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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방전도자 송세현목사
- 시끄럽다 욕하고 주먹질은 다반사···연장으로 살해 위협도 “행여 경찰서에 끌려가 소음방해죄로 없는 돈에 벌금을 내거나 억울하게 구류를 당하고 이해가 안되는 죄목으로 어려움 고통에 있어도 오직 나는 나라와 민족의 그 십자가를 지고 영과스럽고 거룩하며 가장 선하고 귀한 복음전도 피켓을 높이 쳐들고 만민 앞에 당당하게 전해야 한다”‘예수 천국’, ‘불신 지옥’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출퇴근 하는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노방전도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골라 다니며, 목이 터져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쳐대는 탓에, 하루에 한 번, 많게는 서너번씩 이 말을 듣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런 그들을 고성방가를 일삼는 예수쟁이라고 폄하하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교회에 있어 매우 큰 역할을 해 온 사람들이다. 노방전도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눈에 확 띄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큰 모자 눌러쓰고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는 건 웬만한 담력이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이들을 보며 그 힘든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하는지? 남한테 민폐만 끼칠 뿐이지, 같은 기독교인이 봐도 이해가 안된다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들의 행위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우리나라 전 국민 중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무종교인이나 심지어는 타종교인도 이 말은 안다. 그럼 성경적으로 봤을 때 이 말이 틀렸는가? 오히려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우리 신앙의 목적을 가장 분명히 해주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저들로 인해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은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 진리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44년을 이어온 노방전도의 열정송세현목사는 ‘대한민국 복음전도목사’를 자처하며, 지난 44년간 노방전도에 목숨을 건 신실한 목회자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오직 기도와 전도 뿐이 없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노방전도를 워낙 안좋게 보는 시선이 많은 탓에 파출서와 경찰서만 100번도 넘게 들락거렸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일을 주저치 않고 있다. 그는 노방전도에 대해 “강하고 담대함이 없고 부끄러워 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룩하고 특별한 일이다”고 말한다. 송목사의 강인한 전도론은 때때로 스스로를 위기에 빠지게도 했다. 그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다 승객들에게 주먹과 발로 종종 폭행을 당했으며 한번은 쇠스랑을 들고 찍어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당시 정말 극심한 공포심에 온 몸이 굳어졌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송목사의 담대한 전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통일교 집회에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큰 목소리를 “거짓된 문선명을 믿지 말고, 통일교에 속지말고, 예수 천국 가자”고 외쳤다. 그 이후의 상황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노방전도를 하는 전도자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지만 송목사에게도 생활고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하루종일 오직 전도에만 매진하는 탓에 어떤 때는 끼니를 이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알려져 교인들이 가져다 주는 과일, 음료수, 음식, 피로회복제 같은 것도 먹을 수 있지만, 무명인 30대에는 밥을 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뿐 아니라 전도가 끝나고 집을 가야 하는데 버스 토큰 하나가 없어서 곤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환승이라도 되지만 예전에는 버스 한번 탈 때마다 토큰을 사야 하니 집에 갈 토큰까지는 안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영광’ ‘아멘’ ‘감사’만을 외치며, 예수님을 전하는 순간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그의 전도를 향한 열정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 목과 입술에 피가 새어 나와도, 며칠을 굶어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든 지경에도 결코 식지 않는 순수한 믿음 그 자체인 것이다. 노방전도 44년이라는 이력은 한국교회에서도 쉽사리 찾기 힘든 것으로, 세월을 뛰어넘은 그의 노력은 차츰차츰 인정받게 됐고, 이제는 개교회 부흥회에 1,700여 차례나 강사로 초청될만큼 유명세를 탔다. 또한 그를 주제로 수많은 언론이 기사를 내고, 책과 만화책, 심지어 비디오도 제작됐다. 조만간에는 그를 주제로 전도영화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렇게 유명인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어깨에 빨간 띠를 둘러메고, 노방전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남들은 은퇴하는 7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 더 열렬히 ‘예수 천국’을 외치고 있다. ‘노방전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한낱 소음공해나 고성방가로 밖에 안 들리겠지만, 그 수많은 이들 중 어떤 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위로하는 천상의 메시지로 들릴 수도 있다.송목사는 바로 오늘도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비록 누군가는 또 그런 송목사를 향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댈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기다리는 길잃은 양들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전도는 멈출 수 없다. 한편, 송세현목사는 경기도 양평균 지평 출신이다. 그는 지평초등학교 시절 그곳 지평교회에 출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7년 군생활 중 감리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아 노방전도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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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방전도자 송세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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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경력의 사나이 수필가 순담 최건차목사
- 최 건 차 목사(수원샘내교회)매우 다양한 경험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수필가 순담 최건차목사(74세)를 알게 된 것은 오래전 교회연합신문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서 부터이다. 언제나 활달한 성격에 여유로우면서도 정의롭고 당당하게 보이는 것은 철저한 청교도적 신앙의 품격과 과거 장교생활을 했던 군인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최건차목사가 살아온 파란곡절의 역사를 듣노라면 밤을 샐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하여 과도기 이념갈등이 심한 탐진강 상류에서 살다가 유년시절 6�25전쟁으로 빨치산해방구 시절을 겪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미션계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영도 명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한다. 4.19를 지나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부산 해운대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해운대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하다, 미8군 카투사로 의정부와 왜관을 거쳐 대구 미8군후방사에서 근무를 마칠 무렵 장교가 되었다.그는 1968년 1월 21일 사태 때 전방 작전장교로 5분대기 전투소대장을 멋있게 수행하고 나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미군 전투선박부대에 필수요원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부산에서 한국 육군 최초의 선박부대를 창설한 장본인이다. 그후 1973년 말 전역해 부산대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75년 부산을 대표하는 직장예비군 중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알현하기도 하고, KBS 방송국에서 안보에 관한 생방송을 시작으로 부산지역 안보연사로도 활동했다.최 목사는 군에서 제대한 후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부인이 소천하는 아픔을 겪은 후 뒤늦게 안양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렇듯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여 북수원의 변두리 샘내마을에 터를 닦고 30여 년 간을 목회에 전념했다. 대신교단 경기노회장과 수원경목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교계활동과 원로로서 대내외적으로 비중 있는 일들에 자문을 하면서도 정치적 야망이나 욕심을 버린 송죽 같은 야인이다.최 목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명산은 다 찾아 오르는 등산마니아이기도 하다. 혼자서 매주간 1회 이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가와 사회 교계를 위한 기도산행을 한다. 그는 반드시 산 정상까지 올라 기도 마무리 하고 하산한다. 최건차목사는 추억의 흔적을 영상으로 담는데 탁월하다. 등산과 여행을 다녀오면 배경음악을 깔고 움직이는 사진에 자막을 넣고 편집하여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고 있다. 사진을 컴퓨터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연세가 있는 분이라서 그 열과 성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최 목사는 이처럼 팔방미인인지, 전천후사나이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우리 가곡은 물론 이태리 민요 여러 곡과 영어권 민요도 원어로 즐겨 부르며, 중학시절부터 야구광이었고, 특히 반세기 전의 국내외 영화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이다. 기자와 함께 수년 전엔 의기투합하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수필문학반에 등록하여 한 학기를 이수하였다. 이후 최 목사는 4년이 넘도록 계속 수강을 하면서 한국수필 등 여러 문학지에 작품을 내고 있다. 지금은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부회장으로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조문예, 운현수필, 대신문학회 등에서 문학활동을 하면서 동인들과의 유대를 잘 쌓아가고 있다.최목사는 본지 발행인과 본 기자와 거의 매주마다 만난다. 만날 때면 반갑기도 하지만 지난날의 애기를 하다가 급변하는 우리 국가사회와 교계를 우려하는 대화를 의미심장하게 나누곤 한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우리들의 매끈한 사상이 천둥번개를 동반하기도 하여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보기도 한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셋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대학로를 거쳐 낙산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청계천을 거닐다가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감성이 깃든 추억을 만들곤 한다.또 우리 셋은 두 차례에 걸쳐서 중국의 변방 실크로드 신장 위구르지역의 타클라마칸(Taklamakan)을 탐방했다. 그곳 오아시스 도시들에 퍼져잇는 옛 동방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 역사를 탐방하는 시간이었다. 금번 5월말에는 제3차 타클라마칸 역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글·김형원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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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경력의 사나이 수필가 순담 최건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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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에 살던 물고기를 바다로 보낸 하나님의 계획
- 이민교 선교사(북한 농아축구팀 감독) 산속에 살았던 물고기를 전라북도 남원으로 보내고, 소록도로 보내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고, 카자흐스탄으로 보내고, 북녘 땅으로 보내고, 땅 끝으로 보내고….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까? 아니면 내가 원해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땅은 나의 원함대로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일까?소록도 한센인들이 전해준 복음우주베키스탄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거쳐, 카자흐스탄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그리고 지금은 북한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며, 전 세계에서 축구를 통한 하나님 선교를 실천하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사건과 사연을 안고 있다. 이 선교사는 원래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던 사람이었다. 뿌리깊은 원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아와 장애인에게 온 마음을 쏟던 그는 자타공인 교무(敎務)가 될 재목이었고, 원불교 정녀(貞女)인 누님의 권유로 고3때 소록도를 방문한 후 ‘원불교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소록도 생활 7년 후 염불이 아닌 찬송과 방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탐구를 위해 들어간 소록도에서 그는 기독교를 통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죽음은 중학교 2학년 때 <사랑의 스잔나>라는 한 편의 영화로 시작된 물음이다. 종교심이 유난히도 강했던 부모님의 신앙 따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손에 이끌려 장례식장을 많이도 따라다녔다. 울음과 통곡이 지속되던 장례식장을 다니며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저리도 슬퍼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물 즈음에 죽음 이후의 삶을 찾기 위해 무당을 좇아 계룡산을 가고 한국의 민족종교인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를 찾아가고, 길거리의 행려자들과 살아 보고, 부산 당감동 화장터와 서울 벽제 화장터를 다녀 보기도 했다. 다양한 죽음 너머의 삶을 찾았던 고행의 여정으로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록도를 다닌 지 약 7년 만에 소록도 법당 안에서 목탁을 치다가 염불 대신 찬양으로 하나님의 신, 성령이 찾아왔다.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소록도 나병 환자들의 장례식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찬송가 가사가 주님의 성령으로 법당 안에서 목탁을 치고 있던 이 선교사를 습격한 것이다. 그는 “귀신들이 많다고 표현하는 법당 안에도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셨다”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 죽음을 축제로 맞이했던 소록도 나병 환자들의 화장터에서 울려 퍼진 환송식! 그 기쁨의 찬송이 결국 하나님을 웃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축구공을 통해 세상에 전한 복음원불교 법복을 벗고 하나님 성령의 옷을 새롭게 입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자신을 불러 세우신 이유를 찾고자 그는 광야 훈련을 거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다. 그 후 GP선교회 선교사 약사였던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당시 선교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선교비 마련을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약국을 정리한 아내에게 “선교비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원없이 선교 한 번 해보자”고 한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타슈켄트로 떠난 그는 그 곳의 아이들과 마주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외치고 강제로 예배에 참석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해주고, 일상에서 그들의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햇다. 그런 즈음에 그는 그 곳에서 농아들을 상대로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릴 꺼리를 찾던 중, 그는 축구를 생각하게 된다. 본래 이 선교사는 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였지만, 테니스는 다수의 인원이 함께 하기 어려운 경기라는 점이기에, 공 하나만 있으면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축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축구 경험을 토대로 농아축구팀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의 팀은 2000년 아시아 대회에서 3위를 하며, 아시아권의 주목을 받게 된다. 또한 그 지도력을 인정받은 이 선교사는 카자흐스탄으로 옮겨 농아축구팀 감독을 맡게 된다. 그의 인생에서 전혀 상관이 없던 축구를 통해, 선교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놀랍게도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카자흐스탄의 10여년 감독생활이 지속될 즈음에 그는 북한 농아축구팀 감독으로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된다. 다른 나라로 아닌 북한에서의 제의였기에 사실 그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물었다. “북한에 왜 가려고 하느냐? 북한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 “북한에 왜 가려고 해? 일하려고? 아니면 사랑하려고? 일 때문에 가야만 하면 가지 말고 북한 장애인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가라!”그 순간 그는 다시 깨달았다. 축구는 매개일 뿐, 그는 본디 하나님께서 이웃을 섬기고, 장애인을 사랑하라 보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그 어떤 고민이나 이유는 필요 없었다. 이민교 선교사는 지금도 하나님, 그분이 하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 그것이 축구공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거침없이 달릴 것이다. 한편, 그는 최근 책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통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산 속에 살던 물고기에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 놀라운 사랑을 전파하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차진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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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에 살던 물고기를 바다로 보낸 하나님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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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성 목사(어린이기독문화연구소 소장)
- “지난 25년간 어린이 영혼구원과 신앙성장을 위해 하나님만 바라보며 뛰어왔다. 늘 미래의 한국교회와 주일학교를 이야기 하지만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이며,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이다. 그렇기에 지금 1분 1초도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어린 시절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다, 예수님을 만난 뒤 새로운 사명과 소명을 받은 어린이 사역자 김태성목사. 그의 파란만장 했던 지난 인생을 들여다 보면 지금 이 시대 방황하는 청소년의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한때는 소위 잘나가는 폭력서클 일진으로 사람들이 외면한 문제아에서 지금은 눈물어린 기도와 헌신으로 아이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어린이 전문 사역자가 된 김태성목사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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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성 목사(어린이기독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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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진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무)
- “본디 교회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심지어 천주교라 할지라도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뤄가며,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는데 주력해야 하는데, 지금의 교회는 자기 교파, 자기 교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본질적인 것을 상실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정신이 소멸된 교회는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없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을 최전선에서 이끌며 연합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의 총무 배태진목사가 2015년의 한국교회를 향해 그릇된 과거에 대한 회개와 잃어버린 에큐메니칼 정신의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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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진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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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우 목사(열방교회)
- 교회 부흥은 현재 작은교회 목회를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차적인 목표다. 이런 교회부흥을 위해서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전도다.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오직 전도’ ‘오직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평신도들의 전도활동을 독려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세라며, 전도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복음전파가 우선되어야겠지만, 대체 왜 전도는 늘 평신도에게만 강요하는 것일까? 언론매체에 가끔씩 등장하는 소위 ‘전도왕’이란 사람들도 생각해보면 평신도가 대부분이었고, 목회자를 본 기억은 그리 없는 듯하다. 그렇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도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고 전도만이 교회부흥의 길인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전도에 있어서는 뒷짐 지고 서서 평신도의 등을 살며시 떠미는게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에 ‘나부터 전도’를 외치며, 모범을 보이고 있는 목회자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에 위치한 열방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정우목사는 1년 전부터 택시를 운전하며, 손님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전도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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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우 목사(열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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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서 영 목사 (총회신학원 원장)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 총회신학원은 최고의 학업시설과 교수진을 갖추고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지향하는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현재 서울본원을 비롯하여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수원, 순천, 원주, 의정부, 인천, 일산, 전주, 제주, 창원, 천안, 청주 등의 지역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는 총회신학원은 등교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서울사이버신학교도 운영한다. 총회신학원장 정서영박사는 지난 20여 년간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수 많은 목회자와 신실한 복음의 사역자를 배출해 왔다. 이들은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며 사회 각처에서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총회신학원은 방학없이 2년 8학기 수업으로 조기 졸업이 가능하며, 여목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어 현재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의 수가 더 많다. 특별히 학비가 저렴하고 야간학부가 개설되어 직장인과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의 학업이 용이하며 장학제도가 획기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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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서 영 목사 (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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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마성서연구원 이명범목사(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레마성서연구원(레마선교회)와 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성경을 가르쳐온 이명범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통합측에 이어 기장측에서도 제기됐다. 이에 한국기독언론협회(회장 강춘오목사)가 포럼을 통해 이명범에 대한 두 교단의 이단성 있다는 보고서의 정당성을 평가해 봤다. 기독교시민연대(대표 김경직목사)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포럼에서 세 사람의 강사가 각기 평가한 결과는 이명범목사에 대한 두 교단의 이단 보고서는 왜곡되었거나 억지 주장이 많다는 결론을 얻었다. 본지는 포럼 후에 이명범목사를 만나 그 입장을 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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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마성서연구원 이명범목사(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