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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3
    인간사에 나타난 모든 일들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나열도 우리 기준의 이야기입니다.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소명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소명하신 분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에 우리 자신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목 회자로 부름 받았다면 어쩔 수 없이 수단과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마치 유치원에서 배운 파란 불에만 건널 수 있다는 교통 방법을 잘 알기 때문에 빨간 불을 보고 건너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봉사라도 파란불을 기다립니다.예수님께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치원 아이들에게 손을 잡고 파란불이 켜졌을 때 건너가신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돌이키게 하신 것입니다.◦그의 무릎은 예수님 이름 앞에서 기본적 습관의 무릎을 꿇는 기초적 예의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임을 보이신 것입니다.◦세상 권세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자기포기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따지고 논설이 아니라 무조건 침묵과 포기일 때 사단의 불타는 욕망의 불을 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람이라면 그 일이 가장 큰 임무이기 때문입니다.◦정복은 복종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8장 34절부터 보시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했습니다.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사실 목회란 죽고 사는 것입니다. 목회가 기업이면 분명히 죽은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 목회, 세계 제일의 교회, 눈코 뜰 새 없이 팔려나가는 스타 부흥사, 그런들 무슨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꼿꼿하게 세운 목덜미 위의 머리가 온갖 세상을 꿰뚫어보는 신통력도 무익한 것이라면 아주 슬픈 일입니다.하나님 나라 법칙을 아십니까?예수님처럼 입니다.여호수아 1장 3절에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했습니다. 신발이 아니라 발바닥 맨발입니다. 노예는 신발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목회자에게는 편리함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원리가 현대 사회에 이토록 모든 얽혀진 결박에서 해방하는 원리가 될 줄은 너무 감사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이제 실제적 이야기들예수님의 생애와 목회자의 삶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 유사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우리의 문제는 한국적 유교 문화에서 물려받은 성의라든가 정성이라든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더 잘 해보려는 아주 좋게 보이는 그런 습관이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큰 장애의 요소라는 것을 알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예수님처럼이란 그런 인간적인 생활 습관에서 벗어나면 너무 쉽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하나님은 예수님을 사역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고, 생활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기도 생활을 하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세례를 받으셨고, 세상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교회 탄생을 위해 죽으셨습니다.예수님이 구속사역을 감당하시도록 하나님은 도우셨습니다.목회자의 삶 자체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행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목회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자로서의 삶의 총괄적인 지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델이 되시고 비유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하듯 목회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 되며 또한 그 결과 그들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가든지, 심방할 때든지, 설교할 때든지. 기도할 때, 방문할 때, 목회자가 어디를 가든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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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10-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42
    먼저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을 말한 YWAM(국제예수전도단)에서 온 열 방에 이르는 것은 즉 예수님처럼 승리인 포기라고 했습니다. “나의 권리를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맨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나타나신 하나님은 8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지난 이후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우리 백석대학교의 시초에 첫 개회예배 때 주신 본문이 출애굽기 3장 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설립자님의 기본 사상의 기초가 되신 것입니다. 언제나 맨발이라는 생각입니다.진리는 맨발입니다. 나의 편리를 위한 덧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맨발로 가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맨 발은 거추장스러운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70인 전도 때에도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전쟁에 패배한 뒤 예루살렘을 떠날 때 맨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보리를 향해 가실 때에도 맨발로 걸어가셨습니다. 당시 풍습에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노예라는 표시였습니다.모세에게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바로 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노예에겐 어떤 권리도 없고 신발도 신지 못했던 것을 보아왔습니다.내 백성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는 내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주인 되신 분이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민족애의 분노는 그의 맨발을 예고하신 것 같습니다.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내 일을 하고 있음은 무서운 위선입니다. 이 세상 삶 속에서 공익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절대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이 곧 청문회입니다.청문회는 곧 네 자신이 공익을 위한 일을 시작하기 전 내배만 채운 사람은 절대로 공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목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변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적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함은 분명히 온전해질 수 없는 첫 단추의 실수입니다.빌 립보서 2장 6절부터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이 행하신 매우 자연스러우신 삶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셨는데 우리의 구속 하심에 대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예수님이 보이신 것을 우리는 노예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셨던 모든 일은 인성을 가지셨던 삶으로 우리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함께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비하하신 인간성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순수하고 쉽고 단순한 일입니다. 그것이 노예적 삶의 자유함입니다.목회는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권리라도 용납되지 않는 노예로서의 자유함입니다.예수님이 포기하셨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하늘나라를 떠나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정상적인 환경에서 출생할 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습니다.◦사생아로 멸시받았습니다.◦육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을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중요성은 강조하셨습니다.◦공생애를 위해 홀어머니를 떠났습니다.◦결혼의 권리도 포기하셨습니다.◦사람으로서의 최소한 머리 둘 곳을 포기하셨습니다.◦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종교지도자들로부터 최대의 모욕에도 명예를 포기하셨습니다.◦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남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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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3
  • 목회는 쉬운 것이다·41
    한국 교육의 시작은 기독교 교육이었습니다. 목적의식은 단 하나 사람의 인격이나 인성이 우선이 아니라 영성이 우선이었습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처럼이란 먼저 영성이 될 때 지성이 하나님의 창조주의적 상황에서의 교육이었습니다.지금은 뒤바뀌어서 지성 위에 하나의 메뉴로 영성을 덧붙였습니다. 거꾸로 된 교육 방법이 거짓으로 위장된 위선이 교육의 방법이었습니다.오늘 일반적 학문의 명칭 위에 기독교를 붙인 것이 기독교 학문이 되었습니다. 예로 기독교 교육, 기독교 상담, 기독교 행정, 기독교 철학, 기독교 미술, 기독교 복지 이외에도 기독교만 붙였을 뿐 학문은 모두 일반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교육의 틀입니다.기독교적 목회가 목회 상담학, 목회 성장학, 목회 설교학, 목회 예배학, 목회 리더십, 목회 방법론 모두가 일반학문의 틀을 배우고 나온 사람들이 절대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논리나 조직이나 모든 체계가 세상적 학문에 맞게 짜여야 합니다. 어떻게 무소 부재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한 모든 삶의 방법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이론이 순간적으로 불규칙적으로 성령의 계시 하심을 즉 말씀하심의 영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나타난 일곱 교회의 첫 번째 조건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성령의 말씀을 듣는다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진 리를 알면 진리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로움이 곧 거짓이 아닌 나의 한계를 아는 매우 자연스러움입니다. 절대로 잘하겠다는 결심이 아니기에 하지 못함에 대한 솔직함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외치나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유로움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가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우리는 신명기 6장 5절부터 나온 말씀을 세마라고 하여 그 본문대로 가르침을 받았기에 달달 외우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2장에 나타난 6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즉, 여호수아의 세대가 다 죽은 후 후대들이 어떠했는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테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 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지금도 세마를 중심으로 해 훈련된 사람들은 유대교로 남아 예수님의 초림도 믿지 않는 집단적 사람들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고정관념에 묶인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을 해소하셨는데, 저곳도 이곳도 어떤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심이 곧 이때라는 사실을 말했는데도 사람들은 깊은 잠에 취해 거짓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현장으로 너무 쉽고 단순한 만남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세마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여호수아는 무엇을 했는가? 단 자기 주변도 알지 못하는 한 길만 달려갔는가? 후 세대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었는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순된 삶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말입니다.지금도 우리는 칭찬을 얻기 원합니다. 성과위주로 자기주의적 형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로는 과장된 소위 현대말로 ‘뻥’을 칩니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아무 감각 없으신 사실을 사람들이 부풀려 오르게 하는 습관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결국,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강단에서나 사람들에게나 그보다 불신자들에게 토해내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적 표현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알면 ‘뻥’ 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짐을 지고 분에 맞지 않는 내가 만들어놓은 그럴듯한 집에서 살면서 나는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성경을 주판알 튕기듯 그리고 요절을 거미줄 뽑아내듯 사람들이 천재라고 할 정도로 짝을 잘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짓 행위로 보신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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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9-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40
    세상 사람들은 욕하고 싸워도 뒤돌아서면 다 미움이 사라지는 이유는 술이란 매개체가 감정을 지워버리게 하는 것입니다.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술 취했다고 했는데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술기운이 빠진 세상 사람들의 말대로 악령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는 일입니다.왜 복음주의요, 개혁주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유대인같이 자기의 경계를 지키려고 하는가? 분명히 복음이 세 마가 된 이유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에 집착되어 있는 자일수록 내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분별력을 상실했을지 모릅니다.예수님처럼 하는 목회는 무엇인가?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하려고 애씀이 아니라 현장에 머무르는 것”이 진실일 수 있으며 그 일이 참된 목회요,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예수님이 언제나 내가 멈추어 있는 현장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사도행전 1장에 하늘로 오르시면서 가장 마지막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진실 그 자체입니다. 진실은 설명이 아니라 그대로입니다.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입니다. 미래에 의한 반응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것도 아닌 현재 상황입니다.그 분은 정직했습니다. 그 분의 말은 모두 정확했습니다. 그 분의 기록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부정적 행위가 없었습니다. 과장이나 축소가 없었습니다. 위선이나 위장이 없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의 맘대로 불러낸 사람들은 모든 일 즉, 뒤집히는 일이라도 거꾸로 매달려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어떤 상황이든 내게 해로움이 오는 것 같을지라도 결과는 선한 일이요, 즉 진실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형편에 따라 뒤집히는 간절함을 다해도 그분은 더이상 그 몸부림에 대한 특별보상이 아닌 매우 정상적인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진실하심에 정반대되는 일을 잠언에 밝혔습니다. 그런 증상은 곧 진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잠언서 12장 12절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라고 하시고 잠언서 6장 16절 이하에서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 같이 육칠 가지니”라고 하시고 다음과 같이 그 제목을 말했습니다.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하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이동휘 목사가 끝까지 예수님처럼 살 것을 강조하면서 교활한 몸놀림으로 성만찬 예배까지도 감히 꿀꺽 들이키는 파렴치한 가롯 유다를 생각해본다고 계간지인 바울 선교지에 기록하셨습니다.시편 5장 6절에서도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다”라고 기록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에 절대 어긋난 것임을 단호하게 규정지으신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본성만이 아주 쉽게 아주 자연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디도서 1장 2절에서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그 거짓의 아비를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하시고, 그 족보를 창세기 3장 1절 이후에 “너는 죽지 않는다”라고 여자에게 말하여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도 준 최초의 사건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목회자가 진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그 이유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목회가 목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목회를 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왜 사업으로 생각하는가? 그것은 목회 성공이란 진정한 교회의 의미가 상실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운영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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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9-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39
    우리는 미사어구에 능숙해 있음이 곧 위선임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목회자의 소원은 현장과 침묵입니다. 나로 인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삶 그 자체입니다.목회자가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원함은 있으나 감당할 만한 힘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목회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세상적의 꿈과 원함에 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가다 보면 나와 아무 상관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미국의 고속도로에서 한번 출구를 놓쳐버리면 자기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는 길을 한 없이 가야 하는 따분함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 지도를 보는 방법과 중요한 원칙이 지도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의 세밀함을 목적지인 길과 번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지도가 매우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실 때 미국 지도처럼 확실하고 정확하게 어느 곳이든 정한 곳에 정한 길로 안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찮게 보았던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이 목회자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 일은 너무 쉽고 순수하고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철의 강함은 용광로에서 철을 꺼내 해머로 친 달궈진 그 상태를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강하게 만드신 것처럼 나라는 어설픈 아무런 균형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과정을 지나가면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불가능성 때문에 목회적 나의 모습이 명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인가?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방 종교의 절대적인 신처럼 섬겨야 하는 분인가? 이것이야말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데 아내가 남편을 섬겨야 하는 존재인가?예수님은 예수님에 의해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인가?사 도행전 17장 24절 이하의 말씀대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예수님이 보이신 삶이 우리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어린 예수, 12살의 예수는 벌써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있었고 그는 사도들을 모으고 설교하고 기적을 베푸시고 예수는 고향의 자기 사람들에게 내려가 삶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섬긴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결국,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제사장으로 엄포나 놓고 소리나 지르고 자만하여 세상 사람과 구별된 지배자로, 해결사로, 심판자인가? 분명히 아닙니다.예수님이 하신 대로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사랑하여 본업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는 “네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목회는 가정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 듯하고 사람에게 하 듯하지 말라”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의 대상이 하나님의 중요한 선별된 사람들로 내가 마음대로 내버려두고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런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내놓은 금언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했습니다. 그 귀중한 전문직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입 밖에 습관과 버릇처럼 남을 비하시키는데 능숙한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인데 그 일에 가장 숙달되고 능숙한 사람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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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9-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38
    먼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에 부합되게 산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그리고 계획에 부합되는 삶인가? 하나님의 계획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아무도 멸망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믿었다는 사람들이 공갈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너그러우심을 신앙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멸망이나 죽음이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이때마다 발생하는 것이 조급함이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능숙해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과 아무 관계 없는 이방 종교의 수단과 방법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의 목표가 세상구원입니다. 예수님처럼이란 이 사실을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목표가 얼마를 구원시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일 뿐 우리는 구원받은 삶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20절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 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하 나님은 사람과 원수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만드실 때 복을 주셨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하나님과 원수 됨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수문장이 되어 구별하고 구분하여 조건을 말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성이지 단회성이 아닙니다. 더딘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의 조급성입니다. 이 조급성은 하나님의 뜻을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조급함에서 사람들이 무수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어 자기가 만든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소원이 무엇인가? 사람의 소원에 우리는 깊이 빠져 있습니다. 목회자가 될 때 사람의 소원을 벗어버렸어야 하는데 사람이란 사회적 체면과 거기에 물들어 있음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이 사랑의 때 묻은 본성에서 목회라는 교육적인 방법대로였습니다.일반적인 용어가 ‘성공적 목회’입니다. 그 성공적이라는 것이 인간 중심인 사단이 물려준 유산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마음의 소원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주신 생기로 인한 생명의 반응입니다. 마치 엄마의 태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은 오직 엄마일 뿐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입니다.에베소서 2장 10절에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려 하심이니라.”시편 139편 13절 이하에서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신묘막측(神妙莫測) 신통하고 묘하며 측량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목회자 마음의 소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성장학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목회성공이란 말은 더구나 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버릇처럼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상담할 때마다 사용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하나님 뜻대로’ 인도하십시오.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입니다. 나의 본심의 소원은 곧 메시지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기와 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하는 그럴듯한 말입니다.한편,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범죄 행위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뜻이란 객관적인 입장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내 마음의 소원이라고 할 때는 나는 말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8-2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7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우리를 억누르는 참소의 내용에서 해방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처럼’ 사는 것은 변화입니다. 변화란 긴박하거나 쫄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 개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문제로 삼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면서 자기중심에서 어두운 부분만 계속 발견하는 습관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7장 1절부터 보시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 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에베소서 1장 17절부터 보시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목표의 이탈은 모두가 흔들립니다. 지진의 무서움은 목표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뒤흔들어 놓는 것은 곧 파괴입니다.우리가 ‘처럼’ 살아갈 대상이 예수님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 번도 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그를 믿는 이유입니다. 돈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행정비서나 직원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치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왜 ‘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갖가지 잡념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방법과 수단에 능숙한 이유입니다.누가복음 19장 10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9장 30절은 “다 이루었다”. 즉, 잃어버린 자(세상 사람들)를,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일이며 나 자신을 희생함은 돋보임이 아니라 남의 짐을 지는 일입니다. ‘처럼’은 왜 단순하냐 하면 우리가 할 일이 임재하신 하나님이 행하심에 대한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의 행복입니다. 그 가지는 많은 열매나 많은 수확이나 탐스러움이란 사람들의 꿈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몹시 산만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더 확실히 하나님을 분석하여 알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오히려 평신도만도 못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지배자로 사람들의 순수함을 병신으로 취급하는데 능숙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출 수 있는가?” 예수님의 목표나 기준은 가장 쉬운 예로 설명했는데도 왜 그리 고상해졌는가 말입니다.학문이란 너울이 실크 옷자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삶 자체가 산만해 있습니다. 최신 유행이나 인스턴트와 같은 해답에 이끌려 마음으로 결심했다가도 또 컴퓨터를 클릭하여 목표도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는 삶 속으로 망설임도 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유행의 철새처럼 하루살이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마음에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입니다. 살지 못하는 이유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받으면서 그것이 신앙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창조주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함을 받은 선택된 자들의 삶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사셨던 그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신 그 분의 삶이었습니다.그래서 그 분은 우리 만큼만의 매우 쉽고 단순하고 자연스런 삶이었습니다. 그 삶이 예수님의 대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갈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8-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36
    목자와 양의 친밀 관계를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감찰하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6). 그리고 주님의 곁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 12:12).◦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골 4:2),◦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에스겔서 37장 1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개혁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우리가 잘 사용하는 임재란 우리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그 손과 내 귓전에 맴도는 그분의 들리지 않는 음성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시편 기자는 하루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시편 5편 3절에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말없이 바라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임재의 삶에 대하여, 먼저 “듣지요”, 그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는 미소로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분도 들으신답니다”로바크라는 분은 하나님께 여쭙는 방식으로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 제가 지금 주님 뜻 가운데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처럼’ 산다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 분이 내 맘 속에 계시다는 삶 그 자체입니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목회란 그런 것이 아닌가?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뒤돌아 보십시오. 뭐 거창하게 스토리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6개월, 광고 우편물 뜯는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고 1년 반, 줄 서서 기다리는데 5년을 보내게 된다.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는가?“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시간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님, 주님은 나의 쉴 곳이 되십니다.” ‘처럼’ 삶이란 너무나 단순한 삶입니다. 주님의 요구하심도 아주 쉬운 일들입니다. 구태여 주님과 만남을 위해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뚫어진 구멍을 매우려고 온갖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잘 해보려고’라는 주제가 정확합니다.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원에 가서 해결을 봤다고 하면 그 해결이 무엇인가.그래서 사람들은 목적보다 방법이 더 호화롭습니다. 그런 일의 반복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건강을 위해서 많은 기구를 사용합니다. 헬스클럽에 가서 온갖 기구를 사용하고 비싼 돈으로 온갖 기구를 사 놓고 쓰지 않는 도구가 얼마나 많은가?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에 눌려서 질식하게 하는 것도 아는가?그럼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쉽게 죽는다는 것도 아는가? 인간이 만든 격식이 이단으로 둔갑하는 것도 아는가 말입니다.‘처럼’ 사는 것은 방법과 장소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있는 그 자리가 현장입니다. 모든 문제가 두고 생각해보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시즉시 손을 빈 사람에게는 짓눌릴만한 먼지나 찌꺼기는 없습니다. 분리수거란 즉시즉시 구분하면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때에 맞추어 파종하면 모든 것이 매끄럽게 성사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처럼’ 삶이란 무릎을 꿇을 이유도 합심할 이유도 어디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곳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부엌이든, 교회당이든, 버스 안이든, 교실이든, 기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이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7-27
  • 목회는 쉬운 것이다·35
    속세를 떠나서 깨끗한 세상 속에서 살아야 도를 지킬 수 있다는 중들과 같은 도피 행각입니다.기독교는 예수님의 삶처럼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음은 곧 구원받은 사람의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오늘 교회는 매임병이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만의 것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이단 종파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교주가 목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송 설교를 선교한다고 해놓고 꼭 자기 교회에 와서 상담하라고 자기 교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제주도에도 교회가 수 백 개요, 목사님도 수 백 명인데 서울 강남까지 전화한다면 그곳 목사님은 모두 잘못된 이단이라는 말인가?하나님은 이런 방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실 것인가? 그들이 외치는 모든 선교나 목회는 예수님의 삶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함께 일하는 자가 목회입니다. 동역자입니다. 예를 들면 출근 표에 도장 찍고 내 방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출근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 목회입니다. 일시라도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흔들릴 수 있지만, 그분의 임재의 실체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7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로마서 8장 29절에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다”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그 자리에 그냥 두시지 않고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과 나누신 그 불변의 친밀함을 우리와도 똑같이 나누고 계시다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일 뿐 그리스도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구속자의 역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일 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려고 애쓴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만의 권위를 넘보는 것이 되는 것으로 그는 분명히 사람의 목숨은 붙어 있으나 죽음적 삶과 고통 속에 지옥의 삶을 살고 있게 될 것입니다.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이방 종교의 교주로, 이단종파의 교주로 비참한 생애를 마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열정이 결국 비참한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한 예일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요”(계 21:2). “우리는 그분과 연합한 자요”(롬 6:5).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후 3:18). 우리가 결혼에서의 행복은 ‘함께 거한다’라는 의식입니다. “둘이 한 몸으로써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다는 것과 둘이 한 몸을 이루었으니 아무도 가를 자가 없다고 했으며 둘이 한 몸 되었으니 그 비밀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한 몸의 원칙은 자상함과 친밀함이 있고, 정직함이 있고, 꾸준한 대화를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점점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행복이란 시간이 갈수록 서로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함께 삶으로 사람들은 말소리, 대화의 내용, 심지어 생각마저 닮아갑니다.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우리도 그분의 생각, 그분의 원칙, 그분의 태도를 취하게 되고 그분의 마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결혼 관계가 그렇듯 하나님과 교제도 전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인 것입니다.우리가 하는 목회가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 기쁨과 환희가 터져 나오는 생수의 샘이 터지고 강물이 흐르듯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자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며 쇠악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목자와 양의 관계가 행복해집니다.시편 100편 3절을 보시면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리시는 양이로다.” 시편 23편 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7-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4
    죄인은 명령이나 가르침이나 권위로 안 되기 때문에 직접 오셔서 죄인과 코드를 맞춰야 합니다. 이 방법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삶입니다.” 데이비드 한센 목사는 말했습니다. 한 시골 목회자의 진솔한 삶과 그의 목회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구속적 사명을 모방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피조와 창조주간의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사명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질했던 험악한 로마 병정처럼 사력을 다해 사람들을 내어 몰고 있습니다.저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아주 좋아 보이는 말이나 단어들이 현실감 없는 지겨운 용어로 거짓말하는 말로 자신을 속이는 위선적인 행위의 반복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사람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해방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구속적 대신 속죄의 역할이 아닙니다.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비전이나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창조주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지금까지 강대상에서 외치고 있는 목회자들의 ‘말씀’은 그들 자신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솔직하게 말해서 소리 지르는 그럴듯한 말을 하는 사람들 자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 위선이 위장된 상태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위선으로 돋보이려는 모든 장치입니다. 강단을 높이는 일, 강대 상, 제단 상 뒤에 붙인 십자가 휘장들, 꽃꽂이들, 위엄 있어 보이는 성구들, 호화로운 교주형의 가운 위에 걸친 스톨들, 마치 현대 가격의 평가로 2억에 가깝다는 제사장들이 입었던 금과 보석을 주렁주렁 단 에봇이나 사람의 마음을 신 들리게 하는 음악 기구들이나 빈틈없는 곡들이기도 합니다.강단에서 모든 실수를 덮으려는 이러한 위장된 형태가 바로 자기의 약점을 덮으려는 마귀가 준 장치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려는 것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들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키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인데 우리는 지금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우리의 교회 현장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모방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우상종교적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평안이 아니라 숨 쉴 사이도 없이 쫓기는 삶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삶이라면 우리는 우리라는 정욕에서 생산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입니다. 예수님은 순수하시고 순결하심에 우리는 탐심이 가득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안하시되 우리는 복잡합니다. 예수님은 목적이 분명하시지만 우리는 땅에 매여 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이 귀중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놀랄만한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드렸다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을 집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예수를 바라보자”(히12:2).무 리가 일삼아 하는 실수가 문을 닫아놓고 사는 습관입니다. 이 말을 아주 쉬운 말로 하면 매임 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꼼짝없이 매여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만들어놓은 칸막이적 삶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의 특징이 두문불출하는 것입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 자기 순결을 지킨다는 수도사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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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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