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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0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사무엘하> 6: 12-15).‘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실재實在이다. 웃사라는 사람은 그 궤를 옮기던 중 소들이 뛰므로 손을 들어 궤를 붙들었다가 그만 죽고 만다. 이 때문에 다윗은 궤를 쉽게 옮기지 못하다가, 오벧에돔의 집이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윗 성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때에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아내 미갈이 어찌 왕으로서의 품위를 못 지키느냐고 나무래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으니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사실 십자가는 죄인이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롭다 칭하시고 구원의 길에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후 소멸된 존재가 아니라 성령이 되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시켜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잘못 알고 있는 일부 성직자들은 “성령을 받으라”며 주님을 도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성령은 성직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오셔서 동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죄의 굴레에 묶어 두고 있다. 주님이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고 의인으로 칭하시며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은 설교의 틀 밖에 둔 채, ‘너희는 죄인이니 회개하고 복 받으라’는 기복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복”은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달란트의 축복도 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1달란트는 직장인 봉급 16년 9개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복을 수용할 능력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다 포괄하여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이 찾아오셔서 영적&#8228;정신적&#8228;육체적&#8228;물리적 행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복’의 개념이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복을 물질적 축복만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일부 성직자가 대형 교회 성전을 건축하다가 많은 부채를 짊어지며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교인들을 물질적 축복에만 갇혀 있게 하여 생긴 결과이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과 물질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교인들에게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 병든 자 등 하나님의 자녀에게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 자녀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아름답고 멋있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그 자녀와 함께 동행하시는데, 이를 알아 보는 시선을 못 가진 이들도 많이 있다. <역대상> 4장 10절을 보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러므로 신자가 구해야 할 것은 “나의 지역”을 넓히는 것이다. 성령은 성직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오신다. 이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보는 믿음과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세기> 13:14-17). 이제 우리의 눈을 들어 보자. 주님이 우리 옆에 계시는데 멀리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여 보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다윗처럼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싶지 않는가. “하나님, 저 예뻐요?” 하며 찬양을 부르고 싶지 않는가.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3-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57
    말보다 나의 현장이 더 중요하듯, 나의 삶이 있다면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말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이 결국 나의 삶에 불만을 낳게 될 것입니다. 망령되이 말하지 않음의 복을 말한 것입니다. 말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책임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안식일에 대하여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경건하게 침묵이 흐르는 제사개념인가? 한점의 먼지 같은 죄도 없이 정결한 의식인가? 주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신으로 만들고 우상으로 섬기는 대상을 만들어놓고 반복된 신의 이름을 노래로 기도로 바라봄의 존재로 만나는 날로 정한 것인가? 결국, 우상을 섬기는 자가 신을 만나 절하고, 경배하여 자신들의 만사형통하고 만 가지 복을 받을 수 있는 날인가? 그래서 정결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경건하게 앞에 찬란한 조명과 우리를 내려다보는 위엄 있는 교주 같은 분이 금세 지옥에 갈 것 같은 서슬이 시퍼런 재판장의 판결사항을 듣고 주섬주섬 모은 갖가지 헌금이란 명목으로 제물을 드려야 하는 날이 우리가 지켜야 할 주일이라고 하는 안식일인가?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적 자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없는 신을 신으로 섬기고, 신을 모양으로 만들어 우상이 되고, 그 모양의 이름을 지어 갖가지 섬기는 대상을 만나는 날로 변질하였다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장 8~11절까지 보시면,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는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로 일주일의 첫날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20:19, 행 20:7, 고전 16:2)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안식일이 언제냐? 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 을 말하는 것입니다.신을 만나려고 가는 날이냐? 그날 신을 만나는 것이냐? 다시 말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냐? 입니다. 주일에만 하나님을 면회할 수 있는 날이냐? 이 질문은 아주 평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그날은 안식한다(멈추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다(출20:10, 23:12, 신 25:13~14). 어떤 짐도 옮기거나 짐승 위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느 13:15, 렘 17:21~22). 먹는 음식을 하루 전에 준비해야 한다. 안식일에 먹을 것은 그 전날 만나를 모아 둔다(출 16:5, 23~30).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사망이다(출 31:14~15).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란 사실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흥분하는 마음을 진정하고 주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9절을 보시면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10절에서는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절에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였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와 안식일(安息日)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결국 “거룩히 지킬 것”이요,“엿새 동안 힘써 일할 것”이요,“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요,“복되게 한 날”입니다.거룩히 지킴에 대한 구차한 신학적 설명보다는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냥 불의와 부정에서 떠난 상태로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것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히 얽혀진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나눌 이유나 생각이 없는 상태,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의 상태로 모이기를 힘쓰고 나누기를 힘쓰고 기도에 전념하는 구별된 삶입니다.거룩이란 의미가 하나님과 동떨어진 이방 신을 섬기는 그런 경건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적인 것도 아닙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3-2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4
    34. 한국교회 목사의 자질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이 지구상에 한국만큼 목사가 되기 쉬운 나라가 있을까? 한국처럼 교단 분열이 심하고 이에 따른 목사 안수와 그 수준 또한 천태만상이다.‘의사’가 사람의 일시적인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면 ‘목사’는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성업(聖業)이다. 목사는 한 개인의 현실적인 생활과 미래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사는 인간의 구원과 영생의 도리가 설명되어 있는 성경의 진리와 교리와 원리들을 올바르게 깊이 있게 이해하고 통찰하여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마 15:14)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겨우 신구약 성경의 장절이나 찾고 기도할 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버젓이 … 목사들로 활동하고 있”(강춘오, 변환기의 한국교회, 124)어서 한국 교회의 미래가 매우 염려된다. 한국교회의 신학교육과 목사 안수 실태한국교회의 목사 배출이 부실한 시스템을 갖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 전쟁 이후 60~90년대에 이르는 거의 40여년의 기간 동안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목사의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고, 둘째로는 교단분열이 심화되어 그 여파로 갈라져 나온 교단들이 자기들 교회의 목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한 신학교를 급조하여 운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80년대 말에 5만 명에 불과하던 목사의 수가 현재 약 10만명이 훨씬 넘고 있으니, 한국교회가 얼마나 쉽게 목사를 만들어 냈는지, 그 목회현장의 실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교회의 사찰집사가 어느 날 목사가 되어 있다. 한 때 기도원 원장, 가정 제단 제단지기, 교회의 집사 혹은 권사로 봉사하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고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목사가 되었는지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겠지만, 상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지금 대략 360개의 교단이 있는데, 정식으로 국가의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은 50여개 정도된다. 그 중에서도 절반 정도는 대교단 소속이다. 그렇다면, 360개의 교단 중에 정상적인 신학교육 체계를 갖춘 교단은 25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약 330여개의 교단은 무인가 신학교를 통해서 목사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커리큘럼에 의한 신학교육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고 학교가 요구하는 등록금만 내고 졸업장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강춘오, 상동, 131). 최악의 경우는 교인도 몇 명 되지 않는 개 교회가 신학교 간판을 걸고 신학생을 모집하여,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수진이 부실한 교육을 제공한 다음 목사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목사의 평균 자질은 저하되고 사회로부터 경시당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기독교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를 지도하면, 우격다짐으로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고 기복신앙을 강조하면서 미신적인 개신교 신앙을 만들어 전파할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지성인들이 목사의 수준에 실망하여, 평균 이상의 교육수준이 있고 자격을 갖춘 신부들을 찾아서 천주교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낭설이 아니다. 교단분열과 명예욕, 그리고 무책임한 양심이미 언급한대로 한국의 개신교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기도 쉽고, 해체하기도 쉽다. 정당한 명분도 뚜렷한 원칙도 없는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교세를 이루고 있고 편견의 여지가 거의 없는 장로교의 분열이 가장 심각한 상태이다. 현재 장로교 교단은 대략 300개로 헤아려 진다. 일단 모교단에서 분리되어 새 교단을 설립하면, 정식 인가된 학교 설립은 조건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자체 교단 내에서 통용할 수 있는 신학교를 급조하여 운영할 수밖에 없다. “몇 십개 몇 백개 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교단을 만들고 신학교 간판을 달고 목사 안수를 한다.”(강춘오, 상동, 110). 이러한 패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장로교 군소교단의 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폐단을 만들어내는 교단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주된 요인은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인 명예욕과 권세욕,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간의 불화와 불목(不睦)이다. 교단 총회장 선거에서 당선이 안 되면, 자신을 지지하는 교회들을 모아서 별도의 교단을 만들어 총회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회 경력 중에 명예로운 직함을 하나 더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되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 교단에서 감투가 떨어지면 다른 교단으로 옮겨가 총회 임원 감투를 얻어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인사들”(강춘오, 상동, 26)이 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교단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현상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교단 분열이 계속되는 한 부실한 무인가 신학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의 평균 자질은 낮아지는 것이다. 신학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성경 중심의 복음적인 설교를 할 만한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과 영생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과 손실을 가져다주는 무책임한 양심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대책이 있는가이와 같이 분별없이 목사를 양산(量産)해 내는 한국 개신교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고 목사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지만, 막상 그 방법이나 대책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말해서 그저 막연할 뿐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이 목사 안수 문제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그 해법이 묘연하다. (1) 우선 교단 분열을 막아야 한다- 예수의 12 제자들 중 11명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제사를 삼으셨고, 1명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천(自薦)하였다. 결과를 보면 자천한 1명, 가룟 유다만 실패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성공적인 제자가 되었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예수 정신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특징은 ‘겸손’이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섬기는 종으로 세상에 오셨다. 총회장 선거에서 자천(自薦)하여 금품을 사용하면서까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교단의 분열이나 교회의 분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교회의 직책과 직분은 다른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2) 대교단의 희생과 협력이 필요하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목사를 양성하는 법적인 절차를 통일할 수 없다면, 현재 300여개 교단이 난립하여 제 각각 목회자들을 배출해 놓은 이 상황에서, 대교단들이 협력하여 목회자 재교육 과정을 설정하고 일단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목회를 하고 있는 장로교 목사들이라도 정규적으로 보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3) 공동의 협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적어도 장로교라는 명칭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교단들만이라도 다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목회자 양성 과정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추진하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지금 보다 더 심각하게 기독교를 경시하고 외면하기 전에 실력 있고 능력 있고 인품을 제대로 갖춘 건전한 목회자 양성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22
  • 사람됨의 구실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 인간인 사람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더니 첫 번에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 하더니 그 다음날에는 닭을 가져와 동물은 두 발로 걷고 두 팔이 있고 털이 있어 동물이라 하더니 그 다음 날에는 두 발로 걷고 두 팔이 있고 몸에 털이 없는 원숭이를 데려와 동물이라 하더니 다음날 원숭이 털을 밀어서 가져오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했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서양철학은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이라 한다.이성(reason)은 곧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힘)을 말함인데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식별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사람됨의 구실을 하게한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이 태어 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고 있는 이성능력을 ‘양식’ 이를 또한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초한 행동에 반해서 의무 또는 당위(sollen)의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행위가 ‘이성’이라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어원은 옛말로 하면 ‘구실아치’다. 요사이 연예인들이 공인이라 자처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른 용법이 아니다. ‘집사람, 안사람’은 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댁사람’은 큰 살림집에 친밀하게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다. ‘새사람’은 신인이란 뜻 외에 새로 시집온 사람을 손윗사람이 이르는 말이다. 제3자는 신부를 ‘새색시’라 한다. ‘가욋사람, 군사람’은 정원(定員) 이외의 사람이란 말이다. 이와는 달리 ‘상사람, 손윗사람, 손아랫사람, 윗사람, 아랫사람’은 사회적 계층과 관련된 지칭이다. ‘상사람’은 상민(常民) · 상인(常人)으로, 양반(兩班)에 대가 되는 말이다. 이는 조선조 중엽 이후 평민을 일컫던 말이다.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은 수상자(手上者) 또는 수하자(手下者)를 일컫는 말로, 나이나 항렬에 따라 구별하는 지칭이다. ‘윗사람, 아랫사람’은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이란 뜻 외에 지위의 높낮이까지 나타낸다. 사람은 또한 사람의 됨됨이, 인품 등에 따라 구별된다. ‘난사람, 숫사람, 큰사람, 홑사람, 홑벌사람’이 그것이다. ‘난사람’은 출중(出衆)한 사람, 남보다 뛰어나게 잘난 사람이란 말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인간의 죄와 고통이라는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신학적 주제들로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섭리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 죽음과 종말을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물음들로 발전한다.인간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빚어내셨음을 감사하고 존재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자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에게 창조주의 형상을 내어주심은 인간을 포기(파괴)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의지이고, 끊임없이 삶에 희망을 주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이라 믿는 것이다. 생명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인간의 삶은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의 길이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과정 속에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형상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으로 점철되어진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매개로 유한자 인간과 무한자 하느님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감각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가장 민감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은 제 십자가를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삶의 입장 정리를 해야 한다.‘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어원은 어디 있는가? ‘사람’의 옛말은 ‘사&#58487;’으로, 이 말은 ‘살다(生)’의 어간 ‘살-’에 접미사 ‘’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살아 있는 것’, 곧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했다. 그리고 사람은 또한 사람의 됨됨이, 인품 등에 따라 구별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2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9
    필자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크리스천에게서 발견한 색다른 점은 바로 섬기는 자의 행복이었다. 한 번은 어느 선교 단체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먼저 입회한 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정성들여 섬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문학 단체 임원을 하면서 섬기는 일을 주로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국장이 궂은 일을 하고 있으면 나도 함께 거들면서 도왔다. 이를 본 지인들이 “주간님이 왜 그런 일을 하세요.”하고 말려도 나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궂은 일을 하였다. 후에 임원을 그만두면서 회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내가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은 신의 위치에서 낮은 곳에 임하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셨는데, 낮은 곳에서 섬기는 것도 행복이지요.” 나는 이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여호수아 옆에 있던 갈렙, 바울 옆에 있던 바나바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유교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 편이다. 가난해도 가난한 티를 내지 않고 군자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개인의 덕을 중시하는 반면에 이웃과 어려움을 외면하였고, 선비로서의 인품에 맞지 않는다며 농공상을 천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웃의 어려움을 헌신적으로 돕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날 3만 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섬기는 일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서일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존감도 있는 반면에, 섬기는 마음도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섬기는 마음이 인간 모두에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발자크의 <사라진>(1830)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데, 마담 란티의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난다. 그들 앞에는 미모의 여성 아도니스의 초상화가 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림의 사연은 이렇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 시간에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하였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은 마침내 파리에서 유명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22세에 대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된다. 조각만이 삶의 모든 것이었기에 세상사나 사교에는 어두웠던 사라진이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녀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열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긴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은 드디어 인정을 받은 듯, 그는 그녀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한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귀띔하는 진실조차 귀에서 멀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라는 것이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에 그녀가 동의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듣는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살해된다.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다.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쟘비넬라는 바로 현재는 늙고 추한 모습으로 변하여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파티에 들고 나온 노인과 동일인이었다. 생각해 보자. 한때 미모를 갖추고 있던 여장 남자는 나이가 들자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이 되었다. 개인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던 때도 있고, 늙어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답고 멋진 행동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섬겨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고 섬기는 일부터 시작하여 단체 활동이나 친목회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일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멋있어 질 것이다. 나아가 북한 땅에서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백성을 섬기고 세계인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멋있는 일이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 일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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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3-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56
    동남 아시아의 나라들은 집집마다 우상을 놓고 붉은 불을 켜놓고 그 신에 매달리는 것처럼 우상으로 만든 하나님을 섬기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교회당을 신당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하기에 시설비로부터 운영비까지 감당할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아들을 관리하고 돈으로 치부하는 교주가 되고 헤아릴 수 없는 프로그램의 사슬로 꼭꼭 묶는 일이 성공적 목회라고 합니다. 신당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신에 잡힌 사람이 신 굿으로 악령의 힘을 돋워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예수님처럼은 이런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디나 하늘나라적 삶으로 자유롭게 됩니다.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창조주로 무소 부재하신 우주공간 하나님의 창조 하심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의미를 상대적인 일반 종교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는 우리와 함께하심에 귀중성이 믿음이란 원리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란 집합체인 교회 개념에 신당개념에서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선 교회당 개념인 회당에서 믿는 자가 다 함께 모이는 마가의 다락방의 형태가 사람들이 휘장을 치고 제단을 만들고 한 곳으로 집중하도록 조명을 비추고 교주들처럼 가운에 부적을 붙이고 유유히 등장하여 거드름을 피우는 절대자의 무대가 목사가 만든 것들입니다.번쩍이는 강대상, 성찬상, 십자가상, 큰 성경을 펴놓음, 촛불, 값비싼 꽃으로 장식하고 파이프 오르간과 피아노와 각종 장식들과 도구들이 교주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우상이 된 것입니다.그런 도구를 성구라고 하는 자체가 타락한 로마가톨릭이나 동방교가 이미 심판되어진 것을 개혁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수라는 신학으로 문 닫고 믿는 귀신의 제단을 우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망령되어 일컬음에 대하여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내세워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거짓 맹세입니다.‘망 령되이’라는 말은 들추는 것이나 치켜드는 것이나 위로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세’라는 주제로 그럴듯한 찬양이나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의 이름을 미사어구가 있는 대로 끄집어 내어 기도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된 모습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이나 구약의 용어들은 구속사역이 이루기 전 성막과 성전이라는 상황은 하나님과 우리와 하나 될 수 없는 객관적 상태였을 때의 용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라는 휘장에 의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요한복음 19장 30절 이후에서는 그 용어의 실체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그 사실 자체를 출애굽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신 최초의 복이었습니다. 너희가 만든 올무나 의식의 무용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과 열심을 다하는 찬양의 용어 자체의 의미를 알아야 했습니다.‘망령되이’란 거짓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감람산에서 종말에 관한 설교를 통해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마 24:24, 막 13:22).교회 역사를 보면 A. 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바로 전 전율할 만큼 혼란했던 여러 해 동안 이러한 인물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종교적 구원자이며 종말이 임박했음을 선포했던 때가 있었으며, 헬라 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모방하고 믿는 자들을 미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사상이 시대마다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마 7:15)인 그런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그럴듯한 용어들이 얼마 난 가증스러운 것인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명품같이 보이는 짝퉁인지,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용어들입니다. 사랑이란 말, 감사하는 말, 진심 어린 말, 교회 강단에서 쏟아지는 말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찬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말들,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 모두가 진심이었다면 그런 매끈하게 미끄러지듯 쏟아버리는 용어보다는 침묵의 삶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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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3-2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3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3. 예수님이 대형교회를 좋아하실까 정확한 통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 100대 교회의 50%는 한국에 있다고 한다. 기뻐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교회는 매우 특이한 형태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는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가 많다. 성경 중심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대형교회는 성서적인가?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한국에 계신다면, 대형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행 2:46, 47)는 것이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다. 지금의 대형교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다. 물론 초기 교회와 현대 교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과 기능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성도들이 모여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헤어지는 장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용서하는 연습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회가 대형화 될수록 교회 본래의 기능은 약화된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대형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1. 건실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고 있다(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리고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몸으로 비유된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면, 성도들은 몸의 각 지체에 해당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와 일체감을 갖고 상호 작용을 하면서 몸을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의 손님처럼 왔다가 교회를 떠난다.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 큰 교회를 이끌고 운영해 나간다. 가정으로 말하자면 자녀들이 너무 많아 부모가 돌 볼 겨를이 없어 아이들이 방치된 상태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 2. 죄악을 징계하고 치리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의 다양한 기능 중의 하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악습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교회도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그칠 사이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사회에서는 주변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죄인이 있으면 재판을 하고 감옥에 넣어 사회와 격리시킨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죄인들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물론 징계와 치리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여 징계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에는 최종적으로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되어 있으나, 교인수가 많을수록 치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형교회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3. 개인 우상화로 발전될 가능성이 많다. -교인수가 많을수록 당회장은 교인들과의 개별적인 접촉이 어려워지고 목사의 권한은 더욱 비대해진다. 목사도 죄인의 속성을 가진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되면 교만해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거대한 교회당 중심에서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하는 목사를 멀리서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목사는 다소간 신비스러운 존재로 느껴진다. 목사도 어떤 면에서 자신이 그러한 존재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마치 목사가 주인처럼 행세하고 예수의 섬기는 정신을 망각한 채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야말로 교인들의 우상처럼 존재하며 권세를 부리게 된다. 4. 교회가 상업화될 소지가 충분히 있다.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교회가 대형화되면 소위 말하는 상거래의 규모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구조를 이용하여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도 늘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성전에서도 그러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상인들과 제사장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서로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혹자는, 교회 세습도 이 먹이사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대형교회를 지도하는 청렴하고 경건한 목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인품과 신앙과 능력이 교회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한 것이다. 지금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신다면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고 하시지 않았을까? 5. 재정문제로 인한 불화의 소지가 상존한다. -일반적으로 대형교회의 특징은 사람이 많고 돈이 많다는 것이다. 돈과 사람이 얽히면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 많은 헌금을 지출하는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무슨 용도로 그 재정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늘 문제의 핵심이다. 물론 회의체가 있고 절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불화와 분쟁과 비리의 소지는 상존한다. 대형교회가 헌금의 상당부분을 주변의 불행하고 불쌍한 이웃들이나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했다면, 아마도 교회의 이미지는 현재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 규모와 현상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초대형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고 있다. 때로는 그 재정의 크기와 용도가 불의하게 처리되어 발생하는 문제도 비일비재하다. 교회와 목회자 모두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급기야는 교회의 그 재산권과 함께 교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도 하게 된다. 6.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되기 어렵다. -성경은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목자의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성경 시대의 목자는 양과 생명을 나누는 밀접한 관계이다. 양의 수가 많아도 목자는 양을 개별적으로 알고 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요 10:2) 낸다. 참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요 10:14).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대형교회가 되면 과연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가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요 10:11)릴 각오가 되어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목사가 늘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살펴야 할 주제가 있다면, ‘혹시 내가 내 양을 잘 모르는 삯군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7. 교회에 불충실한 교인들이 양산(量産)된다.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직임과 직분을 가지고 충실하게 일을 하면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교적 사명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기능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엡 4:12)는 것이다.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성도들 각자가 이러한 선교적 사명과 직분을 가지고 충실하게 봉사하며 전도하는 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형교회 성도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으면 관리가 어려워지고 조직에 대한 개별적 충성도는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얼마 전 신문(조선, 2017.11.24.)에 500년 전 루터와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를 각색한 기사가 있었다. 루터가 교황에게 말했다. “교회는 로마 성 베드로 성전을 짓느라 교회의 분열이라는 값을 너무나 비싸게 치렀습니다.” 교황이 대답한다. “저도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태도는 거대한 건축이 아닌 이웃을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옛날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성당 건물과 오늘날 개신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3-08
  • 생명과 사랑의 관계
    태어나지 얼마 안 된 쌍둥이가 있었는데 왼쪽의 아이는 몸이 약하여 작고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혼자죽음을 맞이했다. 간호사가 이를 너무 안타깝게 여겨 다른 쌍둥이를 인큐베이터 안에 같이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쌍둥이가 죽은 쌍둥이의 어깨의 힘없이 손을 올리며 안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왼쪽쌍둥이는 맥박, 심장, 체온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실제적인 병원의 치료 과정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의 세계는 모계사회로 형성되며 지구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생명은 태양으로부터 햇볕을 받아서 이렇게 많은 개체 생명들을 탄생시킴은 물론 성장에 이르기까지 양육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은 생명을 생성시키는 양기로, 땅은 양기를 받아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음기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변의 달과 별들은 보조적인 기운으로 이웃처럼 그 생명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온전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햇볕도 공기, 물, 땅과 함께 생명의 기본요소을 이룬다. 땅의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태양의 햇볕과 공기, 그리고 물의 도움을 받아 상호작용을 함으로 땅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그 근거와 그 이 역할은 사랑의 유기체로서의 그 힘을 알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그 생명의 기능으로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 물, 땅이 유기적인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그 유기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첫째 다른 생명들과 공기는 자신에게 맞는 여러 형태의 영기가 고유한 성질을 형성해 낸다는 것과 두 번째 물도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생체에너지를 생성하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땅은 생명의 근거인 동시에 상실로서 여러 가지 형태의 생명들이 생성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 생명의 다양성을 서로 확보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이 사랑의 역할로서 아름다운 땅의 생명을 창조해 내는 데 서로의 그 사랑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물 속에 투영시키고 생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하신다. 이렇게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생명은 모채를 통해 잉태하고 낳는 과정이 사랑으로 이어지며 생명의 잉태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근거가 되고 땅은 개체생명의 모체로서 생명의 산실의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들은 이 땅에서 상호교류하며 소통하며 평등하게 누릴 권한과 성장하는 기회를 4계절을 통해 똑같이 제공받는다. 이렇게 땅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하늘의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작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명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과학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과학에서 무생명으로 보았던 햇빛, 땅, 물, 공기 등도 본질적으로는 생명력을 보유한 생명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생명작용에 의하여 생명들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에 앞장서서 생태계의 위기를 보며 삶의 환경을 살리는 실천이 요구됨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실 때 그 안에는 질서가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경외(敬畏)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처음에는 선했으나 인간들이 그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타락과 그 죄과로 심판을 받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모든 생명 관계 안에 일하고 섬기며 책임지는 청지기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여야 하며 생명은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갖게 함을 알아야 한다.사랑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생명이 무생명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한 알의 씨가 죽어 많은 씨를 낳게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주심을 알게 한다. 생명 받은 우리가 생명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사랑만이 살아 있는 존재를 결합시켜 그 존재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킨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큰 힘을 가졌으며 우주 에너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모든 의식 체계에 부어 주신 이끌림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실재를 끌어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3-0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8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행복이다. 나의 어머니는 27년간을 하루같이 새벽 기도를 다니셨다. 내가 갓난아이 적에는 나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새벽 기도를 다니셨다. 나의 다리가 O자 형으로 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새벽 기도로 인하여 생긴 신체 변화이다. 어머니의 새벽 기도를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어머니를 성령이 인도하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보통 인간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자녀 사랑이 매우 진하셨다. 내가 첫 직장에 출근할 때부터 어머니는 대문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심근경색증으로 자주 쓰러지시는 것을 염려하여 승용차를 구입하였을 때 어머니는 남다른 내공을 발휘하셨다. 매일 새벽마다 아들 모르게 혼자서 아들의 차를 세차하셨던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추운 날 차창이 두텁게 얼음으로 덮여져 있어서였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영하 20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을 끓여 세차를 하셨는데 그게 금방 얼어버리는 바람에, 어머니는 물을 끓여 바께스로 아파트에서 차에까지 나르고 나르면서 차를 닦고 또 닦으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남다른 모성애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어머니의 사랑 흉내를 내려 한 적이 있어 소개한다. 시속 140킬로미터.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고속도로에서도 규정을 벗어난 속도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고속도로는 시속 100, 아니면 110킬로미터가 규정 속도입니다. 이걸 어기면 CC TV에 찍혀 벌금을 물게 되지요. 그러나 1980년대에는 CC TV가 널리 유포되어 있지 않던 때라 벌금 낼 확률이 높지 않긴 하였지만, 보편적으로 운전자들이 시속 110킬로미터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살아오면서 딱 한 번 교통 법규 규정 속도를 어긴 적이 있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 주말 부부였던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직장에서 원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한 번씩 만나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주말이면 아내가 집에 와서 아들을 보고 가거나, 아니면 내가 원주로 차를 몰고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기숙사로 다녀와야 했습니다. 원주로 내려가는 때면 그곳의 이름난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미나리에 얇게 썬 소고기를 싸서 구워먹는 고기말이나, 닭고기에 맛있는 양념을 입혀 구운 P치킨, 미꾸라지를 갈아 만든 추어탕 등은 지금도 침이 감돌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끔 아내의 근무지가 있는 Y시에서 탁구장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내에 비하여, 나는 운동 신경이 둔하였습니다. 게임도 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래도 남자라며 자신만만하였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큰 스코어 차로 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모처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며 해해거렸습니다. 그런 아내와 주말에만 만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보고 싶다. 나 오늘 밤 당신 보러 가야겠다.”“아니. 내일 모레면 집에서 볼텐데, 밤 늦게 뭣 하려고?”“으응. 아무튼 나, 지금 출발한다.”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더구나 추운 겨울이어서 곳곳에 빙판이 널려 있었습니다.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톨게이트에 들어설 때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날씨가 눈발까지 날릴 정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차를 돌리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기려는 눈을 몇 번이나 똑바로 뜨고 차를 몰았습니다. 계기판을 보니 차는 시속 140킬로미터를 달리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지. 문막 근처에서 긴 다리를 지날 때쯤에 도로 한복판에 희뿌연 것이 보였습니다. 빙판 같은데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러자 차가 미끄러지면서 난간 근처에서 겨우 멈춰섰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빙판길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수습하고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위병소에서 밤 늦게 당도한 이유를 대충 둘러대고 아내를 불러냈습니다. 아내는 계속 삼 일 후에 볼 건대 왜 왔냐고 투덜댑니다. 그 날 따라 대입 예비고사 전날이라 모텔엔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욕실도 없는 여인숙의 빈 방을 잡아 겨우 아내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9개월 후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참으로 예쁜 아기를 탄생시킨 것이지요. 그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예쁜 처녀가 되고, 전자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랑을 만나 미국에 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시속 140킬로미터를 달려간 사랑이 아름다운 가족 한 쌍을 이루어낸 것이지요. 그 딸이 성인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룬 걸 보면, 시속 140킬로미터 속도는 생애 딱 한 번 내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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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3-07
  • 목회는 쉬운 것이다·55
    계단은 규격이나 조각으로 사람의 유식함을 자랑하는 증상으로 명예와 욕심과 욕망에 눈망울에 붉어진 사람들의 종말은 100퍼센트가 패가망신으로 종족을 감추게 되었습니다.목사나 정치인이나 어떤 사람이든 ‘죽지 않는다’라는 뱀이 내어놓은 제안에서 멈출 수 없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하향길은 결국 사망이었습니다. 정상은 필연적으로 내리막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상에서의 걷잡을 수 없음의 추락입니다.오늘 현재 우리 곁에 일어나는 목사님들의 법적 투쟁과 비판 비난은 자기도 조절할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일들입니다.목사의 특징이 여기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대형행사, 축제로 박수갈채를 받는다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종말의 자살 행위였습니다.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단체가 예수쟁이들이고, 그 주인공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회장으로부터 수많은 상임 회장의 모자를 쓰고 죽음의 길로 치달아 오르고 있습니다.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네 계명입니다.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이 계명의 해석을 이방 종교 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고통과 불만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개체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무섭고 진절머리나는 섬뜩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체 즉, 함께 계신 분이요.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친밀감에서 살면 정말 은혜로 주신 기적과 같은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우리는 벗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창세기 1장 27~28절에서 창조주가 창조하신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분으로 그들과의 언약준수를 통해 지속적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우쳐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시려는 사슬이 아니고 주안에서의 삶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다른 신에 대하여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방적 개념인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창조주를 기복적 신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보이는 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객관적인 대상의 신이 아니라 우리 속에 와계신 무소 부재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섬기는 대상이 아니요. 우리가 바라는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복 그 자체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신이 아닙니다. 내 속에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 자유 함을 주시는 절대적인 분입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되신 분입니다.우상에 대하여우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신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은 창조주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 앞에서 경건해야 하고 제물을 들여야 하고, 섬겨야 하고, 절해야 하는 그런 대상으로서의 모양입니다.지금 우리 교회는 우상 속에서 매여있습니다. 예배라는 용어로부터 헌신, 헌금, 충성, 봉사, 찬양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찬양을 올려 드리는 하나님과의 객관적, 즉 개체개념인 불신양적입니다.교회건물도, 강대 상을 제단으로 촛불을 켜고 십자가를 달고 가운을 입고, 모든 예식과 의식이 이방 신을 받아들인 로마교회의 무너진 그 틀을 지금도 붙들고 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솟구치게 하는 신의 음성을 느끼게 하는 이미 훼파된 것을 반복하여 경건이라는 찬물을 끼얹는 것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사제단의 권위와 신통력을 강화하여 돈을 뜯어내고 인간적 갈채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사단의 욕망의 표현이 성공이라고 합니다.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서 신음하게 했습니다. 신전에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로 자유를 말살시켰습니다. 경건이란 이방 신이 만들어 놓은 귀신이 통하는 짙은 향 냄새가 동방교회처럼 되어 있기에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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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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