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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11
    한문으로 예배란 단어의 의미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문자로 보면 ‘신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한다’라는 뜻입니다. 일반 종교적 개념에서는 예배란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배란 특히 예배를 드린다는 습관적 인식이 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져옵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예배란 한문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나 무의식 간에 신 앞에 절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여 참된 기독교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이와 같은 현대교회의 개념은 절대 기독교적 신앙의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내 속에 와 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생각해 봅시다.최소한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분의 내재로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아닌 동체적 삶에 누룩이 들어가 모두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술로 표현된 발효된 상태적 삶이 예배적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우리는 그분과 함께 삶에 대한 자연반응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빛의 삶이요, 소금적 삶을 강조하신 이유입니다. 빛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없는 것이요, 소금으로서의 삶은 부패할 수 없는 소금의 소멸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뜨거운 물에 커피가 들어옴으로써 물보다 커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포도 열매의 희생으로서의 와인인 것입니다. 원래의 맛은 있을 수 있으나 형태의 살아짐입니다.‘예배를 드린다’ ‘예배 본다’라는 우리가 편의상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결과가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어떤 제물을 바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나는 지금 예배학적인 학문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있는 잘못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만일 하나님에게 제사(제물)을 드리는 개념으로 예배 행위를 갖는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인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지 않은 구약적으로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개념은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을 보십시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며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예수의 단번에 드린 십자가의 역사를 무용화시키는 데서 오는 교회의 의미 상실을 반복하게 하는 또다시 제사를 드린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부하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예배에 대한 바른 개념을 설명한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히셨습니다. 5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3절에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 하였는데”란 곧, 장소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21절에서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니.”이스라엘이 분열될 때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로 나누어지면서 북쪽사람들은 국경을 못 넘는 죄책감에서 ‘그리심산’에,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신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가짜라고 하여 무시당한 갈등 가운데 있는 그 중간 벽을 허무신 장면이 요한복음에 생수의 공급의 원리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의 진정한 정의를 정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신령이란 로마서 12장 1~2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진정이란 진실하게, 참되게,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신령한 예배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곧 헌신이란 뜻입니다. 헌신은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몸을 드림은 인간 예수와 하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에서 온 거울 속에 나를 비췄으나 그리스도의 모습만 나타나는 것입니다.아내가 거울 앞에 설 때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편의 얼굴만 보이는 것이 한몸이란 머리와 지체의 완성을 말합니다. 머리와 지체의 정상적인 관계 완성이 생명소통이 가능한 정상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1-02
  • 목회는 쉬운 것이다·10
    갈라디아서 1장 6~10절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자나 요란케 하는 자나 받은 것 외에는 사람을 좋게 하고,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다윗을 통하여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해달라는 소원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며, 솔로몬이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집을 지은 것이지만,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사도행전 7장 46절 이하의 말씀을 반복하면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목사가 제사장인가?신당에서는 필연적으로 제사장이 요구됩니다. 제사장 없이 신당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단 종파임을 증명하는 것은 교주가 필연적입니다. 불교에서도 주지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당문화란 제사장이 만든 것입니다.예수님 시대에도 그와 동일한 사건에서 보면 신비적인 체험에서 오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가 베드로가 변화산상의 고백일 수 있습니다(장막 셋을 지어 모셔두고 싶은 심정). 하나님을 한 곳에 가두어 관리하려는 인간의 본성입니다.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가 우상을 섬기는 불교와 통하는 점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입니다.사람들이 기독교 성지순례란 여행에서도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념관이나 흔적을 남기려는 이들의 신당을 관람하는 것일 뿐,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 보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런 여행을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입니다.신당을 중심으로 한 모든 종교는 제사장이 있어 신을 대리해서 백성에게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중보적 역할이 곧 제사장이었습니다. 신당은 위엄이 있고, 웅장하고 신비롭게 단장되어 제사장의 권위를 높아지게 하는 것입니다.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제사장 된 사람은 신당을 꾸미는 일에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당의 규모와 꾸며지는 정도에 따라서 신의 권위도, 제사장의 권위도 함께 높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바로 이런 허망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탈교회로써 진정한 교회가 개척도 불가능하고 엄두도 못내게 하여 유럽이 관광지로써 파괴되고 신당문화에 가장 근사치 된 이슬람으로 모두 둔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는 지적하지 않고 입만 살아서 계속 논설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사람들은 소속된 곳을 위해 제물도 아낌없이 바치고 신당 건축으로 영향력 있는 방법으로 부흥시키려는 또 하나의 욕구를 이루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습니다. 단 회개보다는 나 자신을 복 빌어주는 위임된 제사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갈수록 우상화 하는 가장 하나님의 축복된 교회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구약의 신당에서 도입된 제사장은 전적으로 인간의 범죄의 중보자로써의 역할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음은 중보자로 오셔서 완성하신 사실을 무용하게 하는 주역들이 목사라는 점입니다.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약교회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다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버렸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른 증보자는 영원히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중세교회에서 교회당 문화의 필수적인 제사장(대리인) 제도를 다시 도입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교황이나 신부의 사제제도가 도입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하나님은 교회당 속에서만 갇혀 있을 수 없기에 루터를 비롯하여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당 벽을 헐어버리게 하신 것입니다.예루살렘교회의 훼파와 유럽 전통교회의 폐허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아주 쉽고 명쾌한 답을 숨기고 있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히 기업성공의 원리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가려진 중간 상태가 있는 한, 그리스도의 생명은 절대 소통될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원리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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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9
    지금 우리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여 건축하여 헌당 시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습관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에만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이사야서 66장 1~4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없고…”구약교회가 결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첫째는 이방 나라를 본받아 왕을 요구했던 일, 둘째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을 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살후 2:11~12). 24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이방 나라를 본받아 왕을 세움은 하나님을 정치권에서 밀어내버렸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을 그곳에 가두어버리는 결과로 인간 중심에 빠지게 했습니다.중요한 것은 인간들은 집을 지어 성전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그곳에 모셔두게 하고 자기들의 편리를 따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사도행전 7장 46~48절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자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때 터무니없는 인간들의 행동에 참고만 계실 수 없는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성전들을 헐어버리시기를 계속하십니다.하나님이 헐어버리신 것을 지금도 계속 성전이라며 짓는 것이 목회성공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어찌된 일입니까?하나님의 원하시는 성막은 출애굽기 25장 8절과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찌니라”.이 말씀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되심을 실증하신 것이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성막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 역할자 즉, 중보자로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할이었습니다.이 성전을 헐라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라는 구속 사역의 마침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전의 무용성입니다. 외형적 건축물인 신당의 무용성과 동시에 신당으로 먹고사는 장사꾼들이나 모든 구조물들이나 의식과 제단과 장식까지도 그리고 신적 권위자들까지 모두 정지시킨 것입니다.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구성체라면 그리스도는 그 중에 거하시는 분입니다.광야에서는 성막이 있고, 가나안에서는 성전이 있고, 신약교회에는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전은 예수일 뿐이지 교회가 아닙니다.예수는 교회 안에 거하시는 영이시고, 그 영을 받은 성도가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오늘날 교회당의 원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전의 의미를 혼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당이 성전의 개념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당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에게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는 예수께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형태이든 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이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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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6-10-12
  • 목회는 쉬운 것이다·8
    구약, 즉 모세의 율법에 중심으로 한 교회가 필요했던 근본적인 사건은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 즉, 언약의 파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한 삶이었습니다. 이때는 교회란 따로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에덴의 삶 자체가 교회의 생활이었습니다. 천국에는 교회가 필요 없듯이 그 이유는 하나님과 동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가 가로 막았기 때문에 버려짐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별거에서 필요한 것이 교회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만남은 이때부터 가교인 중보자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즉, 가교의 역할이 교회이며, 중보 사역자로 제사장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적 성격으로 광야의 성막에서나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이때의 하나님은 성막의 임재로 백성 중에 거하시는 형태였습니다. 구약교회는 성막이나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필히 중간 역할자로서 수종자가 필요해서 제사장을 비롯 레위 족속이 선정되었습니다(조성범 목사의 신당문화에서).화목 제물로써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은 성취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그리스도 자신이 되셔서 구약시대의 성막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만남, 즉 동거를 이루신 것입니다.에베소서 2장 13~19절을 보시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신약교회는 성도 자신이 곧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임마누엘’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와 반면 우리가 구약교회 개념에 빠져서 형식이나 의식적 삶은 하나님을 사람과 분리된 자리에 계셨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은 기독교인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제물과 행위로 찾아가서 만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며, 십자가 사건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그의 영으로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구약교회의 하나님의 위치와 신약교회에서의 하나님의 자리는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은 성막을 통하여 만날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직접 우리 자신이 만날 수 있는 것이며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구약교회처럼 성막(성전)이나 성막을 섬기는 레위인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교회에서 가르친 것들은 초등학문입니다. 신약교회에 살려면 구약교회에서 요구했던 것을 지금 요구한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백지화하는 것이 됩니다.솔로몬 성전에 대하여우리는 솔로몬 성전이 교회의 뿌리로 생각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전신은 성막입니다. 출애굽 후 모세를 시내 산에 오르게 하여 그곳에서 성막 건설을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 26장 1절부터 보시면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암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성막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써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고,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동할 때도 장막 중앙에 언제든지 설치했습니다.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 때의 성전 건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사무엘하 7장 2절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장 7절에 보시면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성전 건축을 하나님 편에서 요구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하였사오나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이다”라는 것이 성전 건축을 끝낸 후 헌당사에서 나타난 솔로몬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이 전을 건축했으니 이곳에서 영원히 계십시오.”의 요청은 솔로몬 편에서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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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6-09-29
  • ■⃟ 목회는 쉬운 것이다·7
    오늘 교회를 바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 구약교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족장교회 시대는 가족적이었습니다.하나님의 선민으로써 가족이 곧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원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일 수 있습니다. 족장 시대의 특징은 선택된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는 일에 있어서만은 탈락될 수 있어 선택과 유기가 정확하여 언약에 따라 할례가 시행되었다 해도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인데 광야 교회에 와서도 가나안 교회에서도 동일했습니다.광야 교회는 단일성이었습니다. 광야교회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자손이 소가족 단위를 벗어나서 민족 단위의 거대한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광야 교회의 특징은 거대한 교회일망정 이것은 단일교회였습니다. 모세를 중심으로 한 모든 조직이 단일성이었다는 것입니다.“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과 함께 광야 교회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8).하나님의 교회는 둘일 수 없어서 분열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고라당의 반기는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선지자인 모세 그리고 제사장인 아론으로 제사장은 어디까지나 선지자 반열에 서 있는 모세의 뜻을 따라 그 직임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교회 역사 중 흔히 제사장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거나 죽여 없애는 것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사람이라도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음은 곧 구원받은 자의 한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바울은 이때의 교회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음료를 마신 성도라 해도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증거하면서 이때의 사건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가나안 교회는 정착이었습니다. 가나안 교회의 특징은 정착교회라는 점입니다. 이때 성도들은 ‘먹이는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였습니다.호세아 13장 6절을 보면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이 때가 정치는 왕이 하고, 종교는 제사장이 통치하는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시켰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와 결탁함으로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소외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면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그곳에 가두어 버리게 했습니다.인간들은 성전을 찾아가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뿐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는 넓은 땅을 두루 다니면서 자기들의 욕심과 정욕에 따라 범죄 하기에 바빴습니다. 현대 교회와 아주 동일한 현상이었습니다.이들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으로 인식시켰던 이유가 제단이라는 중심적 행위로 제단지기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가 분열되고, 백성은 세상 술에 취해 있고, 제사장은 돈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었고, 선지자들은 거짓 명예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일삼았습니다. 왕은 백성을 강포로 다스리고,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불살라지고, 백성은 사망으로 유리하게 되었습니다.이런 사건은 예수님 당시도 동일했습니다. 상처만 남은 하나님의 나라요, 교회의 지도자들은 헛된 권위와 썩어빠진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말씀을 멀리하는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마태복음 3장 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요한의 외침은 당연한 선포였습니다. 이 선포로 인해서 구약교회 시대의 문은 사실상 영원히 닫히게 된 것입니다.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만일 그 성전이 회복된다면 세상은 끝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그 꿈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신약교회는 구약교회의 뿌리입니다. 구약은 신약교회의 예언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거울이요 모형 즉, 설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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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6-09-23
  • ■⃟ 목회는 쉬운 것이다·6
    교회의 일체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내용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22절이나 4장 1~16절에서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교회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의 무리입니다. 교회란 과정일 뿐이요, 진행입니다. 즉 임시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정착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수단일 뿐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거하였으니.”교회는 출애굽 후 광야의 삶입니다. 항상 이동형이요, 광야교회입니다. 언제나 이동할 수 있도록 성막을 비롯해 법궤나 번제단 등 백성의 장막 기구들은 한결같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꿸 채와 고리가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이 보이고 함께 살 이유를 발견하여 교회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위협은 정착을 강조합니다. 불균형적 상태는 마귀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마귀의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계략은 정착하기 위한 방법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현대교회가 나그네의 삶이라고 강조하지만 수백 년을 버텨낼 돌집을 짓고 지속적으로 수양관, 교육관, 기도원, 묘지까지 세상의 보장을 쌓아놓는 이유가 교회의 타락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리에서 벗어나 마귀의 관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꿈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병들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구약교회가 병들기 시작한 것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부터였습니다. 나그네적 개념이 정착으로 변화된 요인이기에 예수님은 이 거대한 인간적 최대의 충성심이란 예루살렘 성전이 신당으로 타락된 집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사람들은 왜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지속적으로 인간의 탈교회의 꿈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앓는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솔로몬의 희망사항으로 고백했던 그 고백을 한국교회는 반복되어 성전이라고 이름한 교회당을 짓고 헌당 예배에 부르짖고 있습니다.열왕기상 8장 12절을 보시면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니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솔로몬의 성전을 현대적인 교회건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보시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있느니라.”교회는 전투적 의미입니다. 죄악과 싸움이 아니라 세상 권세와의 싸움입니다.세상 권세와의 싸움이란(세상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전투적이란 의미를 대항적 전쟁의 개념이 아닙니다. 교회의 의미는 확신입니다. 악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악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맡겼는데 마귀는 여자를 선택하여 에덴의 삶을 잃게 했습니다.하나님은 아벨을 선택하였으나 가인은 마귀를 선택하여 아벨을 죽였습니다. 다시 셋을 낳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인간이 부패하여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였습니다.이 같은 싸움은 중세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훈련도 가나안의 전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현대교회의 무력함도 전투를 위한 군사적 영적 의미의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9-08
  • ■⃟ 목회는 쉬운 것이다·5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사도행전 17장 24~25절에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농부일 때는 농장에서도,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에서, 기술자일 때는 공장에서, 교사일 때는 학교에서, 예술가일 때는 예술작품 안에서,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한 몸 관계로 각각 개인 안에 찾아오셔서 함께 계신 분입니다.교회에 대하여교회란 부름 받은 무리 즉 하나님이 불러내신 무리입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된 선택된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가운데 있는 무리를 모세를 통하여 광야로 불러낸 것입니다.사도행전 7장 38절에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장 53절에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천사의 율법이란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율법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0장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려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부르신 목적은 구원의 소명과 사역의 소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과된 사역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사역이 동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믿는 자와 사역자로 나누어져 믿는 무리는 사역의 사람들에게 사역권을 넘겨주게 되는 결과입니다. 신약시대는 전도 즉 선포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오늘 우리는 경쟁의식을 불러 넣어 무서운 병이 들게 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2장 43~47절에서는 성령이 임하신즉슨 불러내신 하나님의 소명에서부터 온 자연 발생이었기에 47절에서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는 부흥의 일은 인간의 공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하심을 우리는 교회의 의미를 잘못 인식함에서 오는 인위적인 부흥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전도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이유가 바로 성전문화와 신당문화에 매인 상태에서 온 교회당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룹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전도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증거한다’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넣어두려는 것이 전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이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또한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열심과 노력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얻고 못 얻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하나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칼빈의 선택교리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모순임을 지적했습니다.중세교회가 면죄부만 사면 죄를 용서받고, 죽은 부모가 천당 갈 수 있다는 천당 티켓처럼, 오늘의 교회당에서 천당 티켓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천국 가기 위한 무수한 조건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행위는 분명히 기독교 신앙적인 표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부르심은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대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라” 교회당을 키우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신자들을 충성이라는 명분으로 쥐어짜서 목회 성공의 척도가 거대한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조건부 면제부를 돈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화려한 형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선교적 목적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연성일 뿐입니다.교회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무리는 부름 받은 순간부터 평준화된 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준화란 빈부귀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9-01
  • 목회는 쉬운 것이다·4
    성전 문화는 기독교가 아닙니다어떻게 해서 교회가 신당인 성전 문화로 변했는가?주후 313년경 거대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모든 종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자기들의 방식대로 믿을 수 있게 했습니다.로마에 예속된 종족 모두는 정치적으로 지배를 받으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함과 동시에 그 속에 황제가 믿는 신앙 방법으로 마침내 로마의 국교로까지 발전했던 것입니다.이 순간이 주 후 313년이었습니다. 로마인은 기독교라는 우산 속으로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방 종교문화가 자연스럽게 교회의 의식이나 조직의 가치 개념들에까지 유입되었던 것입니다.이때부터 가장 치명적인 것이 교회당 문화이며 절기 문화 그리고 사제 문화입니다. 이 이방적 문화가 버젓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이방 종교의 형태는 신당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히랍의 아폴로 신전, 불교의 사찰, 이슬람의 사원과 같이 신당 문화는 불교의 것도 받아들여 가톨릭과 불교의 공통성을 갖게 되었습니다.이 신당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중세교회가 교회당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가 되었습니다.출애굽기 20장 23절에 “어떤 형상으로도 나를 만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과 같을 수 없는 점입니다.교회당 문화에 매달리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구약교회의 실패작인 예루살렘 성전이나 이방 종교 문화가 유입된 천주교 문화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완성한 십자가의 역사를 무효로 만든 것입니다. 이 무효 속에 현대 기독교도 깊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함께 동거하고자 십자가 사건을 치른 것인데 이미 다 이루신(요 19:30) 것을 하나님과 별거하게 한 것이 교회당 문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온 이방 종교로 둔갑하게 하여 놓은 이유는 또 하나의 인간이 가로막는 권위로 제사장 문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혼적인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삼분설의 시작이었습니다.삼분설은 주님이 친히 보이신 것은 죄인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고자 보이신 성찬에서 그리고 구속받은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거하신 공동체가 교회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교회당 문화가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여 진정한 교회를 거리로 쫓겨내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로마를 내어주고 교회를 통째로 삼켰다”라고 탄식한 사학자의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교회와 교회당은 엄격히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 된 교회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것을 바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교회 목회자의 꿈이 되었습니다. 이 착각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교회당을 생각하고 있다는 불행입니다. 곧 성전으로써 하나님을 모신 전이라는 무서운 착각입니다.여기에서 목회자로서 불안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인 주석을 쓰는 것이 신학자들의 허망한 꿈이 되고 있어 더욱 하나님교회에 위협과 불안을 갖게 되고 그리고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좀 배웠다면 모든 주석이 잘못되었다고 무시하고 또 하나의 자기주장을 논설하고자 함이 신학자들의 꿈이 되었습니다.교회당 문화란 교회는 교회당을 가져야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교회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교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집 혹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사상을 신자들이 갖게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엄청난 죄악입니다. 교회당 강단을 신성시하여 거룩한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특별히 꾸미고 장식하고 엄격하게 구별하여 십자가를 걸고 촛대를 세워 촛불을 켜는 행위도 그리고 꽃으로 장식하는 일이나 휘장을 치고 교회당에 나가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됩니다.교회당과 교회를 혼돈하여 하나님의 전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를 우상의 신당으로 신이 있는 집으로 신전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당에서 불리는 하나님은 이방 신들과 다를 바 없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을 비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8-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3
    사람이 만든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마태복음 23장 4절부터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마 23:1~26)라고 규탄한다.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강조한다면 분명히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인간은 종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생한 이교도적인 행위를 통틀어서 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이런 것들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격식이나 방법이 필요하다면 또 하나의 무속종교가 된 것입니다.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의 삶이 기독교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사의 새끼들의 행위를 현대교회가 반복하고 있다면 분명히 기독교가 아닙니다.어마어마한 외형적 형태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호화로운 건축으로 세상에 기독교의 위상을 높였다고 하지만 분명히 기독교는 아닐 것입니다.분명한 것은 이교도의 수단이나 방법이 개입된 것은 인간의 위선적 행위일 뿐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종교라는 수단으로 억압한다거나 무시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본래 종교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잡다한 신을 만들고 그 신과의 중재 역할을 인간이 만든 가지각색의 의식이나 격식을 만들어서 교주로서 신통력을 발휘하는 중간 모리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속이나 이교도들의 행위입니다.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허락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일 뿐이지, 제사장이나 전능자나 능력자라고 하는 중개자는 무용한 것입니다.오직 구원받는 사람과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하나일 뿐이지 그 중간에 인간인 제사장이나 목사나 사제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입니다(갈 1:6~10).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구속사역이 완성되기 전 구약은 많은 사람의 중재자와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행위에 대해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 하심이 있었고, 또 성전과 제사장의 무용성을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심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하심에 의한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의 완성으로 입니다(히 10:10, 요 19:30, 시 23편).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인간들(제사장이라는 목사)이 비집고 들어와 다시 지성소의 휘장을 가리는 행위는 이방 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여기에서 신자들은 매일 강압적으로 제안하는 행위적인 신앙의 방법에 쫓기는 종교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이 쫓기고 가도가도 올라가도 올라가도 정상이 없는 중압감을 안고 살게 것입니다.결국, 종교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것을 이미 아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교회를 종교가 되게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조직이나 방법으로 매우 쉽고 가깝고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가미한 것은 단순한 것을 지나친 과잉에서부터 하나님이란 이름을 걸고 법과 격식에 매이게 한 것입니다.현대 사역의 범위가 목적보다 방법에 소모하고 있습니다. 선교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조직운영에 소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성전으로 둔갑시켜놓고 유지를 위한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 잎을 가리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리개로 끝없는 인간의 힘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8-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2
    아담의 범죄 이후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반 종교는 떨어져 계신 하나님을 찾아 섬기는 그런 일을 지금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죄인이 하나님을 보거나 가까이하면 죽음을 당한다는 두려운 존재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섬기고 속죄물을 준비해야 했던 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의 대속의 완성을 무효로 만드는 행위가 곧 일반 종교적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마저도 이런 종교적 삶을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신약교회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물이 되셔서 드려지심으로 율법이 요구한 종교행위를 완성하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신과 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는 우리 안에 우리는 주안,에 있게 되어 한 몸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근본이 완전히 다른 일반 종교의 방법에 빠져버린 상태로 신자들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여기에서 파생된 교회의 의미를 상실당하여 건물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집처럼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진정한 성전과 예배의 의미를 상실하고, 의식에 묶인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을 예배당에 모신다는 우상적 성전을 만들기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이 있는 신당으로 신성시하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은 개체로서 찾아가야만 만나는 하나님으로 섬기는 대상으로 추락시켰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일반 종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루터의 종교개혁도 로마 가톨릭의 우상화하기 위한 돈벌이 하는 도구로 사용한 거대한 모순을 무너뜨린 것인데, 지금도 교회는 그 귀신을 섬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개념입니다.교회의 구성체는 일반 종교들처럼 하나의 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개념이 아닙니다. 몸으로서의 구성체라는 것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회집체로써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개념입니다.로마서 12장은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에 대한 것을 설명하였고, 고린도전서 12장은 머리 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성령의 여러 가지 현상으로써 곧 은사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예배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란 안식일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구약의 제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일반 종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몸으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에배소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이 곧 지체로서의 한 몸 관계를 결론한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에베소서 1장부터 택하신 목적과 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임과 십자가로서 화목하게 하신 일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비밀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과 새사람에 대한 것과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로 주님이 함께 계신 삶 자체와 아내와 남편과의 질서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자녀와 부모 간의 질서로써 종과 상전 간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장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진다”라는 삶 자체가 바른 신앙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그러기에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몸 안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 사건을 치르시고 부활 승천과 함께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갈등과 목마름이 있는 이유가 일반 종교에 매여 멀리 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신앙 행위나 구약의 율법의 요구에 따르려는 온갖 예배의식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짐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으로 의식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우상종교의 의식으로 사람들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개인 생활을 분리시키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몸의 지체인 동체냐, 떨어져 있는 개체냐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생명이냐, 죽음의 삶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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