몇 몽골 성직자는 예배당 건물을 팔아 자취를 감춘 경우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여러 시행 착오를 겪는 와중에, 국내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많은 지원을 하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지원을 줄여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들도 많다.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반면에, 사탄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는데, 몇몇 교회에서는 몸에 맞지 않는 예배당 대형화를 모색하다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조그만 개척 교회는 대형 교회에 밀려 성직자의 지인들만이 예배 시간에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개척 교회가 부흥하여 대형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교계 지도자들은 미래에 물신주의의 범람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도 유럽의 교회들처럼 교인이 없는 예배당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왜 이런 염려가 생기는 것일까. 이는 교계 지도자들이 한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하다 보니 일어난 일일 수 있다.이제 대한민국도 복지 국가 대열에 들어선 만큼 ‘보릿고개’라는 말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대중은 배고픔을 면하는 문제보다 얼마나 멋있게 인생을 사는가에 관심이 더 많다. 대중이 K-Pop이나 웹툰, 게임, 영화 등으로 즐길 일이 많아졌고, 서민들도 웬만하면 해외 여행을 가고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다닐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을 주실 것이니 교회에 오라고 하면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그것이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에만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들보다 소외되어 있던 서민들에게 관심을 더 가지셨다. 그는 하나님이 아주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당신의 십자가 부활 후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함을 알게 하셨다. 또한 권력자나 부자에게 보이는 행복의 허상을 보지 말고 개인에게 임한 행복을 추구하게 하셨다. 그 행복은 죄의 굴레를 벗어나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앎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함께 함으로써 체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주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다.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신 사랑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위대한 인간미였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현하자.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 때, 인간미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음을 상기하자.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당신은 행복한 자이니, 기도로 영적 호흡을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자.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2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6
    2013년 4월 15일 미국에서 열린 보스턴 국제 마라톤 대회의 결승점 근처에서 폭탄 두 개가 터졌다. 3명이 사망하고 183명이 다친 참사였다. 그 날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결혼 7개월 차 신혼 부부가 있었다. 패트릭 다운스(34)씨와 제시카 켄스키(36)씨. 간호사였던 제시카는 30여 차례을 수술 끝에 두 다리가 절단되었다. 심리학도였던 그녀의 남편 다리 한 쪽을 잃었다. 부부는 워싱턴 근교 병원에서 꼬박 3년을 누워 있어야 했다. 그들은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는 학교, 직장, 원래 살던 집 어디로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5년이 지난 후 부부는 아픔을 딛고 우뚝 일어섰다. 그들은 『제시카와 레스큐: 인생을 바꾸는 우정』이라는 아동용 그림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가공의 인물 '제시카'가 사고 후 반려견 '레스큐'를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남편 패트릭씨는 출간 소감에서 "의족을 단 나를 '트랜스포머'라고 부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부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라"고 조언하였고, 패트릭씨는 사고 후 3년 만인 2016년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5시간 56분 46초의 기록으로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하였다. 패트릭씨 부부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보냈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재기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희망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것이다.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생각났다. “온 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5-10)이 말씀은 역설을 통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온유하게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일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는 그 의가 몸에 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화평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의를 행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인지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게 될 것이다.최근 들어 필자는 이 말씀의 깊은 뜻에 공감할 때가 많이 있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보편적으로 겪은 일이지만, 가난으로 인하여 고생하였다. 옷이 별로 없어 서독에 간 누님이 보내 준 작은 청바지를 몸에 꽉 끼게 입고 다니며 대학 생활을 하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부모와 자녀들을 돌보느라 작가 생활을 포기한 채 직장 생활에 매달려 생계를 유지하여야 했다. 1980년대 신군부 권력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싶었지만, 당장 눈 앞의 생계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어 오면서도 나에게는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좋은 작품을 영원 위에 남기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직장에서 명퇴를 한 후 나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주님은 내가 34년의 직장 생활 끝에 작가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셨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여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님은 내가 가난을 몸소 체험하면서 가난한 자의 처지를 이해하게 하셨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은근과 끈기의 힘을 제공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주님은 매일 아침마다 영감의 이슬을 내려 주시며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가지게 하셨다. 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 3-4)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주님은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향유하게 되는 이치를 알려 주셨다. 그리하여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은 음악인으로는 치명적인 청각 상실의 아픔을 딛고「운명」이라는 위대한 곡을 배태할 수 있었으며, 천체학자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의 아픔을 딛고 블랙홀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난관이 있다 해서 결코 포기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남과 북 사이에 경계가 있고, 세계 곳곳에서 이해 타산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다툼과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편> 109:26-31)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 한반도에는 평화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김정은이 보낸 특사가 청와대를 다녀갔고, 곧 남북한간, 북미간 정상 회담도 있을 예정이다. 이는 주님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여 주시는 기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인은 말보다 물건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사물이나 기표는 인간 관계를 나타내는 징표가 될 수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로테의 남편이 보낸 선물에 붉은 리본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로테를 얻은 것처럼 좋아한다. 베르테르가 맨 처음 로테를 보았던 날 그녀의 가슴에 꽂혀 있던 바로 그 리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는 날에도 푸른 연미복을 입고 호주머니에 그 리본을 넣고, 그 리본과 함께 관 속에 묻힌다. 리본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로테이고, 그 리본과 함께 있는 것은 그녀와 영원히 하나가 된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타인에게는 한낱 천조각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목숨만큼 귀중한 징표였던 것이다.또한 베르테르는 로테와 맨 처음 만나 함께 춤을 출 때 입었던 푸른 연미복을 그녀를 사랑하는 동안에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만큼 로테를 사랑하였으므로 평범한 상황에서는 입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테르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로테가 알베르트의 아내가 되자, 푸른 연미복은 그의 첫 번째 상흔을 떠올리게 한다. 베르테르는 죽음을 앞두고 그 옷을 꺼내 입는다. 그 옷이 자신과 그녀를 하나로 묶어 준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 옷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옷이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졌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므로, 그것은 가장 기호성이 높은 기표이다. 베르트르는 자살하기 위해 알베르트로부터 권총을 빌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로테는 권총을 하인에게 내 주고 그것을 받아든 베르테르는 단지 로테가 그 권총을 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게 죽는다. 로테가 만지던 권총, 그녀가 내 준 권총은 그가 기꺼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만드는 의미인 것이다.1)베르테르에게 ‘리본’과 ‘푸른 연미복’이 로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였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기호가 나타난다. 그것은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나타나는 징표다. 필자에게 주님이 보내 주시는 기호는 바로 ‘영감’과 ‘글’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면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일 만나 - 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먹었다고 나오는 한 종류 또는 그 이상의 음식 - 를 내려주셨듯이, 나에게 영감의 만나를 내려 주신다. ‘오늘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 행복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리해야겠어. 제목은 ‘하나님, 저 예뻐요?’로 할까, 그러면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노트에 그 날 쓸 글의 설계를 해 본다. 한 두어 시간 사색을 하고나서 본격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면 그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좋은 글이 나올 때가 많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시는 작가’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주 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표는 이밖에도 많이 있다. 아내의 건강과 딸아이의 출산과 아들의 취업을 위해 기도 제목을 정해 놓고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새벽마다 맑은 이슬이 내리듯 기도가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요즘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다. 핵무기보다도, 과거에 대한 적폐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단일 민족이었으며, 백의 민족으로서 순수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 때 약소 민족으로서 강대국의 이해 타산에 의해서 분단의 선이 그어지기는 하였지만, 단일한 언어인 한글을 사용하는 한 통일의 물꼬가 트이리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800만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오늘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평화를 추구하는 다음 세대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주님이 몸소 실천하신 사랑과 용서와 화해 등의 인간미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용솟음쳐 누구나 부러워하는 먹지고 행복한 복지 국가가 되기를 기원한다. 모두冒頭에 제시한 <시편> 구절에서 주님은 인간사에도 개입하신 것을 알 수가 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3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4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주님이 바울을 인도하라는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종종 주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느낄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 자녀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반드시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참 길임을 아는 자는 웬만한 고생쯤이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활력을 주님이 주심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로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주님은 일개 학자에 불과하였던 사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변화시켜 주셨다. 필자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바울의 편지가 참으로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음을 인지할 때가 많았다.다윗 역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9-42).다윗이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전전하며 동굴에서 잠자던 사울을 해하지 않고 살려준 후의 일이다. 마온에 살던 나발은 갈멜 지역에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 되는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다. 그런 나발에게 다윗이 소년 열 명을 보내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였나 보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이란 사람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겠느냐며 거절하였다. 이에 다윗은 사백 명의 용사들을 대기시키고 나발의 종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들녘에서 일하는 나발의 종들을 지켜 주었는데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에 다윗은 매우 불쾌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위기를 간파하고 다윗을 설득한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그녀는 서둘러 많은 양의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볶은 곡식과 건포도를 준비시켜 다윗을 찾아가서 다윗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말을 하면서 선을 베풀어 달라 한다.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발의 종들이 죽게 될 위기를 벗어난 줄 알라고 한다. 그 사건 후 하나님이 나발을 치자, 다윗은 전령을 보내 정식으로 아비가일에게 청혼하여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사건에서 중시되는 것은 바로 다윗과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에서 나발의 괘심한 행동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고, 아비가일도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았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가 방점을 찍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행동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따라서 행동하는 데 그 윤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세상 도덕과 괴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보아도 엄연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네 이웃에 대하여 거진 증거하지 말라”,“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 세상 도덕과 보편적으로 통하는 점도 많이 있다. 아비가일 사건도 그러하다. 남편과 오랫동안 쌓은 정도 있을텐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남편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여서, 나발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나님은 곧바로 나무라셨다. “여호와께서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사무엘상> 25:38). 나발의 잘못은 자신의 종과 목축을 보호해 준 다윗에게 서운하게 대한 데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한 데 대한 엄정한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반면에 다윗은 한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성전에 있던 음식을 먹기도 하였으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깊이 회개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한 여러 시행 착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사울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1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3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일화가 성경의 여러 군데서 나타나지만, 이 말씀에서도 그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아마도 자신을 배신한 가롯 유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한 베드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빌라도,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외쳤으나 급작스레 마음을 바꾼 군중, 그리스도가 군중의 환호를 받는 것을 시기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을 다 쓸어 엎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사랑과 용서였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는 편견에 사로잡힌 저들의 무지를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인시키기보다는 그리스도로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고통스런 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질 희생양이 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걸어가야 할 정도正道였다.살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왜 교계 지도자들이 싸움질만 하는가, 왜 김정은은 핵무기를 만들어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깨려 한단 말인가, 왜 독자들이 문학 작품보다 게임이나 K-Pop에만 더 연연한단 말인가, 왜 자식들이 부모의 바램대로 살지 않는가, 왜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몰라 준단 말인가 등등.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이해하지 못하여도, 끝내 희생양의 길을 택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협한 식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탓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그 방법은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은 작가의 길일 것이다. 종종 작가로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메시지를 묵묵히 형상화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소명을 이루도록 주님이 활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삼손에게도 활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생긴 힘이 그의 긴 머리칼에서 생기는 것으로만 알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힘을 주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20). 삼손의 잘못은 여호와보다 들릴라를 더 사랑하였다는 점이었이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사사기> 16:31)내면서 그는 활력을 달란트로 받았지만,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져 자신에게 힘을 주신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이는 교단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에 휩싸여 주님을 망각할 때 삼손과 같이 주님이 주신 힘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교계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을 벌일 때 평신도들을 지도하는 힘을 잃어 버린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는가.평신도들이여. 이제 주님을 바라보자.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때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억하자. 개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위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 삼손에게 힘을 주셨던 여호와를 기억하자. 그가 여호와의 뜻에 따를 때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기록을 보자. “삼손이 레하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사사기> 15:14-15).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에 삼손은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활력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주님이 주신 달란트로 삶에 활력을 찾도록 하자. 주님은 교단 지도자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바로 이 순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남을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주님은 이 시간, 아직도 어둠에 휩싸여 편견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미를 남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할 것을 주님은 원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과 이웃과 지인 들이 편견에 휩싸여 있음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사랑와 용서를 온전히 실천하였는가를 점검하여 보자.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1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2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나 개인의 기도가 아닌 그분이 원하는 기도를 하게 해 달라고. 그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분 자녀들의 행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녀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인이라 칭함 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 자녀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 성령은 먼 별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 이 자리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의 생활이 온전히 주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자녀와 형제들을 온전히 주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그렇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그 자녀의 행복이고,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이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너무 죄의 굴레에 가두지 말라. 성령이 죄를 물리치고 그 자녀가 영적으로 승리하도록 인도하심을 믿게 하라. 그리하여 이 시간 야베스가 주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하여 본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야베스> 4:10). 여기서 “나의 지역을 넓히”신다는 것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선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리라. 인간은 누구나 죄의 허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의 죄는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여 주셨다. 죄를 회개하였으면 더 이상 거기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이라 칭하셨으니 이제 의인답게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사탄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성령이 인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정신 역학을 생각하여 보자. 정신 역학은 정신의 여러 구조들에 대한 에너지의 배분과, 구조에서 구조로의 에너지 이동을 문제삼는데, 등량의 원리에 의하면 어떤 정신적 요소에 위임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이 감소되면 등량의 에너지가 다른 정신적 요소에 나타난다. 즉 정신에서 에너지가 상실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했을 뿐이다. 실제로 에너지는 몇 개의 요소 사이에 배분된다. 물리학에서 이 원리는 熱力學의 제1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한다.개인이 정신적으로 하던 일을 그치면 그 대신에 무엇인가 다른 일을 반드시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남자 아이가 비행기의 모형, 만화, 순경과 도둑 놀이에 흥미를 잃기 시작하면, 자동차, 소설, 여자 아이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리라 예상하면 된다. 가령 착한 일을 하던 데에 소용되던 에너지가 어떠한 유혹이 오면 자아가 통제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보자.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창조>, 1919)에는 “기름자(그림자)”라는 단어가 8번 이상 나온다. 작가가 심리학 용어인 “그림자 현상(The Shadow)”이라는 말을 알고 썼든 모르고 썼든 간에, 이 작품에 나오는 “기름자”는 바로 인간 심리에 나타나는 그림자 현상을 매우 잘 형상화한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남작 집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 그녀는 평소에 매우 착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한참 자고 있는데 남작이 그녀를 흔들어 깨우며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녀는 부인이 알면 어떡하느냐며 몇 차례 거절하여 보지만, 자신의 이성과는 반대로 몸은 남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남작의 시선을 피하면서 별한 웃음- 애걸하는 웃음- 거러지의 웃음을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이는 엘리자베트가 어떠한 유혹이 닥쳤을 때 평소에 자신의 심리에 있는 자리잡고 있던 욕망을 조절하는 단련을 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이다. 엘리자베트가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재판을 걸어 남작의 성폭행을 문제삼지만, 남작은 재판에서 승소하고 만다. 그녀는 장안에 스캔들로 소문난 것이 창피하고 그 충격으로 아이를 유산하면서 깨달은 것은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던 숨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약한 자였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아가 부정적인 그림자 현상에 넘어가지 않도록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으나, 현대 사회에는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요인들이 산재하여 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개인이 사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4-25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1
    필자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주님. 저의 개인적인 기도보다는 주님이 저에게 두신 뜻을 아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저의 개인적인 소망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이 땅의 교인들은 너무 물질적인 데 소망을 두고 살아 왔나이다. 강남의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와 맛있는 요리와 멋있는 여행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주님이 내린 축복으로 착각하였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었나이다. 말구유에 나시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이웃이셨나이다. 주님은 집 한 칸 없이 하늘을 천장으로 삼고 겟세마네 동산을 기도처로 삼으셨으며, 갈릴리 호수 주변을 선교지로 택하셨나이다. 구약에서 예언한 땅, 이스라엘에서 가장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죄를 벗어나서 의인으로 칭함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스승을 잃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동행하셨고, 마가의 다락방에 다시 찾아오셨으며, 성령이 그 자녀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에게 찾아오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착각한다. 대형 예배당을 건축하고 유명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주님의 참모습인가.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루터가 500년 전에 내걸었던 선언문이 다시 내걸리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참모습을 보기를 기원한다. 주님은 대제사장이 종교적 권력을 휘두르는 시기에 오셔서 병들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의 편에서 치유와 위로의 손길을 내미셨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마가복음> 12:13-17).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 권력과 부에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직자들이 세상 것인 것에 집착해 있다. 총회장이 되려 하고, 권력이 있는 자 앞에 줄을 서고, 위정자들처럼 돈 선거를 치르기도 한다. 권력의 집중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은 ‘가이사’의 것에 기울어 있는 형태이다. 예수님의 참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변변한 집 한 채 없으셨고, 제자들도 자신이 살던 거처를 떠나서 주님을 따랐다. 주님은 따로 예배당도 세우지 않으셨다. 갈릴리 해변과 호수가 설교 장소였고, 겟세마네 동산이 기도처였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퍼져나갔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대형화와 목사 세습은 ‘가이사’의 흉내를 낸 것이지, 주님께 대한 참된 예배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책임진 대제사장의 편에 서지 않으시고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서 일하셨다. 마찬가지로 종교 개혁 이후의 청교도들은 로마 교황처럼 화려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보다는 마을 안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꼭 대형 교회에서 드려야만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형 교회는 작은 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농어촌과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개척 교회를 지원하고 부목사들이 교회를 개척해 나가면 지원하는 등의 목회 정책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누가복음> 9:1-6).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예배당이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4-1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0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사무엘하> 6: 12-15).‘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실재實在이다. 웃사라는 사람은 그 궤를 옮기던 중 소들이 뛰므로 손을 들어 궤를 붙들었다가 그만 죽고 만다. 이 때문에 다윗은 궤를 쉽게 옮기지 못하다가, 오벧에돔의 집이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윗 성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때에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아내 미갈이 어찌 왕으로서의 품위를 못 지키느냐고 나무래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으니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사실 십자가는 죄인이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롭다 칭하시고 구원의 길에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후 소멸된 존재가 아니라 성령이 되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시켜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잘못 알고 있는 일부 성직자들은 “성령을 받으라”며 주님을 도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성령은 성직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오셔서 동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죄의 굴레에 묶어 두고 있다. 주님이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고 의인으로 칭하시며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은 설교의 틀 밖에 둔 채, ‘너희는 죄인이니 회개하고 복 받으라’는 기복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복”은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달란트의 축복도 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1달란트는 직장인 봉급 16년 9개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복을 수용할 능력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다 포괄하여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이 찾아오셔서 영적&#8228;정신적&#8228;육체적&#8228;물리적 행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복’의 개념이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복을 물질적 축복만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일부 성직자가 대형 교회 성전을 건축하다가 많은 부채를 짊어지며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교인들을 물질적 축복에만 갇혀 있게 하여 생긴 결과이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과 물질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교인들에게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 병든 자 등 하나님의 자녀에게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 자녀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아름답고 멋있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그 자녀와 함께 동행하시는데, 이를 알아 보는 시선을 못 가진 이들도 많이 있다. <역대상> 4장 10절을 보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러므로 신자가 구해야 할 것은 “나의 지역”을 넓히는 것이다. 성령은 성직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오신다. 이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보는 믿음과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세기> 13:14-17). 이제 우리의 눈을 들어 보자. 주님이 우리 옆에 계시는데 멀리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여 보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다윗처럼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싶지 않는가. “하나님, 저 예뻐요?” 하며 찬양을 부르고 싶지 않는가.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3-2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9
    필자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크리스천에게서 발견한 색다른 점은 바로 섬기는 자의 행복이었다. 한 번은 어느 선교 단체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먼저 입회한 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정성들여 섬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문학 단체 임원을 하면서 섬기는 일을 주로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국장이 궂은 일을 하고 있으면 나도 함께 거들면서 도왔다. 이를 본 지인들이 “주간님이 왜 그런 일을 하세요.”하고 말려도 나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궂은 일을 하였다. 후에 임원을 그만두면서 회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내가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은 신의 위치에서 낮은 곳에 임하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셨는데, 낮은 곳에서 섬기는 것도 행복이지요.” 나는 이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여호수아 옆에 있던 갈렙, 바울 옆에 있던 바나바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유교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 편이다. 가난해도 가난한 티를 내지 않고 군자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개인의 덕을 중시하는 반면에 이웃과 어려움을 외면하였고, 선비로서의 인품에 맞지 않는다며 농공상을 천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웃의 어려움을 헌신적으로 돕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날 3만 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섬기는 일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서일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존감도 있는 반면에, 섬기는 마음도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섬기는 마음이 인간 모두에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발자크의 <사라진>(1830)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데, 마담 란티의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난다. 그들 앞에는 미모의 여성 아도니스의 초상화가 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림의 사연은 이렇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 시간에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하였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은 마침내 파리에서 유명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22세에 대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된다. 조각만이 삶의 모든 것이었기에 세상사나 사교에는 어두웠던 사라진이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녀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열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긴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은 드디어 인정을 받은 듯, 그는 그녀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한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귀띔하는 진실조차 귀에서 멀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라는 것이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에 그녀가 동의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듣는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살해된다.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다.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쟘비넬라는 바로 현재는 늙고 추한 모습으로 변하여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파티에 들고 나온 노인과 동일인이었다. 생각해 보자. 한때 미모를 갖추고 있던 여장 남자는 나이가 들자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이 되었다. 개인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던 때도 있고, 늙어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답고 멋진 행동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섬겨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고 섬기는 일부터 시작하여 단체 활동이나 친목회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일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멋있어 질 것이다. 나아가 북한 땅에서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백성을 섬기고 세계인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멋있는 일이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 일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한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3-2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