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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8
    나는 주일날 W교회 2부 예배 찬양대 석에 섭니다. W교회에는 예쁘게 꾸민 찬양대실이 있는데, 100여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들이 놓여 있습니다. 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교회의 넓은 마당과 벚나무 등이 심겨 있는 정원을 볼 수 있습니다. 창 밖 경치를 보며 녹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가지다 보면 연습 시간이 됩니다.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대포알처럼 내뱉는 발성 연습을 한 후 본당에 들어가서 경건하고 정성들인 찬양을 부르고 목사님 설교를 듣습니다. 나는 다니엘 세이레 새벽 기도회에 꼭 참석합니다.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간단히 세면한 후 집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교회에 갑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예배당 안을 환히 밝힌 가운데 삼백여 명의 교인이 속속 모여들어 예배를 봅니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기도합니다. 아들이 정규직에 취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딸아이가 임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내가 믿음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도록 기도하고, 형제들의 장수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침이면 책상 앞에 앉아, 그 날 주님이 주신 영감을 정리합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왕따를 당하던 삭개오를 나무에서 내려오게 하여 그 집에 머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남이 알아 주지 않아도 고독의 한가운데 앉아 글을 쓰는 나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동행하심으로 글은 생명을 가지고 usb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주님은 나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함께 하십니다.두 달에 한 번씩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집 근처의 뷔페에 갑니다. 손자가 태어났다는 이야기, 손자들 돌보는 이야기와 함께 건강을 챙기라는 조언을 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합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나는 팥빙수 기계쪽으로 가서 유리 그릇에 눈처럼 소복히 어름을 넣고 팥고물과 우유와 떡알과 미숫가루를 넣고 빙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딱 한 그릇만 먹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임이 없는 날이 더 많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출근한 집에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이 있긴 하지만, 점심은 주로 동네 나들이를 하면서 먹는 편입니다. S동에 있는 메밀 국수 집은 제 단골입니다. 원래 나는 비빔 국수를 좋아하지만, 짠 것이 몸에 안 좋다 하여 그냥 물에 말은 국수를 먹는 편입니다. 요즘 들어 음식점이 잘 안 되어서인지 신장 개업한 집이 많습니다. J순대국집이 육천원짜리 한식 뷔페로 바뀌는가 하면, 엊그제까지 손님이 차고넘치던 K감자탕집은 요즘 한가합니다. 집에 오면 아내가 사다 놓은 빨간색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합니다. 앞치마를 둘러야 그릇을 씻을 때 물이 튀지 않습니다. 그릇 세척기가 있긴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 별로 사용 안 합니다. 설거지를 끝내면 싱크대와 식탁을 깨끗이 닦습니다. 설거지가 끝나면 빨래를 합니다. 세탁 시간은 19분으로 맞추어 놓습니다. 그래야 전기세가 절약됩니다. 와이셔츠나 바지는 탈탈 털어서 양손으로 쭉쭉 펴서 건조대에 걸어야 빨래가 말랐을 때 구김살이 없습니다. 집안 청소와 요리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家事가 끝나면 주일날 부를 찬양을 이어폰을 꽂고 듣습니다. 행여라도 위아랫집에 소음으로 들리면 안 되니까요. 가사를 먼저 익히고 내가 찬양하는 모습을 표정 연기까지 해 가며 마인드 컨트롤합니다. 가끔 솔로를 준비할 때면 일주일 내내 스마트폰을 들고 연습에 연습을 더합니다. 이래 뵈도 내가 음치를 면해 2부 예배 솔리스트가 된 것은 이런 연습 덕분인 것 같습니다. 오후에는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성경 구절을 인터넷에서 찾아 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힘이 생겼다는 삼손 이야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하였다는 다윗왕 이야기, 주님이 주신 미모로 바벨론 왕에게 잘 보여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냈다는 에스더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들의 인간미를 상상해 봅니다. 저녁에는 퇴근한 아들과 식탁에 같이 앉습니다. 비록 계약직이긴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아들에게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나처럼 우둔해서 취업을 할 수 있는 자격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절대 실망의 눈치를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에게는 오로지 절대 긍정, 절대 낙관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내가 감사한 것은 나의 평범한 일상에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며 찬양하는 생활은 삶의 기쁨이며 활력이 되는 생활입니다. 내가 가족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천국과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게 합니다. 그러기에 평범한 나에게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함께 하십니다. 이 주님은 오늘도 나와 동행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삶이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이유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7-1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7
    오늘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다섯 번 돌았습니다. 개나리가 꽃봉오리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벚꽃도 제법 꽃잎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안은 정오가 가까운 때인지라 한가롭게 거니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적막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미세 먼지로 인하여 하늘은 거무튀튀하였지만, 그나마 햇빛도 나무 그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섭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일정한 보폭으로 걸을 수 있고, 눈으로는 나무들 사이를 건너가는 까치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을 움켜쥐기도 하고, 팔을 힘차게 저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 출근 안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으며, 형사 죄를 지어 법정에 갈 일도 없습니다. 세금은 제 때 냈으며,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내 나이 예순을 넘겼지만, 서재에서 언제든 필요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으며, 한가한 때를 만들어 한천 가를 산책하며 벚꽃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는 차를 몰고 우이동에 있는 W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아들의 취업과 딸의 임신을 위해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믿음과 건강과 행복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직장을 은퇴하였으니 각종 문학 단체에서 얼마든지 열심히 일할 수가 있습니다. J낭송문학회에서는 춤과 노래와 시낭송이 어우러진 ‘몸시’ 공연을 하였고, H시인협회 임원회에서는 한 해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을 제시하였으며, 기독문인단체에서는 협회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도 내놓았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K동호회에서는 시창작 강의를 하였고, P동호회원들과는 전주 문학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전주 문학 기행에서는 한옥마을에 들러 경기전을 둘러보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았으며, 돌담길 안과 밖을 걸으며 여행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경기전 뒤편의 고향집도 둘러보았습니다. 현재는 삼층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옛 한옥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옛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큰누나가 매형과 데이트하던 동문 사거리의 제과점 ‘조화당’을 떠올려 보았고,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떡가래를 뽑아달라 했던 방앗간을 그리며 옛 동무들을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고향의 옛 자취가 사라진 것을 보면서, 딸아이가 결혼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와 아들이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지라 가끔 거실 안이 공허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집에 있으려니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수첩을 뒤적여 봅니다. 다음 주에는 탈장 수술을 받은 매형 병문안을 가야 하고, 11일에는 P시인 시비 제막식에 참석해야 하는군요. 22일에는 종로3가에 있는 C홀에서 ‘몸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고, 27일에는 H시인협회 세미나에 가서 주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작가 생활이라는 것이 바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당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아깝지 않아?” 하면서 은근히 직장 생활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고, 얼마 전 잠깐 귀국했던 딸아이는 “아빠를 보면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이 생각나.” 하면서 실용성이 부족하였던 양반에 나를 빗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34년을 직장 생활하여 가족을 먹여 살렸던 나를 백수로 취급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은 것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예레미야 애가> 3:24). 주님은 내가 고달플 때 “애썼다”며 위로해 주시고, 내가 외로울 때 동행해 주시며, 내가 힘들 때 강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눈 앞의 안위를 도모할 때 영원을 보게 하시고, 죄로 인해 괴로워할 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가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도모하는 것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께서 주신 달란트로 기독 시학을 정립하라 하시고, 날마다 영감을 주시면서 멋과 낭만이 있는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이끄십니다. 주님은 주일날 예배 시간에 내가 애교를 부리며 부르는 찬양을 열납하시고, 나를 ‘일 對 일’로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기업이 내가 하는 일이 되고, 행복한 작가가 되어 행복하게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그 여호와의 기업이 이 땅에서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활용합니다. 주님이 동행함으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배꼽춤을 출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사무엘하 6:14). 다윗은 “하나님의 궤”와 함께 함에 너무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나 역시 주님이 동행하심을 찬양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7-06
  • 전주 한옥마을 이야기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두 시간 정도를 가면 전주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한옥마을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택시비가 약 5600원 정도가 나옵니다. 한옥마을 입구 왼편은 오목대입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전라도에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을 기념하는 잔치를 병사들에게 베풀었다는 곳이지요. 그 입구에서 100여 미터 가량을 들어가면 ‘경기전’이 있지요. 이곳에는 이성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어진이 있습니다. 입구 오른편에 중앙초등학교가 있고, 그 초등학교 뒤편에 ‘최명희 문학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17년간의 자료 고증과 수 년간의 집필을 거치고 1년여 간의 교정을 끝낸 후 『혼불』이라는 대하 소설을 출간한 최정희의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설 문체에 서정의 옷을 입혀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혼을 담은 그녀의 필치를 엿볼 수 있기도 하지요. 경기전 돌담길과 최명희 문학관 사잇길로 150여 미터를 가다 보면 동문 예술의 거리가 나오고 예전의 동문 사거리가 나옵니다. 그 사거리 왼편 모서리의 남쪽에는 ‘조화당’이라는 제과점이 있었는데, 1960년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였습니다. 나의 큰누님은 매형이 그곳에서 주말마다 단팥죽을 사 주며 청혼하는 바람에 결혼하였고, 내가 그 제과점에서 앙꼬빵을 100원 어치씩 사다 주는 심부름을 한 덕에 큰형과 형수가 결혼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명절 때면 어머니가 떡가래를 뽑는 방앗간은 사거리 오른쪽 모서리에 있었고, 그 옆에는 새벽마다 종소리를 울리며 두부를 파는 두부장수의 집이 있었습니다.그 제과점에 다다르기 전 왼편에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터가 있습니다. 예전엔 88평의 대지 위에 40평의 한옥이 세워진 매우 아름다운 집이 있었는데, 현재는 삼층 건물이 세워져 있어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나는 문인들과 함께 그곳을 갈 적마다 예전의 한옥을 그려보곤 합니다. 40여 평의 마당에는 제법 굵직한 바윗돌이 죽 둘러쳐진 가운데 소나무와 각종 과실수와 화초 들이 심겨져 있었고, 여름에는 넓은 툇마루 위에다 커다란 모기장을 펴 놓고 7형제가 그 안에 들어가 마당 위의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잠에서 깨어 소변을 보기 위해 오강을 찾다가 그만 20대 처녀였던 누님의 배를 누르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악 소리가 들이자 도둑이 든 줄 알고 큰형은 방망이를 들고 불을 켰고 식구들이 모두 눈을 부스스 뜨면서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웬일이다냐?” “왜 그려.”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나는 얼떨결에 소리쳤습니다. “소변 보러 오강을 찾다가 그만 누님 배를 눌렀그만이라우.” 그러자 “그려.”, “아따 나는 도둑이 든 줄 알고 간뎅이가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당께로” 하며 각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소란은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마당 수돗가에서 당시 대학을 다니던 큰형이 양치질을 하며 말을 꺼냈습니다. “어머이. 자가 처녀 젖가슴 만질려고 헌 것 아니여?”이 말은 10살밖에 안 된 나에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명문 전주고에서 우등생이었던 작은형도 한 몫 거들었습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라이잉. 나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책을 본께 야들도 여덟 살만 되면 성욕을 가질 수 있다는디, 누님. 야가 누님 어디를 만졌소?”누님은 얼룩무늬 원피스의 배를 만지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잠결에 잘은 모르겄는디 배를 누른 것 같혀. 갑자기 누르니께 아프더랑께.”작은 누나들도 토끼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건 나를 영 엉큼한 놈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그저 오줌 싸러 모기장을 들추고 나가다가 그냥 누님 배를 누른 것밖에 죄가 없는디.”그러자 큰형이 나직하게 말했습니다.“야. 솔직히 말혀 봐라. 너 누님 젖가슴을 만지고 싶은 게 아니었어?”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냥 소변 보러 가다가 누님 배를 짚은 것 뿐인디.”그러자 식구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제지한 분은 어머니였습니다.“야 이 녀석들아. 그런 소리 허들 말어. 이 열 살배기도 안 된 것이 뭘 안다고 너희들이 야단법석이여. 얘가 어렸을 적부터 내가 데리고 다녀봤지만, 네 살 이후부터는 나한테 젖 달라고 허지를 않았던 순수한 애여. 너희들이나 엉큼한 마음 먹지 말고, 우리 막내를 엉큼한 애로 몰아가지들 말어.”나는 그제서야 나의 진심을 알아 준 어머니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전주 고향집 앞을 지나면서, 나는 어릴 적 한없이 사랑을 퍼 주기만 하셨던 어머니를 그려 보았습니다. 내가 이제껏 순수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6-0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5
    중세 유럽에서의 카니발은 축제의 이면에 비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령 축제 기간 동안에는 서민들이 성직자나 군주에게 쓴소리를 하거나 욕을 해도, 그들은 구금되거나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직자나 군주는 축제 기간 동안에 있었던 비판적인 소리를 참고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던 거지요. 이 때문에 축제 기간 동안에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달란트를 한껏 발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스트레스를 한껏 날려 버리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지요. 이 축제에는 성직자와 군주와 민중이 다 함께 어우러져 축제가 끝난 후 전개될 새로운 일상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축제 때의 쓴소리는 성직자와 군주와 민중이 공통 분모적으로 다루어야 할 진실을 향한 정당한 의견이 분출되었던 셈입니다. 요즘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쓴소리를 보면서 민중의 목소리가 과거에 비하여 많이 높아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쓴소리 이면에 감추어진 사랑을 망각할 때에 그것은 우리 사회에 분열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를 뽑고 쓴소리를 하는 것은 다같이 잘 살아 보자는 관심 때문일 겁니다. 개인과 민족과 나라에 상관이 없다면 그러한 일에 무관심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점은 민중이나 이스라엘 분봉왕이나 로마 황제에게 다 통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사랑으로 해결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국가간의 이익 다툼이나 분단 현실이나 동서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근본 자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너와 나가 한마음으로 가져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여야간의 갈등이나 정책 갈등의 이면에 진정으로 작용해야 할 것은 너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럼 사랑은 어디서 단련되어야 할까요. 용광로에서 불의 담금질을 거쳐 순금이 나오듯이, 개인의 인품을 단련시키는 기본적인 장소는 가정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등 가족이 만나 생동하는 기쁨을 나누는 곳입니다. 이 가정에서 개인이 사회에서 할 역할의 추임새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살다 보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지요. 남자·어린아이·청년·장년·노년·남편·아들·아버지·할아버지·교수·시인·평론가·친구·동호인 등 참으로 개인이 많은 역할을 상황에 따라 하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가정에서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이는 신생아를 보러 갈 때나 지인의 장례식에 가 보면, 사람들이 가족 중심으로 모여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던 딸아이가 필자의 집에 잠시 와 있습니다. 1년 동안 기다리던 아이가 안 생기자 인공 수정을 하기 위해서 집에 온 것이지요. 딸아이를 보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가정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生과 死의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 일인지라, 부부가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은 부부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지요. 그래서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니는 중입니다. <시편>에 “새벽을 깨우리로다”란 말씀이 있지요.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편 57:6-11).새벽은 우주에 놓인 내 영혼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삶이 육적이나 물질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영혼의 세계와 균형을 유지할 때에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세계를 향한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새벽에 주어지는 힘으로 너와 나가 함께 하는 우리와 민족과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가정에서의 멋을 생각해 봅니다.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족이 나눌 기쁨을 찾아 식탁 위에 앉습니다. 그 날 하루 있었던 일상의 고마움을 가족에게 알리고,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보람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고,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사랑이 실천으로 옮겨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표정을 지으며, 주어진 시간에 주 앞에서의 진지한 마음으로 일상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석양의 빠알간 햇빛과 함께 하루 일을 마친 이들이여! 이제 살 맛 나는 가정을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신뢰의 향기와 함께 가족들의 인간미를 만나 보십시오. 주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너와 나가 행복해 질 겁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6-0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4
    필자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전후 생존자들이 전쟁의 후유증을 딛고 일상의 안정을 되찾자, 사람들은 다산(多産)을 통하여 친인척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려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베이비붐 세대들은 온순하고 여유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겪으며 생존 의지를 불태웠고, 70년대 고도 경제 성장 시대에는 아랍의 사막으로 달려가 외화 벌이를 하였으며, 80년대에는 민주 사회를 위하여 저돌적인 민주화 담론을 부르짖었고, 90년대엔 일상에 관심을 가지며 근대화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인륜을 쌓았습니다. 2010년대가 되니 그 세대가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은퇴를 하여 보니, 처음 찾아온 것은 앞치마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전동차를 타고 오면서 만 원에 두 개 짜리 앞치마를 사 왔습니다. 하나는 군청색, 다른 하나는 빨간색. 설거지를 하다 보면 물이 튈 테니 앞치마를 두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고 속으로 되뇌어 보았습니다. 삼십여 년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게 뭐람. 날이 갈수록 아내의 압박은 은밀히 가속되었습니다. 아내는 세탁기 조작법을 알려 주며 직접 실습을 해 보라 하였습니다(이건 절대 고자질하는 게 아님). 건조대에 빨래를 널 때에는 옷을 탁탁 털어서 널어야 했고, 그릇들을 비누칠한 후 수돗물을 틀어 자연스럽게 씻기게 하면서 설거지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나마 청소는 진공 청소기가 있어 수월한 편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유리창을 닦고 욕실 등을 대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그리 힘들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무엇도 못하랴 하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같은 사랑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더라면, 아마 나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주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고통도 마다 하지 않으셨는데, 가족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못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가사(家事)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기세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젊은 날 신랑의 밥상을 들여오며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하던 아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심지어 가사(家事)를 땀이 나도록 하는데도, 아내는 성에 안 찬 지 잔소리를 늘어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아내는 가정에서 한 국가의 왕비처럼 굴었고, 성년이 된 아이들도 아내 말을 더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어, 이거 봐라. 나는 전세를 역전시킬 준비를 아니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아내와 큰집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형님을 따로 뵙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형님. 여자가 나이가 들자 남편 앞에서 기세 등등해지는 것은 왜 그러지요?”형님은 형수씨와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조곤조곤히 말하였습니다. “그건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서 그런 거다. 그럴 때는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야 한다.”그러고 보니, 형님도 요즘 형수씨 앞에서 바싹 엎드려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에 두 번 집안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깨끗이 하는 데도, 형수씨는 시동생 앞에서도 형이 나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과감히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야, 남자들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예전엔 안 그랬는데.내가 젊었을 적에, 어머니가 아버지가 퇴근하면 해 드려야 한다고 해삼을 수돗가에 있는 양푼 물에 담가 놓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나는, 요즘 세태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권 상승을 세계 곳곳에서 주장하고,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에는 공무원의 여성 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의 가정을 돌아보면 이미 대세는 여성 우위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이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에게 짓눌린 기를 펴려고 하는 현상까지 보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니까요.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신 줄 알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동행하셨고,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으며, 기독교 박해의 길을 걷고 있던 바울에게 임하셔서 사도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 주변을 돌아 보면 가정에서 기 죽은 남성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한때 산업 현장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고, 불의를 민주화의 열기로 물리쳤습니다. 이제 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을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행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 가정에서 가족애로 행복을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이 참에 주 앞에서 고백해 봅니다. 여보. 사랑해애.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5-1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3
    예수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품속에서 옥합을 꺼냈습니다. 거기에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향수는 여인의 전 재산이나 다름 없는 혼수 비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인간으로서 그를 직접 뵌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대야에 물을 붓고 옥합에 들어 있던 향수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는 보통 여자로서는 할 수 없는 대단한 용기이며 경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와 같은 경배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의 행위는 주님의 동행에 대한 경배였습니다.주님은 다윗에게도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주님이 기름부어 세운 사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 왕의 자리에 올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나님의 편에서 한다면 결코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사이의 정도 주님이 맺어 주신 것이고, 내 앞에 펼쳐진 사업도 주님이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주님 편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요 축복이겠지요. 나에게 행복은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한발짝 먼저 가시면서 나의 앞에 닥칠 일에 대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나는 한때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도 내 적성에 안 맞으면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진정으로 가고 싶은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작가의 길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동네 산책로를 거닐며 사색하고 아침이면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하는 일은 나의 로망이었습니다. 남들이 전동차를 타고 가며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 작가로서의 사색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꿈과 같은 일이 내 앞에 벌어졌습니다. 퇴직을 6년 앞두고 직장에서 건강 검진을 받다가 나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대학 병원을 찾아갔고 3개월마다 건강 체크를 하여도 의사는 내 몸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와의 상의 끝에 명퇴를 하였고, 내가 그토록 꿈꾸던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치유해 주심으로 다시 건강이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힘은 직장 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해소되어서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힘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셨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글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문단 활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나의 지인들은 나의 글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집필을 하여 그동안 발표한 글을 책으로 출간하여도 그리 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에는 내가 뜬구름 잡는 일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글 쓰는 일은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하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외롭고 힘들 때 나를 위로해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애썼다. 내가 너의 외로움을 잘 안다. 내가 네 곁에 있어 주마.’ 이때 나는 이스라엘 민중으로 왕따를 당하였던 세리 삭개오를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일도 하였던지라 갈등과 고민이 많은 고독한 직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계신 주님은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나무 위에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제자들과 동행하며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우리와 동행하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주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낙원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동행하시면 사탄이 끼어들 수 없고,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평화가 내 앞에서 기다립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화합의 열매를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매일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따 먹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며, 내 앞길이 평탄하리라 확신합니다. 주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시는 나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5-0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2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제1악장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카라얀이 지휘하는 모습은 내 청춘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떻게 눈을 감고 한 시간 이상을 지휘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그의 지휘를 남몰래 골방에서 흉내내며 ‘예술의 멋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강렬한 선율에 맞추어 강하게 지휘봉을 휘젓다가 부드러운 선율에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감미로운 세계에 빠져드는 것 같은 카라얀의 폼을 나는 끝내 잊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 S교회 성가대의 지휘자로 서게 된 것은 순전히 카라얀의 지휘 흉내를 낸 덕분이었습니다. 나는 주일마다 강한 선율의 악보를 선곡하여 일주일 내내 카라얀 폼을 흉내내며 연습에 연습을 더하였고, 성가대원이 스무 명 남짓의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멋진 지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내가 그토록 열심히 지휘를 한 것은 현이의 옆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나는 현이의 연주를 귀담아 들었고, 그녀의 손길을 통해서 나오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을 따라 꿈을 꾸듯 아름다운 상상을 펼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이가 학생인지라, 결혼을 하려면 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성가대 선배인 Y가 흘린 정보에 의하면, 현이가 직장을 한 3년 다니면서 결혼 자금을 저축해야 결혼이 가능하다네요. 그래서 나는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현이가 빨리 성년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사내가 맘만 먹으면 빨리 할 수도 있겠지’ 하면서, 어느 날 작심을 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추석 명절을 핑계로 설탕을 한 포대 사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이는 그녀의 부모님이 계셔서 쑥스러운지 방에서 나오질 않네요. 내가 느닷없이 현이의 집을 불쑥 찾아가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몰라서 그랬는지, 어느 날 나는 지휘자에서 베이스 대원으로 강등되었지요. 그리고 내가 지휘했던 자리에는 현이가 올라섰습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식사 시간이면 현이 옆에 앉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현이 옆에만 있으면 왜 그리도 가슴이 콩당콩당 뛰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는지요. 오히려 현이 옆에 있는 여자애한테는 말이 술술 나오는데, 정작 현이에게는 한 마디도 말을 못 붙이는 거 있죠. 거기다가 백화점 선물 세트를 싸들고 현이네 집에 찾아간다는 후배도 있네요. 그러던 어느 날 현이가 성가대원들 앞에서 자신은 약혼자가 있다고 선언해 버리네요. 현이를 좇아다니던 후배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데요. 나도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현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겨우 꺼냈지요. 집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얼마 후 아내를 만나 사십여 일만에 결혼하였지요. 6개월 후 성가대장인 장선생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왜 현이와 결혼하지 않았냐고 귓속말로 묻네요. 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아, 약혼자가 있는데, 어떻게 청혼을 합니까?” 했지요. 그랬더니 장선생이 한 마디 덧붙이네요. “당신 후배들이 자꾸만 추근덕거리니까,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그렇게 한 거지이. 아, 나한테 현이가 그렇게 말한 사연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아무튼 이래저래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여인과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나는 한동안 결혼 전의 사건을 잊느라 오랜 시간을 허전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야 나는 진심으로 주님 앞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짝은 하나님이 맺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가 콤플렉스가 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추남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열등감은 여성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내가 주님 앞에 진심으로 다가섰을 때 주님은 나의 열등감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는 글재주였습니다. 그래서 30여 년을 글쓰기로 담금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주님께 영감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매달림에 주님은 새벽마다 예쁘고 고운 생각들을 내 머리맡에 놓고 가셨습니다. 아침마다 주님이 놓고 가신 영감을 노트에 적어 놓고 감미로움에 젖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먼저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번 글은 어떻게 써야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을까요. 주님 이번 글은 어떠한 맥락으로 논리를 전개할까요. 이와 같은 대화를 끊임없이 하면서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주님이 놓고 가신 영감을 붙들고 글쓰기에 매달리고, 산책을 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떠올리고 하는 동안, 나는 점차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확인해 갈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즐거웠고, 주님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것이 한때 사랑하였던 사람과의 이별 후에 생긴 나의 변화였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4-2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1
    딸아이가 D구청에 여권 서류를 신청하러 다녀오면서 “아빠, 노래 자랑에 한 번 나가 봐.” 했을 때, 가슴에는 뭔가가 콩닥거렸습니다. 그것은 체면과 욕망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체면이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교수로서 그런 노래 자랑에 나가는 것이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고, 욕망은 평소에 출판 기념회 등을 찾아다니며 축가를 부르곤 했던 데서 오는 자신감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언젠가 S시인 칠순 기념 회갑 기념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 사회자가 나와는 잘 아는 K인지라, 필자는 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축가를 부르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때마침 자켓 주머니 안에는 제자가 만들어 준 반주 MR도 준비되어 있었던 터라, 나는 선뜻 축가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K는 “글쎄. S시인 하고도 상의해 봐야 할 것 같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문단의 원로를 비롯하여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K는 S시인의 가족과 한참동안 얘기를 주고받더니 잰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그래 정교수. 잘 해 봐요.”그리하여 유명 성악가들의 축가를 필두로 하여 내 순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출판 기념회가 무르익어 갈 즈음 사회를 보던 K왈, “이번 순서는 원래 식순에는 없지만, 정교수가 축가를 자청해서 부르겠다고 해서 넣어 보았습니다. 한 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그리하여 나의 애창곡인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나는 표정까지 섞어가며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감싸안을 듯한 표정과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런 미소가 지나가고, 바리톤 음성이 나오는 구절에 가서는 방송에 나오는 성악가처럼 가슴을 펴고 양 팔을 널찍이 벌리면서 늠름하게 불렀습니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구 교수를 비롯한 문인들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킥킥 웃는 것이었습니다. 왜 웃는 걸까. 노래가 끝나고 나와 가까운 사이인 H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H도 킥킥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표정과 폼은 그럴 듯한데, 목소리는 영 아니여. 크크크.”이 말을 들은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나와 버렸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던 지라, 딸아이가 노래 자랑에 나가라고 했을 때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로서 노래 자랑 체험을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출연하게 된 것이 ‘KBS 전국 노래 자랑 1500회 특집 방송’(2010.1.31 방영)이었습니다. 처음 예심이 D구청에서 열렸을 때, 강당 안에는 600여 명 가량의 사람들이 관객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각설이·해군·예비군·밤무대 가수 등의 복장을 하고 자신감을 내비치며 거들먹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처럼 가디건 차림은 별로 튀어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에이. 나같은 사람이 되겠어? 1차 예심만 하고 가야지.’ 이러던 것이 1차 예심을 무난히 통과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젊었을 때부터 다져진 내 표정 연기가 한 몫 한 것 같았습니다. 2차 예심은 반주기를 틀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으나, 그 역시 나의 표정 연기로 인하여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자가 자꾸만 틀려 구성 작가인 김선생이 몇 번이나 다른 노래를 해 보라고 해서 겨우 통과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음정이나 박자에 별로 신경을 안 썼으나, 이번에는 방송 출연이니 만큼 정확해야 했습니다. 나는 본심에서 “땡”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인터넷 음악을 틀어 놓고 음정 박자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KBS 전국 노래 자랑’에 출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W교회 성가대에서 자신감 있게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할 때에도 철학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철학은 하나님 앞에서 되도록 예뻐 보여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므로 어린 아이가 예쁜 짓을 하듯 ‘하나님, 저 예뻐요?’ 하며 귀엽게 노래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청소년들이 노래하듯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울상을 지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예쁘게 노래 부르고, 때로는 성악가 흉내를 내 가며 열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행복을 주시러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하고, 주 앞에서 예쁜 표정을 지으며 노래 부르면 주님이 ‘잘 한다’고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복을 듬뿍 내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예쁘게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 주 앞에서 어리광부리지 말고 진지하게 불러라.’ 그 후 나는 자숙하면서 주 앞에서 진지하게 찬양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이것이 주 앞에서 찬양하는 나의 새로운 법칙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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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4-01
  • 기독교인의 행복론 -40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피터 위어 감독)를 보면 1859년 창립된 명문 웰튼 고등학교에 부임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생들에게 문학 교재의 ‘시창작법’ 부분을 찢어 버리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지요. 그리고는 운율을 느껴 보라며 학생들에게 교정에서 행보를 하게 합니다. 평소에 <시 창작법> 등을 강의해 온 필자는 이 부분이 실감났습니다. 실제로 시를 써 보니, 시 창작법이란 게 별 게 아니고 고교 시절에 배운 명시나 수사 기교만으로도 얼마든지 시가 창작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운율도 우리가 명시를 감상하며 익힌 운율만으로도 얼마든지 창작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필자가 제안하는 것이 탈경계의 시창작법입니다. 요즘 수필에서의 산문율이 시에 자주 나타나고 서사적 특성인 이야기가 시 속에 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시창작의 한 추세인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아는 기자에게 콩트 한 편을 카톡으로 보냈더니, 그가 그걸 시라며 시낭독집에 넣은 일이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시낭송 시간에 그걸 낭송하였더니, 청중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내가 자주 참여하는 공연시 낭송도 그렇습니다. 일단 멋진 표정 연기와 함께 노래를 하고 감정을 실어서 시낭송을 하였더니, 특유의 멋진 퍼포먼스가 되더군요. 이를 보면 시가 읽혀질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직접 독자를 찾아가서 보여주는 접근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는 시인과 독자의 거리를 좁혀주는 한 방식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의 스승인 서정주 시인에게서 들은 이야깁니다. 1930년대에는 시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문우들끼리 자주 어울렸답니다. 한 번은 서정주(1915년생)가 李箱(1910년생)&#8228;박목월(1916년생) 등과 어울려 종로 거리를 지나 서대문에 있는 일식 주점에 들어갔는데, 李箱이 문에 들어서더니 스웨터를 입은 일본 여주인의 제일 윗 단추를 꾹 누르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시인들은 다다미방 위에 올라섰는데도, 그는 “왜 그러세요?”라는 여인의 외마디에도 불구하고 땀까지 흘리며 꾹 누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참만에 서정주가 그를 데리고 다다미 위로 올라서면서 ‘아마도 李箱이 모더니스트이기 때문에 여인의 단추를 현대 문명으로 인한 위기를 알리는 비상벨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이를 보면 李箱은 좀 별났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날개」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기생 금홍의 기에 눌려 지낸 것도 그렇고, 수줍어서 말도 못 붙였던 변동림을 좋아해 결혼했으면서도 한창 신혼 살림 중에 일본으로 유학갔던 것도 조금은 별난 것 같습니다. 소설「날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젊은 부부인데도 각자의 방을 쓰고, 아내가 매춘 행위를 해도 화를 내지 않고 쩔쩔 맵니다. 돈의 사용처를 몰라 아내가 준 용돈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겨우 아내 방에서 잠을 잘 수가 있지요. 결국 주인공은 부부 관계가 절름발이 부부였음을 알고 자살을 택하지요. 요즘 보아도 별난 부부인데, 당대에는 얼마나 특이한 부부였겠습니까? 이처럼 별난 부부의 삶과 같이, 李箱 또한 별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기생 금홍에게 기가 눌려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모자부터 구두까지 온통 흰 색을 입은 스타일리스트였다가, 폐결핵 진단 이후에는 후즐근하게 지내다가 동경에서 일본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리는 바람에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속되어 있다가 폐결핵이 도져 죽게 되지요. 아마도 그는 창작에 너무 심취하다 보니까 허구와 일상의 구분을 쉽게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李箱을 알게 되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창작 방식은 작가에게는 다 나름대로의 창작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李箱은 기생 금홍과 동거를 하면서 그 체험을 허구화시켜 독자에게 감동을 줄 나름대로의 문체를 터득한 것이지요. 건축과 미술을 익혔던 그가 작심하고 창작법을 익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그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글쓰기 방식을 연마하여 십여 편의 소설과 수백 편의 시를 발표하였던 것이지요. 이런 李箱을 통해서 나는 시창작에 그리 많은 창작 기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글이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따져 보는 것이지요. 요즘 나는 아마추어 문학 동호인들에게 시창작법을 강의하곤 합니다. 그리고 강의할 때 기존의 교수법을 고수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강의가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신감이 있으면 당연히 강의가 멋있고 알찰 수가 있지요. 그들의 가슴 한 켠에 멋진 인생 한 편이 그려질 수 있으면, 강의는 성공입니다. 언젠가 만성신장질환을 앓고 나서 나에게도 죽음이 빗나갈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얼마나 멋지고 즐겁게 사는가 하는 것이 사후에도 남을 내 흔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내가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3-23
  • 기독교인의 행복론 -39
    먼저 김치 한 단을 먹기 좋게 자릅니다. 양파도 적당하게 잘라 국 냄비에 넣고, 참치 캔 하나를 따서 넣어 뜨거운 가스불 위에서 김치와 버무려 볶습니다. 그러면 빠알갛던 김치가 하얗게 변하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때 물을 김치와 다른 양념이 가라앉을 만큼 붓고 펄펄 끓입니다. 이십여 분이 지나면 김치찌개가 완성됩니다. 다음은 계란찜입니다. 사기 그릇에 달걀 4개를 깨뜨려 넣고 대파 잘게 썬 것을 새우젓 반 스푼(차 스푼, 나트륨이 적게 들어가도록 고려할 것)과 물 반 대접과 함께 잘게 섞습니다. 그리하여 사기 그릇 안에서 달걀 노른자가 거의 미음처럼 되면 대접이 들어갈 만한 큰 냄비에 물을 약간 부은 후, 그 위에 그릇을 얹어 넣고 7-8분 끓입니다. 그러면 계란찜이 됩니다. 계란말이 요리는 인터넷을 찾아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까 참고하십시오. 필자가 이런 요리를 하는 것은 퇴직한 남자들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이렇게 요리하고 나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그나저나 설거지통에 삼 시 세끼 먹고 난 그릇들이 잔뜩 쌓여 있네요. 싱크대 위에도 냄비와 후라이팬이 쌓여 있습니다. 저 정도를 설거지하려면 40분은 족히 걸립니다. 설거지를 하기 전에 욕실 앞에 놓인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립니다. 그래야 아내가 퇴근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 경제적으로 운용됩니다. 목표는 두 시간 안에 후딱 해치워야 합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끝내니,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네요. 그 전에는 무얼 했냐고요. 사색하고 글 쓰느라 하루를 거의 보냈지요. 아내에게 글 쓰느라고 집안 일 못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이 양반, 모르는 소리 허시네. 글 얘기가 나오면 대부분의 주부들이 글 써서 돈이 되느냐, 밥이 나오느냐며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 하는데, 그런 바가지 들을 일을 뭣하러 하지요? 차라리 나 혼자 실컷 사색하고 나서 아내가 퇴근할 즈음 해서 두 시간만 부지런 떨면 될 것을. 아참. 요리하느라고 청소할 시간이 부족하네. 우선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대략 테이블 위만 정리해 놓고 청소했다고 뻥쳐야겠다. 눈치를 봐서 아내의 검열만 잘 끝내면, 이삼 일은 청소 안 해도 아내가 눈감아 주지요. 이제 요리까지 해 놓았으니 아내가 집에 들어서서 칭찬해 줄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네요. “여보. 나 왔어요.” 아, 저 꾀꼬리같은 아내의 목소리(나만 그렇게 생각해도 좋음).“별 일 없었지요?”“당근이지.”아내가 싱크대 앞으로 가서 설거지한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청소는 했나요?”아내가 거실에 먼지가 있는지를 보려고 얼굴을 바닥쪽으로 기울입니다.“……”“청소 했냐고요?”“어? 으으으응”“먼지가 약간 있는 것도 같고…”아내가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벼락같이 뛰쳐나옵니다.“여봇. 화장실 청소를 안 하면 어떡해욧?”아이쿠.“아니, 첨지(우리집 똥개) 똥오줌을 시간마다 치우느라 시간이 모자랐어.”사 실 딸아이가 데려온 첨지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워낙 그놈의 덩치가 커서 수시로 오줌을 질러대는 것도 만만찮습니다. 젊었을 때는 우리 아이들 똥기저귀도 안 갈아 주었었지만, 요즘에 첨지 똥오줌을 뒤처리 안 했다가는 아내한테 혼쭐납니다.왜 이렇게 사냐고요? 나도 이렇게 사는 걸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어 보고 터득했다고요. 여성이 폐경기를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 남성처럼 거세지는 데 비하여, 남성은 뱃살이 늘어나면서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가슴에 커다란 젖무덤이 생기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물어 보았지요. 형들 왈, “집 안에서는 무조건 여편네 말 들어야 헌다. 그것이 나이 들어 편하게 사는 거여.” “아이고 형님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셨나요?” 이런 얘기가 오갔던 것도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자 나이 예순을 바라보니, 아내의 기가 팍팍 살아나는데 아내 뿐만 아니라 처형과 처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더구나 처형은 아내에게 “네 남편이 원래 띨띨하잖냐?”하면서 대놓고 구박을 합니다. 어쩌다가 집안의 군기라도 잡을라치면 아내는 “삼식이가 웬 말이 그렇게 많아. 집안 일 하기 싫으면 나가서 돈 벌어 오면 될 거 아니야.” 허 참. 내가 기가 막혀서 매 달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될 만큼 연금을 타 오는 데도 구박이 저렇게 심하네요.그 러나 어쩌겠어요. 삼십여 년을 같이 살다 보니 정은 들었지. 이 나이에 집 나가서 어디 발 붙일 데라도 있나요? 그래서 꼼짝 없이 가사 앞치마 두르고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할 수밖에요. 어디 나만 이런가요? 나이 든 남자들, 모두의 번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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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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