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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18 앞에서 빠진부분
    우리는 그가 받으신 고난을 받을 수 없으며 그분의 십자가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주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겪으신 것입니다.목수로 일하면서 보통 사람과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절대로 지금 목사들처럼 평신도와 구별된 제사장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높은 강단과 화려한 삶도 아니고 평신도를 내려다보는 구별된 높은 좌석도 아니고 가운을 걸치고 검정 양복을 입고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규격이 맞는 철두철미한 실수도 없이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사람들과 기쁨, 슬픔, 배고픔, 사랑받고 싶음, 유혹, 우정, 실망감, 권태감, 분노, 영적 고뇌, 연민, 감정적 고통 그리고 육체적 고통도 경험하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에게 시청각 교재로서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현장적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래서 모든 사람, 관원, 율법사, 학자, 천민,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식한 사람, 약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사람까지도 소통되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까지 대화가 되는 삶을 보여주신 이유는 신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근본적 세상 속에서 역사 하시는 범위를 이해시킨 것입니다.그런 우리는 학문과 전통으로 보수라는 사람이나 진보라는 사람까지도 자기 울타리와 올무에 묶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신앙운동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신앙운동이란 특별히 구별된 삶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 예수의 생명 자체가 그렇게 하게 하는 삶입니다.예수님의 열린 삶이 온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인간적인 일체가 아니라 영적 즉 생명으로서의 일체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바른 신앙이 바로 다른 이방 종교나 무속종교나 학문이나 전통적 삶에서 절대 체험할 수 없는 영적 일체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하심으로(요 19:30) “다 이루었다”라는 하나님의 창세기 3장 21절에 약속하신 죄인으로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가죽옷’을 입혀 세상에 살게 하셨던 대신 속죄된 그 삶은 어려운 것이나 금욕적인 훈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우리가 예수님과 아버지와 하나됨을 지금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른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에 우리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연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 사이에 흐르는 영원한 사랑의 흐름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적 일체가 현실이요, 이 현실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과 인류의 일체를 가족의 개념으로 말씀했습니다.“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는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가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라 하셨으며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는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1~14).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나될 속성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은 형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현대교회의 범죄가 부모와 자녀가 따로, 남편과 아내가 따로, 예수님과 교회가 따로, 목사와 평신도가 따로, 이것이 개체 개념입니다.이 사실이 십계명 중 4계명에서 이탈된즉 끊임없는 자기 고통에 매이게 하는 뱀의 능숙한 방법에 깊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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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4
  • 목회는 쉬운 것이다·81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7~50).목회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목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목회는 하나님이 약속한 자유와 안식과 기쁨을 맛보고 누리는 삶의 양식인 것입니다. 목회사역이란, 종교 비즈니스 또는 고객 서비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목사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에베소서 4장 11절에 직임으로의 사역을 분담하게 했습니다.목사의 사역을 두고 “너희 행함을 설교하라, 너의 의문을 설교하지 말라” 목사는 들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답이 곧 목회일 것입니다.목회자의 목회 처신을 위한 윤리를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기가 고생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남을 섬기는 자임을 결코 망각치 말아야 합니다.◦아무리 중대한 일이 닥쳐왔다 하더라도 일신상의 안전을 핑계로 목회자가 자기 교구의 회중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목회자는 자기 봉급으로 자기의 일을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이름을 조심히 사용해야 합니다. 확신할 수 없는 일에 서명 날인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다른 전문 분야에 참견해서도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교인의 말을 잘 들음으로 그 성직을 낮추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교회와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성직자로서 목회자는 자기의 일을 제 일로 치고 보수는 둘째로 여겨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 내에 파당을 조성할 수 없습니다.◦목회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일꾼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목회자는 다른 목회자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목회자의 직무가 그곳 목회지의 다른 교회의 교인들에게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다른 목회자의 인격이나 전임자나 후임자를 헐뜯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입니다(엡 4:11~12, 시 23:1, 겔 34:5, 히 13:20).마지막으로 매듭져야 할 이야기◦목회는 아주 쉬운 것이며 기업이 아닙니다.◦목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목회는 고난이 아닙니다.◦예수님이 목회자와 함께하십니다.◦목회 운영 방법도 계획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목회는 명분이나 성공이 아닙니다.◦목회자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목회는 기업이 아닙니다(기업은 자기 일입니다).◦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목회는 심리학적 분석이 아닙니다.◦목회는 마케팅전략이 아닙니다. ◦목회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닙니다.◦교회개척은 개업이 아닙니다.◦목회는 목회를 위한 준비물이 아닙니다.◦목회는 냉수 한 그릇입니다.◦목회방법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목회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목회는 내가 있는 현장입니다.◦목회는 가정입니다.◦목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목회는 내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목회는 시작입니다.◦목회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목회는 그냥 하는 것입니다.◦목회는 완벽이 아닙니다.◦목회는 성공의 개념이 없습니다.◦목회는 경쟁이 아닙니다.◦목회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목회는 내게 있는 것을 나눔입니다.◦목회는 내 일이 아닙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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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3
  • 목회는 쉬운 것이다·80
    나눔운동은 성령의 반응입니다.“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나눔의 시작은 믿는 사람이 함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임무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소유권의 자유로움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갖고 있는 잉여가 아니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의함입니다. 필요한 사람의 사용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합니다. 주 안에서 주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끊임없는 예배입니다. 집에서 떡을 뗍니다. 가정교회가 기초입니다. 먹는 기쁨을 갖습니다. 두레상적 삶입니다(둥근 밥상). 한국적 전통이 두레상과 품앗이요, 콩 반쪽입니다. 두레상은 얼마든지 초청하지 않은 불청객도 포함됩니다. 품앗이란 남의 일이 곧 내 일입니다. 이 운동이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콩 반쪽이란 아무리 작은 것도 쪼갤 수 있습니다.나의 것이란 다른 사람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수확이 아니라 남기는 것입니다. 그 여분이 나그네를 위한 몫입니다. 이 풍토가 서구사람들의 팁 문화일지 모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맡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진정한 자유는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 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명예와 지위를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과 같이 타인을 섬기라.“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자기중심적이 되지 말고 타인을 즐겁게 하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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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79
    성령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도로부터 안수 받고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우리의 습관은 육신적인 것으로 세상을 의식하기 때문에 내게로부터 나타나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리고 혼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여 신비스러움의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영접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속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삶에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을 의식합니다.성령은 우리의 생애 속에 거룩함을 가져오십니다(요 17:17).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요 14:26).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요 16:13).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요 14:16~18). 성령은 아들 된 것을 확증하십니다(갈 4:6, 롬 8:15~16).성령은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 8:26).증인이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과 복을 주심은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주신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 자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함께하실 때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의 삶의 모습을 성령의 열매로 설명되었는데 그 자체가 성령운동의 기초요, 증거된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증인의 삶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요 15:16). 이 열매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5:18).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16).성령운동이란 열매의 풍성입니다.중요한 것은 열매가 어떻게 맺느냐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증인으로서의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너무 알기 쉽게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매와 이웃을 향한 열매와 자신을 향한 열매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었습니다.하나님을 향한 열매사랑(롬 15:3) :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은 바 되고(롬 5:5), 항상 그의 사랑이 강권하시고(고후 5:14), 실로 사랑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희락(잠 7:18) : 사람들이 왜 희락이 없는가? 복음 자체는 기쁨입니다(눅 2:10). 희락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빌 1:18). 성령의 기쁨입니다.화평(롬 5:1) : 날마다 전쟁, 경쟁으로 고발, 비난, 시기, 질투로 분열이나 성령 충만의 삶은 화평의 열매입니다. 이웃을 향한 열매오래 참음(고전 13:4) : 사랑으로 오래 참음으로 희락의 승리로 사랑이 오고 화평은 평안의 사랑이며 오래 참음은 시련 가운데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의 열매인 것입니다.자비(빌 2:1) : 자비는 이웃을 향한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곧 선입니다(롬 3:12). 양선(엡 5:9) : 양선은 자비에 비해서 능동적인 선입니다.자신을 향한 열매충성(딛 2:10) : 믿음과 충성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롬 12:3, 고전 12:9).온유(마 11:29) : 온유는 회개와 겸손에서 오는 부드러운 심정입니다. 온유는 도덕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마 5:5).절제(벧전 1:5~7) : 절제란 자제를 뜻합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갈 5:21~24).성령운동이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사랑입니다. 결국, 성령운동은 사랑운동입니다. 성령운동이란 사랑입니다. 희락은 기뻐하는 사랑이요, 화평은 휴식하는 사랑이요, 오래 참음은 지치지 않는 사랑이요, 양선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자비는 긍휼에서의 사랑이요, 충성은 전장에서의 사랑이요, 온유는 억제하의 사랑이요, 절제는 훈련 중의 사랑이요. 이 모두가 성령운동이요, 곧 증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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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78
    ◦아브라함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음성은 늘 그의 앞길을 인도했습니다.◦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습니다.◦다니엘은 기도하여 사자 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바울이 기도하였을 때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루터가 기도했을 때 로마의 문들이 요동했습니다.◦존 낙스가 기도했을 때 영국 메리 여왕이 떨었습니다.◦존 웨슬레가 기도했을 때 부흥운동이 영국을 구출했습니다.◦물러의 기도로 고아원이 세워졌습니다.이들의 기도의 공통점은 나타난 현상을 갈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분들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그 공통점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계획이었습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우리는 중보기도, 목적기도란 말을 버릇처럼 사용합니다. 심지어 대학입시를 위한 기도, 그리고 제목 있는 기도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중보기도는 로마천주교 사제가 사용하던 죽은 사람까지 기도하여 낙원으로 끌어올린다는데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덧붙은 기도의 가지 때문에 신자들은 무속적 이방 교회신자로 만드는 철야기도라는 어처구니없는 용어도 출처를 모르면서 신자를 들볶는 도구로 제사장 된 목사의 분주함이 되었습니다.우리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오직 성경은 바른 신앙이요, 오직 그리스도는 바른 신학이요, 오직 믿음으로 영적 운동이요,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임과 오직 영광으로 기도운동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이와 같은 5대 표제가 이루어지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성령운동이요, 나눔운동입니다. 남은 두 가지의 역사는 사람들의 방향과 제사나 준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건입니다.성령운동은 증인의 반응입니다.분명한 것은 인간 삶의 윤리적 도덕적 공동체의 삶의 방법으로 나눔이 아니라 그리고 부흥사가 부흥사로서 주 무기가 성령운동으로 인간의 신비적 역사를 실감 나게 하는 이단적 언어나 행동이 무속적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무당 넋풀이가 된 배뱅이굿의 모양으로 전락하고 있는 세상이란 틀 속에 예수쟁이들이 한 몫을 담당하는 모방에 능숙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예수님이 약속하신 삶이 보혜사 성령이 오신 사실의 현장에서 우리의 자의적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성령운동과 나눔운동은 우리가 설명할 이야기가 아닙니다왜냐하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예수님의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역사가 실제가 된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7절까지에 오순절 날의 역사에 대한 사건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성경에만 194번이나 기록되었다고 합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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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77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요(요 14:1), 그리스도요(요 20:31), 하나님의 약속이요(롬 4:21), 복음(막 1:15)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영적 삶인 이유는, 죄 사함을 받고(행 10:43), 의로움이요(행 13:39), 구원이요(막 16:16), 심판의 면제요(요 3:18), 영생이요(요 3:15~16), 하나님의 자녀요(요 1:12), 하나님께 보호받음이요(요 16:26~29), 화평(롬 5:1)입니다.믿음이 곧 영성입니다. 믿는 자는 표적이요(막 16:17), 말과 행실, 사랑과 정절의 기본이요(딤전 4:12), 능치 못할 일이 없고(막 9:23), 영생을 얻고(요 3:15~16), 구원 받고(롬 1:16, 고전 1:21), 심판을 보지 못한다(요 3:18).예수를 믿는 삶이 영적 삶입니다. 영성 삶이란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리고 어떤 사건 속에서도 예수와 함께라는 사실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가장 쉬운 본질을 버리고 이웃에게 눈독을 들여 유명한 학자가 무엇이라 했느냐는 말 모음에 열중하여 공통적인 결론을 가지고 자기주장이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학문이기에 분명히 신학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십니다.◦인간의 타락 : 마귀의 유혹받음(창 3:1~5) ,여자가 미혹(고후 11:3), 아담의 불순종(롬 5:12~19).◦인간의 육적 타락 : 에덴에서 추방(창 3:24), 노동의 저주(창 3:16~19), 사망과 저주(고전 15:22).◦타락한 인간의 영적 결과 : 전적으로 타락(딛 1:15), 영적 눈이 어두움(엡 4:18), 범죄로 죽음(골 2:13), 죄 중의 잉태(시 51:5, 요 3:6), 마음이 약함(마 15:19, 롬 3:12~16), 죄와 마귀의 종노릇(롬 6:17~19). 인생은 자체가 나그네의 길(창 47:9), 마른 풀(벧전 1:24), 그림자(전 6:12), 안개(약 7:6), 베틀의 북과 같음(욥 7:6), 안개(약 4:14), 쇠해지는 꽃(욥 14:2), 잠깐 자는 것 같음(시 90:5).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하셨습니다.◦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창 1:27).◦인생의 짧음을 깨달음으로 지혜를 얻게 되었음(시 90:9~1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본분임(전 12:1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됨(사 43:7).◦흙으로 빚음(창 2:7).◦정직하게 지으심(전 7:29).◦지성을 부여받았음(창 2:19~20, 욥 32:8).◦통치권을 부여받음(창 1:26, 창 1:28).◦동물보다 우월함(마 6:26, 마 10:31).◦영혼이 있음(창 2:7).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알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불법적 생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대로 사는 사람들의 정반대적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사회구조나 세상의 흔들림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어떤 실수나 부족함이나 바보 같은 사람으로 지적을 받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존재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다윗이 어떤 형태이든 참회하며 반복된 회개 속에서 사는 이유는 자기의 허점을 아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기도운동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우리의 기도에 대한 정의가 한국적 무속종교에서 출발한 기복을 위한 금욕적 염불이나 극단적 삶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육체적 노동으로 하나님을 개체개념의 대상 곧 섬기는 대상, 나의 공력을 드려야 하는 대상으로 하는 이방 종교적 기도인 것입니다. 한갓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땀과 피를 흘리는 극단적 간절함에 대한 예수님 기도를 모방하려는 예수님과 같아지려는 뱀이 내어놓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의 출발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객관적인 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멀리 떨어진 예수에게 다가가는 행위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구약에서는 제물로 신과 교통과 소통함이라면 신약에 와서는 금욕적인 인간의 끊임없는 몸부림이 결국 기도 응답의 목적인 자기욕구에 대한 갈증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며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이야기요, 영적 호흡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1-16
  • 목회는 쉬운 것이다·76
    바른 신학운동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신학이란 상아탑학문이나 응용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일 뿐 학문으로 논설이나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체험적 신앙이요, 실천적 복음 그 자체입니다. 머리에 맴도는 학문이 아닌 가슴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실천이요, 체험 그 자체입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신령과 진정이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적 대상인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고 하버드대학의 모토로 삼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입니다.그러기에 바른 신학운동이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학문적인 연구로 삼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사렛에서의 인간 예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탄생 때 하늘의 천사가 말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신약성경에만 1,390번이나 나타난 예수에 대한 사건 속에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마 1:18).◦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느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바른 신학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인 것은 예수님의 상황 설명이나 배경 설명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 대한 감추어진 삶 속의 비밀로 인한 생명적 삶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리려는 의욕이나 열심히 아니라 그리고 교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 속에 생명으로 역사 하시는 그분이 내 속에 계심에서 오는 나 자신의 이야기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학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것입니다.영적 생명운동은 오직 믿음입니다. 영성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즉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개혁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믿고 성경이 말씀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육체적인 것들과 악한 것들이 개혁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우상으로 만드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수를 자기 성공의 도구로 사용함은 분명히 믿음이 아닙니다.믿음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믿음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는 분명한 영적 변화인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1-08
  • 목회는 쉬운 것이다·75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라는 주제는 세계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안주하고 있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의식들이 무너져야함은 예루살렘 성전의 무용성이 곧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먹고사는 도구로 매여 달린 수많은 사람들의 수단이 멈추어져야 하는 것처럼 그러기에 예수님이 고발되는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로마 천주교회도 동일한 이방적 신앙 방법에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기독교라는 허울로 로마 가톨릭의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지속적으로 부패라는 큰 덩어리들이 개혁자들로 통하여 무너뜨린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가장 온갖 잡신들에 얽혀 현대교회의 부흥이라는 명예로움으로 우리는 안고 있으며 안주하고 있습니다.유교와 무교와 전통적 습관 속에서 그래도 현실 속에 피나는 고통으로 사신 선진들을 통해 오늘과 같은 터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래도 50년대는 피나는 희생으로 지켜왔다면 서구의 긍정신학인 촬스 피니나 로버트 슐러의 현실 축복에 얽힌 곳에 유럽의 신학과 프로그램이 교회를 마케팅 중심과 기업형으로 완전히 뒤덮어 성경도, 목회도, 신앙 자체가 둔갑된 시대에 장종현 박사는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그리고 선언문으로 현장적 실천을 말했고 이제 그 일의 성취인 근본적 원인에서 목사의 진정한 자리 찾기에 구약적 제사장이 아니라 성경적 목사의 정상적인 위치를 외친 것입니다. 이제 실천적 삶의 확실한 지침을 설명해야 할 차례입니다. 제시와 행동방안입니다. 이미 기본적인 틀은 완성되었습니다.개혁주의 5대 표어가 중심이 된 7대 선언문입니다.바른 신앙운동은 오직 성경입니다.바른 신앙운동은 신앙의 기본이 교회의 의무입니다. 교회의 모든 방편은 성경이기에 성경의 말씀에 여러 가지 인간적 설명이 아닌 말씀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말한다고 설명하다가 말씀의 생명을 놓쳐 버립니다. 신앙의 방법으로 모든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 신앙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의식, 용어(드린다, 섬긴다, 헌신)들이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습관, 멀리 떨어진 우상적 신이 아니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장치, 가운, 꽃꽂이, 십자가, 조명, 화려한 강대상, 강단 위에 앉는 의자, 성찬상, 촛대, 목사의 가운, 영상, 교회 버스 운행, 동일한 제복의 안내위원, 형상물, 성화, 제물, 헌금이란 용어, 교회 돈 관리, 교회 홍보, 기타 우리의 원래의 모습을 가리려는 방법이나 도구들입니다.이런 것들이 제사장 문화에서 발생된 가리개의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 능숙한 로마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한국적인 우상적 이방종교의 신전들이 사용한 도구와 방법입니다.이미 구속을 약속하신 창세기 2장 21절에 범죄한 아담과 여자가 가린 무화과 나뭇잎으로의 고통스러운 가리움을 가죽옷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의 계획으로 성경 전체에 이 의식적 가림에 대한 행위는 무참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그런 행위가 다른 신이요, 우상이요, 입으로 염불하는 그럴 듯해 보이는 망령됨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곧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일 뿐입니다. 그곳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더라“(행 2:47)바른 신앙운동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줍니다. 한국적 의식이 영성을 망가뜨립니다. 설교한 후 광고시간에 다 까먹게 만듭니다. 초신자가 학습받고 세례받는 1년에 모든 신앙이 세속화 되게 만듭니다.예배 순서의 복잡성이 영적 순수성을 망가지게 합니다. 지금의 순서가 유교적 제사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비서도, 순서도, 의식도 없습니다. 신자에게 예수와 함께 계심의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게 합니다.요즘 원터치로 스마트폰 시대에 예수님 만나기를 중간 뚜쟁이들인 제사장들이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어떻게 복음화를 가능케 하겠는가 말입니다.예수님을 만나는데 순서절차나 준비물이 필요없습니다. 70인 전도대원을 보내실 때도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0-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74
    외적인 장엄한 의식을 예배의 본질로 보낸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왜냐하면, 진리의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이요 성령중심적입니다. 찬송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은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으로 화려한 교회장식이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의 장식으로가 아닌 성가대 중심의 찬양보다 회중 중심의 찬양으로 칼빈의 가르침은 시편 찬송을 존중하여 악기사용을 반대했다고 합니다.결국, 인간이 조작한 과잉이 하나님의 진심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복한 설명이 얼마나 영적 감각을 마비시키는가? 오늘 우리가 하는 준비는 모두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훼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칼빈은 교회음악에 정통한 사람이었으나 교회에서 악기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천주교회가 악기를 예배중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적인 감각을 충동하는 이유이고 외적인 오만함과 엄숙해 보이려는 준비된 찬양보다 생생한 음성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신다는 이유입니다.악기는 인간중심적이요 찬양대의 준비조차도 그리고 현대 찬양단의 소란스러움 모두가 인간중심이라는 것입니다.기도에 대한 것도 주문 외우듯,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나 일반적 기도문을 만들어 반복하는 것 모두가 틀에 박힌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을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하는 기도는 주문과 같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형상과 우상에 대한 이야기로마 천주교회의 예배는 미신적이어서 천사나 성자들 또는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깁니다. 오늘 우리가 주께서 금하시는 인간이 고안한 예배가 곧 로마 천주교회를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상징물은 육적이요, 맹목적이며, 무능하게 인간의 본성을 유도하는 것입니다.성의에 대한 이야기성의를 착용하는 것이나 성찬을 받을 때 제단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나 그리고 세례를 베풀면서 성호를 긋는 행위는 성경적인 배경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습관처럼 생각했던 것이 음행하는 죄를 짓는 것이요, 사단이 교회의 중심에 세워 넣은 우상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성찬에 대한 이야기성찬의 의미를 성경에서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이 귀중한 일을 의식에 묶여서 아무 의미를 알 수도 없게 코앞에 들이대 먹으라고 하는 일은 참으로 몸과 피를 범하게 했고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왜 성찬이 필요했는가?주의 죽으심의 확신이 중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일은 그가 죽으심에 대한 일인가. 그가 죽으시기 전의 일인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죽지 않으신 복잡한 사건 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만일 죽으심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일은 헛수고인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설명이나 변명이나 그가 하나님의 일인가 아닌가 따지고 설명하고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곧 생명으로 연결되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이란 새 생명의 확신이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가치를 논설을 펼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그 귀중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코앞에 들이대 자신을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사로 마친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최소한 내가 죽은 예수와 있는가 아직 죽지 이니한 사람들 틈에 있는가를 나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자율의 선택을 주어야 합니다. 이 행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신 이유가 뱀에게 인간적 아주 좋은 조건을 받은 인간 원래의 모습에 대한 양심적 고백입니다. 이럴 때 주님의 죽으심에서 발생한 부활적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주님의 피흘림에 대한 새생명의 환희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0-19
  • 목회는 쉬운 것이다·73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예배의 습성이 루터가 성경을 강조하였으나 구약보다 신약성경을 신앙과 윤리의 기초로 보아 교회전통을 높이 평가하여 성경이 금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나 교회정체에 로마 천주교회의 것을 목사들이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신앙의 원리는 ‘성경이 명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했습니다. 세속정치와 신앙과 윤리만이 아니라 예배와 교회정치도 성경의 교훈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전통과 관습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을 강조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성경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도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과 도덕의 부분적인 규율이 아니라 완전한 규범입니다. 성경이 허락하지 않은 사람의 권위나 전통에 기초한 어떤 것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방법으로 예배할 때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둘째로 전통이나 인간의 고난에 의존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전적으로 부패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교만으로 눈 멀어서 선을 택할 수 없으므로 회개할 수 있게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전통에 호소하면서 인간적인 고난을 예배에 가미하던 자들의 예배의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예배의 지침에 대한 이야기성경에서 예배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제시가 십계명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관한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다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전통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에 따라 드려야 하고 어떤 인간적인 전통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상징물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제3계명은 예배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특히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 속성과 규례, 성례, 맹세, 서약, 분깃, 그 외에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말하며 기록해야 합니다. 제4계명은 예배하는 시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이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제 7일로 지켜왔으나 그 후부터 매주 첫째날로 되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되어 있습니다.이것이 기독교의 안식일이요, 신약에서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청교도들은 일하기 위하여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으로 압니다. 구약의 예배는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의식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예표나 상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미리 보여주기 위하여 비유나 상징을 제정하였고 또한 그러한 것을 통하여 도덕적 의무를 제시했습니다.성막과 성전제도, 번제, 화제 등의 제사제도, 제사장과 제사장이 입던 에봇과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상징이요 예표들입니다.현대교회 목사가 제사장으로 착각함이란 바로 의식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예수님은 예표와 상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에 매여 있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이방적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구약적인 의식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지금 양이나 소를 잡을 필요도 없거니와 제사장의 예복을 입을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화려해 보이는 스톨을 둘러 가운을 입는 것이 거룩한 것으로 착각함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유대적인 제사의식에서 벗어나고 해방한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이제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속에 근거하기 때문에 율법의 그림자나 세상적인 화려함이나 또는 세속적인 미덕과 같이 장엄한 의식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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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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