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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8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8.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 종교개혁과 관련된 당시 유럽 국가들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일단 두 개의 거대한 권력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권력, 그리고 각 제국들의 정치적 권력이 서로 협조하거나 대립 양상을 띠고 있었다. 때로, 국왕들이 종교개혁 사상을 지지하고 협력하려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교황의 힘과 결탁하여 개신교 세력 박멸에 앞장서서 개혁운동을 저지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양상이 특이하였다. 이미 언급되었던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사건을 통해서 수만 명의 개신교인들을 학살했던 프랑스에 대하여 교황은 열렬하게 지지하며 축하하였고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양자가 서로 일치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후로 프랑스에서는 개혁신앙 자체 뿐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신앙 자체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비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앙의 양태(樣態)로 인한 부작용과 부패를 경험한 프랑스에서는 이제 신(神) 자체를 거부하는 무신론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교권주의 영향교회에서 가르치며 강조하는 모든 신앙과 교리의 원칙들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과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주장하고 추진해 나가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식이나 교리들 가운데 신앙의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들이 계속 발생하게 되면서, 이러한 것들을 감추고 가리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가 바로 평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성경을 펼쳐들고 개혁신앙을 주도하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운동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격렬하게 핍박하였고 살해하였던 것이다. 교황 측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개혁을 하게 되면 국민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기 때문에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함께 힘을 모아서 개혁신앙을 박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무시하고 덮어둔 채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회나 국가는 마침내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어두움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국가는 전반적으로 피폐해진다. 국민들은 부도덕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 전의 국가적 상황프랑스에 밀어닥친 개혁신앙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피하여 개신교인들로 불리어지던 위그노들이 고국을 등지고 주변의 여러 나라로 피신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양심적이고 능력 있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법률가들과 교사들을 비롯한 유력한 지도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특출한 인물들이 대거 이주해 나가면서 프랑스에는 일반적인 쇠퇴 현상이 일어났고 도시들은 타락하게 되었고 지방의 비옥한 토지들은 황무지로 변하면서 국민들 가운데는 도덕적 퇴폐의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왕들과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부자들은 호위호식하며 탐욕과 방탕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반면에 농민들과 가난한 자들은 약탈과 착취로 인하여 매우 빈곤하고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 기준과 국가와 위정자들에게 충성하는 정신을 일깨워주는 성경의 교훈들을 제대로 접촉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결국에는 부도덕하고 타락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국민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다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유럽에도 자유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프랑스의 농민들과 도시 평민들의 분위기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도자들에게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때마침, 1788년에 몰아닥친 유례없는 흉작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터지면서, 1789년 도시민과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일어난 폭력적인 혁명이 수 년 간에 걸쳐서 무자비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친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말았다. 수많은 살육과 폭력이 프랑스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프랑스가 로마 교회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화형주를 세웠던 그 자리에, 프랑스 혁명당원들이 부패 정권의 지도자들을 처형하는 단두대를 세웠다. 무수하게 많은 정부 지도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군중의 잔악무도한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의 폭력과 잔악한 행위와 살육은 이미 로마교회가 성경의 신앙을 고수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무자비한 행위들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를 거둔 셈이었다.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로마교회에서 배웠던 종교와 하나님 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들을 그와 같이 피폐하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한 기독교를 증오하면서 신앙에 기초가 되는 성경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불태워버리는 일을 자행하였다. 성경에서 유래한 1주일 7일 제도를 10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휴일은 방탕의 날로 보냈다. 이제 프랑스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과 배교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의회는 공공연하게 프랑스를 무신론 국가로 규정하고 ‘이성(理性)의 여신’을 신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의회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를 등장시켜 그 여자를 ‘이성의 여신’으로 받들고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는 의식을 감행하였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 사이를 통과하여 노틀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의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와 성경의 승리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잠 11:5).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과 갈등을 통해 또 다른 양상의 폭력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지방은 황폐하였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프랑스 국가 자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종교, 법률, 사회적 질서, 가정제도, 국가, 교회 등 모든 분야에 극심한 균열이 생기면서 국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쟁취하였지만, 내부적 갈등과 분쟁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투쟁에서 승리한 자코뱅 당은 독재 정치를 통해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냈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는, 1793년에 의회에서 결의했던,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지하는 법령’을 3년 반 만에 취소하고 다시 성경을 용납하는 의안을 결의하였다. 온 세계는 성경을 거절한 나라에 임하는 재앙과 재난을 목도하였다. 주 10일 제도는 원래의 7일 제도로 돌아왔고 성경은 이전보다 더 높임을 받았다.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가 조직되었고, 1816년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창설되어 유사 이래로 가장 많은 성경들이 수백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온 세계로 펴져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는 말씀의 성취였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1-05
  • 한 해를 보낸 소고
    가고 오는 해에 겸손하게 나의 덕담을 피력한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갖는 신앙에 ‘언령신앙’(言靈信仰)이 있다. 말에는 혼, 영, 즉 보이지 않는 ‘힘’이 붙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언령신앙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특히 강조했고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도록 풍습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말과 언어에 대하여 전래되어온 속담이나 격언 중에는 來語不美 去語何美 去言美 來言美(래어불미 거어하미 거언미 래언미 :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조심의 경고). 晝語雀聽 夜語鼠聽 晝言雀聽 夜言鼠聆(주어작청 야어서청 주언작청 야언서령 :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言他事食冷粥(언타사식냉죽 :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이다). 饌傳愈減 言傳愈濫(찬전유감 언전유람 : 음식은 갈수록 좋고 말은 갈수록 는다). 於異阿異(어이아이 :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은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상대가 받아들이는 기분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항상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그런데 요즘에 와서 우리나라 정초 새해인사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는 이 새해 인사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베개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수저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심지어 어느 화장실에도 ‘복’자가 붙어 있다. 복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자.”라는 인사의 시작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히 산업화 이후에 생겨난 인사라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이런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은 복을, 그것도 물질의 복을 ‘많이 받자’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런데 ‘받으세요.’ 그랬다. ‘준다’는 말은 없다. 받기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식이 우리 민족 속에 깔려 있다. 미국 사람에게는 이런 인사가 없다.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이다. 하루 좋은 날을 보내면, “Have a nice day.”, “Have a good day.” 이렇게 말한다. 서로가 행복한 새해, 좋은 하루를 갖도록 하는 인사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설날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덕담을 나누는 날이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이 덕담이 우리에게 인사로 표현되어야 되는데, “너 돈 잘 벌어라.”, “너 금년에는 주지 말고 받기만 해라.”, 이런 인사가 어디에 있는가. “새해 행복하세요.”라고 해야 할 텐데,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광복 이후, 우리가 서구화 도시화 산업화되면서 얻게 된 구조적 변화는 한국국민의 욕구의 수준을 높이 상승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인해서 개인이기주의와 구조적 부조리가 번창하여 개인의 범죄와 제도화된 부정부패가 오늘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정당하게, 착실히 밟으려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편법주의가 팽배하고, 또 사회의 질서도 혼란스럽고 안전을 무시해 버리는 이런 근본적인 것이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부분에서 적용되는 문제의 해결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말로 고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을 현실적으로 더 가미해서 말씀을 드려보겠다. 인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한결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인사는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을 향한 따뜻한 관심이다. 신약에서는 ‘마카리오스’라고 썼다. 이는 축복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영적인 의무로 승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로 만들어 주는 것, 좋은 일로, 의로운 일로 만들어주는 것을 ‘복’이라고, ‘마카리우스’라고 말했다. 신약성서를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전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거꾸로 이다. 뒤집어서 복이라는 이해를 우리에게 새롭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에서의 ‘복’은 ‘아슈레’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번영된 행복, 그것을 일컫고 있다. 구약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장수한다든가, 자식을 많이 낳는다든가, 현숙한 아내와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존경을 받고 신임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런 뜻에서, 복이라는 말로 대신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1-04
  •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교회-1
    마태의 산상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집약시킨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해를 맞으면서, 교회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을 먼저 구하기 십상이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우선시함에서 비롯됨일 것이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전에, 교회 지키기에 먼저 마음을 빼앗겨 왔다. 이는 교회론 적이고 교회주의에 중점을 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이른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야 새 집을 이루듯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남으로써 광야를 넘어서 약속한 곳에 들어갔듯이, 모세가 광야 저편 끝까지 나아갔듯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영문 바깥으로 나가서 십자가를 졌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려면, 저마다 자신의 교회에서 떠나, 그리스도가 지시하시는 멀찍이 떨어진 그 곳을 바라봐야 할 시점인 듯하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회 되려면, 교회를 떠나야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교회되도록,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씻기시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내어주심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결코 이래서는 자기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몸뚱이에서 흘러내리는 보혈로만이 거룩한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교회가 상당히 존재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외부가 알아차릴 만큼 성장하였을 시기에,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묶어서 세상에 내 놓았다. 저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집중된 나머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겠기에, 교회를 가르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오셔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의를 이룬다.’하였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임하시어 그 위에 거하시며,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다.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의 공생에 사역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구원사역이다. 죄에서 인류를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하나님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신 구속사역이다. 바빌론 음녀로 인해서 더럽혀진 나라를 제거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신도들의 중심에 등극하심으로서, 비로소 그가 구체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이 같은 나라를 건설함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법과 칙령이 있게 되고, 시민들은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노예 민에게서의 출애굽과, 저를 세우는 십계명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에게는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 의의 질서를 세워가려면, 그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의’에 관한 보편적 지식을 모두가 공감하도록 정의를 내리려면, 구약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떻게 역사적으로 일반화 하여 왔는가를 살펴보면, 명백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의’와 ‘하나님의 복음’은 갑작스레 상정된 것이 아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이후 바울에게 이르기 까지, 많은 선지자들과 시인들, 수많은 지혜 자들은 기나긴 세월의 통찰 속에서 자신들 만으로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지켜 갈 수 없음을 애통해하였다. 저들의 결말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가져왔고, 자신들의 지혜와 실천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질 못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더 크신 의로우심을 소망하고 기다려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얻어서 평안에 들어갈 것이고, 그 이름은 야훼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렘 23:5-6; 단 9:15-18)’ ‘하나님의 의’란 곧, 죽을 수밖에 달리 방안이 없는 저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 되심의 크신 은총이었다.우린 ‘의’에 관한 개념을 법정 개념에 한정시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입으면’ 죄 없음으로만 인식하고서는, 그 것만을 내세우며,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좁은 의미의 구원을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고귀한 희생이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을 한다거나, 책임을 지는데 까지는 나아가질 못하였다. 마태에서 ‘크리스천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선언 되었는데, 이는 ‘바리새인의 의’가 율법에 응답함을 말함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복음’에 응답함을 이른다. 우리는 저마다 예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질서를 파악조차도 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8-01-0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3
    젊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침 기독교 도교 유교 불교 등에 나타난 죽음을 연구하던 중이었는데, 그것에 관한 책을 보면서 타나토스(Thanatos, ‘죽음에 대한 본능’을 일컫는 정신분석학적 용어)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심장이 갑자기 멈추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반동 형성에서 생긴 열정적인 행동, 무덤을 영원한 안식처라 하면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하였던 노자, 오로지 눈 앞의 현실만을 생각하라 하였던 공자, 열반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한 석가모니 등의 생각이 눈 앞의 벽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때 나에게 빛으로 다가온 생각이 있었습니다. 부활을 몸소 보여 주시며 영원으로 나아가셨던 그분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어깨를 감싸 주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나에게 주신 믿음으로 그분을 만나기 위한 길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일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꿈 속에서 오래도록 만나기를 기다리던 그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길을 가다가 그분의 형상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의 생명이 유지되는 한 나는 그분을 만나리라 확신합니다. 내가 그분을 따르는 것은 당신이 세상의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그분이 정치인과 같은 인기를 누려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분이 하지 않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로마 황제처럼 군림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왕처럼 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좋은 집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름다운 요람에서 태어나지 않으셨고, 세상의 명예로운 직업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나가 박사학위를 따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집도 없는 나그네 길을 걸었지만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주를 품에 안고 영원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도 그분처럼 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대기업 회장이 되어 영화를 누리지 않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멋진 스포츠카를 소유하지 않았고, 웅장한 집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미스 코리아와 결혼하지 않았고,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비싼 와인을 들며 스테이크를 먹지 않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차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꼬박꼬박 냈고, 교통 법규를 지켰으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엊그제 저녁에는 병원에서 삼교대로 근무하는 아내와 식사를 맛있게 하였고, 건강을 챙기라는 아내의 말에 귀기울였습니다. 생일날에는 아들이 케이크를 들고 와 축하해 주었고, 미국에 사는 딸아이가 바람막이 옷을 선물하였습니다. 아침마다 베란다에 사는 첨지(똥개)의 똥을 치우고, 화초에 물도 줍니다. 매 주 화요일이면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고, 동네 단골 슈퍼에서 필요한 생필품과 과일을 삽니다. 매일 끼니 때마다 설거지를 하고,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집안 청소를 합니다. 오후에는 빨래를 해서 건조대에 넌 후 산책을 합니다.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는 사백 년 된 느티나무를 보며 줄기 한쪽이 움푹 패였는데도 생명이 유지되는 걸 봅니다. 향나무와 주목나무가 길게 늘어선 아파트 단지 안을 천천히 걸어 봅니다. 벚꽃과 진달래가 지니 영산홍이 고개를 내밉니다. 그 옆에서 이름 모를 화초와 풀들이 생긋이 웃습니다. 온갖 화초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고 팔다리를 휘저을 수 있는 것도 다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분이 내 옆에 동행함으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 글을 쓰고 난 후 산책을 할까요, 집안 청소를 할까요? 내일은 선교회원들과 바다낚시를 갈까요, 아내에게 함께 가자고 권해 볼까요? 올해에는 산문집을 출간할까요, 평론집을 낼까요? 매 순간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어 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적어 봅니다.대통령이 되어 탄핵을 당해 보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정치인이 되어 전국으로 유세를 다니지 않아서 행복합니다. 대기업을 운영하느라 돈 버는 데 신경쓰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세금 적게 낼 궁리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매일 적당한 영감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굶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5-26).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1-04
  • 목회는 쉬운 것이다·50
    칭찬으로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백 부장의 믿음과 칭찬으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대화를 통한 학습.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 물질에서 해방하게 하기 위하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에서는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 여인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으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양심에 호소하심은 인간의 정죄성의 고발입니다. 비유로 강의하신 예수님을 마태복음 5장 7장에서 간음, 살인, 기도, 빛과 소금의 역할 같은 주제들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이나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상징과 모범 사례를 보면, 최후의 만찬에서(마 26:17~30), 발 씻기는 일에서(요 13:14~15), 십자가의 최후에서(마 27:46~50).이와 같은 일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의 쉽게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상황들은 바로 우리 주변의 일들이었습니다.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모범의 실습에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계속 강조되는 일이 연구하고 계획하여 빈틈없는 삶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삶 자체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혼자의 뜻을 이루려고 입산수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인간미 흐르는 주변 사람들과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예수님의 마음은 단순합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모습이 지금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장 5~13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 이 맘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동등 됨을 취하지 않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이 사실은 예수님의 비하하심입니다. 그 분의 비하는 하나님에 이르는 승귀하심의 능력이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결국, 내 것은 조금도 개입할 수 없으며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일 속에 나를 포함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기독교인 것입니다.내 것이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지금까지 목회적 삶을 내가 꿈꿔오던 것을 현실로 바꾸려는 헛수고의 삶이었기에 우리는 고통이니 고난이니 열심이니 충성이란 단어 속에 나를 묻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꿈이란 현실로 될 수 없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도 보상할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었으며 우리의 거창한 꿈에 아무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의 꿈은 너의 허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꿈은 눈만 뜨면 모두 지워져 버리는 것이 꿈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꿈은 붙들고 있을 수 없는데 목회자의 꿈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을 비누거품 같은 것을 손목에 힘을 다해 붙잡아야 할 조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이 목회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2장 21절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지만 깨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대로의 꿈일 뿐이었습니다. 꿈은 악몽이든 선몽이든 깨어남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나를 나의 허무맹랑한 꿈의 스토리인 현실에 나 자신을 가두어두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1-0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7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7. 북서유럽 주요 국가들의 개혁운동 중세기 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가톨릭 세력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교권에 저항하여 기존의 신앙의 틀을 깨고 성경 중심의 새로운 신앙을 확립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극한투쟁이었다. 종교 개혁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종교개혁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유럽의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성경의 진리가 밝혀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진리’가 ‘목숨’보다 소중한 것임이 확인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예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불변의 진리이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교황권에 대하여 매우 격렬하게 항의하며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과감하게 공격하던 국가이다. 이러한 개혁의 성향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교사들의 활동은 시대를 통하여 계속 이어져 왔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이 번역해 놓은 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등 개혁사업을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로마교회의 박해를 통해서 화형과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중에서도 신자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였다. 그는 원래 매우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개혁신앙을 받아들여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25년간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개혁신앙을 전파하였다.네덜란드는 개신교의 교리를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고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검으로 죽이고 여자들은 산 채로 매장하여 죽였다. 어린 아이들까지 죽였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흘린 피는 언제나 씨가 되어 더 널리 퍼져나갔다. 마침내 윌리엄 3세(빌렘 3세)의 지도하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네덜란드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덴마크의 타우젠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개혁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유럽의 나라들에게는 비교적 복음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의 산실이었던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개혁주의 사상을 전파했던 것이다. 순박하고 용감한 북유럽 사람들은 로마교회의 미신적인 신앙과 사치와 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가르쳐주는 성경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덴마크의 개혁자로 널리 알려진 타우젠(Tausen)은 로마교회 승원장의 도움으로 가톨릭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쾰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신비설에 빠져있는 학생들의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로마교회에서 입학을 금하고 있는 루터의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가서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밀하게 개신교의 복음을 전하다가 승원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틈으로 동료들에게 진리를 전하였고, 승원 안에서도 개신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개신교 신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보호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떨어졌고, 타우센은 자유롭게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덴마크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결국 덴마크는 국가적으로 개혁주의를 받아들였다. 개혁운동의 보루가 된 스웨덴스웨덴에서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 가운데 루터와 멜란히톤의 가르침을 받은 탁월한 두 청년이 있었다. 올라프 페트리(Olaf Petri)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형제였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개혁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교회의 반대가 격렬했다. 신부들은 대체로 개혁신앙을 반대할 때에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도들을 충동하여 일하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자주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고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이 두 형제들도 폭도들에게 피습되어 목숨만 겨우 건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왕이 이 개혁자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동안 국가는 피폐해지고 국민들은 빈곤의 늪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상징과 의식으로 이루어진 예배에 길들여졌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다. 왕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여 개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력한 지식인들이었고 일반적인 학문과 함께 성경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국회에서도 개혁신앙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 두 형제는 왕의 지도를 받아서 성경을 스웨덴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제 스웨덴은 성경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개혁신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 1세기 후에, 스웨덴은 가톨릭 국가들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거의 망해가는 독일을 구해내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여러 나라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국의 웨슬리 형제와 감리교회영국 출신 윌리암 틴들(William Tyndale)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을 기초로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개혁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이다. 그 당시 성경을 보거나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틴들은 비밀리에 독일로 도피하여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는 성경을 번역한 죄로 1535년 네델란드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 성경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열렬하고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가 출현하여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는 여왕을 대항하여 과감하고 용감한 개혁 사업을 이루어갔다.영국에서는 개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로마교회의 박해는 미약해졌지만, 이제는 국왕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였다. 국교주의 정신으로 국가가 정해주는 방식에 따라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하였다. 이러한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북미에 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당시 핍박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John Bunyan)이 옥중에서 저술한 ‘천로역정’은 불후의 명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국교회(國敎會)에 의한 박해의 역사가 거의 100년을 지배하던 중에 나타난 영국의 위대한 개혁자가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형제이다. 이 두 형제는 남달리 성결한 마음과 경건한 행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의 부담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상태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가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기들과는 달리 아무런 동요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항해하고 있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의 노력으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2-23
  • 빛과 생명으로 오신 구주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서 말한 절기이다.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이며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음을 부언한다. (대림 첫째 주일은 11월27-12월3일 사이의 주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 지도 2000년이 되셨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빛과 생명에게 까지 하느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빛과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빛과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빛과 생명은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고찰하면 인간 사회의 삶에서 삶의 구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이는 빛과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생명의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빛과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생명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삶은 ‘빛’과 “생명의 삶”이 필요하다.하나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새로운 삶의 탄생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이 주어져 생명이 되는 신앙이 된다. 이제 두 가지의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악과 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인류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썩어져 가는 인류를 지식과 은총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목적에 합당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빛이 어둠에 가득한 이 세상과 이웃에게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22
  • 성육신한 예수교회-66
    출애굽기 20장을 낭독하는 자나 듣는 이스라엘이라면, 이 열 마디의 말씀이 얼마나 무겁고 거룩하고 경건하며,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주는 말씀임을 확실하게 알 것이다. 지금의 이스라엘도 과거 출애굽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게, 이 열 마디 말씀에서,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함을 명명백백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의 헌법 첫째 문장이, ‘우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이다. 이 열 마디로 되어 진 문장은 이 땅의 어느 막강한 황제라도 흉내를 낼 수 없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칙령이다.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이스라엘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 첫마디 말씀을 동의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겨레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맹세 없이는 이스라엘 시민이 되질 못하기 때문에, 이 칙령과 같은 선포문의 중요성과 가치는, 인간의 가치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이 치리하시는 나라의 시민 십이란, 바로 이러한 바탕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출애굽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 열 마디 말씀을 지켜내질 못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빌론과 페르시아와 로마의 통치로 넘겨졌고, 이천오백 년을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AD70년, 로마군대에 의해서 성전과 함께 돌 위에 돌 하나 쌓이질 않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점령되자, 그즈음 이 광경을 목격한 증인들 중에 한 사람이, 온 지역에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야훼 하나님의 칙령과 복음을 선포한다. 바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붙드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시어, 모든 인류를 더럽혀진 죄악에서 정결하게 씻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저들을 아들의 우편으로 끌어 올리시기 위해, 야훼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등극하신다. 바로 이 복음서가 히브리서이다.이 복음서를 뒤이어 나온 요한의 묵시록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세밀하게 계시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써 죄인들을 속량하셔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하셔서, 산 자들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통치하시기 위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거머쥐셨다. 이 요한묵시록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석에 등극하시는데, 그가 바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놓아 보배로운 피를 흘려,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나사렛 예수이시다. 자신의 백성들을 죄악과 음부에서 구원하시어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려고, 늦도록 문을 여신 채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은 점점 더, 바빌론 음녀와 진한 진노의 잔을 마시며 취해가고,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명예를 탐내는 자들로 밤이 깊었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자신의 일곱 교회를 돌보시며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신다.우리가 신약을 읽는다면서, 황제의 칙령보다도 엄위하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복음’ 선포를 게으르게 직면한다면, 저는 사망과 음부를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묵시록에 흠뻑 젖어든다면,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을 우회할 수 없으리라. 더욱이 히브리서를 가까이 하는 이 역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붙드시기 위해 등극하신, 조물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를 모른다고 하질 못할 것이고, 마태복음을 직면한자 역시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질서를 세움에 있어서 결코 머뭇거리질 않을 것이리라.바울은 백주의 빛보다도 더 밝은 성령의 빛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 받았다. 저는 보좌 우편에 즉위하신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성별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사도로 부름 받아,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다. 바울은 이제껏 붙들고 있던 모든 가치관을 폐기처분하였음은, 그만큼 그가 알게 된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절대 주권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포한 이 ‘하나님의 복음’의 칙령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들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리라. 백주의 빛보다도 더 밝은 성령의 빛만이, 이 깊은 잠에 취한 그대를 깨울 수 있으련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2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2
    그분이 오십니다. 멀리서 오시고, 가까이서 오십니다. 아침 산그늘과 함께 안개 자욱한 들길을 걸어서 오시고, 날마다 장터로 정을 실어 나르는 장돌뱅이가 넘던 고개를 넘어 오십니다. 어제는 너와집의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고갯마루를 넘더니, 오늘은 아지랑이가 영산홍 앞에서 하늘거립니다. 나는 그분을 만나러 잠시 읽던 책을 덮고 묵상에 잠깁니다. 묵상의 고갯마루에서 그분을 만나고 내 안을 찾아오신 그분을 만나기 위한 예를 갖춥니다. 그분이 나무로 된 문을 두드리실지, 마음 문을 똑똑 두드리실지 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와이퍼가 빗물을 걷어내듯 나는 환하게 웃으시는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광야로 나아가자 그분을 시험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탄. 그는 일찍이 뱀의 유혹으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낙원을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가 경험하였던 존재였습니다. 그가 바로 그분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 주며 그분의 초능력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그분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인지라 생리적으로 배가 심히 고프셨습니다. 허기진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음식은 살아 있는 생물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구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탄은 이를 이용하여 그분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분은 이를 능히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탄이 당신을 시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 그분은 성경 말씀을 꿰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1-3).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주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말씀이시므로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인류를 대신한 희생양이 되셨고, 이를 통해 죄에 허덕이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인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흉내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신 일은 죽음을 넘어서 부활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천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셨으며, 성령으로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피와 살을 자녀에게 나누어 주셨고,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음을 자녀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마귀(사탄)가 그분을 두 번째로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은 그분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분을 시험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사탄은 말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 말한 말씀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7). 그분은 사탄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 말씀을 예로 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의중을 앎으로써 이긴 것이었습니다.마귀(사탄)가 세 번째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는 그분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하였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0). 그분은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진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세 번의 시험을 모두 이기셨습니다. 사탄이 말씀을 이용하여 그분을 시험할 때에도 그분은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그분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고, 삼위일체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도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탄을 이기는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이 살아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49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지금도 ‘소자’에게입니다. 보상받을 수 없는 아주 시시한 그런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 발로 채일 만한 흔한 이름 모를 잡초들일 수 있습니다.목회자들의 대상들이 명분을 내세우는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회 대상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 중에 중요한 사랑의 열매가 나옵니다.사랑이란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성령의 증상입니다. 거기서부터 희락과 화평이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탈무드에서는 충성이란 의미를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절제, 충성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예수로 인하여 우리 욕구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요”란 칼럼을 쓰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장에 계셨습니다.◦예수님은 말과 행동이 일치합니다(성경은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짐을 지우지 말고 함께 일합니다(함께 지는 짐입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4).◦사람의 인기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보이기 위함 아닙니다). “저희 모은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의 곧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마 23:5).◦특권의식을 갖지 않습니다(VIP는 모두입니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마 23:6).◦칭찬은 교만하게 합니다(당나귀 귀가 아닙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리라”(마 23:7).◦직분의 명칭에 연연하지 않습니다(수많은 완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8).◦영적 교제.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다른 이는 없습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내가 존재하는 이유).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마 23:11).◦겸손한 삶입니다(거울 속에 비친 남편의 모습). 돕는 배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느니라(마 23:12).◦예수님은 교사로서, 유일한 선생이요(마 23:10, 요 3:2), 군중을 가르치시고(마 5:1-12), 산에서 가르치시고 만나 이야기하시고,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대상은 고상한 사람도 가르치시고, 하류 사람도 가르치셨습니다(요 3:10, 요 3:7). 예수님은 전 생애 동안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막 3:16-19).◦마귀를 쫓아내시고,◦군중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몸소 자신의 생을 통해 가르치시고,◦기도를 통하여 복종하기를 보이시고,◦십자가를 통하여 용서하시고,◦복음과 생과 사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은 치료자로 마태복음 8장 9장에서 질병을 치료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둥병자와 열병 환자들, 손 마른 자들, 맹인이나 농아들, 태어나면서 소경들, 육체적 질병인자들(마 8:14~5, 마 9:1~8, 마 9:27~34, 요 9:1~12) 영적 치료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정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하셨습니다(마 9:22, 마 9:35~36, 마 10:1).◦목자로서의 일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2), 잃어버린 양을(마 15:24), 아흔아홉 마리(마 18:13).◦예수님의 학습 방법 : 실물을 통해 하셨습니다(눅 7:36~50). 바리새인과 식사하시면서 향유의 옥합을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성을 설명하셨으며, 사람을 낚는 어부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더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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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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