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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3
    성경은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하는가? 예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성공과 건강을 크기나 숫자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12명만 데리고 예수님은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요한복음 6장 66절에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이 당신이 누구 신지를 드러내는 이 사건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실망에 빠뜨리고 급기야 상당수의 제자가 “이 사람이 아니구나, 잘못 짚었어….”라고 하고 떠나도록 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유발했습니다.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성령 하나님을 기다렸던 사람은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지방에서 사역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모든 역사를 통해 남기신 사람 수가 120명이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기준은 교인 수의 증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2~6절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오직 네가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에베소교회(행 20:28~31) : 거짓 가르침에서 교회를 지켜달라고.•필라델피아교회(계 3:8, 10) : 네가 작은 능력을 갖추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버가모교회(계 3:1)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사데교회, 라오디아교회(계 3:17)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발가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요한복음 17장 7절에는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17장 2절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중요한 것은 교회부흥은 인위적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 4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숫자가 성공의 가름을 하는 것인가?한국교회를 위기라고 합니다. 양적 성장이 결국 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던 양적 성장이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16세기에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때 왜 개혁이 필요했던 것인가 이미 아는 이야기들입니다.십자군 전쟁으로 교황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새로운 성전 건축을 준비하여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 중심으로 면죄부를 팔아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세며 세계를 정복하는 가톨릭을 꿈꿀 때입니다. 왜 루터를 통해 개혁이 필요했을까요? 루터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분열시키신 것입니다.오늘의 문제의식은 규모가 우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아는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목사는 이름에 그의 공력을 낭독해야 하는 화려함이 기본이 되어야 함은 교인의 허세에 대한 자랑거리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 현대사회의 악습의 반복을 교회가 맨 선두에서 사용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입니다.교회라는 이름 안에 감추어진 것은? 숫자를 우상으로 만드는 역사는 창세기 3장 1절 이하에 나타난 시조가 뱀인 것입니다. 뱀이 교회란 이름 속에 대리점을 차리고 사단이 조정함을 받는다는 것은 뱀이 내어놓은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아지고’, ‘선악을 알게 한다’라는 조건입니다. 즉 밝아지려고, 같아지려고, 알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화시킨 것이 19세기 촬스 피니였습니다. 이들이 긍정 신학이라는 말로 교회는 인위적으로 부흥될 수 있다는 마케팅 전략을 생산했습니다.숫자가 진리인가? 그 당시 이집트가 진리이고, 바벨론이 진리이고, 로마가 진리였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엄청난 교회가 진리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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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6-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32
    기업은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거짓도 그리고 위선을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에서도 감정 자체가 무디어져서 시간이 갈수록 우상의 도시에서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신들과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현대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성장이라는 프로젝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각종 마케팅 기법을 동원하여 시장 조사를 하고 판촉을 하고 이벤트를 하며 매출을 늘리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요나의 경우 10만이 넘는 한 도시 전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이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수일 동안 애쓰고 힘썼으나 단 몇 명만이 복음을 받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격차와 선교에 관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요나와 같이 베드로와 같은 비전을 둔다든지 희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지 않았고 장기적인 목회 계획도 없었기에 이들 모두는 자유했습니다.어느 책에서 한국교회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세 가지로 평했는데, 곧 ‘삼허현상’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는데 무릎을 칠 정도로 그 말에 동감했으며 그보다 중병에 진단은 매우 단순한 일이었으면서도 치유하기 힘든 뱀이 제공한 ‘뻥’의 속성이었습니다.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죽기 때문에 성경은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죽지 않는다’라고 하여 먹으면 너는 ‘밝아지고, 같아지고, 알게 된다’라는 오늘의 삼대 뻥을 주신 것입니다. •첫째 허수(虛數) : 교인 수 등 중요한 통계치는 두 배, 세 배로 과장합니다.•둘째 허세(虛勢) : 물량주의에 자기과시욕으로 정직성을 상실합니다.•셋째 허상(虛像) : 큰 것을 갈망하여 고무풍선에 바람을 계속 집어넣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결국, 터져버려 추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알면서 반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에 매이기에 허세와 허상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믿음이라는 단어로 포장합니다.현대교회의 최고의 가치와 숫자를 중심으로 합니다.크고 많은 것이 옳다는 이 세상의 가치를 성경의 진리라고 믿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여기에서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진정한 교회를 할 수 없으며 교회가 마치 비즈니스 개업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한다는 의미보다는 교회를 차리고 개업한다는 생각이 신학생들의 갈등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교회는 기업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사장이요, 회장으로 둔갑되어 으리으리한 공간과 값 비싼 가구와 골동품으로 장식하며, 그보다 명령하고 통치자로 군림하여 많은 직원을 지배하는 것을 목회하려는 사람들의 꿈이 되었습니다.그보다 최고급 승용차로 같은 무리와 경쟁하는 상류 사회에서 끼리끼리 필드에서 골프채를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상의 축복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기에 기업, 재벌가의 대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업의 사장을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성이 오히려 일반 기업주보다 한 술 더 뜨는 이단 종파의 교주가 된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일반 기업의 형태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성으로 위장했으니 감사도 받지 않고 폭리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 잘못된 말이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교회라는 이름 안에 마케팅 전략이 들어오게 되어 교회당 건축에 더 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터 드리커의 말에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사무실 앞에 걸어놓은 표어가 ‘너의 비즈니스는 무엇인가? 너의 고객은 누구인가? 고객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써 붙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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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6-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3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을 위하여 택정하심을 입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1~5).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이 철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왜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비교할 일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애쓸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아브라함에 대하여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창세기 13장 8~9절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시되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이삭에 대하여그의 생애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과 순종에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께 간구하고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하나님 소유가 된 사람, 하나님 위해서 사는 사람, 하나님 뜻밖에 모르는 사람,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성경의 강조는 경쟁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경쟁은 전문가와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현대교회는 목회를 경쟁의식에 얽매이게 하여 전문성과 그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회학이란 자체가 순수성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목회성장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목사를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리더로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가 쓴 책을 소개한 것을 보았는데, 그 책 제목이 “목회자는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교회와 교회의 경쟁은 지체와 지체들의 갈등입니다. 지체의 갈등은 곧 머리 된 그리스도와 지체된 교회관계에서 생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골로새서 1장 18절에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옛날부터 지금까지 ‘부모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형제간의 싸움’이라고 합니다.싸움이란 질투와 자존감에서 오는 경쟁의식입니다. 현대교회는 경쟁으로 제단지기들(종교지도자)의 욕망에서 출발한 프로그램입니다. 결국, 교회의 분쟁이 현대교회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불행입니다. 마치 운동장에서 뜀박질을 뛰게 만들어 우월을 나누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작은 자들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계없는 적자생존의 깊은 늪을 만들고 있는 것이 현대교회이기에 세상에서 비판과 치욕적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우리 모두는 욕망이라는 열차가 브레이크까지 고장 난 상태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미래가 없는 막 가는 삶을 살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장자라고 정신병자 같은 독설만 쏟아놓는 것은 분명히 그 가정이 편안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도전하는 죽음을 향하는 것입니다.교회의 지체는 절대로 똑같아질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같아지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4절부터 보시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마태복음 10장 33절에서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라고 했습니다.뻥은 교회가 아닙니다한국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큰소리, 그리고 자신만만함 그 자체가 장사꾼들의 삶입니다. 요즈음 이미 지난 풍속이지만 ‘마케팅 전략’이 능숙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매출로 인한 이익이며 시장 점유율입니다.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돈입니다. 유통자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크고 많은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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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6-01
  • 목회는 쉬운 것이다·30
    목회는 경쟁이 아닙니다.먼저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주제 발표한 손봉호 교수의 이야기를 말해야 하겠다.한국교회의 경쟁의식은 유교의 잠식된 문화 속에서 온 것임을 말했다. 필자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유교가 도덕성을 굉장히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형성해 놓은 문화는 굉장히 도덕성에 취약하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세계 투명성 기구에 의하면 한국은 투명성 정도가 세계에서 39위이다. 후진국인 아프리카 국가보다 못하다. 유교와 샤머니즘 세계관이 도덕문화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알 수 있다. 유교와 샤머니즘 문화가 도덕적 의식을 결여시킬 뿐 아니라 지나친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다. 그들은 내세가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뤄야 하기에 엄청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 만큼 경쟁심이 강한 민족은 없다.한국인들은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려면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80점을 맞고 1등을 하는 것이 95점을 받고 2등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경제성장엔 도움이 됐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다.한국 기독교는 유교와 샤머니즘 문화 속에 깊이 빠져있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세계 부패 지수에서 한국이 세계 39위인 반면 일본은 17위이다. 한국인 기독교 인구가 전체 25퍼센트 정도지만 일본은 채 1퍼센트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한국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세상이 교회를 감염시킨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문화의 복음화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무속화가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이 전형적인 예이며,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킨 것이다.경쟁이란 비교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최초 뱀이 제공한 것이다(창 3: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적 욕구에서 이것보다 더 나아 보이는 생각을 이루려는 방법이 현대 용어로 마케팅 전략이다.예수님은 그 조건을 무용지물로 만드셨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그 조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위장으로 결국 뱀의 조정을 받아서 성공적인 신앙이라는 사람들이 만든 것에 매여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생한 것이 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성경 속에 나타난 경쟁자들의 종말을 보자.•가인과 아벨 : 가인은 인류 최초로 경쟁심을 가진 사람이다. 동생에 대한 비교와 그 질투심은 결국 살인이란 비극을 불러왔다.•에서와 야곱 : 이들은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경쟁했다. 야곱은 끊임없이 형이 가진 장자권을 탐내고 장자권의 복을 가로채기 위해 최초의 거짓말을 만들었다. •요셉과 형제 :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겨 아버지께 불효했다.•사울과 다윗 : 노심초사하는 사울의 끊임없는 비교가 자신을 구해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헤롯과 메시아 : 경쟁과 질투로 모든 자식을 잃게 하여 어미들을 통곡하게 했다.•요한과 제자들 : 사람들이 요한의 칭송이 예수님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자신의 스승인 요한에게 괴로움을 주었다.•예수님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예수님 제자들 :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가세한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을 하게 했다.•고린도 교회와 당파 : 자기가 좋아하는 스승을 내세워 당을 지은 사건.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서로 경쟁했다.성경은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7장 4절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이 따를 때도 흥분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예수님 곁을 떠날 때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바울은 남보다 늦게 사도가 된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체험에 대한 우월의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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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5-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29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때부터입니다.그가 우리에게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보다 성경 관주에 의한 짝 맞추기와 누가 말한 것에 올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성경을 연구하고 인용하면 가장 건실한 신앙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어리석은 이유•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알아내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했습니다.•나의 삶을 개선하고 내 문제를 고치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로 성경을 꺼내 들곤 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을 찾아 주장하고 재정적 독립이나 직업적 성취나 우울증의 치료를 위해 성경을 보아야 했습니다.•성공적인 삶의 원칙을 알아내고자 성경을 뒤져 보았습니다.•내게 성경은 일종의 점검목록으로 읽었습니다.•매일 운동하고 비타민을 복용하듯 목록의 항목들에 합격 표시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성경을 읽지 않으면 불신앙인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성경을 형식상이라도 읽어야 했습니다.아무 느낌도 없이 예수님보다도 성경에 더 의지했다는 놀라움은 예수님의 성경이 예수님을 소개해 준 책이라면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미 내 속에 와 계실 때 지금도 소개해 준 성경을 재해석하고 또 분석하는데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세상의 모든 종교마다 자기들이 신성한 문서라고 하는 토라, 꾸란, 모르몬경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신의 존재가 개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붙들고 있습니다.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하나 된 경험 즉 영적 생명인 것입니다. 이제 최소한 한 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랄 그러한 삶 자체입니다.한 예로 결혼상담소에서 신부를 소개한 모든 자료나 설명을 결혼 후에도 계속 분석하고 조사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최소한 한 몸의 삶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 귀중한 사실을 안다면 엿세 동안 주님과 동행한 삶에 대한 환상적인 감사의 찬양과 기쁨의 축제가 되는 날이 주일이 될 것입니다.주일은 안식일 개념에서 죄를 짊어지고 와 실컷 두들겨 맞고 코가 빠져 스트레스 상태에서 파김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살았던 행복의 이야기꽃이 피는 날일 것입니다.지금도 우리는 주일에 점검받고 지시받고 눈도장 찍고 출석카드 찍는데 열중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을 통하여 양과 소를 잡아 번제물로 드리는 마음으로….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가정도 매우 평범한 한 몸 관계로서의 삶인데 남편에게는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론이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부부 된 의미를 알면 매우 행복하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관계에 대한 것을 지식적으로 가르치려고 할 때 순수한 부부관계는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교회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가분수로 만들어 결국 교회가 기형체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이유는 주님과의 영적 관계라는 사실입니다.학문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놓쳤다는 증거는 개혁주의생명신학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자신이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방법과 경쟁의식에 능숙해 있어도 그에게는 진정한 주 안에서의 행복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계의 최고의 슈퍼스타에게 훈련을 받는 것이 목회 성공이 아니라 내 곁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목회적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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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5-04
  • 목회는 쉬운 것이다·28
    왜 사람들이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하는가? 그리고 원수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극단적인 이방 종교에 젖어있다는 증거입니다.내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서 자신이 사랑과 평화를 느낄 뿐입니다. 나아가 세상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탄생 목적도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우리가 순간마다 외우며 고백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머리와 지체로 본 에베소서의 기록이 한 몸으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체의 존재가 머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거론하고 따질 이유가 없는 매우 중요한 체험적 표현입니다. 이 귀중한 공식이요, 원리를 알기 때문에 의욕을 잃지 않는 것은 테레사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나는 무리를 보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만 볼 뿐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을 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에 딱 한 사람만입니다이와 같은 아주 쉬운 일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언제나 한 알의 밀알입니다. 내 앞에 나를 보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분명히 내가 먹고 마시는 만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그리고 교회 부흥도 개인의 한 사람 바로 내 앞에 보이는 그 한 사람이면 됩니다.마귀는 많은 무리를 보여주고 우리가 박수갈채의 꿈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순수하고 아주 쉽고 매우 작은 일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무리란 마귀의 숫자일 수 있습니다.마틴 루터 킹도 의욕을 잃지 않는 이유를 “오직 한 사람이 작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하나님의 완벽한 사랑과 평화 안에 거하면 그 사랑과 평화가 그들의 일상 속으로 흘러 넘쳐 결국 온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많은 무리나 많은 성과는 마귀의 바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극소수를 무시하고 큰 것, 거창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분은 너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전능자이신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체만 덩치가 커 버리면 정신지체인일 수 있습니다. 지식의 기능이 약화합니다.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내포된 삶입니다. 어떻게 해야 함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엄마 앞에서 어리광스럽게 엄마의 기쁨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든 의식이 나 방법이 돼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완벽해짐도 아닙니다.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그 사랑의 주인공인 예수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껴주어서 누구도 울지 않는다면, 모두가 사랑하고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서로 나누고 교만을 내려놓는다면,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우리는 지금 형식주의에 물든 교회, 교회의 예배방식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의식에서 그 탈을 벗으면 불순종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나라의 유교적 습관에 물든 교회가 문밖을 내어다 볼 수 없는 사람들로 된 기형 그 자체로 한 번도 치료해볼 생각도 없이 병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병신이 이해할 수 없는 독선이 결국, 이 꼬락서니를 만드는 것입니다.똑같은 형식, 주일만 모였다가 주중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버려둔 채, 주일이면 경매시장처럼 눈을 부릅뜬 사람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아우성을 치고 장사꾼들의 그 모습을 주님은 망가뜨리셨는데, 우리는 그 일을 또 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회자의 회심한 이야기입니다. “이제껏 나는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려고 애써왔다. 말만 번지르르했을 뿐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지식적으로 논리 정연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내가 가진 것 전부일 뿐입니다. 더 좋은 것, 귀한 것을 기다리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그럴 듯한 설명서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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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4-20
  • 목회는 쉬운 것이다·27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예수님처럼 살자.” 예수님의 구속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를 지심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그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생과 공생 즉,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시고 살아가신 삶은 우리가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려는 십자가 지심입니다.우리의 의무는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은 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우리는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데 능숙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하여 예수 믿어야 지옥 가지 않는다는 말이 지옥을 연상케 하여 기분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사명으로 알고 극단적 용어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동이 됩니다.한 예로 자기 자식에게 “너는 무엇이 되려고 이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라고 한다면 자녀는 공부를 잘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언어 습성이 늘 부정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신앙이 좋다는 사람치고 부드러움보다 극단적이 되고, 손을 잡기보다 손가락질에 능숙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어떤 사람이 「인간의 질과 새로운 길이란 이야기」를 이렇게 구분했습니다.원래의 사람 : 내가 과거에 격은 고통과 학대나 절망을 부지불식간에 남들에게 전해줍니다.새로운 사람 : 사랑 안에 거하면서 내 삶이 치유되고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치유와 변화가 나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간다고 합니다. 나의 재정적인 안정, 정치적 신념, 영적 성향과 관행(나의 욕구를 중요시함).사랑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가장 높은 가치이자 삶의 수액으로 여기게 됩니다. 거함의 길을 따라가면서 나와 남들이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중심으로 인생의 모든 측면(개인적인 재정, 남들과의 일상적 상호작용, 시민의 책임)을 살아갑니다. 내 영적 방향과 경험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남들의 영적 방향과 경험을 무시합니다.사랑 안에 거하면서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고 모든 종교적 전통과 영성을 존중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게 되고 사랑 안에 거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영적으로 겸손해집니다.내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발견한 것들을 자신 있게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남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폭력과 억압을 자행하는 자들이 변화하도록 돕지도 않으면서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면서 학대와 폭력, 억압의 희생자들을 구하고 치유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인해 가해자들의 변화를 위해 서로 독려합니다. 가해자들도 과거에 학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성경 속에서 말씀하신 거함의 삶세상의 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로마서 12장 17절부터 보시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라고 했습니다.“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신 32:35).“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오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사람들에게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함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리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할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할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눌 것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서 주신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만큼만 주시는데 사람의 곳간에 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주시면 많이 먹고 마실 것을 보급해야 할 의무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공동체적 삶의 가치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4-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26
    최소한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각 개인에게 영감하시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강조가 아니라 그분이 나라는 개인에게 역사하심에 대한 간증이나 감사함만 있을 뿐이지 어떤 학문적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수 있습니다.앎이란 의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밝혀주신 진리를 우리의 영이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각자의 현상이어야 할 것입니다.요한일서 4장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라고 했습니다.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문제는 주 안에서 자유로우냐 입니다. 만일 자유로운 삶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연결된 복잡한 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창살로 꼼짝할 수 없게 하는 조건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인간이 꿈꿔온 인간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데 도구로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비스러운 기도응답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욕구를 응답하는 사단의 역할을 예수님으로 착각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진정한 자유란 세속적 자아가 아니라 즉, 수 없는 변화에 의한 불안정성이 아니라 영적 자아가 원하는 대로의 자유함입니다.자유는 삶의 방식으로 기꺼이 풍성한 삶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기꺼이 완벽한 사랑과 무조건적인 포용과 완전한 평안과 무한한 기쁨과 풍성한 삶의 종, 그 자체입니다.예수님의 자유함은 희생이었습니다.바울은 감옥에서 찬양함이었습니다.제자들은 그물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마더 테레사는 섬김의 삶 자체였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 감옥에서 지내면서였습니다. 마틴 루터킹은 죽음을 무릅쓴 행진이었습니다.자유는 이기적이 아닙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곧 자유입니다.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들이마시는 공기의 일부라고 합니다.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사랑과 포용 그리고 선한 목적, 예수 생명적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오직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적 삶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이 안식이라는 의미입니다.모세의 십계명에서 안식일이라는 의미가 곧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 날을 기념하고 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의 진정한 삶에 대한 간증과 감사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은 미움과 이기주의로부터 자유가 아니라 사랑할 자유를 누리며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입니다.험하고 좁은 문이란 개념은 세상적 생각에서 즉, 자기주의에서 인간의 감옥 같은 공간 안에서의 예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우리를 구속하시려는 대신 속죄로 하나님의 방법이며 사랑의 표현일 뿐 우리 자체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루어 놓으신 것 자체가 험하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우리의 본성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완성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유로움입니다.누가복음 4장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내게 기름을 부으시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포로가 된 신앙포로가 된 현대 교회종교라는 틀 속에 포로된 교회자기 생각이란 고정관념의 포로습관이라는 포로학문이라는 포로 교육이라는 포로의식이라는 포로심리학이라는 포로마케팅이란 수단과 기업적 포로로부터 자유함. 이것이 성령이 임하신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곧 자유로움입니다. 자유로움은 나 자신이 성공적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실제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4-01
  • 목회는 쉬운 것이다·25
    에베소서 1장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9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우리 마음에 미움, 탐욕, 불의, 육욕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현실이 차단되었다는 증거입니다.또한, 평화, 목적, 의미, 가치, 행복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현실이 방해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빌립보서 2장 15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우리는 사랑, 선함, 아름다움, 자유, 기쁨, 용서, 연민 자체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 10절 말씀대로 “그 나라가 임하게 하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사람에게 있는 두 가지 색깔사람에게는 동시적 두 차원이 있습니다. 육체적 차원과 영적 차원입니다. 육체적 차원이란 일시적이고 영적 차원은 변하지 않고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진리입니다.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을 잘 알게 하셨습니다. 사람 자체가 선과 악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만일 나 자신이 진리에 속했다는 증거는 자유 함일 때 느낄 수 있으며 진리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자유로움이란 사실을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진리 자체가 하나님의 영임으로 우리 자신을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종교라는 틀 속에서 진리를 판단하는 방법이 곧 남들에게 의지하고 가르치기 위한 자료들이 학문적 이론이나 학자들의 견해를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곧 종교요, 신학의 논리입니다. 전문 목회자라는 것은 사람들이 구분해 놓은 학문적 방법이 잘 분간한 논리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록 진리를 분간하는 영적 능력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한 예로 “신학이 발전할 수록 교회는 문을 닫는다”라는 말이 증거하는 것은 기독교는 영적 관계에서 성숙함을 체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모순일 수 있습니다.사실은 신학의 체계가 말할 때는 자신의 영적 감각에서라면 아주 쉽고 간단명료하게 유무식간에 인간의 본성적 이야기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 학문 자체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 갈등을 느끼지도 못하고 끝없는 논리만 전개하는 무서운 질병에 헤맨다는 것입니다.이들은 성경을 지어낸 이야기로만 일삼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가를 분석하다 보니 그보다 하나님의 순수하심을 두터운 논리로 감추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런 행위를 성경공부라고 착각합니다.학문의 깊이란 학자들의 견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중 요한 것은 역사 이래 어떤 공식교육도 받지 않는 사람, 심지어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사람이라도 영적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단순함에 있다는 것이요 그보다 하나님은 학자나 지식인 중심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예로 은혜를 끼치고 목양에 성공했다는 목회자 중에 한경직 목사님은 배운 학문을 상대에 따라 아주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는 현장에 맞게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성경에 서신 가운데에서도 바울 서신을 이야기한다면 그 배운 선생의 논리를 나열하지 않고 살고 있는 현장중심에서 말했다는 것입니다.지식과 앎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전문 목회자의 특징은 존경한다는 선생이나 강사나 저자에게 의존할 때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성경 지식이 많은 크리스천의 숫자와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며 사는 크리스천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고 합니다.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만 의지하는 머리 발달에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일반적 지식이나 철학적 방법으로 기록하고 말한다는 것은 결국 생명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3-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23
    성경에는 “구제를 하되 먼저 믿는 자에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우선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아는 일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굶주린 사람에게 쌀 한 되를 건네기는 쉬워도 같은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생의 자랑이란 공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명분 때문에 이웃 사랑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서로에게 사랑을 나누기 전에 먼저 가정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거창한 표어가 아닙니다. 거창한 비전이나 계획이 아니라 너의 그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가까운 나의 그늘에 사랑을 받을 사람이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신앙은 목적이 아닙니다. 살아본 사람들이 목적대로 살았는가 물어보십시오.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에 시달렸는가. 성과에 대한 치수가 나를 계속 본질의 자리를 벗어나게 함을 느끼면서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려면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논리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타고났다. 누구나 타고난 일에는 놀라운 재능이 있으므로 그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일을 하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사와 갈채를 받기 위해서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 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인간의 최대의 꿈을 이루었을 때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런 사람 대다수를 세상이라는 괴물이 집어삼킵니다. 그 꿈의 실현은 결국 괴물의 수작이요, 나 자신을 큰 덩치로 삼켜버리려고 세상의 꿈을 갖게 한 것입니다.에덴동산의 아담과 여자는 평생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미래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광야를 헤매는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빌립보서 3장 10절에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시간 맞춰서 기도하는 사람보다 그들의 행동 자체에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자유로움입니다.자기 직업을 삶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직업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슈바이처는 밀림 속에서 악어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인생의 목적에 의한 밀려남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서 즐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종교적 행위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닙니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중보기도가 아닙니다. 그 중보의 내용이 삶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이고 생활입니다.내가 대신해서 상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이방종교인 로마 가톨릭의 대신 중재역할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 제도로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의 개념을 지금도 계속 반복하는 죄악의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시편 37편 4절을 보면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기쁨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목적은 결국 세속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극히 기본적입니다.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상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8장 2절부터 3절에서 “어른들은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을 알게 됨의 증거는 사람들 간의 갈증이 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인간의 목적을 놓아버리면 자유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단순함에 대한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나 생각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며 가까운데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권위이시지만 너무 단순하시고 편하신 분으로 격식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복잡한 격식은 이방 종교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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