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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64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사람은 행복한가?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한 절대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가?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꿈을 이루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인가?사람들의 동경하는 백설공주는 과연 행복한가?영국의 황태자의 아내로 간 여자들은 행복했을까?돈 많은 집 아들과의 만남은 행복한 것인가?디트리히 본훼퍼의 말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져 39세의 삶을 마감한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악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했답니다.종교가 아닌 이유가 오늘 우리들의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백설공주의 행복이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백설공주가 만난 백마 탄 왕자를 동경하는 수없는 허탄한 꿈이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반복하는 헛수고의 일일 수 있습니다.기독교는 분명히 세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소위 세상은 백설공주의 콤플렉스, 로또의 콤플렉스, 대박의 콤플렉스와 같이 기독교는 하나님 콤플렉스에 쫓기고 있습니다. 백마 탄 왕자만 오면 꿈을 실현한다는 기복적 신앙이 기독교의 본질을 망가뜨리게 하고 있습니다.그는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욕구를 만족하게 하는 우상적 가치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생생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는 그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한복음 7장 15절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가.지금 우리는 이런 질문을 능숙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배워서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학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어디에서 얼마만큼 했느냐에 기준을 두다 보니까 계속 두터운 시날산 외투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이 끼어 입는데 능숙해 있습니다.명품 핸드백인가를 아는 방법은 비 올 때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짜 명품 가방은 비가 오면 가슴에 껴안고 손과 발로 비를 맞지 않게 하지만, 짝퉁은 머리 위에 올려 비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질문처럼 배운 사람은 배운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백일하에 드러내는데 능숙합니다. “어떻게 배운 적이 없는데….” 못 배운 사람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는가에서 신학교 4년에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서구문명이 유대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M. Div.라는 3년 과정을 또 만들어 놓아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에게 복잡한 학문 속에 깊이 파묻었던 것입니다.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바로 말하려면 정통 학문을 해야 한다”라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받은 것으로 교인을 내 눈 밑에 두기 위해 강단을 높이고 그들을 무시하는 극단적 용어가 설교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밟고 무시하고 있는가 이것이 목회자가 제사장 된 권위로 생각하게 되었고 주일 설교 때마다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학문성에 대한 과시가 이제 어떻게 조절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원문번역, 영문성경 등 유명하다고 하는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의 질문이었습니다.“네까짓 것들이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느냐?”“네가 배운 학문성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그래서 목사들은 무엇을 하는가?이 질문에 대처하기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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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6-20
  • 목회는 쉬운 것이다·63
    칼빈을 보수란 착각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는 칼빈주의에서 개혁주의의 5대 표제로 생명의 가치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어느 분이 ‘칼빈의 제네바 학살은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란 논문에서, 칼빈 이후 유명한 정치 철학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홉스’와 ‘밀턴’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홉스는 군주 혹은 국가의 통치를 지지했고, 밀턴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는데 이 둘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빈의 사상을 근거로 했다는 것입니다.칼빈의 가르침은 한쪽에 치우치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에서도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 선택, 제한적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은혜가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한 것입니다.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 줄기의 핵심을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순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삶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칼빈의 사상을 일부분에 매달려 있기에 개혁주의생명신학 운동이 필요하게 한 것입니다.결국, 신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신학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것입니다.목회자가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인가? 안다는 것의 출처가 어디인가? 아는 것을 전하면 목사가 아닙니다. 목회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가?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목회할 수 있는가? 내가 목회하기 위하여 학문을 알아야 하는가? 이런 사람이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학문의 무용성이 아니라 학문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문이 학문으로가 아니라 학문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성경은 큰 틀에서 구약의 율법이 결국 몽학선생으로써의 역할에 중요성을 말했듯이 바울의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정죄에서 은혜로서의 유연성을 말했듯이 우리가 사람들이 주장하고 말하고, 글로 써 놓은 역사 속에 순간순간 이어온 사람들의 논리가 합해져 결국 ‘성경이 답이다’라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 보시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을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9절에서 “누구든지 너희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10절에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12절에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3절 이하에서 자기 자신이 조상의 유전대로 유대교를 지나치도록 밀어 학문적 가문에서 자란 자신의 확실한 학문성을 말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전통과 습관과 많은 관계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소명의 확실성의 특징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사명은 논리가 아닙니다. 사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 실천은 연구하고 의논해서가 아닙니다. 바른 신앙이 곧 바른 교회입니다. 바른 교회는 바른 목회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문한다는 목회자는 위선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간단한 답으로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인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요한복음 7장 15절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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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 목회는 쉬운 것이다·62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 시의 질서를 확립하고 칼빈의 생각하는 도덕을 향상시키고자, 칼빈의 신앙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반대자를 처형했다고 합니다.칼빈이 말한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단도 아니었다. 또 교회를 거역한 사람들도 아닙니다.칼빈의 이런 면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오늘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라는 두터운 벽 안에 갇혀진 역반응이 결국 기업형 교회로 신나는 프로그램이 춤추며 날뛰는 사단이 밝아지고, 같아지고, 선악을 알게 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지금도 칼빈주의요, 개혁주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은 그와 비례하는 신흥종교 같은 기업형 교회들만 키워내는 불행한 일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문 닫아 걸고 정통보수라는 이론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소위 칼빈주의의 진실한 의미도 모르고 금욕이나 극단주의는 주님이 부탁한 생명적 가치를 계속 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더위에 못 이겨 문 닫은 채 에어컨을 틀고 자던 사람이 그 이튿날에 차디찬 시체로 변했다는 현실적, 사회적 사건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나 머지않은 날 보수라는 고집 아래 숨을 거두는 차디찬 사람으로의 나일 수 있습니다.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취한 사건이 그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깨닫고 돌아온 고백은 우리 모두가 시편 51편을 수없이 읽고 묵상한 터입니다.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게 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과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이름 없는 병신 같은 자식이 어디 나에게 이따위 말을 하느냐? 라고 당장 능지처참시킬 순간입니다. 네 따위 놈이 별 볼일도 없는 놈이….기업형에서 성공한 제왕에게 그의 입지와 명분을 건드리면 금세 저주를 해버릴 것이고 출교시킬 사람이 목사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설교 자체가 신자들을 기죽게 만드는 말만 일삼는다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큰소리치는 자에게 순간적으로 추락해 버릴 사건을 용납할 수 있는가?칼빈이 제네바 사건이 전체로만 보아 그 일을 감행하라고 제사장이라는 권위 때문에 온몸에 철갑으로 씌워진 위선과 고통스러움을 자백할 수 있는 개혁주의 예수 생명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칼빈은 제네바 사건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만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16세기 제네바를 통치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어낸 유언비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해 징계를 받았거나 권징을 받았던 사람들이 악의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퍼뜨렸다고 합니다.어찌하던 우리는 칼빈의 그런 점에만 묶여 있는 것이 한국적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칼빈주의가 오늘까지 우리의 문제점이 근시안적인 눈에 단면으로 보이는 것만 매달려 있음을 곧 하나님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점입니다.저는 복잡한 자료를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건 중심에서 나타난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칼빈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권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보수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보수란 성경중심이라고 하는 오직 성경이나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이라는 것이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대로인가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보수라는 사람들의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주권이나, 작전이나, 예정이나, 창조나 섭리가,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것이 아님을 다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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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5-31
  • 목회는 쉬운 것이다·61
    푸드 목사는 “너희 행함을 설교하라 너의 의무를 설교하지 말라.”폴 틸리히는 “목사는 들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교회에서 인간의 우두머리로 높아져 있는 목사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정말!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당회장이란 이름으로 호화로운 환경여건이 우선되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명품에 빠져있음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옛말대로 촉새가 황새 뒤쫓다가 가랑이 찢어져 죽는다는 말이 신학교 출신들이 이 허망한 꿈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는 성공주의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여자 목사 안수 문제도 여성을 비하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지체로서의 교회라고 한다면 목사가 제사장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은사적 직임일 때는 문제될 일이 아닙니다.여성 목사 안수에 대한 것을 논하는 자체가 얼마나 믿음을 벗어난 사실을 노출하는 무식이라는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백석총회가 모교단측과의 통합에도 큰 문제는 그 총회가 제사장 중심제도라는 망측스러운 이단적 용어가 결국 목사가 제왕적 자리를 고수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축복권을 가졌다 하여 하나님을 대행하는 행위는 무서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연초에 높은 산을 찾아 그 지역을 축복하고 일부는 교회에서 이삭이 장자권 선포를 위한 별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별미헌금까지 거두었다는 것입니다.모 유명한 기도원에서 원장이 금요일 별미헌금을 거두어 집에 돌아갈 차비까지 거두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매여있는 자들이 목사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지 않고 여성을 비하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 올무가 풀리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너무 좋은 마지막 때를 만났습니다.그 이유는 언제나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은 새싹이 자라서 썩은 것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며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옛날 위생시설이 없을 때 생기는 종기(꼬무락지)가 온몸에 생겨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수술기구도 없을 때 긁어내면 오염되어 더욱 곪았습니다. 이 곪음의 종말은 어디에 부딪히게 되어 엉덩이에 생긴 종기가 터져 온몸에 고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고름이 빠진 곳이 굳은살로 남아 흉터가 됩니다. 그 일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만 있는 자연반응이었습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반응일 수 있습니다.사실상 어떻게 치료해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 방안을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대로 시각으로 한계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원래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그런 것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잡아 놓은 것처럼 처참한 환경을 면할 수 없는 사냥꾼의 덫에 걸린 산양 같이 먹으려는 맹수 앞에서 진리를 운운하는 그 가소로움이 도대체 네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 진리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이유나 설명이나 논리가 그리고 고명한 학자의 견해를 대언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보내신 자의 말을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잘못된 기구나 조직을 확 바꾸려고 합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내고 파서 제쳐버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있었던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제네바를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는 열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가 조찬선 목사의 「기독교 죄악사」 하권 89쪽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제네바 시의회에서 목사로 추대받아 목사로 활약하면서 성경해석자로서 최후의 판결권을 독점한 왕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교회의 규율을 엄격히 하기 위하여 수많은 신도를 투옥, 추방, 사형도 서슴지 않았으며, 천주교의 종교재판을 보고 자라온 그는 특히 종교적 범죄를 잔인하게 처벌했다. 한 예로, 춤췄다고 투옥, 설교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을 잘라 처형했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 그가 4년 동안 76명을 추방하거나 투옥하고, 58명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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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5-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60
    그리스도의 신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분일 뿐 섬기는 우상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의 속죄주가 되시기 위하여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그래서 그는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 동고동락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요 1:4, 갈 4:4, 히 2:14~18).우리의 찌꺼기를 정리하시기 위해 율법 아래 나셔서(갈 4:4)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아래 복종하시고 우리가 불법함에 대한 모든 것을 복종하여 철저하고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수난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 지냄으로 우리의 죄로 인하여 감당하여야 할 모든 것을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소망과 확신을 주심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사죄의 은총을 구하시고(요일 2:2, 히 7:24~25), 우리를 거룩하게 되는 일에 효력 있게 하셨으며 교회를 보증하시며 성령과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십니다.그리스도가 가지신 직임인 선지자 직과 제사장직과 왕 직에 대하여서 목사들에게 준 직임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여기에서부터 목사의 문제점의 시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무서운 공해가 목사를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오류일 수 있습니다.목사가 제사장 문화인 신당개념에서 지성소에 제물과 이름표를 가지고 우상으로 만들어 가두어 놓은 예수 신 앞에 중보하는 책임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이방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이방 종교가 기독교와 뒤섞여 이렇게 기독교 목사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한국 기독교에서 신흥종교라고 하여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갖가지 종파가 이 일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단으로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 헤아릴 수 없는 종류들입니다.그들의 종말은 이권과 재산싸움으로 신비롭게 등장한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3직에 매였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기업적이고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하나님 나라라고 위장하여 공동체적 미혹된 위선으로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기독교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목사란 무엇인가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업적 교회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교회가 신당의 탈을 벗지 않으면 계속 그리고 끊임없이 목사직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방 종교의 신도로 전락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목사란 말이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유진 피터스는 50년 목회한 회고록에서 “목사는 기능적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 애정어린 말이었다. 목사는 사람들 사이나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공동체 안에 세워진 사람이고 목사의 할 일은 현장이 중심이며 언제나 인격적이고 쉬지 않는 기도가 그 일이다”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각지체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듯 성도들은 은사를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 상호보완하며 협력하는 데 쓰기 위한 기능적인 직임이라는 점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전체가 머리 된 그리스도로서 지체의 자연스러움의 표현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목사는 제왕이 아니다.목사는 사제가 아니다.제왕주의 사제주의를 버리라.성경이 말하는 목사는 섬김의 일군이십니다. 사심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않습니다. 제왕주의 사제주의를 내려놓을 수 있는 목회는첫째, 가정교회를 회복시키는 것이요, 둘째, 가정교회보다 성경적 대안이 나오면 가정교회를 버리는 것이요, 셋째, 성경적인 목회는 가정교회라고 하고 그보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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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5-10
  • 목회는 쉬운 것이다·59
    하나님의 일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구분해놓고 전문화하든지 부업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보다 무서운 일은 각 교회에다 대리점, 체인점을 내고 교안과 교재를 팔아먹고 재벌이 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이라고 자랑하고 간증하니 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개념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그러면 우리가 하려는 목회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그분이 구속자로서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리스도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구별하신 선지자로 제사장과 왕의 직임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사하시고 가르치시고 권위를 가지신 무소 부재하시고 유무 상통하시고 모든 것의 창조자시라는 것입니다.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성을 가지시고 비하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속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인도되매…”(단 7:13).하나님의 아들로서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우리가 믿는 그분은 우리가 준비할 이유가 없음은 그분이 우리의 생활 속에 무소 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후에 더욱더 깊은 의미가 있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라는 칭호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소유자와 통치자가 되신 것입니다.로마서 1장 7절이나 에베소서 1장 1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신 말씀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우리가 믿는 분은 우리의 구세주로서 예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인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님이십니다.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그분이시며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름 부음 받으신 그분이시며 인성을 가지셨으나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삼위 중의 제 2위이시며 성령의 특별공작으로 잉태하여 나셨으며 하나님의 후사요 대표자시며 교회의 소유자와 통치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구세주이십니다. 그가 지신 신성과 인성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인생의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경건의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죄인 된 인생들의 대속자가 되고 수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시기 위하여서는 인성을 입으셔야 했습니다다만,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서는 죄 없으신 사람이셨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또한 무한한 가치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서나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나 절대적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으로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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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4-25
  • 목회는 쉬운 것이다·58
    아무렇게 생긴 막돼먹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조차 녹는 이해되는 죄책감을 벗어난 상태 누구의 가르침이나 소리지름이 없는 경각심이나 두려움도 없는 상태 누구의 날카로운 비판도 없는 그런 상태가 구속 받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거룩일 것 같습니다. 현대교회의 형태로써는 가장행렬 같은 위선적 경건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오늘 교회를 성전으로 둔갑하여 경계를 그어 구별해 놓은 인테리어가 아닐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위선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높은 문턱을 만들어 놓고도 사람을 부르는 전도라는 위선적 슬로건과 표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을 겁도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라고 소리 지르는 그런 사람들이 거룩의 본질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나 같은 죄인’이 진정한 자유를 얻음에 대한 삶이 진정한 거룩일 것입니다. 성경구절을 드려대며 연대별로 신학자라는 사람의 이야기나 원문이나 성경원본의 기록을 나열하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장입니다.현장은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룩히 지키라는 대로 내가 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노동 후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리적 건강을 위한 몸의 법칙입니다. 천하고 귀하고 어른과 아이들, 도우미, 운전사, 청소부, 고집불통, 깡패, 배고픈 사람, 장애우, 다문화 가정 모두가 칸막이 없는 곳에서 앉든 서든 간에 명품 옷이든 시장통에서 싸구려 옷을 입었든 뚱보든 말라깽이든 관계없이 주님이 계심에 대한 소통이요, 관계입니다.헤이글러(Dr.Haegler) 박사의 연구에서 “사람이 낮에 일하면서 소모된 산소의 분량을 밤에 쉬는 것만으로는 다 회복하지 못하므로 엿새 동안에 부족하였던 산소를 하루 쉼으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합니다.짐승을 시험해 본 결과도 이레 중 하루를 쉬게 하고 엿새 동안 일을 시킨 결과 더욱 능률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데서 나타나는 무서운 결과는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들까지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인가?다시 하나님을 신으로 만든 다른 신을 시각적 대상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구술 외우듯 부르짖는 망령됨이 신으로 만든 다른 신을 만나는 날로 설명된 현대교회는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다른 신을 만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도구가 되고 자동차가 도구가 되고 가족 전체가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아침 일찍부터 가정이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다른 신의 존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존재인가최소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신 복되게 하신 속에서의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격식이나 의식에 묶여진 꽉 째인 옷이나 신발을 신은 불안함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버킹검의 가족은 아니어야 합니다. 재벌 집의 며느리는 아니어야 합니다. 주일이란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후, 파김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명절날 가족 방문이 싸움판이나 허리가 부러지는 후유증은 없어야 합니다.목회가 기업이 되면, 재벌 주는 호화롭고 나머지는 스트레스입니다. 최소한 교회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가 기업에서 해방하면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나 가방끈이 길든 짧든 간에 유무상통한 곳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올 것이며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높은 교회 문턱이 바울선교회의 초기 시작한 전주 안디옥 깡통교회처럼 모난 사람들이 등 붙이고 살 수 있어서 그 사랑이 세계까지 번져갈 수 있을 수 있습니다.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구속받은 자들이 즐겁게 살아갈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부드러운 모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4-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7
    말보다 나의 현장이 더 중요하듯, 나의 삶이 있다면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말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이 결국 나의 삶에 불만을 낳게 될 것입니다. 망령되이 말하지 않음의 복을 말한 것입니다. 말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책임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안식일에 대하여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경건하게 침묵이 흐르는 제사개념인가? 한점의 먼지 같은 죄도 없이 정결한 의식인가? 주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신으로 만들고 우상으로 섬기는 대상을 만들어놓고 반복된 신의 이름을 노래로 기도로 바라봄의 존재로 만나는 날로 정한 것인가? 결국, 우상을 섬기는 자가 신을 만나 절하고, 경배하여 자신들의 만사형통하고 만 가지 복을 받을 수 있는 날인가? 그래서 정결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경건하게 앞에 찬란한 조명과 우리를 내려다보는 위엄 있는 교주 같은 분이 금세 지옥에 갈 것 같은 서슬이 시퍼런 재판장의 판결사항을 듣고 주섬주섬 모은 갖가지 헌금이란 명목으로 제물을 드려야 하는 날이 우리가 지켜야 할 주일이라고 하는 안식일인가?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적 자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없는 신을 신으로 섬기고, 신을 모양으로 만들어 우상이 되고, 그 모양의 이름을 지어 갖가지 섬기는 대상을 만나는 날로 변질하였다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장 8~11절까지 보시면,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는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로 일주일의 첫날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20:19, 행 20:7, 고전 16:2)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안식일이 언제냐? 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 을 말하는 것입니다.신을 만나려고 가는 날이냐? 그날 신을 만나는 것이냐? 다시 말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냐? 입니다. 주일에만 하나님을 면회할 수 있는 날이냐? 이 질문은 아주 평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그날은 안식한다(멈추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다(출20:10, 23:12, 신 25:13~14). 어떤 짐도 옮기거나 짐승 위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느 13:15, 렘 17:21~22). 먹는 음식을 하루 전에 준비해야 한다. 안식일에 먹을 것은 그 전날 만나를 모아 둔다(출 16:5, 23~30).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사망이다(출 31:14~15).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란 사실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흥분하는 마음을 진정하고 주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9절을 보시면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10절에서는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절에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였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와 안식일(安息日)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결국 “거룩히 지킬 것”이요,“엿새 동안 힘써 일할 것”이요,“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요,“복되게 한 날”입니다.거룩히 지킴에 대한 구차한 신학적 설명보다는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냥 불의와 부정에서 떠난 상태로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것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히 얽혀진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나눌 이유나 생각이 없는 상태,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의 상태로 모이기를 힘쓰고 나누기를 힘쓰고 기도에 전념하는 구별된 삶입니다.거룩이란 의미가 하나님과 동떨어진 이방 신을 섬기는 그런 경건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적인 것도 아닙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3-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56
    동남 아시아의 나라들은 집집마다 우상을 놓고 붉은 불을 켜놓고 그 신에 매달리는 것처럼 우상으로 만든 하나님을 섬기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교회당을 신당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하기에 시설비로부터 운영비까지 감당할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아들을 관리하고 돈으로 치부하는 교주가 되고 헤아릴 수 없는 프로그램의 사슬로 꼭꼭 묶는 일이 성공적 목회라고 합니다. 신당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신에 잡힌 사람이 신 굿으로 악령의 힘을 돋워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예수님처럼은 이런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디나 하늘나라적 삶으로 자유롭게 됩니다.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창조주로 무소 부재하신 우주공간 하나님의 창조 하심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의미를 상대적인 일반 종교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는 우리와 함께하심에 귀중성이 믿음이란 원리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란 집합체인 교회 개념에 신당개념에서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선 교회당 개념인 회당에서 믿는 자가 다 함께 모이는 마가의 다락방의 형태가 사람들이 휘장을 치고 제단을 만들고 한 곳으로 집중하도록 조명을 비추고 교주들처럼 가운에 부적을 붙이고 유유히 등장하여 거드름을 피우는 절대자의 무대가 목사가 만든 것들입니다.번쩍이는 강대상, 성찬상, 십자가상, 큰 성경을 펴놓음, 촛불, 값비싼 꽃으로 장식하고 파이프 오르간과 피아노와 각종 장식들과 도구들이 교주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우상이 된 것입니다.그런 도구를 성구라고 하는 자체가 타락한 로마가톨릭이나 동방교가 이미 심판되어진 것을 개혁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수라는 신학으로 문 닫고 믿는 귀신의 제단을 우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망령되어 일컬음에 대하여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내세워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거짓 맹세입니다.‘망 령되이’라는 말은 들추는 것이나 치켜드는 것이나 위로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세’라는 주제로 그럴듯한 찬양이나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의 이름을 미사어구가 있는 대로 끄집어 내어 기도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된 모습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이나 구약의 용어들은 구속사역이 이루기 전 성막과 성전이라는 상황은 하나님과 우리와 하나 될 수 없는 객관적 상태였을 때의 용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라는 휘장에 의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요한복음 19장 30절 이후에서는 그 용어의 실체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그 사실 자체를 출애굽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신 최초의 복이었습니다. 너희가 만든 올무나 의식의 무용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과 열심을 다하는 찬양의 용어 자체의 의미를 알아야 했습니다.‘망령되이’란 거짓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감람산에서 종말에 관한 설교를 통해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마 24:24, 막 13:22).교회 역사를 보면 A. 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바로 전 전율할 만큼 혼란했던 여러 해 동안 이러한 인물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종교적 구원자이며 종말이 임박했음을 선포했던 때가 있었으며, 헬라 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모방하고 믿는 자들을 미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사상이 시대마다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마 7:15)인 그런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그럴듯한 용어들이 얼마 난 가증스러운 것인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명품같이 보이는 짝퉁인지,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용어들입니다. 사랑이란 말, 감사하는 말, 진심 어린 말, 교회 강단에서 쏟아지는 말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찬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말들,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 모두가 진심이었다면 그런 매끈하게 미끄러지듯 쏟아버리는 용어보다는 침묵의 삶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3-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5
    계단은 규격이나 조각으로 사람의 유식함을 자랑하는 증상으로 명예와 욕심과 욕망에 눈망울에 붉어진 사람들의 종말은 100퍼센트가 패가망신으로 종족을 감추게 되었습니다.목사나 정치인이나 어떤 사람이든 ‘죽지 않는다’라는 뱀이 내어놓은 제안에서 멈출 수 없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하향길은 결국 사망이었습니다. 정상은 필연적으로 내리막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상에서의 걷잡을 수 없음의 추락입니다.오늘 현재 우리 곁에 일어나는 목사님들의 법적 투쟁과 비판 비난은 자기도 조절할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일들입니다.목사의 특징이 여기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대형행사, 축제로 박수갈채를 받는다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종말의 자살 행위였습니다.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단체가 예수쟁이들이고, 그 주인공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회장으로부터 수많은 상임 회장의 모자를 쓰고 죽음의 길로 치달아 오르고 있습니다.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네 계명입니다.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이 계명의 해석을 이방 종교 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고통과 불만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개체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무섭고 진절머리나는 섬뜩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체 즉, 함께 계신 분이요.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친밀감에서 살면 정말 은혜로 주신 기적과 같은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우리는 벗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창세기 1장 27~28절에서 창조주가 창조하신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분으로 그들과의 언약준수를 통해 지속적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우쳐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시려는 사슬이 아니고 주안에서의 삶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다른 신에 대하여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방적 개념인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창조주를 기복적 신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보이는 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객관적인 대상의 신이 아니라 우리 속에 와계신 무소 부재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섬기는 대상이 아니요. 우리가 바라는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복 그 자체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신이 아닙니다. 내 속에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 자유 함을 주시는 절대적인 분입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되신 분입니다.우상에 대하여우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신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은 창조주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 앞에서 경건해야 하고 제물을 들여야 하고, 섬겨야 하고, 절해야 하는 그런 대상으로서의 모양입니다.지금 우리 교회는 우상 속에서 매여있습니다. 예배라는 용어로부터 헌신, 헌금, 충성, 봉사, 찬양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찬양을 올려 드리는 하나님과의 객관적, 즉 개체개념인 불신양적입니다.교회건물도, 강대 상을 제단으로 촛불을 켜고 십자가를 달고 가운을 입고, 모든 예식과 의식이 이방 신을 받아들인 로마교회의 무너진 그 틀을 지금도 붙들고 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솟구치게 하는 신의 음성을 느끼게 하는 이미 훼파된 것을 반복하여 경건이라는 찬물을 끼얹는 것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사제단의 권위와 신통력을 강화하여 돈을 뜯어내고 인간적 갈채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사단의 욕망의 표현이 성공이라고 합니다.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서 신음하게 했습니다. 신전에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로 자유를 말살시켰습니다. 경건이란 이방 신이 만들어 놓은 귀신이 통하는 짙은 향 냄새가 동방교회처럼 되어 있기에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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