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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54
    마치 생수가 터져 나오기 전 나오는 건수를 암반석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가난할 때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이 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먹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본 메뉴의 고기 튀김이 나오기 전 스프만 먹고 와서 돈까스를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엉터리 같은 신비적인 사이비 듣고, 보고, 말하게 한 허무맹랑한 삶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출 20:23).지금까지 이야기는 우리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를 영화 한 편을 보듯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가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신 사실 속에 있지 않은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우선 비져서-신을-너를 위하여, 온갖 것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능숙해 있는 현대 교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온갖 학문과 이론을 인간의 욕구와 갈망을 해갈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사용하여 형통의 신을 만들고 있습니다.하나님은 토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가 있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토단(土壇)이란 흙 자체입니다. 사람의 것이 가입되지 않은 원래의 자연 그대로의 단입니다. 인간의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도구나 방법이 아닙니다.번제는 희생제물로 제물을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에 의한 향기입니다. 죄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 학문까지 다 내가 그것 때문에 수십 년간 소중히 쌓아놓은 모든 자료들까지 다 불태워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제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화목제는 친교제입니다. 화목제는 어떤 특별한 의무를 면하는 헌신의 목적과 고통의 때에 약속한 맹세를 이행할 목적으로 그렸던 것입니다(적대감을 제거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출애굽기 20장 25~26절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글을 쓴 사람처럼 자상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하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함이니라” 이 말을 그냥 주은 돌, 아무렇게나 생긴 돌, 창조하실 때 그 모습 그대로의 자연석을 주어서 하라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있는 것 즉 적고 많고가 아니라 생김새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술적 손끝이 닿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이 얼마나 편리하고 쉬운 일입니까. 예수님처럼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는 인간의 최소한의 성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방 신의 방법입니다.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정성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 너를 창조하고 복 주신 그대로입니다(창 1:27-28). 그리고 그래도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아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돌로 할 때는 부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곧 부정한 일에 능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이교도의 신당을 짓는데 능숙해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조각가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세상 사람들의 우상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 장수를 했다는 일을 반복하여 우상을 만들어 기업형으로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 뿐 교회나 목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그다음 출애굽기 20장 26절에서 쌓아올린 것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를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저는 이 말씀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짐을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어린아이라도 홋치마를 입은 여자가 앞서 계단을 오른다면 그의 하체가 뒤 올라가는 사람의 눈이 보이게 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53
    단, 한 가지 질문을 명상하라.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가장 쉬운 문제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입니다. 우리 각 개인 자신의 위대한 창조주와 하나이며 완벽하고 온전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습관은 습관에 의한 습관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냐 곧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이냐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목회인 것입니다.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 자신이 위대한 창조주와 하나이며, 완벽하고 온전한 영적 존재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쫓기는 스케쥴과 열심에서 자유 할 수 있고, 어려움에서 평화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맨발입니다. 모세의 소명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 말기인 80세가 되는 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로부터 민족 해방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 장면이 출애굽기 3장 5절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희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내용이고, 자주 인용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백석학원이 1976년 야간생 30명을 모집하고 처음 예배 때 설교했던 본문입니다.우리가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맡기실 때 꼭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하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입니다. 막무가내로 어른에게 엉겨 붙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지만, 어른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릎에 앉고 수염을 만지는 데까지는 참으실 수 있지만, 상투를 잡아당긴다면 참지 못하는 분노가 인자한 할아버지가 돌변하여 매를 드는 것처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며 거룩한 것이 거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맨발입니다. 발바닥에 다른 중간 매개체가 없는 맨살 그대로입니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장치 모두를 망가뜨린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의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라”(슥 12:1).“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의 손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이요 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이요 드리는 예물은 돼지피와 다름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양함이요”(사 66:1).“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니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 7:46~49).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돌비석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맨발로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쉬운 법칙으로 계명의 10가지 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네 계명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여섯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님은 누구나 이행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이야기로 누구든지 이행할 수 있기에 맨발로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어려운 관문으로 험하고 좁은 문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뚜쟁이들이요 신자라는 사람들입니다.신자란 우상 신을 믿는 사람으로 이방 종교의 방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되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방들이 만들어 놓은 섬겨야 하고 섬김을 받아야 하는 절대적인 우상의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런 확신도 없는 이유입니다. 만일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의 공력에서 나타나는 응답이라고 하여 우리가 진액을 드려진 공적을 이방 신들이 받아들여서 죽음과 사망과 고통으로 이끌리게 하는 말초신경이 흥분하게 하는 마약과 같은 습관적인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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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52
    망각이 우리의 모습 자체를 왜곡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자기 본연의 창조성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길러지는 것이라고 하여 교육의 본질을 그곳에 두기 때문에 세상적 조건을 갖춘 고통과 불안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길러짐 때문에 영원한 불구로 살 수 있습니다.유명이란 순간일 뿐 지속이 아닙니다. 스타는 별과 같아서 그 존재는 순간뿐입니다.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일 뿐입니다.나는 닭인가?나는 독수리인가?나는 유명한 성악가인가? 유명한 정치인인가?다시 말해서 나는 땅만 헤집기 위해 태어났는가? 창공을 비행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그 대답일 뿐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사람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길들이려고 하면 독수리는 닭 울타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교육은 본성을 찾기보다는 습관에 의해 반복된 길들임에 있습니다.에드워드 옆의 「권력과 지성」이라는 책에서 지식인에 대한 정의한 게 있습니다. “지식인이란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습관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지식인은 친숙해지면 더이상 지식인이 아닙니다. 스스로 객관화해야 합니다.건축가인 송효상(2011년 광주디자인 비엔날레 총감독) 씨도 건축가로서의 기본 사상을 “항상 시각을 달리하려고 나를 타자화(他者化), 객관화하려고 훈련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자신의 객관화는 인간의 창조적 원래 모습의 회복입니다. 누구와 똑같은 쉬운 형태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창조일 뿐입니다. 그 결과까지 스케줄은 나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창조는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십시오. 그 영화가 유명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본성적 진실한 삶의 가치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금하면 꼭 보십시오.세 상에 길들었다는 것은, 전통적 교회에 길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성의 바로 길든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나만의 주신 하나님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상적, 윤리적 잣대로 평하고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달고 혈압을 체크하고 혈당을 잴 이유가 없습니다.새벽 기도로부터 주일 성수, 성경 공부, 소그룹 지도, 철야 기도, 십일조 헌금, 기도원 기도, 세미나, 될만한 프로그램, 건강을 위한 헬스, 골프, 등산, 미팅, 정치적인 모임, 단체모임, 경조사 외, 헤아릴 수 없는 목사의 품위를 지키려고 약을 한 주먹씩 매 끼마다 털어 넣고 수시로 정규적으로 검진하는 일까지 목회자 자녀라고 하여 체면과 관계된 관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결국 자기 꿈 실현을 위한 불타는 욕망, 비판, 자기 개발 등 셀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목회는 나 개인의 습관에 일부분이 아닙니다. 예수처럼이란?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나 장소나 버릇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금욕적이거나 극단적인 철저한 무릎이 해지도록 했다는 기도 생활 외의 모든 것과는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이런 이야기를 어느 분이 했습니다.남인도의 성스런 이루나 찰라라는 산기슭에는 라마나 마하리쉬란 위대한 현자가 살았다고 합니다.헌신하는 자들에게 ‘스리라마나’로 불렸던 그는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아주 간단한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누구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수많은 사람이 스리라마나를 찾아왔는데 그중에 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사업가나 결혼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기를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는 아낙네들 외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다고 합니다.이런 수천, 수백 명의 사람이 갖가지 현실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지혜를 기대하며 스리라마나를 찾아왔는데 그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처방전을 들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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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2-0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1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꿈 꿔 온 스토리는 산산이 부서지는 환상일 뿐입니다. 목회자의 꿈은 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아닙니다. 한참 세계를 뒤흔드는 목적 있는 삶이나 열정, 비전, 긍정적인 삶, 이런 거창한 꿈의 소리가 목회자들의 말 못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목회자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에 목표에 돌을 던져놓고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삶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발생한 중병이 위선이요, 거짓말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종말은 모라토리움으로 비참함을 체험해야 하는 것을 아는 목회자가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가 사는 방법이 큰 목소리입니다. 한국적 상황은 교통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명함에 이력서를 넣고 다니는 사람 중에 목회자가 많다는 것도 아는 사실입니다.지금은 덜 하겠지만 흰 와이셔츠 주머니에 경목이라는 꼬리 달린 카드를 넣고 과시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불편한 삶이겠습니까?과시하려는 꿈이 현실이 되지 않음은 큰 축복일 수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치유를 가져오지만, 환상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목회자가 어렵다는 것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허망한 환상입니다. 그래서 나의 진실함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다닙니다. 그 옷이 명품이라는 현대사회가 그보다 교회가 걸친 에봇이 되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가운은 벗어야 합니다. 시날산 외투 한 벌을 벗지 않아 돌무더기에 묻어버린 것을 보였을 뿐 아니라 큰소리쳤던 용기가 위선으로 변질되었을 때 죽는다는 것도 보았습니다.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매여 있는 천국의 보상심리가 목사의 주 무기였습니다. 코너에 몰릴 때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죽을 힘을 다해 짖어댑니다. 목회자의 자기 자신의 욕망의 안타까움의 돌파구가 죽은 후 보상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 이전의 삶을 우선하였습니다. 사는 척 폼을 잡고, 진정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며 상패나 학위나 갖가지의 사회적 상징들을 끌어 모으고 유행어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뻥 뚫린 허전함을 수단과 비전으로 메우려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지나가 버린 날들은 나의 공력으로 나열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도 꿈을 못 깨고 있다는 사실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제 오늘 이야기를 제리 프랭카우서의 저서인 「독수리와 닭」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새들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 때부터 닭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닭 모이를 먹는 독수리는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닭들처럼 행동하면서 더 이상 자신이 독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넌 독수리야 날개를 펼쳐서 날아보아라”라고 지붕 위에서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태양을 향해 번쩍 쳐들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승리에 찬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습니다.독수리는 창조하실 때부터 독수리였습니다. 비록 닭들과 함께 먹고살았지만, 독수리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잠언서 20장 5절에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창조하실 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릴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한대함을 품어 올릴 수 있는 것이 명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로 태어난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언제인가 환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입니다. 목회자가 기업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운영방식에 젖어있다고 기업인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현재 형통하고, 안정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대로 바보같이 맹종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40년을 살았지만 그대로 둘 수 없기에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떠남에 대한 것을 실패로 인식하게 하는 세상적 방법에 아주 약합니다. 독수리처럼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영적 존재로서의 근원과 본질을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굴복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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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50
    칭찬으로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백 부장의 믿음과 칭찬으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대화를 통한 학습.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 물질에서 해방하게 하기 위하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에서는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 여인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으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양심에 호소하심은 인간의 정죄성의 고발입니다. 비유로 강의하신 예수님을 마태복음 5장 7장에서 간음, 살인, 기도, 빛과 소금의 역할 같은 주제들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이나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상징과 모범 사례를 보면, 최후의 만찬에서(마 26:17~30), 발 씻기는 일에서(요 13:14~15), 십자가의 최후에서(마 27:46~50).이와 같은 일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의 쉽게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상황들은 바로 우리 주변의 일들이었습니다.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모범의 실습에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계속 강조되는 일이 연구하고 계획하여 빈틈없는 삶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혼자의 뜻을 이루려고 입산수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인간미 흐르는 주변 사람들과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예수님의 마음은 단순합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모습이 지금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장 5~13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 이 맘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동등 됨을 취하지 않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이 사실은 예수님의 비하하심입니다. 그 분의 비하는 하나님에 이르는 승귀하심의 능력이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결국, 내 것은 조금도 개입할 수 없으며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일 속에 나를 포함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기독교인 것입니다.내 것이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지금까지 목회적 삶을 내가 꿈꿔오던 것을 현실로 바꾸려는 헛수고의 삶이었기에 우리는 고통이니 고난이니 열심이니 충성이란 단어 속에 나를 묻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꿈이란 현실로 될 수 없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도 보상할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었으며 우리의 거창한 꿈에 아무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의 꿈은 너의 허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꿈은 눈만 뜨면 모두 지워져 버리는 것이 꿈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꿈은 붙들고 있을 수 없는데 목회자의 꿈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을 비누거품 같은 것을 손목에 힘을 다해 붙잡아야 할 조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이 목회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2장 21절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지만 깨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대로의 꿈일 뿐이었습니다. 꿈은 악몽이든 선몽이든 깨어남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나를 나의 허무맹랑한 꿈의 스토리인 현실에 나 자신을 가두어두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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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9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지금도 ‘소자’에게입니다. 보상받을 수 없는 아주 시시한 그런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 발로 채일 만한 흔한 이름 모를 잡초들일 수 있습니다.목회자들의 대상들이 명분을 내세우는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회 대상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 중에 중요한 사랑의 열매가 나옵니다.사랑이란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성령의 증상입니다. 거기서부터 희락과 화평이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탈무드에서는 충성이란 의미를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절제, 충성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예수로 인하여 우리 욕구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요”란 칼럼을 쓰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장에 계셨습니다.◦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일치합니다(성경은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짐을 지우지 말고 함께 일합니다(함께 지는 짐입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사람의 인기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보이기 위함 아닙니다). “저희 모은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의 곧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마 23:5).◦특권의식을 갖지 않습니다(VIP는 모두입니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마 23:6).◦칭찬은 교만하게 합니다(당나귀 귀가 아닙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리라”(마 23:7).◦직분의 명칭에 연연하지 않습니다(수많은 완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8).◦영적 교제.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다른 이는 없습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내가 존재하는 이유).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마 23:11).◦겸손한 삶입니다(거울 속에 비친 남편의 모습). 돕는 배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느니라(마 23:12).◦예수님은 교사로서, 유일한 선생이요(마 23:10, 요 3:2), 군중을 가르치시고(마 5:1-12), 산에서 가르치시고 만나 이야기하시고,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대상은 고상한 사람도 가르치시고, 하류 사람도 가르치셨습니다(요 3:10, 요 3:7). 예수님은 전 생애 동안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막 3:16-19).◦마귀를 쫓아내시고,◦군중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몸소 자신의 생을 통해 가르치시고,◦기도를 통하여 복종하기를 보이시고,◦십자가를 통하여 용서하시고,◦복음과 생과 사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은 치료자로 마태복음 8장 9장에서 질병을 치료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둥병자와 열병 환자들, 손 마른 자들, 맹인이나 농아들, 태어나면서 소경들, 육체적 질병인자들(마 8:14~5, 마 9:1~8, 마 9:27~34, 요 9:1~12) 영적 치료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정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하셨습니다(마 9:22, 마 9:35~36, 마 10:1).◦목자로서의 일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2), 잃어버린 양을(마 15:24), 아흔아홉 마리(마 18:13).◦예수님의 학습 방법 : 실물을 통해 하셨습니다(눅 7:36~50). 바리새인과 식사하시면서 향유의 옥합을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성을 설명하셨으며, 사람을 낚는 어부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더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48
    우리는 화려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선교나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삶을 말씀하십니다.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만물까지도 우리가 마구 대할 대상이 아닙니다.행사나 축제를 위한 도구들이 아닙니다. 목사가 목회 성공을 위한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양심적인 자기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나의 신앙적 보상이 아닙니다.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6장 1절부터는사람들 앞에서 기도하지 말라.사람들 앞에서 구제하지 말라.사람들 앞에서 금식하지 말라.이런 사람은 이미 세상에서 상을 받았다.이들에게 이어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권능을 행했고, 내가 한 것을 자랑하였고, 23절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율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율법은 자기 자신의 완벽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처럼 살아가면 보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조건 관계에서 오는 인간의 죄성에서 출발된 대가를 기대하는 그런 보상이 없습니다.조건에 의한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목사의 목적 달성을 위한 명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자기 행위가 보상을 목적으로 한 결과일 뿐입니다.목회자의 불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는 상 받으려고 축복받으려고 건강해지려고 잘되려고 성공하려는 이방 종교가 말하는 조건에 의한 열성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했더니 지금 같은 보상을 누리는 것이다고 간증한다면 그 즉시 예수님께 내어 쫓김을 당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라는 것입니다.이어서 31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나 신학적으로 전통이라고 하는 사람들 눈에 왜 지극히 작은 자가 보이지 않을까요. 목회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 너무 흔한 대상이요 발에 채일 정도로 깔려있는 작은 자인데 보이지 않을까요?작은 자를 찾아 헤매는 목회자는 고통입니다. 자기 집 추녀에 걸린 파랑새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자들의 삶은 어렵습니다.아주 쉬운 일인데 왜 고통이요 고난이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목회에 대한 큰 기대와 기적 같은 역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가난으로 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도 하지만 바보를 통해서도 하십니다.하나님의 일 중에 세상에서 대접받는 일도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목회는 많은 군중 앞에서는 신나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숫자가 적은 데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사람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쪽팔림’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목회자가 많은 사람에게 신뢰받고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작은 가정이나 자녀에게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신을 받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 실제적이고 가장 문제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관심도 없는 것이 한국적 보이려는 시각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는데 아무 부담을 느낄 수 없도록 단련된 모습이다. 목회 성공이란 가치관에 대한 문제가 목회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2-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7
    만일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인간적 노력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유교나 무속 문화의 유물이 성의와 정성을 기독교가 모방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진정한 열심의 의미는 ‘예수님 안에’ 라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우리식 해석으로 맹종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에 예수님이 와 계신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忠(마음 중심에), 誠(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공력이나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금욕이나 극단적인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고 함께 사셨던 그 자체입니다.‘냉수 한 그릇’입니다우리는 언제나 아주 좋아 보이는 그리고 그럴 듯한 것으로 누가 보아도 좋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한국적 체면과 명분이 예수님의 아주 미미한 자연스러움을 무시하는데 사로잡힌 것입니다.귀한 것을 보는 시각적 평가가 상실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당연한 일이나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값 비싸다는 것은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의 계산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허비한다는 마음이 아깝게 생각하는 인간적 욕심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이 여인은 산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값으로 계산해 본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내가 소유할 이유도 없고 더 좋은 것을 가지게 된 벅찬 기쁨이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불필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소중함을 갖게 된 이 여인의 행동에 감동하신 것은 이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감격된 일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한 행동이 기특하다는 것보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느낀 사람에 대한 표현입니다.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선언하는 그의 깨끗한 마음가짐입니다.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의 어설픈 표현입니다.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정교한 형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절대 섬김의 방법을 말씀하신 적 없으십니다. 오늘 이야기도 ‘냉수 한 그릇’입니다. 설탕을 얼마큼 탔느냐, 좋은 그릇이냐도 아닙니다. 접시에 받쳐서 기본적 예의를 지킬 것도 요구하지 않으심입니다. 그물이 정수된 것이나 정수기 필터를 정기적으로 바꿔 주었느냐도 아닙니다.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만남도 오다가다 만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있는 대로 없으면 생수 한 컵이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길가 벤치에서 그것도 없으면 그냥 서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상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에게 함께 계신 분입니다.우리는 화려한 의식을 벗어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고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격식과 체면치레입니다. 이것은 불명예스러운 유교와 무교의 유산들입니다. 그리고 이방 종교의 찌꺼기들입니다.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현대사회는 문명의 충돌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할 필요가 없는데 하려고 애쓰는 일, 물은 물로서인데 따뜻하게 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이 긴박한 갈증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상처는 현대적입니다. 그런데 회의를 거쳐서 예산 지출과 방법을 연구하다가 상처는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진행형이 아니라 순간형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세대 차에 대한 갈등입니다. 교회도 고정관념과 순수성의 충돌입니다.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대는 있는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노출하는 시대입니다. 즉 솔직의 세대입니다. 인간의 본심의 순수함을 원하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도록 의식에서 만들어진 위선에서 갈증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뻔히 드러날 줄을 알면서도 거듭된 거짓으로 모면하려고 애쓰다가 개망신을 당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2-07
  • 목회는 쉬운 것이다·46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그 일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을 가만히 보라”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앞세워 자기 공력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열심일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렇게 표현한 분이 있습니다. “체조경기에서 볼 수 있는 기구 중 높이가 1.2m, 길이가 5m, 너비가 10cm가 되는 평균대가 있는데 한 가닥으로 된 좁은 대위를 걸을 때 평행 감각과 조정 능력을 잃으면 웬만한 선수도 떨어지기가 일쑤입니다.” 그 평균대처럼 20년 가까이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의 철학이 방심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목회자라고 표현했습니다.이 불안감이 마치 줄타기를 하는 곡예처럼 생각하는 위험부담을 갖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걷고 있는 목회길에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것이 경쟁의식입니다. 그 경쟁은 곧 열심이라는 마귀의 갈채에 마치 곡마당에서 위험부담을 갖고 재주를 피우는 것으로 목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곡예사는 관중 때문에 존재합니다. 목회는 대중과 관중에게 보이려는 재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현재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당면 과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회를 하려는 의욕은 소명의식에서 뜨겁게 타고 있으나 이런 일들로 인해 불타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한다는 중요성보다는 큰 교회를 해야 한다는 한국만이 가진 경쟁의식입니다. 그 경쟁의식을 유교와 무속종교에서 그 출처를 찾으신 분도 있습니다.우리는 일등만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볼 때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어릴 때부터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구분하였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20평 아파트 사는 사람과 50평 아파트 사는 사람,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학자냐 학자가 아니냐를 확실하게 나눕니다. 양반이나 상놈이냐는 서열을 나누는 습성이 기독교라는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일등이라는 이 공해는 마귀의 수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사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념에 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구별하는데 능숙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구원과 유기로, 정통이냐 비정통으로, 잘났냐 못났냐, 돈이 있느냐 없느냐, 일류 학교냐 하류 학교 출신이냐, 전라도냐 경상도냐, 이런 일들의 균형을 위한 십자가 역사입니다.구분이 결국 목회장소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목회환경이 좋으냐? 나쁘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구분이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때 진정한 목회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복음입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아주 평범한 삶입니다.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만든 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매우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든 이유가 이방 종교화되어 의식이나 방법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는 대상으로 착각하게 한 이유가 교회에 대한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배당으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성전에는 제사문화로, 제사는 섬기는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 목사 자신을 제사장으로, 제사장은 성전을 크게 지어야 제사장의 명예와 권위가 돋보이게 되고, 제사장은 성도라는 교인과 신의 관계로 만들 개체로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한 제물이나 제사로 공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어처구니없는 일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제사장의 필요성을 무용하게 하게 되는 공포증상일 수 있습니다. 중간 뚜쟁이의 무용성에 대한 두려움을 목사가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 무서운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1-2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4
    목회자가 매일 삶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알려지신다면, 또 그리스도를 전하는 필수 요소가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서 우리 삶의 체험담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가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삶에 가치를 두어서 그 체험에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심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나누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우리가 생각하는 열심히 아니라는 것을 로마서 10장 1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예수님처럼 하는 목회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예수님이면 너무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걸어가신 아는 길이기 때문에 모험이나 두려움이 없는 길입니다. 또한, 신비로울 수도 없습니다.우리가 하려는 목회성장학이라는 열심의 조건이 순수하고 쉬운 길을 복잡하게 어질러 놓는 일이 됩니다.이미 갔던 길을 왜 일부러 꼬불꼬불한 골짜기를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열심히 예수님을 대적하고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유대인과 한국인의 비슷한 점은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열심히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면 과잉 충성, 열정, 정열이 사탄의 박수갈채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한국적 목회 성공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교회가 아닌 교회당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란 출처가 어디인가? 자기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이 훌륭하고 유창하여 하나님 중심인 것 같으나 일방적인 자기 목표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꿈꾸고 있는 환상적인 환경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열심을 자동차 엔진에 비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동차 엔진이 움직이는 것이 열심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냥 엔진으로서의 일일 뿐입니다.베드로의 누가복음 5장 4절에서 나타난 사건이 열심인가? 밤을 맞도록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히 아닙니다. 베드로의 지금까지의 일은 자기란 조건에 의한 열심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3장 19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열심히 무엇인가?어거스틴은 “바른길에서 절뚝거리는 것이 잘못된 길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습니다.이단일수록 열심을 강요합니다. 이단뿐 아니라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목표보다는 속도전인 열심을 강요합니다.중요한 것은 목표에 의한 삶 자체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열심히 욕망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불안 초조라는 사실을 증거가 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재촉할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따름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입니다. 속도조절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자신의 약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거움입니다.예수님처럼 목회는 속도가 아닙니다자기 몸을 희생하는 봉사가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도 없고, 대속의 피도 없고, 십자가의 능력도 없다면 결국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릇된 삶이 될 것입니다.이와 같이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과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 다음의 봉사 생활인데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자기를 희생해야 한다고 목사들은 말합니다. 사실상 목사 자신도 무엇을 얼마큼 희생했는가 생각해보면 희생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한 조건에 의한 일을 하고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일 목사가 희생을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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