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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부흠 장로
    원로장로회, 나라사랑본부, 노회장로회 등 조찬기도회 열심 김부흠 장로(88세, 대신총회 남서울노회 평화교회)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여 여러 단체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 교단 남서울노회장로회, 대한민국사랑운동본부 등에 매주 조찬기도회에 참석한다. 그동안 함께했던 라이온스클럽에도 매주 모임에 참석하여 교류하면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며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저는 건강을 위해 별다른 운동은 하지 않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병원에 한번 입원한 일이 없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김 장로는 명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자퇴하고 군에 입대하여 헌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 2사단에서 근무했다. 6.25 전쟁 중에 군부대에서 군목을 통해 전도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오늘까지 신앙으로 살아오고 있다.김 장로의 집안은 철저한 불교 집안이었으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변함없이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군 헌병대에 근무할 때에 당시에는 같은 사병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근무했지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김 장로는 전역 후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경제인연합회에 입사하여 사무총장을 맡아 일하면서 많은 사업을 주도하고 참여했다. 1969년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에 일본을 시찰하여 우리나라에 필요한 경제 문제를 배우고 산업화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경제개발에 필요한 일들을 열정적으로 맡아 일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영등포기계공업단지, 구로공업공단지, 반월공업단지, 충주공업단지 등등의 설립과 사업추진에 참여해 날밤을 새울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이는 김 장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고 큰일을 해 낸 것으로 자신은 평가하고 있다.김 장로가 장로 장립을 받은 것은 예장합동교단 충현교회에서 1975년이었고, 현역으로 있으면서 노회와 총회에 많은 헌신을 하였다. 은퇴한 후에는 예장대신교단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면서 연합운동에 참여하여 헌신하고 있다."저는 연합활동을 그저 앉아서 하는 것보다 찾아가는 연합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각 지회로 돌아가며 모이면서 회전하는 연합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활력이 생겨 납니다."최근에는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에 참여하면서 대표회장에 취임했으나 김 장로의 강력한 개혁성향 주장에 회원들의 반대로 협조가 어려워 사퇴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참여를 통해 열정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일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김 장로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하여 말하면서 "무엇보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목사님들의 기득권 주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밀어 주면서 교회를 위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집행부가 결정하여 추진하는 일에 따르며 협력하면서 사랑으로 하나 되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김 장로는 부인 임순자 권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두었으나 임 권사는 97년에 소천했다. "저는 우리 집사람이 떠나고 나서는 정말 너무 허전하고 외로워서 못 살 것 같은 심정이었다."며 부인 임 권사가 살아 있을 때에는 김 장로의 사회활동에 많은 기도로 후원을 했다고 회고한다.김 장로는 임 권사와의 사이에 3남이 있다. 장남은 목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차남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삼남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극진히 아버지를 잘 섬기고 있다고 한다.김 장로는 매일 새벽기도로 시작하여 반드시 성경을 몇 장 읽고 난 후에 다른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김 장로가 즐겨부르는 찬송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이고, 또 좋아하는 성경은 시편이라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5-1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4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주님이 바울을 인도하라는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종종 주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느낄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 자녀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반드시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참 길임을 아는 자는 웬만한 고생쯤이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활력을 주님이 주심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로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주님은 일개 학자에 불과하였던 사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변화시켜 주셨다. 필자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바울의 편지가 참으로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음을 인지할 때가 많았다.다윗 역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9-42).다윗이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전전하며 동굴에서 잠자던 사울을 해하지 않고 살려준 후의 일이다. 마온에 살던 나발은 갈멜 지역에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 되는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다. 그런 나발에게 다윗이 소년 열 명을 보내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였나 보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이란 사람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겠느냐며 거절하였다. 이에 다윗은 사백 명의 용사들을 대기시키고 나발의 종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들녘에서 일하는 나발의 종들을 지켜 주었는데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에 다윗은 매우 불쾌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위기를 간파하고 다윗을 설득한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그녀는 서둘러 많은 양의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볶은 곡식과 건포도를 준비시켜 다윗을 찾아가서 다윗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말을 하면서 선을 베풀어 달라 한다.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발의 종들이 죽게 될 위기를 벗어난 줄 알라고 한다. 그 사건 후 하나님이 나발을 치자, 다윗은 전령을 보내 정식으로 아비가일에게 청혼하여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사건에서 중시되는 것은 바로 다윗과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에서 나발의 괘심한 행동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고, 아비가일도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았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가 방점을 찍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행동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따라서 행동하는 데 그 윤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세상 도덕과 괴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보아도 엄연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네 이웃에 대하여 거진 증거하지 말라”,“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 세상 도덕과 보편적으로 통하는 점도 많이 있다. 아비가일 사건도 그러하다. 남편과 오랫동안 쌓은 정도 있을텐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남편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여서, 나발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나님은 곧바로 나무라셨다. “여호와께서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사무엘상> 25:38). 나발의 잘못은 자신의 종과 목축을 보호해 준 다윗에게 서운하게 대한 데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한 데 대한 엄정한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반면에 다윗은 한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성전에 있던 음식을 먹기도 하였으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깊이 회개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한 여러 시행 착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사울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61
    푸드 목사는 “너희 행함을 설교하라 너의 의무를 설교하지 말라.”폴 틸리히는 “목사는 들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교회에서 인간의 우두머리로 높아져 있는 목사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정말!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당회장이란 이름으로 호화로운 환경여건이 우선되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명품에 빠져있음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옛말대로 촉새가 황새 뒤쫓다가 가랑이 찢어져 죽는다는 말이 신학교 출신들이 이 허망한 꿈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는 성공주의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여자 목사 안수 문제도 여성을 비하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지체로서의 교회라고 한다면 목사가 제사장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은사적 직임일 때는 문제될 일이 아닙니다.여성 목사 안수에 대한 것을 논하는 자체가 얼마나 믿음을 벗어난 사실을 노출하는 무식이라는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백석총회가 모교단측과의 통합에도 큰 문제는 그 총회가 제사장 중심제도라는 망측스러운 이단적 용어가 결국 목사가 제왕적 자리를 고수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축복권을 가졌다 하여 하나님을 대행하는 행위는 무서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연초에 높은 산을 찾아 그 지역을 축복하고 일부는 교회에서 이삭이 장자권 선포를 위한 별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별미헌금까지 거두었다는 것입니다.모 유명한 기도원에서 원장이 금요일 별미헌금을 거두어 집에 돌아갈 차비까지 거두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매여있는 자들이 목사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지 않고 여성을 비하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 올무가 풀리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너무 좋은 마지막 때를 만났습니다.그 이유는 언제나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은 새싹이 자라서 썩은 것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며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옛날 위생시설이 없을 때 생기는 종기(꼬무락지)가 온몸에 생겨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수술기구도 없을 때 긁어내면 오염되어 더욱 곪았습니다. 이 곪음의 종말은 어디에 부딪히게 되어 엉덩이에 생긴 종기가 터져 온몸에 고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고름이 빠진 곳이 굳은살로 남아 흉터가 됩니다. 그 일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만 있는 자연반응이었습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반응일 수 있습니다.사실상 어떻게 치료해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 방안을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대로 시각으로 한계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원래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그런 것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잡아 놓은 것처럼 처참한 환경을 면할 수 없는 사냥꾼의 덫에 걸린 산양 같이 먹으려는 맹수 앞에서 진리를 운운하는 그 가소로움이 도대체 네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 진리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이유나 설명이나 논리가 그리고 고명한 학자의 견해를 대언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보내신 자의 말을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잘못된 기구나 조직을 확 바꾸려고 합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내고 파서 제쳐버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있었던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제네바를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는 열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가 조찬선 목사의 「기독교 죄악사」 하권 89쪽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제네바 시의회에서 목사로 추대받아 목사로 활약하면서 성경해석자로서 최후의 판결권을 독점한 왕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교회의 규율을 엄격히 하기 위하여 수많은 신도를 투옥, 추방, 사형도 서슴지 않았으며, 천주교의 종교재판을 보고 자라온 그는 특히 종교적 범죄를 잔인하게 처벌했다. 한 예로, 춤췄다고 투옥, 설교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을 잘라 처형했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 그가 4년 동안 76명을 추방하거나 투옥하고, 58명을 처형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5-1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8
    38. 성서적 종말신앙의 부활이 필요하다 현재 기독교계 안에 상존하고 있는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종말’ 사상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종말’이라는 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역사를 세 단어로 압축하여 설명하였다. ‘창조’(Generation, 창조로 인류의 세대가 시작되었다), ‘타락’(De-generat ion, 그 세대가 타락하였다), ‘회복’(Re-generation, 타락한 세대가 다시 회복 된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역사는 ‘회복의 역사’이다. 죄인이 의인으로 회복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한 상태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고, 죄로 인해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회복되는 마지막 순간을 인류의 역사의 종말, 혹은 하나님의 왕국의 시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종말 사상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 전체는 두 개의 큰 약속이다. 첫 번째 약속의 책 구약은,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멸망당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을 따라서, 그리고 구약의 수많은 구절 속에 예언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성취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일이라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늘날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연대가 그분의 오심을 중심으로 ‘주전’(BC :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주후’(AD : Anno Domini, 라틴어 주님의 연대)로 나누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인물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무죄(無罪)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다. 또 다른 위대한 약속, “내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남겨 놓고 가셨다. 두 번째 약속의 책인 신약에는 예수 재림의 약속과 관련된 구절이 300회 이상 나온다. 그러니까 구약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시겠다는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악 세상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내용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구약에 기록된 예수 초림의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신약의 재림 약속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 재림의 시간이 곧 인류 역사의 종말이다. 재림 시에 일어날 사건들예수 재림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절은 요한복음 14장 1~3절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이 시점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의 날”(욜 3:14), “마지막 날”(요 6:40), “심판 날”(벧후 2:9), “진노의 날”(계 6:9),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등 여러 가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 재림 시에 이 지구상에 일어날 현상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 날이 지구 종말의 시간이 될 것을 확실하게 예감할 수 있다.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벧후 3:10)날 것이다. 계시록에는 그 날에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계 6:14)워 질 것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승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고, 그 후로는 “항상 주와 함께 있”(살전 4:16,17)게 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살후 1:8,9)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의 순간은 천지가 개벽하면서 온 인류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운명의 시간이 된다. 역사적 종말과 개인의 종말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예수 재림의 순간을 역사적 종말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은 개인의 종말이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예수의 재림 시에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종말은 곧 역사의 종말이기도 하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는, 그 수술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수술실에 들어갈 때의 시간 개념으로 연결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종말 개념은 개인의 생명이 끝나는 종말과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종말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질문할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2, 35, 37). 여기에서 우리가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긴 역사에 비해서 한 인간의 삶은 매우 짧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 삶의 연륜과 경험을 가지고 예수의 재림이 더디다거나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는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신앙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막 13:37)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제자들 세대에는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그러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살다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무덤에서 잠자던 의인의 부활로 연결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살도록 교훈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에, 재림이라는 미래의 사건을 현재적 시제로 보는 지혜와 신앙이 필요하다. “내가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는 재림의 소망이 오늘 나의 현재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미래에 있을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재림이 아니라, 그 재림의 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진실하게,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서적 종말 신앙이다. 베드로는 예수 재림에 관하여 설교한 다음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는 질문과 함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고 권면하였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거의 사라진, 예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하고 준비하라는 메시지의 부활이 시급하다. 예수의 초림 맞이에 실패한 유대인의 운명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5-11
  • 하나 된 민족의 회복
    지난해 묵은 역사를 살펴보면 1950년 6.25전쟁은 하나의 민족이 남과 북으로 타의 힘에 의하여 한 민족이 사상과 이념으로 분단의 현실로 서로의 갈등을 품고 분열과 갈등으로 살아오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과 북은 1972년 ‘7,4 남과 북이 공동성명’을 통해 민족이 공동의 통일 의지를 밝히고 이후 남과 북은 1992년 ‘남북기본 합의서’로 통일의지를 밝힌바 있다. 그 이후 ‘2000년 6.15남북공동 선언’, ‘2007년 10월4일 “남북공동선언”,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음을 알게 한다. 이는 우리 민족의 통일의 의지와 평화를 확수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자주적인 민족공동체가 민족의 통일을 위해 화해의 일치로 숙원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이러한 뜻은 민족이 동질성회복을 위해 통일을 위한 이산가족 상봉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민족의 한을 달래는 그 동안 정부는 어떠했는가를 알게 한다. 또한 여기에 한국교회는 이 한을 달래는 기도를 하고 노력해 왔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그 동안 우리 하나의 민족은 어떻게 살아 왔는가? 생각해 보면 비정상적인 강점기를 통하여 분단장벽, 계급장벽, 빈부격차, 상대적 경제박탈감, 정치적 갈등 등 부당한 구조적 장벽에 시달려 왔다. 또한 생명, 평화, 공의의 가치를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벽들을 허무는 일에 교회가 사회 선교에는 삶의 갈등의 구조에 외면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한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 신앙’에 거리를 두고 살아 왔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한다. 세상 만물과 만사의 일에 하느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 생명의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보면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80세 되던 해 호렙 산에서 기도 중에 하느님으로 부터 ‘민족의 해방을 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이집트로 돌아 와 형인 아론과 더불어 믿음의 힘을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함을 알게 한다. 이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의 약속(계약)의 중개자가 되면서 이후에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 끌고 에돔 모압의 광야에서 40년의 세월동안 유랑 세월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12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감을 알게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도 과거 3.1운동이 지난 역사적 의미와 그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을 보면서 민족의 어려움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한 민족의 아픔에 참여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삶의 가치는 정의, 사랑, 평화, 화해가 그 기초가 됨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역사를 살펴 돌아보면 그 역사적 사건은 시대가 처해 있는 그 시대를 두고 새롭게 그 의미와 그 시대에 함께한 말씀이 항상 따르며 거기에 해석이 따른다. 예컨대 하나인 민족이 화해하며 만나는 사건은 그 시대가 처하여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다. 민족이라는 의식이 하나의 인식으로 믿음이 생기고 여기에 따라 화해가 가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민족’이라는 서로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피는 물보다 강하다’는 교훈을 알게 된다. 예컨대 옛날 히브리인들은 살롬(Shalom)이라는 말로 서로 인사를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됐음을 알게 한다.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고난과 수난, 억압과 비극의 쓰라린 역사 경험을 가졌지만 헤어질 때마다 ‘샬롬’외치고 기도하였음을 보게 한다. 그 예로서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자식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끌려 갈 때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끌려가는 자식들의 귀에다 되고 ‘샬롬’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도 ‘샬롬’을 외치면서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는 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전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평화, 기쁨, 상호의존, 공존, 공생적인 서로 관계의 중심은 ‘화해’에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이제 남과 북은 서로 화해하는 실천의지로 믿음을 경험해야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서의 이 모든 말씀은 약속이다. 이 말씀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이요 그 믿음의 중심은 ‘화해’이며 이’화해’로 믿음은 가능하다. “하나 된 민족의 회복”은 오로지 ‘화해’ 뿐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5-10
  • 이능훈 장로
    원로장로연합회와 서대문복음화협, 서예미술진흥협회 등 조찬 참석 교류 이능훈 장로(90세, 기감 홍제감리교회 원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 30~40분간 기도하고 모임이 없는 날이면 성경을 읽고 집안에서 화초를 가꾸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매주 모이는 한국교회원로장로총연합회 증경회장으로써 월례모임과 서대문복음화협의회 초대회장으로써 또는 재단법인 한국서예미술진흥협회 등의 조찬모임에 참석하며 교류하고 있다.“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집도 거리가 멀어서 모임을 많이 줄이고 있지만 그래도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이 장로는 최근 자녀들의 권유로 경기도 부천의 자택에서 기도와 성경 탐독으로 현재 성경은 120독을 하였으며, 매일의 기도는 △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자녀들이 창의적인 삶을 살고 △모든 일에 협력하는 사역을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이 장로의 건강의 비결은 “생명주시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맑은 정신과 영혼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온 가족을 위한 기도하는 일상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늘 편안한 마음이 건강의 비결인 것 같다고 말한다.이 장로는 젊은 시절에는 국방부 산하 공무원으로 15년여를 지냈고, 이후 무역회사와 일반기업에서 간부사원으로 좋은 시절을 보냈다. 이때에 전공이 아니었지만 ‘복식부기(複式簿記)’ 방법도 배워서 회사경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장로는 건설업에도 종사하였다.이 장로는 연합단체에서 많은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교계에서는 폭넓은 지면(知面)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한국교회원로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세계기독신도연맹부총재, 서대문복음화협의회 초대회장 등 초교파 단체 외에도, 감리교단의 여러 연합단체에서도 많은 사역을 감당해 왔다.이 장로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새천년 좋은 장로’ ‘감리교 남선교회105년사’를 제작 편찬하여 좋은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이 장로는 다양한 경력만큼이나 취미와 재능이 많다. 집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에 각종 화초를 가꾸면서 건강에도 좋은 생활을 하는 한편, 여러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피아노,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을 연주하는 것으로 틈틈이 좋은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한다.이 장로는 홍제감리교회에서도 건축위원장을 맡아 현재의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이바지 했고, 감리교단에서도 연회와 지방회 등에서 여러 모양의 헌신으로 장로직을 잘 감당해 왔기 때문에 많은 후배 장로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이 장로가 존경하는 목회자는 김봉록 감독과 김기동 담임목사이다. “목사님들은 늘 존경받는 삶이 필요한데 저는 이 분들을 항상 존경합니다”라면서 지난날 열정적으로 연합사역에 몰두 할 때 함께 일했던 유상열 장로, 정연택 장로 서정원 장로 등 고인이 되신 분들이 생각난다고 회고하기도 한다.이 장로는 부인 박순서 권사를 58세에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고 홀로 지낸 세월이 오래지만 때때로 생각나는 아내를 잊을 수가 없으나 자녀들의 각별한 돌봄과 아울러 자신이 분주하게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늘상 새로운 아침을 맞게 한다고 말했다.이 장로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고 모두가 신앙으로 잘 자라서 두 아들이 목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딸과 사위들이 장로로 임직 받아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 장로의 기도와 신앙의 본이 보여준 결과 일 것이다. “남은 날 하고 싶은 일은 없으나 건강하고 깨끗하게 살면서 감사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이 장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저서를 출간한 일과 본 교회 교회당을 건축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온순하고 겸손한 모습 그대로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 ,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이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5-1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3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일화가 성경의 여러 군데서 나타나지만, 이 말씀에서도 그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아마도 자신을 배신한 가롯 유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한 베드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빌라도,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외쳤으나 급작스레 마음을 바꾼 군중, 그리스도가 군중의 환호를 받는 것을 시기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을 다 쓸어 엎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사랑과 용서였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는 편견에 사로잡힌 저들의 무지를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인시키기보다는 그리스도로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고통스런 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질 희생양이 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걸어가야 할 정도正道였다.살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왜 교계 지도자들이 싸움질만 하는가, 왜 김정은은 핵무기를 만들어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깨려 한단 말인가, 왜 독자들이 문학 작품보다 게임이나 K-Pop에만 더 연연한단 말인가, 왜 자식들이 부모의 바램대로 살지 않는가, 왜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몰라 준단 말인가 등등.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이해하지 못하여도, 끝내 희생양의 길을 택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협한 식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탓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그 방법은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은 작가의 길일 것이다. 종종 작가로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메시지를 묵묵히 형상화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소명을 이루도록 주님이 활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삼손에게도 활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생긴 힘이 그의 긴 머리칼에서 생기는 것으로만 알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힘을 주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20). 삼손의 잘못은 여호와보다 들릴라를 더 사랑하였다는 점이었이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사사기> 16:31)내면서 그는 활력을 달란트로 받았지만,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져 자신에게 힘을 주신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이는 교단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에 휩싸여 주님을 망각할 때 삼손과 같이 주님이 주신 힘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교계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을 벌일 때 평신도들을 지도하는 힘을 잃어 버린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는가.평신도들이여. 이제 주님을 바라보자.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때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억하자. 개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위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 삼손에게 힘을 주셨던 여호와를 기억하자. 그가 여호와의 뜻에 따를 때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기록을 보자. “삼손이 레하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사사기> 15:14-15).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에 삼손은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활력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주님이 주신 달란트로 삶에 활력을 찾도록 하자. 주님은 교단 지도자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바로 이 순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남을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주님은 이 시간, 아직도 어둠에 휩싸여 편견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미를 남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할 것을 주님은 원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과 이웃과 지인 들이 편견에 휩싸여 있음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사랑와 용서를 온전히 실천하였는가를 점검하여 보자.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5-10
  • 목회는 쉬운 것이다·60
    그리스도의 신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분일 뿐 섬기는 우상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의 속죄주가 되시기 위하여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그래서 그는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 동고동락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요 1:4, 갈 4:4, 히 2:14~18).우리의 찌꺼기를 정리하시기 위해 율법 아래 나셔서(갈 4:4)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아래 복종하시고 우리가 불법함에 대한 모든 것을 복종하여 철저하고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수난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 지냄으로 우리의 죄로 인하여 감당하여야 할 모든 것을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소망과 확신을 주심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사죄의 은총을 구하시고(요일 2:2, 히 7:24~25), 우리를 거룩하게 되는 일에 효력 있게 하셨으며 교회를 보증하시며 성령과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십니다.그리스도가 가지신 직임인 선지자 직과 제사장직과 왕 직에 대하여서 목사들에게 준 직임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여기에서부터 목사의 문제점의 시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무서운 공해가 목사를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오류일 수 있습니다.목사가 제사장 문화인 신당개념에서 지성소에 제물과 이름표를 가지고 우상으로 만들어 가두어 놓은 예수 신 앞에 중보하는 책임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이방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이방 종교가 기독교와 뒤섞여 이렇게 기독교 목사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한국 기독교에서 신흥종교라고 하여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갖가지 종파가 이 일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단으로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 헤아릴 수 없는 종류들입니다.그들의 종말은 이권과 재산싸움으로 신비롭게 등장한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3직에 매였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기업적이고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하나님 나라라고 위장하여 공동체적 미혹된 위선으로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기독교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목사란 무엇인가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업적 교회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교회가 신당의 탈을 벗지 않으면 계속 그리고 끊임없이 목사직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방 종교의 신도로 전락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목사란 말이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유진 피터스는 50년 목회한 회고록에서 “목사는 기능적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 애정어린 말이었다. 목사는 사람들 사이나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공동체 안에 세워진 사람이고 목사의 할 일은 현장이 중심이며 언제나 인격적이고 쉬지 않는 기도가 그 일이다”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각지체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듯 성도들은 은사를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 상호보완하며 협력하는 데 쓰기 위한 기능적인 직임이라는 점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전체가 머리 된 그리스도로서 지체의 자연스러움의 표현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목사는 제왕이 아니다.목사는 사제가 아니다.제왕주의 사제주의를 버리라.성경이 말하는 목사는 섬김의 일군이십니다. 사심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않습니다. 제왕주의 사제주의를 내려놓을 수 있는 목회는첫째, 가정교회를 회복시키는 것이요, 둘째, 가정교회보다 성경적 대안이 나오면 가정교회를 버리는 것이요, 셋째, 성경적인 목회는 가정교회라고 하고 그보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5-10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7
    37. 기복신앙으로 천국의 방향을 잃은 한국교회어느 지역이나 국가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가면, 이전부터 이미 토착화 되어 있는 토속신앙과 융합을 이루어 본래의 종교 이념이나 형태와는 색깔이 다른 제 3의 종교가 만들어진다.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기독교 역시 한민족의 토속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샤머니즘의 기복주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이유 중의 하나도, 기독교 본래의 정신인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이 발전되고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신앙인들 각자에게 있는 것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여 성도들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목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배양된 샤머니즘적 기독교샤머니즘이란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부터 인간의 삶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내려 온 원시종교의 한 형태이다. 심성이 연약하고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나 사물에 대하여,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절대신(神)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종의 신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 신앙은 주로 현실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위험이나 불안이나 재난 등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더 나아가 삶에 필요한 것들을 신의 손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생존의 본능과 관련을 갖는다. 반면, 기독교는 매우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치밀한 질서와 이론과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종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경배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막연한 신(神)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통해서 계시된 구체화된 존재이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경우에 다양한 형태로 인간들에게 현현(顯現)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교제하고 소통하면서 궁극적인 구원의 도(道)와 현실적인 삶의 원리를 제시한 지성적 존재이다. 그리고 현재의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복에 대하여 언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현실적인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주문을 외우듯이 반복하여 간구하면 그 마음의 간절함이나 성의를 보고 내려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얻어지는 결과적인 선물이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5).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원리가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언약의 말씀을 잘 깨닫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그 열매로 나타나는 올바른 행실과 성품의 변화를 가르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적 번영과 복 받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강조하므로 샤머니즘적 기복 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와 넓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기독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것도 오랜 세월동안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던 샤머니즘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샤머니즘에서 사용하는 ‘주문’(呪文)이 기독교의 ‘기도’와 접목되어 샤머니즘적 기독교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의 기능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이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이 성경절에서 “내 이름으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 혹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라는 의미와 함께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뜻대로” 구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사람의 의식주에 대하여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6장의 내용도 그 핵심에는 33절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에 먼저 구해야 할 “그의 나라와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도와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성경절의 의미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인간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조건 아무 것이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기적으로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복은 현재적 삶에 필요한 물질적 복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복신앙에서 복음신앙으로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현실 생활에서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참된 복음의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복음의 진수는 죄인이 예수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로 죄를 용서받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극복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서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복을 누리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계명들은 사람의 건강과 행복과 평안과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이 왕에게 한 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으실지라도) 왕이 세운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겠다는 이 단호한 결심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모든 백성에게 필요한 절대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추구하는 복은 너무나도 물질적이며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다. 심지어는 복음 전도와 성품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능력으로 내려주신 성령의 선물도, 치유의 은사, 방언의 은사, 귀신 쫓는 은사 등 왜곡된 방향으로 치우쳐 있어, 정작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와 같은 은사는 희귀하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도래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현실적인 구원자를 찾다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참 메시야를 거절하였다. 신약에 예언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이 현실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기복 신앙에 눈이 멀어 천국의 방향을 상실하고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는 일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4-26
  • 어떻게 지내십니까 / 김봉선 장로
    “매일 새벽기도, 건강이 허락되는 대로 연합단체 모임 참석” 김봉선 장로(92세, 예장합동 서울 내수동교회)는 매일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매주 사랑의 쌀 조찬기도회, 원로장로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경기노회와 서울지구 장로회 월례회에 빠지지 않는 것이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매주 목요일 내수동교회 노인대학에도 열심히 출석하고 있다.“저는 하루도 집에서 조용히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이 나이에 분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김 장로는 어린나이에 결혼하여 딸 하나와 부모님을 모시고 황해도 옹진군에서 1.4후퇴 때에 피난 나와 월남하였다. “제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친족이 이산가족이 되지 않고 살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처가 쪽으로는 처남과 처제가 이북에 남아있는데 소식은 못 듣고 있어요.”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통일을 기다리고 있지만 너무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젠 노년에 기다릴 희망도 다 사라졌다고 탄식한다.김 장로는 생애에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가 박희천 목사라고 말한다. 박 목사와 교회를 섬기면서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을 감사하고 있다. 예수를 믿고 당시 후암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박희천 목사를 따라 지금의 내수동교회를 개척 설립한 후 은퇴하기까지 함께 사역해 왔다고 한다.김 장로는 1973년에 장로장립을 받고 노회와 총회 총대로도 활동하고, 경기노회 장로회와 서울지구 장로회, 전국 장로회 등에 참석하면서 연합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친교와 인간관계를 넓게 가져왔다.김 장로는 박희천 목사의 오른팔이 되어 여전도사를 두지 않기로 한 교회방침에 따라 20여 년간 ‘내수동교회 심방장로’로 사역하였다. “아마도 한국교회에 심방장로로 이렇게 오래 사역한 것도 처음 같고, 제가 여전도사 대리역할을 한 것이지요.”라면서, “저는 심방을 가면 꼭 담임목사님이 보내서 왔다고 말하면 잘 받아 줍니다.” 내수동교회를 은퇴한 박 목사는 그 공로를 잊지 않고 늘 “모든 것은 장로님이 다 하셨다.”고 했다고 한다.김 장로는 부인 한도화 권사(91세)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고, 두 자녀는 칠십대가 된 노년을 맞고 있으나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있다. 아들의 집에서 보내고 있는 노부부의 건강은 아직도 출입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다. 그러나 때때로 북에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면서 눈물 젖은 기도를 할 때가 많다고 한다. “북에서 피난 나와서 남다른 은총으로 예수 믿고 살게 됐으니 감사하고, 남은 생애도 예수님 의지하고 천국 갈 때까지 감사함으로 살겠습니다.”김 장로는 그동안 연합단체 모임에 참석하며 느낀 지도자들에 대한 소감은 “무엇보다 자리다툼이 너무 심하고, 자신들이 회장과 임원을 맡겠다는 욕심이 많다.”면서 기독교의 가치관인 ‘겸손’이 결여된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면서 순교적인 사명을 일깨워 나가야 희망이 있다고 했다.김 장로는 피난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고 살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추억은 본 교회에서 박 목사의 은퇴를 앞두고 예우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한다. 같은 당회원으로서 의견대립이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도 서로가 화해하고 손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김 장로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이고, 성경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16절로 18절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구절을 평생 교훈으로 삼고 자녀를 양육하고 대인관계를 가져왔다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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