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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0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0. 종교개혁의 대부 루터의 출현 후스를 중심으로 보헤미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종교개혁의 여파는 독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던 프라하에서 있었던 두 가지 그림 사건, 예수와 교황의 모습을 대비한 그림 때문에 발생한 프라하 대학의 대소동 때문에 독일에서 유학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후스에게 성경을 배운 그들은 독일의 각처에서 가톨릭의 가르침과는 대조가 되는 참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니까, 루터가 나타나기 오래 전에 이미 독일에도 종교개혁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에 루터는 후스의 저서를 읽고, 이미 오래 전에 보헤미아의 한 개혁자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주장한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술회한바 있다. 루터의 출현과 개혁의 출발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업에 종하고 있었고, 성격이 강직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고 결단력이 있는 소신 있는 사람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그러한 성향을 물려받아서 늘 원칙에 충실하며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진실하면서도 강직하고 학문에 익숙한 특출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자신은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집에서 대학으로 가던 길에서 바로 옆에서 떨어진 벼락 때문에 큰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루터는 신부로서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성경을 깊이 있게 열심히 연구하였으며, “기도를 잘 하는 것은 공부의 반 이상을 한 것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영성이 충만하고 경건한 수도승이었다. 그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수록 현재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가톨릭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예배나 제도상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많은 모순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정식 신부로 임명된 후에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성경에 충실한 그의 강의(시편, 복음서, 편지서 등)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설교는 진리를 아주 명료하고 힘 있게 증거하였으므로 청중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교회에 대한 루터의 대실망과 면죄부 사건루터가 꿈에 그리던 거룩한 도성이자 가톨릭교의 본산지인 로마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루터는 그 여행과 로마 방문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교회에 대하여 대실망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부요함과 사치와 화려함에 놀랐고, 그들의 생활 속에 만연해 있는 죄악상에 전율하였다. 심지어는 주교의 입에서 나오는 야비한 농담과 불경스러운 언행, 그들의 방탕함과 주색에 빠져있는 생활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루터는 로마에서 감행되고 있는 온갖 죄악의 참상과 파렴치한 행동들을 목격한 다음, 로마가 지옥 위에 건설된 성(城) 같다고 술회하였다. 당시에 교황의 법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빌라도의 계단’이 있었는데, 누구든지 무릎으로 그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어느 날 루터가 경건한 마음으로 그 빌라도의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롬 1:17)는 말씀이 우레처럼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급히 일어나서 나온 다음, 고행으로 받는 구원을 가르치는 로마교회를 더 신뢰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특히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울분을 경험하면서 가톨릭교와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가 충성을 다하던 교회와 단절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면죄부 사건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책임을 맡은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비텐베르그 성에 도착하여 온갖 미신적인 언사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사면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미래의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의 죄까지고 용서받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면죄부 판매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루터는 죄 용서는 면죄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면죄부를 사지 말고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마침내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과 비성경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95개의 논제를 정리하여 비텐베르그 성 교회의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 이 때에 루터의 나이는 34세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교황청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이 95개항의 면죄부 반박문은 급속히 독일을 넘어서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종교개혁의 불이 지펴진 것이다. 교황청과 수도사들은 루터에 대하여 참람된 자라고 비난하면서 교만하고 건방진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드디어 선과 악 사이에 역사적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치열한 싸움터에서 루터에게는 동역자가 필요하였다. 이 때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함께 일하던 멜란히톤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판단력과 지식과 웅변술은 출중하였다. 순결하고 고상한 인품을 가진 그는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던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의 과감하고 용감한 성격과 조화를 이루어 종교개혁의 큰 역사를 이루는 일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보헤미야의 개혁자 후스에게 제롬을 보내주셨고 루터에게는 멜란히톤을 보내주셨다. 중세 종교암흑시대를 깨뜨리는 종교개혁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는 싸움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자와 ‘다르게’ 믿는 자 사이의 투쟁이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집안에서 싸웠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유대 민족들이 선지자를 핍박하였다.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바른 진리를 선포하셨을 때에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공격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기독교가 성경을 파묻어놓고 지극히 인위적인 종교로 둔갑을 시켜 성경과는 무관한 미신적인 로마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을 때, 성경의 진리를 들고 나온 빛의 자녀들을 어두움의 자식들이 극렬하게 박해하며 살해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매우 슬프고 모순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루터와 같은 진리의 투사들이 나타나서 참 빛을 드러내며 증거 할 때, 타락하고 배도한 교회의 오류에 대하여 공감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나서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권의 힘으로 개인과 도시를 파문시키면서 핍박을 하게 되면 함께 일하던 동역자들까지도 자취를 감추게 되어, 개혁자들은 사실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는 어떠한가? 개혁할 과제들이 없어서 잠잠한 것인가? 아니면, 개혁의 소리를 낼만한 루터와 같은 능력과 열정을 갖춘 인물들이 없는 것인가? 혹시 그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개혁자들이 나타나서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은 개혁의 소리를 외칠 때에, 어떤 희생과 손실을 무릅쓰고라도 함께 연합하고 힘을 모아서 동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교권의 힘이나 여론이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0-14
  • 92. 제99회 총회장 백남선(白南善) 목사
    전남 고흥 출신백남선(白南善 1947. 2. 5-) 목사는 전남 고흥군 과역면 효덕리에서 선친 백형만과 정선례 사이에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고흥은 서해안에 접한 섬 지방이어서 당시 8.15광복이 된지 오래지 않아 시국은 어수선했으나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쪽은 바다에 접해 있어 여러 종류의 해산물이 풍부하여 부모 슬하에서 여러 형제들과 함께 먹거리 걱정은 비교적 타지역보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 순탄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그가 태어난 효덕리는 바다와 가까워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언제 평화로운 세상이 돌아 올지 몰랐지만 그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호남지방은 선교사 공의회 시절(1893-1900)에 선교담당 구역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맡았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도서(섬) 지역이 많아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관을 무릎쓰고 육지에서는 말을 타고 섬 지방에는 배를 타고 수로(水路)를 개척해 들어가 열심으로 선교에 임하였다. 군산과 남원 김제에 이어 고흥 땅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기록상으로 고흥땅에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는 1907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 세워진 신흥리교회, 1908년에 같은면 신평리에 세워진 명천교회(오석주), 1915년 고흥군 포두면 진두리에 세워진 길두교회(유천석), 1917년 도양면 관리의 도양중앙교회(이형술), 1921년 같은면 당선리의 도화교회(지익풍), 이듬해(1922) 영암면 남열리 남열교회(보이열 선교사), 1924년 오양읍 봉암리 대봉교회(임찬호), 1925년 도덕면 가야리 가야교회(박병학), 1927년 포두면 송산리 송산교회(황하윤), 1930년 과역면 과역리 과열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남선 소년은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면소재지에 있는 과덕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며 지도자들을 통해 동화 이야기도 들으며 교역자들의 설교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재미있게 들으며 신앙을 키워 나갔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이르자 효덕국민학교와 여항중학교, 순성고등학교로 진학 중등교육을 탈없이 이수할 수 있어 해방 후 혼란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렇게 무난하게 마음놓고 기초실력을 다질 수 있었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다음으론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들을 도와 생업의 전선으로 몰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는 대학을 마치자 바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진학, 3년의 신학교육을 이수하고 1979년 2월 졸업하였다.졸업 후 광주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이듬해에 목사장립을 받았다. 1984년 지역사회 복음화란 큰 뜻을 품고 광주 화정3동 159번지에서 미문교회를 개척 오늘의 대교회로 성장시키는데 주역을 감당하고 있고, 그의 목회철학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칼빈주의의 5대 교리의 기초 위에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강조하며 실천강령으로 선교와 교육을 지향하며 교인들을 제자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광주 화정동에 미문교회 개척총회 규칙부장과 교육부장 등 두루 거쳐광주경찰청 발전위원 등 경찰선교에 정성 쏟아“한국기독교총연합회 탈퇴” 결의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노회와 총회, 나아가서는 대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임무도 마다하지 않고 힘 닿는대로 적극 참여 봉사하였다. 과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지나친 욕심을 억제하며 주어지고 맡겨지는 일에 대하여서는 노회 일이나 총회적인 봉사와 대사회적인 이웃 봉사에도 최선을 다 할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자질을 스스로 갈고 닦고자 1995년 5월엔 미국에 있는 휴스턴(Huston) 신학대학원 M.Div 과정을 마쳤고, 2011년 6월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Biblical)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D.Min)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2014년에 목회와 교정(敎政)에 이받이했다고 미국 개혁신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기도 했다. 총회적으로는 1992년에 총회 규칙부장으로, 2004년에 총회교육부장, 2012년엔 총회 서기로 선출되어 봉사했고, 2012년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로 봉사했고, 2014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게자씨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9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대외적 봉사로는 총회장을 역임한 이듬해 2015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회장, 2001년엔 호남협의회 회장과 2004년엔 광주서부경찰서 경목부장, 2010년엔 광주시 초교파 교단협의회 회장, 2010년 이후 현재까지 광주광역시 경찰청 발전위원으로 경찰선교에 힘을 쏟고 있다. 2017년 9월 현재 본교단 산하에 있는 <예장출판사> 대표이사로 문화사역에도 봉사하며 미문교회 성장과 부흥에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있다(백남선 목사 이력서 2017, 8. 30. p.1 참조).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9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 기구개혁 혁신위원회를 가동하기로 하다. ② 신앙과 직제일치협의회 운동에 대하여는 본교단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반대입장을 발표하다. ③ 각종 목적 주일을 <…날로 변경하여 사용하기로 하다. ④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탈퇴하기로 가결하다. ⑤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영세(領洗)를 인정하지 않기로 가결하다(제101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서현수 김창수 편, 예장총회 2017. p.42).끝으로 백남선 목사의 신앙과 신학 그의 목회관을 엿볼 수 있는 설교 한 편을 살펴보므로 백남선 목사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성경본문 구약성경 사무엘상 26장 1절부터 12절, 설교제목 ‘도우시는 하나님’이란 제하에 1.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도우시는가. 1) 주님과 함께 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6절에 다윗이 아히멜렉과 아비새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울의 진지로 가는데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큰 일 날 소리입니다. 삼천명 특공대를 데리고 다윗을 잡겠다고 하는데 그 소굴로 다윗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가서 죽으면 죽으리라 그런 각오 없었으면 다윗 따라 나서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다윗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아히멜렉은 영원히 성경에서 없어져 버렸지만 아비새는 계속 성경에 나옵니다. 다윗이 정권을 잡았을 때 이 아비새는 장군이 되고,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복되게 살았습니다. 2) 영적인 줄에 선 자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 사람들은 줄을 잘못 섰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떠나셨는데 십 사람들은 사울한테 붙어가지고 또 다윗을 고발합니다. 훗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십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도 영적으로 줄을 잘서야 합니다. 망하는 사울 왕에게 십 사람들이 붙듯시, 망하는 고라에게 유명한 250명이 붙듯이, 오늘 교회 안에도 마귀 짓 하는 데도 거기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어떻게 도우시는가. 3절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보고 들어옴을 알고 사울이 뒤따라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깨달음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뒤따라 오는 것을 몰랐다면 다윗은 죽습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사는 자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9장 39절에 보면 노아 때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였는데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다가 다 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실 때도 바로 그런다 하였습니다. 말세가 되면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시 편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깨닫는 게 참 중요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깨닫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가 중요하듯이 설교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시편 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세우신 목사님을 통해서 나에게 내 가정에 주신 말씀 한 말씀도 놓지지 않고 들어야 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배생활, 기도생활, 헌신생활, 봉사생활 더 잘해야지 하는 깨닫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설교는 장로교 후예들의 공동적인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모점적인 메세지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그의 슬하엔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백성철은 ㅁ고사가 되어 목포 사랑의교회에서, 둘째는 선교사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0-13
  • 한가위 감사의 갈무리 1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서 자연의 길이요 질서요 생명이 된다. 이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 하려면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여기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함도 알게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하기에 씨를 뿌리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씨를 뿌려 거두려면 반드시 때가 지나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지만 이는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뿌린 씨가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하며 모든 일에 이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도 알게 한다. 그러나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씨앗 에서 수확을 얻지 못해도 결국 뿌리는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농사의 법칙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이치도 알게 한다. 종자대로 심으면 종자대로 난다. 이것은 소가 돼지를 낳을 수 없듯이 결국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또한 심는 자는 반드시 그 종자를 다음 기회를 갖기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도 주의 하여 알게 한다. 이는 다음 수확을 위해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한다. 이렇게 세상만사의 이치가 '심는 대로 거둔다' 사실로 진리인 된다. 이는 반드시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종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알게 한다. "감사의 갈무리"는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무리하는 것이요 심는 것만큼 이루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갈무리하여야 함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감사로 하늘의 씨(복음)를 받는 하나님의 몸으로 사람의 인내로 잘 심는 자가 되어 하늘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직함으로 "감사의 갈무리"를 알게 한다. 때가 이르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갈무리'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잘 거두어 돌보는 것이다. 이는 창조질서 순응에 대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4계절, 우주 천체의 지속적인 운행은 창조질서의 순응에 대한 이치로 되어진다. 원래 창조질서에 순응 하는 관계를 알게 한다. 이 회복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교회들의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감사절에 연유하면서 자기민족의 역사전통과 문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접목하여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전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물에 대한 현혹됨이 아니고 이렇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늘 기억하게 하는 창조보전을 위한 감사인 것이다. 이렇게 창조질서를 지키고 생명의 감사를 아는 것은 우리나라의 한가위 명절이다. 그리하여 한가위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나누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스스로 의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한가위가 감사를 아는 명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한국의 한가위와 구약성서의 초막절은 너무나 공통점이 같다. 초막절은 유대 달력으로 티쉬리월로 7월15일 보름날인데 한국의 한가위도 음력으로 8월 15일이다. 달만 다르지 날짜는 보름으로 항상 같은 것이다. 달밤을 즐기는 행사도 서로 같다. 그리고 조상을 찾아 경배하며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다. 초막절에는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조국 땅에 있는 성전을 향해 누구나 순례를 하며 조국과 조상을 기억하는 전통도 같다. 유대인들의 쑤카와 한국의 한가위가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은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지배문화가 아니고 백성의 문화였다. 이 문화는 하늘과 땅, 신령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원초적인 신앙적인 풍습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는 우리에게 자연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묵상하고 사색하고 영적 직관과 기도와 체험으로 알아 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해준 자연에서 영감 받은 자들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성이 성서 전반에 자연 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0-13
  • 성육신한 예수교회-59
    증기기선이 발명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서 미 대륙으로 이동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서 인간이 그가 속해있던 집단이나 사회제도에 얽매여 있던 신분에서 벗어나서, 그 스스로가 수고하고 노력한대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 것이었다. 개인의 소중함이 기지개를 피기 시작하였고,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었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들을 갖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된 이동이, 개인의 자유를 얻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이렇게 지난날 산업물자를 이동시키고, 사람을 이동시키던 대형 기선들이 인간의 문명을 새롭게 일으키게 되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오천 명이나 팔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루즈 선을 타고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문화를 탐방하고 즐기는 여행객들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여행객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한 주간 혹은 두 주간 여행을 즐기려면 뱃멀미를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이 문제가 사업자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맨 처음 발명된 기술은, 배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자이로(gyro) 장치이다. 이러한 장치는 오늘에 와서는 항공기에도 응용되고 있고, 지진 설계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이로 장치를 배 아랫부분 양 쪽에 설치하는 데에 드는 시설비용이나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력에 부담이 되었다. 거대한 기선의 무게에도 부담이 되었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신기술이 생긴 것이다. 배 아래쪽에 비행선과 같은 양 날개를 달았더니, 대형 선박이 파도와 진동을 이겨내는 데에 효율적이었다. 이로 인해서 선박 운영자나 이용객들은 경제적이고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에게는,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커다란 위험이 항상 기다리고 있고, 다양하고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힘쓰고, 끊임이 없는 연구와 새로운 기술들을 익힘으로서, 자신들의 고객인 여행객들에게는 편안함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서는 즐거움과 행복을 서비스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험악한 환경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란, 무엇보다도 항시 사회적 안전을 가져오게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기술과 장치일 것이다.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주 작은 위험에서 조차도 세월호처럼 전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지난 세월호의 전복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이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사회적 구성원의 도덕 지수와 감정 지수도 지능 지수만큼 높아져 있어야만, 보다 안전한 항해가 이뤄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항시 불안의 상태가 가중되게 되면 기존 질서는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질서가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이에게 사회적으로 권위를 보다 많이 부여 받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법조계이다. 이 집단에 부여된 권위만큼 더 큰 권위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부여된 권위만큼 법조계 집단의 통합적 지성도 탁월하다면, 시민들에게 전반적으로 신뢰와 안전을 구축하는 커다란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울을 잡고 있는 집단이 도덕성이나 감정지수가 시민들 보다 낮다면 그 사회의 질서는 세월호 만큼이나 신속하게 전복되어질 것이리라.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는 넓은 길로 가질 말고, 좁은 길로 가라’하신다. 이는 우리게 항상 새로운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리라. 어느 위인이 잠시 세속을 떠나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가 지금까지 길들여진 잣대로 생각되던 고정 관념이 무참하게 붕괴된 것이었다. 천국에 있어야 할 분들이 지옥에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는데, 그는 남이 보질 못하는 새로운 저울과 지식을 갖게 된 것이었다.왜 아브라함은, ‘네가 사는 곳, 아비와 친척과 논밭을 버리고, 그 도시에서 떠나, 야훼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을까?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고 멀리 나가게 되었는데, 이를 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고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하시는 말씀은 곧,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라는 뜻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어서 한쪽으로만 공이 구르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는 교육환경과 제도, 원수 갚는 일에만 집착된 세속에 익숙 되어 가기 때문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0-13
  • 박현제 장로
    미래포럼에 출근하면서 단체 고문직과 회의 참석으로 분주한 시간 가져 박현제 장로(79세, 기감 룻교회)는 아침 일찍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하여 서울 신설동 한국미래포럼을 출근하면서 하루의 일정을 시작한다. 박 장로의 경력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여러 단체의 고문직을 맡고 있어 항상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일 것이라고 말한다. 내외환경신문 상임고문, 한국경찰신문 상임고문, 사)대한청소년전통호국무술연맹 상임고문 등을 맡아 자문과 지도를 하고 있다.교계에서도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부회장, 사)세계한인기독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맡아 연합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 정치권에도 중앙당 위원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 환경 조직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어 여러 지인들은 박 장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팔방으로 종횡무진(縱橫無盡)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는 매우 활달한 성격의 인물이다.박 장로는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62년 철도청 제1기 공채로 입사하여 19년 간 근무하고 퇴사하기까지 여객전무와 역장 등 중요 직책을 맡아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너무나 당당한 전성기였기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부러워했고 재정적인 여유도 있었다고 한다. 81년 퇴직하여 보다 큰 꿈을 가지고 타이어 수출 사업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박 장로는 직장생활에 쫓기다 보니 퇴사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이거해 온 후 늦은 나이에 2000년에 룻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교계와 정치권에서 새로운 직책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교단에서는 장로회 지방회회장, 중앙회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연을 널리 익혀 나갔다. “저는 늦게 장로가 됐지만 항상 믿음으로 살기위해 노력했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일에 편안하게 대처하고 처신하게 됐습니다.”박 장로는 김영삼 정권 시절 부산 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으로 극복해 왔습니다.”라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지금도 서울 여의도에 있는 모 정당에 출입하면서 중앙당의 어느 분야에서 정치일선의 조직과 정책을 도우고 있다. “저는 정치권에 출입은 많이 하고 있으나 지금은 일선에 앞장서고 있지는 않고 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지요.”라며 새로운 정치개편을 염두에 두고 정치안정을 바란다고도 했다.박 장로는 대한민국 정치의 최선의 길은 “안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안보가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하고, 안보가 정당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정치권에 관심이 많은 만큼 많은 전 현직 정치인들과의 교분도 많다고 한다.박 장로는 한국교회연합운동에 대해서도 “저는 요즘에 보면 전도하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전도하는 교회와 단체는 분쟁이나 잡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 모두는 기도하면서 자신이 전도자로 나서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 평신도 운동에 대해서도 “최근 평신도들이 갈급함이 없어요. 사회적인 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실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가 너무나 절실합니다.”박 장로가 존경하는 지도자는 감리교단의 전용재 감독과 박경진 장로라면서 “전 감독은 항상 혁신적으로 일하는 지도자이며, 박 장로는 물질을 가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인물”이라고 했다.박 장로는 문광자 권사(77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과 장녀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다면서 늘상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가정을 위해서 가훈처럼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나가길’ 원한다고 말한다.박 장로가 좋아하며 암송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43장 19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고,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이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0-13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5
    가끔 새벽 하늘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 남빛이었다가 포도주빛으로 변하면서 해가 뜰 즈음해서는 옅은 하늘빛을 띠는 과정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지요. 그 하늘 아래 있는 정경도 어둠을 말갛게 씻어낸 듯이 아름답지요. 그럴 땐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에게도 삶의 새벽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다섯 살 때인 1960년대에 전주에서 Y초등학교 교감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앞의 관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옆집의 교장 관사와는 돌담을 사이에 두고 쪽문이 나 있어서 교장 선생 사모님인 장여사가 가끔 놀러오곤 하였습니다. “아이고. 사십대 중반에 웬 막내다요. 부부 금슬이 좋으신가 봐.”그러면 어머니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서름여덟에 난 막내지요.“ 하며 웃으시곤 하였다. “얘. 막내야. 춤 좀 춰 봐라. 옛다 춤값이다.”그러면서 백 원짜리 지폐를 앞치마에서 꺼내면 어머니는 ‘애 버릇 없어진다’며 극구 사양을 하였고, 서로 주고 떨치고 하다가 결국 오십원 짜리 지폐로 낙착을 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의 「백조의 호수」가 들어 있는 레코드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레코드플레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와 장여사 앞에서 새처럼 날아오르고 나비처럼 내려앉는 동작을 하며 춤을 추곤 하였습니다. “야 잘 춘다. 멋진 구경 하고 가네요. 쟤는 발레리노 시켜도 되겠다.”고 잔뜩 칭찬을 하고 가곤 하였습니다. 며칠 후에는 점심 때쯤 되어 학교 여선생들이 십여 명 우리집으로 몰려왔습니다.“갑자기 웬일이라요?”“아드님이 아주 무용을 잘 한다면서요. 그래서 구경 왔어요.”“아이고 집이 지저분헌디 워쩐대.”“괜찮아요. 아드님 무용만 잠간 보고 들어가려고요.”“아이고. 얘는 정식으로 무용을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전축을 틀어 놓으면 저 혼자 춤을 추는디.”“예. 그것 좀 보려고요.”그리하여 어린 나는 여선생들 앞에서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엄마 품에 달려들어 그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어머니는 “얘. 착하지. 니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한 번 해 봐.” 그래서 한참을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겨우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새처람 날아오르고, 나비처럼 내려앉으며 팔을 흔들고를 반복하며. 그러자 무용을 전공하였다는 여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아드님은 정말 무용에 재주가 있습니다. 무용학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저토록 기발한 안무를 하는 것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발레리노를 시켜도 될 것 같습니다.”“아이고,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디.”이런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는 만나는 지인들마다 “야는 무용에 천부적 소질이 있대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였습니다. 나의 춤사위가 있고 난 일 년 뒤, 장여사의 부군은 K군의 교육장으로 발령나고, 아버지 역시 K군 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나, 부모님과 나는 식구들과 떨어져 초등학교 뒤에 있는 관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간 며칠 후 눈발이 진하게 흩날리던 날 어머니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읍내에 있는 교육장 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일본식 집이어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과 넓은 툇마루가 있는 거실이 있었고, 방은 다다미 방이었습니다. 다다미방 위에서 장여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면서 곶감을 한 접시 꺼내왔습니다.“야가, 그 춤 잘 추던 막내둥이 아니여?”“야. 너 인사 잘 드려야지.” 하면서 어머니는 손으로 내 뒷덜미를 누르며 더 정중히 인사하게 하였습니다. “아, 괜찮혀. 아직 어린앤디, 뭘.”그러면서 두 사람은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한참동안 늘어놓는 사이에, 나는 접시 위에 있는 다섯 개의 곶감을 다 먹고 한 개를 남겨두었습니다.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던 장여사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곶감을 한 개만 남겨놨다냐. 이거 마저 먹어라이.”그래도 나는 “아니예요.”하면서 끝내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장여사는 “야가 다과를 내어 놓으면 어른들이 조금 남겨 놓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러는 거구먼.”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껏 웃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집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야가 어른들이 음식을 앞에 놓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언제 배웠다냐?”면서 몇 번이나 살포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내 앞으로 눈발이 더 많이 휘날렸지만, 날은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0-13
  • 목회는 쉬운 것이다·42
    먼저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을 말한 YWAM(국제예수전도단)에서 온 열 방에 이르는 것은 즉 예수님처럼 승리인 포기라고 했습니다. “나의 권리를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입니다”맨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나타나신 하나님은 8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지난 이후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우리 백석대학교의 시초에 첫 개회예배 때 주신 본문이 출애굽기 3장 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설립자님의 기본 사상의 기초가 되신 것입니다. 언제나 맨발이라는 생각입니다.진리는 맨발입니다. 나의 편리를 위한 덧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맨발로 가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맨 발은 거추장스러운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70인 전도 때에도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전쟁에 패배한 뒤 예루살렘을 떠날 때 맨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보리를 향해 가실 때에도 맨발로 걸어가셨습니다. 당시 풍습에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노예라는 표시였습니다.모세에게 많은 노예들이 있었던 바로 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노예에겐 어떤 권리도 없고 신발도 신지 못했던 것을 보아왔습니다.내 백성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는 내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주인 되신 분이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민족애의 분노는 그의 맨발을 예고하신 것 같습니다.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내 일을 하고 있음은 무서운 위선입니다. 이 세상 삶 속에서 공익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절대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이 곧 청문회입니다.청문회는 곧 네 자신이 공익을 위한 일을 시작하기 전 내배만 채운 사람은 절대로 공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목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변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적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함은 분명히 온전해질 수 없는 첫 단추의 실수입니다.빌 립보서 2장 6절부터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이 행하신 매우 자연스러우신 삶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셨는데 우리의 구속 하심에 대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예수님이 보이신 것을 우리는 노예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셨던 모든 일은 인성을 가지셨던 삶으로 우리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함께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비하하신 인간성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순수하고 쉽고 단순한 일입니다. 그것이 노예적 삶의 자유함입니다.목회는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권리라도 용납되지 않는 노예로서의 자유함입니다.예수님이 포기하셨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하늘나라를 떠나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정상적인 환경에서 출생할 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습니다.◦사생아로 멸시받았습니다.◦육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을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중요성은 강조하셨습니다.◦공생애를 위해 홀어머니를 떠났습니다.◦결혼의 권리도 포기하셨습니다.◦사람으로서의 최소한 머리 둘 곳을 포기하셨습니다.◦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종교지도자들로부터 최대의 모욕에도 명예를 포기하셨습니다.◦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남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0-1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9-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19. 경건한 개혁자 후스와 동역자 제롬 서기 9세기 경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서부와 중부)에 개혁적 복음이 들어갔다. 그리고 보헤미야에서는 비교적 선교가 순조롭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보헤미아에도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보헤미아어로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Wyile, b. 3, ch.1)는 것이 교서의 골자이다. 이 내용은 당시 교황권의 권세와 횡포를 대변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적 권력으로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가톨릭교의 전횡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상식적, 비과학적, 비인간적이었다. 이러한 시대가 거의 일천년 이상 계속되었으니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와 이에 따른 그 폐해(弊害)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스의 출현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거주하던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이 종교적 박해를 견디다 못해 좀 더 자유로운 곳을 찾아서 보헤미아로 이주하여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개혁적 가르침과 분위기가 이미 보헤미아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비행과 백성들의 타락상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활동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을 격렬하게 핍박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숲속과 산속으로 피신하여 예배를 드렸다. 군사들은 그곳에까지 추격하여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1372(?)년, 남 보헤미아의 후시네쯔라는 시골 마을에 얀 후스(John Huss)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좀 더 큰 도시(프라하)로 이주하여 프라하대학에 입학시켰다. 후스는 학업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이 깨끗하고 성품은 온유하면서도 쾌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고 좋아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교회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된 후스는 그의 뛰어난 실력과 고매한 인품 때문에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 승정이 되었고, 모교의 교수를 거쳐서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성직을 시작한 지 수년 후에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어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혁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후스의 개혁사업후스에게 개혁의 불을 붙였던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영국에서 어떤 학식 있는 설교자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두 사람이 프라하에 왔다. 그들은 교황을 정면으로 대적하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는 두 장의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무언의 설교를 시작하였다. 하나는,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있는 예수님을 초라한 복장을 한 제자들이 따라가고 있는 그림이고, 또 한 그림은 교황이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요란스럽게 장식한 말을 타고, 앞에는 나팔수들이 뒤에는 역시 사치스러운 복장을 한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았고, 그 그림의 영향력은 프라하의 주민들에게 신속히 퍼져나가서 그야말로 프라하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후스도 이 그림에 큰 감동과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민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교회에 충성하는 신부이기는 하였으나, 가톨릭교의 비성서적인 교리나 가르침과 의식들에게 대하여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정직한 양심을 가졌던 후스는 교회의 그러한 비리들과 오류들, 그리고 부패한 타락상들을 지적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로마 가톨릭교에 저항하고 교황을 대적하는 개혁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후스는 가톨릭교의 이교적인 의식들과 미신적인 교리들과 성직자와 신도들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하여 과감하게 개혁을 주장하였다. 교마교 지도자들의 오만하고 부패한 생활에 비하여 후스의 삶은 매우 순결하고 경건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후스의 편에 가담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후스의 동역자 제롬과 두 사람의 최후후스의 이러한 개혁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위클리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제롬이 보헤미아로 와서 후스와 합류하게 되었다. 제롬은 매우 대중적인 인물이었고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언변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역동적인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오류와 비리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진리의 빛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진리의 빛을 드러내 주셨고 그들을 개혁의 길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권세과 교권이 이들의 활동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후스는 당시 교황 요한 23세가 이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집한 콘스탄스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후스는 그 회의석상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확고부동한 입장을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참석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교권의 부패를 거침없이 규탄하였다. 마침내, 후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성서적 교리를 취소하든지 화형을 당하든지 선택해야 할 마지막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주저 없이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화형대의 불을 지피기 직전 다시 한 번 후스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권고를 받았다. 후스는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고 외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후스의 뒤를 이어 개혁 사업을 하던 제롬도 역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약 1년을 감옥에서 지나는 동안 제롬은 몸이 쇠약해지고 마음도 함께 약해져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제롬은 후스의 뒤를 이어 순교하기로 작정을 하고, 주교들에게 지난 번에 했던 말을 취소한 다음 그들의 비행과 만행을 지적하면서, “나는 다만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내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보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외쳤다. 화형장으로 끌려 간 제롬은 사형집행자가 자기 뒤에서 불을 붙이려고 하자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화형장의 잿가루로 사라졌다. 많은 개혁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순교를 당하였으나 그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보여준 그들의 영광스러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숨은 빼앗아 갔으나 그들이 밝혀놓은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은 채 후세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0-11
  • 91. 제72회 총회장 김길현(金吉鉉) 목사
    전남 무안 출신김길현(金吉鉉 1926.1.19~2008.2.6) 목사는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는 조선이 일제 식민지였다. 무안은 동으로 영산강이 접해 나주와 영광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신안군의 여러 섬과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목포시, 북쪽으로는 함평에 접해있다. 무안군은 높이 400m 이상의 산지는 없고 야트막한 산과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형성된 전형적인 농지로 이루어져 있고 한반도 남서쪽 해안을 끼고 있어서인지 온화한 해양성 기후여서인지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김길현 소년 역시 이와같은 자연환경에서 성장해서인지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따뜻한 심성이다. 그가 태어난 조선의 정치와 경제적인 현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불안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인근 나주와 함평 목포와 군산에 미국남장로교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이들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무안에도 이르러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소년 길현도 비록 시골 벽지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진리를 깨닫게 되자 좀더 배워야겠다는 자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교회에서나마 사경회 등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수를 깨닫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찌기 서당에 다니는 친구들 어깨너머로 듣고 배운 한학의 초보적인 실력은 갖추고 있었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교회 지도자들이 길현 소년에게 성경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는 전남노회에서 직영하고 있는 성경학교에 입학해 신·구약 성경공부에 전념하게 되었고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며 전도자의 사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신대원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사이 조국은 8.15 광복을 거치고 1950년 6.26 전란을 겪기도 했지만, 김길현은 용케도 살아 남았고 신학교를 마치고 강도사를 거쳐 전남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게되었다. 그때가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이듬해 1954년 5월 8일이었다. 성경학교 졸업 후 장로회신학교 입학광주 백운동에 ‘대성교회’ 설립광주 숭일학교 이사장·총회신학교 이사 역임지도자의 언행일치 강조겉모습은 시골 노인 같았으나 말씀엔 위엄 있어그 사이 몇 교회에서 전도사를 거쳐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1965년 6월 31일 고향이나 다를바 없는 광주시 서구 백운동 380-1번지(이성섭 장로 자택)에서 교우 30여명과 함께 첫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광주 대성교회가 출발하였다. 개척 멤버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물질적인 헌신과 협력으로 드디어 1967년 5월 13일 50평의 신축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1968년 4월 15일 전남노회로부터 교회이름을 ‘대성교회’로 허락받기에 이른다. 교회는 김목사와 온 성도들의 열심있는 충성으로 1978년 1월 17일 광주시 서구 백운1동 380-1번지 현 위치에 연건평 350평의 아담한 새 건물을 마련해 1,600여 교인들이 회집하는 중형교회로 성장하였다.아울러 해외선교에도 눈을 돌려 1969년부터 구 소련방이었던 러시아에 메시야신학교(Messiah Seminary)를 설립하였으며(이사장 김길현 목사), 중국에도 선교사를 파송 선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도 미자립교회 및 개척교회 17처를 지원하고 있다.김길현 목사는 대외적인 활동과 봉사에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그가 속해있는 전남노회 노회장을 비롯 지역에 있는 광주 숭일학교 이사장으로, 총신대학교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총회인준신학교인 광주신학교 교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1986년 9월)을 역임하였으며, 드디어 1987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신림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2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선출됨으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목회경력과 원만한 성품으로 교단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인정받아 총회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 교단의 위상을 높였다.그가 재임했던 제72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인준 지방신학교 신학부 3년제를 1988학년도부터 4년제로 학제를 개편하기로 하다. ② 경기도 과천지역은 중·경기노회로 편입하기로 하다. ③ 노회 분립(중부산, 남부산, 동부산)을 허락하다. ④ 전도목사도 임시목사에 준하여 노회임원이 될 수 있다. ⑤ 라틴 아메리카 장로교신학대학과 브라질선교회 설립건은 인준하기로 하다.(제100회총회 회의결의 및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 2016 p.29 참조).광주 대성교회의 1995년말 현재의 교세는 교인 총수 3,200명(학생 670명, 장년 1,530)으로 성장하고 있다. 대성교회는 광주지역 복음화를 뛰어넘어 세계를 품고 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교단의 자랑스러운 교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말기에 이르러 교회분쟁에 휘말려 그는 새로 갈라나간 광주하영교회에서 목회를 마감하였다. 그가 재임했던 72회기였던 교단 기관지인 기독신보(1987. 10. 3 토 p.1)에 실린 총회장 취임사를 보면 교단장으로서 총회와 산하교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때로는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신신학 문제로 신앙적인 아품이 컸고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W.C.C 여파로 말미암아 분열의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앙과 신학이 같은 우리끼리도 인맥과 지방색으로 인한 반목때문에 사분오열의 쓰라림을 맛 보았습니다. 이때마다 건전한 신학과 훌륭한 신앙을 지닌 선배님들의 투쟁의 공로는 오늘까지 총회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음을 퍽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부족한 저도 선배들이 지키고 쌓아온 신앙과 신학과 전통에 추호의 흐트림이 없이 일사각오로 전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임기중에 행정의 지표로 삼을 3가지는 국내외의 선교사업이 박차를 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총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지상명령인 전도가 중심이 되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총회산하 전교회와 주의 종들이 하나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총회의 재정, 사업 현황을 기독신보에 조금도 의문이 없게 하겠습니다. 셋째로 헤어진 형제들을 영입하여 하나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믿고 참여하여 돕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새롭게 하겠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목회철학과 교단 운영의 원리 원칙을 피력한 설교 한편이 있는데 그 설교는 성경본문을 마 9:35~38절을 가지고 본교단 지도자 양성기관인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식에서 미래의 일꾼들을 향한 메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서론에서 어떤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보화가 아니라 인물이라고 전제하고서 신학을 마치고 주님의 명에 따라 목회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미래의 지도자들을 향해 다섯 가지의 명제를 제시하며 설교로 천명하였다. 어떤 지도자가 되기 전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갈파하였다. 여기에 그의 메세지를 요약하면, 첫째 언행일치의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의지가 굳어야 합니다. 셋째, 실패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한 가지 이념에 전념할 것입니다. 다섯째, 작은 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작은 일에 성공하는 자라야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마태 25장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보여주는 광경이 나옵니다. 우편에 있는 저들에게 내가 주릴때 먹여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며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작은 일에 관심가지고 충성하며 섬기는 인물이 좋은 인물이요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임을 깨닫을 것을 호소하였다(기독신보 1988년 2월 20일 토 p.4참조). 김길현 목사가 총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설교한 것이지만 그의 목회철학과 섬김의 도를 피력한 메시지라 생각된다. 그의 겉모습은 시골 노인같았지만 그가 말씀을 증거할 때는 위엄과 사랑이 깃들어온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병석에서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2008년 2월 6일 82세를 누리고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예장총회는 그의 장례식을 총회의 예를 다해 총회장(葬)으로 모셨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9-29
  • 감사는 이유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자연 과학자들이 ‘창발적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 신앙으로 보면 하나님의 ‘내재성’의 입장을 알게 하여 ‘내재적 초월’을 자연으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 흔히 가을을 단풍계절의 풍경만을 보는 관광객도 있지만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의미도 있다. 가을은 살아 익은 열매를 보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를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가면서 이러한 가치로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되어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도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로 변신해 가고 있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보다는 공부 잘하는 지식기능사를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한다. 이러한 기업은 기능적 인간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출세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방법도 개의(介意)치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인 자본주의 사회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정당화로 인식하고 살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부(富)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되고 말았다. 이 돈벌이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 등을 적극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본래의 경제이념을 상실하고 자유경쟁을 유도하여 삭막한 삶으로 생활을 이끄는 현상이 되고 만다. 사실로 본래의 경제관 이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으로 이를 성사 시키는 것으로 경제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감사’라는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에 비롯된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음”을 알게 한다. 감사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을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그리고 생명의 아버지이심의 그 까닭을 아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그럼으로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후천적으로 가진 반사작용과 같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그런 조건반사가 아니라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그것 이치를 알게 한다. 이는 곧 ’은혜’라는 그 깊은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즉 회개할 때 모든 죄를 덮으시는 죄 사함의 은혜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은혜이다. 여기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태도로 사랑의 교제 속에서 범사에 대한 믿음의 인사(人事)가 있다. 인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할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사는 사람끼리 관계를 갖는 생활에서 기본적인 인사가 된다. 이런 일을 감안하여 보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가 없는 무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우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인간, 자연과의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인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고 인간 사이의 관계가 상실이 되면 자연을 황폐케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땅이 인간에게 엉겅퀴와 들풀들로 서로 엉키듯이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저주받는 노동이 되게 하고 반면에 인간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보전하며 인간의 신뢰도가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면 여기에 땅에서 강물이 흐르고 온갖 들판에서 과실이 맺는다는 것으로 창조의 증언으로 실증이 되어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맥추절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은 땅이 자연적으로 소출을 낸 것에 대한 감사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징표로 믿었던 그 믿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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