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3(목)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허광재 칼럼 기사

  • 목회는 쉬운 것이다·72
    교회개혁의 기초가 가정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가정을 이루며 가정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청교도들의 삶에서입니다. 어떤 학문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순수하게 오직 성경 중심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백한 교리나 시행하던 예배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유지하려고 했던 정치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교리 개혁에 대하여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전통과 미신으로 오염된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과 교리의 표준과 척도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로마 천주교회에 의하여 오염된 그릇된 교회, 미신적인 예배, 폭정을 일삼는 교회정치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인 전제가 종교개혁과 함께 다양한 교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성경을 보는 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제 때문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또는 전제에 따라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도 다양한 형태들의 상황이 이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정통이란 점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혼란하게 변화된 것입니다.지금까지 많은 이단과 그릇된 교파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전제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명하거나 교훈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에 성경을 뜯어 맞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천국의 통치 원리를 평등과 자율이라고 제시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된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오늘 우리는 천주교도들의 계급 구조적인 정부형태를 취했는데 그것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성경을 가져다가 맞추는 것이 바로 그릇된 신학운동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중요한 것은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때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 수 있으나 그릇된 전제에 의하여 해석되면 성경이 제시하고자 하는 그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적 전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이 요구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란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이유가 예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비추어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같은 바른 신학을 재발견한 신학자가 요한 칼빈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를 바로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에 기초하여 로마 천주교회나 재침례교회의 성경해석을 비판하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라고 고백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여 교리를 체계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계시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존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을 찾아와 그의 왕국의 말씀과 성령으로 살리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는 자에게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어놓은 세상의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방법은 무용하고 헛된 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9-20
  • 목회는 쉬운 것이다·71
    성경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로부터 시작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 넓고…”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치는 환상인 것입니다.”인간의 죄성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먼저 살리시기 전에는 결코 그 사실을 스스로 먼저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필요의 충족으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다른 색깔이 가입되지 않은 무색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한 이유가 매우 평상적인 단순한 삶 그 자체로 보여주셨습니다.연합회, 협의회, 대형집회도 아니고 설득하려고 성명서를 발표할 이유도, 방어할 이유도, 어떤 형태도 아닌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완전 패배자로서 가능성이란 1퍼센트로도 찾아볼 수 없는 무력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같으면 높은 권력자라도 아는 척하고 자기변명으로 변호사와 함께도 아닙니다. 피할 길 없이 소나기를 맞아 나 자신의 기본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아주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돈 없는 자도, 무식한 사람도, 병들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어떤 기본조차도 없는 그 사람들에게도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인간은 일시적 필요가 채워지면 진리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더 큰 필요와 더 큰 자극을 갈구하여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존재입니다.사람들은 자기 필요를 채우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생각지 못한 벼랑에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욕망은 하나님과 관계를 끊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범으로 베드로의 그럴듯한 결단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실수한 사건들이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안달하는 소위 기도제목의 소리지름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히 그 일이 목사의 소관이 아닌데 자기가 만든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프로그램입니다. 성경에 오직이란 말은 너희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것입니다.인간이 느끼는 필요를 채워주는 곳은 절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고 나면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연결된 조직은 모두에게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교회에서 일반적 교육이론을 받아들여서 시간이 갈수록 심각한 죽음의 현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MBTI」 성격유형테스트를 비롯한 각종 심리상담을 포함하여 출처도 모를 수많은 도구를 밀수입하여 사용하는 주인공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결국, 목사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범하고 있는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선배 목사들이 만들어 놓은 그곳에 진정하게 목회할 용기를 못 갖게 하는 일을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요는 얼마든지 가공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멀쩡한 사람도 정신분석을 몇 번 받고 나면 순식간에 환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심리학으로 대변되는 치료 중심의 가르침 속에 애초에 정상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사람의 필요를 우선으로 채우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한 마케팅 전략은 인간의 재치를 의지한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똑똑한 사람들이 인간의 구석구석을 조사하여 찾아낸 인간의 필요를 채움으로 교회당을 차고 넘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박수갈채를 받고 연예인처럼 그 사실을 선전하려고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람들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자의 교훈”이라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남이 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모방의식과 남보다 앞에 서려고 하는 열심히 경쟁을 만듭니다. 경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경쟁이란 비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최초 뱀이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죄성적 욕구에서 더 나아 보이려는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은 타락한 인간의 생리현상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건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위장 속에는 뱀의 조정을 받은 그 여정을 성공적인 신앙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9-13
  • 목회는 쉬운 것이다·70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곳만이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알아듣지도 못할 말과 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요란하게 하여 계속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나와 함께 계심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일을 제사장이 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매우 단순한 복음의 가치를 복잡하게 만든 화려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인간적 욕망의 꿈에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유교적인 전통과 무속적 신비주의로 자리가 굳어진 곳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대단한 선교적 열정이 있었던 초기의 선교적 역사는 급진적으로 발전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 보면 기독교가 무섭게 변질되어 명목상의 기독교일 뿐 복음과는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입니다.유교의 기초를 버리지 않은 그 위에 구약적 제사장이라는 의식이 굳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만인제사장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 속에 유교적 질서와 윗사람 위주의 중심이 귄위주의, 사회질서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하나님이란 이름을 남용하여 심판하고 형벌만 주는 가까이할 수 없는 분으로 제사장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여기에서 당회장권, 목사의 권이 남용되어 설교나 신학적 바탕을 유교식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 것입니다.남성 중심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으로 남자는 치유될 수 없게 되었듯,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요, 동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둘을 따로 봄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기초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절대로 기독교가 아닙니다.이들은 가문을 지나치게 유지하려는 정통주의에서 발생한 신학도 학문으로 단순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복잡하게 만들어 엄청난 범죄를 일삼고 있으면서 듣기 좋은 말과 용어를 사용하는 가증스러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 중 가장 부흥했다고 자랑만 일삼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상처가 곪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없게 위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받아들여 수입한 신학을 학문이란 겉옷을 겹겹이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진들의 눈물과 피로 닦아 놓은 터 위에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오늘날 우리 교회의 흐름은 자료에 의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18세기 대각성운동의 주역)는 “부흥은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며 인간은 부흥을 가져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그러나 찰스 피니는 “부흥이 인간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준비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사실 한국교회는 찰스 피니의 사상에 매여지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영감주의자인 노오만 빈센트 필은 ‘부흥에 있어서의 인간적 역할’을 강조한 저서인 「확신의 삶」, 「적극적 사고력」의 정신적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스스로 하는 신앙, 꿈과 환상의 필요성 강조, 심리학적 정신치료법 강조되었습니다.그 후 필의 수제자 로버트 슐러의 대중적 부흥운동, 교회성장 원리, 적극적 사고, 환상, 상상, 심리적, 상업적 기술에 근거하여 ‘적극적 사고에서 위대한 힘이 생긴다’는 주장이 한국교회를 흔들어 기형적인 성장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현장을 옥성옥 씨가 「마케팅에 약해진 기독교」, 「심리학에 약해진 기독교」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목사들로부터가 인간의 본질상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 필요를 교회가 채워줌으로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신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방 종교와 똑같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으로 재판도 필요없이 즉결사항에 속한 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행동은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에서 만들어진 위선일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30
  • 목회는 쉬운 것이다·69
    개혁주의가 어떤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혁주의의 주제인 5대 솔라(Sola)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이라는 삶의 방법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방법이 영을 말살시킵니다. 방법과 이론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우리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부터 말하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를 군더더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사실 속에서 생활이 된 아담이었습니다. 그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으로 머리와 지체로 유기적 관계로 행복한 삶의 법칙 속에서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구약적 제사장이 중간에 끼어들게 했습니다. 그래서사제가 중보자 역할을 다시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시작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계없이 전통을 다시 고수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개혁자가 바른 이야기를 했는데도 오늘날 목사가 물려받는 이유가 목사의 삼직입니다.오직 성경의 순수함을 제사장이 재해석하여 줍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의 머리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삼게 한 사람들에게 거룩이란 단어로 갈라놓는 일에 능숙하게 되었습니다.그리하여 오직 다음에 제사장이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그리스도 사이에 오직 믿음 사이에, 오직 은혜 사이에, 오직 영광 사이에 제사장이 만든 제사법칙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의식을 만들었습니다.어떤 한심한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라면과 같다. 라면만 물에 넣고 끓이면 아무 맛이 나지 않기에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각종 수프를 넣으므로 라면의 맛에 특성이 있고 맛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은 뱀 중의 독사로 생각했습니다.오늘 현대의 혼란이 바로 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군더더기는 시날산 외투 한 벌처럼 명품적 요소에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온갖 사상이 하나님의 순수함에 흙탕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순수함, 즉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 시키는 이런 사람들이 목사일 수 있는 것입니다.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헤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사장으로서 목사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또 하나의 논설이나 학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통하는 생명의 역사는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지금 제사장으로서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유치하고 어설픈 그림들이 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해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입니다.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아닌 신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성공의 우상을 수없이 만들고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비전성공, 목적달성, 꿈, 형태, 공력, 연민, 인간적 사랑, 수없는 환상적 형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매매하고 있습니다.망령되이 일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복적인 도구로 사용합니다. 복 주는 이름으로 염불 외우듯 기도라는 이름으로 뇌까리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정한 날을 위해 성전으로 둔갑하여, 예수께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하나님은 영이시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그뿐 아니라 제사장이 된 목사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했는데 바벨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으로 쪼개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비겨서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끊임없는 프로그램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고 했는데 조직과 자신의 철두철미한 계획으로 자기의 목적 달성에 정력을 쏟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정하게 되고 하체가 드러나는 비참한 죽음임을 말했습니다(출 20:23~26).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68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알고 있는 것이나 아는 척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에서 온 것인지 네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가 예수쟁이라면 양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너는 네 속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치매나 변비 환자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눈이 밝아지기 위함인지,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너 자신은 알고 있지 않으냐? 라는 것입니다.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 목사가 제사장인 척하고 있지 않으냐? 너는 네가 치매인지 변비인지 자기증상에서 알고 있지 않으냐?지금 우리의 유창한 변론 속에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느냐? 정말 양심적으로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입니다. 왜냐하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내 것이 아니어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우리의 자유이면서 수월함입니다. 생명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즉각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가진 특성이 보내신 이의 것이기에 상대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상황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명입니다. 사명은 자아의식이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입니다.지금까지 꿈을 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유 없는 극단적임을 말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결국, 우리가 수다스럽게 말하고 밤새워 써놓은 글들의 목적은 자기영광이라는 것입니다.성경공부를 시키고 은혜로운 설교라고 해도 상담하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하는 모두가 나 잘난 것에 대한 변증입니다. 그런 것들 모두가 우리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겸손하게 “내 생각입니다”라는 말 자체도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만일 진정한 주님과의 관계라면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변화일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형편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지금처럼 핸드폰을 하고 문자를 보내겠습니까?지금까지 행한 일은 자기가 빠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참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됨에 대한 결과가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불의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자체에서 믿음의 진정한 의미가 불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의 증거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학문 자체가 남의 이야기와 자기의 변호이며, 합리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곧 생명적인 삶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확신을 주는데 곧 실천법칙입니다.사랑이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입니다.희락이란 자기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화평이란 자기의 손실에 무관심한 것입니다.인내란 자기 곤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자비란 자기권리를 눈감아 두는 것입니다.양선이란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것입니다.충성이란 자기를 억제하는 것입니다.온유란 자기 장점을 잊는 것입니다. 절제란 자기욕구를 억제하는 것입니다.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 희락, 화평이고, 사람 관계에서는 인내, 자비, 양선입니다. 나 자신에서는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가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입니다.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45
    우선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분이 조선일보에 소개된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분의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답변이 “농촌 목회요? 그냥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거죠.”그 냥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냥이란 말을 잘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이 목회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간암 수술을 세 번째 했습니다. 그다음 검사에 왜 자꾸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사와 면담 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물어보았습니다. 10여 년이 넘도록 만난 담당 의사의 딱 한 마디, “함께 사는 겁니다”라는 귀중한 답변을 들었습니다.만일 나에게 목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저는 그냥 대충 사는 사람입니다.이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영화 상영하고,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미생물을 이용한 농업 기술을 강연하고, 수목 조성과 들꽃 축제를 열고, 아이들과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등하교 버스 운전까지 한다는 것입니다.이런 일을 하는 분은 보령시 천북면 들꽃마당시온교회 김영진 목사입니다. 들꽃마당시온교회는 들꽃과 나무천지인 평화로운 농촌교회의 담임인 김영진 목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쁜 목사입니다.주민들이 내 집처럼 교회에 드나들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끊어다가 스크린을 만들고 빔프로젝트를 사서 영화 상영을 하여 노인부터 동네 꼬마까지 예배당 ‘마을극장’으로 모여들게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네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과 추수한 것을 모아 감사하고, 고기도 굽고, 전도 부치고, 두부도 하고, 송편도 함께 하여 교회마당의 들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힘을 합해 들꽃 축제도 열어 보령시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재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다른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습니다.“농촌목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도시 교회처럼 생각해서 혼자 열심 내고 그러면 3년을 못 넘기고 좌절과 실망, 낙담해 떠나게 될 것입니다.“농촌에 오면 농촌의 속도로 사는 게 좋습니다.”농촌교회는 주민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낙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목회는 의욕이 아닙니다. 내가 처해진 환경에 흐름을 같이 타야 합니다.종교적 열심을 말할 때에이슬람교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슬람교의 기본원리는 6신(信) 5행(行)이 있습니다. 즉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행합니다.6신이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선지자이다, 꾸란 만이 성전이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 심판을 믿는다.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모방해 창시된 것입니다.5행이란 신앙고백입니다(항상 중얼거리면서 신앙을 고백한다). 기도입니다(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다). 금식, 구제, 성지순례입니다.이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 종교의 하나일 뿐입니다. 알라라는 신에 맹종할 뿐 그 열심히 결국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일머니라는 검은 물결의 세계에 깊이 잠입하고 있음은 무서운 사건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신앙생활이란 열심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이 이방 종교와 이단들의 형태로 바뀌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목회도 대부분이 열심히 했다고 고백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힘을 다했다고 말하면서 목회 성공을 회상합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결과가 현재의 성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이 무슨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인가 말입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출처가 자기 자존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말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24 앞부분에서 빠진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의 통로인 것입니다. 나의 주변 모두에게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늘 하나님에 관하여 배워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이 하나님의 통일된 현실인 것입니다.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사도행전 17장 26~28절에서는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신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에 있듯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습니다.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이론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 모든 것이 거룩한 흐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임재는 어디서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2장 1절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드리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예배 그리고 제물이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무엇을 해주시는가? 자연, 친구, 부모, 음악, 침묵, 영화, 성경, 직업, 허드렛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영적인 삶이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한 부분에서 요한복음 18장 33~38절에 나타내셨습니다.33절에서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 사람의 왕이요?(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도 저들이 한 것입니다.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요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37절에서 빌라도는 그러면 당신이 왕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예수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38절에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유대인에게 말했으며 그는 진리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임에 당연한 일인데 세상에 속한 삶을 갈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우리는 찬송가에서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감동 있게 부릅니다. 나는 495장(구)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나님 나라는 세속적 권리를 지닌 물질적, 정치적 왕이란 빌라도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나라는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으며 우리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 이유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마음만이 느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만의 꿈의 나라가 아닙니다. 빌라도가 생각하는 나라 개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평안해질 수 없고 계속적인 인간적 투쟁을 일삼는 세상적 지향에 매여 있으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 나라는 절대 체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진리란 물질세계를 넘어서 곧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의 눈을 통해서 참여하는 영적 현실입니다.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67
    변비는 몸의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채,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함에 매여 매사에 부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 병은 자기 독선에 매여진 자칭 보수 정통을 주장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 이해나 관용이나 소통은 불가능합니다.“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 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8).학문이 나 하나를 진실하게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결국 예수님을 발견 후 배설물이 되어야 함과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값비싼 옥합의 향유가 중요했던 것이 인간의 욕망과 조건의 도구였기에 예수를 만난 후 거추장스럽고 무가치하기 때문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적인 목사들은 이 사건을 얼마나 미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의지와는 정말 다른 이야기를 강조합니다.왜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가?왜 율법을 중요시 여기는가?그 이유는 가장 쉬운 구구단 공식과 같아서 예수를 만났을 때 알게 된 기초가 된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꽉 막힌 사람들 때문에 생명의식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라”라는 말 그 자체입니다.학문의 종결은 그리고 나의 성공적 삶의 종점은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애타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나의 종말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30여 년이란 것은 결국 우리 구속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 자의가 아니라 부르시고 선택하신 그분의 계획이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귀중한 사실이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 자체인 본성적인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동참할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함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학문으로서가 아니고 설명된 조직이나 구조가 아닙니다.신앙의 본질이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가 오늘 고질병으로 죽어가는 세계교회와 목회자의 긴박한 처방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 너는 보수신학도 안했는데, 너는 성경공부도 안했는데, 너는 족보도 시원치 않는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 무식한 사람아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까부느냐, 정통보수신학도 하지 않았는데 학문의 가치로 그리고 출신성분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가 지금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도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바로 안다면 그리고 설명할 수 있다면 교회의 정의를 학문적으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개혁주의생명신학적 기도도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고 있다면 분명히 이방 종교적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이란 해석이 우리의 신앙을 무속종교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는 이미 아버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아들의 첫 외침입니다.“아~빠”라는 말 한마디 속에 진정한 소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아빠! 엄마! 는 배운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에서 나오는 반응의 표현입니다.그래서 오직 성경이란 성경을 설명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성경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소통이지 욕구적 반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5
  • 목회는 쉬운 것이다·66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배우고 느끼고 연구하고 아는 것에 능숙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아는 것을 자신 있게 토해냅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나의 이야기에 동의하기를 바랍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네 이야기를 하라고 목사로, 교수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했습니다.“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요, 의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동일합니다.기도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그 의문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아느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곧 하나님이기에 그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지 너희 자신이 설명하고 증명할 자료를 만들어 이분이 이런 분이라고 낳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요한복음 7장 15절에 깜짝 놀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0여 년이 넘도록 잘 알 건데 이 사람은 배운 일도 없고 율법을 알지도 못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유식하게 우리를 가르치고 말하느냐라는 것입니다.유대인은 찔림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면 우리는 그런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놀라지도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저 사람이 아무리 그렇듯 한 말을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의 이야기로 무시할 것입니다.이때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 속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한편, 생각해 보면 유대인이라고 아직 주님의 초림도 믿지 않는 율법주의자들이 세계 학문에서 신학을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이상히 여길 정도로의 관심인 동시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교만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예수의 전문인이라고 하는 예수쟁이들은 사회변화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아픔에 대한 것조차도 무식한 울안에 갇힌 독선적 삶이 바른 신앙이라고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간이 굳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요즘 무더울 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선풍기와 에어컨을 켜고 문을 꽉 닫아 산소의 소멸로 죽었다는 사건입니다.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문 닫고 믿는 신앙입니다. 오직 정통이란 하나님중심이라는 고집이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숨 막혀가는 현장에 예수님이 우리 호흡의 통로를 만드신 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인 것입니다.치료될 수 없는 숨 막히는 신음소리가 아주 고막을 망가뜨릴 정도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이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속에서 두 가지의 불치병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치매와 변비입니다치매는 과거의 성공이나 공력과 사건은 기억하나 현재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과거의 사건에 매여 사는 것이라고 하면 변비는 영양소를 다 흡수하고 남은 찌꺼기를 배설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배설의 순환작용이 막힌 증상입니다.치매가 왜 무서운 병인가 하면 과거의 공력을 말하는데 능숙해지면 현재는 무감각하여 주위 환경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인데 신학적 전통과 관습에 묶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 경험과 전통에 묶여 먹고사는 도구가 되어 있는 치료 불가능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세상의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이 모든 환경을 더럽히는 주인공입니다.그래서 출애굽기 20장 26절에서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12
  • 목회는 쉬운 것이다·65
    그래서 명함이 이력서가 되어 명분 있는 메이커를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류사회 속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돼지가 양몰이 개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유대인은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양심이 말살되어졌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여 배운 적이 없는 저 사람은 배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너는 무식한 사람이야, 정규 신학을 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있었다면 깜짝 놀랄 사건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지금 우리는 열정적으로 목사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란 표어를 간판으로 내세운 자신이 백마 탄 왕자의 기다림이 결국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이상향인 꿈의 실현의 도래가 과연 행복한 것인가.그러기 위해 진력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하나 자신이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배운 적이 없는 예수님의 답변이 이해가 되는 것인가.“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노력으로 쌓아놓은 돌무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우리를 보내신 분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지금 내가 잘난 체하고 주문 외우듯 하는 자신의 것들이 행복할 수 있는가?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듯 하나님의 종말론적 세상을 멸망시키고 양과 염소를 구별하려고 날카로운 검을 가지고 나타나실 것이라고 공포의식을 고조시키는 목사들의 절대적인 그 말대로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지금 당하는 고통을 사실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금새라도 해결될 것 같은 해결사가 온다고 한들 행복해질 수가 있는가.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로 위로받으려고 하는 힘센 빽을 가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들이 맞는 것인가?중들이 찾는 말대로 ‘나미아불타불관세음보살’이라는 용어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평안을 주는 것인가 그런 일에 능숙한 예수쟁이들이 말끝마다 우리 하나님을 부른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결국, 하나님이 인류가 원하는 그런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인가 말입니다.돼지가 샴푸와 린스를 뿌려서 샤워했다고 깨끗해지는 것인가.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 속에 왜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분명히 헌금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걷어서 기업을 경영하는 장사꾼에게 투자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방송국에 고발한 일을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라고 그냥 두어야 하는가?최소한 백일하에 드러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일이 기독교를 폄하하는 일인가. 나를 구하려고 오는 백마 탄 왕자가 오면 백설공주의 한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인가?그래서 목이 터지라고 통성기도하고 이름 붙여서 두 손들어 목청을 돋우어 악을 써야 하는 제 꼴도 엇갈린 몰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댄다고 되는 것인가.“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진정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열심이라는 뱀이 내어놓은 조건에 휘말림이란 이유가 마약 중독자와 같은 혈안이 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허망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6-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