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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연의 가족과 이웃공동체
    생물학적인 관계에 근거하여 ‘혈연의 가족’은 삭막한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다양한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으로 전제되어 가족구성간의 이익이나 그 이익의 분담은 공평하고 동일함으로 이해하려고 함을 본다. 그리하여 가족 구성원들은 밀접한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전제하고 산다. 오늘에 와서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문제들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이상화 되어 여기에 따른 다른 양상들이 나타나 가족이라는 논의인 ‘갑질’의 논으로 오만 무례한 행동을 자아내고 있는 사정에 접하면서 “혈연의 가족과 이웃공동체”를 본다. 가정은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삶을 가리키며 다만 물질적인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족구성원들이 건전하게 성장 성숙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안식과 사랑을 제공해 주는 보금자리의 안식처를 갖기 위해 가족구성원의 행복과 복지 향상을 갖도록 다양한 기능과 과업을 수행하여야 함을 알게 경험하게 한다. 여기에 가정이란 그 기능이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그 기능이 가정구성원들을 위한 그 가정의 기능은 성과 생식, 양육 및 교육, 보호, 휴식, 생산과 소비, 오락, 종교의 기능 등 그 영향을 좌우하고 대 사회적인 기능으로는 합법적인 성적통제, 생식을 통한 사회의 유지, 존속, 노동력 제공과 소비생활을 통한 경제적 기능, 자녀의 사회화를 통한 사회의 활동에 적합한 구성원 제공 등의 기능이 있다. 여기에 가정은 개개인이 생활하고 보호받는 터전인 동시에 한 사회를 유지, 존속시키는 최소의 단위로서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중간 고리라 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과거 우리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회. 정치적 상호연관성을 보려고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유교문화가 강한 영향을 주었기에 1996년도에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의 7개국 민간여성단체(NGO)대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언사와 행동을 받고 살아온 동아시아 지역이 심하다는 것을 가부장적 유교이념을 비판하고 가정은 외부 관여를 차단함에 이를 비판하게 되고 여자의 사회 참여를 높이게 됨에 이르렀음을 알게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현대를 흐르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상들이 나타남으로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양상들이 많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 한다. 그 예로서 보면 서구사회에서 이혼율이 상당수를 넘어 한국도 그 이혼율이 상당수를 넘고 있는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준하여 현대의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은 가족과 연관 된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가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문제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으며 가족에 대한 논의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단절을 법적으로 제기하는 일이나 한국사회에서도 이를 모방하며 가는 모습을 쉽게 보고 있다. 이러한 서구사회에서만 보았던 문제를 눈앞에서 보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접하면서 한 때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교도 이상적인 기독인의 삶의 양태를 미혼, 독신, 무자녀로 안주하려는 추세도 있었고 어느 때에는 미혼, 독신을 선호 할 때도 있었다. 어느 때에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핵가족’ 양태가 가장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의 다수의 가정들을 비정상적이고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고 편견 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모습을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신앙관으로 살아왔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21세기에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의 상호 연관된 믿음의 삶의 자세를 구성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한다.공동체주의의 이론으로 세계적인 학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의 강의와 책에서 '자유사회의 시민은 이웃에게 어떤 의무를 지니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는 문제를 제시하며 이웃정의론을 부르짖고 있다. 그는 다양한 논쟁에서 극적이고 도전적인 발상을 선보이며 철학을 이해하면 정치와 도덕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알게 한다는 주장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6
    2013년 4월 15일 미국에서 열린 보스턴 국제 마라톤 대회의 결승점 근처에서 폭탄 두 개가 터졌다. 3명이 사망하고 183명이 다친 참사였다. 그 날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결혼 7개월 차 신혼 부부가 있었다. 패트릭 다운스(34)씨와 제시카 켄스키(36)씨. 간호사였던 제시카는 30여 차례을 수술 끝에 두 다리가 절단되었다. 심리학도였던 그녀의 남편 다리 한 쪽을 잃었다. 부부는 워싱턴 근교 병원에서 꼬박 3년을 누워 있어야 했다. 그들은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는 학교, 직장, 원래 살던 집 어디로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5년이 지난 후 부부는 아픔을 딛고 우뚝 일어섰다. 그들은 『제시카와 레스큐: 인생을 바꾸는 우정』이라는 아동용 그림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가공의 인물 '제시카'가 사고 후 반려견 '레스큐'를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남편 패트릭씨는 출간 소감에서 "의족을 단 나를 '트랜스포머'라고 부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부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라"고 조언하였고, 패트릭씨는 사고 후 3년 만인 2016년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5시간 56분 46초의 기록으로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하였다. 패트릭씨 부부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보냈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재기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희망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것이다.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생각났다. “온 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5-10)이 말씀은 역설을 통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온유하게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일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는 그 의가 몸에 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화평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의를 행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인지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게 될 것이다.최근 들어 필자는 이 말씀의 깊은 뜻에 공감할 때가 많이 있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보편적으로 겪은 일이지만, 가난으로 인하여 고생하였다. 옷이 별로 없어 서독에 간 누님이 보내 준 작은 청바지를 몸에 꽉 끼게 입고 다니며 대학 생활을 하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부모와 자녀들을 돌보느라 작가 생활을 포기한 채 직장 생활에 매달려 생계를 유지하여야 했다. 1980년대 신군부 권력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싶었지만, 당장 눈 앞의 생계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어 오면서도 나에게는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좋은 작품을 영원 위에 남기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직장에서 명퇴를 한 후 나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주님은 내가 34년의 직장 생활 끝에 작가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셨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여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님은 내가 가난을 몸소 체험하면서 가난한 자의 처지를 이해하게 하셨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은근과 끈기의 힘을 제공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주님은 매일 아침마다 영감의 이슬을 내려 주시며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가지게 하셨다. 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 3-4)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주님은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향유하게 되는 이치를 알려 주셨다. 그리하여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은 음악인으로는 치명적인 청각 상실의 아픔을 딛고「운명」이라는 위대한 곡을 배태할 수 있었으며, 천체학자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의 아픔을 딛고 블랙홀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난관이 있다 해서 결코 포기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남과 북 사이에 경계가 있고, 세계 곳곳에서 이해 타산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다툼과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08
  • 목회는 쉬운 것이다·63
    칼빈을 보수란 착각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는 칼빈주의에서 개혁주의의 5대 표제로 생명의 가치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어느 분이 ‘칼빈의 제네바 학살은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란 논문에서, 칼빈 이후 유명한 정치 철학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홉스’와 ‘밀턴’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홉스는 군주 혹은 국가의 통치를 지지했고, 밀턴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는데 이 둘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빈의 사상을 근거로 했다는 것입니다.칼빈의 가르침은 한쪽에 치우치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에서도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 선택, 제한적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은혜가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한 것입니다.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 줄기의 핵심을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순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삶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칼빈의 사상을 일부분에 매달려 있기에 개혁주의생명신학 운동이 필요하게 한 것입니다.결국, 신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신학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것입니다.목회자가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인가? 안다는 것의 출처가 어디인가? 아는 것을 전하면 목사가 아닙니다. 목회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가?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목회할 수 있는가? 내가 목회하기 위하여 학문을 알아야 하는가? 이런 사람이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학문의 무용성이 아니라 학문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문이 학문으로가 아니라 학문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성경은 큰 틀에서 구약의 율법이 결국 몽학선생으로써의 역할에 중요성을 말했듯이 바울의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정죄에서 은혜로서의 유연성을 말했듯이 우리가 사람들이 주장하고 말하고, 글로 써 놓은 역사 속에 순간순간 이어온 사람들의 논리가 합해져 결국 ‘성경이 답이다’라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 보시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을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9절에서 “누구든지 너희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10절에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12절에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3절 이하에서 자기 자신이 조상의 유전대로 유대교를 지나치도록 밀어 학문적 가문에서 자란 자신의 확실한 학문성을 말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전통과 습관과 많은 관계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소명의 확실성의 특징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사명은 논리가 아닙니다. 사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 실천은 연구하고 의논해서가 아닙니다. 바른 신앙이 곧 바른 교회입니다. 바른 교회는 바른 목회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문한다는 목회자는 위선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간단한 답으로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인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요한복음 7장 15절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6-0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0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0. 복음성가로 병들어가는 교회 예배 기독교 신앙은 비교적 지성적이면서도 영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그런데 요즈음 기독교의 예배가 다분히 감성적인 분위기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아서, 의식 있는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에 큰 부담과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려지는 예배에 있어서 ‘감정’ 혹은 ‘감동’이라는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라면 적극 장려할 일이고 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들이 급속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어서 그 영향이 교회의 성도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음악의 영향과 감화력목사의 50분 설교가 마친 다음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아멘’ 소리 보다 성가대의 5분 찬양 후에 나오는 ‘아멘’ 소리가 더 크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목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가사도 없이 연주되는 악기의 소리만 들은 후에도 청중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다. 그만큼 음악이 미치는 감동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적 마귀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음악을 통해서 성도들의 심령과 삶을 오도(誤導)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된 록(Rock) 음악은 보컬 리드와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이렇게 네 가지로 짜여진 팀이 강렬한 소리와 함께 특유의 강한 비트로 젊음의 기쁨과 욕구 불만 등 감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세속 음악이다. 그 후 레게(Reggae), 힙합(Hip-hop), 랩(Rap) 등의 음악이 전 세계의 청소년들의 정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그들의 감정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음악이 그러한 음악 장르에 영향을 받으면서 교회 음악 고유의 리듬과 박자가 서서히 사라지고, 가사만 기독교적 용어일 뿐, 음악의 형태와 분위기는 세속 음악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성가는 록음악을 불러들이는 문(?)경건한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타락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여 서서히 영성이 약해지고 신앙적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 조금씩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는 집단도 마찬가지다. 모든 타락과 세속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안에 록 뮤직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소위 복음성가, 혹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라고 하는 음악이 교회에 유입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록 음악의 요소인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이 교회 단상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1970년 이후로 세계로 확산된 복음성가는, 예배에 사용되는 전례용 음악인 찬송가와 다른, 단지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대중음악이다. 그러니까 복음성가는, 대중음악이라는 그릇에 기독교 메시지를 담아 놓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노래에는 기본적으로 ‘곡조’가 있고 ‘가사’가 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더 강한 영향력이 있는가? 아마도 ‘곡조’일 것이다. 아무런 가사 없이 악기로 하는 연주만 들어도 감동이 깊이 오는 것을 보면, 곡조에 포함된 리듬이나 박자 등이 사람의 감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노래의 가사는 지성에 영향을 주고 곡조는 감성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가사가 아무리 기독교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곡조가 세속적이면 육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교회에 깊숙이 들어온 크리스챤 록이제는 기독교 음악의 장르 중에 ‘크리스챤 록’(Christian Rock)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상당히 세속화된 복음성가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크게 자리를 잡고 있다. 기독교 청년들이 주관하는 축제에 록 음악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점점 광란의 지경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집회에 참석한 후에 과연 성령 충만한 평안과 기쁨과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한 청년은 그러한 집회에 참석한 다음, “그 수련회는 음악이 나에게 주는 흥분이 독약임을 깊이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교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새 신자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듣고 다음과 같이 그 느낌을 표현하였다. “제가 교회에 들어와서 가장 놀란 사실은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나 들었던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그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예전에 술 마시고 춤을 추면서 가졌던 느낌과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복음성가(福音聖歌)’라는 용어에는 문제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복음을 담은 거룩한 노래,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그 복음성가의 가사를 록 음악의 선율, 리듬, 화음, 악기, 연주법 속에 대입하여 부르면 결코 성가(聖歌)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탄의 영이 이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감성을 가진 인간은 듣는 음악의 성격에 따라서 심장 박동과 혈압, 신경계, 소화, 근육, 인체의 호르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사탄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육체적 원리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타락과 멸망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복음성가, 무엇이 문제인가요즈음 복음성가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록 음악은 비트가 강한 것으로 이러한 음악을 오래 듣게 되면 우리 신체의 근육을 약화시킨다는 결과가 있다. 이러한 록 음악의 생활화는 청소년들의 심성을 변화시켜 인내심이 없어지게 하거나 정서 불안의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 크리스천 록 음악의 특성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과도한 싱코페이션(당김음)의 사용이다. 이는 악곡의 변화와 긴장감의 증대를 위해서 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쾌감이 있다고 과도히 사용한다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에 효과적이며, 반응이 빨라 말씀보다, 성령의 일하심보다 능동적이어서 은혜의 경험이 감정적이고 인간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일시적이어서 지속성이 없거나 약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옥성호,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0), 326,327.> 음률과 템포와 악기가 록앤롤 스타일의 음악이면 두뇌에서는 성적 충동과 마약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에, 그러한 음악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은 교회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는 찬송가의 곡조나 가사에 흥미를 잃게 된다. 더 나아가 영적인 사물에 대한 감지 능력이 약화되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록 음악에 익숙한 청소년들을 교회로 인도하거나 교회에 머물러 있도록 하려면 교회에서 그런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합리화, 혹은 정당화 한다. 그러나, 결과는 두 가지일 뿐이다. 그런 청소년들은 교회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교회의 분위기를 세속화시켜 평균 영적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경건한 예배 분위기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는 점진적으로 세속적인 감흥이 발동하고 말씀의 영성과 능력이 서서히 고갈된다. 이제 교회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회가 대중 음악에 물들어 세속화되는 것을 계속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판단하여 어떤 과감한 조치를 내려 이제부터라도 변화와 개혁을 시도할 것인가?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01
  • 이 시대를 보며
    오늘의 세상 풍조는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위험을 본다. 여기에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오늘의 사회는 집단은 있으나 공동 사회는 없다'고 한다. 유기체적인 삶의 결여로 기능주의의 의미를 알게 하여 이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알게 한다. 여기에 본질이나 내용보다도 그 기능이나 작용을 중시하는 점을 알게 한다. 오늘에 있어서 그 시대어로 모던(modern)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이 매너리즘의 시대는 그런 뜻에서 이전의 가치체계에 대한 하나의 반역의 시대로 그런 특징이 생활감정과 예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비 고전적 내지는 반고전적인 것으로 주관주의와 기능주의를 그 근본 성격으로 간주하게 함도 알게 하지만 사실로 삶을 살아가는 데는 기능만이 아니라 삶은 살아있는 것이기에 살아있음으로 살림이 됨을 알아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정치와 경제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 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사회 구조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이 통하는 사회의 구조 속에서 시달려 왔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삶의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적 삶의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에 살면서 혼돈된 시대에 사람들을 올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갈구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향을 몸소 실천하는 지도자가 아쉬움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개혁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모든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더 중요함을 현실에서 갖게 한다. 이렇게 오늘의 정치 위기는 잘못된 가치 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정의보다는 불의, 신뢰보다는 불신, 질서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어두운 사회 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가치는 바른 길을 택하여 걸어가야 한다. 세상이 건저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은 삶의 가치를 택하여 정도를 밟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 세상을 알게 한다. 예컨대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한다든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 한다면 잠시 이는 성공한 것 같게 보일런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의 길을 자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을 따라 이를 행하면 만인의 추앙을 받게 된다는 사실과 진실이 여기에 있기에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심의 하늘의 뜻을 믿게 한다. 모두 함께 지으신 그 뜻을 헤아려 이 세계를 이분법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통전적으로 보고 유기체적인 생명 관계로 살피는 믿음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더 생각 할 것은 오늘의 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신학”을 적용해 보면 그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이 사는 공간의 삶은 필히 시간과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의미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기 때문에 여기서 사실과 의미가 부여되고 사물에 대해서는 사실 공간, 자연 공간, 인간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알게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으로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믿게 함에 유의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 공동체 의식을 갖는 신앙고백을 알게 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고간의 신앙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인간도 한 생명으로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가치를 누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보지 않고 통전적이며 유기체적인 생명관계로 믿는 믿음임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31
  • 임석환 장로
    참전유공자 사무실 출근, 서울에 원로장로회 등 각종 모임 참석 임석환 장로(86세, 예장합동 포천 송우교회 원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농장과 골프장 주변의 청소와 풀과 나무 등 조경을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임 장로는 건강을 위해서 별다른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워낙 활동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덤으로 주시는 것 같다”면서, 서울에 나갈 일이 없으면 포천의 참전유공자 사무실에 출근 한다고 한다. 6.25 참전유공자로서 포천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포천을 벗어나서는 주로 서울로 외출을 하는데 전국원로장로회연합회, 한국기독교원로장로회연합회 그리고 잃은양찾기운동본부 등의 모임에 매주 3회 정도 참석하여 교제하며 좋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임 장로는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1950년 6.25 전쟁 당시 피난하여 바로 육군에 입대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고향 북한 땅에는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을 남겨두고 아버지와 피난 나오는 중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형과 함께 남쪽으로 넘어 왔다. 이들 형제는 함께 군에 입대하여 전쟁 중에 형은 전사했고, 임 장로는 혈혈단신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저는 제대 후에 연고지가 없어 군 생활을 하던 가까운 포천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을 하는 거지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에 23세의 나이로 밥이라도 먹고 지낼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고된 일을 감당할 수 없어 그만 두었어요.”어느 날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노인 엿장수를 만나 그의 권유로 엿장수 생활을 3년여동안 하였다고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살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엿장수는 자유로워 맘대로 일하고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었기에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고물상을 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던 중 고물상 주인은 신실한 그를 보고 그곳 ‘만세교’ 다리 근처에 고물상을 차려주었다. 고물상은 점점 더 번창해 갔다.임 장로는 그 후 4.19 혁명 때에 고물상을 그만두고 인근 군부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제법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천에서 의정부 사이에 한 교회가 종각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분에게 “일을 좀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느냐”고 하니까 마침 그분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었다. 그 인연으로 지금의 포천의 송우교회 쪽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풀려 나갔습니다.”라는 임 장로는 그동안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다시 축산업을 시작하게 되어, 양계, 돼지, 젖소 등을 기르는 ‘청림목장’을 운영하면서 파격적인 수익을 얻게 되었다.임 장로는 앞서 교회당 건축에도 빚을 얻어 헌금하여 대지구입과 건축에 힘을 합하였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감당할 수 없도록 목장이 늘어났고,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한 생활을 넘어 포천 지역의 당당한 유지로 나서게 되었지요. 정말 잘 풀렸지요.”임 장로는 그로부터 교회 일은 물론이며, 포천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 인물이 되어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고, 교단과 연합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이렇게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은 3대에 걸친 신앙가정에서 태어나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일 것이다.임 장로는 윤선애 권사(80세)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2남은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으며, 자녀들 모두가 신앙으로 바로 자라서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다. 임 장로는 가장 보람 있고 감사한 것은 자녀들이 모두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란 것이라고 말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5-3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편> 109:26-31)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 한반도에는 평화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김정은이 보낸 특사가 청와대를 다녀갔고, 곧 남북한간, 북미간 정상 회담도 있을 예정이다. 이는 주님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여 주시는 기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인은 말보다 물건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사물이나 기표는 인간 관계를 나타내는 징표가 될 수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로테의 남편이 보낸 선물에 붉은 리본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로테를 얻은 것처럼 좋아한다. 베르테르가 맨 처음 로테를 보았던 날 그녀의 가슴에 꽂혀 있던 바로 그 리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는 날에도 푸른 연미복을 입고 호주머니에 그 리본을 넣고, 그 리본과 함께 관 속에 묻힌다. 리본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로테이고, 그 리본과 함께 있는 것은 그녀와 영원히 하나가 된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타인에게는 한낱 천조각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목숨만큼 귀중한 징표였던 것이다.또한 베르테르는 로테와 맨 처음 만나 함께 춤을 출 때 입었던 푸른 연미복을 그녀를 사랑하는 동안에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만큼 로테를 사랑하였으므로 평범한 상황에서는 입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테르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로테가 알베르트의 아내가 되자, 푸른 연미복은 그의 첫 번째 상흔을 떠올리게 한다. 베르테르는 죽음을 앞두고 그 옷을 꺼내 입는다. 그 옷이 자신과 그녀를 하나로 묶어 준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 옷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옷이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졌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므로, 그것은 가장 기호성이 높은 기표이다. 베르트르는 자살하기 위해 알베르트로부터 권총을 빌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로테는 권총을 하인에게 내 주고 그것을 받아든 베르테르는 단지 로테가 그 권총을 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게 죽는다. 로테가 만지던 권총, 그녀가 내 준 권총은 그가 기꺼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만드는 의미인 것이다.1)베르테르에게 ‘리본’과 ‘푸른 연미복’이 로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였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기호가 나타난다. 그것은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나타나는 징표다. 필자에게 주님이 보내 주시는 기호는 바로 ‘영감’과 ‘글’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면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일 만나 - 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먹었다고 나오는 한 종류 또는 그 이상의 음식 - 를 내려주셨듯이, 나에게 영감의 만나를 내려 주신다. ‘오늘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 행복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리해야겠어. 제목은 ‘하나님, 저 예뻐요?’로 할까, 그러면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노트에 그 날 쓸 글의 설계를 해 본다. 한 두어 시간 사색을 하고나서 본격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면 그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좋은 글이 나올 때가 많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시는 작가’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주 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표는 이밖에도 많이 있다. 아내의 건강과 딸아이의 출산과 아들의 취업을 위해 기도 제목을 정해 놓고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새벽마다 맑은 이슬이 내리듯 기도가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요즘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다. 핵무기보다도, 과거에 대한 적폐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단일 민족이었으며, 백의 민족으로서 순수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 때 약소 민족으로서 강대국의 이해 타산에 의해서 분단의 선이 그어지기는 하였지만, 단일한 언어인 한글을 사용하는 한 통일의 물꼬가 트이리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800만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오늘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평화를 추구하는 다음 세대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주님이 몸소 실천하신 사랑과 용서와 화해 등의 인간미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용솟음쳐 누구나 부러워하는 먹지고 행복한 복지 국가가 되기를 기원한다. 모두冒頭에 제시한 <시편> 구절에서 주님은 인간사에도 개입하신 것을 알 수가 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31
  • 목회는 쉬운 것이다·62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 시의 질서를 확립하고 칼빈의 생각하는 도덕을 향상시키고자, 칼빈의 신앙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반대자를 처형했다고 합니다.칼빈이 말한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단도 아니었다. 또 교회를 거역한 사람들도 아닙니다.칼빈의 이런 면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오늘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라는 두터운 벽 안에 갇혀진 역반응이 결국 기업형 교회로 신나는 프로그램이 춤추며 날뛰는 사단이 밝아지고, 같아지고, 선악을 알게 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지금도 칼빈주의요, 개혁주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은 그와 비례하는 신흥종교 같은 기업형 교회들만 키워내는 불행한 일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문 닫아 걸고 정통보수라는 이론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소위 칼빈주의의 진실한 의미도 모르고 금욕이나 극단주의는 주님이 부탁한 생명적 가치를 계속 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더위에 못 이겨 문 닫은 채 에어컨을 틀고 자던 사람이 그 이튿날에 차디찬 시체로 변했다는 현실적, 사회적 사건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나 머지않은 날 보수라는 고집 아래 숨을 거두는 차디찬 사람으로의 나일 수 있습니다.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취한 사건이 그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깨닫고 돌아온 고백은 우리 모두가 시편 51편을 수없이 읽고 묵상한 터입니다.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게 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과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이름 없는 병신 같은 자식이 어디 나에게 이따위 말을 하느냐? 라고 당장 능지처참시킬 순간입니다. 네 따위 놈이 별 볼일도 없는 놈이….기업형에서 성공한 제왕에게 그의 입지와 명분을 건드리면 금세 저주를 해버릴 것이고 출교시킬 사람이 목사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설교 자체가 신자들을 기죽게 만드는 말만 일삼는다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큰소리치는 자에게 순간적으로 추락해 버릴 사건을 용납할 수 있는가?칼빈이 제네바 사건이 전체로만 보아 그 일을 감행하라고 제사장이라는 권위 때문에 온몸에 철갑으로 씌워진 위선과 고통스러움을 자백할 수 있는 개혁주의 예수 생명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칼빈은 제네바 사건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만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16세기 제네바를 통치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어낸 유언비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해 징계를 받았거나 권징을 받았던 사람들이 악의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퍼뜨렸다고 합니다.어찌하던 우리는 칼빈의 그런 점에만 묶여 있는 것이 한국적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칼빈주의가 오늘까지 우리의 문제점이 근시안적인 눈에 단면으로 보이는 것만 매달려 있음을 곧 하나님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점입니다.저는 복잡한 자료를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건 중심에서 나타난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칼빈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권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보수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보수란 성경중심이라고 하는 오직 성경이나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이라는 것이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대로인가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보수라는 사람들의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주권이나, 작전이나, 예정이나, 창조나 섭리가,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것이 아님을 다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5-3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9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9. 이단을 너무 쉽게 만드는 한국교회의 경솔함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단’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이 단어는 매우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가볍게 경솔하게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교회처럼 이단을 쉽게 만들어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박영관 씨가 이단이라고 정한 개인이 118명, 예장통합 총회 사이비이단문제상담소가 만들어 낸 이단이 73명, 한기총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가 결정한 이단이 42명이다. 이 외에도 소위 이단 감별사들과 이단연구단체에서 생산해 낸 이단도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들을 가려내는 일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는 도(道)를 넘어도 한참 넘었고, 마치 상거래 하듯이 쉽게 이단을 만들기도 하고 풀기도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어서 교회의 장래가 심히 우려된다. 이에 한국교회의 이단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1)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은 이단 문제와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이단 감별사마다, 이단연구소마다 이단을 정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고 통일성과 객관성이 없다. ‘이단’이란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만 규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설교 중에 말실수 한 것 몇 마디 가지고도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이단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니까 눈금이 일정하지 않은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평가하여 이단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장로교 단체가 주최한 이단 사이비 세미나의 한 초청 강사는 ‘이단의 확인법’을 강의하면서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지 않거나 유아세례를 부인하면 이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장로교 중심의 기준이다. 침례교회나 그리스도교회 등 세계 개신교(新敎)의 절반 정도는 사도신경이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초청강사의 기준에 의하면 개신교의 절반 정도는 이단인 셈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신조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개인이 이단이다. 그러므로 이단을 규정할 때에, 가장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객관적 기준은 성경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2) 이단 규정은 전문성을 가진 신학자들이 해야 한다한국교회에서는 대개 각 교단의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 아니면, 소위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정하여 발표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면면(面面)을 보면 대체로 신학적으로 전문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상당한 비난과 저항과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감수할만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단을 가리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단에서 나와 정통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단을 비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단을 제대로 연구하여 규정하려면, 그리고 그 결과들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소위 정통교회라고 하는 각 교단 신학대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협의체를 구성하여 이단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3) 이단을 규정하는 과정과 절차에도 객관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에서 이단을 규정하는 절차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너무나 형식적이고 졸속으로 처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 교단이 모 교회나 개인을 이단으로 정죄할 경우, 그 대상에 대하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연구하여 총회에 상정을 하면, 총회 대표자들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진지한 토의도 없이 결의해 버린다. 그 순간에 또 하나의 이단이 탄생하여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의 치명적인 문제는 당사자와는 한 마디 대화나 변명의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를 한다는 것이다. 종교암흑시대에도 종교재판을 받을 만한 혐의가 발생하면 당사자를 불러다가 고문을 하면서라도 본인의 의사를 묻고 혐의를 인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단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하여 당사자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이고 부실한 연구 결과물을 가지고 이단으로 규정한다. 아직 이단으로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단이라고 확정하여 이단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모순이다. 법정에도 범죄 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의심받는 순간부터 이단으로 단정해 버린다. 이것은 상식과 도리를 벗어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다. (4)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 그리고 힘의 논리성경은 하나인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 종파는 수천 개에 달한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각 교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다.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한 것인가? 뚜렷한 기준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정하는 양상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이 어떤 한 교파가 자(自) 교파의 신조를 기준으로 하여 신조를 달리하는 타(他) 교파를 이단으로 정했을 경우에 그것을 상대적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상대적 이단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이단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힘없는 소수가 이단이 되고 힘 있는 다수가 정통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단을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가톨릭을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할 무렵, 이미 거대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세력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권력을 이용하여 격렬한 핍박을 가하였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절대적 이단을 가려낸다면, 가톨릭이 분명한 이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초기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당은 그 당시 유대 사회나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스러운 교리를 전하는 이단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는 누명을 썼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동안 ‘이단’이라는 말에는 힘의 논리가 작용해온 것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기준으로 가려져야 한다. (5) 이단 판별 기준 예시(例示)이단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미국의 행크 박사(CRI : Chritian Research Iinstitute 회장)는, 이단을 규정할 때에는 성경의 본질적인 문제와 비본질적인 문제를 구별하여, 본질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으면 이단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하면서, 다음의 8가지 본질적인 대목을 제시한 바 있다.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가. ② 인간이 태어날 부터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③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하는가. ④ 삼위일체를 믿는가. 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가. ⑥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가. ⑦ 지구가 재창조 될 것을 믿는가. ⑧ 예수 재림으로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종말론을 믿는가. 상당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불가피하게 이단을 가려낼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 이단을 규정하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다음의 성경절들을 염두에 두고 심사숙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5-18
  • 약속은 기다림이다
    성서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구약에서 보면 ‘기다림’은 ‘서로 묶다’ ‘참을성 있게 바라보다’ ‘기다리다’ ‘희망하다’ ‘기대하다’ ‘침묵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신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다’ ‘기대하다’ ‘받아들이다’ ‘고대하다’ ‘기대하다’ ‘희망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기다림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장차 나타날 어떤 일에 대하여 고대하고 확신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다. 기다림은 신뢰에 근거한 기대를 의미한다. 신뢰와 지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기다릴 수 없다. 그저 막연하게 어떤 대상을 기다리는 것은 맹신에 가깝다. 그런 기다림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회의로 바뀌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과 지식에 근거한 기다림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과 일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들을 기록한 것이 성서의 역사인 것이다. 기다림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다. 기다린다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손을 놓고 무언가 이루어지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을 떠올리지만 이러한 행동은 성서가 말하는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다. 기다림은 수동성과 능동성(부정 및 긍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기다림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균형을 이룰 때 힘과 용기와 인내를 가져다준다. 긍정적인 면에서 기다림은 항상 주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골방에 들어 가 하나님을 찾는데 시간을 모두 써야 한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정확한 시기에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시간 안에서 때를 알게 한다. 때는 여기에 걸맞은 때를 말한다. 때는 밭을 갈 때와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두고 저장할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음으로 이를 알게 한다. 모든 것은 그 시기에 따라 ‘때’가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은 교회의 전통이나 개인의 신앙 습관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속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 즉 때가 되어서야 성취된다. 그들이 가졌던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참 믿음의 여부는 이 기다림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림과 믿음으로 붙잡고 의를 구하며 애통해하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하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이라는 우리의 몫이 있다. 약속이 없어 지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지친다. 하지만 나는 지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는 기다림에 인내하는 자 이어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기다려야 할 일들이 있다. 응답이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기다림 뒤에 감춰두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기다림은 약속이요 기다림은 우선하는 책임감당이다. 성서에서 보면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은 24년의 기다림 끝에 아들 이삭을 얻는 것이 대표적인 실례이다. 야곱이 베델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요셉도 어린 나이에 13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주셨던 약속을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다윗도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시험에도 굴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임함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 것을 믿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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