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2(토)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 소외가 극복된 인간화의 실현에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휴머니즘의 해석을 통해 구원 받는 구주 예수를 알고자 한다.‘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로 법에서 나타난 권리. 의무의 주체자로 상대편과 자기 자신을 인격체로 가리키며 자기 외에 남을 막연하게 부르는 말로 자연인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물질이며 생물이고 인간에게는 마음을 쓸 줄 알아 자각할 줄 아는 존재이고 인간은 고도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자주적으로 행동 할 줄을 알아 인간이라 하여 ‘사람’과 ‘인간’의 차이를 알게 한다.우리가 잘 부르는 “아리랑”의 가사를 살피면 ‘아리랑’은 신을 지칭하고 ‘쓰리랑’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래서 ‘아라리가 났네’는 신의 자녀들이 ‘사람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남을 알게 한다. 그 역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를 살펴 증언하고 그 삶으로 이 세상에서 나라를 구축하고 관계를 이루며 삶을 펼쳐 나감을 믿게 한다. 이는 나라를 건국해서 보이며 실천하는 것은 그 역사로 족보를 살펴 삶을 엮어 흥망성쇠를 보여 믿게 한다.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인간이 사는 세상은 사람이 삶만을 위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임을 알게 하는 곳이 세상이다. 그리하여 세상이란 의미는 사람들이 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깥세상’인 저 ‘세상인 본래의 천상’을 빚 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다’는 죽음을 말하게 된다. 이는 세상만사의 온갖 모든 일이 하늘의 뜻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묻는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진술을 처음부터 최종적 목표로 하고 출발함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가 유한한 자유, 그리고 소외로서의 죄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처음부터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서 예수는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 예수가 자칭 그리스도라고 일컬어졌던 예수, 곧 실제로 역사에서 살았던 “역사의 예수”의 말과 행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밖에 없다.우리가 인간의 구원을 이해하고, 삶을 영위에 살아가는 데는 그 때 그 때의 실존적 상황과 사회적 역사적인 정황이 무엇인가? 에서 알게 하듯이, 구원의 현재도 구원 자체의 휴머니즘적인 성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구원은 곤경의 삶의 정황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인간이 사회의 법을 어길 때 그리고 인간 자신이 인간으로 있지 못할 때 그리고 인간 자체로 부터 떠나 소외 상태가 될 때. 그리고 ‘나’가 인간의 주체성을 빼앗기고 남의 것이 되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해 무시와 경멸과 모욕을 당해서 인간으로 행세하지 못해 인간 자체의 소외에로 전락된 때 인간 자체의 소외 극복이라는 현대적 의미를 늘 상 삶의 현실에서 보아 온 삶의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여기에 오늘의 인간 사회는 인간 소외의 극복이라는 구실로 인간화의 실현을 구심점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구원을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할 때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인간화의 실현에 오늘의 구원이 있다면 여기에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인간 부재’의 현실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알고 갈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잠잠하면 돌로도 소리치게 하는 분이심을 알게 한다.”(눅19:40)“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당나귀와 같은 짐승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예수만이 아니라 ‘인간’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의 예수이심을 믿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1:15)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4-25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2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나 개인의 기도가 아닌 그분이 원하는 기도를 하게 해 달라고. 그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분 자녀들의 행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녀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인이라 칭함 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 자녀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 성령은 먼 별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 이 자리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의 생활이 온전히 주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자녀와 형제들을 온전히 주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그렇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그 자녀의 행복이고,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이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너무 죄의 굴레에 가두지 말라. 성령이 죄를 물리치고 그 자녀가 영적으로 승리하도록 인도하심을 믿게 하라. 그리하여 이 시간 야베스가 주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하여 본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야베스> 4:10). 여기서 “나의 지역을 넓히”신다는 것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선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리라. 인간은 누구나 죄의 허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의 죄는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여 주셨다. 죄를 회개하였으면 더 이상 거기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이라 칭하셨으니 이제 의인답게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사탄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성령이 인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정신 역학을 생각하여 보자. 정신 역학은 정신의 여러 구조들에 대한 에너지의 배분과, 구조에서 구조로의 에너지 이동을 문제삼는데, 등량의 원리에 의하면 어떤 정신적 요소에 위임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이 감소되면 등량의 에너지가 다른 정신적 요소에 나타난다. 즉 정신에서 에너지가 상실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했을 뿐이다. 실제로 에너지는 몇 개의 요소 사이에 배분된다. 물리학에서 이 원리는 熱力學의 제1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한다.개인이 정신적으로 하던 일을 그치면 그 대신에 무엇인가 다른 일을 반드시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남자 아이가 비행기의 모형, 만화, 순경과 도둑 놀이에 흥미를 잃기 시작하면, 자동차, 소설, 여자 아이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리라 예상하면 된다. 가령 착한 일을 하던 데에 소용되던 에너지가 어떠한 유혹이 오면 자아가 통제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보자.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창조>, 1919)에는 “기름자(그림자)”라는 단어가 8번 이상 나온다. 작가가 심리학 용어인 “그림자 현상(The Shadow)”이라는 말을 알고 썼든 모르고 썼든 간에, 이 작품에 나오는 “기름자”는 바로 인간 심리에 나타나는 그림자 현상을 매우 잘 형상화한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남작 집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 그녀는 평소에 매우 착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한참 자고 있는데 남작이 그녀를 흔들어 깨우며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녀는 부인이 알면 어떡하느냐며 몇 차례 거절하여 보지만, 자신의 이성과는 반대로 몸은 남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남작의 시선을 피하면서 별한 웃음- 애걸하는 웃음- 거러지의 웃음을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이는 엘리자베트가 어떠한 유혹이 닥쳤을 때 평소에 자신의 심리에 있는 자리잡고 있던 욕망을 조절하는 단련을 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이다. 엘리자베트가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재판을 걸어 남작의 성폭행을 문제삼지만, 남작은 재판에서 승소하고 만다. 그녀는 장안에 스캔들로 소문난 것이 창피하고 그 충격으로 아이를 유산하면서 깨달은 것은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던 숨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약한 자였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아가 부정적인 그림자 현상에 넘어가지 않도록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으나, 현대 사회에는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요인들이 산재하여 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개인이 사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4-25
  • 목회는 쉬운 것이다·59
    하나님의 일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구분해놓고 전문화하든지 부업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보다 무서운 일은 각 교회에다 대리점, 체인점을 내고 교안과 교재를 팔아먹고 재벌이 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이라고 자랑하고 간증하니 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개념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그러면 우리가 하려는 목회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그분이 구속자로서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리스도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구별하신 선지자로 제사장과 왕의 직임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사하시고 가르치시고 권위를 가지신 무소 부재하시고 유무 상통하시고 모든 것의 창조자시라는 것입니다.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성을 가지시고 비하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속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인도되매…”(단 7:13).하나님의 아들로서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우리가 믿는 그분은 우리가 준비할 이유가 없음은 그분이 우리의 생활 속에 무소 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후에 더욱더 깊은 의미가 있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라는 칭호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소유자와 통치자가 되신 것입니다.로마서 1장 7절이나 에베소서 1장 1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신 말씀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우리가 믿는 분은 우리의 구세주로서 예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인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님이십니다.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그분이시며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름 부음 받으신 그분이시며 인성을 가지셨으나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삼위 중의 제 2위이시며 성령의 특별공작으로 잉태하여 나셨으며 하나님의 후사요 대표자시며 교회의 소유자와 통치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구세주이십니다. 그가 지신 신성과 인성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인생의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경건의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죄인 된 인생들의 대속자가 되고 수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시기 위하여서는 인성을 입으셔야 했습니다다만,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서는 죄 없으신 사람이셨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또한 무한한 가치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서나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나 절대적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으로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4-25
  • 부활의 의미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몸과 혼의 생명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신약의 기사에서 나사로(요11:38)에게서 부활은 현세의 생명을 회복하는 경우나 그리스도와 같이 재림 때에 그가 일으키실 자들의 영생을 회복한 경우 다 같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성서는 가르치기를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이 몸과 혼의 영원한 형벌이 될 것이라 한다(마10:28, 요5:28,29:,행24:15). “부활” 이란 낱말이 수식을 받을 경우에는 대체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표현이 쓰인다(마22:31, 눅20:37 행4:2,17:32,23:6,24:21:고전15:12이하). 신도들의 부활은 (이렇게 ‘의인’들의 부활이라 했다.)이렇게 때로는 이렇게 신도들의 부활을 ‘의인들의 부활’. ‘생명의 부활’ 여기에 반하여 불신자들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요5:29) 이라고 불의한 자들의 부활을 (행24:15)이라 했다. 이렇게 교회의 신조들 속에 자주 사용되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들은 성서에 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초대 교부들과 신조들이 입증하는 바에 의하면 ‘육신의 부활’이라 함은 초대 교회가 도입함을 알게 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당시 신조들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오늘의 삶을 현실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자에게 반드시 믿음의 자리를 찾아 여기에 우리의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전능하신 창조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심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의 관계를 회복함에 있음을 살아있는 믿음의 행위로 알게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죽은 자를 일으키신 생명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 또한 귀중한 것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옛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왕상17:17, 왕상17:17,왕하4:32)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친히 부활이요 생명이 (요11:25) 되심을 보여 주신다(고전15:20-23, 47-49 살전4:14)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에 의해서 죽은 자를 일으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 한분뿐이심을 믿는 생명의 삶은 부활뿐이다.여기서 우리가 살핀 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삶의 행위자이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나님의 행위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도 일어나게 됨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친히 보이셨음을 의심 할 여지가 없음은 그는 살과 뼈를 가지고 있어 눈에 보이는 몸을 지니고 있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보이셨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도 나타나 눈에 보이는 상처까지 아직 지니고 있었음을 보이시고 함께하는 삶의 태도를 증거되게 하심에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의 현실은 죽음이 육체의 몸에 미치는 영향력까지를 포함하여 몸을 이기셨음을 믿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피어야 하는 것은 육신으로 된 진짜 몸(육신체)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일체의 입장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반대가 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24:39절에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과 뼈가 없느니라’에서 말씀하심을 알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의 순간에 겪은 놀라운 변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예컨대 부활한 주님께서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었다는 신비한 요소가 출현 설화 속에 나온다. 예수 부활 후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비록 참 하나님이셨으나 또한 한 인간이셨고 그는 여전히 인간이셨다고 말한다(딤전 2:5). 인간의 몸을 지닌 그리스도가 신처럼 무소부재하게 되었다면 그의 참 인간성은 소멸되고 승천의 실제 사건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한다.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의 품격과 그 업적이 너무나도 특이함을 믿음으로 믿기에 여기에 따른 그 “부활의 의미”도 깊게 알아야 한다. 예컨대 예수의 품격과 그 업적이 너무도 특이하기에 그의 부활도 특이하며 그 의미도 깊음을 깨우쳐야 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능력의 가장 놀라운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권능이 자기들 속에서도 역사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부활신앙으로 채워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4-11
  • 여홍윤 장로
    매주 원로장로회와 사랑의 쌀 조찬 모임에 참석하며 교분 가져 여홍윤 장로(82세, 예장합동 원남교회)는 은퇴 후에 그동안 열정을 다해 노력했던 한마음선교회를 떠나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주 월요일마다 모이는 합동측 원로장로회와 사랑의 쌀 토요조찬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시간이 나는대로 성경읽기와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별다른 운동이나 노력은 하고 있지 않지만 오늘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만족한 생활을 한다고 했다.“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붙잡아 주시고 지난날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오늘까지 건강하게 지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여 장로는 노령에 접어들었지만 동료 장로들을 만나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는 일상을 보내면서 주님 안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여 장로는 1965년에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1972년 새서울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고 충성을 해오다 1998년 종로구 창신동 창신제일교회로 이거하여 은퇴하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역을 감당해 왔다. 여 장로는 “교회에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목사님을 중심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회고하면서, 이는 형님이신 합동교단의 중진 여홍근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도 한다.여 장로는 80년대 이영수 목사가 합동교단의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교단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에서도 총무를 맡아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 한때는 KBS 모금사업위원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로로 임직 받으면서 뜻한 바 ‘한마음선교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 선교를 시작했다.“정말 감사한 것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선교에 필요한 물질을 채워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러한 선교사업을 진행해 오게 하신 것은 기적 같은 역사입니다.” 사실 여 장로는 재단법인 한마음선교회를 통해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을 많이 해 내었다. 주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 지역의 동포들을 고국으로 초청하여 그들이 조국의 발전과 경제적인 부흥을 이룩한 것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갖게 하고, 이들을 환영하는 예배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 왔다. 대전 엑스포 대회 때에는 100여 명의 동포를 한꺼번에 국내로 초청하여 교계에서 많은 호응과 관심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제가 젊었기도 했지만 세계를 다니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필요함을 채워주시고 감당하게 하신 것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여 장로가 한마음선교회를 통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에서 국내에 초청한 동포는 연인원 4,500여 명에 달한다. 그들은 모국을 방문하여 발전상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고 또한 복음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돌아갔다. “사실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교회에서 이처럼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협력해 주었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많은 이들이 참여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여 장로는 연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헌신했다.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와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여 장로는 한국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지도자들은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헌신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일 때에 성도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라며, 평신도 사역 역시 봉사와 헌신을 하면서 치우치지 않아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여 장로는 김복례 권사(82세)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다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장남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차남은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장녀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여 장로는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을 종종 방문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4-1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1
    필자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주님. 저의 개인적인 기도보다는 주님이 저에게 두신 뜻을 아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저의 개인적인 소망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이 땅의 교인들은 너무 물질적인 데 소망을 두고 살아 왔나이다. 강남의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와 맛있는 요리와 멋있는 여행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주님이 내린 축복으로 착각하였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었나이다. 말구유에 나시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이웃이셨나이다. 주님은 집 한 칸 없이 하늘을 천장으로 삼고 겟세마네 동산을 기도처로 삼으셨으며, 갈릴리 호수 주변을 선교지로 택하셨나이다. 구약에서 예언한 땅, 이스라엘에서 가장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죄를 벗어나서 의인으로 칭함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스승을 잃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동행하셨고, 마가의 다락방에 다시 찾아오셨으며, 성령이 그 자녀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에게 찾아오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착각한다. 대형 예배당을 건축하고 유명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주님의 참모습인가.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루터가 500년 전에 내걸었던 선언문이 다시 내걸리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참모습을 보기를 기원한다. 주님은 대제사장이 종교적 권력을 휘두르는 시기에 오셔서 병들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의 편에서 치유와 위로의 손길을 내미셨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마가복음> 12:13-17).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 권력과 부에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직자들이 세상 것인 것에 집착해 있다. 총회장이 되려 하고, 권력이 있는 자 앞에 줄을 서고, 위정자들처럼 돈 선거를 치르기도 한다. 권력의 집중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은 ‘가이사’의 것에 기울어 있는 형태이다. 예수님의 참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변변한 집 한 채 없으셨고, 제자들도 자신이 살던 거처를 떠나서 주님을 따랐다. 주님은 따로 예배당도 세우지 않으셨다. 갈릴리 해변과 호수가 설교 장소였고, 겟세마네 동산이 기도처였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퍼져나갔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대형화와 목사 세습은 ‘가이사’의 흉내를 낸 것이지, 주님께 대한 참된 예배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책임진 대제사장의 편에 서지 않으시고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서 일하셨다. 마찬가지로 종교 개혁 이후의 청교도들은 로마 교황처럼 화려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보다는 마을 안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꼭 대형 교회에서 드려야만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형 교회는 작은 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농어촌과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개척 교회를 지원하고 부목사들이 교회를 개척해 나가면 지원하는 등의 목회 정책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누가복음> 9:1-6).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예배당이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4-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8
    아무렇게 생긴 막돼먹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조차 녹는 이해되는 죄책감을 벗어난 상태 누구의 가르침이나 소리지름이 없는 경각심이나 두려움도 없는 상태 누구의 날카로운 비판도 없는 그런 상태가 구속 받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거룩일 것 같습니다. 현대교회의 형태로써는 가장행렬 같은 위선적 경건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오늘 교회를 성전으로 둔갑하여 경계를 그어 구별해 놓은 인테리어가 아닐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위선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높은 문턱을 만들어 놓고도 사람을 부르는 전도라는 위선적 슬로건과 표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을 겁도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라고 소리 지르는 그런 사람들이 거룩의 본질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나 같은 죄인’이 진정한 자유를 얻음에 대한 삶이 진정한 거룩일 것입니다. 성경구절을 드려대며 연대별로 신학자라는 사람의 이야기나 원문이나 성경원본의 기록을 나열하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장입니다.현장은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룩히 지키라는 대로 내가 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노동 후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리적 건강을 위한 몸의 법칙입니다. 천하고 귀하고 어른과 아이들, 도우미, 운전사, 청소부, 고집불통, 깡패, 배고픈 사람, 장애우, 다문화 가정 모두가 칸막이 없는 곳에서 앉든 서든 간에 명품 옷이든 시장통에서 싸구려 옷을 입었든 뚱보든 말라깽이든 관계없이 주님이 계심에 대한 소통이요, 관계입니다.헤이글러(Dr.Haegler) 박사의 연구에서 “사람이 낮에 일하면서 소모된 산소의 분량을 밤에 쉬는 것만으로는 다 회복하지 못하므로 엿새 동안에 부족하였던 산소를 하루 쉼으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합니다.짐승을 시험해 본 결과도 이레 중 하루를 쉬게 하고 엿새 동안 일을 시킨 결과 더욱 능률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데서 나타나는 무서운 결과는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들까지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인가?다시 하나님을 신으로 만든 다른 신을 시각적 대상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구술 외우듯 부르짖는 망령됨이 신으로 만든 다른 신을 만나는 날로 설명된 현대교회는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다른 신을 만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도구가 되고 자동차가 도구가 되고 가족 전체가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아침 일찍부터 가정이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다른 신의 존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존재인가최소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신 복되게 하신 속에서의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격식이나 의식에 묶여진 꽉 째인 옷이나 신발을 신은 불안함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버킹검의 가족은 아니어야 합니다. 재벌 집의 며느리는 아니어야 합니다. 주일이란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후, 파김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명절날 가족 방문이 싸움판이나 허리가 부러지는 후유증은 없어야 합니다.목회가 기업이 되면, 재벌 주는 호화롭고 나머지는 스트레스입니다. 최소한 교회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가 기업에서 해방하면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나 가방끈이 길든 짧든 간에 유무상통한 곳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올 것이며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높은 교회 문턱이 바울선교회의 초기 시작한 전주 안디옥 깡통교회처럼 모난 사람들이 등 붙이고 살 수 있어서 그 사랑이 세계까지 번져갈 수 있을 수 있습니다.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구속받은 자들이 즐겁게 살아갈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부드러운 모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4-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6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6. 개신교와 천주교, 하나 될 수 있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 ‘개신교와 천주교가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 일치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종교개혁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이 현상을 보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개신교의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이 천주교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천주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천주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천주교가 ‘종교의 얼굴을 가진 국가인가?’ 아니면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종교인가?’ 라는 이 두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아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천주교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국가이다. 천주교는 지금 엄연히 지구상의 한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다. 천주교 국가로서의 바티칸은 이태리 로마의 도심에 0.44㎢를 차지하고 있는 초미니 국가이며 인구는 늘 1000명 이하이다. 그러나 177개국과 외교적 수교 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하고 있는 범세계적인 국가이다. 이 지구상에 천주교의 바티칸 외에는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종교는 없다. 다만 몇 나라들이 종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을 뿐이다.천주교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천주교 탄생은 서기 4세기 초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가 당시 경쟁자 멕센시우스와 전투 대치 중에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속에서 본 그리스도(XPIΣTOS, 크리스토스) 이름의 첫 두 글자 X(키)와 P(로)를 겹쳐서 군호를 만든 다음, 그것을 군인들의 철모와 방패에 써 붙이도록 하여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콘스탄틴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200년 이상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던 기독교를 향하여 자유를 선포하고(서기 313년 밀란칙령) 성직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본인도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면서 기독교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국가적인 분위기와 함께 당시 로마의 또 다른 거대한 종교집단이었던 미스라(태양신교) 종교의 지도자들도 신도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태양신 종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원래의 기독교 분위기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큰 비율을 이루고,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전에 이교도일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오류와 타락이 홍수처럼 교회에 밀려들었다.”(Wharey’s Church History, p. 54).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타락하고 배도한 기독교의 풍토에서 발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교리나 풍습이 교회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의 신조라고 할 수 있는 미사나 화체설, 고행, 고해성사, 연옥설, 일요예배, 마리아 숭배, 등 이러한 비성경적인 모든 교리나 풍습들은 이방종교나 헬라 철학 사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천주교는 기독교 보다 불교에 더 가깝다. 두 종교의 성직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녀와 여승이 있다. 묵주가 있고 염주가 있다. 향을 피우고 제사를 드린다. 돌이나 나무나 철로 형상을 만들어 경배한다. 개신교회가 이러한 천주교와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고후 6:15)할 수 있겠는가? 현재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1968년 이래로 천주교는 소위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신교를 천주교와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고, 현재 개신교와 천주교의 일치 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517년 루터에 의해서 천주교와의 사이에서 촉발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서 칭의(Justification) 교리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1999년에 양측이 ‘의화(義化)교리’에 합의함으로 일단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 7월 한국의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 세계감리교협의회가 ‘의화(義化)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동참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천주교가 자신들의 일부 교리를 수정하고 타협하면서 개신교와의 일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이에 발맞추어 2014년 5월 2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 교단들이 서울시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의 활성과 증진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가칭, 한국신앙직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 직제협의회 안에는 예수교 장로회 통합, 기독교 대한 감리회, 한국기독교 장로회, 한국 구세군, 대한 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 기독교 한국 루터회, 한국교회연합회 등 유수한 교단과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다.또한, 세계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통합(흡수)운동(“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에 개신교를 대표하는 미국 내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합선교회(Cooperative Evangelism), 빌리그래함 협회(Billy Graham Association), 트리니티 방송 네트워크(The Trinity Broadcasting Network), 약속이행자들(Promise Keepers), 이해와 협력위원회(한국) 등 유력한 개신교 단체들이 개신교를 흡수 통합하려는 천주교의 강력한 추진력에 동조하거나 굴복하고 있기 때문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통합은 시간이 문제일 뿐 이미 기울어진 분위기인 것 같다. 더 이상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stant, 저항)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 채 종속되어 가고 이 현실을 보면, 종교개혁 500년을 지나면서 개혁의 기운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든다. “개신교의 죽음”(The death of Protestantism)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향후 로마 가톨릭의 목표는 무엇인가오늘날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교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인식 중의 하나는, 가톨릭은 단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국가라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천주교는 바티칸이라는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국가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배후 조정하는 막강한 세력이 바로 제수이트(예수회)이다. “그들은 지금 막강한 권력, 세계적인 조직망, 정밀한 정보, 막대한 금력을 가지고 마치 첩보 기관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전략을 사용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장악하고 세계의 종교들을 가톨릭 안에 묶는 일을 줄기차게 진행하고 있다.”(데비드 차, 마지막 신호, 225). 이렇게 세계의 종교들을 통합하고 나면, 정치적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가톨릭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거대한 부채 국가인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열강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세계적인 시간 주간 잡지 타임(TIME)은, 2015년 9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를 방문하여 이루어 놓은 성과를 평가하면서 9월 26일자로 발행된 잡지에 교황을 표지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문제는 표지의 타이틀이다. 「The New Roman Empire」(신 로마제국)이라는 제목과 함께 “The Global Reach of Pope Francis”(교황 프란시스의 세계적 성과)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다. 우리는 이 타이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4-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35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5.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는 설교단의 허약함 설교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바 되었다. ‘믿음’이라는 것도 단지 예수를 통해서 죄의 사유함을 얻고 그 결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므로 설교자의 중대한 사명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설교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설교자 자신의 의견이나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설명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이나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풀어서 가르친다. 성경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거나 상실되면 그 ‘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는 ‘사람의 말’이 되어 버린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 강단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목사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예수가 드러나야 하고 그분의 말씀이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청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예수 대신, 정치 사회 이야기, 목사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들, 현실 생활에 얽힌 잡다한 설화들이 나누어지고 있다. 때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빙자하여 그 말씀을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삼아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청중들이 설교자의 말을 수용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2004년 8월 18일 기독교회관에서 「기독교사상」이 주관하여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여기에서 지적된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은 “신학의 부재와 교회중심론 탓에 교회는 역사의식, 즉 설교의 예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학의 부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이 되겠지만, 설교자들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말씀의 부분적인 내용들을 다루기 때문에 성경의 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전달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교회를 출입하며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게 된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외치며 예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목사들이 성경 말씀의 참 뜻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망하게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호 4:6)한다는 이 말씀의 일차적인 책임자는 강단에서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목회자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에 있어서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그 동안 종종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하여 강의한 경험과 자신이 추구하던 부분들을 토대로 목회자와 설교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 놓는다. 설교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가짐 (01) 설교는 목회에 있어서 생명줄과 같은 것이고, 교회 차원에서는 심장과 같은 것이다. 설교에 능력이 있고 영성이 있으면 교회에 생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설교에 영성과 능력이 없고 내용이 빈약하면 교회는 활력을 잃게 된다. 교회 성장은 목회자의 설교에 영향을 받는다. (02)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에 만족할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와 보라’는 초청을 하게 될 것이고 선교 정신이 살아나게 된다. 설교의 흐름이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03) 설교는 목회자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영감을 받아야 한다. (04) 설교 준비는 펌프의 마중물과 같은 것이다. 설교는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생활 속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말씀과 삶(지하수)을 끄집어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 목사의 인품과 신앙과 영성이 설교의 절반이다. (05) 설교의 근원은 철저히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설교는 인간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원은 반드시 성경에서 나와야 하며, 그 주어진 말씀을 채색하고 꾸미기 위하여 인간적인 언어의 기교나 미사여구를 삼갈 것이다. (06) 설교를 전달하는 언어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며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설교가 준비되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빈약하면 설교의 효과는 매우 허약해진다. 힘 있는 음성, 정확한 발음, 강약고저의 조화, 적당한 속도, 적절한 예화나 비유, 확신에 찬 모습 등이 필요하다. (07)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상시 설교자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의 삶이 백성들에게 감동이 되고 모본이 되면 청중은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설교에 동화되고 감동을 받는다. 직설적으로 견책하는 메시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08) 설교를 할 때에 설교자도 그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으로 인식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분’이라는 표현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 명령형(하십시오) 보다는 청유형(합시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09) 설교 내용은 지정의(知情意)의 단계를 포함하는 것이 좋다. 지적인 깨달음을 주고(知) 정서에 감동을 주고(情)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意)해야 한다. (10) 설교를 위하여 단상에 오르기 전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교통을 나누는 것은 영감적인 설교에 필수 요소이다. 말씀의 능력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목사는 죄로 인해 죽을 뻔한 사람을 말씀을 통해서 살게 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교회에 나와서 살 뻔한 사람들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할 때에는 말씀에 담겨져 있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여 성도들을 영육간에 치유시키고자 하는 치열한 투쟁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히 4:12)기 때문에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죄인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심령 뿐만 아니라 삶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큰 골짜기에 산적해 있는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겔 37:10)가 되었던 그 역사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일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성장용 설교가 아닌 영혼을 살게 하는 생명 있는 설교가 오늘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30
  • 바로 지금은
    세월은 ‘바로 지금을’ 알게 한다.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이나 지내는(사는) 형편이나 사정이나 살아가는 세상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삶의 소중한 선물은 추억이다. 추억은 삶의 흔적이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면 희망, 기쁨, 실망, 슬픔, 그리움, 기다림, 깨달음, 아픔, 등의 마음을 추상(追想)하게 한다. 세상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삶은 짙어지고 흘러가는 시간을 통하여 그때그때의 지냈던 형편이나 사정을 알게 하며 지내온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 흘러갔구나 하는 기억을 남기게 된다. 여기에 성서의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한다. 이는 그 때가 과거에서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이 순간 ‘바로 지금’이라는 때를 알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의 소중한 추억만 그리며 살려한다. 행복이란 현재와 상관한다. 행복은 여행을 알게 하는 데 어떤 목적지에 이르러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머무는 공간이라야 풍성하고 그 여정(旅程)이 추억의 세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소중한 사람, 소중한 일, 시간을 보내는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에 가면 약속한 일들이 우리들 누구에게도 내일 여기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은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삶은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 있다. 지금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을 사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항상 무겁다. 그리하여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 때를 알려면 주어진 삶의 깊은 곳에 깊은 눈으로 낮과 밤을 흐르는 시간을 응시하고 길고 넓은 공간을 넘어 저 곳의 피안(彼岸)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10).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성서가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에서 “때문”이라는 낱말은 의존명사로서 쓰인다. 즉 어떤 말 뒤에 쓰여 그 말이 가리키는 사물이 다른 말이 가리키는 일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낸다고 하여 ‘때’에 따라다녀 “때문”이라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가리킴으로 그 뜻을 확실히 한다. 그리하여 전도자는 때를 모르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고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세월을 아끼라 함은 시간과 공간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집에서 거하는 것을 알게 한다. 시간에서 삶을 보면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나만 가는 것이 아니고 너도 간다는 것이다. 시계에는 총 세 개의 가리키는 침이 있다. 어떤 것은 아주 빨리 가고 어떤 것은 느릿 느릿하게 가고 또 어떤 것은 가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천천히 간다. 이 침들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치며 결국 처음에 출발한 곳을 향해 끊임없이 가는 것을 본다. 시간은 만든 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물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만이 아시는 것이요 그 분의 본향을 가기위한 나그네의 여정인가? 고 생각하며 “세월은 바로 지금”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후서 6:1-10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 신앙의 삶을 펼친다.세월의 의미는 바로 이 ‘때’를 (now. right. so far, today)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