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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 아래 있는 인간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은 피조물이다”는 전제하에 죄에 의한 실존론적 인간 이해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오늘의 인간의 삶을 사는 해석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그 의미에 뜻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다른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로 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그 특징이 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다만 인간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 현실을 그대로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인간 삶의 현상을 지적하려는데 유의해야 할 것은 죄라는 개념을 밝히는데 있어서, 법이나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거나 또는 죄의 현실을 밝히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죄로 부터의 자유와 해방, 여기에 죄를 묻는 근본적인 그 목적과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시키려는데 그 의의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죄론은 구원론의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묻는 것은 곧 ‘회개’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됨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 에게 비로소 구원의 믿음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구원론에 있어서 죄를 가장 문제시함에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함에 이르고자 함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죄”라고 함에는 우선 일반 ‘법’으로 이해하여 세상 법만 어기는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문제는 ‘법’을 어겼다는 사실만으로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법의 기본 정신과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한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문제 삼는 것도 죄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문제로 보는 죄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선 차원의 죄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묻는 근원적인 죄가 무엇인가? 그 ‘죄’는 종교적인 영역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 곧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인간의 잘못된 힘’을 알게 한다. 세상 맨 처음 창조의 에덴동산에서 간사한 뱀이 이브를 꼬일 때 사용한 유혹의 말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인간의 죄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유혹의 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인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소외’(estrangement)를 말하는데 하나님을 가리켜 “존재의 근거”,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가 되는 바로 그 존재의 근거자체로 오만 불손으로 멀어져 소외된 존재로 자처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여기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비존재의 유산을 그대로 안고 있어 유한성에 얽매여 있는 존재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참된 자기’를 창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존적인 자기로 부터 탈출하여 미래를 지향하려는 자기 아버지 하나님 되신 초월의 관계하고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유한성과 자유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는 것을 인간의 삶의 자세로 그리스도인 삶을 영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본 뜻은 ‘불신앙’에 있다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죄의 물음을 반도덕적인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다. 불신앙(비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단순히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전인적으로 떠나 있는 상태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를 가리키기에 우리는 새해 벽두에 참신한 그리스교의 교인의 한 인간으로 무술년 새해를 맞아 “죄 아래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01
  • 여시동 장로
    노년에 자신의 사무실 출근하여 일과를 시작하는 기쁨 넘쳐 여시동 장로(75세, 예장고신 주님의교회)는 늦은 나이 74세에 취득한 공인중계사 자격으로 서울 강남 대치동(비전 컨설팅 공인중개사) 번화가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매일 출근한다. “내가 이 나이에 건강하게 일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별다른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걷는 일상이며, 무엇보다 모든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다 내려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경북 상주에서 1967년 서울로 올라와 경향교회(석원태 목사)가 설립되면서 출석하여 1999년에 장로로 장립받기까지 교회를 열정적으로 섬겼다. 평소에 존경하던 석 목사를 도와 은퇴하기까지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당시에 나는요 좋은 지도자 목사님을 만난 것이 자랑스러웠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젊음을 다 바쳐 교회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청천벽력 같은 목회자의 일탈행위가 드러나 도무지 남아 있을 수 없어 그 교회를 나왔지요. 지금은 경향교회를 떠나 개척된 주님의교회에서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난날의 온갖 발자취를 돌아봅니다.”여 장로는 그 일로 인해 교회가 크다는 것도 의미가 없고, 목사가 유명한 것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작은 교회일지라도 가식이 없는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즐거운 교회생활이 필요하다고 했다.“나는 목회자를 섬기면서 살게 된 것이 즐겁고 감사했습니다.”여 장로는 경향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서 다음세대를 양육하는데 노력해왔고, 석원태 목사를 도와 고려신학교(고려측 파주캠퍼스)의 어려운 운영을 도우기 위해 후원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여 장로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그나마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좋았던 기억들을 말한다. 그러나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여 장로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같은 동료 장로간의 갈등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장로로서 그 신앙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동료로부터 인격적인 모욕과 폭언 등을 당하면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모순을 참아내야 하는 괴로움이었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여 장로는 교회를 은퇴한 후 74세가 되던 해에 공인중개사 자격 시험에 도전하여 최고령자로 합격해 학원에선 모델까지 하는 등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하나님 은혜로 이 늦은 나이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고 사무실을 개설하여 내 이름으로 나의 대표명함을 당당하게 내 놓고 일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여 장로는 새해가 되면서 남다른 포부와 결심으로 이름 그대로 그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벅찬 가슴을 안고 뛰고 있다. 지금 개설한 사무실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남은 생애에 교회를 위해 못다 한 헌신을 다하려고 한다는 그의 다짐이 결실로 이어지길 기대한다.여 장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첫째 좋은 목회자를 만난 것이며, 둘째 좋은 이웃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교회가 무엇이냐고 말한다면 “말씀의 토대 위에 바로 서 있는 지도자로서 깨끗하고 본이 되는 목회자가 있어야 하고, 교회를 책임지는 일은 목사와 장로가 함께 성도들에게 신행일치(신(信行一致)의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교회연합과 일치에서도 지도자들의 각성과 회개가 필요하고 오늘의 난제를 풀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밖엔 없다고 강조한다.여 장로는 김수정 권사(72세)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어 장남은 직장인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고, 출가한 두 딸들도 신앙가정으로서 잘 살고 있다. “나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아요. 가정이 은혜롭게 부부가 노년에도 건강하며 평안하고, 나 같은 못 난 사람이 교회의 장로로 부름 받아 지금까지 헌신하게 하신 것 너무 감사하지요.”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2-0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5
    요즘 들어 진리는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따라서 진리도 많은 사람에게 공감되는 진실로 인정받아야 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론 진리가 다수로부터 인정을 받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베이비 부머 세대입니다. 이 땅의 베이비 부머들은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민주화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연례 행사처럼 치러지는 위수령 등으로 인하여 강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레포트 제출로 학점을 받아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교수들이 삼사십 년간 연구 결과물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고, 개인의 학문적인 체계도 개인이 도서관에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 챙겨서 정리해야 할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대학 4년 동안 배운 것이 직장 생활을 하는데 평생 유용하여야 할 터인데, 민주화를 이루느라 대학 강의를 직접 듣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보니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한때 대학 교문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때가 있어서 대학물을 적게 먹긴 하였지만, 우리들의 젊은 날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몸짓은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데모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유신 철폐를 위한 데모가 있으니 B탑 앞으로 모이세요.”총학생회 임원인 K가 여러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나가자.” 과 대표인 희찬의 외침과 함께 우리들은 가방을 챙겼습니다. 학교 중앙에 있는 B탑 앞에는 이십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우리는 탑 앞으로 가서 모여 있던 학생들과 합류하였습니다. K가 4열 종대로 스크럼을 짜서 돌자고 해서 “유신 철폐 민주 수호”를 외치며 다섯 바퀴를 돌자, 어느새 탑 앞에 모인 학생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습니다. 주요 일간지 완장을 찬 기자들이 탑 앞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어 데모 현장 사진을 부지런히 찍고 있었습니다. “유신 철폐, 민주 수호” “유신 철폐, 민주 수호”라는 외침이 남산 중턱을 넘어설 듯이 커졌습니다. 이제 학생들은 장충단 공원이 있는 정문쪽으로 나아갔습니다. 학생들은 8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였습니다. 그러자 교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교문 앞에는 경찰들이 빽빽이 막아섰습니다. 누군가가 일단 앉자고 소리쳤습니다. 학생들은 차분히 앉아 다음 행동을 준비하였습니다. 따가운 초여름의 햇살이 우리들의 이마와 등에 내리꽂히자, 수학교육과의 강**가 큰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우리 과 여학생 감**이 유신 체제의 부당성을 적은 원고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십여 명의 학생이 운동장에서 끌고 온 농구대를 교문에 밀어붙이며 밖으로 나갈 통로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길거리로 질주하였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최루탄 냄새가 눈과 코를 찔렀습니다. 산소 마스크를 쓴 기자들이 팔을 더 높게 쳐들라고 하였고, 대열 앞에 서 있던 나와 우리 과 학생들은 팔을 높이 쳐들며 “유신 철폐, 민주 수호”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습니다. 데모가 있은 지 일주일 후, 사범대학 건물 현관 게시판에는 붓글씨로 쓴 공고가 나붙었습니다. ‘교육학과 정** 제적수학교육과 강** 자퇴’우리들은 황당하였습니다. 단지 정**은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데모 소식을 알리고, 데모 학생들에게 물을 떠다 준 일밖에 없는데, 두 사람의 얼굴이 그 후로 학교에서 안 보였습니다. 며칠 후에야 나는 정**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강**이 형사들의 강요에 의해서 자퇴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데모 현장이 한교 정문 옆에 있는 A호텔 빌딩 옥상에서 누군가에 의해 상세히 비디오로 촬영되었고, 그 때문에 한때 직장을 잡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내 안에 있던 숨겨진 진실은 결코 죽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요즘 문단의 어떠한 모임에 가서도 불의와 부조리를 용납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젊었을 적에 가졌던 용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될 만큼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보물입니다. 그 실록이 나오기까지에는 사관들의 목숨을 걸고 쓴 사초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관들은 그 실록을 쓰고 나면 사초를 물에 씻어 지워버렸습니다. 나는 젊었을 적에 내가 가졌던 진실을 향한 용기가 지금도 내 가슴에서 용트림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2-0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2
    망각이 우리의 모습 자체를 왜곡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자기 본연의 창조성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길러지는 것이라고 하여 교육의 본질을 그곳에 두기 때문에 세상적 조건을 갖춘 고통과 불안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길러짐 때문에 영원한 불구로 살 수 있습니다.유명이란 순간일 뿐 지속이 아닙니다. 스타는 별과 같아서 그 존재는 순간뿐입니다.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일 뿐입니다.나는 닭인가?나는 독수리인가?나는 유명한 성악가인가? 유명한 정치인인가?다시 말해서 나는 땅만 헤집기 위해 태어났는가? 창공을 비행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그 대답일 뿐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사람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길들이려고 하면 독수리는 닭 울타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교육은 본성을 찾기보다는 습관에 의해 반복된 길들임에 있습니다.에드워드 옆의 「권력과 지성」이라는 책에서 지식인에 대한 정의한 게 있습니다. “지식인이란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습관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지식인은 친숙해지면 더이상 지식인이 아닙니다. 스스로 객관화해야 합니다.건축가인 송효상(2011년 광주디자인 비엔날레 총감독) 씨도 건축가로서의 기본 사상을 “항상 시각을 달리하려고 나를 타자화(他者化), 객관화하려고 훈련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자신의 객관화는 인간의 창조적 원래 모습의 회복입니다. 누구와 똑같은 쉬운 형태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창조일 뿐입니다. 그 결과까지 스케줄은 나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창조는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십시오. 그 영화가 유명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본성적 진실한 삶의 가치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금하면 꼭 보십시오.세 상에 길들었다는 것은, 전통적 교회에 길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성의 바로 길든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나만의 주신 하나님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상적, 윤리적 잣대로 평하고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달고 혈압을 체크하고 혈당을 잴 이유가 없습니다.새벽 기도로부터 주일 성수, 성경 공부, 소그룹 지도, 철야 기도, 십일조 헌금, 기도원 기도, 세미나, 될만한 프로그램, 건강을 위한 헬스, 골프, 등산, 미팅, 정치적인 모임, 단체모임, 경조사 외, 헤아릴 수 없는 목사의 품위를 지키려고 약을 한 주먹씩 매 끼마다 털어 넣고 수시로 정규적으로 검진하는 일까지 목회자 자녀라고 하여 체면과 관계된 관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결국 자기 꿈 실현을 위한 불타는 욕망, 비판, 자기 개발 등 셀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목회는 나 개인의 습관에 일부분이 아닙니다. 예수처럼이란?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나 장소나 버릇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금욕적이거나 극단적인 철저한 무릎이 해지도록 했다는 기도 생활 외의 모든 것과는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이런 이야기를 어느 분이 했습니다.남인도의 성스런 이루나 찰라라는 산기슭에는 라마나 마하리쉬란 위대한 현자가 살았다고 합니다.헌신하는 자들에게 ‘스리라마나’로 불렸던 그는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아주 간단한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누구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수많은 사람이 스리라마나를 찾아왔는데 그중에 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사업가나 결혼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기를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는 아낙네들 외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다고 합니다.이런 수천, 수백 명의 사람이 갖가지 현실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지혜를 기대하며 스리라마나를 찾아왔는데 그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처방전을 들려주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2-0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9
    29. 영국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1534년 국왕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성공회와 로마교회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그 후 1559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반가톨릭법을 강화시켜 교회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였다. 당시 성공회는 가톨릭에 속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개혁교회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정책은 영국 내에 혼재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이해하며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의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소위 ‘국교주의’ 사상이 개신교 전반을 지배하였고, 국가가 예배의식이나 교회 출석 등을 간섭하고 강요하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중심의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던 청교도들은 국가로부터 수색을 당하고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청교도들은 마침내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네덜란드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청교도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에 그들은 집과 재산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떠났다. 대체로 물질을 신앙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저들의 신앙은 참으로 순수하고 진실하고 담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청교도들은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이 생활하기에는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든든해지고 깊어졌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일부 청교도들은 더 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다시 신대륙(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떠날 때 그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존 로빈슨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의 고별설교의 일부분은 오늘날 현대 개신교회가 깊이 새겨보아야 할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다. “나 개인으로서는 개신교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해마지 않습니다. 그 교회는 한 때 신앙적이었지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 이상으로는 한 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형편입니다. 루터교도는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 칼빈파의 신도들 역시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남긴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밝게 비치는 빛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의 전부를 밝히 깨닫지는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희가 처음에 받은 빛 이상의 빛을 받고자 갈망할 것입니다.”(D.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1, 269). 암흑시대 동안에 훼손되고 가려지고 파묻혀버린 성경의 진리를 하루아침에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평생 동안 밝혀낸 성경의 진리는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리가 밝혀지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찾는 일을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실수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청교도들을 ‘분리주의자’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영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1620년 9월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여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수개월 간의 항해 끝에 12월 21일, 남자 78명 여자 24명, 도합 102명이 미국 버지니아 플리머스에 도착하였다. 겨울철에 도착한 그들은 초기에 뼈저린 고생을 하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나, 원주민의 도움으로 농사를 배우고 이듬해 봄이 되면서 비교적 안정한 삶을 시작하였다. 1630년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북쪽에 있는 한 지점에 도착하여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1640년 경에는 약 2만 여명의 영국계 이민자들이 새로이 형성된 뉴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되었고, 1691년에 플리머스가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에 통합되면서부터는 먼저 이주해왔던 분리주의자(청교도)들은 더 이상 분리된 상태로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의 종교생활을 주도하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도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박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들이 청교도의 정착촌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정착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청교도들은 다시 보복하였고 이로 인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원주민 인디언 추장 필립을 체포하여 그를 참수하였고, 사지를 네 방향으로 잡아당겨 찢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청교도의 기독교 정신을 상실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 먼 거리를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핍박을 가하였다. 교인들만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고 정부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의 종교 박해를 피해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또 다른 형태로, 자신들과 다른 신조를 따르는 신앙인들을 핍박하고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죄악의 본질을 타고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는 발전하지만 인간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만 다를 뿐이지 이러한 양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외친 용감한 투사신대륙에 영국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지 약 11년 후 로저 윌리암스라는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영적으로 성서적으로 매우 확고한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가 범죄를 예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규정하고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고 부당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정부가 정한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금을 가하거나 투옥하는 것은 영국의 국교주의와 같은 것이므로 결코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저 윌리암스는 결국 국가의 정치와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 인물로 간주되어 식민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고, 14주간을 혹독한 추위 속에서 피신하여 다니면서 기적 같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하여 생존하게 되었다. 때로는 인디언의 부락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하였고, 수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떠돌며 헤매던 끝에 근세(近世)에 신앙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장하고 승인한 최초의 주(州)라고 할 수 있는 로드 아일랜드 주(州)의 기초를 놓았다. 그 주는 당시 신앙 박해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번창하는 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州)가 표방하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마침내 북미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이렇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 풍요한 나라로 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 신대륙의 나라에 와서 신속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은 개신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신앙심 없이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신앙고백을 하며 신앙인이 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는 그들의 영향력 때문에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들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타락했던 역사가 미국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개신교계에도 새로운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1-22
  •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
    사람이 목숨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다가 삶으로 가는 로드 맵(road map)’으로 흔히 ‘인생 칠십 고래희’하여 [두보의 시 곡강]에 나온 말로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살기란 예로부터 드믄 일이라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이 삶의 한계를 넘어 100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은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로 그 인생관으로 인생의 존재가치, 의미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새해를 맞아 삶의 전체적인 사고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문제를 알게 한다. 본래 철학적으로는 그 근거 추구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여기에 따르는 개념이나 사상의 바탕에 근거하여 근거 추구를 하기에 삶의 구조와 그 의미에 대한 자기 이해를 묻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추구하며 산다. 이는 곧 현대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인생관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해석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여기에 크리스천이나 비크리스천이나 구분 없이 가릴 것이 없다. 이는 곧 여기에 그 근본적 해결의 문제는 오늘의 인생살이에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오늘의 삶이 안고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 중점이 되고 있고 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 중심 자료는 구약 창세기에 나타난 {에덴의 설화}가 그 중심의 자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태어남은 아버지(부성)없이는 태어나지 못함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논 할 때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을 알게 한다.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로 이를 말할 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라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과 무관한 인간의 세상살이는 상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과 무관한 모든 관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인간의 인생살이의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바탕이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연구되고 말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라면 사람에 관한 신학적 개념, 명제, 진술들이 인간학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을 믿게 한다. 여기에 인간학은 인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거쳐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게 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이를 본업으로 삼아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 전체를 거기에 준한 목적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철학은 인간을 인간 자체, 존재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그 삶의 자리를 검토 비판하고 인간을 그의 삶의 자리, 곧 사회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이해하려 하며 인간의 인생살이는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풀어 보려는 것을 우선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를 가리켜 항상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사람을 그 자체로서 단독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을 전제로 한 인간 이해라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이해를 돕는데 절대적인 필요와 사람의 주체성 확립뿐만 아니라 인간이 세상살이를 통해서 하느님은 방법상으로나 상징적으로도 중요성을 알게 하고 믿게 한다. 그 증거는 하느님이 인간들의 아버지이심으로 사람의 사랑의 아버지로 드러나게 하는 인간학적 의미가 있음을 신앙하게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해에 있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자녀로 조명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절대적 초자연적 존재에 예속된 인간, 그 말씀에 순종한 인간을 의미 한다면 여기 절대자인 하느님은 궁극적 실재, 궁극적인 관심, 존재의 근거, 등 개념으로 신앙하는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신앙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는 첫째가 인간은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다. 두 번째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스런 존재라는 사실로 인생의 유한한 존재임을 인생살이에서 알게 한다. 신학적 해석에 의하면 창조론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세상살이에서 이를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인간을 피조자로서 창조주 하느님을 믿게 한다. 이는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인생살이”를 알게 하는 것이다. 한해 365일의 인생살이를 기본으로 하느님의 나라 일에 삶을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1-18
  •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교회-2
    일본에서 복음 강연을 여러 번 가져본 이들은, 그 참여하신 분들에게서 지역적인 도넛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참여하신 분들이 거의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거주하는 마을 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알게 되면, 죽어서도 마을 묘지에조차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크리스천들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국민은 모두가 천황을 숭배하던 터이라서, 일본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란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천황 숭배를 당연히 거절하게 되므로, 종교 때문에도 매국노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일제 강점기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애국이요 애족의 행위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 읽은 성경은 출애굽기였다. 기독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실제로 옥중에서 돌아간 신도들은 나라사랑과 신앙이 일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톨릭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사람의 순교자도 배출하지 못하였음은, 저들 지도부가 이미 일제와 천황숭배를 비롯한 조약들을 맺은 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적인 부끄러운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혁신적인 실천으로 인해서, 지나간 과거가 모두 묻혀 지고 씻은 듯이 부끄러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김 추기경은 독일 개혁교회의 신학원에서 개신교신학을 연구하였고, ‘내 탓이요’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벌이면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가톨릭이 되게 한 것이었다.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인들과 크나큰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은, 저들이 부끄러움과 패배감 때문에 결코 다시 재건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론적인 생각들은 모두 시간 속에 묻혀져 버리고, 오늘의 독일은 유럽의 지도자 국가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진 것일까? 더욱이 유대인들이 600만이란 희생을 감내하였지만, 오늘 날에 가장 자신들을 존중히 여기고, 자신의 동포들을 지극하게 사랑하고, 소통이 잘되는 민족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도 못 받아 들였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해서 열 가지 계명을 스마트하게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에게서 신명기 서신의 저주는 온데간데없는 것 갔고, 신명기가 예찬하는 실제의 행복감이 가득 넘치는 세상을 일궈냄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더더욱 1퍼센트에 육박하는, 성령을 체험한 메시아닉 쥬가 일어나는 이유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종교 개혁이 독일의 한 지역에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할 즈음, 로마 공교회는 제도적으로 수많은 결함들을 들어내고 있었다. 한 때는 ‘팍스 로마’라는 평화가 온 유럽에 영향을 주어서 사람들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하였지만, 시간을 보내면서 내부의 타락과 지도자들의 탐욕은, 주변 지역들의 제후들과의 불편한 관계들을 가져왔고, 전체주의에 신물이 날 정도였으며, ‘공교회’의 제도에 모두가 얽혀져 있어서, 불편한 관계가 중첩되자, 사람들은 뒤집힐 날만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이 때에 황제의 칙령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일반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위에서 온 권세 있는 ‘하나님의 복음’을 루터가 선포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늘에서 내린 포고령이었는데,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이 신의 계시의 칙령을 완수할 사도는 바로 루터이었던 것이다.루터의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남’을 사람들에게 계몽하고, 누구든지 이 복음 선포를 수행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입게 됨’을 성경을 번역하고, ‘바빌론 포수’와 ‘만인 제사장’ 등의 계몽서적을 발간하여 읽히게 함으로써 이뤄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력은 당시 ‘우리나라 우리 민족 끼리’라는 구호와 공감대를 가지면서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Needs와 맞아 떨어져서 커다란 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역기능적으로 보여 진 이들에게는 세월호 같은 운명이 라고 생각 될 수 있겠지만, 누가행전의 통찰력을 도움 받는다면, 이 한국교회에 승선한 모든 승객들과 승무원들을 구해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레데 섬을 떠나, 이탈리아로 항해하던 600명 가까이 승선한 배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몰타 해협에서 파선하였지만, 숨은 은둔자인 죄수 바울만큼은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고 있던 터이었다. 이 배에 승선한 이들은 바울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모두가 살아남아서 로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간 십삼 년 넘게 ‘영성논단’을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다음 날을 기약합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8-01-18
  • 황충기 정교
    더불어민주포럼 사무실 매일 출근, 교계 인사들과 친교 가져 황충기 정교(74세, 구세군아현교회 원로)는 매일아침 집 뒷산을 오르는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최근 사무실을 열게 된 ‘더불어민주기독포럼’ 사무실에 매일 9시에 출근하여 일과를 시작한다.황 정교는 지난날 중국정통보건요법중앙회 회장으로서 대체의학을 통한 선교와 진료에 전념해 왔다. 은퇴 후에는 필리핀에서 대체의학을 연구하면서 ‘이스트아벤유 메디칼센타(東西韓方病院)를 국립의료원 한방 부속병원으로 설립 개원하여 원장으로 일해왔다.황 정교는 “저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선교지향적인 가치를 목표로 하고 일해 왔습니다.”라며, 많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복음선교가 목표였다고 한다. 병원 건물 전면에 ’이 병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치료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라고 현수막을 내걸고 진료했다. 병원의 목적을 복음선교에 두고 경영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무료진료도 해 주고, 믿는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진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환자가 많았지요.” 황 정교는 이러한 간접선교가 매우 보람된 사역이었다고 회고한다.황 정교는 4년 후 병원은 위탁경영으로 돌리고 귀국했다. 지난 2002년부터 계속해 온 민주통합포럼, 열린민주포럼까지 당시 야당중심의 모임을 운영해 오면서 열심히 정치권복음화운동을 펼쳐왔다. 황 정교는 “저는 야당의 편에서 오랫동안 포럼을 만들고 기도회를 개최해오면서 많은 오해와 비난을 들어 왔고, 심지어 빨갱이 좌파라는 비난도 받기도 했으나 인내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며 어려웠던 기억을 떠 올렸다. 심지어 기도회를 열면서 설교자를 섭외하면 ‘좌파’라면서 거부 당하는 일을 여러 번 겪어도 인내로 계속해 왔다고 한다.또한 황 정교는 그동안 사단법인 통일연합종교포럼을 통해서 북한에 인도적인 지원과 필리핀, 캄보디아, 몽골 등에도 의약품지원 사업을 해 왔다고 한다.황 정교는 그동안 문제인 대통령 당선을 위해 노력했고, 이에 힘입어 ‘더불어민주기독포럼’ 사무실을 기독교연합회관 1405호에 개설하고 본격적인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한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 단체는 여당 내의 야당역할을 할 것이며, 교계는 물론 정계에서 진실한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계를 위한 기도운동을 비롯하여 신앙적으로 인정받는 단체가 될 것이라며, 정치꾼이 모인 단체가 아니라고 말했다.현재 더불어민주기독포럼은 국내에 330개 지부, 해외 5개 지부(미국, 독일, 프랑스 등)를 조직 운영하고 있다.과거와 달리 “진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회, 교회를 염려하고 위하는 단체가 돼야 한다”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방인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모든 명예와 질투, 다툼을 버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 정화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황 정교가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어려운 시기에 많은 비난과 수모를 당하면서 기도운동을 해 온 것과, 북한선교를 열심히 한 일”이라고 회고한다.황 정교는 김금자 부교(74세)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자녀들이 하나님은혜로 건강하고 행복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고, 가정이 은혜롭고 평안한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저는 무엇보다 부부가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라면서, 특히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황 정교는 앞으로 더불어민주기독포럼을 통해 교계를 정화시키고, 나라를 위한 새로운 신앙운동을 펼쳐 나가는 비전을 가지고 우리시대에 참다운 기도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편집자주: 구세군 ‘정교’는 타교파의 ‘장로’에 해당하고, ‘부교’는 ‘집사’에 해당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1-1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4
    그 날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엠마오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두 제자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시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여 주기를 바랬다. 그가 죽은 지 사흘이 되었을 때에 그를 따르던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 일을 보았다. 여자들이 그의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무덤에 나타난 천사들이 “그가 살아나셨다”(<누가복음> 24:23)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동료 제자들이 무덤에 가서 확인하여 여자들이 말한 것을 확인하였느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예수는 당신이 고난받고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을 선지자들이 그토록 말하였는데도 더디 믿느냐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날이 저물었으니 자신들과 함께 묵고 가자고 그리스도에게 강권하여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지고 있던 떡을 떼어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가 직접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들과 함께 한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열한 제자와 함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주께서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엠마오를 갔다 온 두 제자도 그들이 길에서 일어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누가복음> 24:35)였습니다. 이와 같은 엠마오 사건을 보면,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은 굉장히 멀리 떨어진 별에 계신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태어나서 현재까지 살아오는 동안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동행하실 겁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당시 이스라엘 민중에게 왕따를 당하던 세리 삭개오의 집에 거하셨습니다. 중풍병자와 소경과 문둥병자를 고치셨으며,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으며, 죽은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젊은 시절에도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나의 아버지는 1970년대에 42년간의 교직 생활로 얻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다 날린 후 기존의 살던 집을 팔고 변두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은 서대문구에 있는 ‘기자촌’이라는 곳이었는데, 높은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어서 비탈길이 가팔랐습니다. 형제들이 거의 결혼하여서, 그 집에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시집 안 간 막내 누님과 총각인 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종종 걸음으로 올라가도 20여 분이 걸리는 산 중턱에 있던 집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고, 산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적막감을 더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전화기가 드물던 때라 직장에서 호출하는 비상 전화는 옆집에서 전달받아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침묵으로 달래셨고, 나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쪼개어 집안의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내가 작가로서의 꿈을 접고 묵묵히 직장 생활을 하였던 것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집 없이 공생애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개인의 안일에 머물지 않았던 사도들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현재의 고통은 단지 지나가는 풍경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젊은 시절에 내가 당하였던 고통은 주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쇠는 뜨거운 불에 달구어져 많이 칠수록 단단하여 집니다. 주님은 구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시련을 몸소 십자가 보혈로 체험하셨습니다. 이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 뒤에 영생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매우 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몸소 부활하셔서 우리들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의가 있음을 믿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개인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옆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심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셨고, 이를 통해 인류를 향한 사랑을 실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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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51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꿈 꿔 온 스토리는 산산이 부서지는 환상일 뿐입니다. 목회자의 꿈은 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아닙니다. 한참 세계를 뒤흔드는 목적 있는 삶이나 열정, 비전, 긍정적인 삶, 이런 거창한 꿈의 소리가 목회자들의 말 못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목회자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에 목표에 돌을 던져놓고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삶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발생한 중병이 위선이요, 거짓말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종말은 모라토리움으로 비참함을 체험해야 하는 것을 아는 목회자가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가 사는 방법이 큰 목소리입니다. 한국적 상황은 교통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명함에 이력서를 넣고 다니는 사람 중에 목회자가 많다는 것도 아는 사실입니다.지금은 덜 하겠지만 흰 와이셔츠 주머니에 경목이라는 꼬리 달린 카드를 넣고 과시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불편한 삶이겠습니까?과시하려는 꿈이 현실이 되지 않음은 큰 축복일 수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치유를 가져오지만, 환상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목회자가 어렵다는 것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허망한 환상입니다. 그래서 나의 진실함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다닙니다. 그 옷이 명품이라는 현대사회가 그보다 교회가 걸친 에봇이 되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가운은 벗어야 합니다. 시날산 외투 한 벌을 벗지 않아 돌무더기에 묻어버린 것을 보였을 뿐 아니라 큰소리쳤던 용기가 위선으로 변질되었을 때 죽는다는 것도 보았습니다.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매여 있는 천국의 보상심리가 목사의 주 무기였습니다. 코너에 몰릴 때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죽을 힘을 다해 짖어댑니다. 목회자의 자기 자신의 욕망의 안타까움의 돌파구가 죽은 후 보상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 이전의 삶을 우선하였습니다. 사는 척 폼을 잡고, 진정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며 상패나 학위나 갖가지의 사회적 상징들을 끌어 모으고 유행어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뻥 뚫린 허전함을 수단과 비전으로 메우려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지나가 버린 날들은 나의 공력으로 나열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도 꿈을 못 깨고 있다는 사실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제 오늘 이야기를 제리 프랭카우서의 저서인 「독수리와 닭」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새들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 때부터 닭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닭 모이를 먹는 독수리는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닭들처럼 행동하면서 더 이상 자신이 독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넌 독수리야 날개를 펼쳐서 날아보아라”라고 지붕 위에서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태양을 향해 번쩍 쳐들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승리에 찬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습니다.독수리는 창조하실 때부터 독수리였습니다. 비록 닭들과 함께 먹고살았지만, 독수리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잠언서 20장 5절에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창조하실 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릴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한대함을 품어 올릴 수 있는 것이 명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로 태어난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언제인가 환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입니다. 목회자가 기업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운영방식에 젖어있다고 기업인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현재 형통하고, 안정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대로 바보같이 맹종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40년을 살았지만 그대로 둘 수 없기에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떠남에 대한 것을 실패로 인식하게 하는 세상적 방법에 아주 약합니다. 독수리처럼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영적 존재로서의 근원과 본질을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굴복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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