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2(월)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성육신한 예수교회-64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도회가 11월에 21일간 개최되었다. 10,060교회 350,000의 신도들이 함께 공간을 뛰어넘어서 기도의 향연을 베푼 것이었다. 누구 하나 억지로 되기보다는 순수하게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이 기도회를 더 높게 타오르도록 하신 스피커들은 순도가 높은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참여하였지만 정치적인 냄새가 전혀 없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는 순수한 기도의 향연이 되었다. 으레 매스컴에는 교단을 정치하는 이들의 소식이 오르고, 교단이나 단체를 대표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빠짐없이 정치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의 손에는 부귀와 권력과 명예와, 그에 합당한 모자들을 쓰신 분들이다. 이러한 이들로 조직된 단체들에도 기도회라든지 부흥성회라든지, 회개운동 같은 것들이 거듭 있어왔으나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그런데 이번 기도회에서 마지막 간증하는 시간에 나오신 분들의 간증은 기도의 뚜렷한 열매들을 보여주는 표적이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복음서를 비롯하여 사도들의 행전에서 표적과 기사와 성령의 나타남을 항상 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처럼, 감동과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 도시에 바울 사도가 잠시 머물다가 떠난 적이 있었으나,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믿었고, 사도들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도들이 되었던 것이었다. 사도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권능과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살전 1:5-8).1907년의 부흥은 인위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 혹은 점심을 건너뛰면서, 혹은 저녁 시간에 저마다 삼삼오오 모이면서 먼저 회개가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되는 마음이었다. 원산을 비롯하여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온 땅에 거룩한 설렘과 무언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와 울렁임이 있었던 것이다. 국모가 시해되고 국가의 주권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허탈감과 상처와 고통 중에 있었던 이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신도들 가슴에 불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룩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다니엘 2017기도회’의 21일 간증을 듣고 또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삼천리강산에 성령께서 아직도 머무르고 계심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의 법궤를 원수에게 빼앗긴 소식을 듣자, 그 순간 엘리 사제의 목이 부러졌던, 그 암울한 시기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음이 천만다행임을 알 수 있다. 이날 한 목회자는 21일 동안 기도하는 도중에 심장에 이상 증세가 있어서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도 다니엘 기도회 스마트폰 영상을 보며 참여하는 중, 한 강사가 치유를 선포하자 즉시 완쾌된 것이었다. 또 한 사례 자는,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인데, 임신을 하여 함께 단상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한 개척교회 목회자는 기도회 기간 동안에 세 들어있던 예배당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번 하였는데, 법적 등기를 마치고 하나님께 나아와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힘든 분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저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질 않으신 것이다. 모두가 치료되어서 회복되었고, 구원을 경험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지는 그 비었던 자리에 든든하게 서는 것이었다.우리는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한 가정의 불임이 치료되어서 출산 날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고,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사선에 섰다가, 건강한 주의 종으로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보았고, 풍전등화처럼 쇠약해진 교회가 단단한 반석위에 우뚝 선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한국교회에 표적으로 나타나신 주님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다니엘의 기도는 예사로운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오나라의 배도 같은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수많은 정부와 권력과 계파가 흔들고 털어도 먼지하나 안날 정도로 온전한 신앙인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다니엘을 밟아보았지만 그는 항시 살아서 새롭게 들어선 정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일군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계략의 덫이 있어도, 초지일관 예루살렘으로 향한 높은 성루의 열린 창에서, 큰소리로 또박또박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신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기도자의 21일이란 그 기도가 응답되는 하나님의 시간이기에......,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07
  • 김영돌 장로
    세무서 상담과 회계사 사무실 출근, 제자훈련과 중보기도 계속해 김영돌 장로(77세, 예장합동 광천교회)는 은퇴했지만 현역처럼 교회와 사회 일에 분주하다.김 장로는 매일 아침 8시면 집을 나서서 오전에 장남이 경영하는 ‘엘림세무회계컨설팅’사의 고문 자격으로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서울성동세무서에 매주 3회 정도 출근하여 민원실 상담과 안내를 맡고 있다. 그렇지만 날마다 오후 5시면 귀가하여 휴식과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김 장로는 현재 출석하고 있는 광천교회에서 주일이면 일대일 제자훈련반 교사를 맡아 가르치며, 중보기도팀과 새가족부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어 성도들이 좋아하고, 어쩌면 시무장로 때보다 더 바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건강을 위해서는 많이 걷는다면서 웬만한 곳은 걸어서 다닌다고 한다. 집에서는 실내 자전거타기와 아령 등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저는 바쁘게 일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많이 걷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같습니다.”김 장로는 경북 의성의 빈농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구에서 상업학교를 다녔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은행에 취직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15년여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야간대학도 졸업해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은행에 근무하면서 사업투자유혹으로 실패하게 되어 퇴직하고 78년 서울로 왔다. 은행에서의 경험으로 법인회사에 세무회계분야 경리로 입사하여 과장과 전무에까지 오르면서 직장생활을 했다.처음으로 서울에 정착하여 출석한 아현교회에서 1993년 장로 장립을 받고, 재정위원장을 비롯하여 총무, 교육 분야를 맡아 헌신했다. “제가 아현교회에서 가장 보람 있게 섬긴 부서는 중고등부 부장이었고, 많은 후배 제자들을 배출한 것과 성공한 제자들을 보면서 더욱 감사함이 넘칩니다.”라고 한다. 중부노회에서는 회계와 부노회장을 역임하고, 총회 총대로 나갈 기회도 있었다. 노회 남전도회와 장로회에서 임원으로 일했고, 전국장로회와 전국남전도회연합회에서도 참여하여 일했다.정 장로는 대인관계에서 분명하고 진실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동료들과 이웃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어 남들이 부탁하고 협조를 구할 때 거절을 하지 못하여 피해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김 장로는 “저는 모든 일에 참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으로 살면서 참고 있으면 서로가 충돌하거나 다툼이 없어요.”라며,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고향에서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때때로 어릴 때의 어릴 때의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하면서 먼 산을 바라보면 마음으로 고향을 그려보곤 한다고 말한다.김 장로는 한때 친구들의 권유로 환경운동연합과 참여연대에서 사회활동도 했다. 그러나 본인의 성향과 맡지 않아 탈퇴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교단과 교계연합회에서는 책임을 지는 임원을 피하고 평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다.김 장로는 교계를 보면서 옛날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요사이는 웬일인지 우리가 전에 믿고 열심을 내던 것보다는 훨씬 열정이 식어졌고 형식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김 장로는 오복연 권사(75세)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장남은 엘림세무회계컨설팅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차남은 변호사로 종사하고 있으며, 딸 둘은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번역사와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저는 우리 자녀들 과외 한번 못시켰지만 하나님 은혜로 잘 자라서 사회인으로 일하고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김 장로가 좋아하는 성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2-0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0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1-5)‘어린 아이’는 순수하며 정직합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를 낮”춥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비유로 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을 말씀하십니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에서 ‘어린 아이’를 말하였습니다. 그는 정신이 성숙하여 가는 변화의 과정을 세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말하리라. 즉 정신이 낙타로, 그리고 이 낙타가 사자로, 그리고 이 사자가 마침내 어린이가 되는 사정을’(『짜라투스트라』,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관하여])”. 먼저 ‘낙타’의 상태를 생각하여 봅시다. 낙타란 본래 위대함이란 존재 방식에서의 현존재를 의미합니다. 신의 우위와 도덕 법칙의 숭고함 앞에서, 그 몸을 굽히고 엎드려서 큰 중량을 자진하여 부담하는 크나큰 외경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낙타는 용이치 않은 상태에 있고자 하며, 비속한 일상 생활의 안이함을 경멸합니다. 그는 자기가 확증될 만한 과제를 가지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용이한 일이 아니고 심한 압박이 될 만한 어렵고 엄격한 명령을 완수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의무를 의욕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 보다 그 이상의 것에 의욕을 가집니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자기의 숙명으로서 정해진 생의 의미에 복종하려고 합니다. 순종과 복종이란 점에서 이 외경으로 채워진 정신은 그 독특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확고한 가치체계에 둘러싸여서 그는 헌신적으로 자진하여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릅니다. 다음으로 ‘사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는 거기서 바로 그의 사자에로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무거운 짐을 견디어 내는 외경으로 가득찼던 정신은 ‘사자’로 변신합니다. 그는 자기를 ‘밖’으로부터 압박하고 제압하고 있던 중량을 벗어던집니다. 그는 그의 ‘최후의 신’인 객관적 도덕과 싸웁니다. 그는 그의 지금까지의 자기 소외를 인식하고, 객관적으로 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과 싸웁니다. 이상주의적인 도덕에 대하여 그 초월적인 기초 놓음, 그 ‘예지계’, 그 신의 의지까지 포함해서 사자의 자격으로 싸움으로써 자유를 획득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자유를 해방하고, 자유가 근본적으로 상실되어 있는 입장을, 즉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생의 의미에 의하여 생을 규제하는 입장을 초극합니다.세번째는 ‘어린 아이’입니다. 낙타를 지배하고 있는 ‘너는 해야 한다’에 대하여 사자는 주인답게 자기의 ‘나는 하고자 한다’를 맞세우지만, ‘나는 하고자 한다’ 속에는 너무 과도한 긴장과 방어의 자세가 있고, 과도한 반항과 자기 경직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의지는 아직 고의적이며, 그것은 아직 창조적인 의욕으로서의, 또 새로운 가치들의 새로운 투기로서의 참된 자유자재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비로소 그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無垢합니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 유희, 스스로 회전해 오는 차륜, 제 일 운동, 성스러운 긍정입니다. 정신은 이제야 스스로의 의지를 의지한다. 세계를 잃었던 정신이 스스로의 세계를 획득합니다.세 사람의 인물상이 위의 3단계에 대응합니다. 자기를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위력의 통로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최대의 봉사적 인간인 천재는 낙타에 대응합니다. 비판자이고 부정자이며 미지의 먼 해안을 향한 대담한 항해자인 자유 정신은 사자에 대응합니다. 그리고 긍정자이고 새로운 가치들의 정립자인 짜라투스트라 자신은 유희하는 어린 아이에 해당합니다.‘어린 아이’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보고 상심해 있던 두 제자를 생각해 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던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왔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향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 하나, 영적 세계를 어떻게 전해야 하나 등으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누가복음 24:27)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2-07
  • 목회는 쉬운 것이다·47
    만일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인간적 노력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유교나 무속 문화의 유물이 성의와 정성을 기독교가 모방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진정한 열심의 의미는 ‘예수님 안에’ 라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우리식 해석으로 맹종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에 예수님이 와 계신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忠(마음 중심에), 誠(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공력이나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금욕이나 극단적인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고 함께 사셨던 그 자체입니다.‘냉수 한 그릇’입니다우리는 언제나 아주 좋아 보이는 그리고 그럴 듯한 것으로 누가 보아도 좋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한국적 체면과 명분이 예수님의 아주 미미한 자연스러움을 무시하는데 사로잡힌 것입니다.귀한 것을 보는 시각적 평가가 상실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당연한 일이나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값 비싸다는 것은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의 계산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허비한다는 마음이 아깝게 생각하는 인간적 욕심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이 여인은 산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값으로 계산해 본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내가 소유할 이유도 없고 더 좋은 것을 가지게 된 벅찬 기쁨이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불필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소중함을 갖게 된 이 여인의 행동에 감동하신 것은 이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감격된 일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한 행동이 기특하다는 것보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느낀 사람에 대한 표현입니다.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선언하는 그의 깨끗한 마음가짐입니다.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의 어설픈 표현입니다.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정교한 형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절대 섬김의 방법을 말씀하신 적 없으십니다. 오늘 이야기도 ‘냉수 한 그릇’입니다. 설탕을 얼마큼 탔느냐, 좋은 그릇이냐도 아닙니다. 접시에 받쳐서 기본적 예의를 지킬 것도 요구하지 않으심입니다. 그물이 정수된 것이나 정수기 필터를 정기적으로 바꿔 주었느냐도 아닙니다.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만남도 오다가다 만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있는 대로 없으면 생수 한 컵이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길가 벤치에서 그것도 없으면 그냥 서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상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에게 함께 계신 분입니다.우리는 화려한 의식을 벗어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고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격식과 체면치레입니다. 이것은 불명예스러운 유교와 무교의 유산들입니다. 그리고 이방 종교의 찌꺼기들입니다.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현대사회는 문명의 충돌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할 필요가 없는데 하려고 애쓰는 일, 물은 물로서인데 따뜻하게 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이 긴박한 갈증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상처는 현대적입니다. 그런데 회의를 거쳐서 예산 지출과 방법을 연구하다가 상처는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진행형이 아니라 순간형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세대 차에 대한 갈등입니다. 교회도 고정관념과 순수성의 충돌입니다.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대는 있는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노출하는 시대입니다. 즉 솔직의 세대입니다. 인간의 본심의 순수함을 원하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도록 의식에서 만들어진 위선에서 갈증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뻔히 드러날 줄을 알면서도 거듭된 거짓으로 모면하려고 애쓰다가 개망신을 당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2-0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4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4. 프랑스에서 진행된 종교개혁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 종교개혁은 거세게 저항을 받았고 때로는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고 고수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게 많았다. 그런데 이 개혁의 와중에 늘 문제가 되는 것은 개혁파와 로마교회 사이에서 세력을 행사하는 황제의 태도였다. 어떤 황제들은 로마 교황권의 압력 때문에 개혁 세력들을 핍박하였고 또 어떤 황제들은 개혁파를 도와서 개혁사업이 발전되도록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때, 독일에서는 카알 5세가 이단 박멸을 작심하고 개혁자들을 지지하는 제후들을 포로로 잡아서 이 성(城) 저 성으로 보내면서 큰 괴롭힘을 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제후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사라지면서 카알 황제는 쓰디쓴 패배를 경험한 일도 있었다.쯔빙글리에 의해서 꽃을 피웠던 스위스의 종교개혁 사업도 한 때 매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개혁사업에 헌신하던 많은 지도자들이 카펠(Cappel)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얼마 후 가장 영향력 있던 지도자 에콜람파디우스도 죽었다. 이곳저곳에서 개혁사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다시 가톨릭의 세력이 확장되는 듯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 개혁사업을 인도하고 계셨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가톨릭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될 것이고,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진리가 힘을 얻고 빛을 보게 될 날은 분명히 올 것이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시작됨당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터와 관계없이 거의 동시대에 사방에서 개혁이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성경의 빛을 명확하게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파리 대학의 러페브르(Leferve) 교수였다. 그는 매우 열심 있고 진실한 가톨릭교회의 추종자였으나 고대문학을 연구하던 중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빛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루터나 쯔빙글리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1512년에 이미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의, 곧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고 그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 후일에 개혁의 선두주자로서 활동한 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이다. 파렐은 사도 바울과 같은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러페브르는 주로 그의 제자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파렐은 그 진리를 들고 나가서 공중에게 큰 소리로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파리 근교의 모오(Meaux)라는 도시의 한 고위 성직자인 감독이 이들과 연합한 것이다. 개혁파의 가르침은 신속하게 전파되었고, 당시 왕이었던 프란시스 1세의 누이도 개혁신앙을 받아들임으로 개혁의 복음은 노동자로부터 왕궁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러페브르는 프랑스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모오의 감독은 자신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서 성경을 보급한 결과 모오에서는 농부들까지 성경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귀족 베르캥의 개혁사업당시 프랑스 귀족 가운데 최대의 학자로 알려졌던 베르캥(Louis de Berquin)은 매우 세련되고 용감하고 품위 있는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로마교회의 충실한 신봉자이도 하였다. 정직한 양심의 소유자였던 그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는 원래, 개혁자 루터를 증오하는 사람이었는데,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결과, 루터의 가르침이 로마교회의 가르침보다 성경에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개혁사업의 선봉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로마교회 교도들에게 기피해야할 매우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당국자들에 의해서 세 번이나 투옥되었으나 그의 천재성과 고결한 인격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당시 프란시스 왕이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베르캥은 주변의 상황이 악화되고 저항이 증가할수록 더욱 더 열심히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였다.당시 그의 대적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베르캥을 처형하고 싶었지만 왕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길거리에 세워져있던 성모 마리아상이 파손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 문제로 도시 안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베르캥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수도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사건이 마치 베르캥의 개혁사업의 영향이라고 거짓 소문을 내었고, 그 결과로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공교롭게도 베르캥의 수호자였던 왕이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그의 원수들은 베르캥을 신속히 재판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베르캥의 용모는 진리의 화신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평화스럽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고, 프랑스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개혁의 동지들에게 순교를 각오하고 개혁사업에 매진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였다. 파리와 모오 시(市)에서 핍박의 심해지자 개혁의 지도자였던 러페브르는 독일로 들어갔고 파렐은 동프랑스의 고향으로 돌아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여전히 개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핍박이 이르렀을 때에 유대와 사마리아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던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칼빈의 출현파리의 어느 대학에 매우 침착하고 총명하고 탁월한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충실한 신봉자였으며 개혁자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저들은 화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청년이 바로 요한 칼빈(John Calvin)이다. 개혁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그의 사촌이 파리에 살고 있었는데, 칼빈은 종종 그 사촌 올리베탄(Olivetan)과 만나서 당시의 종교적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칼빈은 그 사촌의 개혁적 사상이나 교리에 대하여 공감하지 않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예리하고 총명한 그의 마음 한 쪽에는 개혁사상에 대하여 무엇인가 끌리는 것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어느 날 칼빈은 우연히, 큰 광장에 나가서 이단자들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평화스럽고 빛나는 얼굴과 늘 어두운 그림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에 자신의 신앙에 분명히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순수한 신앙과 확고한 믿음의 기초가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칼빈은 본격적으로 순교하는 이단자들의 “기쁨의 비결”이 들어있는 성경의 참 진리를 찾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칼빈은 구원이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칼빈의 출현은 프랑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던 중에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성경의 참다운 진리를 깨닫게 된 그는 신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한 동안 법률공부에 치중하다가, 마침내 그것도 포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한 다음, 개혁신앙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소위 유력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 신앙을 포기하고 개혁신앙에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게 된 배경에는 언제나 ‘성경’이 있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25
  • 내 이웃 사랑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강토와 민족은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휴전선으로 반 동강이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념의 갈등보다도 조국이 먼저 있었다. 정치적 대립보다도 민족이 먼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과 정치에 사로잡혀 조국도 민족도 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같은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았는가! 우리는 강대국의 대결 사이에서 우리의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무력의 대결이 곧 평화의 길인 줄 잘못 알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돌이켜 보면 해방이후 54년간 우리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동안 우리는 국내외에서 몰아치는 이념과 정치대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이처럼 해방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분열과 증오가 심화되면서 우리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니, 민족적 정통성의 확립이니 하는 것들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게 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과 민족적 단합과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원시 되었을 뿐 아니라 위험시되기 까지도 하였다.이제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으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재를 뒤집어쓰고 민족과 조국을 분단으로 밀어 넣은 우리의 잘못을 통회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움을 털어놓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아왔다. 상대방의 피 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여 상대방이 쓰러질 때 우리는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승리이며 누구의 기쁨이 될까? 우리가 남의 힘을 빌려 자기 형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으니 이 세상 어디에 이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여기에 우리는 분연히 역사의 새벽을 밝혀야 한다. 이 지구상 또 어디에 분단의 땅이 있는가? 이 세상 또 어디에 분단의 민족이 있는가?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그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며 그 조국은 우리의 조국이 아니다. 우리의 땅은 만주벌판까지였으며 우리의 조국은 하나의 조국이었다. 북은 남의 반쪽이었고, 남은 북의 반쪽이었다. 우리가 나뉘어져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제 남(南)은 북에게, 북(北)은 남에게 그 땅을 되돌려 주어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한다. 분단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고 분단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비극의 원인을 보려고 할 때 분단극복의 길은 트이지 않는다. 반평화적인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통일은커녕 민족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아니 된다. 오늘 우리는 형제가 형제를, 동족이 동족을 배반하고 죽였던 골육상잔의 비극 앞에 서있다. 이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소원한다.이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크게 다섯 가지의 원칙아래 진행되어 왔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이 제시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인도주의 원칙과 민중우선의 원칙을 덧붙인 것이다. 남북 간의 교회는 이러한 5대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뢰 회복을 위한 실천 과제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신뢰관계의 구축, 평화구조의 정착, 각종 교류의 계속적인 추진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민족이 분단된 지 반세기를 넘기면서도 아직도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그동안 남과 북의 교회는 8.15 직전 주일을 평화통일을 위한 공동 기도주일로 정하고 공동의 예배문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 왔다. 그 동안 드려온 기도의 성과를 모아 8.15광복절을 계기로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영적 일치를 이루어 분단의 벽을 허무는 대사역을 시작했다. 이러한 취지아래 1993년 8.15에 KNCC 등 종교계를 비롯한 민간 통일운동단체 회원 5만 여명이 독립문에서 임진각까지 48Km에 이르는 인간 띠를 만들어 우리의 통일 염원을 담아 가지고, 49개 개신교 교단과 13개 사회단체들이 각계각층을 총망라하여 남북 인간띠 잇기 대회를 가지고 시위(示威)를 했다. 평화통일의 인간 띠로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주로 고백하는 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손에 손잡고 참여 했다. 신앙의 진보와 보수를 떠나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소망임을 고백하면서 누구나 다 참여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24
  • 96. 제98회 총회장 안명환(安明煥) 목사
    충남 태안 출생안명환(安明煥 1945.9.9~) 목사는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710번지에서 부친 안상각 장로와 모친 정화영 권사 사이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부모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신앙으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어촌에서 태어난 덕택으로 앞이 훤히 트인 드넓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여러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때로는 모래사장에서 청소년들의 푸른 꿈을 꾸며 아무탈 없이 평탄하게 잘 자랐다. 명환 소년은 부친이 염전을 운영한 관계로 유여한 생활 속에서 배고픔을 모르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을 즐겁게 감내하며 성장한 행운의 소년이었다.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주일마다 예배당엘 다녔고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아버지께서 아들의 먼 장래를 위하여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신 개명하였기에 아들 명환의 장래를 위하여 아들을 서울에 있는 기독교 명문사학의 하나인 양정중고등학교로 유학을 시켰다. 당시로써는 아버지 안 장로가 염전을 경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뒷받침 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교계뿐만 아니라 소원면 내에서도 유지로(지도자) 통하고 있었다. 명환 군은 집 가까이 있는 무교동성결교회(현 중앙성결교회)에 나가고 있어서 1959년 황성택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고 객지에 나왔어도 교회라는 정신적인 울타리가 있어 외로운 줄 모르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건국대학교에 진학, 학교에 다니던 중 군소집 영장이 나와 대한민국 공군에 지원하여 3년을 근무한 후 공군 의무하사로 1969년 제대 후 대학에 복학, 1971년 대학을 졸업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 석사과정(M.A)을 마쳤다. 그 후 신학을 해야겠다는 소명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해서인지 주위의 권고와 자신의 결단으로 서울에 있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에서 1984년 39세의 늦깍이로 신학교를 마치고 수원 세류동에서 가족들과 몇 사람의 성도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수원 명성교회가 설립되었다. 대학원서 행정학 전공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개척총회 내 각 기관서 두루 봉사WCC 반대 설교문 작성 전국교회에 배포선교단체 ‘인터콥’과 일체의 교류 단절 결의 졸업하던 1984년 10월 황해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이듬해 1985년 10월 9일 황해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명성교회(明星敎會) 개척 시무 후 한번도 타교회에서 목회 한 적이 없는 오직 명성교회 한 교회만을 위해 목회사역에 심혈을 기울였고, 수원지역 복음화가 곧 대한민국의 복음화요, 통일 이후의 통일된 조국 복음화요, 이것이 세계 복음화로 이어진다는 비젼을 품고 목회에만 전력을 다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설립 만 10년만에 전체교세가 총 교인수 1,060명(학생 460명, 장년 600명) 중형교회로 급성장하였다(1995년 예장총회 설립 80주년 기념 사진명감 제4권 p.891 참조). 1995년엔 수원기독교문화원 이사장으로, 1998년엔 사단법인 청소년상담마을 이사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2000년엔 총회 순교자 기념사업부장으로, 2001년엔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2002년엔 총회 세계선교회(GMS) 이사회 서기로 피선되어 2006년까지 봉사했으며, 같은 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충청도협의회 부회장, 2004년 황해노회의 노회장으로 2차로 피선되었고, 2005년엔 총회 남북한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실무부회장, 2006년 총회교정 선교위원회 위원장, 2006년 세계선교회 부이사장, 2010년 서북지역노회 협의회 대표회장, 2011년 총회 정치부 부장, 같은해 GMS 미주지역 특수선교위원회 위원장, 2012년 총신대학교 재단이사회 부이사장으로 현재까지 섬기고 있다. 그리고 2012년 9월 17일 예장총회 제97회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2013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라비돌 신텍스컨벤션(경기 화성시)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8회 총회에서 영광스러운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그의 총회장 취임 일성이 ‘화합하며 교단회복에 앞장 서겠습니다’였다.(기독신문 2013년 9월 25일자 p.3)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날개가 꺽인 새처럼 힘들어 하지만 우리는 이번 회기를 통해 분명히 화합을 이루며 힘있게 전진하는 교단이 되겠습니다.”라고 한대로 총회를 섬기는 1년 동안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나 그의 생김새대로 힘차게 뚜벅뚜벅 1년을 앞만 바라보고 교단을 위해 걸어갔다. 또 그 해 총회 임원회는 부산서 개최되는 WCC 반대 설교문을 작성 배포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해 12월엔 작은교회 찾기운동의 일환으로 전남 고흥에 있는 국립음성나환자촌을 방문 소외되고 외로움을 달래며 연말을 보내고 있는 소록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은 양성환자는 없고 음성환자들만 있는 상황이지만 특수하게 격리되어 있는 약자들을 교회가 돌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상징적인 방문이었지만 한 교단의 지도자로서 소외되고 외로운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필자가 인터뷰차 2017. 8. 18 그의 만남에서도 “총회장 재임시 최선을 다 한다고 했으나 교단내 여러 지도자들에게 염려를 끼친 일들이 있었다며, 이는 자신의 부덕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도자로써의 책임의식을 엿볼 수 있었고 그의 지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선친 안상각 장로가 본 교단 사당동 총신대학교 기숙사 건립시 건축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소원면 모항리 염전을 저당해 상당액의 건축기금을 대출받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는 미담을 기억하면서, 교단과 총신을 위해 부자 간의 섬김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다. 그는 총회장의 중임을 감당하면서도 교단의 지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독교텔레비젼·CTS> 공동대표로 봉사했고 본교단 유일의 인재양성 기관인 총신대학교 법인이사장으로, 수원명성교회 원로목사로, 사단법인 행복나라 총재로 대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재임했던 제98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몇가지 요약하면, ① 신학부 보고 중, 첫째 인터콥신학노선에 대하여 최바울 선교사와 그가 이끄는 선교단체(인터콥)와는 이후로 일체의 교류를 단절하고 산하 지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고지하며 또한 이미 참여한 교회는 탈퇴하도록 하다. 둘째 베리칩과 666에 관하여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과 동일한 것으로 연관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임을 확인하고 666과 베리칩을 연관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하다. 셋째, 개역개정판 성경번역 오류에 대한 수정 질의 건은 대한성서공회로 통지하여 수정하도록 촉구하기로 하다. ② 군목부 보고 중, 군목후보생에 대한 조기안수 청원건은 국방부에서 실시하는 군목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해 총회소속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해에 강도사고시 응시자격을 부여하기로 하고, 합격후 봄노회시 군목으로 간주하되 축도권은 임관시 부여하기로 하다. ③ 총회에서 모든 부동산 구입시 전문기관에 의뢰하고 자금계획부터 건축까지 종합적인 평가보고 하여 총회에서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후 시행토록 하다. ④ 총회실행위원회의 정책위원을 각 노회 파송 1인으로 하다. ⑤ 외국시민권자 당회장 허락과 관련하여 소급적용은 불가하며 이후 외국시민권자의 경우는 1년이내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허락하기로 하다. ⑥ 총회 총대가 아닌 노회원이나 관계자 또는 소속된 사람이 총회석상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지교회에 가서 소란을 피우면 해당 노회에 책임을 물어 총회 총대권을 5년 정지키로 하다. ⑦ 총신 운영이사장, 기독신문 이사장, 사장, GMS 이사장 선출을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하기로 하다. 안명환 목사에게는 사모와 슬하에 3형제가 있는데 장남(중훈)은 목사로 아버지가 개척 설립한 명성교회의 바톤을 이어받아 섬기고 있으며, 둘째 중원은 집사로, 셋째 중환 목사는 기관 목사로 본교단 총회 교육국에서 각각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24
  • 성육신한 예수교회-63
    세상이 총체적으로 어두워져서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하지 못할 때에는 75, 80세의 노인에게서 다시 시작되거나, 출생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을 거쳐 하란마저 떠나서 가나안 땅에 기거하던 이야기나,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하는 이야기는 노인들에게서 시작 된다. 그것도 어쩌다가 잠시 동안만 등장하는 조연 역할이 아니라, 주연으로 등장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의 땅에 나타남에 있어서, 노인이 주역을 맡아야 했음은 왜일까? 노인의 등장은 불가불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저 멀리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메시아를 내다보면서, 그렇게 기뻐하며(요 8:56), 오직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홀로 믿음으로서 걸어갔다. 모세는 팔십 노인으로 자기 것도 아닌,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이다가, 야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는데,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가 노예 민들을 억압과 고통의 이집트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세워갈 수 있었던 근저에는, 겸손이라는 인격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겸손이란 출생으로 얻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닦여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겸허함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사십년간의 광야를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리라. 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아 백성들의 진영에 내려왔을 때는, 그 땅은 이미 범죄와 타락으로 인한 광란의 제전이었다. 야훼 하나님은 결코 이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다. 야훼께서는 저들에게 진격하여 하나도 남김이 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진노의 파도를 잠잠히 가라앉힘도 모세의 간절한 기도였다. 어디 이 뿐이랴, 자신을 절대 신뢰하는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미련 없이 느보산에서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넘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다윗에게 칠십이 다가오자 그를 짓누르는 피할 수 없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나......, 충신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가 솔로몬에 집착하여있고, 나단 선지마저 궁중을 떠나질 않고, 후대가 솔로몬이어야 함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윗은 옛적 사울의 전장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골리앗의 환영을 보았다. 아주 어린 나이의 한 소년이 대담하게 물맷돌을 다섯 개 챙기고서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서더니, 만군의 살아계신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달려가 물매를 날려 골리앗의 이마에 박았다. 골리앗의 머리를 칼끝에 세워 백성들에게 보인 것이었다. 이 환영을 다시 본 다윗은 더 이상 염려하질 않고 솔로몬을 왕위에 앉혔다.이스라엘의 신화와 같은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질 않고 솔로몬에게서 새롭게 꽃을 피운다. 솔로몬은 왕위에 앉았으나 그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었다. 알렉산더가 델피 신전의 사제에게 신의 신탁을 받으려 하였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야기만 들었다. 그래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다시금 기자로 향하여 거기 사제로부터 신탁을 받았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함을 입은 자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왕권이 유지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였다. 솔로몬도 혼란스러운 정세에서 모든 것을 잠재울 신탁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솔로몬의 즉위식이 마쳐지자, 저는 기브온 산당에 올라 수많은 제사를 야훼 하나님께 드리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시간이 가득히 채워졌는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입히신 것이었다. 세계의 모든 군왕들이 흠모하는 은사를 위로부터 입게 된 것이었다.정계의 기라성 같은 자들이 어린 솔로몬을 하루도 가만 두질 아니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를 서로가 자기 아이라며 싸우는 두 여인을 데려 와서는, 왕의 법정에 세운 것이었다. 솔로몬은 머뭇거리질 않고서 그 아이를 절반 갈라서 공평하게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온 궁정이 물 끼얹은 듯 긴장이 고조되더니, 조금 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어린 것이 별 도리가 있을라고......, 그 참에 다시금 울부짖는 고성이 나더니, 한 여인이 소리쳐 말하기를, ‘지금 자세히 보니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요,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임금의 공평하신 판결에 찬사를 보내며 이르기를, 아이를 그냥 주질 말고 공평하게 갈라서 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6초가 지난 듯 모든 문무백관들도 알아차렸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저 여인이니라. 어서 이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렸다.’ 이날 그 아이만 어머니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만백성이 진정한 어버이를 선물로 얻은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1-24
  • 김시영 장로
    50년 익힌 사진기술, 교계행사 사진기록 남기는 일로 분주 김시영 장로(76세, 예장합동 남서울노회 함께하는교회 원로)는 오늘도 교단의 ‘장로신문’ 사진취재 기자로 교계행사장을 두루 다니면서 기록을 남기는 일에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사진에 취미를 가졌던 관계로 사진을 찍어 밤을 새우면서 디지털로 편집하고 앨범을 만들고 있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급여를 받거나 특별한 예우를 받는 일은 아니지만 감사와 봉사로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은 저는 건강을 위해 등산과 운동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이 분주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 같습니다.”김 장로는 일찍 고향을 떠나 ‘함께하는 교회’ 장로로 임직 받아 22년간 헌신을 했고, 원로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본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부장을 10여 년 맡아 헌신했고, 제직회 각 부서를 섬기면서 원로 장로가 되기까지 맡아왔다. 노회에서도 임원으로서 부회계를 거쳐 회계를 맡아 일했고, 주일학교연합회 회장과 남전도회연합회 회장을 역임 했다. 그리고 총회 총대로도 참석하여 관심 있는 사역에 헌신했다.김 장로는 고향 교회(경북 상주시 죽암제일교회)에서 일찍 20대에 집사직을 맡아 교회의 주동적인 헌신을 했다. 농사일에 탁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 농촌계몽과 개발에 노력하여 성공적인 농업경영을 했다. 20대 후반에는 더 큰 일을 위해 당시 수리시설(水利施設)이 열악한 때에 경북 성주에 양수시설(揚水施設) 사업을 시작했다.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50만여 평에 이르는 갯벌 농지에 수로(水路)를 만들고 거대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행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양수기와 연료, 수로와 농지를 모두 쓸어버리는 대홍수가 덮쳐 와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됐다.김 장로는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농사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 1971년 당시 해외근로자들의 진출에 힘입어 한일개발 직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어 80년대 중반까지 근무했다. 귀국하여 생활의 기반을 잡고 안정된 교회생활로 현재의 함께하는교회(전 신광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김 장로가 교회를 섬기면서 보람을 느끼고 헌신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봉사하는 기쁨과 감사가 항상 넘칩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잘 자라서 사회인으로 일하게 된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남서울노회의 평신도선교훈련원(LMTC)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도 했다. 중국 쿤밍의 소수민족교회를 돕고, 베트남에서 서민주택건설과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선교에 많은 협력을 하였다. “선교훈련을 받고 해외선교에 참여해 보니 이러한 봉사가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김 장로가 고향을 떠나 온지도 50년이 넘었지만 “지난 시절 어릴 때 고향교회를 섬기던 일을 잊지 않고 살지만, 서울에서 또 다른 교회를 섬기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노회와 교단을 위해 봉사하고, 기쁘게 일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감사한 것”이라고 했다.김 장로는 우순옥 권사(76세)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장남은 목사로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자녀 모두가 결혼하여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면서 잘 살고 있다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저는 자녀를 키우면서 정직과 성실하게 살 것을 가르쳤지요. 무슨 일을 하던지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이 보던지 안 보던지 최선을 다해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우리시대에는 믿음생활에서도 목회자의 말씀에 절대순종하면서 살았는데, 요즘 세대는 너무 자유 분망하여 안타까운 면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가 사회에 거울이 되어야 하고,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장로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이들이 끝까지 믿음 잘 지키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남은 날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복음을 즐겨 읽고 있다는 김 장로는 찬송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를 즐겨 부른다고 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1-2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9
    하루 만 원으로 일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청년 시절에 단돈 천 원이 없어 하루종일 방 안에서 사색하여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겨울인데도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가운데 다사로운 기운이 가져다 주는 분위기를 느끼며, 카알 힐티의 『행복론』을 읽으며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마냥 기다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현재의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적어도 만 원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고 교통비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기도 합니다. 그 해 겨울 소도시 전주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이 정원의 과실나무들을 솜이불처럼 덮었고, 온 도시가 하얀 눈으로 칠해졌습니다. 우리집에서 백 미터 떨어져 있던 D교회는 전주역 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벽돌집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고딕 양식의 높다란 창문이 있었고, 뾰족 첨탑 위의 하얀 십자가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옆으로 목조로 된 종탑이 있었는데, 거기서 커다란 종이 새벽에 울릴 때마다 어머니는 종종 걸음으로 예배당으로 발길을 옮기곤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심은 가족에게도 전해졌고, 3남 4녀의 형제들은 모두 교회에서 성가대나 교사로 활동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다가올 크리스마스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월이 되면 어린이들은 성극이나 성극, 성경 암송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고, 우리 형제들은 제각기 칸타타나 성경 암송 등을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였습니다. 초저녁에 저녁을 먹고 나면 여섯 살 배기인 나도 초등학생인 누나들을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소도시 교회인지라 우리를 지도하는 교사 J는 칸타타 연습을 끝낸 후 아이들을 모아 연습시키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J선생이 나타나기 전의 한 시간 가량은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육관 마룻바닥 위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공기 놀이도 하였습니다. 나는 착한 아이여서 누나들과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 옆에는 단발 머리를 한 영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치부 어린이로서, 전주 형무소에 가서 공연할 성경을 암송하는 나의 단짝이었습니다. 나는 누나들 옆에서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얼굴이 예쁜 여자 아이한테는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서양화에서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예쁜 여자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예쁜 영희의 볼에 그만 나도 모르게 뽀뽀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런 뽀뽀 세례를 받은 영희가 마구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누나들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너, 왜 그러냐? 좋으면 좋다고 말로 헐 것이지.”누나들은 영희를 달래느라 눈깔 사탕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영희는 그 사탕을 볼에 가득 담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로 올라와 S고에 입학을 하였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편지 한 통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여학생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나는 여학생이 먼저 편지를 보낸 사연을 발신자에게 당당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J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고 내 주소를 찾아냈다며, 나와 펜팔로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편지가 몇 차례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 여학생이 어릴 적 영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 교제가 일 년이 지난 즈음 영희에게서 소식이 뚝 끊겼습니다. 나는 영희가 어디로 이사라도 갔나 싶어 궁금하였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던 터라 영희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편지를 끊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나와 단짝이던 K가 하숙집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집에 놀러 오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K의 하숙집에 놀러갔지만 어른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 여학생과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자 K는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면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들고 다녔고, 얼마 후에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와의 절교를 선언해 버렸습니다. 나는 K의 갑작스런 절교에 당황스러웠지만,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그냥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후, K는 동창회 모임에도 영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 사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K가 병태의 펜팔 친구를 빼앗아 결혼해 버렸대.”나는 그제서야 고교 시절 K가 나에게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K는 나의 펜팔 친구였던 영희와 결혼하게 되어 삼십 년 이상을 동창회에 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자식. 그럼 진작 나한테 고백을 할 것이지.’요즘도 K는 동창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에 K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족과 함께 만 원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1-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