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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6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그 일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을 가만히 보라”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앞세워 자기 공력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열심일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렇게 표현한 분이 있습니다. “체조경기에서 볼 수 있는 기구 중 높이가 1.2m, 길이가 5m, 너비가 10cm가 되는 평균대가 있는데 한 가닥으로 된 좁은 대위를 걸을 때 평행 감각과 조정 능력을 잃으면 웬만한 선수도 떨어지기가 일쑤입니다.” 그 평균대처럼 20년 가까이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의 철학이 방심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목회자라고 표현했습니다.이 불안감이 마치 줄타기를 하는 곡예처럼 생각하는 위험부담을 갖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걷고 있는 목회길에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것이 경쟁의식입니다. 그 경쟁은 곧 열심이라는 마귀의 갈채에 마치 곡마당에서 위험부담을 갖고 재주를 피우는 것으로 목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곡예사는 관중 때문에 존재합니다. 목회는 대중과 관중에게 보이려는 재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현재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당면 과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회를 하려는 의욕은 소명의식에서 뜨겁게 타고 있으나 이런 일들로 인해 불타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한다는 중요성보다는 큰 교회를 해야 한다는 한국만이 가진 경쟁의식입니다. 그 경쟁의식을 유교와 무속종교에서 그 출처를 찾으신 분도 있습니다.우리는 일등만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볼 때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어릴 때부터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구분하였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20평 아파트 사는 사람과 50평 아파트 사는 사람,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학자냐 학자가 아니냐를 확실하게 나눕니다. 양반이나 상놈이냐는 서열을 나누는 습성이 기독교라는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일등이라는 이 공해는 마귀의 수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사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념에 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구별하는데 능숙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구원과 유기로, 정통이냐 비정통으로, 잘났냐 못났냐, 돈이 있느냐 없느냐, 일류 학교냐 하류 학교 출신이냐, 전라도냐 경상도냐, 이런 일들의 균형을 위한 십자가 역사입니다.구분이 결국 목회장소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목회환경이 좋으냐? 나쁘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구분이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때 진정한 목회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복음입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아주 평범한 삶입니다.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만든 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매우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든 이유가 이방 종교화되어 의식이나 방법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는 대상으로 착각하게 한 이유가 교회에 대한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배당으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성전에는 제사문화로, 제사는 섬기는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 목사 자신을 제사장으로, 제사장은 성전을 크게 지어야 제사장의 명예와 권위가 돋보이게 되고, 제사장은 성도라는 교인과 신의 관계로 만들 개체로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한 제물이나 제사로 공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어처구니없는 일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제사장의 필요성을 무용하게 하게 되는 공포증상일 수 있습니다. 중간 뚜쟁이의 무용성에 대한 두려움을 목사가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 무서운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1-2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3
    23. 음지에서 이루어진 큰 개혁운동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인류의 역사는 그 자유의지의 선택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진행과정이 극도의 죄악으로 점철되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할 정도의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역사를 반전시키신다. 예를 들면, 노아 당시에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든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다음에 새 역사를 펼쳐 놓으셨다.마찬가지 원리로, 종교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성경의 모든 진리들이 왜곡되고 가리어져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참 빛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곳저곳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무너진 진리를 수보하는 일에 착수하셨다. 프랑스의 왈덴스인들을 비롯하여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보헤미아의 후스와 제롬 등 유력한 개혁자들이 나타나 조만간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시작될 종교개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세례파의 출현이와 같은 배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대에 스위스에서는 칼빈이 독일보다 더 구체적이고 철저한 개혁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외치는 일단의 무리들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형제들’(Brethern)이라고 알려진 ‘재세례파’(Anabaptists)이다. 이 재세례파는 매우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개혁사업을 진행하였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삼은 것은 물론이고,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아직 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한 편,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은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하였다. 교회로부터 성상(聖像)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은, 이들이 가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물론이지만, 기존의 오직 성경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 등의 개혁세력에 의해서도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개혁 내용은 결코 비성서적이거나 기존의 개혁 운동을 무시한 것도 아닌데, 더 진취적이고 더 구체적인 개혁을 이루어가는 이들에게 기존의 개혁 세력이 핍박을 가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메노나이트와 아미쉬스위스에서 핍박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에 재세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네델란드)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재세례파 지도자 중에는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원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으나, 가톨릭 교리 중 화체설(化體說)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가톨릭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에 재침례파로 개종하였다. 시몬스는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재세례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경상의 세족예식을 비롯하여 새로운 개혁의 분야를 넓혀갔는데 이러한 개혁에 동조한 사람들을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들은 신대룩으로 이주하여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계속 강조하였고, 이들과 같은 계통으로 알려진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비무장 평화주의와 의료봉사를 통해서 미국의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현재에도 미국의 농촌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하고 있는 아미쉬도 스위스에서 발생한 재세례파의 일원이었던 암만(Jacob Amman)이라는 지도자에 의해서 더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개혁을 시도한 결과로 나타난 개혁파의 한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청교도 신앙의 회중교회와 침례교영국에서 성공회가 국교회로 자리를 잡고 국왕이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에,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Robert Boown)에 의하여 국교와의 분리를 주장하며 새롭게 형성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es)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속박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칼빈의 장로 제도를 배격하고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로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여, 그리스도의 언약 아래서 성경의 양심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또 다른 교회 조직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회중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영국에서 회중교회 신도들에게 가해진 핍박 때문에, 이들은 좀 더 나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랜드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영국에서 홀랜드로 이주한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 목사였다가 회중파로 개혁한 스미스(John Smith)의 지도하에 1608년 암스텔담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세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많은 감명을 받았고, 또 그들의 교리 중의 일부인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인정하여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의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칼빈의 예정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 그것을 자신들의 신조로 삼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베풀고 있는 물을 뿌리는 세례가 역사적으로 변질된 것이며 성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물에 잠기는 침례의식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침례교회가 된 것이다. 제칠일침례교의 탄생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고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특히 십계명의 요구사항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는 매우 중대한 요소임을 인식하여 그것을 순종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는 사실도 확신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십계명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일도 거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신념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오늘날의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던 중, 주일을 계명상의 제칠일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면서 받은 빛에 충실하던 성도들에게 또 다른 빛이 이르러 왔다. 영국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John Traske) 목사는, 그가 지도하던 밀 야드(Mill Yard) 교회 교인 중 한 사람인 잭슨(Hamlet Jackson)씨로부터 제칠일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트래스크 목사는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이를 올바른 성경적 진리로 인정하여 받아들였고, 마침내 밀 야드 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상 올바른 침례를 베풀며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제칠일침례교회가 되었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개혁세력보다 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름 없는 개혁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한 역사가 있다. 처음에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을 개혁하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 성경중심의 개혁을 이루어가는 신(新) 개혁 세력을 박해한 것은 아이러니다. 신성한 영역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악적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인간 세계의 비루함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파묻혔던 진리의 보배들이 하나씩 하나씩 밝혀져 마침내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17
  • 이산가족 상봉 ②
    참 행복은 둘이 하나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가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 나와 나 아닌 것 중에서 나 아닌 것이 결코 나 아닌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부여 해주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고 그리고 형제간이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형제자매의 우애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부모 형제가 결코 남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살림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 ‘二而一’는 나와 나 아닌 것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一而二’는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사랑의 신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살림의 신비 안에서는 남을 사랑함이 곧 나를 사랑함이 되고 나를 사랑함이 곧 남을 사랑함이 된다. 이러한 삶의 뿌리는 한 가정 안에서 화목한 가운데 식구끼리 하나 됨을 맛보는 데서 찾게 된다. 뿌리 없는 삶은 온전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 뿌리가 심히 썩고 있고 심지어는 죽어 있는 뿌리가 많다. 결혼은 남과 여의 이성의 만남으로 성 놀이의 리크레이션이 아니다. 가정은 생명이 약동하는 사랑의 보급자리이다. 여기에 수신해서(修身齊家) 가정을 이루면 온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治國平天下)고 한다. 오늘의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현주소는 삶의 뿌리가 망가진 채 표류하고 있으며 살림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음을 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은 생명의 한 삶을 산다.인생이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왕을 만나고, 씨앗은 땅을 만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만남의 역사는 시작되고 생활의 좋은 살림은 좋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좋은 부모 만남은 좋은 자녀, 좋은 선생 만남은 좋은 제자, 좋은 친구 만남은 좋은 친구, 좋은 왕의 만남은 좋은 백성이 되고 좋은 씨앗은 좋은 땅을 만나야 좋은 열매를 거둔다. 서로의 관계회복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알게 하고 여기에 깃들게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참 행복은 둘이 하나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가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소통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여야 한다. 강이 흐르듯이 아래로 향하여 잘 내려가는 강을 알게 한다. 삶에도 뜻이 통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오고 가는 삶의 소통을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은 가시는 삶으로 하나님의 삶을 나타내는 관계를 알게 한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자녀의 사이로 인연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창조의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자녀는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이 관계를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소중한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이치가 된다.참 행복은 둘이 하나 일 때 행복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 되면 삶은 행복해진다. 이 삶은 모든 것의 소통을 알게 한다. 이 소통은 존재가 실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실존은 ‘밖에 나타난다’는 뜻으로 본질에 대한 현실 존재라는 의미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남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주체성으로 그 실존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의 중심’의 사상은 우리시대 사람들이 많은 지식은 가졌으면서 실존하는 것은 잊어 버렸으며 그렇다면 그 주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면 키에르케고르는 ‘결단을 내려 너 자신을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실존하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세 가지 근본 형태로 말한다.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신앙적 단계로 주지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은 무엇을 받았느냐에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떠맡았느냐에 있다고 말함에 유의하는 것이다.우리 민족의 관계개선으로 이산가족 상봉 확대를 위해 새롭게 도입된 방식인 화상상봉은 이산가족교류 교류 차원에서 상봉, 생사확인 규모의 확대와 거동이 불편한 이산가족들에게 화상으로나마 상봉의 기회를 마련해 이산가족 문제해결에 한 민족의 피붙이를 정서로 풀어 경직된 막힌 담을 허무는 기회를 서로가 만들어야 한다. 이 만남의 평가와 함께 통일 환경 개선과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는 길만이 오로지 통일정책이 접근 가능함을 기도로 우리 그리스도인과 함께 남북한 민족이 하나 되는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음을 기도해야 한다. 서로의 싸움은 전쟁으로 가능하나 피붙이 인 같은 민족의 정서나 그 이유는 불문하고 한 피부로 동질성회복의 치유를 갖게 됨을 확신해서 이산가족 상봉의 로드 맵(road map)을 상기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6
  • 95. 제62회 총회장 이기하(李起夏) 목사
    전북 임실 출생이기하(李起夏 1917.~1979) 목사는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임실군 둔남면은 군 중심지역이다. 둔남 북쪽은 임실군청 소재지 임실읍이고, 서쪽으로는 청웅면, 동쪽으로는 지사면과 산서면으로 연결된 평야지대이다. 먹고 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었으나 평민들의 생활상은 일제하 학정에 시달리던 때라 궁핍과 가난의 시절이어서 의식주 전반에 이르러 말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 또한 3.1독립운동 거사가 있던 전후의 정치·경제·사회 환경 또한 말이 아니었다.부모들은 아들 기하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일제하 모든 국면이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이다보니 기하 소년 역시 앞날이 밝을 수 없었다. 마을 서당에 제대로 다닐 형편도 되지 못했고, 군청 소재지인 임실읍에 있는 소학교에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기하 소년에겐 배우는 일에 목말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기하는 천신만고 끝에 이리에 있는 이리농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꿈은 나라의 피폐하고 있는 농업에 투신, 덴마크 같은 신진농업과 낙농의 꿈을 펼쳐 보고픈 꿈을 지니고 있었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기하는 이리농업학교를 졸업 한 후 그의 마음 속에 일제하에서도 조선인들의 계몽사업을 통해 근대화를 꿈꾸면서 조선인들의 정신과 신앙계몽을 위해 헌신했던 지도자 최용신(崔容信 1909~1936)과 같은 민족지도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최용신은 원래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협성여자신학교 농촌과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농업학교 졸업 후 신진농업의 꿈꿔최용신과 같은 농촌계몽에 관심, 한때 학교 서무과서 일해김제중앙교회 장로 장립 후 총회신학교 입학군산삼일교회서 목회, 군산노회장 등 교정 참여바울신학교·전북신학교 이사장 역임황예스터의 지도로 농촌운동 이론을 터득하면서 한편 황해도 수안에서 동료 김노득과 함께 3개월 동안 실제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1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 선교사 밀러(Rev. Miller. E. Hughs 密義斗 1877. 7. 18~1966. 6. 6)의 후원으로 파송단체는 YMCA 소속으로 하여 경기도 화성군 샘골에서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했다.처음에는 야학으로 시작했으나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교육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교육내용은 문맹(文盲)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 아니라 산술, 보건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김활란(金活蘭) 등은 샘골에서의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용신은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로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신병(身炳)으로 귀국,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계몽운동과 농촌교육을 계속하였으나 지병(장충첩증)의 악화로 사망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22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p. 359 참조). 이기하 청년 역시 당시 시대적 여건이 앞뒤가 꽉막힌 절망 외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의 조선사회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와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파악해서인지 자신의 앞날의 꿈을 주님의 사역으로 심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농업학교를 막상 졸업한 기하에게는 전공과는 다른 금융계로 진출이 이루어졌고, 1944년 해방 직전 그의 나이 27세에 김제여고 서무과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후에는 서무과장으로 진급이 되어 생활이 안정되는 듯했으나 뜻하지 않은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이기하는 신앙생활을 게을지 하지 않은 결과로 6.25 전쟁 발발 1개월 전에 김제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되자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친히 목격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쟁 중에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가 전세가 반전되고 사회가 점점 자리를 잡아 가던 무렵 1953년 7월 17일 정전의 소식을 듣게된다. 이를 계기로 지난 날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고 휴전과 더불어 그동안 문을 닫았던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전신)가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로 가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얼마 안되어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정부를 따라 서울남산 신궁터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기하 신학생도 학교와 함께 서울로 상경, 학교와는 거리가 좀 떨어진 마석에 가곡교회를 개척 설립해 목회 실습처로 삼으며 신학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다하였다. 드디어 1957년 3월 총회신학교를 별과 6회로 졸업하고 고향 김제노회에서 감격적인 목사장립을 받았다.목사가 된 후 첫 목회지가 연정교회(전북 김제시 연정동 587의 2 소재)였다. 그는 연정교회에서 만 7년동안 복음과 양떼를 위한여 젊음을 볼태웠다. 1964년 군산삼일교회로 임지를 옮겨 16년 간을 성실을 다해 그곳에 목회의 뿌리를 내리고 열정을 다해 목회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정(敎政) 활동으로는 군산노회장을 비롯 총회 전북대회장 총회인준신학교인 바울신학교 이사장 및 교수를 역임했고, 이어 전북신학교 이사장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76년 예장 제61회 총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이듬해 1979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사당동에 있는 본 총회신학교의 대강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2회 총회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올랐다.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62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전국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통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 ② 한동노회를 동서울노회로 명칭 변경을 허락하다. ③ 카나다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④ 총신교수는 타교단 신학교에 강의함을 금하기로 하다. 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호칭함은 부당하다고 가결하다. ⑥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하지 않기로 가결하다. ⑦ 미국 나성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인준하도록 가결하다. ⑧ 고시부원은 총회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된지 10년 이상 된 자로 한다. ⑨ 총회 전도부 산하에 부흥전도단을 두기로 하다(제100회 총회(회의결의)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0. p. 26 참조). 이기하 총회장이 남긴 총회적인 큰 사역이 하나있다. 그것은 그의 재임시에 발의 오늘날까지 시행 발전하고 있는 주교교사 통신대학과 성경통신대학의 실현이다. 성경통신대학의 원래 시작은 1917년 소안론(Rev. Swallon William, 1865~1954) 선교사에 의해 평안남도에서 시작된 성경통신과를 개편, 1935년 총회교육부에 귀속시켰고, 1989년 제72회 총회 성경통신대학으로 개편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을 마치면 안수집사 피택시 노회 장로고시 자격이 주어져 인기가 있다. 신구약 문제집과 일반과목 문제집을 직접 작성 제출해 합격하면 된다.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데에는 이기하 총회장의 지도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제101회 총회보고서, 이승희 편, 예장총회 기획행정실 2106, p. 225~227). 이 제도는 총회가 교사와 제직을 위한 평신도훈련 교육과정으로 오늘까지 계속 발전되고 있다.이기하 목사는 62세 수를 누리고 주님나라로 영민하였다. 그에게 여한이 있었다면 조선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꿈이 시대적인 장애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주님께서는 천국사역을 위해 당신의 종으로 불러 사용했으니 전화위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16
  • 성육신한 예수교회-62
    한 지역의 목회자들이 격주로 모여서 온 종일 성경말씀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새벽기도회 시간에 맞추어 흩어지던 시기에, 안성지역의 목회자가 집에서 키우는 닭 몇 마리를 잡아 가져와서 저녁 만찬을 차려 놓았다. 그가 닭들 가운데서 어느 닭을 잡을까 하며 생각하다가, 그래도 목회자들에게 대접하는 것이니,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튼실한 녀석들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놈들이 선별 되었다. 그중에 한 녀석은 수탉이었는데, 세 마리 중에서 벼슬이 가장 아름답고 위품 당당하여 모든 암컷들을 거느리고 돌보는 닭이었다. 보름 후 기도회에 다시 모였는데, 그 목회자가 자신의 닭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었다. 단지 15일이 지났는데, 남은 두 마리 수탉 중에서 한 마리가 유난히 벼슬이 다시 갖추어져 왕관이 씌워지고 황금색 깃털로 의전을 갖추더니, 전혀 이전의 수탉 같지 않게, 더욱 당당하고 품위 있는 몸가짐을 하고서는 새벽마다 아침이 오는 것을 고하는데, 온 마을에 닭 우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것이었다. 이전에 위세가 눌려 있을 때에는 벼슬도 모두 뜯겨 나가서 볼품이 하나도 없던 그였는데,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 이 목회자의 가슴은 새로운 기운이 입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닭을 사육하면서 닭장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어떤 때에는 기이하기도 하다. 수탉이 거느릴 수 있는 닭들은 오십 마리가 한계인 것 같다. 그 이상을 넘으면 전혀 질서가 잡혀져 있지 못하다. 오십 마리씩 수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마련해서 그 닭장 안에 수탉 서너 마리와 암탉들을 넣어두고 시간이 얼마 경과되면, 그 닭장 안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늑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닭장 안에 저녁이 되면, 열 마리씩 잠을 잘 수 있게 높이가 다르도록 여러 줄을 가지런히 세워두면 서열대로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자리를 잡는데, 그 군락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이 장 닭은 세 번째 가운데 줄에 자리를 잡고, 밤이 맞도록 그의 가족들을 살핀다.아침에 닭장으로 들어가 사료를 주면, 그 장 닭은 책임감을 느끼는지, 모든 닭들이 안전하게 먹이를 먹을 수 있게 주변을 경계하며 살핀다. 닭들의 식사가 모두 끝나 가면 그제 서야 식사를 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 장 닭에게서 오는 기운이 어찌나 마음 든든해 보이든지......, 혹 가다가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옥수수 등을 던져 넣어주면, 낯이 설은 것이라서 그런지 수탉이 그것을 살펴보고,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를 살핀 이후에야 모두가 달려들어서 먹는데, 이 새로운 음식도 가장 나중에 가서야 남은 찌꺼기를 먹는 것이었다.암탉들이 일 년 동안 달걀을 내어 놓는데, 일 년이 찰 즈음에는 생산 능력이 떨어져서, 경제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즈음에 이르면, 닭을 키우는 주인은 아침마다 닭장에 사료를 갖고 들어가서 ‘앞으로 7일 뒤부터는 금식을 한다.’고 닭들에게 고한다. 매일 금식 날짜를 짚어서 마지막 날이 지나고 나면, 금식 당일부터는 사료 통을 들고 들어가더라도 잠을 자는 자리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주인에게 몰려들지도 않는다. 물만을 공급해주고, 열흘 정도 금식 기간이 끝나면,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서 공급하는데, 그 시기부터는 빠져나간 깃털들이 다시 나고, 얼마가지 않아서 맨 처음처럼 달걀 생산 능력을 회복한다.닭들을 키우면서 사람이 배움을 얻는 것은 이 뿐 아니다. 암탉이 어느 정도의 달걀을 낳으면 알을 품기 시작 하는데, 꼬박 21일간을 품는다. 병아리가 태어나기 까지 그 스무하루동안을 온 힘을 쏟아 온기가 골고루 가도록 알들을 굴린다. 병아리가 태어나고 나면 그 어미 닭의 몸은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겉모습이 깃털로 덥혀 있어서, 주인이 알아채질 못하다가, 태어난 병아리들을 보고, 너무나 대견해서 어미 닭을 안아주려고 붙잡는 순간, 그 주인은 깜짝 놀라는데, 어미닭의 몸이 아주 가벼워 진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교계에서는 처처마다 기도하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린다. 삼천리 방방 곳곳에 자리 잡은 일만 교회, 35만의 성도가 ‘다니엘 21일 기도회’를 갖고 있다. 나라를 위해, 교계를 위해, 교역자들을 위해, 통일과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등장하는 강사들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다. 어쩌면 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이 땅에서 목회자로서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것인지를 기도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아는 것 같다. 스무하루가 지나면 황금빛으로 새로 난 깃털, 위품 당당한 벼슬, 우렁찬 새벽 울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리라. 성도들 모두가 야훼하나님의 군대로 재무장됨을 보게 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1-16
  • 배명길 장로
    종로5가 사무실 출근, 애터미 사업과 드리미선교재단 일에 전념 배명길 장로(76세, 예장통합 서울노회 숭덕교회 원로)는 경북 칠곡에서 상경하여 서울 숭덕교회에서 57년간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왔다. 운동을 좋아하는 배 장로는 건강을 위해 매주 2회 이상 테니스를 즐겨 하면서 평소 산책을 한다고 한다. “저는 운동도 좋아하지만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이 건강에 기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매일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907호에 출근하여 하루의 일정을 시작한다배 장로는 국내 우수기업인 주식회사 애터미 회사의 사업에 심혈을 기우려 노력하면서 ‘드리미선교재단’의 운영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이렇게 노력하고 일하는 것은 저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배 장로는 칠곡에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함으로 고향에서는 대단한 인재로 소문났지만, 목회자가 되려고 했으나 소명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을 때라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택했다. 처음 들어간 창녕섬유 주식회사에서 상무까지 지냈고, 자신이 ‘고운상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30여 년간 경영을 해 왔다. 이 때 섬유업계에서는 배 장로가 높은 위상을 평가받을 수 있었다.당시에 상인 선교를 위한 ‘목화선교회’를 박래창 장로, 김범렬 장로 등 7인이 창립멤버로서 설립하여 오늘까지 활동하고 있다. 목화선교회는 동대문 섬유상가의 상인 위주로 운영되어 온 선교회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배 장로는 숭덕교회(예장통합)에 출석하면서 교회학교 교사를 30여 년간 맡아 왔고, 재정부장 등 여러 부서에서 헌신했다. 숭덕교회는 당시 담임목사인 박영출 목사가 배 장로의 장인이었고, 배 장로는 1977년에 장로로 장립 받아 원로가 되기까지 교회를 섬겨 왔다.숭덕교회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뜻한 바 있어 ‘숭덕학사’도 같이 설립하여 지금(김재룡 목사 시무)까지 3000여 명의 학사생을 배출한 교회로서 인재교육에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해 왔다. 특히 배 장로는 이 일에 적극 참여하고 사역했던 것이 교회를 섬겨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배 장로는 교단 내에서도 모든 면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지도자로서 장로교복지재단 이사를맡아 헌신을 했고, 그 경험을 살려 교단에서는 배 장로에게 공주원로원 원장직을 맡겼다. 당시 공주원로원은 많은 적자가 있었고,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교단은 배 장로를 적임자로 보고 해결하도록 하였다.연세대학교 동문으로서 연세동문장로회가 창립되면서 배 장로는 총무를 맡아 지금까지 상호 친교하면서 모교가 기독교정신의 확고한 운영을 다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또한 배 장로는 초교파 연합단체인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한지협) 제27, 28대 대표회장을 맡아 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열심을 다했다. 한지협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씀을 앞세우고, 한국교회 26개 대표적 교단 평신도지도자들이 모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전통있는 단체이다.배 장로는 한국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해서는 “우선 장로교, 특히 통합교단과 합동교단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교단만 하나 되면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평신도 운동에 대해서도 난립해 있는 평신도 기관들이 하나로 뭉쳐야 대 교계, 대 사회에 대하여 영향력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서 '하나 되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배 장로는 박은수 권사(72세)와 사이에 외동딸을 두었는데 출가하여 부부가 교사로 근무하면서 부모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한다. 배 장로는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7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찬송을 즐겨 부른다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1-16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8
    작가가 되고 나니 지인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급을 받는 직업을 안 가졌으니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루 온종일 글만 쓸 수도 없을텐데 심심하지 않겠는가 등으로 작가로서의 삶을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남이 나를 작가로 알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나의 삶에 동행하는 그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나를 작가로 인정하는데, 더 이상 작가를 알아 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내가 고독의 상황에서 그분을 통해서 얻은 지혜입니다. 나는 영원 위에 남는 흔적을 위해서 상상하고 글을 쓰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를 위해서 나에게 하루에 필요한 돈은 만 원입니다. 만 원은 개인이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돈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나라간의 경계가 생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뛰어넘을 탈경계적 사고를 통해서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일상의 행복을 영위하는 데에 하루 만 원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도 몸이 건강한 상태에서 아침과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가능한 돈이지요. 우선 노년의 경우를 생각하여 봅시다. 65세 이상은 교통비가 안 들기는 하지만, 요즘처럼 50대에 은퇴하는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한 달 평균으로 잡아서 적어도 하루 3000원 정도는 교통비로 들어가지요. 그걸로 동묘역 옆의 풍물 시장 구경도 할 수 있고, 동쪽으로는 춘천, 서쪽으로는 인천, 남쪽으로는 온양, 북쪽으로는 소요산까지 다녀올 수 있습니다. 점심은 그 지역에서 유명한 춘천 막국수나 해물 짬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집 근처의 공원이나 천변을 얼마든지 산책할 수가 있지요. 만 원은 내가 생존하고 있다는 근가가 되는 돈이고, 나의 일상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돈입니다. 만약 하루에 쓸 돈이 너무 많다면 나는 좋은 차를 굴리며 여행하는 데 시간을 다 소비할 터이지만, 만 원은 내가 작가로서 하루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딱 적당한 돈인 것입니다. 하루 만 원은 내가 허황되지 않고 겸손하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며, 자그마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멋진 돈입니다. 간혹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면 낙원상가 4층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이천 원짜리 명화를 볼 수도 있고, 그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이천 원 짜리 팥빙수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그 근처의 이발소에 가서 3500원 자리 이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은퇴한 이발사들이 소일거리로 나와서 일하는 곳이기에 그 이발 솜씨가 꽤 괜찮습니다. 간혹 개인이 노년이 되면 경조비가 상당히 들어갈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축하나 위로를 받았으니,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지인의 애경사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럴려면 하루 일당을 아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 집과 공원을 오가며 산책하며 지내면 됩니다. 집에서는 무얼 하냐고요. 책을 보든가 글을 써야지요. 글을 아무나 쓰냐고요. 아무나 쓸 수 있습니다. 개인이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면 얼마든지 쓸 얘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친구들과 소꿉장난하던 얘기도 있고, 젊은 시절 연애하던 때의 심정도 있고, 중년에 전문가의 입장에서 전문 분야의 노하우를 쌓던 얘기도 있을 겁니다.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어서 쓸 얘기가 전혀 없다고요. 있습니다. 개인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이야기를 하지요. 과거 유대 민족은 남성이 중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의 무리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 자리에 참석한 남성만 센 숫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다말은 남편과 그 형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창녀 복장을 하고 들에 나가 있는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대를 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이방인인데도 불구하고 보아스와 결혼하여 대를 이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장군인 남편을 죽인 다윗과 결혼하여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이는 죄인도 얼마든지 구원의 길에 들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 인생은 앞에서 열거한 여자들보다도 훨씬 더 규모 있게 살았습니다. 사회 규범을 따르며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자녀를 낳아 잘 키웠습니다. 이는 개인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결과입니다. 개인은 자식들을 건사하였고, 가정을 통해 행복을 만들어 갔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70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으며,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를 가졌습니다. 빈 몸으로 와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일구었고,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왔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1-16
  • 목회는 쉬운 것이다·45
    우선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분이 조선일보에 소개된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분의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답변이 “농촌 목회요? 그냥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거죠.”그 냥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냥이란 말을 잘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이 목회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간암 수술을 세 번째 했습니다. 그다음 검사에 왜 자꾸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사와 면담 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물어보았습니다. 10여 년이 넘도록 만난 담당 의사의 딱 한 마디, “함께 사는 겁니다”라는 귀중한 답변을 들었습니다.만일 나에게 목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저는 그냥 대충 사는 사람입니다.이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영화 상영하고,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미생물을 이용한 농업 기술을 강연하고, 수목 조성과 들꽃 축제를 열고, 아이들과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등하교 버스 운전까지 한다는 것입니다.이런 일을 하는 분은 보령시 천북면 들꽃마당시온교회 김영진 목사입니다. 들꽃마당시온교회는 들꽃과 나무천지인 평화로운 농촌교회의 담임인 김영진 목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쁜 목사입니다.주민들이 내 집처럼 교회에 드나들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끊어다가 스크린을 만들고 빔프로젝트를 사서 영화 상영을 하여 노인부터 동네 꼬마까지 예배당 ‘마을극장’으로 모여들게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네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과 추수한 것을 모아 감사하고, 고기도 굽고, 전도 부치고, 두부도 하고, 송편도 함께 하여 교회마당의 들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힘을 합해 들꽃 축제도 열어 보령시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재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다른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습니다.“농촌목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도시 교회처럼 생각해서 혼자 열심 내고 그러면 3년을 못 넘기고 좌절과 실망, 낙담해 떠나게 될 것입니다.“농촌에 오면 농촌의 속도로 사는 게 좋습니다.”농촌교회는 주민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낙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목회는 의욕이 아닙니다. 내가 처해진 환경에 흐름을 같이 타야 합니다.종교적 열심을 말할 때에이슬람교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슬람교의 기본원리는 6신(信) 5행(行)이 있습니다. 즉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행합니다.6신이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선지자이다, 꾸란 만이 성전이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 심판을 믿는다.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모방해 창시된 것입니다.5행이란 신앙고백입니다(항상 중얼거리면서 신앙을 고백한다). 기도입니다(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다). 금식, 구제, 성지순례입니다.이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 종교의 하나일 뿐입니다. 알라라는 신에 맹종할 뿐 그 열심히 결국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일머니라는 검은 물결의 세계에 깊이 잠입하고 있음은 무서운 사건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신앙생활이란 열심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이 이방 종교와 이단들의 형태로 바뀌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목회도 대부분이 열심히 했다고 고백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힘을 다했다고 말하면서 목회 성공을 회상합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결과가 현재의 성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이 무슨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인가 말입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출처가 자기 자존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말입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6
  • 이산가족 상봉 ①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Ich und Du=I and Thou, I and it) 는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인식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제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름이 하나 됨을 알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로 향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현대문명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격적 주체인 ‘너’로 보지 않고 도구적 존재, 수단적 존재, 사물적 존재인 ‘그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현실로 알게 하는 말로 ‘나’와 ‘그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와 ‘그것’과의 관계로 인간은 타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인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는 관계회복으로 이끈다. 이렇게 마틴 부버는 한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두 겹(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원초적인 관계성과 그 차이와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우리의 삶의 인식에 있어서 생명 살림의 부재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의 나 된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함’이라 한다. 부버는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에게서 만난다”고 한다. 인간은 영원자 너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 가고 자기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과 구별되는 초월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만날 때 거기서 신앙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성품, 속성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인연(因緣)인 것이다. 나의 나됨은 바울이 말 한대로 당신인 네가 있기에 가능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너’가 있어야 ‘우리’가 될 수 있다. 고로 우리가 ‘너’는 ‘나’와 만남은 아무런 원인이나 까닭이 없는 우연(偶然)이 아니라 사이를 맺어지는 연줄과 같은 인연(因緣)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여기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하지 않는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하신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나’와 ‘너’와의 점 하나의 관계이다. 서로의 사이는 관계이다. 그래서 人間(인간)이라는 말은 서로의 관계를 알게 한다. 함께 사는 삶에서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통하는 것은 서로 관계하며 산다는 것이다. 소통은 살림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음이며 죽음은 살아있음이 없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너 없이는 내가 없고 나 없이는 네가 없음을 안다. 네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서 내 마음이 되고 내가 네 마음으로 들어가서 내 마음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마음의 상태를 일컬음이다. 서로의 사이에는 들어오고 들어가는 관계의 소통이다. 성서의 전면(全面)은 이 관계에서 수립된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또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고, 둘째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무슨 일에나 행동의 중요한 지침이 되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 행동의 지침으로써 예수님은 스스로 삶의 자세가 ‘자기 비움’(케노시스)임을 보여 준다.예수님의 첫 번째 출발은 ‘자기 비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한다. ‘너’와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자기의 지위와 권세와 위치의 모든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려놓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흔히 사람의 욕심은 그릇이 너무 커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비우면 사람의 마음의 그릇은 커지고 욕심의 그릇은 작아진다. 여기에 모든 만족과 감격이 찾아 든다. 반면에 자기를 비우지 못하면 마음의 그릇은 작아지고 욕심의 그릇은 커져만 간다. 여기에는 자기만족이 없다. 행복은 여기에 찾아오지 않는다.인생을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왕을 만나고, 씨앗은 땅을 만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만남의 역사는 시작되고 생활의 좋은 살림은 좋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1-1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2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2.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 독일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루터가 태어난 지 몇 주일 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 중에 있는 한 목자의 초라한 집에서 츠빙글리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름답고 웅장한 천연계를 바라보며 성장한 츠빙글리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조모(祖母) 곁에서, 순수하지만 웅대한 꿈과 포부를 가진 진실한 크리스찬으로 자라났다. 특히 그는 남달리 명석하고 매우 총명하였으며 그를 가르칠만한 교사를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3세 때에 당시에 스위스의 가장 우수한 학교들이 있는 베른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이 유능하고 뛰어난 어린 학생에 대하여, 당시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던 도미니크회(Dominican)와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는 경쟁적으로 이 아이를 자기들의 편에 두고자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의 아버지는 츠빙글리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산골에서는 이 츠빙글리의 지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바젤(Basel)로 갔고, 그곳에서 비템바하(Wittembach)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로마교회의 이단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도전사실상 그 당시 츠빙글리와 루터는 서로 교류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중에 츠빙글리는 루터의 서적을 통해서 자신의 개혁적 메시지가 서로 일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개혁자는 오직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전력질주 하였던 것이다.1516년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deln) 수도원의 설교자로 초빙되었다. 그곳에 하나의 명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상’이었고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연중 대절기가 되면 여러 나라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 미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부류는 그들의 고행을 포함한 순례 여행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에 크게 실망하였고, 또 다른 한 부류는 로마교회의 의식들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귀중한 복음을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서 그 소식을 널리 전파하였다.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전당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이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아울러 예물의 액수도 감소하였다. 이리하여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3년 후에는 당시 스위스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취리히(Zurich)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복음과 교권이 대립되다츠빙글리의 설교는 매우 개혁적이고 복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로마교회의 부패와 거짓 교리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정치가들, 학자들, 기술자들, 농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애굽의 암흑에서 인도해 낼 우리의 모세가 될 것이다.”(-D’ Aubigne, b.8, ch.6)라고 말하였다.이와 같은 츠빙글리의 감화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로마교회가 잠잠할 리가 없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금고를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면죄부 판매를 적극 추진하였다. 독일에서는 테첼(Tetzel)이라는 신부가 그 판매책임을 맡았고, 스위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수도사 삼손(Samson)의 지휘 아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관하였다. 한 지역에서 동시에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다. 츠빙글리는 면죄부 판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삼손은 한 장의 면죄부도 팔지 못하고 스위스를 떠났다.츠빙글리의 설교는 언제나 복음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은혜스럽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많은 청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는 루터가 교황과 교권에 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는 이제 츠빙글리가 교황의 권한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된 로마교회 측에서는, 당시 콘스탄스의 감독이 세 명의 사절을 취리히의 의회로 파견하여 츠빙글리가 사람들에게 교회의 법규를 범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질서를 파괴하고 있으니 그를 조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취리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평화롭고 범죄가 없었던 안정된 도시였기 때문에, 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츠빙글리의 활동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역전(逆轉)이 된 대토론회독일에서나 스위스에서나 개혁사업이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나, 이를 약화시키려는 로마교회의 노력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들이 츠빙글리에게 제안한 방법은 공개토론회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부적인 조작을 통해서 츠빙글리를 제압하고자 하는 음모였다. 바덴(Baden)에서 대토론회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츠빙글리는 직접 그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고, 개혁파의 대표로는 에콜람파디우스(Ecolampadius)와 할러(Haller)가 출석하였고, 로마교회 측에서는 학식이 풍부하다고 인정받는 에크(Eck) 박사가 나왔다.에크와 그 일행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단에 올랐으나, 개혁파의 대표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크가 만약 로마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성공하면 막대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좀 불리한 입장이 되면 상대방에 대한 모멸과 조롱을 서슴지 않고 퍼 부었으며 매우 오만한 태도로 상대방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개혁파의 대표자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오직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하였다. 토론회의 내용은 필기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으나, 한 학생이 몰래 모든 내용을 필기하여 그 내용을 밤중에 츠빙글리에게 보냈고, 츠빙글리는 밤새 그 기록들을 검토하여 그 다음 토론에서 주장하고 답변할 내용들을 작성하여 학생을 통해 전달하였다. 이 토론은 18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에크 일행은 매일 저녁 풍성한 식탁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개혁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음 토론을 위해 준비하였다. 토론회에 참석자 중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양측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에크의 주장들에 대하여 혐오스러운 감정을 갖게 되었다.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하였지만, 이 토론회의 결과로 개혁 사업은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중요한 지역인 베른과 바젤 두 도시가 개혁 사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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