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3(목)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허광재 칼럼 기사

  • 종교에 얽매임 ①
    마태복음 25장 35~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39절에 “언제 그랬느냐”, 45절까지에서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이슬람교는 연민을 가르칩니다. 무함마드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꾸란에 의는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친척과 고아, 가난한 자, 나그네, 거지에게 그리고 포로들의 해방을 위해 재산을 나눠주는 것입니다.석가모니도 연민을 베풀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힌두교도 미래의 힌두교는 힌두교 유산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헌신해야 합니다.유대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정의를 강조합니다.이들 모두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와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모든 일에 사랑을 강조했습니다.어거스틴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서는 의견의 차이를 딛고 힘을 합치라고 했습니다.종교의 틀에 얽매인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하지만 그들의 일치를 빌미로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거부합니다.칼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칼빈의 주장에 얽매여서 이론 형성이 안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신학 교리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본질이라는 중요한 일을 종교라는 안경을 통한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또 하나의 고상한 이단을 만들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다른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곧 틀이요, 이단성의 본성인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실체요, 소망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사람들, 모두가 그분의 형상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나 마틴 루서 킹이나 간디가 보여준 것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내재한 매우 보편적인 틀을 벗어난 반응인 것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소박한 말입니다. 거기에 나의 존재가치나 성공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분출입니다.그러나 종교집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급급한 조급함에서 영적 정체성을 망각합니다.우리가 행하는 현실적인 시급한 사건일수록 기도하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것이 신앙적 표현인 것처럼 남용합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언사는 현실도피성인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상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은 미래 지향이 아니라 지금 부딪혀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위선적 행위가 곧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즉, 중보기도는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가 아닙니다. 믿음은 현장입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했습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서 기도하겠다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수저 하나 더 놓으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목말라 죽을 지경이라면 물을 주는 일이 신앙입니다.압제자의 학대를 받고 있다면 압제에서의 해방입니다.질병으로 죽어간다면 치료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면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의 가치는 그의 신학이 얼마나 옳으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하나님이 보시는 초점은 사람의 가치가 그의 학문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너희 각 개인의 마음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적 이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이기 때문입니다.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쉬운 것이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2-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21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 진리는 내 정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점점 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포용(은혜)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운영 시스템으로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귀중한 사실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라고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황홀하고 거대한 구속의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회개란 잘못을 뉘우침이 아니라 예를 들면, 밧데리의 기능이 탈진된 상태에 다른 밧데리의 점프로 건강한 파워를 전수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정신을 얻어 신경통로와 패턴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요소(생명, 사랑, 기쁨, 평화, 은혜, 연민, 자유)입니다.즉, 정신을 바꾸어 그리스도의 운영 시스템으로 정착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시스템으로 운영되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그 삶의 원동력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이럴 때 내가 사는 환경이 변화되고 내 경험이, 내 이웃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정신적 변화는 하나님이 이미 깨인 사람들을 통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생명의 역사입니다.이제 결론적으로 신앙의 핵심을 바꾸어야 할 긴박성은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체개념과 개체개념이 죽고 사는 것으로 나누어짐을 말하려고 합니다.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의식적인 위선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합니다.교회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임재는 내 안에 있다. 형식적인 예배 의식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함과 진정한 행복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생각과 기독교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모방하는 사람이나 ‘처럼’ 살게 하는 것은 마귀가 제공한 방법입니다.하나님을 알아서 좋은 점은 그분이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생각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 사랑이요,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사랑과 기쁨을 기다리기 전에 그리스도의 삶입니다.목사, 리더자 그리고 선생이 나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훈련한다는 생각과 내재하시는 성령이 나의 주된 선생이 되신다면 수 없는 실망이나 불만이 사라지고 주의 평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내 행동을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 생각과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겉으로 보이는 육체가 사람의 전부라는 생각과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영적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완전한 삶이란 인간의 행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언제인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과 하나님 나라는 지금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에 방해요소가 바로 여덟 가지 생각에 대한 모순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2-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20
    사랑이 치유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과학에 의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깊이 연구한 가운데 발견한 과학적 증명입니다. 용서의 사랑은 참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창살 뒤에서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패턴이 깔렸습니다. 그런고로 온갖 부정적인 비판과 자기 비하가 우리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이 형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습니까. 거기에서 온 죄책감에 의한 수치심이 상처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늘 두려움 때문에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사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이방 신처럼 개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서 솔로몬 성전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만 계시게 하여 가두어 두려는 참으로 어리석은 그 행동의 유전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하나님은 주일날 성전(예배당)에 가두어 두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돈도 받고 지극히 사랑한다는 허울 좋은 슬로건을 앞세우고 에봇을 걸치고 장자 교단이라는 뚜쟁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여 수많은 제자가 그들의 제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오늘 죽음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개혁주의생명신학 회복을 가장 영적 대안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조금도 변화가 없는데 사람들이 변절하신 하나님으로 둔갑시키는 이유가 자기들이 하는 일에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머리로만 아는 예수정철어학원의 정철 이사장의 말에 한국인에게 영어가 어려운 이유는 머리로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 보니 기독교인들이 머리로만 계산하고 설명하고 머리로 믿는 신앙이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한국 기독교는 머리로 계산합니다. 이 시스템을 유럽신학이라는 죽은 신학의 오염이 급속도로 잠식한 이유가 남의 밥에 든 콩을 중시하는 모방의식에서 장마철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그곳에서 돈 없고 영어 안 되어서 10년 이상씩 있었던 사람들의 콤플렉스가 집요한 자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교수라고 하여 자기 주변을 볼 수 없는 장님처럼 된 사람들이 신학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젖어진 수많은 제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능성을 갖는 사람들에게까지 방해와 무관심과 무력함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언한 중심이 된 사상을 실천을 위한 프로그램이 말과 제시가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내면화해야 합니다.갈라디아서 4장 6~7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이 진리에 눈을 뜨인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머리에서 마음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사건입니까.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예배, 기도, 헌금, 봉사 등 모든 의식이 그리스도가 하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가 신을 불러내는 것과 같이 우리의 거룩한 행동으로 끌어내리려는 무속주의가 한국의 바른 신앙을 망가뜨린 것입니다.우리 마음에 와 계신 하나님 그 생명이 머리 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사실에서 생명적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입니다. 나의 지식이나 이론이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와 계신 예수 생명이 우리의 사상이나 머리의 기능이 생명적 기능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내가 용서와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2-03
  • 왜 성경적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하는가? ①
    인간의 뇌는 반복됨에 의한 반응이 곧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된다고 합니다. 신경과학이나 생화학, 유전학에 의해 우리 뇌는 반복된 경험뿐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 의해서도 프로그램이 된다고 합니다.반복된 경험을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기본 패턴과 구조가 어릴 적부터 형성되며 부모와의 상호 작용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서적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예수님은 동정녀에 의해 탄생되었고, 우리는 평범한 잉태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아담이 정신적 타락이 원인이라면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여심으로 하나님 같은 인간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사실 그 자체가 예수님이십니다.예수님의 순수한 조건 없는 말씀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불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순수한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거짓된 뇌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이들 말대로 “거짓말이지?”, “공갈치네!”라는 말은 거짓말의 체험에서 온 찌든 뇌에서 발생한 자연 반응입니다.이 낡은 ‘시스템’을 망가뜨려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데 소위 우리가 잘 사용하는 고정관념은 그의 부정적 습관에서 온 것이라면 피해당한다는 공포의식에서 자기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병적 집념이 한국이라는 대국의 틈에서 침략만 받아온 한국적 폐쇄심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유대인들이 갖는 선민이라는 의식이 아주 작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신 가나안 복지라는 생각은 곧 잘못된 집착에서 발생한 것이 왕으로 오셨다는 예수에 대한 공포의식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라면 망상적 사고에서 병을 유발시킨 ‘장자교단’이라는 이 낡은 사고를 가진 미치광이들 같은 집착에 계속 교단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는 불치병이 된 것입니다.지금 세계가 모두 공통분모에 소통하는 시대인데도 얼마 전 모 교단에서는 장자 교단이라는 썩어빠진 착각이 학자들에게까지 세균처럼 번져가고 있는데 그들이 무슨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신비한 사실을 알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했습니다.영광스러운 비밀,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생명 회복에서 오는 ‘영광의 소망’입니다.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린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뱀이 약속한 세상적 누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진리에 따라 살기 위한 운영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요 3:36, 6:27~28).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라는 새로운 운영 시스템인 것입니다.크리스천의 삶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즉 창조주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대로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준비하시고 장치하신 예수의 생명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1-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17
    한국교회의 문제점 중 중요한 문제는 종교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틀이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종교적 행사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중예배, 성찬식, 성경을 읽는 시간이라든지 수없는 절기 문화에만 국한하는 이유가 이방 종교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교회가 주일만의 행사와 무수한 프로그램에서 학자들의 주석이나 학문적 틀에서의 교회의 정의와 용어가 이방 종교적 해석이라는 점입니다.목사들은 그 틀만 붙들고 있는 제사장이란 잘못된 인식이 삶과는 관계없이 교인을 몰아붙이는 형식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들의 가슴에서 울렁이며 기쁨과 확신을 주는 예수 생명이 그런 종교적 의식에서 무수히 소멸하고 암 덩어리처럼 굳어 있습니다.우리 자신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일하든 고민하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입니다.예수님은 예수의 생명을 자연 비유를 통해 영적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겨자씨, 무화과나무,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 알곡들, 물, 불, 해, 사람, 비 같은 것이나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주님은 설명하셨습니다.회당에서 예수 생명을 학문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예수 생명을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 조용하고 고독한 곳을 찾으신 것입니다.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질문한 그들 속에 이미 있다고 하신 것은 이미 너희 속에 예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예수 생명은 인간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를 순간순간 사람의 노력으로 응답하시는 무속적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미 너희 욕구나 목적이나 정욕의 간절함 이전에 내가 너와 함께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종교적 행위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회당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이기 전에 이미 교회 오기 전에 이미 내가 원하는 복을 너희 삶 가운데 주셨으니 주일은 제시가 아니라 감사와 축제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속에 왔다고 하셨습니다.틀에 갇힌 이유는 성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종교의 틀에 가둬놓고 종교라는 안경을 쓴 채 모든 구절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의 역할을 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해석해 놓은 소위 학자라는 전문가들의 생각에 의한 해석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는 능숙한 수법이 성경 원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학문으로써 끝내려는 현대 알 만한 지도자들이 하나님과의 순수한 각 개인만이 느끼고 감동될 수 있는 실재를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요한복음 7장 18절에서는 아주 귀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위한 것이 곧 학문입니다”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심은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뿐이었다는 것입니다.만일 개인별로 다가와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오늘과 같은 수단과 방법에 능숙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하는 아는 사람들의 논리나 증언이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기적 중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은 영적으로 필요한 일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영적 눈이 치유 받으면 성경이 성경으로 바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와의 공동체적인 가장 실제적인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현장에서 겪어야 할 일이며 목회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방법이었습니다.거 기까지는 제자와 함께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다음 구분이 구속자로서의 고난이나 십자가 지심과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그리고 우리와 40일을 함께 보이시고 승천하신 일은 그분만의 몫이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1-05
  • 목회는 쉬운 것이다·16
    저는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회복시킬 필요성은 곧 엠마오로 가던 두 청년의 눈을 뜨게 하는 역사입니다.기독교가 일반 종교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특정한 장소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속에 계십니다.종교로 둔갑한 유대 종교나 이슬람 종교나 모든 이방 종교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경전을 중심으로 합니다.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성전의 고정관념을 깨셨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사실이 기독교만의 유일한 신앙입니다.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시편 46장 10절에서는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자기 성공에 미쳐버린 사람아 좀 분주한 손을 멈추고 하나님이 너와 관계없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불가능한 이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는 것과 같습니다.“이는 하나님은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20).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내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십계명 중 하나님과 관계되신 4계명은 완전 불변의 법칙입니다. 불순종이 사망이라는 말은 단번에 숨이 끊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란 살아있으면서도 자유함이 없이 고통의 연속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질병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오렌지 나무는 분명히 오렌지 열매를 낳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의한 고통이란 말입니다. 나무가 굳이 물고기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더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예수 생명 회복운동이란 어설프게 생겼을지라도 성형한 얼굴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대로 가는 것이 마음에 평안을 준다는 것입니다.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닙니다. 매순간 내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신앙의 본질도 교회의 원래 모습의 회복에서 가능하며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실개천이든 큰 냇가이든 강물이든 관계없이 어떤 모습에서도 환경에서도 생명의 흐름이 바른 신앙이요, 바른 목회입니다.우리는 습관처럼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목회 성공이란 어떤 형태든 그 안에 멈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교인이 작으면 목회에 실패했다 합니다. 이렇게 비난하는 습성 때문에 제자들이 겁먹어서 교회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할 일은 격려와 배려입니다.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에게 자녀가 60세가 넘어도 어린애로 보는 자연스러움이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잘못 사용하여 비난할 때 자녀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한국적으로 잘못된 표현 방법이 한국교회가 엉켜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옛날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바른 제자로 성장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지금 현재를 칭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창세기 1장 27절의 깊은 뜻은 변함없이 성경 속에 나온 사건과 인물들에게 임했던 것처럼 지금도 유효함을 알게 하는 것이 예수 생명의 회복인 것입니다.사람들은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적 삶이 아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는 것은 진리의 순수성입니다. 내가 나인 것이 곧 진리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어진 현장에서의 자유함을 갖는 것입니다.바른 신앙의 정체성을 알면 우리는 천국의 미래적 기다림이 아닌 현재적 삶인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생명의 삶입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심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한 몸 되심이 바로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평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곧 평안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15
    이 시점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에서 ‘바른 신앙운동’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그 뜻을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신다는 중책감을 사명으로 느껴야 합니다.예수님은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 있는 곳으로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는 반대로 건물을 세워놓고 “오라”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닌 부류로 만들어 집단주의에 모이게 하는 사단의 방법인 것입니다.오라고 하여서 한 그물에 넣고 자기 재산과 그룹을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그런 사람들로 묶어 가두어 놓고 갖가지의 법을 만들어 붙들고 있습니다.베드로에게도 그물이 넘치도록 잡은 것은 어부의 꿈이었으나 성공적으로 이룬 고기를 버려두고 나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성경적 교회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바울의 기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있기를 빈다.”라고 했습니다. ‘가라’와 ‘오라’는 매우 다릅니다. 가라는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오라는 멈출 수 있는 시설이나 장치와 법이 필요합니다. 가라가 주님의 말씀이라면 목회학이 필요 없습니다. 모양대로 주먹구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이론이나 체계나 성공이나 성장이라는 용어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분명히 진정한 교회는 오라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고 할 때는 교역자가 무한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학교의 확장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라고 불러 모으면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대기업화된 교회의 수장이 된 목사만 있어도 됩니다. 한 기업이 문어발처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적 교회는 존재 가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영적 현실을 담기 위해서 새 포도주의 필수 요소들은첫째, 예수님이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은혜와 포용을 받고 내면화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이 은혜입니다.둘째, 하나님 그리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이자 핵심 원칙이 사랑입니다.셋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사람들끼리의 영적 연합이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코이노니아의 개념에서 초대교회는 일상 속에서 이런 영적 진리를 실천하는 모습이 분명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고 조언하며 살았던 장면이 사도행전 2장의 삶이었습니다.성경에는 슈퍼스타인 목회자와 목회 개념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지체로서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지체가 머리에 붙어 존재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기독교가 고도로 조직화된 교파의 시스템으로 쉴 새 없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기업과 동일한 조직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그런 모습을 한국의 최대의 교회 집합체라는 한기총을 모델로 백일하에 인간의 최고 추한 꼴인 금권을 드러낸 것입니다. 총회도 목사가 모이는 곳마다 돈에 눈이 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명분 있는 거짓과 위선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는데, 바른 신앙이라고 강요당하는 것입니다.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처럼 기능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교회 즉 지체로서의 솔직함을 위선 하려는 데서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하나님으로 만들고 천국을 가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와는 만날 수 없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하나님과 철저히 거리를 두는 이유가 바로 오늘 교회가 아방궁 같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로 인간의 목적과 성공에 초점을 두는 기업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이 귀중한 사실을 하나님은 말해야 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멸망을 즉석에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예고하십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2-15
  • 목회는 쉬운 것이다·14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이 말의 정확한 번역은 “가면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입니다. 빌립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영적 문제로 고민하는 남자를 우연히 만나 성경 공부를 인도하게 되고 그 덕분에 그 남자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눈을 뜨게 됩니다.하박국 2장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함께 사는 삶 자체가 교회입니다. 목회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내가 속해 있는 그곳에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한 예로 마치 마을 이장이 마을 주민을 돕는 것처럼 교회가 처한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교회 생산의 방법과 중요성은 한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교회도 교회를 생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합니다.교회에 대한 의미 부여에 따라서 바른 신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한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처럼 머리와 지체라고 하여 결국 한몸이라는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목회자가 한국적 유교적 관습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사람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서의 숙련공으로서 다양한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목회라는 사실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방향을 가르치는 것이 목사가 아니고, 그 지시함을 받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목사이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한 존재로서 이 땅에서의 임재가 목회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위선적 표현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바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 그 자체인 것입니다. 목회나 전도도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웃집 문을 두드리고 서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전도요, 목회인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아주 먼 곳까지 와 있습니다. 교회를 성과 위주로 기업화하려는 목회는 결국 교회가 아닌 기업으로 조건에 의해 타락하게 되어 거기서 또 다른 어려움이 산출된 것입니다. 그 대표가 한기총 집단일 수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발언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똑같은 손짓만 하는 이야기는 교회의 근본적 변화를 말할 수 없도록 모두가 올무에 묶여 있습니다.최소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 그 무서운 올무에서 해방하게 해야 하는 이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통적인 형태와 구조와 종교란 틀 속에 가두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모세 시대는 모세의 법이 구약종교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희생제물이 있어야 하고, 제사장제도가 있어야 하고, 장막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 가지를 모두 완성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드려진 진정하고도 완벽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장막 자체가 하나님과의 연결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몸 혹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로서 서로와 세상을 향해 사역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에 있어서 필수요건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거룩한 장소 개념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역사적으로 보면 A. D. 200년까지 교회 건물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는 마치 산불처럼 거침없이 퍼지는 현상이었으며 기동성, 유연성, 관계, 겸손, 포용 같은 특성을 보였다고 합니다.유럽교회들이 교회당의 훼파가 그 거창하고 아름다운 예술적 가치를 가진 성전이라는 무용성을 우리는 뒤늦게 교회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실패한 기독교의 모습을 뒤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2-08
  • 목회는 쉬운 것이다·13
    첫째, 누구나 교회가 건물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모든 행동으로 보아서는 교회가 장소요, 건물이며 교회활동이 특정한 날과 특정한 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그 귀중한 제시가 성경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7:49, 행 17:24, 사 66:1).우리는 십계명을 범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십계명을 범했다는 것은 지체로서 머리와 이원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교회가 아니며 로마서 1장 24~27절 말씀대로 ‘내버려 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십계명 중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의 중요성은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표시가 됩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동체임에도 섬기는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없는 신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자기 성공과 자기가 주인공이 된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망령되이 일컫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뇌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성공을 위한 수호신으로 일컫고 있습니다.◦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든 신을 만나는 날일 뿐 구속주신 주 안의 삶 자체와 주일 개념이 안식일이란 개념에만 중심이었습니다. 교인을 만들고 있을 뿐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다른 사람을 섬길 영적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교회는 이런 진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직원 중심으로 한 계급 구조는 소수에게만 의존하는 건강하지 못한 패턴을 낳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보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더 가깝고 성경 지식과 영적 지혜에서 월등하다고 생각합니다.자녀의 영적 교육을 아동 목회 프로그램과 부교역자들에게 철저히 의존합니다. 아이들도 아버지와 엄마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려 하지도 않고 책임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속사람)부터 변한다고 가르치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적 모습을 신앙 성숙의 척도로 강조하고 있어 위선적 삶을 살게 했습니다.예를 들면 잘 입고, 예배 행사에 잘 참석하고, 남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고, 헌금을 많이 내고, 성경을 자주 인용하고, 앞에 나서서 일하고, 교회의 많은 직책을 맡고, 전도를 많이 하고, 자녀를 예의 바르게 기르고, 나쁜 습관이 없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가르칩니다.여기에서 부작용은 잘 보이려는 위선에 능숙하게 할 뿐 부족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게 하는 시스템이 현대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헌금한 재정이 잘못된 곳에 사용됩니다.신자가 드린 연보가 교회의 시스템에 의해 사용되기 때문에 현장적이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곤궁한 사람에게 나누는 일이 복잡해졌고 재정이 목회자의 꿈을 성취하는 정치하는 비용으로 편중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 없는 형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회는 장소나 프로그램 그리고 조직에 빠지게 되어 교회로써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일들 교 회는 건물이, 당회, 제직회나 직원 그리고 프로그램이 없어도 교회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빠져든 교회, 세상적 올무에 묶인 교회를 바로 구출하는 일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핵심은 관계입니다.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세상과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여러 모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누구와도 함께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런 작고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교회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장소와 시간, 사람의 무한한 관계에서 예배, 제자훈련, 교제, 선교, 봉사, 책임성, 베풂과 같은 교회의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의 만남과 사건에 늘 눈과 귀를 열고 살아가며 그 속에서 나타나는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할 줄 아는 신자들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1-24
  • 목회는 쉬운 것이다·12
    성경이 삶의 유일한 표준임을 믿는 신앙운동은 2011년을 정점으로 하여 교회 지도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백일하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대단히 중요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이 발표됐습니다. 선언문 중 바른 신앙운동, 바른 신학운동, 영적 생명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 그리고 나눔운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찾는 것이 개혁주의생명 회복을 위한 의미였습니다.우선 미국에서 대형교회를 했던 짐 팔머라는 목사가 얘기한 담임목사로서 봉사하면서 후회스러웠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그는 교회는 세 가지 수준에서의 기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명분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둘째, 공동체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임. 셋째, 기업성입니다. 지불해야 할 청구서, 맞추어야 할 예산, 유지보수해야 할 건물, 운영해야 할 프로그램, 유급 직원을 갖춘 조직 등.교회는 명분과 공동체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는 사실인데, 그러나 교회가 기업적 측면이 실용적인 필요성과 효율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일이 가장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교회적인 사명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목회 성공의 기준은 크기(출석률, 예산, 건물)가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므로 기업화되어 가는 모습입니다.담임목사로서의 자존감(신학, 학위, 계급체계)이 상위석이라는 허영심으로 불일 듯 일어나는 모습입니다.숫자에 집착하고 교파적 자존감과 리더로서 자질만을 위해 컨퍼런스나 세미나, 성장의 과정성에만 매이고, 연구 또는 봉사나 겸손의 순수성은 계속 상실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예배 출석 인원은 얼마인가?◦ 주일학교 아동의 수는 얼마인가?◦ 소그룹 참여 인원은 얼마인가?◦ 직원 수는 얼마인가?◦ 헌금은 얼마인가?◦ 교회 건물은 얼마나 큰가?◦ 주차장은 얼마나 넓은가?◦ 부지는 얼마나 넓은가?◦ 성공의 본보기인 세미나와 간증으로 얼마나 유명한가?이와 같은 기업적 측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목회성공이요, 교회성장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하고 공동체와 명분의 기능으로 진정한 교회 상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현대교회의 목회자가 바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이와 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과잉보호와 시스템에 적응시키고자 훈련된 목사와 직원들의 감시가 교인들의 영적 탈선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마치 이단과 같은 빈틈 없는 조직에 신자들을 얽매이게 하여 진정한 순수한 예수님과 하나 됨에 대한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목회자의 개인적인 체면과 자존감과 생계 및 교회 유지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달렸다는 기업적 사고가 신자들의 참여와 지지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상태에서 목회자로서 진정한 도를 벗어나게 되고 마치 조직에 대한 참여가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 행사 중심(절기, 축하, 감사, 임명, 기타), 성경 공부(프로그램 교재 중심, 성경적이 아닌), 헌금 강조(수많은 제목), 필요한 자리 채움, 교회 위원회 활동(소그룹, 갖가지 모임), 방문자의 끊임없는 방문, 애쓰고 땀 흘리는 것과 천국 간다는 조건부터로….결국, 목회가 추구하는 목사의 기업적 방향에 의한 모임 중심이 옳은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이와 같은 목회방향에서의 결과는 예배와 성경 공부, 프로그램, 소그룹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끝나면 다음 모임 때까지 아무런 교제가 없이 관계도 끝나버리는 것입니다.현대 목회자가 순수한 신자들의 자유로움의 신앙적 방향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한 몸으로서 머리와 지체의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분명히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1-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